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함이 느껴지는 표정이다. 그러면서도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이 전해진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의 표지가 하는 말은 그랬다. 이 책이 왜 궁금했을까. 그건 제목 때문이었고 표지 때문이기도 했다. 저자인 에이드리언 리치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녀의 시도 읽은 기억이 없다. 책날개의 소개와 더불어 검색을 통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도. 고백하자면 내게는 다소 어려운 책이었다. 단순한 시인의 산문과 에세이 정도를 기대하고 있다면 아마도 나와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한 권의 책을 읽고, 한 시대를 말할 수 있고,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일, 그것이 가능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부와 노력이 필요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한 권의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그 안에서 여성의 삶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그것이 그 사회의 현실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말하는 건 어렵다. 같은 여성이라서 때로 주관적일 수 있고, 한쪽으로 편향될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주관성과 편향이 가장 객관적인 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에이드리언 리치의 글을 읽고 샬럿 브렌테의 『제인 에어』를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고 느꼈다. 다른 시선으로의 읽기가 필요하다.


여성들이 경험한 피해자성과 분노는 모두 현실이고, 현실적인 원천이 있다. 그 원천은 우리가 사는 환경 곳곳에 존재하고 사회와 언어와 사고 구조로 스며든다. 다른 누구보다 시인들이 그곳을 탐색하고 활용할 것이다. 우리는 그 현실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고 그곳에 안주하지도 않을 것이다. (48쪽)


과거 시나 소설에서 여성은 항상 보조적인 역할에 충실해왔다. 우리 문학만 봐도 그렇다. 자신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남편이나 아들을 위해 희생하거나 그들에게 보호받는 대상으로 존재했다. 우리는 그렇게 양육되었고 지배받은 것이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여성으로 어머니로 시인으로 살았다. 아이를 낳고 쓴 일기에서는 보편적 여성의 감정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글쓰기의 생활을 쉬어야 했고, 연이은 임신과 육아가 그녀를 지치게 했으며 그 시간을 지나 다시 열정적인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 마음이 있었다. <어머니와 딸>이라는 글은 특히 더 많은 생각과 공감을 요구한다. 나와 같은 성의 어머니를 통해 여성의 삶을 본다.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면서 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한다. 그것은 여전히 지금의 시대가 요구하는 것들이다.


딸을 키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 딸들은 무엇을 가지기를 혹은 가질 수 있기를 바랄까? 우리 어머니들은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깊이,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신뢰와 애정이 필요하다. 분명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사실이지만, 자신에게 너무나 적대적인 세상에서 자라는 여성들은 스스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매우 심오한 사랑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사랑은 그저 남자들이 요구해온, 오래되고 제도화된, 희생적인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용기 있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원한다. 문화가 여성에게 새겨놓은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우리의 한계에 대한 의식이다. 한 여성이 다른 여성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실제적인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의식을 분명히 밝히고 확장하는 것이다. (207쪽)


우리 딸들에게는 자신의 자유와 우리의 자유를 모두 원하는 어머니가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여성의 자기부정과 좌절을 담는 그릇이 될 필요가 없다. 어머니의 삶의 질은ㅡ아무리 무방비 상태로 싸움 중인 삶이라도ㅡ딸에게 물려주는 가장 중요한 유산이다. 자신을 믿는 여성, 싸우는 여성, 그리고 주변에 살만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여성은 딸에게 이런 가능성이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208쪽)


한 사람의 여성 시인으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란 무엇일까. 나는 알 수 없고 닿을 수 없다. 그녀의 글을 통해 조금 접촉할 뿐이다. 예술이, 그러니까 문학과 시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돌아볼 뿐이다. 독자이자 여성으로 말이다.


