그게 무엇이든 시작이 중요하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나는 시작에 있다. 무슨 밀이냐 하면 뭔가 쓰려고 하는데 쓰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냥 이렇게 시작이라도 하는 것이다. 텅 빈 화면을 바라보면서 다른 창을 열었다가 인터넷 급상승 검색어를 클릭하고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인데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 것일까.

매년 정월대보름에는 더위를 팔았다. 유독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가족들에게 마구 더위를 넘겼다. 그런데 올해는 잡곡밥이나 땅콩, 밤 같은 부럼도 없는 그런 날로 지나갔다. 주말 밤 식탁에 놓인 땅콩을 보고 정월대보름이구나 싶었다. 하늘을 보고 커다랗게 둥근 달을 찾는 일도 잊었다. 사소한 일상을 놓쳤다고 할까. 놓쳐도 서운할 일이 아닌데 올해는 그냥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이런 작은 일상의 여유조차 사라진다. 당연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메르스 사태를 떠올리면 공포에 휩싸였던 그 여름이 재생된다. 폐 질환을 앓던 큰언니가 병원 일정을 뒤로 미뤘던 기억도 소환된다. 그 여름이 지나고 5년 뒤 이 겨울은 다시 하나의 두려움으로 남을 것이다.

주일에는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다. 같은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의 사고였다.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어르신들이 다치셨다. 모두 입원하셨고 치료 중이다. 모두 다 건강하게 회복하시고 퇴원하시길 바란다. 어제는 놀랍고도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 ​언론과 방송 모두 봉준호 감독의 수상에 대해 전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난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은 일어나는 것이다.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발생하면 항상 생각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할 수 일을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생각의 끝에서 만나는 나의 자리다.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싶은 거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욱 속상한 마음이다. 가장 잘 알면서도 열심을 내지 않는 것.

언제나 그렇듯 마음은 다시 책으로 향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읽을 거라는 마음, 그리고 지금 읽는 중이라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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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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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이야기이자 모두에게 말하고 싶은 그것이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시작하면 끝을 맺을 수 있을까. 누가 하찮은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줄까 고민하고 고민한다. 누군가는 그런 상대가 단 한 사람이라도 존재한다면 쓸 수 있다고 말한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도 주저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글을 쓰려고 하는가. 내 안에 갇힌 이야기는 진짜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장혜령의 『진주』도 그런 마음이 쌓여서 시작된 건 아닐까.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한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하면서 느꼈을 상처와 슬픔, ‘훌륭한 아버지’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진정 무엇인지 설명하지 하지 않았던 선생님과 어른들. 그리고 묵묵히 삶을 견디며 딸을 키우는 어머니. 이제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진짜 삶이었던 어린 소녀가 자라 들려주는 나직한 목소리로 가만히 들려주는 소설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소설을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 소설의 형식이나 구성 때문이 아니었다. 화자인 ‘나’ 와 다른 시대와 다른 공간에 거주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분명 다른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고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나의 주변에도 분명 존재했을 수많은 어린 ‘나’와 그의 가족들의 존재를 나는 모르고 있었다. 알았더라도 소설 속 아이들처럼 ‘너는 왜 아빠가 없냐’고 묻는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여전히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세상과 불화하는 이들이 여전한 지금도 다르지 않기에 더욱 그랬다. 부재로 존재하는 아버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나’에게 가능했을까. 소설에 등장하는 화자의 일기, 그러니까 작가 장혜령의 일기에는 아빠에 대한 걱정과 동시에 어린 소녀가 느꼈을 불안이 고스란히 담겼다. 잠들 때 엄마 손을 꼭 잡고 자자고 말하는 ‘나’의 간절함이 전해진다. 그러나 대답은 그러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생계를 위해 너무도 할 일이 많은 엄마는 아침이면 깨끗한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이미 일을 하고 있다.

 

‘나’의 기억으로 시작했을 이야기. 기억은 얼마나 정확한가. 그 많은 일기들과 그림, 사진을 간직했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아이스크림을 사 오라며 돈을 건넨 사복 경찰과의 만남, 가게를 나오는 소녀의 등 뒤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동네 아줌마들,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의 가족들과 지냈던 안산에서의 기억, 아버지가 부재한 이들이 함께 명절을 지내며 서로를 위로하던 날들, 언제부터 소녀는 나만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던 것일까.

