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 가공선 창비세계문학 8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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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도 학자금 대출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 대출로 인생의 발목이 잡힌 이들은 많지 않았다. 열심히 일해 갚을 수 있을 정도였다는 게 맞겠다. 취업은 쉽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고 든든한 배경도 없던 나는 3D 직종에 취업을 했다. 노동조합은커녕 갑과 을이 분명한 직장에 불만이 많았지만 동료들과의 어울림으로 힘겨웠지만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1929년에 발표된 코바야지 타끼지의 『게 가공선』을 읽으면서 그 시절을 떠올리며 잠깐 안도했고 우리의 노동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학생은, 어릴 때 할머니를 따라 간 절간의 어두컴컴한 불당에서 보았던 ‘지옥 그림’을 떠올리며 그것을 바로 자신이 겪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릴 적 그에게 그런 그림들은 마치 이무기 같은 동물이 늪에서 꿈틀꿈틀 기어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과 정말 똑같았다. ―그들은 과로 때문에 오히려 잠들지 못했다. 한밤중에 느닷없이 유리창을 마구잡이로 긁어대는 듯 섬뜩한 이 가는 소리나 잠꼬대, 가위눌린 듯한 괴상한 고함 소리가 어두컴컴한 ‘똥통’ 여기저기서 들렸다.’ 57쪽

 

 소설은 131쪽의 짧은 분량으로 내용도 간단하다. 제목 그대로 게 가공선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생생하게 담았다. 문제는 평범한 게 가공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1926년 게 가공선에서 가혹한 노동으로 사망자가 발생한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이 소설은 자본에 의해 잔혹하게 소모되는 노동 현장을 고발한다. 먼 바다에 홀로 선 게 가공선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 보여준다. 감독이라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하고, 최소한의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소설 속 표현처럼 그곳은 ‘똥통’이었고 ‘지옥’이었던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가난한 농부, 학생, 어부, 힘든 광산에서 치여 선택한 광부 등 다양한 이들이 모였다. 국가적 산업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혹사한다. 그리하여 회사는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 조금이라도 돈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작은 희망은 싹을 틔우기 전에 사라진다. 시체로 변하는 동료를 보면서 인간 이하의 대접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노동자들은 단합한다. 파업을 도모하지만 이를 알아차린 감독이 불러들인 구축함의 해병 앞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소설은 실패가 아닌 다시 한 번 투쟁의 열의를 불사르는 모습을 보여주며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앞날의 승산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사느냐, 죽느냐 하는 거니까.”

 “그래, 한 번 더! ” (129쪽)

 

 발표된 지 80년이나 지난 소설이 지닌 의미는 특별하다. 그들의 모습은 현재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깊어만 가는 양극화, 늘어가는 청년 실업, 졸업을 미루는 대학생 등 우리 사회 곳곳의 심각한 문제와 맞닿아 있다. 거울처럼 우리네 삶을 비추는 아픈 소설이다. 책을 덮은 후에도 여전히 자본에 휘둘리며 살며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들의 아픔을 달래며 응원하는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그들의 환청과 여운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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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절반이 지나고 나니 한 해를 다 소모한 듯하다. 소모라는 말이 우습지만 지난 1년 동안 내가 읽은(읽었다고 믿는) 책들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첫눈도 내렸고 소소한 절망은 어느새 눈 덩어리처럼 커졌다. 11월이 아프다. 예전과 다른 이유로 아프니 다행인지도 모른다.

 

 아픈 마음을 달래주는 건 이번에도 책이다. 책들의 유혹은 언제나 강렬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책이라면, 내가 만나지 못한 작가라면 더욱 그렇다. 최근엔 백민석 작가의 새 책 소식에 흥분하는 이들을 보고 놀랐다. 백민석이 누구길래?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혀끝의 남자』가 궁금했다. 해서 주문했고 기다린다. 같은 이유로 아직 곁에 두지 못한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를 리스트에 올린다. 글샘 님의 글로 만난 김신용 시인의 시집 『잉어도 함께.

