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
이응준 지음 / 시공사 / 2013년 2월
평점 :
‘아름다운 건 쉽사리 망가진다. 모습과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장미라든가 신부처럼. 하지만 슬픔은 영원히 아름답다. 왜냐하면, 우리는 슬픔을 아름다움이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194쪽
돌아보면 ‘청춘’이라 불리는 시기를 채웠던 모든 것들은 미흡하고 불안하기에 아름답다. 청춘이라서 세상을 부정할 수 있었고 타자를 이해하기에 앞서 이해받기를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우리는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면 다르게 살 거라 다짐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감정의 결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글로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이응준의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는 청춘의 이야기다.
소설은 주인공 문하가 이삿짐을 싸면서 한 권의 노트를 발견하면서 시작한다. 글로 남겨진 건 그의 과거였다. 잊고 있었던, 잊기를 바랐던 기억이었다. 소설은 문하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에게 상처를 남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현재가 아닌 과거로의 여행인 것이다.
문하는 열 살 되던 해에 아버지와 형이 생긴다. 남들에게는 재혼 가정이었지만 문하와 형 인하는 이복 형제였다. 정원이 있는 집에서 문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아버지는 낯설었지만 형 인하는 달랐다. 문하에게 형은 우주와 같은 존재였고 완벽한 사람이었다. 인하가 읽는 책, 인하가 들려주는 세상은 언제나 정의로웠고 빛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하는 인하에게서 더이상 빛을 볼 수 없었다. 인하는 문하가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부정과 부패로 가득한 세상을 변화하는 게 아니라 그 세상과 타협하고 있었다.
하나의 우주였던 형의 존재가 허물어지고 문하는 집을 나와 대학가인 가합동에서 생활한다. 그곳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산타 페를 만난다. 산타 페는 미술을 전공했지만 예술가는 아니었다. 문하는 그를 형이라 부르며 카페 일을 돕거나 근처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다. 그러다 수인이라는 여대생을 알게 된다. 문하는 왜 이곳에 머무르는지 모른 채 그들과 어울린다. 산타 페와 수인이 들려주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만 산타 페와 수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소설은 끝까지 문하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후원했던 정치인에게 배신당하고 병들어 죽은 아버지, 형과 어머니의 묘한 관계가 언급되지만 문하의 감정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가족들에 대한 문하의 분노나 절망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는 말이다. 인하를 사랑한 만큼 그에게 듣고 싶은 변명이 많이 있었을 텐데, 문하는 철저하게 고통의 시간을 선택한 것이다. 다만 산타 페와의 일상을 통해 형 인하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짐작할 뿐이다.
문하가 혼자서 보낸 그 시절을 우리는 뭐라 불러야 옳을까? 나를 찾는 시간이라 해야 할까. 가장 사랑했던 이를 용서하기 위해 이해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간이라면 맞을까. 15년이 지난 후 문하가 다시 찾은 가합동의 카페는 여전하지만 산타 페의 소식은 없었다. 그 시절은 끝났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진정 일생을 두고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면 그건, 과연 저마다의 인생 가운데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곰곰이 살피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중심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별자리를 만든다 하더라도, 이제는 서로를 덩그러니 수억 광년 밖에 두지 말자. 하여, 전속력으로 달려가 산산이 부서지는 밤하늘 별들의 섬광처럼 우리 지난날 아파했단 말도 쉽사리 하지 않도록, 그대는 내게로, 나는 그대의 인력 안으로 무모하게 손 내밀 순 없는지.’ 270~271쪽
이응준이 스물여섯 살에 쓴 이 소설은 상처로 얼룩진 시절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삶을 뒤흔들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상처는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채우는 하나의 과정은 아니었을까. 열 살 소년이 어른으로 자라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 말이다. 아름답지만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은 내가 청춘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청춘들을 위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