예술은 인간의 타고난 권리고, 우리 자신과 타인의 경험과 상상의 삶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인류의 인간성을 지속적으로 재발견하고 복구하는 측면에서 예술은 민주주의의 전망에 필수이다.(462쪽)


우리는 그저 현재에 붙박혀 있지 않다. 우리는 역사의 끝이라는 좁은 복도에 갇혀 있지 않다. 누구도 다수를 배신해야 굴러가는 체제의 물결 위에서 파도타기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겐 선택권이 있다. 우리는 역사의 한 토막을 통과하며, 그 안에서 살고, 그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를 써야 한다. 수많은 다른 사람과 함께,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그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다. 아니면, 우리 의식과 연민을 거세당한 채, 없는 사람처럼 마지못해 살아갈 수도 있다. (489쪽)


시인의 산문이나 에세이를 떠올리며 기대했던 보통의 독자에겐 어려운 주제일 수도 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하지만 더 알고 싶은 갈망이 생겼다. 뭐랄까 점점 더 알면 알수록 내가 발전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전체를 재독하지 못하겠지만 밑줄 그은 부분이나 관심 있는 주제의 글은 반복해서 읽고 기억하고 싶다. 책을 통해 접근한 세계의 실체, 그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한다고 할까. 개인적으로 여성학, 페미니즘, 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리베카 솔닛의 책과 함께 읽어도 괜찮겠다. 좋다는 표현보다는 근사하고 멋진 책이라는 말로 끝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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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08-21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표지의 사진이 정말 근사해서 관심이 가던 책인데요. 자목련님 글 읽으니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

자목련 2020-08-22 17:23   좋아요 0 | URL
표지가 책 선택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ㅎ 좋은 책이라는 확신에 비해 포스팅은 부족합니다. 개인적으로 추천해요. 바람돌이 님, 주말 시원하고 건강하게 보내세요^^*
 
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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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삶이 다른 한 사람만을 향한다. 하루의 시작과 끝이 그녀를 향해 열려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시간마저 그녀로 채운다.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와 보낸 짧은 시간의 기억은 더듬고 그녀를 위한 글을 쓴다. 부질없는 사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는 닿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릴 수 없다. 함께 할 수 없을지라도 그녀로 인해 인생이 완결되기를 바라는 간절함. 고독하면서 쓸쓸한 사랑이다. 그럼에도 고독한 생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힘이 사랑이다. 『사랑의 역사』라는 진부한 제목의 소설에서 그 사랑을 확인하다. 사랑의 근원은 무엇이며 사랑은 어떻게 기록되고 간직되는가 생각하게 만든다. 


사랑의 역사이니 분명 누군가의 사랑의 기록일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아름다운 로맨스를 기대하기엔 엉뚱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열쇠공으로 살아온 팔십 대 노인, ‘레오 거스키’의 하루는 혼잣말을 하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일상이다. 가족도 없이 아침을 맞이하고 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그에게도 분명 사랑의 시간이 존재했을 터. 그렇다면 ‘레오 거스키’가 사랑한 여인은 누구일까. 왜 그녀는 곁에 없을까. ‘레오 거스키’에게 사랑의 시작과 끝은 단 한 사람, ‘앨마 메러민스키’뿐이었다. 수줍고 서툰 감정을 나누며 서로에게 다가간 소년과 소녀. 그들은 폴란드의 작은 마을에 살았고 우정을 쌓았고 첫사랑의 감정을 키웠다. 레오는 오직 단 한사람 앨마만을 위한 글을 썼다. 그러나 안타깝게 앨마와 꿈꿨던 미래는 2차 대전으로 무너졌다. 앨마는 미국으로 떠났고, 레오는 폴란드에서 죽음의 위협을 피해 숨어 지냈다. 그리고 결국엔 레오도 친척이 있는 미국으로 왔다. 어쩌면 누군가는 레오가 글을 쓰고 있다는 점을 단번에 주목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막연하게 삶의 마지막에 헤어졌던 앨마를 만나는 게 아닐까 기대했다. 적어도 레오와 앨마는 미국에 있으니까. 