80년대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아버지. 집이 아닌 거리에 있었고 경찰을 피해 다니고 결국엔 감옥에서 지냈던 아버지. 시간이 흘러 아버지는 돌아왔고 아버지가 감옥에서 삶을 견디는 동안 아버지의 동료들 가운데 우리가 알만한 누군가는 교수가 되고 정치인이 되고 사업가로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간다. 마치 과거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버지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었을까. 그 기준은 누가 세우는가. 돌아온 아버지도 생의 현장에 적응하려 노력한다. 대학 졸업장 대신 전과자가 된 아버지는 남들처럼 회사에 다닐 수 없다. 친구나 지인의 소개로 들어간 회사에서도 여전히 주변을 돌아보고 뒤를 돌아본다. 부당한 대우, 체불된 임금, 열악한 노동환경. 그것들을 묵과할 수가 없다. 다시 그렇게 아버지는 방 안으로 돌아와 식물처럼 조용히 지낸다. 그러나 딸에게는 자전거를 가르치며 돌아보지 말라고 공집합을 이해하지 못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어쩌면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어둡고 무서운 곳인데 자전거 타는 작은 일부터 두려워한다면 살아갈 수 없다고(12쪽)’ , ‘돌아보지 말아라.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나아갈 때는, 자신이 나아갈 방향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라고(100쪽)’ 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딸은 짐작할 뿐이다.

아버지가 앞으로 나가는 대신 돌아본 세상엔 보통의 우리가 있었다. 기간제, 계약직, 임시직의 우리들 말이다. 시대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여전하게 지속되는 고단한 삶. 소설 속 아버지는 여전히 거리에서 투쟁하고 단식하고 언론에 등장한다. 과거의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장 자기가 사는 시대가 바뀌지 않더라도 지금의 어린이들이 어른이 된 미래에는, 자신들이 꿈꾸던 세계가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178쪽)’ 모두에게 괜찮은 세상, 악의보다는 선의가 가득한 세상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소설은 ‘나’처럼 아버지의 부재가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된 어린아이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역사 속 저편에 기록으로 남은 민주화운동과 노동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고 살아내는 이들에게 『진주』는 소설이 아닌 그들의 기록이자 일상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부끄럽고 불편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가 더듬어가는 기억 속 반려견과 보내는 잔잔한 일상과 진주의 풍경에서 어떤 평안과 평화를 느낀다. 참으로 이상한 감정이다. 아버지가 옥살이를 하던 도시 ‘진주’를 가기 위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멀미를 했던 열 살의 ‘나’는 아버지와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서른둘의 나이에 다시 그 진주를 찾는다. 엄마와 함께 짧은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먹었던 국수, 진주의 볼거리와 먹거리를 소개하는 이들의 말투와 표정, 일요일에는 면회를 하지 않는다는 것, 아득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모든 것은 이야기가 될 수 있고 때로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힘으로 응집된다. 장혜령의 『진주』는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당사자인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남편을 믿고 기다리고 지원하는 아내와 그의 딸이 살아낸 시간의 기록이라 더욱 남다르게 다가온다. 누구도 대신 채울 수 없던 아버지의 자리, 부재로 자신을 증명하던 아버지를 세상에 공개한 것이다. 그렇게 작가 장혜령이 혼자만 간직했던 이야기의 타래가 술술 풀려서 나에게 닿는 순간의 감정을 나는 오래 기억하고 싶다. 소설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흘러가는지 지켜볼 것이다. 구르고 굴러 커진 소설의 힘이 닿는 그곳이 어디인지도 말이다. 이제 『진주』를 만나는 모든 이들은 스스로가 하나의 운동장이 될 것이며 그곳에서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 자전거를 타면서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마음을 응원할 것이다. 그가 뒤돌아보면 손을 흔들고, 넘어지면 달려가 일으켜주고. 마침내 그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즐거움과 소소한 풍경이 주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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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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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경험에 의한 이야기가 아닐까 궁금할 때가 있다. 소설이라는 것이 허구의 세계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 현실처럼 너무 완벽할 때, 경험치가 없다면 알 수 없는 구체적인 장면을 마주할 때 그런 생각을 한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정 부분 작가나 지인의 경험이 소설에 녹아들었을 것이다. 소설이란 게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낯선 세계를 그리는 건 아니니까. 요즘엔 SF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종종 받는다. 그래서 소설과 현실을 구분하는 일이 무의미할 정도다.

