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낙엽
토머스 H. 쿡 지음, 장은재 옮김 / 고려원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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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일반적으로 타인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기를 원한다. 어쩌면 그것은 의도하지 않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지도 모른다. 불운한 삶이 아닌 행복한 삶을 꿈꾸는 단순하면서도 거대한 소망처럼 말이다. 그 소망이 실현되었을 때 그것이 사라질 거라 생각하며 사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닥친 갑작스런 사고나 불행에 대해 강력하게 대처한다. 문제는 언제나 불신과 추측이다. 사실과 진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아니라 확인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의심이 모든 것을 망쳐놓는다. 혹시 혹은 만약에, 라는 생각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것이다.

 

 『붉은 낙엽』은 그런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했다. 물론 이 소설은 범죄소설이며 추리소설의 장르에 속한다. 이웃의 한 아이가 실종되고 주인공의 아들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며 벌어지면서 겪게 되는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에릭은 사진관을 운영하고 그의 아내 메러디스는 대학 강사다. 둘 사이엔 평범한 중학생 아들 키이스가 있다. 누가 보더라도 단란한 가족이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에이미 부모의 부탁으로 키이스는 아이를 돌봐주고 돌아온다. 다음 날 에이미가 사라지면서 키이스는 경찰의 조사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에릭은 아들 키이스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다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놀란다. 사춘기 아들이 갖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이층 방에서 혼자 무엇을 하고 시간을 보내는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릭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키이스의 지난 행동에 대해 의심을 한다. 그러면서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와 자동차 사고로 죽은 어머니, 어린 나이에 죽은 동생 제니, 혼자 사는 형 워렌을 생각한다. 아들 키이스와의 관계를 통해 아버지와 자신의 사이를 돌아본다.

 

 실종된 에이미의 진범을 찾는 과정과 에릭이 알지 못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가 가족이라는 큰 퍼즐을 하나씩 맞추며 이어진다.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고통과 분노, 용의자로 몰린 키이스를 지키려는 에릭 부부의 대립이 팽팽하게 흐른다. 에릭이 알지 못했던 키이스의 모습들과 하나씩 드러나는 증거들로 인해 소설은 어느새 키이스가 범인일지 모른다는 확신을 독자에게 심어준다. 빨리 범인을 잡아야 하는 경찰, 키이스를 범인으로 단정한 에이미의 아버지, 걷잡을 수없는 의심으로 아내까지 믿지 못하는 에릭. 그들에게 행복은 현재가 아닌 과거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환하게 웃고 있는 가족사진처럼 말이다.

 

 ‘나는 창 앞에 남아서, 아침 햇빛이 늘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드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이 집을 둘러싼 숲의 작은 조각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잠시 나는 우리가 이곳에 이사 오던 날을 회상했다. 트럭에서 짐을 부리는 동안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며 어떤 시간을 가졌던가. 날은 또 얼마나 화창했던가. 그날 우리가 이 완벽한 숲에 함께 모여, 모두가 웃고 또 웃으며 얼마나 행복해 했던가. 167쪽’

 

 소설은 잔인하게도 한 가족이 어떻게 와해되는지 그 과정을 낱낱이 보여준다.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가족은 서로를 보듬어 껴안거나 절대로 다시 붙일 수 없는 수 천 개의 조각으로 부서지기도 한다. 누구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견고하다고 믿었지만 티끌 만한 것에도 쉽게 흔들리며 오해의 벽을 만드는 인간의 마음 때문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에이미가 카렌 지오다노의 딸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내가 그즈음 동네의 길을 걸어가다 느낀 것은, 멀리 높은 곳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모래알처럼 구별이 안 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면 어떤 얼굴이든 독특하고 딱 하나뿐이라는 것이었다. 그 얼굴들은 엄마의 얼굴이거나 아빠의 얼굴이고, 누이 혹은 형제의 얼굴이며, 딸의 얼굴이거나 아들의 얼굴이다. 그 얼굴에는 수많은 기억들이 아로새겨져 있어서 다른 누구의 얼굴과도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애착의 핵심이고, 그 애착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특질이다. 우리가 이런 애착의 기억들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무관심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무표정한 눈으로 서로를 알지 못한 채, 가장 기초적인 영양분을 찾아 바다를 떠올게 될 것이다.’ 19~20쪽

 

 유괴 범죄라는 섬뜩한 소재로 시작되었지만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척 아름다운 소설이다. 생생하게 포착한 불안과 주인공의 내밀한 감정이 잘 표현되었다. 더불어 우리 삶에 있어 중요한 게 무엇인지 확인시킨다.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관계인 가족이야말로 거대한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란 걸 각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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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으로 돌아왔다. 먼 길을 떠났다 돌아온 것처럼 내 방, 내 책상이 낯설다. 넓은 공간에 있다가 와서 그런가, 이 공간이 아주 작에 느껴진다. 어젯밤 도착하자 마자 싸들고 온 옷가지들을 세탁기에 넣고 큰 주전자 가득 물을 끓였다. 집을 비운 사이 도착한 책을 보고 내가 올 때를 맞춰 친구가 보낸 상주 곶감을 먹으며 익숙한 소파에 기대어 드라마를 보고 읽히지 않는 책을 읽다 잠이 들었다.