이제 소설은 다른 이야기로 시선을 돌린다. 열네 살 소녀 ‘앨마’가 등장한다. 이 소녀가 혹시 레오의 손녀일까. 나는 혼자 생각했다. 레오와는 단 하나의 연결점도 찾을 수 없는 소녀다. 엄마와 남동생과 살고 있다. 아빠의 죽음으로 인해 힘든 사춘기를 보내며 아빠에 대한 모든 것을 기억하려 애쓴다. 그러면서도 아빠를 그리워하는 엄마가 안쓰러워서 아빠란 말도, 아빠와의 시간도 언급하지 못한다. 앨마의 이름은 <사랑의 역사>란 책의 여주인공의 이름이라고 한다. 그 책은 아빠가 우연하게 서점에서 발견하고 엄마에게 선물한 책으로 스페인어로 쓰인 책이었다. 책의 내용도 모르면서 소녀 앨마는 자신에게 이름을 준 주인공 앨마가 궁금하다. 


소설은 노인 레오와 소녀 앨마의 이야기를 교차로 들려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레오의 이야기보다 엉뚱하고 발랄한 소녀 앨마의 이야기에 더 집중했다. 소녀 앨마는 아빠를 잊지 못하고 삶의 의미도 찾지 못하고 번역만 하는 엄마에게 뭔가 신나는 일, 그러니까 새로운 사랑을 찾아주고 싶어 한다. 주변을 둘러보고 엄마와 어떻게든 이어주고 싶지만 결과는 실패다. 드디어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엄마에게 한 권의 책을 영어로 번역해달라는 의뢰하는 한 남자. 편지를 보낸 ‘제이컵 마커스’란 남자가 번역을 부탁한 책은 <사랑의 역사>였다. 이 책이 그 책일까. 앨마는 엄마인 척 남자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에 대해 알아가려 한다. 그리고 엄마가 번역한 <사랑의 역사>를 읽으면서 주인공인 앨마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앨마 메러민스키’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을 한다. 앨마의 호기심과 엄마를 향한 사랑이 너무 예뻐서 ‘제이컵 마커스’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리고 소설의 제목인 <사랑의 역사>속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소설 <사랑의 역사>는 어떤 이야기일까. 점점 더 궁금해졌다.


앨마의 엄마가 번역한 내용을 소개하는 부분을 보면 소설보다는 아포리즘의 형식을 빌린 사랑의 고백이자 연서처럼 느껴진다. 분명 소년 시절 레오가 ‘앨마 메러민스키’를 위해 쓴 소설이 맞는 것 같은데. 작가의 이름은 다른 사람이다. 그는 누구일까. 조각을 하나씩 연결을 시켜 이야기가 완성되는 동안, 독자는 감탄한다. 한 권의 책으로 이어진 사람들의 놀랍고 신비한 인연.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이 결국엔 하나의 이야기 <사랑의 역사>로 모인다. 저마다의 사랑의 역사에 대해 들려준다고 할까. 첫사랑의 애틋한 기억으로 일생을 견뎌온 레오와 ‘앨마 메러민스키’의 사랑의 역사, 영원한 사랑으로 기억될 소녀 앨마의 엄마와 아빠가 만든 사랑의 역사, ‘앨마 메러민스키’의 흔적을 찾아가는 열네 살 소녀 앨마가 만들어갈 사랑의 역사. 


내가 무슨 일을 하건, 혹은 어떤 사람을 찾아내건, 나는-그는-우리 중 누구도-엄마가 간직한 아빠의 기억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마침내 이해했다. 엄마를 슬프게 하면서도 위안을 주는 그 기억으로 엄마는 세상을 만들어냈고, 다른 사람은 불가능해도 엄마는 그 안에서 살아남은 방법을 알았다. (277쪽)


