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 뷰 - 제1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우신영 지음 / 다산책방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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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높은 꼭대기를 좋아하는 건 아래를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 아래에 내가 두고 온 비참한 것들과 이별하기 위해서. 앞만 보고 달리는 일도 지우고 싶은 과거에서 달아나고 싶은 욕망 때문은 아닐까. 우신영의 『시티 뷰』는 그런 욕망이 쌓아 올린 곳에서 마주하는 인간의 헛헛한 마음이 느껴진다. 욕망을 따라 높이 올라갔는에 왜 허무할까. 추락할까 두려운 마음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게 허상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영영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걸 알기 때문일까. 


살고 싶은 도시, 그게 이 도시의 다른 이름이다. 바다를 메워 만든 이 도시에는 없는 것이 많다. (9쪽)


신도시를 소개하는 소설의 첫 문장은 송도 국제도시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때문에 소설을 읽으면서 나와는 상관없지만 방송에 자주 등장해 익숙한 송도의 풍경이 겹쳐졌다. 소설은 뭐하나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신도시 삶의 빛과 그림자를 보여준다. 어디서든 삶은 마찬가지라고 말하듯. 재력과 명예를 두루 갖춘 부모와 의사 남편, 자신의 필라테스 학원을 운영하는 수미도 그랬다. 모두가 부러워할 삶이었지만 그만큼 노력했다. 자기 관리를 넘은 다이어트와 운동은 그녀를 젊음이 아닌 늙음으로 인도했다. 그래서 남편이 아닌 어린 주니와의 만남을 끊을 수 없었다. 수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남편, 아이는 필요한 액세서리 같은 것이었다.


수미는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어떤 쾌락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인생 어차피 자기 팔 자기가 흔들며 사는 거지. 이런 내가 그에게 피해를 주나. 아니, 이익을 주지. 사소한 부도덕은 상냥한 부인이 되게 해주니까. 그렇지 않은가. 모두에겐 풀 곳이 필요하다. 풀고 와서 우아하게 처신할 곳도 필요하다. 필연적으로 두 개의 장소와 두 개의 자아가 필요하다. (42쪽)


그에 비해 가난한 의대생이었던 남편 석진은 덕적도에서 칼국숫집을 하는 아버지와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있다. 수미와 결혼해 곧 개원의가 된다. 석진의 욕망은 사소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니었다. 성공한 삶, 석진 역시 높은 곳을 갈망했다. 등산을 하고 가짜 암벽을 타고 클라이밍 취미의 내면엔 꼭대기에 오르겠다는 욕망이 있었다. 방식만 달랐을 뿐 수미와 석진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미가 젊은 육체의 헬스 트레이너와 관계를 맺듯 석진도 면도날을 먹는 조선족 노동자 유화에게 끌렸다. 유화에게 석진은 저 밑 맨바닥에 자리 잡은 어머니를 보았다. 몸이 전부였던, 몸으로 모든 걸 받아내고 감당해야 하는 삶. 그런 몸에 내시경을 넣어 돈을 버는 석진.


칼을 먹는 유화가 섭식장애일까, 남의 시선을 먹는 수미가 섭식장애일까. (229쪽)


수미와 석진이 신도시의 중심이라면 주니와 유화는 변두리에 속한다. 수미와 석진에게 몸은 치장하고 관리하는 것이지만 주니와 유화에게는 생계를 위해 하루하루 소모하는 것이었다. 높은 빌딩을 닦다 추락한 유화의 남자친구. 그들의 몸은 아름다움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노동을 위한 몸이었다. 석진에게 화장한 얼굴만 보였던 수미가 주니에게 맨 얼굴을 보이고 수미의 취향에 맞추던 석진이 유화 앞에서는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다. 작가는 서로 대치되는 육체와 욕망을 적절하게 치밀하게 다뤄 잘 짜인 소설로 완성시켰다.


인간의 욕망을 위해 하찮게 버려지는 것들은 얼마나 많을까. 하나의 꼭대기 아래 차곡차곡 깔린 수많은 아래. 하나를 위해 나머지 전부는 사라지는 세상. 거대한 도시의 실체를 모른 채 그곳을 향한 욕망은 타오르는 불을 향해 돌진하는 불나방 같은 게 아닐는지. 그런 의미에서 유화의 질문은 이 소설의 상징처럼 들린다.


