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내 손편지의 수신인이었던 너는 나쁜 소년이었다
내가 원하는 천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411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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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에 읽은 시와 아침에 읽은 시는 분명 같았다. 시를 읽는 눈과 마음이 달랐을 뿐이다. 차례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차분하게 읽는 대신 눈에 닿는 순서대로 시를 읽다가, 다시 차례대로 읽는다. 그러니 시라는 건 읽는다고 읽는 게 아니고 안다고 아는 게 아니며 이해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님이 분명하다.

 

 <나의 마다가스카르 1>

 ―세월 하나 지나갔다

 

  별자리가 천천히 회전을 하는 동안

  우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동안

 

  마다가스카르 항구에선

  이해하지 못했던 노래가 가슴을 치고

  사랑 하나, 서서히 별똥으로 떨어진다

 

  나는 투항했던가

  감당 안 되는 빗물이 길을 막아버린 오늘

  나는 마다가스카르에 투항했는가

 

  젖은 그물에 엉켜 죽어가는 펠리컨을 보며

  비틀스의 해산을 떠올렸다

 

  항구에서의 세월

  나의 마다가스카르에선 세월과 친해질 수 없다

 

  오늘 또

  뼈만 남은 노인이 폐지를 실은 리어카를 끌고

  들짐승처럼 소리 없이 등 뒤를 지나갔다

 

  마다가스카르의 어느 날

  세월 같은 게 하나 지나갔다

 

 허연의 시를 읽으면서 허물어지는 감정을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내 나이가 괜히 고마웠다. 어린 왕자 속 바오밥나무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던 마다가스카르에서 한 세월을 본다. 몸이 부서질 듯 매달렸던 그 무언가가 지나간 세월 말이다. ‘세월 같은 게 하나 지나갔다’ 란 구절은 최승자의 이런 시를 찾게 만든다.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세월이 있었다 / 한 사막이 있었다 //그 사막 한가운데서 나 혼자였었다 / 하늘 위로 바람이 불어가고 / 나는 배고팠고 슬펐다 // 어디선가 한 강물이 흘러갔고 (그러나 바다는 넘치지 않았고) // 어디선가 한 하늘이 흘러갔고 (그러나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 한 세월이 있었다 // 한 사막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시는 하염없이 나를 무너지게 만든다. 어떤 대단한 생이 아닌 그저 밥을 먹고 사는 일이, 살아내는 일이 버거워서 분노하면서도 끼니마다 뜨거운 밥을 차리는 슬픈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먹어야 사는 저주는 생의 어느 순간에서든 균일하다’ 라니, 이 군더더기 없이 생을 정리하는 표현에 목이 메인다.

 

 <역류성 식도염>

 

  어떤 처량함이 있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밥 알

 갱이들이 한 알 한 알 조개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자꾸 집중하다 보면 손이 움직이고, 입이 열리고, 밥

 알갱이들이 어두컴컴한 통로로 쏟아져 들어가는 일이

 마치 석탄을 파내서 트럭에 싣는 일 같기도 하고, 불

 구덩이 위에 뿌리는 일 같기도 하다. 이 동작을 반복

 하다 울컥하는 순간이 있다. 밥을 퍼 넣는 손이 포클

 레인처럼 보이는 너무나 슬픈 순간이 있다. 손에 피

 가 돌지 않는 그런 순간이 있다.

 

  나의 식도는 자주 막힌다. 막힌 통로에 적당한 시

 간 차를 두고 뭔가를 털어 넣어야 하는 건 아주 오래

 된 저주다. 먹어야 사는 저주는 생의 어느 순간에서

 든 균일하다. 이빨 하나 남지 않은 입을 오물거리며

 감당하기 힘든 크기의 수저를 빨고 있는 노인네를 볼

 때마다 나는 그 입가의 조개껍질 같은 주름을 저주했

 다. 먹다가 생긴 주름.

 

 <천국은 없다>

 

  사랑은 하필 지긋지긋한 날들 중에 찾아온다. 사랑

 을 믿는 자들. 합성섬유가 그 어떤 가죽보다 인간적

 이라는 걸 모르는 자들. 방을 바꾸면 고뇌도 바뀔 줄

 알지만 택도 없는 소리다. 천국은 없다.

 

  사랑이 한때의 재능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인

 간에게 아주 빨리 온다. 신념은 식고 탑은 무너진다.

 무너지는 건 언제나 상상력을 넘어선다. 먼지 휘날리

 는 종말의 날은 생각보다 아주 짧다. 다행히 지칠 시

 간은 없다.

 

  탑의 기억이 사라질 즈음

  세상엔 새로운 날이 올 것이다.

  지긋지긋한 어떤 날이.

 

  <편지>

 

  적어놓은 건

  반드시 벌로 돌아온다

 

  밤새 쓴 편지를

  감히 다시 볼 수 있는 자는 많지 않다.

  세상에 모든 편지에는 죄가 많아

  인간은 밤새 적은 편지에

  초라해진다

 

  편지를 받는 모두는 십자가에 매달린다

 

  적어놓은 것이니

  세상에 남는 법

  적은 자들은 늘 외롭고

  벌을 받는다

  적어놓은 죄, 기록한 죄

  편지는 오늘도 십자가에 내걸린다.

