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의 세계 - 어느 알려지지 않은 차원과 그곳에서 온 기이한 생명체들에 대한 기록
유린 지음, 도밍 그림 / 고블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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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다른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 외계인이나 미확인 우주 물체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귀신 혹은 영혼이라고 하면 맞을까. 그들은 그들 나름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괴담을 넘어 기이하고 신비한 일이 일어나는 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니까. 다만 그들을 모른 척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니 여기 판타지를 넘어 호러와 공포 미스터리의 합체라 할 수 있는 『너머의 세계』는 낯설게 다가온다.


우선 책의 형식과 구성이 독특하다. 표지만 봐도 기묘하지 않은가. 그 수상함은 삽화로 더욱 증폭된다. 수년 전 웹에서 인기 있던 시리즈를 연재했던 작가 유린을 아는 이라면 반갑고 기대가 클 책이다. 단순한 공포 소설이 아닌 나폴리탄 괴담(출처를 알 수 없고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을 취재한 결과물이다. 방법은 다양하다. 전단지, 인터뷰, 일기, 녹취록 같은 증거들을 모아 사건을 상상하게 만든다. 목차도 침투, 사냥, 잠식으로 의심스럽다.






괴담이 발생하는 장소는 우리에 익숙하고 친근한 공간이다. 매일 등교하는 학교, 아파트, 극장, 서점, 놀이공원 같은 일상 공간에서 괴담은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 언제 생겼는지 모르는 아파트 복도의 표식, 안내문, 꼼꼼하게 읽지 않는 사용 설명서, 사실은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다는 게 가장 무섭다.


산장에서 사라진 손님,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자리를 이탈한 후 돌아오지 않은 학생, 영화관 B동 근무자가 긴급 호출 시 마주한 이상한 형체, A동의 이상한 소문, 한옥마을에서 반인반귀(半人半鬼)상태로 인간을 잡는 사냥하는 귀잡기 놀이, 입주민 봄 소풍에서 사라진 세대, 모든 게 의심스럽지만 사건의 정황이나 증거도 찾기 어렵다.


6층 8관에 대해 떠도는 소문은 사실이 아닙니다. 직원 여러분은 고객들에게 사실을 안내하시기 바랍니다. 상영관 내에서는 사망자 또는 실종자가 나온 적이 없습니다.


바닥 청결 상태를 점검하다 D11 좌석에서 물기 어린 발자국을 발견했다면 매점으로 가십시오. 매점에서 사탕을 받아 놓아둔다면 발자국은 사라질 것입니다. (54쪽, 「영화관 근무자를 위한 업무 매뉴얼」)


공식적인 관리자가 아닌 다른 이가 배포한 유인물, 존재하지 않는 호수,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존재, 무엇을 믿어야 할지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만약 그 공간에 내가 있다면 어떨까. 아니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런 순간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상한 산장 안내문을 발견했거나 특별한 서점에 방문했거나 새벽에 자꾸 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당장 그 공간을 벗어나는 게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공포가 스며든 몸은 통제 불가한 상태가 될 테니까.







세 번째 안내입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 아파트 복도나 중앙 현관에서 물웅덩이를 밟는 듯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라도 절대 다가가거나 직접 확인하려 하지 마십시오. 만일 우연히 그곳을 지난다 해도 절대 쳐다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아이 컨텍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 (131쪽, 「그 아파트의 축제」)


○○아파트에서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도대체 무엇이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을까요? 취재 팀은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계속 취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이 모든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길 바라며 오늘의 뉴스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63쪽, 「그 아파트의 축제」)


읽는 내내 불안과 긴장감이 더해지는 책이다. 뭔가 책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공포물을 좋아하는 이라면, 이미 나폴리탄 괴담을 즐기는 이라면 흠뻑 빠져들 책이다. 길고 지독한 여름이 끝나고 가을의 입구가 아닌 더위의 한복판에서 만났더라면 더 좋았을 책이다. 추리 스릴러의 계절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살짝 팁을 공개하자면 눈치가 빠른 이는 책 속의 모든 괴담이 연결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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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산책시키기 - 당신의 인생을 뒤바꿔 놓을 10가지 방법
벤 알드리지 지음, 김지연 옮김 / 혜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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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문제와 직면한다. 예상하고 대비했던 문제가 아니다. 어찌할 바를 모른다. 나만 그렇다고 여기지만 사실상 모두가 그렇다. 하나의 사건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이후가 달라진다. 우왕좌왕하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와 마음을 진정시키고 차근차근 해결을 찾아 나선 이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도 처음부터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모든 어려움에 맞서 보험을 들거나 각 분야의 전문가를 알고 있는 건 아니니까. 『바나나 산책시키기』의 저자 벤 알드리지도 다르지 않았다. 달랐다면 그는 스토아 철학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바나나 산책시키기』 란 호기심을 불러오는 제목의 이 책은 저자가 스토아 철학에 영감을 받아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들려주는 책이다. 어렵게 말하자면 스토아 철학 일상 적용이라 할 수 있고 쉽게 말하자면 주체적으로 삶을 이끄는 10가지 방법에 대한 안내서라 하겠다. 그러니 스토아 철학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버려도 좋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스토아학파는 외부 사건, 즉 우리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 대부분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생은 불확실하기에 우리가 그 결과를 좌지우지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자들은 외부 사건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우리는 나의 통제력과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에 집중함으로써 인생의 주도권을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46쪽)