 

 

 소설가 한강이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이 나왔다. 아니, 시인이 맞다. 그녀는 시를 먼저 발표했고 소설로 등단했다. 작년엔 『노랑무늬영원』이 아주 많은 위로가 되었다. 버티고 견디며 담금질하는 날들, 이번 겨울엔 그녀의 시집이 그 역할을 할 것 같다.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회복하는 인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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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13-12-18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도 몇권 고르고 갑니다... 아픔 많이 가라앉으셨길... ...

자목련 2013-12-18 12:16   좋아요 0 | URL
따뜻한 댓글 고맙습니다. 여울마당 님 포근한 오후 보내세요^^*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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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글쓰기란 제목을 지닌 책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어떤 목표를 향해 나가고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목차를 훑어 내고 저자를 확인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고 이윤기의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는 당연 읽어야 할 책으로 분류될 것이다. 번역가, 소설가, 신화전문가 이윤기가 들려주는 글쓰기의 노하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번역과 글쓰기에 대한 39편의 에세이를 통해 이윤기의 생생한 말과 글을 마주할 수 있다.  그가 쓴 소설과 번역한 작품을 접한 이라면 더욱 반갑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의 작품을 세 네 권 읽었고 읽지 않은 소설과 산문집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그의 열혈 독자라 할 수 없다. 이 책을 통해 그가 신화에 대해 깊은 애정을 소설에 녹여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더불어 문학, 번역, 언어에 대한 생각도 만날 수 있다. 문학에 대한 그의 글에서 단호함이 전해진다. 새로운 무언가를 창작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숨어 있다.

 

 ‘나는 문학을,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에다 이름을 지어 붙이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에다 이름을 붙이는 행위이지 ‘저 자신’ 에게 이름을 지어 붙이는 행위는 아닌 것이다. 학문은 나날이 쌓아야 하고, 도는 나날이 비워야 하듯이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에다 지어 붙이는 이름은 나날이 늘려야 하고 ‘제 이름’ 에 붙는 이름은 나날이 지워가야 하는 것이다. 남의 얼굴 보고 이름을 지어야지 제 얼굴 보고 이름 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67~68쪽, <얼굴 보고 이름 짓기> 중에서)

 

 뿐만 아니라 번역에 대해서도 그가 얼마나 단어, 문장에 본 뜻을 전하려 애썼는지 알 수 있다.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오역에 대한 사례도 들려준다. 그는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들어준 책으로 『장미의 이름』을 꼽으면서 오역에 대한 부분을 솔직하게 개정판의 글을 통해 인정한다.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하게 반성한다. 자유로운 영혼인 ‘그리스인 조르바’ 의 생생한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건 이런 그의 노력 덕분인 것이다. 정말 멋진 작가다.

 

 이 책은 비단 문학이나 번역처럼 전문적인 글쓰기에 대한 책만은 아니다. 이윤기의 글을 통해 우리는 말과 글을 제대로 사용하고 쓰고 있는지, 말이 지닌 의미를 올바르게 전달하고 있는지 묻기 때문이다. 속어, 비어, 줄임말을 많이 사용하는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내가 부리는 말, 내가 부릴 말은, 되도록 많은 사람이, 되도록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필요하다고 느껴지면 한자나 영어를 병기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극소수의 독자에게나마 정확한 의미를 전달할 필요를 느낄 때만 그렇게 한다. 하지만 한글 표기만으로도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져서 그럴 필요를 느낄 때가 점점 줄어가고 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272~273쪽, <내가 부리는 말> 중에서)

 

 많은 말을 하고 싶은 책이다. 그만큼 강렬하다. 다만 그대로 전하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 단언컨대 이 책을 읽은 많은 이가 그의 책을 펼칠 것이다. 글을 통해 여전히 살아 있어 조르바처럼 춤추는 이윤기를 만날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설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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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여행자들 오늘의 젊은 작가 3
윤고은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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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난은 우울증 같은 거라 어디에든 잠재했다. 자극이 임계점을 넘으면 그 우울증이 곪아 터지기도 하지만, 용케 숨어 한평생을 마무리하는 경우도 있다.’ 12쪽

 

 예기치 못한 사고, 질병은 예외도 없이 모두에게 닥칠 수 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앞에 내가 아닌 남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위무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러니 타자의 시선에서 누군가의 불행은 안타까운 감정,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미약하나마 성금이나 자원봉사라는 행위를 통하여 할 일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윤고은의 『밤의 여행자들』도 다르지 않다. 재난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진짜 재난이 무엇인지 묻는다.  