 

한 권의 소설을 읽는 일은 그저 재밌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소설을 읽는 일은 세상을 읽는 일이 되었고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되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사유가 그곳에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독자는 소설을 통해 세상과 접속하고 소통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를 생각할 때 고 박완서 작가는 소설은 그런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나는 작가의 소설을 전부 읽지는 못했다. 겨우 몇 권 읽었고 곁에 두었다. 나는 알 수 없는 시대의 풍경과 그것을 살아내는 이들의 마음을 소설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만나지 못한 글들을『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로 만난다. 자신이 쓴 소설과 산문, 동화, 여행기를 소개하는 글이다. 때로 아쉽고 안타까운 심정을 솔직하게 들려준다. 글을 쓸 때의 상황과 출판 당시의 복잡한 마음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제목만으로도 소설과 산문집은 익숙한데 동화집은 잘 몰랐다. 67편의 작가의 말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이 책을 통해서야 이렇게 많은 글을 쓰고 책으로 냈다는 걸 알았다. 작가에게 글을 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그의 글을 읽고 기다리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 작가의 말은 뭔가 사적인 영역에 초대받은 기분이다. 한 권의 소설을 압축하여 들려줄 때도 있고 개인적인 일상을 소개할 때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은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기분을 안겨준다. 정확하게 그 형체를 설명할 수 없지만 말이다.

마흔이라는 나이에 등단을 하고 책을 내는 일이 작가에게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겠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꾸준하게 글을 쓰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면서도 글이 도무지 안 써지고 절망스러운 때에 『나목』을 펴보는 버릇이 있다는 작가의 말은 첫 소설에 대한 깊은 애정과 함께 어떤 고단함이 전해졌다. 그런가 하면 이런 글은 지금 문학에 속한 이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지 않을까 싶다. 끊임없이 쓰고 고치고 또 써야 하는 작가에게 힘을 내라고 응원하는 듯하다. 어디 문학뿐일까. 누구나 살면서 절망하고 한계를 느끼는 순간에도 자신을 다잡을 수 있는 글로 다가온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억누르는 온갖 드러난 힘과 드러나지 않은 음모와의 싸움은 문학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의 싸움을 걸 상대의 힘이 터무니없이 커졌을 때라든가 종잡을 수없이 간교해졌을 때도 그런 싸움을 중단하거나 후퇴시켰던 적은 없고, 그럼으로써 문학한다는 게 본인이게만 보이는 훈장처럼 스스로 자랑스러울 수 있지 않나 싶다. 52쪽, 『살아 있는 날의 시작』발문에서

전쟁이라는 시대의 수난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일상을 담담하게 전하는 작가의 산문을 읽으면서 편안하고 포근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흙을 만지고 손자의 밥을 챙기고 계절의 기록하는 일상들. 선명하지 기억을 소설로 복원해 꼭 세상에 내놓고 싶었던 소망, 그런 작고 소소한 모든 것들은 작가의 말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어쩌면 독자가 원하는 건 문학평론가의 어려운 해설이 아닌 허심탄회하게 내뱉는 그런 말들이 아닐까 싶다. 출판사를 바꾸어 낸 소설과 개정 보정판을 내면서 자신의 소설을 읽고 지난 시절을 가만히 떠올렸을 그를 상상해본다.

 

한때는 글의 힘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것처럼 치열하게 산 적도 있었나 본데 이제 와 생각하니 겨우 문틈으로 엿본 한정된 세상을 증언했을 뿐이라는 걸 알겠다. 138쪽, 『그 여자네 집』서문에서

한 권의 책을 시작할 때 만나는 작가의 말은 책에 대한 기대를 안겨주고 마지막에 만나는 그것은 짙은 여운을 남긴다. 한 평생 쓴 책들의 시작과 끝을 모아 이렇게 책을 낼 수 있다는 기쁨을 독자인 우리만 누려서 안타깝다. 고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연대순으로 정리하고 표지를 정리해 한눈에 볼 수 있는 즐거움도 안겨주는 책이다. 자신의 책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일이 작가의 말이라고 한다면 정성을 들이지 않은 책이 어디 있을까 싶다. 그래도 67편의 말 중에서 지금 소개하고 싶은 걸 하나만 꼽자면 『살아 있는 날의 소망』의 서문이다.