저자가 소개한 ‘안티 버킷 리스트’는 스토아학파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살면서 꼭 해보고 싶은 리스트가 아닌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리스트가 안티 버킷 리스트다. 딴지를 거는 이가 있을 것이다. 버킷 리스트도 하기 어려운데 왜 안티 버킷 리스트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두려워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의 목록(아주 사소한 것들 - 벌레 만지기, 통화 포비아)를 하나씩 도전한다면 정복하지 않더라도 해보니 별거 아니라는 생각으로 살 수 있다. 인생의 주도권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주체적으로 삶을 이끄는 방법도 다르지 않다. 자발적 불편함 추구하기,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운명을 사랑하기, 스스로 돌아보기, 역할 모델을 찾기, 부정적인 상황도 염두에 두기, 내 마음을 통제하기, 상대하기 힘든 사람을 상대하기, 죽음을 생각하기, 우주적 관점 지니기로 10가지다. 저자는 10가지 항목을 소개하면서 각각 스토아철학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현재의 삶에 접목시킬 수 있도록 안내한다.


자발적 불편함 추구하기에 바로 책의 제목인 ‘바나나 산책시키기’가 등장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바나나 산책시키기’는 말 그대로 줄에 묶인 바나나를 산책시키는 일이다. 반려견과의 산책을 떠올리면 된다. 상상해 보라, 당신이 바나나를 산책시키고 있다면 얼마나 창피할까. 그러나 수치심을 깨뜨린 경험이 생긴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감이 생길게 분명하다. 거기다 자발적으로 물을 덜 마시거나 SNS와 단절하고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한다면 마음가짐이 달라질 것이다.


부정적인 상황도 염두에 두기는 뭘까. 부정적 시각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부정적 시작화란 하나의 일에 대해 발생할 수 있는 부정적인 일을 가상해서 대비하는 것이다. 저자는 암벽 등반가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등반 중 맞닥뜨릴 수 있는 잠재적 위험 요소를 상상하고 시뮬레이션 하는 일이다. 아마도 한 번쯤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운전을 처음 시작했을 때, 새로운 공간을 방문할 때 발생하는 위험 요소. 이런 연습은 실제로 부정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이 된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러니까 삶 자체에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한 감사를 생각하게 된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손가락 하나만 다쳐도 일상의 불편함은 크다. 그제야 지금껏 잊었던 손가락에 대한 고마움을 생각한다.


주체적으로 삶을 이끄는 10가지 방법 가운데 끌리는 것부터 먼저 만나도 좋다. 자신이 처한 현재 상황과 딱 맞는 주제가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막연하게 다가올 두려움에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인생은 얼마나 비참한가.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처럼 알고 있다고 다 내 것이 되는 건 아니다.


걸음을 멈추고 장미 향기를 맡아 보라. 인생은 언젠가 끝이 나고, 그럼 더 이상 피자를 먹을 수 없게 될 거란 걸 기억하라. 미래는 불확실성의 연속임을 기억하라. 그리고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지만, 괜찮다. 어떤 어려움에도 맞설 수 있는 힘이 있으며, 훈련을 통해 그 힘을 더욱 키울 수 있다. (351~352쪽)


아무리 좋은 방법을 알려주고 조언해도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다른 자기 계발서가 그렇듯 벤 알드리지가 스토아철학에서 발견한 내 삶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내 삶에 적용시켜 실천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이제 미루지 말자. 각자 삶의 주도권을 잡아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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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은 무엇일까. 눈을 감아봐야 알까. 아니면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일까. 어쩌면 마음의 평정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제목만 보고 잠언 비슷한 글이 아닐까 짐작했다. 제목 때문에 에밀 시오랑이 생각나기도 했다. 생에 마지막 2년의 기록을 담은 에세이로 모두 9편의 짧은 글을 만날 수 있다. 아내와 함께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1940년~1941년에 쓴 글을 읽으면서 소름이 돋았다. 신기하게도 그가 살아온 시대는 80년 전인데 마치 지금의 우리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사는 건 결국 다 같은 것일까.