“이 도시는 불길해요. 바다를 메꿔서 육지로 만들었다죠? 얼마나 많은 것들이 죽었을까요?” (204쪽)


인간은 욕망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그 욕망은 만족이 있을까. 높은 꼭대기에서 위태롭게 흔들릴 욕망의 끝은 모른 채 인간은 욕망의 끝을 향해 오른다. 추락할 것을 안다면 적절한 높이에서 멈춰야 마땅하다. 어리석은 인간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도 꼭대기를 향해 오르고 오른다.


소설을 한 마디로 요약하지만 정말 재밌는 소설이다. 술술 읽힌다. 잡은 순간 끝까지 달리게 만든다. 그러나 재미와 만족은 별개다.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본 것 같은 기분을 감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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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를 먹는다. 커피를 곁에 둔다. 커피도 좋겠지만 Tea를 겯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차를 잘 모르지만 이런 책은 괜히 끌린다. 사실,내가 좋아하는 찻 잔이 등장할 거란 예감 때문이다. 『영국의 여왕과 공주』란 제목을 보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우아한 드레스와 왕관이 따라올지도 모른다. 그렇다. 표지부터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의 삶은 정작 우아하지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태생부터 운명이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이 책 저자가 독특하다. Cha Tea 홍차 교실이라니 영국 냄새가 물씬 풍긴다. 2002년 개교한 일본의 Cha Tea 홍차 교실에서 집필했다. 짐작할 수 있듯 일본에 영국의 차 문화를 전파하는 일을 하고 있다. 차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의 여왕과 공주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영국의 여왕과 공주』에서 만날 수 있는 여왕과 공주는 모두 22명이다. 시간순으로 차례로 왕비, 여왕, 공주를 소개한다. 우선 제일 먼저 만나는 왕비는 브라간사의 캐서린(1638~1705)이다. 캐서린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영국 왕실에 차 문화를 정착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공작 주앙 4세의 둘째 딸로 가톨릭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당시 포르투갈과 영국의 동맹을 위해 1662년 영국의 찰스 왕세자와 결혼했다. 정략결혼인 셈이다. 결혼 전부터 차를 즐겨 마신 그녀가 가져온 차가 현재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녀는 침실이나 침실 옆의 사적인 공간에서 차 모임을 열였다. 자극이 강한 차를 마시고 위가 상하지 않도록 차를 마시기 전에 버터를 바른 빵이나 차에 설탕 또는 사프란을 넣어 마시는 방식이 유행했다고 한다. 포르투갈에서 주문한 오렌지 마멀레이드가 등장하기도 했다고. 놀라운 건 모임에 남편의 정부도 참석했다고 한다. 왕비와 왕의 정부가 나란히 차를 마시는 분위기는 어땠을까. 속마음은 감추고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느라 힘들었을 것 같기도 하다.


한 나라의 왕비로 사는 일은 일반 국민을 알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왕위를 이을 자식이 낳아야 한다는 부담감, 왕위를 놓고 서로 쟁탈을 벌이는 형제와 친척들, 그러니 맨 처음 영국의 여왕이 된 앤(1665~1714)은 어땠을까. 앤 여왕은 ‘로열 터치’로 기억될 것 같다. 왕의 손길이 병자에게 닿으면 병이 낫는다는 ‘로열 터치’를 윌리엄 3세가 폐지했으나 앤이 부활시켰으니 국민의 사랑은 충분히 받았을 것이다. 앤 여왕 시대에 은으로 만든 찻주전자가 보급되었다고 한다. 앤 여왕은 서양 배를 모티브로 한 로코코 양식의 찻주전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유가 있었다. 앤이 가장 좋아하는 게 ‘서양 배 시나몬 콩포트’였다고 한다. 모두의 추앙을 받는 여왕이었으니 단 음식을 포기할 수 없었던 앤 여왕이었다.


그렇다면 ‘애프터눈 티’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어머니의 간섭으로부터 해방된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이 1837년 즉위 후 가신에게 처음 내린 명령이 ‘차와 타임스지’를 가져다 달라고 했으니 그녀의 차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가 알 수 있다. 하지만 ‘애프터눈 티는 빅토리아 여왕이 아닌 여왕의 침실 여관이었던 공작부인 마리아 러셀을 만나러 오는 손님이 많아서 시작되었다고.


