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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4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8년 3월
평점 :
어떻게 살 것인가, 계획하지 않고 그저 살아간다. 누군가는 불성실한 것 아니냐고 무책임하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럼, 하루를 잘 사는 게 계획이라고 슬그머니 말한다. 하루를 사는 건 너무 어렵고 금세 지나간다. 월 단위, 년 단위의 계획을 세우지만 대체로 무리한 계획인지 아니면 늘 등장하는 변수 때문인지 계획은 뼈대만 남을 뿐 살을 붙이지 못한다. 뻔한 핑계라는 걸 안다. 그래도 하루를 잘 살고 싶은 계획은 여전히 유효하다. 어쩌면 ‘다다시’의 삶이나 나의 삶이나 비슷한 건 아닐까. 우리는 누구나 같은 듯 다른 저마다의 삶을 살고 있으므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즐겁게 읽고 좋아하기에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에 대한 기대가 컸다. 오해는 하지 말길 바란다. 기대에 못 미쳤다는 건 아니니까. 이혼을 한 중년 남자 다다시가 자신이 원했던 오래된 주택을 구하고 혼자서 자신만의 삶을 계획하고 하나하나 실천하는 과정만으로도 이미 충분했으니까. 아파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계절의 움직임과 소리. 집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공간을 소유하는 개념도 좋았다. 다다시에게 집주인 소노다 씨가 세를 놓으면서 오래된 집을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도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시야 저편, 공원 안쪽에는 키 큰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등 올려다봐야 할 만큼 큰 나무들이 서 있다. 바람에 의외로 잘 휘어지는 큰 나무는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올려다봐야 할 만큼 키가 크다는 뜻은 이 집도 내 모습도 나무가 내려다본다는 뜻이다. 여름이 되면 철새가 날아와 나무에 둥지를 틀고 울거나 하지 않을까. 지금 들리는 것은 공원을 걷는 사람들과 아이들의 목소리다. 적당한 거리에서 거리낌 없이 목소리가 들려온다. 새소리도 아이들 목소리도 들리면 기쁘다. (35쪽)
나는 북쪽으로 난 이 창문이 좋았다. 옆집에서 보이지 않도록 사이에 가시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나무만 보인다. 창문에는 차양을 깊게 쳤다. 지붕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내뻗은 서까래가 차양을 지탱한다. 오랫동안 아파트에 살았더니 이층 어느 방에서나 창문으로 차양이 보인다는 게 생각 외로 신선했다. 서까래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래된 집에 산다는 게 실감 났다. (63쪽)
걷기에 충분한 공원, 자동차를 처분하고 자전거로 이동하는 삶, 나에게 맞는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오롯이 나를 위해 사는 시간, 느리게 천천히 먹고 마시는 다다시의 일상은 여유 그 자체로 다가왔다. 책이나 옷에 대해 의견이 달랐던 전처가 없는 공간, 누구의 참견도 없는 혼자 만의 우아한 삶이라 그를 부러워하는 이도 많았다. 유학을 떠난 아들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으니 말이다.
소설은 그렇게 무난하게 흘러간다. 옛 불륜 상대였던 가나를 만나기 전까지. 그러니까 이혼의 결정적인 이유라 할 수 있는 연인 가나를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다. 전혀 소식을 몰랐던 가나가 지금은 다다시가 사는 동네에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 좋았던 감정이 다시 살아나는 듯 다다시는 혼란스럽다. 그러나 가나는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무심하게 대한다. 아무렇지 않게 다다시의 집을 들르며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사연을 들려준다. 다다시와 다르게 가나에겐 관계의 회복이나 불타오를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쯤에서 나는 소설이 뻔한 결말로 흐르는 게 아닐까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노련하고 세련된 마쓰이에 마사시는 달랐다. 그가 공들이는 공간에서 누구와 함께 사는지 시선을 돌린다. 가나의 아버지가 계단에서 넘어져 병원에 입원하면서 다다시는 둘이 아닌 셋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가나와 가나의 아버지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퇴원 후 심각해진 치매로 인해 다다시는 자주 가나의 아버지와 시간을 보낸다. 거기다 미국으로 떠난 소노다 씨가 예상보다 빨리 돌아오는 사정까지 생겼다. 계획했던 삶의 수정은 불가피하고 새로운 계획이 필요했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어떤 일이 펼쳐질까 불안한 두려움을 포함한 기대도. 하루만큼 늙어가지만 내일보다는 젊은 날을 산다는 게 위로 아닌 위로가 되기도 한다.
인간은 애초에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키스를 했어도 잠자리를 함께했어도 알 수 없는 부분은 남는다. 말을 써서 생각하고 말을 써서 뜻을 전하게 되면서, 다시 말해 인간이 인간이라는 유별난 생물이 된 이래로, 전달될 게 전달되지 않게 됐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 말은 머릿속에서 멋대로 이야기를 지어내고 터무니없는 것을 상상하게 하고, 엉뚱한 해석을 하게 한다. 말을 초원한 직감도 있지만, 직감도 맞을 때가 있으면 틀릴 때도 있다. (244쪽)
남들이 부러워하는 혼자만의 우아한 삶은 다다시에게는 때로 외롭고 고독한 시간이었다. 벽난로 앞의 온기를 나룰 이가 필요했고 냉동실에 만들어 둔 만두를 함께 먹고 차를 마실 이가 그립기도 했다. 그것을 채워줄 가나와 아버지가 등장했다. 가나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봐야 하고 다다시는 그들 곁에 머물 것이다. 쉽지 않겠지만 피할 수도 없고 피하지도 않을 삶이다. 앞으로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결정된 것은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다다시는 충만하다. 소설의 제목처럼 우아한지 어떤지 알 수 없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