그는 말한다. 절망과 비탄이 가득한 삶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실패와 좌절 대신 웃음과 사랑을 바라보며 그래야 한다고. 그래서 이 짧은 9편의 이야기는 아프면서도 위로받는 기분이고 냉철하면서도 뜨겁다. 맨 처음 만나는 「걱정 없이 사는 기술」은 물질만능주의를 살면서 항상 뭔가 부족하다고 여기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누가 봐도 초라한 행색의 청년 ‘안톤’은 가진 게 없다. 그러나 정작 안톤은 걱정이 없다. 자신이 가진 기술을 타인에게 나누고 돈이 아닌 필요한 것들로 받는다. 아름다운 순환이라고 할까. 필요한 만큼만 소유하면 그만이다. 그런 마음은 최악의 인플레 사태에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상을 공유하는 「나에게 돈이란」으로 연결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돌아보고 깨닫게 한다.


삶의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돈의 실패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우리는 비록 돈에 실패했지만, 삶의 용기와 기쁨을 잃지는 않았다. (「나에게 돈이란」, 42쪽)


3년은 편히 살 수 있는 거액의 돈뭉치를 내고 빈 오페라 티켓을 샀던 일을 결코 잊지 못할 거라는 슈테판 츠바이크. 석탄 부족으로 난방이 되지 않아 코트를 입고 따닥따닥 붙어 앉은 관람객. 음악가의 훌륭한 연주와 가수들의 아름다운 노래가 전하는 감동. 돈이 줄 수 없는 기쁨과 만족을 알려준다. 돈을 좇는 삶이 아니라 돈에서 자유롭고 돈이 아닌 삶의 가치를 생각하라고.


나는 돈의 주인이 아니고, 돈이 내 삶의 지배자가 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날의 경험을 통해 나는 지울 수 없는 교훈을 배웠다. 우리의 진정한 안전은 가진 재산에 있지 않고, 우리가 누구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달렸다. (「나에게 돈이란」, 44쪽)


존경하는 로댕의 작업실에 방문하고 그의 집에서 본 로댕의 놀라운 작업 열정에 반한 「영원한 교훈」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슈테판 츠바이크가 프랑스 혁명사를 읽다가 발견한 사소한 일화에 대한 것이다. 루이 16세가 콩코르드광장에서 처형되는 극적인 날, 광장과 지척인 센강에서 수많은 낚시꾼이 평소와 다르지 않게 낚시를 하고 있는 이야기. 슈테판 츠바이크의 통찰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지녀야 할 그것이다. 우리가 살고 만드는 역사. 삶이란 무엇이며 역사란 무엇인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역사를 진정으로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지금의 나는 모든 역사책이 센강의 낚시꾼에 관한 그날의 사소한 일화를 빼놓지 않고 다루기를 바란다. 우리는 현재 매일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센강의 낚시꾼」, 53쪽)


이 시대의 대다수는 역사가 아니라 언제나 오직 자신의 삶을 산다. (「센강의 낚시꾼」, 54쪽)


슈테판 츠바이크의 완벽한 문장으로 빛어낸 훌륭한 이야기는 짧고 강렬한 글에 담긴 심오한 울림은 오래 곁에 머문다. 그래서 한번에서 끝나지 않는다. 분량이 짧기도 했지만 좋아서 두번 읽게 된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을 읽으면서 히라오 마시히로의 『왜 그렇게 살아야 할까』가 생각났다. 닮은 듯한 제목 때문인지도 모른다. 산다는 건 다 같지만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니니 함께 살아가기 위한 규범과 도덕이 필요하다. 이것이 무너지면 사회를 혼란에 빠진다. 정의가 사라진 사회, 무질서한 사회를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학습했다고 할까. 그럼에도 우리 삶에서 적용하기란 쉽지 않다. ‘나’의 필요에 따라 다르게 적용될 수 있으니까.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는 윤리학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도덕과 윤리는 공기와도 같습니다. 눈에도 안 보이고, 있는 것이 당연하며, 딱히 고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공기가 없으면 우린 바로 죽을 것입니다. 도덕이 없으면 바로 죽지는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온전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반대로 지금 내가 인간으로서 온전히 살아가고 있다면 이미 우리 주변에는 도덕, 윤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할까』, 32~32쪽)