공작 부인은 자신을 만나러 오는 모두를 만찬에 초대하기 어려워 만찬 전 티타임에 초대한 게 관습으로 굳어졌다는 설이 있다. 5시~ 5시 반사이에 공작부인이 참석하는 차 모임이 있다는 기록, 이것이 ‘애프터눈 티’의 기원이라고. 이러한 배경도 영국과 청나라의 아편전쟁(1840)이 일어난 원인이 되었다.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영국에 할양된 홍콩에서도 ‘애프터눈 티’가 유행했다고 한다.


가장 익숙하고 친근한 엘리자베스 2세 (1926~2022)와 불운의 왕세자비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1961~1997)의 생애도 빼놓을 수 없다. 사진, 초상화, 삽화 같은 풍부한 자료는 책을 읽는 재미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영국의 왕비와 공주 22명의 생애를 만날 수 있는 점도 흥미롭지만 시대별로 명예혁명(1688), 스페인 계승 전쟁(1701~1714)과 같은 영국을 둘러싼 유럽 역사의 흐름도 짚어볼 수 있는 점도 유익하다. 개인적으로 예쁜 찻잔과 도자기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좋아하는 잔을 꺼내 차를 마실 때 한 번쯤은 영국의 캐서린 왕비나 공작부인 마리아 러셀이 생각날 것 같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224쪽)


차를 음미하는 즐거움은 음식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이런 책을 찾는다. 일종의 요리책이자 중세 유럽의 문화와 일상도 함께 만날 수 있는 『중세 유럽의 레시피』는 그런 의미로 흥미로운 내용을 담은 책이다. 우아한 귀족의 식사, 새하얀 보석의 달콤한 유혹, 대대로 누리는 과실의 축복, 신과 함께 살고, 신과 함께 먹다(중세 전기의 수도원 요리), 기사가 들여온 식문화(중세 아랍 요리), 왕족의 대관식 메뉴까지 흥미롭다. 관심이 있는 분야의 레시피를 선택해서 즐길 수 있다. 거기다 각종 향신료와 허브의 쓰임새와 재료에 대한 설명도 충분하다.


도전해 보고 싶은 요리는 이런 것이다. ‘렌즈콩과 닭고기 스튜’로 렌즈콩이 구약 성서에도 등장했다니, 정말 오래된 식자재로 사용된 것 같다. 보관이 용이하고 영양도 좋아서 수도원의 식사 메뉴에도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 점점 추워지는 요즘에 아주 따뜻하게 먹을 수 있는 요리다. 닭다리 살을 굽고 닭 육수를 부어 30~40분 약불에 끓이고 다른 냄비에는 렌즈콩과 육수를 끓이고 순무가 들어가는 게 포인트다. 마트나 인터넷으로 구할 수 있는 재료라서 누구나 한 번쯤 해 볼 수 있는 요리가 아닐까 싶다.




렌즈콩과 닭고기 스튜




중세 시대의 식재료가 신분에 따라 어떻게 나눠지는지 알려주는데 빵의 경우는 질 좋은 밀가루로 만드는 최상급 흰 빵은 귀족과 왕족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잡곡 등이 들어 있는 빵은 등급이 낮은 것으로 시민 계급이 많이 먹었고 마지막으로 농민들은 그보다 더 질이 낮은 밀가루로 구운 빵을 먹었다니 좀 씁쓸하다.


맛있는 빵, 부드러운 빵으로 이야기를 돌려보면 ‘원파운드 케이크’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에게 익숙한 파운드케이크는 버터, 밀가루, 달걀, 설탕을 각각 1파운드씩 사용해 만든 케이크에서 유래되었다. 미니 오븐을 구비한 1인 세대에서도 충분히 시도할 수 있는 케이크가 아닐까.




원파운드케이크




책으로 중세 유럽의 달콤한 맛과 삶을 만날 수 있다. 영화 속 판타지나 우아한 중세를 요리로 만나는 즐거움과 함께 요리를 좋아하고 새로운 요리를 발견하는 기쁨을 원한다면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이전과 다르게 ‘애프터눈 티’가 다가올 것 같다. 알고 나면 마음이 달라진다. 책의 역할이라고 할까. 아무튼 커피를 제일 좋아하지만 깊은 잠을 위해 차를 마시기도 하는데 『영국의 여왕과 공주』를 통해 만난 Tea와 찻잔이 생각알 것 같다. 거기다 그들의 안타까운 삶도. 사랑으로 맺어진 결혼이 아니라 불화한 왕실, 국익을 위해 맺어진 혼사, 서로가 서로를 증오한 왕과 왕비의 모습은 시대를 지나 현재의 영국 왕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역사가 기록하고 그 기록을 읽는 우리가 느끼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그렇다. 어쩌면 왕실을 둘러싼 스캔들, 끊임없는 가십은 그들이 감당해야 할 몫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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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4-10-27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차와 마들렌이 생각나는 글이네요.

