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요 엄마
김주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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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란 말은 언제나 애달프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그저 듣기만 해도 가슴이 저린다. 영원히 내 편이라 믿었던 존재가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인정해야 했던 게 엄마의 죽음이다. 영원한 건 없지만 단 하나를 선택하라면 서슴없이 엄마를 선택할 것이다. 나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자식들이 그러할 것이다. 『잘 가요 엄마』는 그런 어머니에 대한 기록이며, 사모곡이다.

 

 소설은 주인공 ‘나’ 에게 새벽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시작한다. 병은 노모의 죽음은 예견되었던 것이다. 소식을 전하는 이부 동생도 애통함 보다는 그저 담담하다. 두 명의 남편을 두었지만 단 한 번도 행복하지 않았던 여자, 마음 속 가득찬 응어리를 누구에게도 풀어 놓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온 여자,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하여 자식을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지난 세월을 돌이켜본다.

 

 작가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어머니를 담아낸다. 일제강점기, 남편에게 버림 받고 홀로 자신을 키우는 가난한 어머니가 얼마나 고된 삶을 살았을지 알면서도 어머니에게 따뜻한 한 마디를 건네지 못했다. 오히려 그를 싫어하고 미워했다. 어머니는 하루종일 날품팔이를 하고 일만 하는데도 밥 한 끼 제대로 먹을 수 없었고, 월사금을 내지도 못했다. 그러니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외톨이로 지내야 했다. 방학 때마다 찾아가는 외삼촌댁에서나 혼자가 아니었다. 그곳엔 자신의 마음을 읽어주는 애숙이 누나가 있었다. 그러나 외삼촌의 중매로 어머니가 재혼을 하면서 동생이 태어나고 나는 더 겉돌았다.

 

 새아버지가 있었지만 여전히 일을 하는 건 어머니 몫이었다. 심지어 외삼촌 가족의 생계까지 어머니가 책임지고 있었다. 아무리 동생이라 해도 왜 어머니가 모두 책임져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원하지 않는 결혼을 앞둔 애숙이 누나를 야반도주 시키는 어머니가 이상했다.  어머니는 내가 잘못을 해도 호되게 꾸짖지 않고 언제나 죄인처럼 굴었다. 그런 어머니가 보기 싫어 집을 나온 후 연락을 끊고 지냈던 것이다. 어머니를 모시는 동생이 있었기에 경제적인 도움만으로 자식의 도리가 충분하다고 자위했던 것이다. 동생이 기억하여 들려주는 어머니의 인생은 오직 큰 아들만 향해 있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삶 어디에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 살아온 시간은 단 한 순간도 없었던 것이다. 한 평생 큰 아들을 그리워하면서도 그립다, 보고 싶다, 말 한 마디를 내뱉지 않았던 것이다. 그 숱한 회한의 시간과 화해할 수 있는 시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일흔이 넘은 나이를 살면서 어머니를 안쓰럽게 여기고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려 했던 적이 없었다. 때문에 소설은 애절하고 눈물겹다. 내 어머니, 내 할머니의 모습이 겹쳐져서, 서러운 세월을 홀로 감당해야 했던 한 여자의 기구한 운명이 서러워서 아프고 아프다.

 

 ‘무언가 그 깊이나 의미를 도저히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함이 주검의 얼굴에 묻어 있었다. 어머니의 표정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면서 죽음이 비참한 종말이 아니라는 듯 편안해 보였다. 그 표정은 지금까지의 삶이 오직 생존만 하는 하찮은 상태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뜻으로 보였다. 우리가 보통 삶이라고 부르는 것과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장벽도 없다는 것을 증거해 보이려는 듯했다.’ p. 58

 