 

  적은 자의 하루는 슬프고

  내걸린 편지는 세상의 어느

  호리병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남겨진다

  편지를 쓴 죄

  그리움 같은 것을 적은 죄

 

 먹고 사는 일의 버거운 가운데도 우리는 사랑을 갈구한다. 그렇다. 하필 지긋지긋한 날들 중에 사랑이 찾아오고 그리움과 연민이 쌓여가고 무언가를 꿈꾸게 만든다. 아니, 사랑이라는 게 지긋지긋한 날을 변화시킨다고 어리석은 믿음을 키운다. 사랑이 있던 날도, 사랑이 사라진 날도 그저 지긋지긋한 어떤 날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같은 일들을 반복하고 반복한다. 보낼 수 없는 편지를 쓰는 일, 다시 읽을 수 있는 용기조차 사라져 버린 날들, 그럼에도 벌을 받을 각오로 기록을 멈추지 않는 밤을 우리는 기억한다. 어쩌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지긋지긋한 날들을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방법이 아니겠는가.

 

  <내가 원하는 천사>

 

  천사를 본 사람들은

  먼저

  실망부터 해야 한다.

 

  천사는 바보다.

  구름보다 무겁고,

  내 집게손가락의 굳은살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천사는 바보이고

  천사는 있다.

 

  천사가 있다고 믿는

  나는

  천사가 비천사적인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상상해왔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천사를 떠올린다.

 

  본드 같은 걸로 붙여놓았을 날개가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낭패를 당한 천사.

  허우적거리다

  진흙탕에 처박히는 천사.

 

  진흙에 범벅되는 하얀 인조 깃털

  그 난처한 아름다움.

 

  아니면

  야간 비행 실수로

  낡은 고가도로 교각 끝에

  불시착한 천사

 

  가까스로 매달린 채

  엉덩이를 내보이며

  날개를 추스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아니면

  비둘기 똥 가득한

  중세의 첨탑 위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측은하게 지상을 내려다보는

  그 망연자실.

 

  내가 원하는 천사다.

 

 사랑뿐 아니라, 우리의 생은 누군가에게 혹은 무언가에게 빚이 있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시를 통해 그 빚을 갚고 싶은 건 아닐까. 이렇게 귀여운(주관적인 느낌이다)시를 써준 그가 고맙다. 누구나 고귀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떠오를 천사를 그만의 언어로 현실감 있게 등장시켰으니 말이다. 잡을 수 없고, 만날 수 없다고 믿은 천사를 우리는 쉽게 만날 수 있게 될 것 같다. 어쩌면 우리의 가까운 곳에 천사는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우리는 이미 천사와 밥을 먹고, 천사와 수다를 떨고, 천사와 친구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만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진 울적하면서도 유쾌한 이 시가 좋다. 시인의 의도는 다를지라도 나는 좋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란 시집에서 언제나 나를 붙잡았던 시는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였다. 이 시집 『내가 원하는 천사』에서 나를 울먹이게 하는 시는 바로, 이 시다. 덧칠하면서 사는 나이를 나는 알 것 같다. 칠해진 색들 위에 다시 무언가를 칠하지만 원하는 색을 만들 수 없다는 어떤 좌절감, 어떤 절망감을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이라는 하루를 시작하면서 덧칠을 한다. 덧칠을 하는 하루를 지내고 늘어나는 두께만큼 욕망은 줄어들고, 지긋지긋한 어떤 날들 중의 하루 뿐인 오늘도 서글프게 흘러간다.

 

 <덧칠>

 

  덧칠하면서 사는 나이다. 낡은 목선에 켜켜이 붙어

 있는 페인트의 두께에서 어떤 절지동물 사체들이

 혀 있는 굴곡이 보인다. 기생하면서 살아온 것들, 고

 래와 목선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들, 그 위에 덧칠된

 울퉁불퉁한 굴곡들. 뜨거운 게 치밀어 올라온다. 난

 오늘 덧칠을 시작했다.

 

  목선에 들러붙은 지독한 것들에게. 온몸이 가려워

 지는 그들의 생존 방식에 대해 짠물에도 살아남은 그

 들의 묵묵한 인내에 경배한다. 하나하나의 이름은 모

 른다. 하지만 진화에서 빗겨 나간 과묵함이 눈물을

 핑 돌게 하는 풍경임은 분명하다. 나는 얼마나 작은

 가. 숨죽이며 발목을 잡는 건 자책이다. 짠물에 씻겨

 나가지 않은 사체의 세월이 나의 노래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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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2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2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05-25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을 사면 모든 시가 다 좋지 않잖아요? 이 시집도 자목련님이 올려주신 시가 좋아서 사고 싶다 하다가 이게 다일 거야 이러고 말아요. 시집 잘 안 사거든요. 생각해보니까 시를 읽지 않아서 내가 말이 많구나..( '') 이런 생각이 들어요. orz

자목련 2012-05-25 12:44   좋아요 0 | URL
음, 이런 비교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가수의 테입(그러니가 시디가 아닌)을 사는 거랑 비슷한 것 같아요.
모든 노래가 좋지는 않지만 그를 좋아하니까 아무렇지도 않았거든요.
시도 그런 것 같아요. 모든 시를 다 좋아하지도 않고 많은 시인들을 알지도 못하지만 말이에요.

비가 보고 싶은 날이에요. 더워지고 있으니, 바다고 보고 싶고.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는데도 바다를 보는 일은 어려워요. 아이리시스님의 바다는 어떤가요? 잘 지내나요? (좀 이상한 질문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