자목련 2024-10-29 09:11   좋아요 0 | URL
요즘 같은 날씨엔 따뜻한 차와 달달한 간식이~~

망고 2024-10-27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렌즈콩과 닭고기 스튜 메모! ㅋㅋㅋㅋ

자목련 2024-10-29 09:11   좋아요 0 | URL
망고 님의 요리 기대할까요? ㅎㅎ

페넬로페 2024-10-27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 사람들은 차에 엄청난 열정이 있더라고요. 가끔씩 차 마시면 좋은데 커피에 기계적으로 손이 가요^^

자목련 2024-10-29 09:12   좋아요 1 | URL
맞아요, 일어나면서 커피 마실 준비를 해요^^
 
유령의 시간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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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을 산다. 내가 원하는 삶과 살아가는 삶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삶의 방향은 더 나은 쪽으로 두었다. 내 삶을 사느라 내 삶 밖을 둘러볼 여력이 없었다. 내 삶 밖을 생각하고 알아가는 통로는 소설이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타인의 삶을 상상하거나 그들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했다. 때로 나의 그것과 비교했다. 저마다의 삶은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김이정의 『유령의 시간』 을 읽는 일도 다르지 않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의 삶과 그들의 삶을 생각한다. 정확하게는 소설 속 ‘지형’의 아버지 ‘이섭’의 삶이다. 이섭은 아내 미자와 1남 3녀를 둔 가장이다. 새우 양식장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미자와 나이 차가 많을 뿐 평범한 아버지다. 지형이 아버지에 대해 아는 건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것 정도다. 나중에야 아버지에게 다른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섭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던 것일까.


소설은 화자 지형을 통해 아버지의 시간을 천천히 들려준다.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이섭은 사회주의를 선택한다. 이념을 위한 삶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눠주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시대는 그를 나쁜 쪽으로 몰았다. 우선은 살기 위해 북으로 갔다. 이섭에게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다시 남을 택했다. 가족이 있으니까.


“이쪽에서 내 가족을 희생시킬 만큼 더 나은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네. 내가 돌아가려는 곳은 가족이 있는 집일뿐이야.” (205쪽)


이섭 대신 아내가 감옥에 갈 줄은 몰랐고 어린 자식의 생사를 모르는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전쟁이 일어나고 이섭은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가슴에 그들을 품고 미자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세상은 이섭의 이력을 외면했다. 직장을 구하려 이력서를 낼 때마다 신원 조회에서 탈락했고 조카와 친척에게도 피해가 갔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할 수 없던 아버지의 삶이었다. 자신의 지난 시간을 자세히 말할 수 없었다. 부모 형제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심연 깊숙이 자리한 슬픔에 대해서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그런 이섭의 깊은 슬픔과 무한의 고통은 아름다운 비유와 묘사로 그려낸다.





단단한 투구와 갑옷까지 거창하게 차려입은 채 온몸을 굽히고 손을 모은 자의 비굴함을 보는 것 같아 잡힌 새우를 볼 때마다 기분이 언짢아지곤 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보면서도 언짢음이 쉽게 가시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허약한 것들의 비루함이라니. 생각해보면 허약한 자신에 대한 이섭의 적의는 제법 뿌리가 깊었다. (45쪽)


가만히 누워 있으면 벽지 사이로 모래가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저 부실한 시민아파트는 이섭의 인생을 닮아 있었다. 언제 무너져내릴지 모르는 위태로운 건물에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숨차게 살고 있었다. (255쪽)


제대로 된 가장의 역할은 고사하고 자식을 지키지 못한 회한은 막내딸 지우의 죽음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거기다 그를 올가 맨 ‘사회안전법’까지. 이섭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 몸부림치는 그에게 1975년 8월 15일, 해방 30년이 된 60의 나이에 자서전을 쓰기 시작한 건 유일한 숨구멍은 아닐는지.