 문득, 내가 기억하는 주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야윈 육체가 떠오른다. 어쩌면 어머니에게 온통 가시밭길로 이어졌던 삶을 벗어난 죽음은 평온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고 싶다. 어느 누구도 어머니의 삶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작가의 말처럼 말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살았다. 사람들로부터 유린당하고 희생당하면서도 그런 질곡과는 무관심한 채로 일생을 보냈다. 오히려 그 참혹한 공포심을 끌어안고 흡사 아무런 구애도 없었던 것처럼 그것이 자신의 것이든 혹은 남의 것이든 진솔하게 끌어안고 살았다. 드디어 어머니는 자신을 찾아온 죽음조차도 아무런 불평이나 두려움 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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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친밀하다란 말이 떠올랐다. 지내는 사이가 아주 친하고 가깝다란 뜻으로 같은 의미로 쓰이는 밀접하다, 허물없다란 말이 있다고 한다. 허물없는 사이, 밀접한 사이보다 친밀한 사이가 더 단단한 관계처럼 느껴진다. 해서 자꾸 친밀하다, 친밀하다, 라고 중얼거린다.

 

 내게 친밀한 당신들을 생각한다.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당신이 있다. 단 한 번도 목소리를 듣지 못한 당신이 있다. 문자를 주고 받고, 안부를 나누고, 때때로 일상이 궁금한 당신이 있다. 무언가를 공유하면서도 무언가는 공유할 수 없는 사이이기도 하다. 의도하지 않게 상처를 받고 예상하지 못한 감동을 받는다. 그러니까 때때로 서툴고 때때로 친밀한 사이인 것이다. 서툰 친밀감 말이다.

 

 한 단어를 생각할 때, 한 도시를 생각할 때, 한 권의 책을 생각할 때 저절로 내게로 다가오는 나의 당신들, 혹은 나만 아는 당신, 내가 알지 못하는 당신들!! 누군가는 낯설어서 더 설레기도 하고, 누군가는 낯익어서 더 반갑다. 그냥 이런 글을 쓰고 싶은 날이다. 그냥 이런 감정을 말하고 싶은 날이다.

 

 책도 그렇다. 익숙한 이름이라 반갑고, 낯선 이름이라 더 궁금하다. 남자 작가에 이어 여자들의 은밀한 수다가 시작되었다. 김이설, 한유주, 구경미의 이름이 반가운 테마 소설집 이브들의 아찔한 수다은 정말 표지부터 아찔하다. 킬 힐이라니, 부실한 체격으로 2cm 이상의 굽을 가질 수 없은 내게는 더욱 매혹적이다. 당연하게 남자 시인이라고 생각했던 김경후 시인은 여자였다. 그래서 더 좋다. 나는 여자를 더 좋아하니까. 열두 겹의 자정이란 제목은 더 좋다. 안도현의 시집 『북항도 나왔지만 나는 김경후에게 더 끌린다. 시는 어떨까, 분명 좋을 것이다. 계간지를 통해 보았지만 제대로 읽지 않은(나는 왜 계간지 장편을 읽지 못하는 것일까) 은희경의 장편소설 『태연한 인생은 과연 은희경다운 소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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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6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7 0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05-26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린 또 만나서 친밀..이제 운명인가 봐요..(막 이런다)

2012-05-27 0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30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30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출항 1 버지니아 울프 전집 17
버지니아 울프 지음, 진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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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절로 알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 감출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건, 누군가를 사랑할 때 오는 감정이다. 반면,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그건 역시 사랑이며, 결혼이다. 한 때 사랑하면 반드시 결혼해야 하고, 그럼 저절로 행복해 진다는 생각을 신념처럼 여겼었다. 사랑, 결혼, 행복을 하나로 보았던 시절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겨우 사랑, 결혼, 행복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았는데 버지니아 울프는 『출항』을 쓸 10대에 이미 알고 있었나 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원하고, 결혼을 꿈꾸고 행복한 삶을 욕망하는 것까지 말이다.

 

 소설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사업을 하는 아버지와 고모들의 손에 자란 스물 넷의 주인공 레이첼과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레이첼이 그녀의 가족과 지인이 동반한 여행지에서 소설가 지망생인 테렌스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하지만 열병에 죽는 과정을 다뤘다.