윤리는 무엇이며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 막연하게 다가오는 질문이다. 저자는 이 문제를 개인의 윤리는 자유, 사회의 윤리는 정의, 친밀한 관계의 윤리는 사랑이라는 기준으로 분류하여 강의한다. 윤리의 기본 원리를 12개이며 3개의 영역에서 세분화하여 4개로 설명한다. 정의와 윤리철학에 대해 이론적 내용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실험, 소설, 게임, 정치에서 어떻게 윤리가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가장 대표적이고 강렬한 사고실험은 이렇다. ‘버튼을 누르면 1억 엔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어디선가 모르는 사람이 죽는다면 버튼을 누르겠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처음에는 단순하게 1억 엔인데 누르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모른척할 수 있을까. 마음이 복잡해진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니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하면 다른 누군가가 버튼을 누르고 그 누군가의 죽음이 바로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나는 모두 개인이고 내 위치에서만 생각하면 끝나는 게임처럼 보이지만 그건 결국 나에게도 남에게도 좋지 않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 이것이 윤리이고 정의가 아닐까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상대도 할 수 있고 상대가 해도 되는 일은 나도 해도 된다는 것, 바로 상호성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혼자가 아닌 사회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관계는 무척 중요하다. 나 개인으로 존재하면 그만이라 여길 수 있지만 개인고 개인이 연결된 사회에서 개인은 나이면서 동시에 상대이고 결국은 우리라는 사실이다. 나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관계의 중요한 시작이라는 것이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명제다.


자유라는 것은 나에게는 권리가, 남에게는 의무가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서로에게 모두 해당하니 남에게는 권리가 나에게는 의무가 있다는 뜻도 됩니다. 나의 권리는 타인의 의무와 세트입니다. 의무를 지키면 나의 자유는 제한되지만, 그것은 나의 권리를 즉, 나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할까』,124쪽)


80년 전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에서 전하는 긍정과 사랑이 정의와 윤리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어디에 가치를 두어야 할까 하는 문제는 개인마다 다르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이 모인 사회의 윤리는 그럴 수 없다. 사회 윤리는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어야 하니까. 저자는 그것을 균형을 맞추는 일이라 말한다. 개인, 사회, 친밀한 관계에서 균형을 맞추는 일, 어렵지만 우리가 찾아야 하고 지켜야 할 것이다.


정의 자체가 윤리의 일부이며 사랑과 자유도 윤리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원했던 윤리는 이 모든 것들의 균형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것들 중에 하나가 튀어나와 균형을 잃지 않도록 방지하는 일입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할까』, 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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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11-12 1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시대의 사람들은 역사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삶을 산다‘ 구절에 공감이 됩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란 사람이 어떤 사람이지 궁금해 졌습니다. 자목련님의 좋은 글 감사 합니다. _()_

자목련 2024-11-13 16:07   좋아요 1 | URL
좋은 책이었어요. 현재의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게 신기했고요.

달자 2024-11-13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센느강 낚시꾼의 일화는 특히 많은 울림을 남기네요. 좋은 글 언제나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4-11-13 16:09   좋아요 0 | URL
다른 이야기도 좋았지만 말씀처럼 그 일화는 여운이 오래 남았어요.
 


집중력이 떨어진다. 속도도 떨어진다. 읽기, 쓰기, 어떤 일을 진행하는 속도. 모든 게 그러하다. 당연하다. 늙고 있으니까. 아니 이 늙음은 나에게만 한정된 것이다. 다른 이들은 그들의 속도와 집중력이 있으니까. 시간의 느림을 용납하지 않는다. 나의 속도와 상관없이 제 속도로 뚜벅뚜벅.


노란 은행잎이 가득하다. 가로수의 잎들이 누렇게 빨갛게 변한다. 곧 가을이 사라질 징조다. 입동이 지나면 바로 겨울이 올 것 같기도 하고. 옆집은 김장을 하려는지 어제 보니 문 앞에 파와 큰 대야가 가득하다. 김장철이 다가오고 있구나. 올해 배춧값은 어떤가. 김장을 직접 담그는 건 아니지만 항상 궁금하다.


계절은 계절대로 흐르고 나는 나대로 흐른다. 읽고 싶고 궁금했던 책을 샀다. 소설이다. 예소연의 단편집 『사랑과 결함』, 조해진의 장편 『빛과 멜로디』. 곧 읽겠지. 읽게 되겠지. 이주혜와 위수정의 소설이 궁금한데 위픽 시리즈는 살짝 주저한다. 중고로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성급한 마음을 접어두고.







여름 옷을 정리하면서 옷 몇 벌을 버렸다. 내가 좋아했던 티셔츠를 거리낌 없이 버리는 쪽으로 밀었다. 겨울 신발 하나 쓰레기봉투에 넣어 입구를 묶었다. 책도 몇 권 버렸다. 이런 단호함이 필요하다. 책은 더 큰 단호함이 필요하다. 가을이 가기 전에 책을 정리하자. 가을이 너무 빨리 가버려서 타이밍을 놓쳤다는 핑계는 대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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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4-11-06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드는 것의 가장 나쁜 점은 설렘의 상실인 것 같아요. 집나간 설렘을 함께 기다려요.

자목련 2024-11-06 15:08   좋아요 0 | URL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걸 설렘이 알아야 할 텐데요.
 
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조경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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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조경란의 소설을 읽으니 그의 첫 소설을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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