결국 완성하지 못한 아버지의 원고가 이 소설의 시작이다. 작가가 된 지형이 남북작가대회 작가단에 참여해 북한 호텔 객실에 있는 첫 장면에서 느꼈던 알 수 없는 묵직한 슬픔의 근원이었다. 아버지가 끝내 꺼내지 못하고 그리워만 했던 아내와 자식, 지형에게는 두 오빠였던 그들에게 전하는 길고 긴 안부라고 할까. 유령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를 향한 애끓는 애도였다.


어쩌면 아버지는 유령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땅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못했던 유령. 마침내 하늘은 짙은 남색이 되었다. 지형은 하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초가을 강바람이 손가락 하나하나, 머리카락 한올 한 올을 쓰다듬으며 대기 속으로 사라졌다. 유령의 시간이 저물었다. (283쪽)


통렬한 아픔을 아름답게 그려 낸 가득한 김이정의 『유령의 시간』 은 사느라 지우며 잊고 지낸 아픔과 국가와 사회가 돌봐야 할 지난 시대를 추모한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함께 하기를 바란다. 부디 소설 속 1970년대가 아닌 2024년 현재에는 유령으로 존재하는 이가 없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담아서.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내가 몰랐던 삶도 들여다보고 생각할 것이다. 비록 소설을 읽고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작은 시간이겠지만.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분단과 역사의 폭력에 희생된 개인의 삶을 생각하고 담아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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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가을 2024 소설 보다
권희진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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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좋은 계절이다. 걷다가 살짝 뛰면 경쾌한 리듬이 따라올 것 같은 날들이다. 동네 공원을 도는 가벼운 산책, 조금 긴 시간을 들인 등산도 좋을 것이다. 그런 걷기에 『소설 보다 : 가을 2024』를 곁들여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때마침 권희진의 단편은 「걷기의 활용」이다. 걷기란 목적지를 두지 않고 그냥 걷는다는 행위 그 자체로 좋다. 소설 속 ‘나’도 다르지 않았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시절 걷기는 그에게 가장 큰 일상이자 위로였다.


어쨌거나 한 반년 동안은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처음에는 집 주면만 걷다가 나중에는 먼 곳까지 나가보기도 했다. 걷다 보면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앞으로 뭐 해 먹고살지로 시작한 고민은 80세 노인이 된 미래까지 갔다가 결국 다시 오늘 저녁에 뭐 먹지, 하는 생각으로 돌아왔다. (「걷기의 활용」, 25쪽)


걷기는 그런 것이다. 같은 곳을 걷다 보면 항상 같은 것들을 본다. 그리고 조금씩 변하는 걸 감지할 수 있다. 어쩌면 관계도 그런 게 아닐까. 권희진의 단편은 ‘나’와 태수 형과의 관계를 걷기에 비유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 가까이 지낸 둘은 일상을 공유한다. 태수 형의 연애와 사소한 농담 같은 대화. 그러다 둘은 만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매일 걷던 익숙한 길이 걷기가 멈추면 낯선 곳이 되는 것처럼 관계도 다르지 않다. 누구의 잘못인지, 오해인지 알 수 없다. 뒤늦게 듣게 된 소식은 태수 형의 죽음이었다. ‘나’에게 걷기가 평범한 일상이자 중요한 일과였던 것처럼 태수 형이 그런 존재였다는 걸 알게 된다. 소설은 지난 관계를 떠올리며 누군가를 추억하게 만든다. 쓸쓸하지만 혼자 걷는 산책의 풍경과 겹쳐진다.


이미상의 「옮겨붙은 소망」은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이상하다고 하면 이상하고 아니 그게 뭐 이상한가 싶은 거다. 화자인 ‘나’는 같은 빌라에 사는 n&n’s의 쇼핑 도우미다. 처음에 나는 이 부분을 n&n’s가 쇼핑몰을 운영하는 것으로 착각해 읽었다. 다시 읽으니 그게 아니라 n&n’s가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에서 원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나’를 고용한 것이었다. 쇼핑을 도와주면서 n&n’s 부부의 사정을 알게 된다. 아파트를 팔아 빌라로 이사를 오면서 일을 하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얻은 우울증, 남편의 사고사. n&n’s 는 우울과 슬픔이 가득한 분위기를 상상할 수 있지만 소설은 의외로 유머러스하다고 할까. 다시 한번 말하자면 나는 어렵고 난해했다.