 

 버지니아 울프는 레이첼를 둘러싼 다양한 등장 인물을 통해 남성과 여성의 사고가 어떻게 다른지, 세대 간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보여준다. 어머니의 부재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오직 피아노만이 전부였던 그녀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건 외숙모 헬렌이다. 스물 넷이란 나이에 사랑에 대해 욕망에 대해 무지했던, 아니 경험하지 못한 채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만 살고 있는 조카에게 더 넓은 세상과 더 많은 사람과 교류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그녀는 산타 마리나의 빌라에서 지내면서 근처 호텔에 머문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 중 어떤 이는 노년의 삶을 즐기고 있었고, 어떤 이는 자유로운 연애와 혁명을 꿈꾸고 있었고, 어떤 이는 수재였고, 어떤 이는 소설가 지망생이었고 어떤 이는 사업가였다. 레이첼은 그들과 교류를 맺으며 자신이 떠나온 영국의 다른 삶을 알게 된다. 그런 조카를 보면서 헬렌은 레이첼이 누군가를 만나 변화하기를 바랐다. 아니, 젊은 남자와 연애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수재인 세인트와 소설가 지망생인 테렌스가 레이첼에게 다가왔고 그녀는 테렌스와 많은 대화를 나누며 마침내 그를 사랑하기에 이른다.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후 곧 약혼을 하고 결혼을 약속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레이첼이 열병으로 죽고 테렌스를 절망한다. 레이첼의 내면이 성장하고 서로를 채워주며 삶을 이어갈 동반자를 만났으므로 행복한 결말이었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레이첼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출항’의 뜻 그대로 기존의 곳을 떠나 자신의 내면을 찾아 나서는 행위를 더 떠나는 것에 의미를 두었던 것일까. 

  

 ‘그녀는 자기들이 다퉜던 것들을, 특히나 바로 그날 오후 헬렌에 관해 얼마나 싸웠는지를 상기했으며, 그들이 같은 집에 살고 함께 기차를 타며 서로 너무나 달라서 화를 내게 될 30년, 40년, 50년 동안 얼마나 자주 다투게 될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피상적이며, 눈과 입과 턱 아래서 진행되고 있는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삶은 그녀와 관련 없었으며 다른 모든 것과도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시, 비록 그녀가 결혼해서 30년, 40년, 50년을 그와 함께 살며, 그와 싸우고, 그와 아주 가깝게 있다고 할지라도, 그녀는 그에게서 독립적이었다. 그녀는 그 밖의 모든 것에서도 독립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인트 존이 말한 것처럼, 그녀가 이것을 이해하게 만든 것은 사랑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런 독립심, 이런 고요함, 이런 확실성을 그와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는 결코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이것 역시 사랑이었다. 그녀는 그 밖의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다.’

 

 소설은 어렵고 아름답다. 인물의 행동을 지속적으로 나열하고 배경을 자세히 묘사해 지루했지만 흡입력이 강하다. 그건 버지니아 울프의 섬세함 때문이다. 레이첼의 미묘한 심경을 묘사할 때 언제나 거대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함께 보여준다. 더불어 소설가 지망생인 테렌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시의 구절들은 소설을 돋보이는 역할을 한다.  

 

 철학적인 연애소설이며, 자아를 찾아 나선 성장소설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버지니아 울프는 다양한 인물을 통해 남성과 여성의 삶에 대해, 욕망과 결혼에 대해 말한다. 레이철에 통해 한 여성의 자아가 어떻게 확립되는지 보여준다. 아니, 미완의 생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헬렌의 말처럼 말이다. 생은 때때로 당혹스럽고, 때때로 놀라운 일들을 마주하고, 때때로 감탄하며, 때때로 절망하고 절망하면서 계속 살아 나가니 말이다.

 

 “결국, 비록 내가 레이첼을 꾸짖기는 하지만, 나 자신이 훨씬 현명하지는 않아. 물론, 나는 더 나이가 들었고, 거의 인생의 절반은 살았지만, 너는 이제 막 시작하고 있어. 그것은 당혹스런 일이지. ―때로는 실망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아마도 위대한 것들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발견할거야. ―아, 그래, 너는 확실히 그것이 흥미롭다는 것을 발견할거야. ―그리고 그렇게 계속 살아 나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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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밥을 먹은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커피와 싹을 잘라내고 구운 감자를 먹었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오늘, 언니가 심은 피망은 잘 자라고 있다. 피망에 물을 줄 때마다 집으로 돌아간 언니를 생각한다. 예전과 다르게 자주 다니러 오지만 그래도 생각난다.  

