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작약의 시간은 끝났지만 시로 작약을 만난다.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작약의 계절에 만났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쉬움은커녕 반갑다. 이렇게 또 작약에 빠져든다. 조용미 시집 『초록의 어두운 부분』에서 발견한 시다. 이 시집을 구매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안희연의 신간을 살펴보다가 문학동네 말고 창비나 문지에서는 어떤 시집이 나왔나 찾다가 조용미의 신간을 보았다. 목차를 보다가 작약을 보았다. 아니, 작약이라니 그럼 이 시집을 사야지.






저 작약의 본을 짐작해 볼까


내 이파의 작약은 한때 귀신이었다가 한때 기린이었다가

한때 흰뺨검둥오리였다가 한때 벚나무모시나방이었다가

한때 거미게였다가


어쩌면 나였던 누구였다가, 단공도 부단공도 모르는 크게

깨우진 자였다가 공재고택의 향나무였다가


이번 생에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이 고리를 끊으려 했던

그저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은 고독한 자였다가


마침내 확연히 명백한 작약이 되었다 내 앞의 작약이 되었다 (「작약의 본생담」 , 전문)



먼 산 작약

산작약


옆 작약

백작약


저수령 넘어 은풍골로 작약을 보러 간다


당신 없이,


백자인을 먹으면 흰머리가

다시 검어진다


잠을 잘 수 있다


백자인을 먹으면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간다


측백나무의 씨

온석 같은 열매 속에는


백자인 여섯 알이

가만히

들어 있다


저수령 넘어 은풍골로 작약을 보러 간다 (「작약을 보러 간다」, 전문)







사진첩에서 작약을 찾았다. 백작약, 사라 작약, 레드 참 작약. 작약이 피고 지던 순간을 떠올린다. 올해의 작약이 준 행복들. 그리고 곧 수국이 가져다줄 기쁨도 생각한다. 물론 『초록의 어두운 부분』에 수국에 관한 시도 있다. 그 시는 수국을 마주할 때 읽어야지.


시가 있어 좋다. 시로 작약을 만나서 좋다. 이런 시를 써 준 시인이 고맙다. 유희경의 「심었다던 작약」에 이어 이제 조용미의 작약도 기억할 것이다. 책장에 조용미의 다른 시집이 있다. 모아두기만 한 시집을 펼치는 여름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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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날 대신해 소설, 잇다 5
김명순.박민정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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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손주가 아닌 손녀는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인문계가 아닌 상고를 가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물론 나는 그 주장에 반하여 인문계와 대학을 졸업했다. 자식의 편에 섰던 엄마 덕분에 가능했다. 엄마는 딸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했고 결혼도 늦게 천천히 해도 좋다고 여겼다. 엄마가 돌아가실 즈음 오빠만 결혼을 한 상태였다. 이른 나의 결혼을 결정한 오빠도 마음에 들지는 않으셨을 것 같다. 김명순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엄마와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시대를 잘못 타고 나서 딸이라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그늘에 갇혀 살아온 삶.


『천사가 날 대신해』에는 김명순의 소설이 세 편 수록되었다. 데뷔작인 「의심의 소녀」 와 「돌아다볼 때」, 「외로운 사람들」이다. 「의심의 소녀」 (1917년)엔 제목이 암시하듯 소녀가 등장한다. 평양 대동강 근처의 마을에 ‘범네’라는 이름의 소녀와 할아버지가 이사를 온다. 그러나 둘만 소통할 뿐 동네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다.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그러다 동네에 한 신사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할아버지와 범네는 급히 동네를 떠났다. 놀랍게도 그 신사는 범네의 아버지였다. 불행한 결혼 생활로 범네의 엄마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할아버지는 손녀의 이름도 바꾸고 손녀를 살리려 숨어사는 것이다.


「돌아다볼 때」(1924년)의 주인공 ‘소령’도 평탄한 삶이 아니다. 소령은 신여성이지만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머니와 같은 운명일까 주변의 걱정을 산다. 공교롭게 소령은 평양에 강연을 하러 온 이학자 ‘효순’이란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효순은 유부남이었고 이를 안 소령의 고모는 소령의 혼처를 찾아 결혼시킨다. 그러나 소령의 남편은 난봉꾼이었고 시어머니는 모든 걸 소령의 탓으로 돌렸다.