정기현의 「슬픈 마음 있는 사람」속 ‘기은’도 걷는다. 걸으면서 낙서를 발견한다. 흥미로운 건 낙서가 이어지고 업데이트된다는 것이다. 김병철이란 사람을 지목해 욕을 하고 그를 향해 분노한다. 낙서를 보는 사람이라면 그 인물이 궁금해질 정도다. ‘기은’의 걷기는 교회로 향한다. 평일 교회의 모습은 평화롭고 그곳에서 만난 ‘준영’과 탁구를 치다 점점 가까워진다. 함께 산책을 하고 낙서의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기은은 혼자 걷다가 낙서를 발견하면 자신도 모르게 준영을 생각한다. 나중에야 준영이 목사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교회는 모두에게 안식처의 공간이지만 준영에게는 집이다. 준영에게는 어떤 슬픈 마음이 있는 걸까. 가장 재밌고 편하게 읽은 소설이지만 실체를 알 수 없는 여운이 남았다. 어쩌면 그것은 슬픈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기은은 자신이 비로소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이 된 것에 아늑함을 느끼면서도 슬픈 마음을 가지게 된 덕분에 슬픔 속에 한참을 머물다 자리를 떴다. (140쪽)


때로 읽기는 이해를 동반하지 않고 그냥 읽는 자로 충분할 때가 있다. 핑계 같지만 『소설 보다 : 가을 2024』 가 그랬다. 잘 몰라서 처음 들어선 길을 걷는 느낌이라고 해도 좋겠다. 처음 만난 권희진, 장기현은 소설이 그랬고 처음이 아닌 이미상의 소설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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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4-10-21 2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에 만보씩, 주 4~5회를 몇달간 걸었는데요. 병원에서 제 몸을 보더니 허리부터 골반, 둔부, 허벅지 연결되는 뼈와 근육이 주저앉고 눌러붙었다면서 걷지 말라네요. 정석 자세의 걷기가 아니면 많이 걷는 거 절대 안좋답니다. 근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걷는 자세가 다 틀렸답니다. 자목련 님도 부디 몸조심 하세요ㅜㅜ

stella.K 2024-10-21 18:08   좋아요 1 | URL
와, 뼈와 근육이 눌러 붙어요? 그러니깐요, 이 표준이라는게 오히려 사람을 잡는다더군요. 전 일주일에 만보라면 걷겠어요. 하지만 하루 만보면 전 아예 뼈와 근육이 주저 앉을 걸요? 😢 물론 많이 걸어도 무리가 없는 사람 부럽긴 하죠. ㅠ

자목련 2024-10-22 11:17   좋아요 1 | URL
뭐든 적당한, 적절함이 필요한 것 같아요.
날씨가 쌀쌀합니다. 특별히 감기 조심하세요!
 
앨리스와의 티타임 - 정소연 소설집
정소연 지음 / 래빗홀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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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르는 세계를 생각한다. 이 세계가 전부라고 여겼지만 어느 순간 다른 세계가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의문이 생겼다. 그 세계에 대해 더 알고자 애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유일무이하다고 확신하지 않는다. SF 소설 영향을 받았냐 묻는다면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 인간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소통하는 존재를 상상한다.


정소연의 『앨리스와의 티타임』 은 그런 세계로의 초대다. 그러니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공간, 이웃에 외계인이 살 수도 있는 세상, 현실과 상상을 오가는 경계, 다른 세계를 향한 열린 마음과 인정. 그 모든 것을 흥미로움과 놀라움 그 자체였다. 정소연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라 찾아보니 『앨리스와의 티타임』에는 2015년에 발간된 『옆집의 영희 씨』의 복간이자 그 이후 작품을 수록한 책이다. 14편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표제작 「앨리스와의 티타임」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전부가 아닌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 세계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나와 평행선 상에 존재하는 다른 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모른다. 화자 앨리스는 그런 세계를 방문하는 일을 한다. 그러니 이런 첫 문장은 이상하지도 낯설지도 않다.