 

 

 

 

 

 

 

 

 

 

 어제는 언니가 심은 가지가 꽃을 피웠고 오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내년에는 피망 대신 토마토를 심어야 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언니가 심었다는 가지의 꽃을 떠올리니 유희경의 시집 『오늘 아침 단어』가 생각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시집에 ‘심었다는 작약’ 이란 제목의 시가 떠오른다.

 

  

 

 

 

 네가 심었다던 작약이 밤을 타고 굼실거리며 피어

나, 그게 언제 피는 꽃인지도 모르면서 이제 여름이

라 생각하고, 네게 마당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그게 아니면, 화분에다 심었는지 그 화분이 어떻게

허연빛을 떨어뜨리는지 아는 것도 없으면서 네가 심

은 작약이 어둠을 끌고 와 발아래서 머리 쪽으로 다

시 코로 숨으며 번지며 입에서 피어나고, 둥근 것들

은 왜 그리 환한지 그게 아니면 지금은 어떻게 설명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지도 않으면서, 봄은 이렇게 지

나고 다시 여름이구나 몸을 벽에 붙여보는 것이다 그

러니 작약이라니 나는 그게 어떻게 생긴 꽃인지도 모

르고 나도 아니고 너는 더구나 아닌 그 식물의 이름

이 둥그렇게 떠올라 나는 네가 심었다는 그것이 몹시

궁금하고 또 그런 작약이 마냥 지겨운 건 무슨 까닭

인지 심고 두 손을 소리 내어 털었을 네가, 그 꽃이.

심었다던 작약이 징그럽게 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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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내 손편지의 수신인이었던 너는 나쁜 소년이었다
내가 원하는 천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411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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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에 읽은 시와 아침에 읽은 시는 분명 같았다. 시를 읽는 눈과 마음이 달랐을 뿐이다. 차례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차분하게 읽는 대신 눈에 닿는 순서대로 시를 읽다가, 다시 차례대로 읽는다. 그러니 시라는 건 읽는다고 읽는 게 아니고 안다고 아는 게 아니며 이해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님이 분명하다.

 

 <나의 마다가스카르 1>

 ―세월 하나 지나갔다

 

  별자리가 천천히 회전을 하는 동안

  우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동안

 

  마다가스카르 항구에선

  이해하지 못했던 노래가 가슴을 치고

  사랑 하나, 서서히 별똥으로 떨어진다

 

  나는 투항했던가

  감당 안 되는 빗물이 길을 막아버린 오늘

  나는 마다가스카르에 투항했는가

 

  젖은 그물에 엉켜 죽어가는 펠리컨을 보며

  비틀스의 해산을 떠올렸다

 

  항구에서의 세월

  나의 마다가스카르에선 세월과 친해질 수 없다

 

  오늘 또

  뼈만 남은 노인이 폐지를 실은 리어카를 끌고

  들짐승처럼 소리 없이 등 뒤를 지나갔다

 

  마다가스카르의 어느 날

  세월 같은 게 하나 지나갔다

 

 허연의 시를 읽으면서 허물어지는 감정을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내 나이가 괜히 고마웠다. 어린 왕자 속 바오밥나무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던 마다가스카르에서 한 세월을 본다. 몸이 부서질 듯 매달렸던 그 무언가가 지나간 세월 말이다. ‘세월 같은 게 하나 지나갔다’ 란 구절은 최승자의 이런 시를 찾게 만든다.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세월이 있었다 / 한 사막이 있었다 //그 사막 한가운데서 나 혼자였었다 / 하늘 위로 바람이 불어가고 / 나는 배고팠고 슬펐다 // 어디선가 한 강물이 흘러갔고 (그러나 바다는 넘치지 않았고) // 어디선가 한 하늘이 흘러갔고 (그러나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 한 세월이 있었다 // 한 사막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시는 하염없이 나를 무너지게 만든다. 어떤 대단한 생이 아닌 그저 밥을 먹고 사는 일이, 살아내는 일이 버거워서 분노하면서도 끼니마다 뜨거운 밥을 차리는 슬픈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먹어야 사는 저주는 생의 어느 순간에서든 균일하다’ 라니, 이 군더더기 없이 생을 정리하는 표현에 목이 메인다.