공부를 열심히 한 신여성이지만 자유연애에 대한 확신과 사회 구조는 바꿀 힘은 없었다. 100여 전에 발표한 소설인데 어떤 면에서는 현재의 삶에 대입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여성 혐오와 차별을 고스란히 전해진다. 여성을 대하는 남성의 태도도 다르지 않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소유물로 착각하고 구속할 수 있다는 생각은 왜 변하지 않는가. 「의심의 소녀」의 범네의 아버지는 헤어지자는 말에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이혼한 전처를 죽이는 현재의 남성과 다르지 않다.


장편소설 「외로운 사람들」 (1924년)에서는 시대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신념과 사랑으로 인해 갈등하는 네 남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시대엔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혼인을 맺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순희’와 ‘순철’ 남매는 달랐다. 신연성 순희와 사회학자 정택은 사랑을 위해 도피했다. 각자 정혼자가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순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둘은 같이 떠난 것과 다르게 따로 돌아왔다. 순희의 동생 순철은 어린 나이에 두 살 많은 복순과 혼인했다.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사이라 어른의 뜻에 따라 혼인하는 게 당연하다 여겼다. 그런데 유학에서 청국 왕녀 순영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순영에게 결혼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양다리를 걸치게 된다. 순영이 조선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순철의 순영과 복순 사이에서 갈등한다.


서로 잘 이해하는 두 연인이 모-든 관계를 끊고, 모-든 소식까지 서로 알리지 않으면서, 오히려 다른 곳에 사랑을 옮기지도 아니하였다면 세상은 그 연고도 모르고 웃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이 믿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운명의 위협을 받아가면서,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발자국마다 그들의 피를 흘리면서 그들의 꿈꾸는, 어떤 목표를 향하여 걸어나간다. 이런 일이 세상에는 흔히 없는 일이요, 사람들은 다- 모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외로운 사람이 되었다. ( 「외로운 사람들」, 117~118쪽)


「외로운 사람들」에서 정택과 순철은 자신의 사랑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고뇌한다. 말이 고뇌이지 뻔뻔하다. 정택은 조선에서 다른 여성을 만나는데 그녀를 보호할 이가 자신뿐이라는 괴상한 논리를 펼친다. 그나마 순철은 양심적이다. 순철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복순과 이국 땅에서 순철의 사랑만이 전부인 순영을 외면할 용기가 없다. 그래도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기로 결심한다. 순철을 기다리던 순영은 병에 걸려 생을 마감하고 정택의 혼인 소식에 순희도 죽음을 택한다. 순희와 순영의 마지막은 죽음이어야 했을까. 시대를 탓해야 할까. 가정 폭력과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인 여성이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해 2차 피해를 감당해야 하는 100년 후의 지금을 생각하면 모르겠다.


박민정의 「천사가 날 대신해」에서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 ‘세윤’의 실종과 죽음에 대해 들려준다. 세윤은 불행한 결혼 생활을 끝내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화자와 함께 ‘JLPT’시험 준비를 한다. 그런 세윤이 실종 후 자살한다. 세윤이 남긴 건 일상을 담은 브이로그가 전부다. 나는 그 브이로그를 통해 세윤의 고통을 짐작하고 가늠할 뿐이다. 놀라운 건 브이로그에 등장하는 ‘로사’였다. 나의 학교 후배였던 로사가 세윤의 직장 동료였다. 세윤에게 로사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녀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말해줬지만 세윤은 듣지 않았다. 세윤의 죽음이 직접적으로 로사에게 있다고 주장할 수 없지만 나는 더 강하게 로사를 멀리하라고 말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어떤 억측이나 소문은 얼마나 무서운가.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슬그머니 가담한다. 김명순의 「의심의 소녀」에서 정확한 사실을 모르면서 소문에 가담하는 동네 사람들, 「돌아다볼 때」의 고모처럼 지레 짐작한다. 뉴스나 언론을 통한 보도에 상상하는 더한다. 박민정의 「천사가 날 대신해」에서 세윤이 감당해야 할 시선은 어땠을까. 이혼녀, 전 남편과 연락을 하는 일을 바람을 피우는 거라 수군거리는 동료들. 그런 문제에 대한 고민은 박민정의 에세이 「때가 이르면 굳은 바위도 가슴을 열어」로 이어진다.