나는 일흔네 번째 세계에서 앨리스 셸던 부인을 만났다. (「앨리스와의 티타임」, 11쪽)


어느 세계든 다를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 늘 그랬다는 생각이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나는 앤디 워홀이 없는 세계를 보았다. 피카소가 무명으로 일생을 마치는 세계를 보았다. 언제나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웠다. (「앨리스와의 티타임」, 18~19쪽)


화자가 만난 앨리스는 화자의 세계에서 잘 알려진 소설가였다. 놀랍게도 그녀 역시 다른 세계를 여행하던 사람이었다. 아, 소름 돋는 장면이지 않는가. 우리가 모르는 세계에는 얼마나 많은 앨리스가 존재한단 말인가. 소설의 설정이라 해도 나는 이 장면에서 이 단편에서 조금 울컥하고 먹먹해졌다. 다른 세계를 여행하던 일흔네 번째 세계에서 만난 앨리스도 다른 세계 여행자였다. 그녀는 다른 세계로 가서 알츠하이머 치료법을 찾아 돌아왔다. 사랑하는 남편을 위한 일이었다. 화자가 아는 앨리스는 자살을 한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나와 같지만 나와 다른 사람, 나와 같지만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 누구라도 이 단편을 읽는다면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나를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런 나를 마주하는 장면도 말이다.


놀랍고 흥미로운 상상은 「옆집의 영희 씨」에서도 마찬가지다. 외계인과 함께 사는 시대가 배경이다. 언젠가 그런 미래가 오지 않을까. 화자 ‘수정’은 화가자이자 미술 전담 교사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심의 오피스텔을 구할 수 없다. 하지만 옆집에 외계인이 산다는 이유로 싼값에 이사했다. 소설에서 외계인은 정부의 감시를 받는 존재이자 기이하고 징그러운 모습이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외계인을 피하지만 수정은 상관없었다. 자신을 이영희로 소개한 외계인은 수정의 집에 와서 수정의 그림을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말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지만 그저 평범한 이웃이라고 할까. 그리고 흔적도 없이 떠났다. 옆집의 영희 씨는 나름 지구에 적응하려고 노렸고 했을지도 모른다. 신문에서는 외계인을 ‘지구의 일상을 경험하러 온 그들’이라 칭한다.


애틋하면서 따뜻하고 현실적인 SF 소설이라고 할까. 그러나 잘못 들어온 세계에서 삭제당할 수도 있다는 설정의 「비거스렁이」는 SF를 빌려 청소년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느낌이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없는 존재가 된 지영은 이름을 물으면 36번 홍지영이라고 답한다. 익숙한 일상인데 갑자기 담임 정연이 귀찮을 정도로 자신을 찾는다. 원하지 않는 호출, 상담이 불편하고 정연의 속셈이 궁금하고 화가 난다.


비슷한 삶이 존재하지 않듯이 비슷한 세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겉으론 어떻게 보든 실제로 지영에게 딱 맞는 세계는 하나뿐이었다. 지영에게 상황을 설명해서 해결될 문제라면 훨씬 편하겠지만, 다른 세계나 시공간 불일치나 하는 말을 믿어주기를 바라기도 어려울뿐더러, 자기 세계를 스스로 찾아가기란 불가능했다. 틈을 직접 들여다보고 그 세계에 어울리는 조각들을 맞춰나가는 것은 균형자만이 갖는 재능이자 업이었다. (「비거스렁이」, 58~59쪽)


그랬다. 담임 정연은 균형자였다. 잘못된 세계로 들어온 지영이 맞는 세계를 찾도록 도와주는 역할. 현실에서 정연 같은 역할을 할 이는 누구일까. 지영이 들어온 잘못된 세계에서 꺼내 그동안 힘들었을 지영을 위로하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줄 이는 존재하는가.


정소연의 소설은 이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SF다. 처음부터 존재했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열리는 계단을 발견하고 그 통로를 통해 나아가겠다는 희망과 의지를 보여주는 「계단」, 인터넷 검열 사회(지금 우리 모습은 아닌가)에서 식물처럼 물과 햇볕으로 자라는 공유기를 발명하고 유포했다 교도소에 수감된 언니의 의지를 보여주는 「개화」는 선의로 이어지는 행동과 연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정소연의 소설은 김초엽의 소설로 연결된다. 정소연의 소설 『옆집의 영희 씨』의 을 향한 독자들의 뜨거운 복간 요청과 애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나처럼 김초엽을 먼저 만난 독자는 이제야 정소연을 만난 게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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