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의 인문학
한귀은 지음 / 한빛비즈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인문학이라는 말은 어렵다. 매 순간 철학적 사유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건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잘 몰라서, 혹은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한귀은은 이런 마음을 알아차린 듯 일상에 스며든 인문학에 대해 말한다. 그러니까 이 책 모든 순간의 인문학 은 철학적이거나 지루하지 않다. 물론 아주 재미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저 누구나 한 번쯤 맞닥들인 감정들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그로 인해 깊게 파인 마음의 구덩이를 채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를 인정하고, 긍정하는 힘을 키워 관계까지 확장시킨다면 삶은 달라질 거라 말한다. 그게 바로 인문학이라는 거다.

 

 ‘어쩌면 사는 일은 자신을 긍정하는 일이다. 우리 시대에 자신을 긍정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일터에서, 학교에서, 하물며 운전을 하거나 길을 걷다가도 비난을 받는다. 미니홈피나 어쩌다 단 댓글에 대해서도 비판을 당한다. 그런 비난과 비판은 이 세계 전체가 경쟁체제이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그러니 비난은 다반사고 자기 긍정은 힘겹다. 그러므로 칭찬이 필요하다. 이 시대의 칭찬은 단지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한 일시적인 처방이 아니라 우리를 존재에 대해 긍정으로 이끌고 특별한 관계를 만드는 힘이 있는 언어다.’ 121쪽

 

 책은 크게 5가지 <사랑이 사유로 반짝이는 순간>, <나에게서 낯선 행복을 발견하는 순간>, <고독이 명랑해지는 순간>, <상처가 이야기로 피어나는 순간>, <우리가 기꺼이 환대할 순간>로 나눠 우리의 삶을 들여다본다. 사랑, 행복, 고독, 상처, 죽음(늙음)이란 주제로 대신할 수 있겠다. 저자는 자신이 읽은 책, 감상한 드라마와 영화, 음악을 우리의 삶에 대입한다. 그녀가 소개하는 그것들이 모두 인문학에 관련된 건 아니다. 『고독한 군중』 , 욕망 이론, 시간과 타자란 책처럼 제목도 생소하지만  친절한 금자씨, 러브 액츄얼리, 거짓말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책엔 밥 먹고, 일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자괴감에 빠지고, 한 번씩 악몽에 빠지거나 늙음을 두려워하는 누구나의 일상이 담겼다. 일상의 기록이나 나열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막장 드라마나, 로맨틱한 영화를 보는 일, 목욕탕에서 익명의 누군가를 옹호하거나 비난하는 일이, 수다가 아니라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은 신선하다. 그런 일들로 인해 인문학은 일상으로 스며들 것이다.

 

 ‘나는 아줌마들이 ‘드라마 폐인’ 에서 ‘드라마 - 인문 - 폐인’ 이 되기를 바란다. 찜질방이나 찻집에서 드라마에 대한 담론을 펼치면서 삶을 다양하게 해석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여주인공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주위의 남자들을 품평하는 즐거움도 누리면서, 은밀하게 자기 자신의 욕망과 콤플렉스와 사랑을 떠올려보았으면 좋겠다.’ 194쪽

 

 책이 어렵지 않게 다가오는 건 저자의 솔직함에 있다. 그녀는 자신의 외모, 가족, 상처, 실패 등 사적인 감정들을 들려준다. 장녀로서의 부담감, 똑똑하지도 잘나지도 못해서 겪는 좌절감, 술로 견뎠던 시절들의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는 책과 더 가까워진다. 우리의 삶이 거대한 사건으로만 이뤄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스스로가 봉인했던 어떤 기억이나, 순간을 떠올리고 생각하게 만든다.

 

 삶은 어떤 감정들이 발생하여 상쇄되는 과정의 반복이다. 다른 듯하지만 같은 감정에 상처 받고, 관계는 힘들다. 그 감정에 매몰된다면 삶을 지루하고 불행할 것이다. 그러나 책에서 말하듯 다른 시선에서 마주 보기, 인문학적으로 접근한다면 삶은 다른 얼굴로 빛날지도 모른다.  ‘젊다’ 를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로 정의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을 새롭게 정의한다면 어떨까?