우리가 아직은 악보다는 선을 믿고 우리를 싣고 사는 역사의 흐름이 결국은 같은 방향으로 흐를 것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이 세상 악을 한꺼번에 처치할 것 같은 소리 높은 목청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선, 무의식적인 믿음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89쪽, 『살아 있는 날의 소망』책머리에서

 

문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도 같다고 생각한다. 문학으로 이어진 우리가 공감하고 연대하는 순간 세상은 좀 더 선한 쪽으로 흘러가 단단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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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2-05 0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책 앞과 뒤에 담긴 글만 모아서 책 한권을 만들다니, 그것도 괜찮네요 저는 동화 예전에 만났어요 보기는 했지만 다 잊어버렸군요 예전에 전쟁이 배경인 소설을 보면서 한 사람 이름이 자꾸 나오는구나 하면서 본 게 생각나네요 이제는 그런 게 연작소설이라는 걸 알고, 박완서 님 경험이 담겼다는 걸 아는군요 그때는 거의 몰랐습니다 소설에 자기 경험을 많이 쓰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요 그렇다 해도 그걸 보고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도 하는군요


희선

자목련 2020-02-06 09:40   좋아요 1 | URL
희선 님은 동화를 만나셨군요. 저는 소설과 산문만 만나서 동화를 많이 쓰신 줄 몰랐어요. 말씀처럼 작가의 말로만 엮인 구성도 흥미로웠어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심난한 일상입니다. 희선 님, 건강 잘 챙기세요^^
 
사랑의 잔상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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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로로 작가 장혜령을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녀의 글을 읽었고 종종 장혜령 시인을 검색해보았다. 시인의 첫 시집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런데 내가 마주한 그녀의 글은 시가 아닌 산문이었다. 그것도 사랑에 관한 이미지들. 내 안에 간직된 사랑의 이미지는 너무도 흐릿하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에 내가 원하는 글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의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그녀가 말하는 사랑은 삶이며 글이었고 고독이었으며 열망이었다.


그저 쓰고 고친 것들, 사랑에 대해 쓰기 시작했지만 막상 마침표를 찍고 읽었을 때에는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를 것들은 아닐까, 내게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모든 글이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향한 기억과 몸짓이라 해도 맞았고, 기억해야 하는 순간을 기록함으로 간직하는 당연한 수순 같다고 할까. 하지만 그 안에 서린 어둡고 추운 절망의 기운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쓰고자 했으나 쓸 수 없고 쓰고 있지만 만족하지 않았고 자꾸만 길을 잃은 것 같은 두려움이 전해졌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쓰는 걸 멈추지 않았고 보통의 날에 마주한 이들의 사랑을 포착했다. 그 사랑의 아픔을 목격하고 때로 미래를 예측한다. 때로는 사랑이 온 줄도 모르고 떠난 뒤에야 발견하기도 했다.

그녀의 글은 사랑을 꺼내기에 충분하다. 사랑으로 인해 눈부셨던 과거의 순간, 사랑이 전해준 고통과 상실에 대해 아파했던 밤들이 펼쳐지는 건 당연하다. 그러다 다른 선택과 결정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한 상상하기 하고 만다. 처음 사랑이라고 맹신했던 나의 몸짓이 선명한 사진처럼 내게 달려든다. 그러니 이런 문장을 만났을 때 반갑고 신기하면서도 씁쓸했다. 아무렇지 않는 문자 하나에 설레던 일, 문자 하나에 수많은 의미를 부여하던 시절이 떠올랐기에. 아직 폐기하지 못한 연인의 편지를 읽는 것만 같았다.