일생 동안 한 사람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이 진정한 사랑이라 해도 그 사랑이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사랑은 부족함 없이 아름답다. 사랑은 그런 게 아니던가. 조금씩 사랑에 대해 알아가는 소녀 앨마를 통해 우리는 느낀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확신과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책임지고 감당해야 한다는 걸 배운다. 슬프면서도 유쾌하고 고요하면서도 소란스러운 즐거움이 가득한 소설이다. 사랑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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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는 떠났고 더위가 남았다. 입추와 말복이 지났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가을은 아직 멀리 있다. 온라인 장 보기를 통해 먹거리 주문을 했다. 문자로 알림이 왔고 상자가 도착했다. 필요한 것을 한꺼번에 주문할 수 있고 빠른 배송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으로 나도 이용자가 되었다. 상품을 클릭해서 자세하게 볼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해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배송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물건을 받고 현명한 소비에 대해, 착한 소비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착한 소비자가 아니었고 지혜로운 소비자도 아니었다. 상자 하나에 모두 배송될 거라 여겼는데 아니었다. 주문한 제품마다 다른 상자에 포장되어 도착했다. 그러니까 상자가 쌓였고 나는 좀 속상했다. 나라는 소비자에 대해서 말이다.

원하는 물건을 받은 기쁨은 사라지고 불편함이 남았다. 편리하다는 장점을 부각시켜도 그렇다. 처음이니까 그렇다고 스스로 위로할 수밖에 없다. 아파트 근처에 있는 마트에서 주문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가격이 조금 비쌀지 모르지만 이렇게 많은 상자와 쓰레기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상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기분이다. 어떤 변화도 없고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마음이 가라앉는다. 조금 지루하고 우울한 것 같다. 늘어나는 코로나 확진자와 쉬지 않고 울리는 안전 재난 문자. 미세한 게 아닌가 보다. 미세한 흔들림이라면 감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럼 제법 흔들리고 있다는 게 맞을까. 8월 17일, 어제는 큰언니의 추도예배일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올해는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휴대폰에 저장한 스케줄로 알림을 내년으로 설정한다. 그해 여름을 잠시 생각한다. 몹시 더웠던 여름, 슬픔으로 차오르던 여름. 내 곁의 귀여운 선풍기도 언니의 흔적이다. 우리가 함께 바람을 맞은 적은 없다. 그런 소소한 일상을 나누지 못했다.





유쾌하고 명랑한 영화를 찾다가 라미란이 주연한 <정직한 후보>를 봤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국회의원이라니. 라미란의 생활연기는 최고였다. 원작은 브라질 영화라고 하는데 현실과 동떨어진 픽션의 이야기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여하튼 많이 웃었고 조금 나아진 것 같다.

이번 주는 조금 빠르게 흐를 것 같다. 흔들리고 느슨해졌던 일상을 조이고 단단하게 채울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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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란 단어를 좋아한다. 조용하고 잠잠한 상태의 마음을 원한다. 나의 마음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한 게 좋다는 걸 아는데도 그게 참 어렵다. 내 마음 하나 어쩌지 못하면서도 세상 일들이 내 마음 같지 않아 속상하고 힘들다. 친구나 지인도 마찬가지다.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면서 불만을 토로한다. ‘고요’를 만들거나 그것에 다가가려 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그것을 원한다. 이런저런 불평과 생각의 끝엔 결국 산다는 게 무엇일까, 무엇을 위해 이토록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 란 질문으로 이어진다. 삶이란 허망한 것이구나. 결론을 맺다가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는 살아 있음이 감사하다. 간사한 마음, 그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면 사는 게 평온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참선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힘든 날들이 이어지는 요즘, 나에게 더욱 필요하다. 아니, 이 시기를 견디고 있는 모두에게. 

 