작가는 누구보다 ‘나’를 많이 말하지만, 가장 ‘나’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단 한 명의 작가이지만 또한 오롯이 작가일 수 있으려면 끝없이 나르시시즘을 경계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쓰는 사람이 자기 생애까지 대생화해서 이루려는 문학 행위가 그저 소문으로만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때가 이르면 굳은 바위도 가슴을 열어」, 306쪽)


어렵고 쉽게 읽었다 말할 수 없지만 좋은 소설이었다. 이런 기획이 아니었다면 나는 김명순의 이름도 모르고 그의 소설을 찾아 읽을 일도 없었다. 페미니즘이나 여성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도 좋은 교재가 될 것 같다. 소설적 재미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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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자 2024-07-15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민정 작가의 <백년회로외전>을 읽고 너무 좋았어서 박민정 작가의 다른 책을 검색했는데, 백년회로외전보다 더 새로 나온 신간이 있더라구요! 이 책을 통해서 ‘소설,잇다‘라는 시리즈도 발견을 했네요 정말 좋은 기획인 것 같아요.. 땡투 날리고 한국 들어가서 구입할 예정! 역시 언제나 유려한 글로 후기를 써 주시는 자목련님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24-07-16 10:10   좋아요 0 | URL
네, ‘소설,잇다‘ 는 의미있고 남다른 시리즈라 생각해요. 한국 여성 작가에 대한 관심과 그들의 시선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볼 수 있다고 할까요.100년 전 작가의 글을 읽기가 살짝 힘든 부분도 있지만요.
달자 님도 즐겁게 만나시면 좋겠어요!
 
나목 박완서 아카이브 에디션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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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 내일이 오지 않을 꺼라 생각한 적이 없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날들이 있었을 뿐. 평범한 일상이 한순간 무너지고 살아가는 이유를 찾지 못하는 이에게 내일은 어떤 의미일까. 살아있기에 살아가가는 일은 고통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나목』의 ‘나’도 그랬을까. 전쟁이라는 폭력을 견뎌내며 폐허와 함께 살아가는 일을 지금을 사는 이는 알 수 없다.


미 8군 PX 아래층 초상화부에서 일하는 ‘나’는 미군을 상대로 초상화 접수와 가격을 흥정한다. 환쟁이에게 업무를 배분하고 독촉한다. 지루할 정도로 반복된 일상에 새로운 환쟁이 ‘옥희도’씨가 들어온다. 똑같이 미군 애인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그는 달라 보였다. 물론 ‘나’에게 관심을 주는 남자는 따로 있었다. 전기부에서 일하는 ‘태수’였다. 태수는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했고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그러나 태수와 옥희도 둘 중 한 명을 꼽으라면 태수는 아니었다. 태수와 관계는 약간의 밀당 같은 것이라면 옥희도와는 자석 같은 끌림이었다. 옥희도도 ‘나’의 마음을 알고 ‘나’를 향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옥희도는 ‘나’를 아끼는 사람이었다. 아내가 있고 5명의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었어도 그는 ‘나’를 사랑하는 일을 멈추었을 것이다.


옥희도는 그런 사람이었다. 스물한 살 나의 마음을 어루만지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두었고 그 마음의 끝을 맺을 수 있는 사람. 스물한 살인 ‘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솔직하게 옥희도에게 전한다. 아파서 일을 나오지 못한 그를 병문안을 핑계로 찾아가면서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면서 그 안에 같이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옥희도 같은 사람은 잊고 태수를 생각하라고 말할 게 분명하다. 어쩌면 옥희도를 사랑한다고 믿는 ‘나’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금지옥엽으로 자신을 아꼈던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 여동생을 챙기던 오빠 둘의 부재가 만든 감정 말이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경험하지 않았을 감정이다. 피난을 갖다 돌아온 오빠들은 다락에 숨어지냈다. 계동의 고가에는 ‘나와 어머니만 살고 있어야 했다. 전쟁의 날들이었지만 숨어지내는 오빠들과 어머니가 있기에 두려움은 없었다. 큰아버지와 사촌 오빠의 방문이 있기 전까지. 네 명이 거하기에 다락은 좁았고 ‘나’는 오빠 둘의 거처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거처를 옮기고 폭격으로 오빠들은 죽음을 맞았다. 자신 때문에 오빠 둘은 죽고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은 일을 마치고 계동의 고가로 오는 시간을 늦추었다.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는데 어머니는 죽은 아들들만 붙자고 사느라 살아있는 딸은 봐주지 않았다. PX에서 돌아온 경을 환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얼마나 추운지, 얼마나 무서운지 묻지 않았다. 부서진 고가 그 자체였다.