 

 ‘서른에도, 마흔이 넘어도, 예순이 되어도, 사랑이란 건 언제나 젊다. ‘젊다’는 어떤 형태를 나타내는 형용사가 아니다. 젊다는 것은 설렘과 실수의 반복으로 구성되는 동사다. 끊임없는 행동과 그 행동에 맞먹는 적극적인 후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려들 수밖에 없는 근성으로 이루어진, 움직이는 동사인 것이다. 그리하여 ‘젊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젊음’이고‘ 청춘의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는 청춘’이다.’ 35~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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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에 잘 지낸다는 L의 문자를 받았다. 잘 지내냐는 물음에 나도 잘 지낸다고 답을 보냈다. 잘 지낸다는 말로, 우리는 긴 이야기를 생략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복잡한 나날의 연속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피곤하고 고단한다. 서늘하거나 강렬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여름과 맞닿은 날들, 어떤 사람은 휴가를 준비할 것이고, 어떤 이는 장마를 걱정할 것이다.

 

 나른한 오후다. 책을 펼치다 졸음으로 빠져들 오후다. 그전에 이런 책으로 감기는 눈을 세운다. 궁금한 책들이다. 기다렸다고 말해야 한다, 제임스 설터의 장편 『가벼운 나날』을 말이다. 서늘한 기운이 전해져서 좋다. 자칫 무거운 나날이 될 여름에 필요한 제목이 아닐까. 단편집 『어젯밤』을 읽은 이라면 『가벼운 나날』이 매우 반가울 것이다. 여름처럼 강렬한 제목, 『미친 사랑』속 사랑은 얼마나 치명적일까. 내겐 시인으로만 각인된 심보선의 『그을린 예술』은 분명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궁금하다.

 

 

 

 

 

 

 

 

 

 

 

 

 

 

 

 

 

 

 

 

 이제 읽은 책과 읽고 있는 책이다. 피카소에 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피카소 월드』는 흥미로운 책이다. 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피카소의 작품과 그의 개인적인 사진이 함께 담겼다 - 그의 그림과 조각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장가치가 충분한 책이라 생각한다.) 『이별 리뷰』로 만난 한귀은의 『모든 순간의 인문학』은 영화, 책, 일상에 대한 인문학이다. (이제 읽기 시작했다.) 날씬한 여자의 뒷모습을 표지로 내세운 『프랑스 남자들은 뒷모습에 주목한다』는 프랑스와 프랑스 사람을 탐구한 책이다. 그들의 문화, 사고방식, 관습을 통해 프랑스를 말한다.

 

 

 

 

 

 

 

 

 

 

 

 

 

 

 

 

 

 

 책장을 정리한다. 그러니까, 읽은 책과 읽지 않은 책, 읽을 예정인 책들로 나눈다. 책들의 자리를 바꾸면서 잊고 있던 책들과 만난다. 어떤 책은 다시 훑어보다 같은 구절에서 멈추고, 어떤 책에선 처음 만난 듯 낯선 구절을 메모한다. 여름, 강렬한 날들로 채워지겠지만 그 속에 숨은 서늘한 날들을 기다린다. 나른한 오후는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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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9 23: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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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1 08: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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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9 23: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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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 노재희 소설집
노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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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존재함과 동시에 누군가와 마주한다. 혼자가 아닌 세상에 합류한 것이다. 나 아닌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고독을 갈망한다. 부모와 지낸 어린 시절에도, 친구가 제일이었던 학창 시절에도, 사랑하는 이를 만났어도 혼자 만의 시간을 꿈꾼다. 우리가 꿈꾸는 궁극적인 고독은 나와 마주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노재희의 소설집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에는 고독을 꿈꾸는 이들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가족과 지인과의 단절이 아닌 진정한 고독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고독의 발명>은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엄복태의 이야기다. 그는 든든한 직장에 다니고 아내와 아이가 있는 누가 봐도 행복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시를 쓸 수 없다. 그에게 시라는 고독와 마주할 시간과 공간이 없다. 그 애타는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 둘째를 임신한 아내, 해고를 앞둔 친구, 기러기 아빠로 회사에서 야근을 일 삼는 직장 상사, 그들에게 시를 쓰지 못하는 자신의 고통을 말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대학 시동아리 모임에서 시집을 팔아 풍류를 즐겼던 선배를 만나고 그를 통해 시잡지를 출판하는 대표를 만난다. 엄복태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하지만 잡지는 나오지 않고 출판사 사정을 빌미로 돈까지 빌려간 대표는 연락이 끊긴다. 엄복태에게 시는 무엇이었을까? 시를 쓰기 위해 몸부림치는 순간, 그는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바랐던 건 그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은 가족이 아닌 자신을 선택한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멕시코 지사로 발령을 받아 떠나면서 연락이 끊긴다. 20여 년 만에 아들은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무엇 때문에 가족을 버렸는지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농자를 짓고 음식 배달일을 하며 혼자 자유롭게 사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떤 질문이나 답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만이 느낄 수 있는 우주, 그 고요한 눈에서 말이다.