안부를 묻는 일.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 똑똑, 문을 두드리고 세계로의 진입을 간청하는 일. (62쪽)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다. 사랑하는 사람, 그는 사랑받는 사람이 자기 안의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일 뿐임을 아는 사람이다. 무수한 사랑과 이별 끝에도 자기 내면에 결코 사라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67쪽)

시나 소설과는 다르게 산문에서는 작가의 숨결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나만의 언어로 전하고 싶은 욕망, 세상과 닿고 싶은 간절함이 보인다고 할까.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지만 수없이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는 걸 안다. 하나의 이미지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글로 쓴다는 건 쉬운 게 아니니까. 불투명한 희망을 보고 글을 쓴다는 건 고통이다. 아니다, 쓴다는 게 희망일 수도 있다. 그녀가 오랜 시간 쓴 글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왔지만 사랑이 아니라 그녀 본연의 모습은 아닐까. 그녀가 쓴 글을 통해 우리는 그녀를 만난다. 그녀가 본 영화와 그림을 상상하고 그녀가 찍은 사진을 통해 그녀의 일부를 인식한다. 그리고 기억 저편에서 걸어오는 나를 만난다. 낯선 사람과 친구가 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던 삶을 생각한다. 같은 방에서 잠이 들고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지금 서로를 기억할까. 세상의 끝에 서 있는 것 같았던 시절, 고요만이 나를 어루만지던 시절과 포옹한다. 이제는 가만히 등을 두드리며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내가 되었다는 말을 들려준다. 

 

낯선 사람과 한방을 쓰고, 또 다른 방으로 옮겨가며 이 삶을 어디까지 전진시킬 수 있을까. 우리가 살았던 방들을 연결하면 그건 얼마나 긴 길이일까. (81쪽)

사각의 방 한 모서리에 우두커니 웅크려앉아 있던 적이 있었다. 오후 두시의 햇빛이 얼굴에 쏟아질 때까지 엎드려 잠을 잔 적이 있다. 빛 외에는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시간에 따라 기울어지고 방을 가득 채웠다가 이윽고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125쪽)

그런 시절을 통과했고 여러 사랑을 지나왔다. 사랑이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다른 사랑이 존재한다는 걸 우리는 이제 안다. 어쩌면 이런 글을 통해 그런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저마다의 사랑이 품었던 빛과 향기를 우리는 잊고 살아왔다고. 끊임없이 사랑을 원하고 말하지만 사랑은 여전히 어렵다. 안다고 믿었지만 점점 더 멀어지는 심연처럼,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는 제대로 볼 수 없는 당신의 표정처럼. 온통 사랑을 쓰고 말하고 외치고 쏟아내는 세상에서 사랑하며 사는 삶은 더욱 고단한 일이다.

이 세상에는 인간인 내가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결코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사랑이 있으며, 당신이 있으며, 운명이 있다. 그러므로 비밀로 남겨둬야 하는 것이 있다. 다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은 비밀을 지킴으로써 당신이 내 안에 머물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어쩌면 씁쓸하겠지만, 내가 결코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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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에드워드 캐리 지음, 공경희 옮김 / 아케이드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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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하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을까. 저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다. 돌이켜보면 누군가 곁에 있었기에 살아낼 수 있었다. 사랑하는 이가 아니라 미움의 상대였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마리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마리는 알자스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마리는 보통의 아이와 달랐다. 아주 작은 아이였다. 책 제목인 little과 표지처럼 말이다.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전쟁에서 돌아왔지만 곧 죽었고 어머니는 가정부로 일하는 집에서 마리 옆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여섯 살 소녀는 그렇게 고아가 되었다. 그러니 집 주인인 ‘닥터 쿠르티우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쿠르티우스는 의사였지만 사람을 진료하는 대신 모든 인체 기관의 모형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는 해부 모형 제작자였고 병원에서 필요로 하는 몸을 일부를 밀랍으로 만들었다. 마리는 이제 그를 도와 밀랍을 만드는 제자가 되었다. 쿠르티우스는 마리를 밀랍으로 만들었다. 마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시작한 것이다. 마리의 두상을 보고 많은 이들이 자신의 두상을 만들기를 원했다. 인간의 욕망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쿠르티우스의 소문은 파리까지 퍼져 당시의 유명 인사가 그를 찾아오고 파리에서 활동하기를 권유한다. 쿠르티우스와 마리는 파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들이 살게 된 집에는 재봉사 남편을 잃은 과부와 아들 에드몽의 살고 있었다. 과부는 대놓고 마리를 무시했고 쿠르티우스는 그런 과부에게 빠져들었다. 과부는 쿠르티우스가 만든 밀랍을 보고 사업을 구상한다. ‘닥터 쿠르티우스의 캐비닛’이란 이름은 금세 유명해졌다. 유명 인사의 밀랍을 만들고 관람료를 받는 것이다. 쿠르티우스를 도와 모든 일을 하는 마리를 그들은 하녀로 삼았다. 마리는 주인까지 자신을 저버려 속상했지만 그 모든 걸 받아들여야만 했다.