때문에 ‘나’는 퇴근 후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을 같이 보내고 견뎌준 이가 옥희도였다. 약속을 하지 않아도 장난감 가게 앞에서 만났다. 옥희도에게 어머니와의 갈등이나 고민을 털어놓은 적은 없지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전쟁이 앗아간 삶을 그 역시 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돈벌이로 초상화를 그려야 해지만 화가로써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번뇌하며 말이다. ‘나’는 옥희도의 고독과 고통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옥희도가 그린 그림을 보고 죽은 나무, 고목으로만 보았으니까. 그의 아내를 책망하고 질투했을 뿐이다.


나는 그들의 삶에 다가갈 수 없다. 박완서가 세밀하게 담아낸 미 8군 PX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쓸쓸하고 황폐한 거리를 가득 채운 상념과 전쟁의 상흔이 남은 계동의 고가의 풍경을 그려볼 뿐이다. 그러나 주인공 ‘나’ 스스로 알 수 없는 감정들은 조금 알 것 같다. 어머니를 향한 원망과 한 번이라도 자신을 안쓰럽게 봐주기를 바라는 간절함, 자신을 사로잡는 우울과 죽음, 반대라 삶에 대한 열망과 욕구를 느낄 수 있었다. 소설 곳곳에서 빛나고 눈부신 문장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늙고 초췌한 어머니와 젊고 싱그러운 ‘나’의 모습, 한순간의 불꽃처럼 화려하게 타오르고 싶은 마음에 호텔로 향한 ‘나’의 마음, 요란하게 움직이는 장난감 침팬지의 몸짓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나’와 옥희도의 눈빛.


죽고 싶다. 주고 싶다. 그렇지만 은행나무는 너무도 곱게 물들었고 하늘은 어쩌면 저렇게 푸르고 이 마당의 공기는 샘물처럼 청량하기만 한 것일까. 죽고 싶다. 살고 싶다. 죽고 싶다. (315쪽)


팽팽하게 대립한다고 여겼던 어머니와의 갈등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끝난다. 나의 반항적인 외박이 불러온 결과였을까. 약을 먹고 의사를 불러도 소용없었다. 어머니가 죽고 고가에 나 혼자 남았다. 그리고 나의 곁에는 태수가 있다. 시간이 흐르고 중년의 ‘나’는 남편 태수와 함께 고인이 된 옥희도의 전시회를 찾는다. 그곳에서 마주한 그림.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古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390쪽)


나목에게는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391쪽)


박완서가 그려낸 소설 속 인물들은 전쟁을 살아내느라 삶이 파괴되고 부서졌다. 자신을 괴롭히는 고독과 싸우고 어찌할 수 없는 시대와 싸우고 버텼다. 잎이 지고 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裸木)처럼 살았다. 박완서 작가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서진 삶이라고 해서 포기하지 않았다. 봄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박완서 작가는 소설을 통해 폐허의 삶에서 발견한 한 가닥의 희망을 말한다. 시대는 다르지만 부서지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고독하고 외로운 이들에게, 곧 봄에의 믿음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 1970년에 발표한 『나목』이 육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빛을 발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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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은 읽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고 어떤 소설은 읽었다고 착각한다. 박완서 작가의 『나목』도 그런 소설이었다. 읽은 건 같은데 내용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박수근 화가, 한국전쟁, 그 정도만 생각났다. 읽었다고 하면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고 읽지 않았다고 하면 방송이나 지인이 언급한 내용에 읽었다고 여긴 것이다. 읽고 있는데 읽은 것 같다. 그러니까 제대로가 아닌 대충인 것이다.