 

 주인공 요나는 정글이란 여행사에 근무한다. 정글에서 요나가 기획하는 여행상품은 재난 여행이다. 말 그대로 지진, 태풍, 가뭄, 화산, 쓰나미, 해일 이 발생한 재난 지역을 여행하는 것이다. 10년 동안 근무한 요나는 정글에서 퇴출 대상으로 상사 김으로부터 성추행까지 당한다. 정글에서 최대 위기에 처한 요나에게 김은 휴가 겸 출장을 권한다. 기획자가 아니라 여행자가 되어 재난 상품을 검토해보라는 것이다.

 

 ‘재난이 한 세계를 뚝 끊어서 단층처럼 만든다면, 카메라는 그런 단층을 실감하도록 돕는 도구였다. 카메라가 찰칵, 하는 순간 그 앞에 찍힌 것은 이미 인물이나 풍경이 아니다. 시간의 공백이다. 때로는 지금 살고 있는 시간보다 짧은 공백이 우리 삶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요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모든 여행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출발선을 넘은 게 아닐까, 하고. 여행은 이미 시작된 행보를 확인하는 일일 뿐.’ 35쪽

 

 요나가 선택한 여행지는 ‘사막의 싱크홀’ 란 상품으로 베트남 남부의 무이라는 섬이다. 5박 6일의 일정으로 섬의 사막에 위치한 싱크홀을 둘러보고 홈스테이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더 이상 재난 지역이 아니었다. 재난을 이용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불편할 뿐이다. 요나는 일정을 마치고 공항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그만 일행과 헤어지고 만다. 신분증과 여권도 없이 무이로 돌아온다. 리조트 매니저는 요나가 정글의 직원임을 확인하고 무이를 위한 새로운 프로젝트를 부탁한다. 더불어 리조트와 무이를 지배하는 폴에 대해 들려준다. 요나가 여권도 역시 폴에게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주었다.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요나는 새로운 재난 시나리오를 만드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재난 여행을 준비할 때는 어느 각도로 칼을 들이대도, 누구나 감동하고 슬퍼할 만한 재난의 단면들이 나타나도록 고심해야 한다. 사람들의 동공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강렬한 이미지다.’ 145쪽

 

 요나는 새로운 재난 상품을 만들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럭이라는 청년의 도움을 받아 무이 곳곳을 둘러보던 요나는 그곳의 진짜 삶과 마주한다. 어디든 폴의 그늘에 있었다. 폴이 기획한 시나리오는 끔직했다. 무이의 개발을 위해 허위 재난을 만들면서 걸림돌이 되는 가난한 하층민인 수상 가옥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었다. 사막에 거대한 구멍을 파는 도구이자 재난으로 발생할  갖가지 사연의 희생자로 말이다. 누군가는 폴의 계획대로 이미 재난을 위해 죽었고, 곧 죽을 것이었다.

 

 ‘사람들은 과거형이 된 재난 앞에서 한없이 반듯해지고 용감해진다. 그러나 현재형 재나 앞에서는 조금 다르다. 이것이 재난임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해도 방관하거나, 인식하면서도 조장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싱크홀은 저편 사막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175쪽

 

 무이에서 재난은 곧 현실이었다. 어디 무이 뿐일까? 소설 속 직장이 정글이듯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작가는 우리의 삶을 정글이라 단정하고 이야기를 풀어낸 건 아닐까.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재난은 이미 현실에서 발생하고 있다. 긴 불황으로 이어진 청년 실업, 불안한 직장 생활, 거대 권력 앞에서 무너지는 소시민의 삶, 우리가 사는 곳이 무이와 다르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재난 여행이라는 독특하고 기발한 설정을 통해 윤고은이 말하고 싶었던 건 결국 우리 현실이 재난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난을 극복하는 일은 현실을 이겨내는 것이고, 재난으로부터 소중한 이들을 지켜는 일이다. 그것이 매우 어렵고 힘들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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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은 깊어가고 아침은 느리게 온다. 가장 춥다는 아침을 맞았다. 이제 점점 추워지는 날들만 남은 것일까. 찐 고구마를 먹는 날들이 많아졌다. 이유는 밥이 먹기 싫어서다. 고구마와 커피, 스카프를 두르는 아침,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날카로운 바람의 움직임이 들려온다.