 

 <역류성 식도염>

 

  어떤 처량함이 있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밥 알

 갱이들이 한 알 한 알 조개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자꾸 집중하다 보면 손이 움직이고, 입이 열리고, 밥

 알갱이들이 어두컴컴한 통로로 쏟아져 들어가는 일이

 마치 석탄을 파내서 트럭에 싣는 일 같기도 하고, 불

 구덩이 위에 뿌리는 일 같기도 하다. 이 동작을 반복

 하다 울컥하는 순간이 있다. 밥을 퍼 넣는 손이 포클

 레인처럼 보이는 너무나 슬픈 순간이 있다. 손에 피

 가 돌지 않는 그런 순간이 있다.

 

  나의 식도는 자주 막힌다. 막힌 통로에 적당한 시

 간 차를 두고 뭔가를 털어 넣어야 하는 건 아주 오래

 된 저주다. 먹어야 사는 저주는 생의 어느 순간에서

 든 균일하다. 이빨 하나 남지 않은 입을 오물거리며

 감당하기 힘든 크기의 수저를 빨고 있는 노인네를 볼

 때마다 나는 그 입가의 조개껍질 같은 주름을 저주했

 다. 먹다가 생긴 주름.

 

 <천국은 없다>

 

  사랑은 하필 지긋지긋한 날들 중에 찾아온다. 사랑

 을 믿는 자들. 합성섬유가 그 어떤 가죽보다 인간적

 이라는 걸 모르는 자들. 방을 바꾸면 고뇌도 바뀔 줄

 알지만 택도 없는 소리다. 천국은 없다.

 

  사랑이 한때의 재능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인

 간에게 아주 빨리 온다. 신념은 식고 탑은 무너진다.

 무너지는 건 언제나 상상력을 넘어선다. 먼지 휘날리

 는 종말의 날은 생각보다 아주 짧다. 다행히 지칠 시

 간은 없다.

 

  탑의 기억이 사라질 즈음

  세상엔 새로운 날이 올 것이다.

  지긋지긋한 어떤 날이.

 

  <편지>

 

  적어놓은 건

  반드시 벌로 돌아온다

 

  밤새 쓴 편지를

  감히 다시 볼 수 있는 자는 많지 않다.

  세상에 모든 편지에는 죄가 많아

  인간은 밤새 적은 편지에

  초라해진다

 

  편지를 받는 모두는 십자가에 매달린다

 

  적어놓은 것이니

  세상에 남는 법

  적은 자들은 늘 외롭고

  벌을 받는다

  적어놓은 죄, 기록한 죄

  편지는 오늘도 십자가에 내걸린다.

 

  적은 자의 하루는 슬프고

  내걸린 편지는 세상의 어느

  호리병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남겨진다

  편지를 쓴 죄

  그리움 같은 것을 적은 죄

 

 먹고 사는 일의 버거운 가운데도 우리는 사랑을 갈구한다. 그렇다. 하필 지긋지긋한 날들 중에 사랑이 찾아오고 그리움과 연민이 쌓여가고 무언가를 꿈꾸게 만든다. 아니, 사랑이라는 게 지긋지긋한 날을 변화시킨다고 어리석은 믿음을 키운다. 사랑이 있던 날도, 사랑이 사라진 날도 그저 지긋지긋한 어떤 날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같은 일들을 반복하고 반복한다. 보낼 수 없는 편지를 쓰는 일, 다시 읽을 수 있는 용기조차 사라져 버린 날들, 그럼에도 벌을 받을 각오로 기록을 멈추지 않는 밤을 우리는 기억한다. 어쩌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지긋지긋한 날들을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방법이 아니겠는가.

 

  <내가 원하는 천사>

 

  천사를 본 사람들은

  먼저

  실망부터 해야 한다.

 

  천사는 바보다.

  구름보다 무겁고,

  내 집게손가락의 굳은살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천사는 바보이고

  천사는 있다.

 

  천사가 있다고 믿는

  나는

  천사가 비천사적인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상상해왔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천사를 떠올린다.