 

 병원과 은행에 다녀왔다. 은행에서 사은품으로 건네는 상자가 무릎 담요라는 사실에, 치약으로 교환해 달라고 말했다. 내게 필요한 건 치약이니까.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였더니 무릎 담요를 받아올 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스친다. 서랍 속에서 잠들어 있는 무릎 담요들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아침이다. 메일을 확인하고 이웃 서재의 글을 읽는다. 아직 읽지 못했던 책과 알지 못했던 책 소식을 듣고 몇 권을 고른다.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나왔다. 김애란의 수상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우수상 수상작은 책 소개를 보고서야 알았다. 나의 시선은 김애란의 침묵의 미래보다 김이설 , 승숙, 천운영의 이름에 멈춘다. 김애란은 최연소 이상문학상 수상작가가 되었다. 『비행운』 은 몇 편만 읽었다. 구보 미스미의 『길 잃은 고래가 있는 저녁』, 사이먼 밴 부이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삶』, 리디아 플렘의 『수런거리는 유산들』은 제목에 이어 표지도 멋지다.

 

 

 

 

 

 

 

 

 

 

 

 

 

 

 

 

 

 

 

 이상 문학상 수상작품에 실린 우수작으로 선정된 김이설, 염승숙, 천운영, 이장욱도 소설집도 생각난다. 김이설의 <흉몽>은 문지웹지의 1월의 소설로도 선정되었다. 그녀의 두 번째 소설집은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기다리는 시간은 연인을 대하는 듯 떨리고 설렌다. 천운영의 소설집은 문학동네에서 새단장으로 나왔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장욱의 소설집도 곧 나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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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컵을 좋아한다. 책 만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쁘고 신기한 컵을 보면 갖고 싶다는 마음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꼭 곁에 두어야 할 정도다. 그렇다고 컵이 많은 건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책장에 책과 책 사이에 나만의 컵을 함께 나란히 두는 게 나의 작은 꿈이다. 이런 내게 박세연의  『잔』은 황홀, 그 자체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잔에 대한 이야기다. 일러스트레이터인 저자가 자신의 일상에 흐르는 공간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수많은 잔에 담았다.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는 단골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맛은 얼마나 달콤할까. 손님에 따라 잔을 선택하고 커피를 전하는 일은, 정말 행복할 것 같다. 유명한 찻잔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어 수집가에게는 더욱 좋다. 눈을 뗄 수 없는 잔들이 가득하다. 아, 매혹적인 찻잔들... 

 

 

 

 

 

 

 

 좋은 이들과 뜨거운 차를 함께 마시는 시간은 그 온기가 식어도 여전히 뜨겁고 따뜻할 것이다. 꽃을 띄운 사진에서는 진한 꽃향기가 날 것만 같다. 사진으로 만나는 잔들도 아름답지만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으로 태어난 잔은 더욱 특별하다.

 

 

 

 

 

 

 

 

 

 

 

 이 책의 놀라운 점은 바로 표지다. 표지를 벗기니 잔들이 쏟아진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잔에서 시작해 잔으로 끝나는 것이다. 책, 어디에서라도 잔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 하나, 책에서 만나는 잔을 곁에 두었으면 즐거움은 배가 될 것이다. 물론, 나는 안타깝게도 그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이토록 많은 잔이 있는데, 겹치는 잔이 하나도 없다.

 

 

 

 

 

 

 

에스프레소의 온도를 지키는 데미타스,

홍자의 향을 머금은 넓고 얇은 잔,

어떤 음료든 척척 담아내는 머그,

음료의 시원함을 그대로 전달하는 유리잔,

보온을 위한 둥글고 두꺼운 잔,

누구든 이동하며 마실 수 있는 종이컵까지.

그냥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잔에는 차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훌륭한 맛과 향과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한

정성이 숨어 있다.