대학 때 교양 국어 수업을 들었다. 강사가 박완서 작가를 닮은 분이셨다. 그 수업이 좋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학점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친구는 아이가 어렸을 때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빌렸다. 종종 통화를 할 때면 책 목록에 대해 말하곤 했는데 당시 친구가 빌린 목록 가운데 박완서 소설이 있었다. 초등학생용 도서였다. 나중에 통화할 때 『나목』에 대해 물어봐야겠다. 친구는 제대로 읽었을 것 같다. 대신 내게는 『나목에 핀 꽃』이 있다. 좋아하는 동생이 선물한 책인데 시간의 두께가 가득하다. 이 기회에 다시 읽어봐야겠다.







매년 의식처럼 구매했던 젊은작가상을 올해부터는 수상작품 가운데 읽은 소설도 있어서 사지 않기로 했는데 읽고 싶은 작가의 단편이 있어 구매했다. 김멜라와 김남숙 소설만 읽을 것 같다. 다른 소설은 작가노트만 읽을지도 모른다.


카뮈의 에세이를 읽은 기억이 없다. 카뮈의 에세이 『결혼·여름』도 이번 여름에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실은 녹색광선에서 나온 『결혼·여름』를 구매하고 싶었는데 가격을 생각하며 미뤘는데 이번에 책세상에서 나온 걸 보고 구매했다. 예쁜 건 녹생광선의 책이 진짜 예쁘다. 덥다. 조금이 아니라 제법 많이 덥다. 읽는 즐거움이 더위를 잊을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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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6-17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나목 갖고 싶게 만들었네요.
요즘 드라마 ‘졸업‘ 보고 있는데 고등학교 국어에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가르치더군요.
가끔 국어 교과서도 좀 훑어봐야겠구나 싶더군요.
나목은 저도 읽었는데 내용이 기억이 안 나네요.ㅠ

자목련 2024-06-19 10:22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예쁩니다. 읽는 맛이 좋다고 할까요.
국어 교과서 본 기억이 없는데 궁금해지네요.
 
우리의 여름에게 에세이&
최지은 지음 / 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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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눈을 감는다. 그리는 얼굴이 있다. 그려지지 않는다. 떠오르지 않는다. 형체도 없는 얼굴, 그러나 선명하다. 가만히 세 글자, 당신의 이름을 불러본다. 최지은의 『우리의 여름에게』를 읽을 때는 몰랐다. 읽고 나서 나는 읽는 내개 그 얼굴을 그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여름에 돌아가신 엄마였다. 소소한 일상의 기쁨이나 환한 웃음 대신 무겁고 피곤한 낯빛이 전부였던 얼굴. 그러나 내가 모르는 얼굴이 있을 것이다. 내가 모르는 수줍음과 설렘 말이다. 우리가 보낸 여름에도 그런 날들이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의 부재는 강력하다. 끝내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부재를 인정하는 노력도 할 수가 없다. 인정하는 순간 삶이 무너져내릴까 두려워서.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모든 건 자랑이 될 수 있다. 나의 유일한 자랑, 삶을 지탱하는 자랑, 시인 최지은의 글은 그런 자랑이었다. 오래 듣고 싶은 당신의 자랑이었다. ‘당신의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란 박준 시의 한 구절처럼 말이다.

가장 가까운 이를 떠나보내고 살아가는 일은 상실과 나란히 걷는 일이다. 때로 어깨동무를 하고 발을 맞추고 때로 상실을 부축하거나 상실에게 기대며 걷는 일. 어린 나이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나의 어린이는 그걸 조금 일찍 감당했다. 할머니의 얼굴에서, 큰아버지가 주신 탕수육에서, 선생님의 화난 말투에서. 그러니 저자의 마음속에 자리한 어린이는 열한 살이 넘도록 할머니의 품에 안겨 머리를 감으면서도 할머니의 걱정이 되면 안 되었다.

어디 하나 모날까 봐 조심스럽게 그러나 강단 있게 들려주는 저자의 이야기는 맑은 동그라미 같았다. 조금씩 커져도 절대 터지지 않을 힘을 지닌 동그라미라는 게 느껴졌다. 기억의 시작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엄마,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부재가 익숙했던 시간을 채우던 불안.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할머니의 돌봄과 보살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든든한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자랑이었다. 우주 같은 사랑. 그 사랑을 딛고 앞으로 나간다. 슬픔을 바라볼 힘을 키우고 슬픔이 지나간 자리를 비추는 햇빛을 발견하다.