 

 나머지 다른 소설 속 인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독립된 무언가를 갈망한다. 어느 날 갑자기 아픈 무릎에서 꽃이 피는 기이한 일을 경험하면서 두려움 보다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어 기뻐하는 <누구 무릎에 꽃이 피나>의 춘복 씨. 그녀는 꽃을 뽑지 않고 그대로 둔다. 손녀를 돌보는 피곤함에서 잠시 멀어지고 싶었다. 부모의 불행한 결혼 생활 때문인지 자신을 떠난 여자를 잊지 못하는 <시간의 속>의 화자가 원하는 건 시간이다. 아니 과거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이 징글징글한 생일파티에 초대되어 문 앞에서 하나씩 받은 고깔모자를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언젠가 그녀가 말했다. 고깔모자에는 차곡차곡 지나간 시간이 쌓이고 있으며 우리 각자의 현재 좌표는 뒤집어놓은 고깔모자의 꼭짓점이라는 거였다. 현재가 늘 괴로운 건 과거로 가득 찬 고깔모자의 꼭짓점에 집중되는 하중 때문이었다. 나는 고깔모자 인생론이 꽤 그럴듯하다고 그녀를 칭찬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버린 그때, 그녀와의 과거로 가득한 고깔모자의 꼭짓점에서 나는 압사할 지경이었다.’ (187쪽, <시간의 속> 중에서)

 

 철학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공무원인 아내를 대신하여 살림을 하는 <생활의 기술>의 주인공은 현실을 탈피하고 싶다. 집 안을 청소하고 아이를 돌보고 장을 보는 일상이 아닌 다른 삶을 꿈꾸지만 실천하지 못한다. 안주하고 싶은 현실과 벗어나고 싶은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이다. 어쩌면 그는 주변 어디서나 마주하는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내가 겪어보지 않는 일까지 통제하고 싶은 거야.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는 걸 견디지 못하니까. 모든 것이 자신이 아는 질서 속에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겠지.’ (284쪽, <생활의 기술> 중에서)

 

 <당신 손목을 붙드는 그림자>는 책에 매료된 어머니를 추억하는 소영의 이야기다. 소영의 기억 속에 어머니는 언제나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의 무엇이 어머니를 빠져들게 하는지 그녀는 나중에야 알게 된다. 소영은 이혼을 하고 아들을 키우면서 교정교열 서재장식일을 한다. 읽기 위한 서재가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서재를 갖기를 원하는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고급의 양서와 함께 낡고 오래된 책을 장식하면서 사람들의 결핍을 본다. 지식이 아닌 무언가를 채우기 위한 그들을 통해 소영은 어머니를 기억한다. 

 

 ‘무엇보다 세상 의 별별 이야기 속에 쏙 빠져드는 것이 굉장했지. 그런데 말야,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걸 싫어한다는 것은 참, 견디기 어려운 일이야.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걸까, 그러면서도 계속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것도. 있잖아, 우리가 인생의 어느 순간, 빛나는 걸 보게 되면 나머지 인생 동안에 그 그림자에 붙들려 살아야 하는 것 같아. 일단 어떤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 우리는 평생 그 아름다움의 자장(磁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337쪽, <당신 손목을 붙드는 그림자> 중에서

 

