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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와 달빛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8
세르브 언털 지음, 김보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평점 :
인생의 한 시기가 남은 삶을 결정적으로 지배하기도 한다. 트라우마라고 부를 수도 있는 그것, 대부분 그 실체는 지독한 사랑이거나 상처다. 어떤 이는 추억이나 기억으로 간직하지만 어떤 이는 내내 같이 살아간다. 그것을 어떻게 견디고 받아들여 넘어가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20세기 헝가리를 대표하는 작가 세르브 언털의 『여행자와 달빛』 속 ‘미하이‘는 내내 같이 살아가는 인물이다. 현재에 충실하려고 안정된 중산층 삶에 안착하려고 ‘에르지’와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왔다. 하지만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에르지와 자신의 성향은 맞지 않고 뭔가 어긋나는 느낌이다. 그런데다 신혼여행지인 이탈리아 베네치아까지 자신을 찾아온 친구 때문에 기분이 상한다.
친구의 등장으로 미하이의 학창 시절이 소환된다. 미하이는 에르지에게 자신이 전부를 걸었던 친구 ‘터마시’와 그의 동생 ‘에바’, 그리고 성직자가 된 ‘에르빈‘와 보냈던 시간을 들려준다. 미하이 가족과는 다른 분위기의 터마시 가족, 배우가 되고자 했던 에바, 죽음을 갈망했던 터마시가 끝내 성공한 이야기. 미하이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현재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친구들과 보냈던 그 시간, 절정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던 시절, 터마시와 에바를 향한 감정들. 그들과 헤어졌다고 여겼지만 아니었다. 그런 생각에 휩싸였기 때문일까. 미하이는 에르지와 탄 기차가 아닌 다른 기차에 오른다. 조금 시간이 걸릴 뿐 에르지와 만날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미하이는 에르지에게 돌아가지 않고 친구들을 찾아 떠난다.
이제 소설은 신혼여행으로 시작했던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미하이의 생각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20대 청춘도 아닌 그의 행동을 방황이나 일탈로 볼 수 있을까. 미하이는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 에르지의 생각처럼 에바는 첫사랑이 맞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사랑한 에바, 자신은 사랑한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미하이의 기억 깊숙한 곳에 에바는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찾는 건 에르지 한 사람이었다. 아내 에르지는 미하이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미하이는 그런 아내에게 자신을 찾지 말라는 전보를 보내고 길을 떠난다.
여행자가 된 미하이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산악 도시에 도착하고 배회한다. 강풍과 추위에 지친 그 앞에 죽은 터마시의 환영이 보인다. 병원에서 눈을 뜬 미하이는 의사와 죽음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진다. 회복된 미하이는 그곳을 떠나야 하지만 경제적 문제가 있던 차 예술사를 공부하는 미국인 젊은 여성 ‘밀리센트’가 나타나 도움을 청한다. 그녀에게서 미하이는 방황하던 청춘 시절을 발견한다.
인간은 방황의 시기에 더욱 소심해지고 겁이 많아지며, 가장 좋은 기회를 잃어버린다. 이 때문에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 시절에 대한 회상은 영원히 남는다. (142쪽)
방황하던 시절로 여행하는 것, 그 회귀는 단지 시간을 옮기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것은 더 아래로 내려가야만 하는, 그리고 더 먼 과거, 자신의 개인사로 가야만 하는 계단일 뿐이다. 방황하던 시절은 그냥 쓸모없는 방황으로 채웠던 시간인 것처럼 낯선 여인은 항상 낯설 뿐. 그는 집으로, 낯설지 않는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 사람들……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세상 곳곳을 떠돌던 바람이 그들을 휩쓸어버렸다. (154~155쪽)
밀리센트는 자신과 함께 있기를 바랐지만 미하이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미하이에게 학창 시절 겪었던 어지러움과 발작 증상이 나타났고 의사에게 치료를 받다 ‘에바’와‘ 에르빈’으로 추정되는 이의 소식을 듣는다. 밀리센트에게 돈을 빌린 미하이는 에르빈이 있는 구비오로 향한다. 그리고 운명처럼 그곳에서 성직자가 된 에르빈을 만난다. 에바와 터마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만 그는 구체적인 답을 피한다. 성직자로 그 본분에 충실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와인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던 에르빈은 없었다.
“나는 이미 그 어떤 것도 그립지 않아.”
미하이는 에르빈을 이해하고자 했다. 이해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 아마도 그는 스스로 모든 것을 지운 듯했다. 실제로 에르빈은 모든 이와 단절해야 했고, 사람들 간에 감정의 싹이 틀 수 있는 뿌리마저 영혼으로부터 덜어냈다. 지금, 이제 고통스럽지는 않지만, 여기 버려둔 땅에 그는 머물고 있다. 메마르고 척박한 이 산에서…… (186쪽)
단호하게 말하는 에르빈과 과거에 매달려 질척거리는 미하이의 모습은 무척 대조적이다. 각자의 시간을 견디고 살아온 결과라고 할까. 그러니 미하이의 철없는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자신을 찾는 일,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혼여행에서 아내를 버리고 도망친 무책임한 남편,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이사로 재직한 아버지 회사에 닥칠 어려움을 모르는 아들이 분명하다. 도대체 그가 찾는 건 무엇일까. 첫사랑 에바를 향한 욕망, 죽음을 갈망하고 실현하기를 바라는 마음일까. 죽음을 갈망했던 미하이는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고서야 삶에 대한 의지를 찾는 미하이가 안타까우면서도 그를 이해하기란 어렵다.
이쯤에서 에르지를 떠올려보자. 그녀는 미하이를 찾고 기다리는 대신 프랑스 파리로 향한다. 혼자서 헝가리로 돌아갈 수는 없다. 파리에 있는 친구를 만나 그간의 사정을 전한다. 친구는 당장 이혼하라고 말하지만 에르지는 여러 상황을 고려해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는 전 남편, 시아버지의 사업에 투자한 돈, 그리고 미하이에 대한 자신의 마음. 그런 그녀에게 놀랍게도 베네치아에서 만난 미하이의 친구가 접근해 페르시아인를 소개한다. 미하이가 사기꾼이라 말했던 그는 에르지를 이용하려는 게 분명했다. 사고로 페르시아인과 단둘이 남겨진 에르지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다.
이탈리아 곳곳을 여행하는 기분, 대성당과 미술품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안겨주지만 복잡하고도 어려운 소설이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소설처럼 우리도 때로 현재에 처한 어려움을 피하려 과거로 도피한다. 그러나 결국엔 알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시간은 바로 현재라는걸. 둘로 시작했던 여행은 각자의 여행이 되었다. 동반자가 있어도 결국엔 혼자라는 게 인생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여행자의 삶을 선택하지 않는 한 여행은 출발지이자 도착지에서 끝난다. 다시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디로 갈지 어디서 끝날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삶이라는 여행 말이다.
살아남아야 한다. 폐허 속 들쥐처럼 그 또한 살아남을 것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것. 인간은 살아 있어야 항상 뭔가가, 여전히 뭔가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3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