 

  본드 같은 걸로 붙여놓았을 날개가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낭패를 당한 천사.

  허우적거리다

  진흙탕에 처박히는 천사.

 

  진흙에 범벅되는 하얀 인조 깃털

  그 난처한 아름다움.

 

  아니면

  야간 비행 실수로

  낡은 고가도로 교각 끝에

  불시착한 천사

 

  가까스로 매달린 채

  엉덩이를 내보이며

  날개를 추스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아니면

  비둘기 똥 가득한

  중세의 첨탑 위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측은하게 지상을 내려다보는

  그 망연자실.

 

  내가 원하는 천사다.

 

 사랑뿐 아니라, 우리의 생은 누군가에게 혹은 무언가에게 빚이 있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시를 통해 그 빚을 갚고 싶은 건 아닐까. 이렇게 귀여운(주관적인 느낌이다)시를 써준 그가 고맙다. 누구나 고귀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떠오를 천사를 그만의 언어로 현실감 있게 등장시켰으니 말이다. 잡을 수 없고, 만날 수 없다고 믿은 천사를 우리는 쉽게 만날 수 있게 될 것 같다. 어쩌면 우리의 가까운 곳에 천사는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우리는 이미 천사와 밥을 먹고, 천사와 수다를 떨고, 천사와 친구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만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진 울적하면서도 유쾌한 이 시가 좋다. 시인의 의도는 다를지라도 나는 좋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란 시집에서 언제나 나를 붙잡았던 시는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였다. 이 시집 『내가 원하는 천사』에서 나를 울먹이게 하는 시는 바로, 이 시다. 덧칠하면서 사는 나이를 나는 알 것 같다. 칠해진 색들 위에 다시 무언가를 칠하지만 원하는 색을 만들 수 없다는 어떤 좌절감, 어떤 절망감을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이라는 하루를 시작하면서 덧칠을 한다. 덧칠을 하는 하루를 지내고 늘어나는 두께만큼 욕망은 줄어들고, 지긋지긋한 어떤 날들 중의 하루 뿐인 오늘도 서글프게 흘러간다.

 

 <덧칠>

 

  덧칠하면서 사는 나이다. 낡은 목선에 켜켜이 붙어

 있는 페인트의 두께에서 어떤 절지동물 사체들이

 혀 있는 굴곡이 보인다. 기생하면서 살아온 것들, 고

 래와 목선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들, 그 위에 덧칠된

 울퉁불퉁한 굴곡들. 뜨거운 게 치밀어 올라온다. 난

 오늘 덧칠을 시작했다.

 

  목선에 들러붙은 지독한 것들에게. 온몸이 가려워

 지는 그들의 생존 방식에 대해 짠물에도 살아남은 그

 들의 묵묵한 인내에 경배한다. 하나하나의 이름은 모

 른다. 하지만 진화에서 빗겨 나간 과묵함이 눈물을

 핑 돌게 하는 풍경임은 분명하다. 나는 얼마나 작은

 가. 숨죽이며 발목을 잡는 건 자책이다. 짠물에 씻겨

 나가지 않은 사체의 세월이 나의 노래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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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2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2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05-25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을 사면 모든 시가 다 좋지 않잖아요? 이 시집도 자목련님이 올려주신 시가 좋아서 사고 싶다 하다가 이게 다일 거야 이러고 말아요. 시집 잘 안 사거든요. 생각해보니까 시를 읽지 않아서 내가 말이 많구나..( '') 이런 생각이 들어요. orz

자목련 2012-05-25 12:44   좋아요 0 | URL
음, 이런 비교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가수의 테입(그러니가 시디가 아닌)을 사는 거랑 비슷한 것 같아요.
모든 노래가 좋지는 않지만 그를 좋아하니까 아무렇지도 않았거든요.
시도 그런 것 같아요. 모든 시를 다 좋아하지도 않고 많은 시인들을 알지도 못하지만 말이에요.

비가 보고 싶은 날이에요. 더워지고 있으니, 바다고 보고 싶고.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는데도 바다를 보는 일은 어려워요. 아이리시스님의 바다는 어떤가요? 잘 지내나요? (좀 이상한 질문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