슬픔을 슬픔으로 바라보는 시간이 지나가면, 슬픔만으로 끝나지 않는 무언가가 오는지도 모르겠다. 그 무언가 때문에라도 슬픔은 슬픔으로 두고 싶다. 언제든 슬플 요량으로 이불 끝을 조금 더 끌어당겼다. 날이 밝으면 이 빛을 기억하며 씩씩하게 나가 걷자고 생각하면서. 한번 더 이불을 끌어당겼을 땐 처음 보는 햇빛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63쪽)





어른이 된 후에 마주한 엄마, 아버지, 할머니, 큰 언니의 죽음이 가져온 상실과 부재는 나의 슬픔의 근원이 되었다. 슬픔의 그물에 빠져지내기도 했다. 저자는 어땠을까. 알 수 없는 어떤 마음이 담긴 글을 읽으며 헤아려본다. 읽다가 가만히 멈추고 읽다가 눈물을 흘리고 읽다가 대견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어진다. 저자의 마음속 어린이를 다정하게 안아주고 싶다. 그러다 금세 글을 읽으며 위로받는다. 특히 이런 글 앞에서 큰 위로를 받는다. 무거운 수박을 굳이 들겠다며 결국엔 수박을 깨트린 다섯 살 어린 손녀를 혼내는 게 아니라 쪼개진 수박을 붙여 모은 할머니. 두부와 콩나물을 사 오라는 할머니의 심부름.

할머니라면 이럴 때 나에게 어떤 심부름을 줄까. 어떤 말을 들려줄까. 할머니의 해답을 상상하면 조금 덜 속상해지는 마음이 있습니다. 두려움도 미움도 잊어버리고 ‘문득 다 괜찮다, 그럴 수 있다’ 하게 되는 마음이. 그러니 매일 아침 현관문을 나서며 상상합니다. 저 방에서 할머니가 나와 오늘 나에게 하나의 심부름을 준다면 무얼까?

ㅡ기쁘렴. 기쁘게 집으로 돌아오렴. (117~118쪽)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막막함을 느낀다. 혼자 해결해야 할 일이라는 걸 알지만 누군가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다. 그럴 때 나는 큰언니를 생각한다. 이상하다. 엄마가 아닌 큰언니라니. 큰언니라면 어떨까.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저자가 할머니가 어떤 심부름을 줄까 생각하는 것처럼. 기쁘게 집으로 돌아오라는 심부름. 큰언니는 마지막 순간에 행복하라고 말했다. 무엇을 하든 행복하라고. 행복이 우선이라고.

엄마는 초여름에 떠났고 큰언니는 막바지 더위와 함께 떠났다. 여름은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더욱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게 성장하는 여름처럼 나 역시 여름을 먹고 살아간다. 술이나 길고 긴 대화에 의지하며 잠들었던 과거의 여름이 지나고 쌓여 고유한 여름밤의 기쁨을 안다. 여름에 물든 상처가 만들어 낸 삶의 풍경을 기억한다. 저자가 스스로를 돌보고 더 깊게 사랑하는 여름. 저자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저자를 돌보러 오는 것처럼 나의 그들도 그렇다는 걸 느낀다. 저자는 그 사랑과 돌봄 덕분에 슬픔과 상처와 결핍은 채워졌고 아무런 조건 없이 선물을 주는 기쁨으로 나누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변했다. 내 마음은 달라졌다. 어린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어린 내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서로 달라졌다. 틈이 생겨버렸다. 구멍이 생겼고 어둠이 오갔고 바다가 출렁이고 그 위로 파도가 오고 또 갔다. 엉뚱한 구멍을 파기도 했고 어둠을, 바다를 손에 쥐려고 힘껏 애쓰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지금의 내가 됐다. (126쪽)

읽을 부분이 줄어드는 게 아쉬운 책이다. 가볍고 가뿐하면서 힘 있는 아름다운 글이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작은 바람을 감출 수 없다. 『우리의 여름에게』는 나누고 싶은 여름이 되었다. 여름이면 생각날 책이 되었고 여름이면 그리울 감정이 되었다. 우리가 지나온 여름과 앞으로 살아갈 여름이 얼마나 환하고 빛날까 기대한다. 어떤 여름은 지독해서 무릎이 꺾이고 주저앉아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뜨거운 여름의 열기를 식혀줄 한 줄기 바람이 함께 할 여름이라는 믿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여름에 보태는 마음을 지키는 마음이 있어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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