 

 어제는 계획적이면서 충동적인 한 권의 책을 주문했고, 리스트는 우선은, 갖고 싶은 책이다. 1913 세기의 여름은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100년 전의 여름,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여름이 존재하는 책일까. 여하튼 갖고 싶다. 하성란의 웃는 얼굴을 표지로 쓴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 『카레 온 더 보더』, 영화로 화제가 된 코맥 매카시의 카운슬러, 김경집의 『인문학은 밥이다』, 조해진, 신해욱, 김미월의 여행기로 기대만발인『누구나, 이방인,많은 이들이 기다렸을 황정은의 두 번째 장편소설『야만적인 앨리스씨,가와이 간지의 데드맨매력적인 표지와 독특한 제목으로 내용이 더 궁금한 『하품은 맛있다,지인이 강력 추천한 『모든 것은 빛난다』를 담는다.

 

리스트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소설가 한강의 시집, 김 숨의 단편집.

 

 

 

 

 

 

 

 

 

 

 

 

 

 

 

 

 

 

 

 

 

 

 

 

 그리고, 이런 시들을 옮긴다.

 

 

 옛 가을의 빛 - 허수경 

 

 개들은 불안한 고독의 날개를 가진 나비를 쫓아다녔다

 저수지에 고인 물의 살 속으로 깊이 침입하던 바람은

 수초를 기슭으로 자꾸 보냈고

 하여 저수지 기슭에는 붉은 물풀들이 행려거지처럼 누워 있었다

 

 고추가 마르던 집 앞에서 빛은 고독한 매운내를 풍기며 앉아

있었다

 가지가 마르던 마당에 보라빛으로 고여들던 어둠은

 할머니가 피우는 담배연기 속으로 들어가 해맑은 죽음의 빛으

로 살아났다

 

 병아리가 종종거리는

 맨드라미가 붉은 손을 자꾸 흔드는

 그 마당에 가만히 앉아서 김칫거리를 다듬던 새댁의 눈 안에 고

인 눈물빛

 

 벙어리 소녀는 낡은 거울 앞에서

 낡은 결혼예복을 입어보았다

 결혼예복 속에는 원앙 두 마리가 낡은 금빛 자수에 안겨 있었다

 낡아가는 빛을 보면서 말을 할 줄 모르는 소녀가  수음을 했다

 

 우물에 기대어 먼 빛만 바라보았다

 묵직한 우울함이 우물에 가라앉은 빛이 될 때

 먼 산숲에서 핀 버섯이 가만가만 공기 속으로 돋아났고

 흙은 아렸다

 

 얼마나 무료한 나날들이 빛 속에 있는가

 그날 죽을 것 같은 무료함이 우리를 살게 했지, 아주 어린 짐승

의 눈빛 같은

 나날이었다

 

 

 갈색의 책 - 이제니 

 

 나 혹은 너는 나무숲에서 오래된 책 한 건을 발굴했다

 나무숲은 꼭 갈색일 필요는 없다 아주 희미한 갈색의 암

시 정도만

 먼지와 빛의 깊이를 지닌 고고학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해

두자

 

 누군가 경건한 얼굴로 문장을 읽어내려갔다

 행간과 행간은 지독히도 넓었고 침묵 또한 꼭 그만큼 벌

어졌다

 

 정말 가슴 아프게도 들리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소리내어 말할리 없잖아

 

 꿈에서 깼을 땐 단 하나의 단어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

 흔들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기억하는 얼룩과 네가 기억하는 얼룩

 흰 것 위에는 검은 것, 검은 것과 흰 것

 

 벌레 먹은 나뭇잎 구멍 사이로 오후 네시의 햇빛이 스러

지듯이

 보도블록 깨진 틈 사이로 모래알들이 쓸여들어가듯이

 

 누구든 좋으니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떨어져나간 겉장, 제목도 없는 책

 나는 일평생 나라는 책을 읽어내려고 안간힘 썼습니다

 

 갈색의 갈색의 갈색의 책

 

 무슨 말이든지 하세요 그러면 좀 나아질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침묵하는 법을 배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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