 

모든 생각과 감정을 안전한 내면 깊숙한 곳에 넣었지만, 겉으로는 자동인형처럼 되었다. 그들의 지시가 내 태엽을 감으면, 나는 기계적이지만 완벽하게 지시에 따랐다. 살 기회를 얻으려고 입을 다물고 하녀의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 그들이 다른 곳에 있을 때면, 나 자신을 불러내서 다시 마리답게 되었다. 여전히 마리였다. (160쪽)

돈과 명예가 있는 이들은 자신의 밀랍을 만들었고 과부의 사업은 번창했고 쿠르티우스는 살아있는 이들이 아닌 죽은 자들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만든 데스마스크에 파리의 사람들은 더욱 열광했다. 그러는 사이 마리는 에드몽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과부는 부와 권력을 얻는 방법으로 아들의 결혼을 이용했다. 마리와 에드몽 모두에게 슬픔이었다. 이쯤에서 프랑스 파리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바야흐로 루이 16세의 시대였다. 파리의 모든 이들이 쿠르티우스를 알았으니 당연 궁정에서도 그를 찾아왔으니 바로 루이 16세의 누이 열네 살 엘리자베트 공주였다. 키가 148센티미터를 넘지 않는 그녀는 열일곱 살 마리와 똑같았고 밀랍에 관심을 보였다. 마리는 공주의 조각 교사로 궁에 들어가게 되었고 스승과 과부는 마리에게 왕과 왕비의 밀랍을 원했다.

 

​서로를 알아본 공주와 마리는 한 몸처럼 지냈지만 그녀의 숙소는 찬장 선반이었다. 공주를 제외한 사람들은 여전히 마리를 하녀로 대했다. 그래도 궁전을 구경할 수 있었고 자물쇠공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놀랍게도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남편이자 루이 16세였다. 운 좋게 마리는 왕의 실물을 본뜬 모형을 만들었고 왕실 가족 모두를 스케치할 수 있었다. 그랬다. 그것으로 인해 궁정에서 쫓겨나고 과부와 스승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건 마리뿐이 아니었다. 불행한 결혼의 결과로 에드몽은 다락방에서 홀로 지냈다.

그 시기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고 파리에는 피바람이 분다. 불안과 공포가 도시를 감싸는 와중에도 마리와 에드몽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하지만 왕족의 두상이 발견되고 마리와 스승과 과부는 감옥으로 끌려간다. 아이를 가진 마리는 죽음을 면했지만 과부는 처형 당했다. 에드몽의 죽음과 사산된 아이, 마리에게는 가혹한 운명이었다. 스승과 재기를 꿈꿨지만 그 역시 빚을 유산하고 떠났다. 혼자 남은 마리는 버틸 수가 없어 결혼을 선택했지만 허황된 꿈만 꾸고 돈만 요구하는 남편과의 시간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오직 두 아들만이 희망이었다. 하지만 삶이란 반전이 있기에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감옥에서 만난 로즈라는 여인으로 인해 알게 된 이가 있었으니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의 밀랍상을 확보한 후 남편과 이혼했고 마리는 런던으로 향했다. 아들 하나를 프랑스에 두고 떠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런던에서 마리는 자신의 재능을 펼쳤고 성공했다. 모두에게 ‘리틀’이라 불리는 마리는 프랑스 역사의 한 장면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기록한 사람이었다.

​소설은 1761년에 태어난 마리가 1850년 죽음을 맞기까지의 인생을 들려준다. 고아이자 하녀였던 그녀가 겪은 프랑스 혁명처럼 그녀의 인생 자체도 혁명과 같았다.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주인을 따랐고 그에게 배운 재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타인의 시선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고 주체적으로 살기를 원했고 그렇게 살았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 인형들만 나를 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상태, 그것을 밀랍상이라고 부른다. (623쪽)

​한 사람의 생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 수 있을까. 그가 살아온 삶이 곳 역사라는 걸 우리는 이제 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리틀』은 역사소설이자 밀랍 박물관의 창시자인 마담 투소를 그린 전기소설(傳記小說)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저마다의 역사를 쓰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소설을 통해 모두의 삶이 귀하고 특별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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