살수록 어려운 게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일이다. 그래서 책을 읽고, 상담을 받고, 강연을 듣는다. 뭔가 발견하기 위해서,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애쓴다. 미국계 한국인인 저자도 그러했다. 보통의 삶을 사는 20대 청년이었고 고민과 방황의 끝에서 한국의 송담 스님을 찾았다. 10년간 묵언 수행을 하고 참선의 대가로 알려진 스승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가 처음부터 출가의 길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참선에 대해 배우고 존재의 이유에 대해 알고 싶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 책을 통해 참선의 세계를 배우고 경험하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테오도르 준 박이란 사람의 인생 이야기이자 누구나 한 번쯤 품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느꼈다. 존재와 동시에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사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국계 한국인으로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른 한국의 사찰에서 스님의 길을 걸으며 스승인 송담 스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일, 그것은 힘들고 험난한 여정이었다. 그 안에서 참선의 기쁨을 찾는 일이야말로 수행은 아니었을까. 그가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느낀 것을 솔직하게 들려줄 수 있었던 건 그 과정에서 자신이 변화했기 때문에 ‘참선은 삶에 대한 일이다’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나는 참선을 시도했지만 그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없었다. 창피하지만 당연한 결과다. 그럼에도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고 감동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그가 특별한 사람이 아닌 보통의 우리와 같았기 때문이다. 하버드를 졸업하고 30년 가까운 시간을 수행자의 삶을 살면서 강연과 강의를 통해 얻은 명성을 유지했다면 달랐을 것이다. 오히려 절을 떠나 세상으로 나와 여행을 하고 요가를 배우고 그 안에서 참선의 의미를 세상에 알리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더욱 놀라웠다. 본연의 나로 돌아와 초심의 마음을 돌아보고 나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정말 어려운 선택은 아니었을까. 일상에서 참선을 하면서도 꾸준하게 요가 수련을 배우고 깨달음을 얻는 그의 모습은 아무런 노력 없이 변화를 바라고 고요를 원하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생을 걸고 세상에 말할 수 있다. 방탕과 방황으로 채워졌던 20대를 알기에 지금의 청춘에게 다가갈 수 있었고 참선의 어려움을 알기에 참선을 배우는 이들의 좌절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상처 입은 치유자였다.

 

치유를 해주는 모든 사람에겐 아픔이 있다. 어쨌거나 우리는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통해 공감과 연민을 배운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사라지기를 바라게 되는 것도 자신의 불행을 통해서다. (2권, 103쪽)

 

참선에 대해 몰랐다. 막연하게 심신수련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여겼다. 마음을 모으는 기도, 명상, 호흡, 요가, 이런 단어들이 함께 떠올랐다. 아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테오도르 준 박의『참선』을 읽었지만 여전히 나는 참선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가 안내하는 방법대로 참선을 해보았지만 집중도 쉽지 않았고 “이뭣고”를 반복하는 일도 어려웠다. 그러니 삶의 화두를 생각하는 일이나 감정을 다스리는 건 엄두를 낼 수도 없다. 수많은 반복과 노력의 있어야만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참선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참선으로 시작해 참선으로 끝나는 하루가 얼마나 충만할지 짐작할 수 있다. 삶을 긍정하는 즐거움 가르침이자 수행법이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한지 알게 되었다.

 

참선은 우리 내면에 있는 해와 달의 빛을 모으고 주위의 구름에 초점을 맞춰 다 태워 없애버린다. 참선을 하면 더욱더 많은 빛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뚫고 나와 우리의 마음을 환히 비추고 몸을 가득 채운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두 눈과 얼굴에서 빛이 난다. 마침내 그 빛은 우리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 빛이 비치는 대로 행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2권, 280쪽)

 

우리는 제대로 살기를 원한다. 그것은 나를 지키면서 타인과 함께 공존하는 일이다. 나의 내면을 수시로 들여다보고 주위를 살피는 일은 쉬우면서도 힘들다. 그래도 놓쳐서는 안 된다. 참선의 삶을 사는 일도 그렇다. 이제 겨우 참선에 대해 알아가는 내가 거들 말은 아니지만 참선이 주는 위대한 감동을 당신이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순간, 잠시라도 참선을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한다. 거기 내가 원하는 ‘고요’가 가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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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8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19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0-08-18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우연히 동영상 추천받아 보았던 분이시네요. 말씀하시는 태도, 목소리가 너무나 차분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자목련 2020-08-19 09:51   좋아요 0 | URL
글이 아닌 영상으로 보면 색다른 기분일 것 같아요.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 시인선 542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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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닫고 시를 읽는 날이다.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이제는 그만 너를 보내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산뜻하게 비와 이별할 수 있다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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