 우리 삶의 결핍을 채우는 게 어디 책 뿐일까. 그것을 채우려는 모든 행위가 고독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떤 이에게는 시가, 어떤 이에게는 추억이, 어떤 이에게는 돈이, 어떤 이에게는 사랑이 고독이다. 그러니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란 제목처럼 삶은 자신만의 고독 속으로 달아날 때 충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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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이 되었고 아카시아꽃이 환하게 피었다. 아파트 복도에 나가면 옅게 아카시아 향이 닿는 듯하다. 송홧가루가 지나가고 아카시아 꽃이 피고 곧 밤꽃도 필 것이다. 앵두는 붉게 익고, 내가 모르는 곳에서 작약은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을 터. 모든 것들이 자기 자리에서 부지런히 해야 할 일들을 해내고 있다. 나는 여기 그대로 있고 너는 아직 멀리 있구나. 너에 속한 다른 이름들의 너는, 잘 지내고 있으리라 믿는다. 너¹에게 가슴에 새기는 달, 5월에 편지를 보냈다. 너²에게 초록이 닿기를 이란 문자를 6월에 보냈다. 너³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은 하루를 너와 나는 다르게 보내고, 같은 하늘을 너와 나는 다른 부분을 보고, 같은 드라마를 볼 수도 있고, 같은 노래를 듣기도 하겠지. 같은 책을 읽고 있을 수도 있고, 어느 순간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 그러니 속상할 필요도 없다. 나는 여기에, 너는 거기서 살아가면 된다.

 

 6월, 이런 책을 곁에 두려고 한다. 돌아온 정유정이란 말은 적당하지 않지만 떠오르는 말이 없다.『28이란 숫자가 의미하는 게 무얼까, 궁금할 뿐이다. 도서관이 아닌 내 방 책장에서 꺼내보고 싶은 박범신의『외등』, 표지부터 수줍은 숙녀를 닮은 박상수의『숙녀에게』, 김려령과 구병모의 소설을 만나는 창비청소년문학 『파란 아이』를 우선 담는다.

 

 

 

 

 

 

 

 

 

 

 

 

 

 

 

 

 

 

 

 

 겨울과 봄이 지났고, 여름이 시작된다. 작년보다 강한 더위와 많은 비가 내릴 거라고 한다. 작년만큼만 견디면 될 것이다. 작년만큼만 이겨내면 될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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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전히 슬픔의 구간에 속하지만
    from 그리하여 멀리서 2013-09-09 20:16 
    나를 증명하는 몇 가지 서류를 본다. 한글과 한자로 쓰인 나의 이름, 나의 나이, 내가 살고 있는 주소를 본다. 한때 내가 나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아니, 적확하게 말하자면 그 시절에는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에게도 나를 보이고 싶지 않았고,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존재 자체가 엄숙한 감사라는 사실을 나는 아주 늦게 깨달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대로다. 변한 건 무엇일
 
 
프레이야 2013-06-04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월도 벌써 넷째날이네요. 올여름 더 덥고 비도 더 많이 온다고 하던가요? 그렇군요! 자목련님에게도 제게도 지치지 않는 여름이 되면 좋겠어요.^^ 정유정의 신간소설 제목의 의미가 궁금하네요, 저도.

자목련 2013-06-04 20:34   좋아요 0 | URL
해마다 여름은 더 빠르고 강하게 달려오는 듯해요.
좋은 책들이 더위를 막을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어요!!
 

 

 지난 화요일 밤 늦게 오랜 친구 H가 전화를 했다. 그녀는 항상 바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목소리를 자주 듣지 못한다. 때문에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나는 H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통화하는 내내 울면서 말을 이어갔다. H에게 갑작스런 일이 일어났고, 그것은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 와중에 H는 이상하게도 내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고 했다. 마지막까지 니 목소리를 들어서 됐다고, 그 말을 반복했을 뿐이다. H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나는 어떤 질문도 어떤 위로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의 기억 속에 새겨진 어떤 모습으로 서로를 기억할 뿐이다. H가 다시 전화를 걸어올 때까지 많은 날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거다. 어떤 일들은 이야기로 꺼낼 수 조차 없을 정도로 강력한 슬픔을 지닌다. 슬픔이란 온전하게 그것을 헹구어 낼 수 있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건조한 눈을 크게 뜨고 있어도 가슴에는 눈물이 자라기 때문이다.

 

 H의 전화를 기다리는 날들, 나의 일상은 다르지 않다. 먼지와 머리카락이 거실에서 춤출 때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감이 탑을 쌓을 때 세탁기를 돌린다. 출판사의 사재기 소식을 다룬 기사를 읽고, 좋아하는 작가의 블로그에 올라온 짧은 글을 읽고, 몇 권의 책을 고른다. 아주 많이 기다렸던 책들이다. 정미경의 단편집 <프랑스식 세탁소>, 김숨의 장편소설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이사라 시인의 시집 <훗날 훗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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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3 18: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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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7 16: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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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3 2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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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6 10: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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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8 22: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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