차가 찻잔을 통해 입으로 전달될 때까지의 모든 것을 위해

만들어진 소통의 도구이다. 443쪽

 

 

 책 장을 넘기면서 나는 감탄하고 부러워한다. 그러다 나의 컵을 생각한다. 책을 읽을 때, 리뷰나 글을 쓸 때, 내 곁엔 언제나 잔이 있다. 내게로 와서 나의 일부가 된 그것들을 매만지게 만든다. 하여 특별한 나의 컵들에 담긴 사연을 불러온다. 나를 만나러 먼 길을 달려온 이들과 함께 했던 시간을 생각한다. 눈을 맞추고 가벼운 포옹을 하고, 두 손을 잡고 나눈 시간이 담겼다. 잔의 아름다움에 빠져 행복한 시간을 선물하는 책이다. 당신과 나의 소중한 시간을 생각하고 미소짓게 만드는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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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연인들 - 김선우 장편소설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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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주문처럼 말한다. 우리를 살게 하는 건 사랑과 소망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정작 하루를 견디고 또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밥을 먹고 잠들 수 있는 힘은 어떤 분노이거나 증오에서 나오기도 한다. 나를 고통스럽게 한 존재를 넘어서기 위해 그가 무참히 짓밟히는 그 날을 고대하며 사는 삶도 있다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불행을 안고 태어난 삶이 그러하다. 나의 잘못이 아니라 부모나 형제의 잘못으로 그 삶이 대물림 되는 경우, 그 고리를 끊기 위해 새로운 불행이 잉태되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과감하게 그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까. 누군가에는 끊고 싶은 고리가 누군가에는 다시 이어가고 싶은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김선우의 소설에서 ‘고리’는 사랑이다. 끊어야 할 고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된 폭력이며, 이어가야 할 고리는 생명에 대한 사랑이다. 폭력을 일삼던 남편을 죽이고 복역 중인 지숙은 딸 유경을 사랑했기에 자살을 선택했다. 유경의 인생에 걸림 돌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경은 엄마의 고향인 ‘와이강’에 유해를 뿌리고 일부를 가지고 스톡홀름으로 향한다. 북유럽을 꿈꿨던 엄마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서다. 유경은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한다. 그가 한국의 와이강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경에겐 충분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와이강을 찾는다. 평온하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사랑을 나누고 미래를 약속한다. 그러나 곧 돌아오겠다던 그는 사고로 죽고 그 충격으로 유경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흐르던 사랑이 멈추자 유경의 삶도 멈춘 것이다. 유경이 다시 와이강을 찾은 건 해울의 편지 때문이다. 해울은 와이강의 물을 보내고 자신을 도와달라는 의문을 편지를 보냈다. 와이강에서 버려져 그곳의 당골네가 손녀 수린과 함께 남매처럼 키운 아이였다.

 

 유경에게 와이강은 엄마와 그를 떠올리는 소중하면서도 아픈 곳이다. 7년 만에 다시 찾은 와이강은 버림 받은 이들, 상처 받은 이들을 품어주고 치유해 주던 강이 아니었다. 정부 정책이라는 이유로 곳곳이 허물어지고 사라지고 있었다. 강이 파괴되면서 몸이 굳어가는 수린을 위해 해울은 공사를 중단시키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숙, 그, 수린, 해울은 와이강이 존재했기에 살 수 있었던 이들이다. 와이강은 죽은 지숙에게 맑고 순수한 추억을 간직한 곳이었고 그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곳이었으며 수린과 해울에겐 엄마였다. 그리고 유경에겐 멈추었던 삶을 흐르게 할 유일한 곳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붙잡을 수 없었던 그의 이름, ‘연우’를 찾고 생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김선우의 『물의 연인들』에 대해 단순하게 사랑 이야기라고 예상한 건 오산이었다. 『캔들 플라워』를 떠올렸어야 옳았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영민한 글로 그림자이거나 그늘인 삶에 빛의 길을 터 준다는 걸 기억해 내야 했다. 그녀는 극도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으로 우리의 무감각을 흔들어 깨운다.우리가 함께 지켜지고 지속적으로 보존되어야 할 것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나는 괜찮아요. 아주 오래 살아도 좋았겠지만 아니어도 상관없어. 강이 흐르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선생님? 와이강이 오빠랑 내게 늘 들려주던 얘기인데요. 어제보다 오늘을 더, 조금이라도 더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강은 흐르는 거예요.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겠죠. 어제보다 오늘을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지 않으면 흐를 필요가 없어요. 어제에 멈춰 서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거기까지 말을 마친 수린이 힘이 드는지 가만히 숨을 내쉰다. 희미한 단내가 풍기는 수린의 숨소리가 물소리처럼 흐른다…… 라고 유경은 느낀다. 응, 죽은 거나 마찬가지로 살았어. 이제는 안 그럴게. 어제보다 오늘 더, 조금이라도 더 많이 사랑할게. 그렇게 흘러갈게. 그게 사는 거니까.’ 257쪽

 

 그러므로 김선우가 이 소설에서 말하는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사랑이다. 나 스스로에 대한 사랑, 너에 대한 사랑, 생명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 물에 대한 사랑 말이다. 수린의 말처럼 강이 멈추지 않고 흘러야 하는 것처럼 우리 삶에는 사랑이 흘러야 할 것이다. 작은 물줄기가 흘러 다른 물줄기를 만나 커지고 더 많이 흐르듯 나의 사랑과 당신의 사랑이 흘러 세상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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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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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다는 건 가면을 쓰고 사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감정을 자제하고 숨기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우리네 삶은 그렇게 지속된다. 살아내야 하니까, 도미노처럼 몰려오는 삶의 거친 파도 앞에 무너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서글프다. 그런 줄 알면서도 서글프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내몰려도 나를 대신 할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이 아프다. 한강의 소설은 그것을 한 번 더 각인시킨다. 잔인하게도.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깊게 베인 상처를 가만히 지켜보고 어루만진다. 오랜 시간 기다리고 기다렸던 손길이라는 걸 우리는 금세 알아차린다.

  

 「회복하는 인간」은 언니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다친 발목을 치료하다 입은 화상을 방치한 주인공 이야기다. 그녀가 화상을 입은 건 복숭아뼈 만이 아니었다. 지난 시절 언니와의 관계에서 조금식 데인 부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부모님과 남편 모두에게 사랑받았던 언니는 그녀의 상처를 보여주기도 전에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녀는 이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얼마나 힘든 날들을 버티며 살아왔는지 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회복하는 인간」, 32쪽>

 

 그저 열심히 살고 있다고 여겨지는 수많은 삶은, 그녀의 발목처럼 깊은 상처를 안은 채 견디고 있는 건 아닐까. 남편 대신 가계와 아이를 모두 책임져야 하는 「훈자」속 주인공이나 이제까지 살았던 삶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길을 떠나는「밝아지기 전에」도 그녀들과 다르지 않다. 안간힘을 쓰며 살지만 산다는 그 자체가 무의미할 뿐이다. 지친 그녀가 견디다 못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아내와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고 믿었던 「 왼손」의 남자처럼 말이다. 평범한 직장인 주인공은 언제부터인지 아내와 말을 나누는 시간이 줄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아이가 잘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은 그저 잠을 자기 위한 공간이 되버렸다. 어느 날 왼손이 통제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인다. 남자의 왼손은 그동안 감췄던 욕망을 분출하듯 과격하게 행동한다. 그로 인해 직장에서는 해고되고 오랜 만에 만난 첫사랑과도 불편한 사이가 된다.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왼손은, 감춰진 울분이었을까.

 

 그들이 간절히 바랐던 건, 그저 자신을 그대로 바라봐 주는 단 한 사람의 눈빛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른의 세계에서 그 한 사람이 되어주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눈빛을 기다리고 바라는 건 여전히 우리의 생을 사랑하고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숨기고 살았던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용기를 내는 「에로우파」와 「파란 돌」의 화자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모든 걸 잃은 「노랑무늬영원」의 현영이 차마 꺼내놓지 못한 바람도 그것이었다. 죽음의 터널을 지나왔지만 현영에게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림이 전부였던 그녀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두 손은 사라졌고 남편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두 손만이 남았다. 절망의 그녀에게 삶을 보여준 건 친구 소진의 아들이 키우는 도마뱀 노랑무늬영원이었다. 앞발을 잃은 도마뱀의 앞발이 다시 돋아나듯 그녀의 생도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만일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을 가진 인간으로서 다시 살아나가야 한다면, 내 안의 죽은 부분을 되살려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부분은 영원히 죽었으므로. 그것을 송두리째 새로 태어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이다.’  <「노랑무늬영원」, 296쪽>

 

 소설에서 마주하는 삶들은 잊고 있었다고 여겼던, 그리하여 아무런 상처도 남아 있지 않다고 믿었던 나의 이야기이며 당신의 이야기다. 소설 속 그녀(그)를 부서지게 만든 건 대단한 것들로부터 시작된 게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고 무던하게 믿었던 미련함이나 아프다고, 힘들다고, 말하지 못한 채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삶의 균열은 아주 작은 곳에서 시작되기에 우리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다.

 

 한강의 소설은 우리가 쉽게 지나치고 발견하지 못하는 그 작은 틈새를 발견하고 메울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있는 듯하다. 어떤 틈새는 한 번에 메워지기도 할 것이고 어떤 틈새는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할 것이다. 그 과정을 버티고 견디는 생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포기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 힘내라는 그녀의 작지만 강한 목소리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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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무가 될 수밖에 없었어
    from 그리하여 멀리서 2016-04-29 17:37 
    자신을 지키며 성장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특히 어디서든 뛰어나올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세상에서는 말이다. 외부의 공격뿐 아니라 내부의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기르려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선택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을 결정한 건 영혜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을까. 영혜는 남편과 가족들에게 충분히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해받지 않아도 상관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