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작약의 시간은 끝났지만 시로 작약을 만난다.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작약의 계절에 만났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쉬움은커녕 반갑다. 이렇게 또 작약에 빠져든다. 조용미 시집 『초록의 어두운 부분』에서 발견한 시다. 이 시집을 구매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안희연의 신간을 살펴보다가 문학동네 말고 창비나 문지에서는 어떤 시집이 나왔나 찾다가 조용미의 신간을 보았다. 목차를 보다가 작약을 보았다. 아니, 작약이라니 그럼 이 시집을 사야지.
저 작약의 본을 짐작해 볼까
내 이파의 작약은 한때 귀신이었다가 한때 기린이었다가
한때 흰뺨검둥오리였다가 한때 벚나무모시나방이었다가
한때 거미게였다가
어쩌면 나였던 누구였다가, 단공도 부단공도 모르는 크게
깨우진 자였다가 공재고택의 향나무였다가
이번 생에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이 고리를 끊으려 했던
그저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은 고독한 자였다가
마침내 확연히 명백한 작약이 되었다 내 앞의 작약이 되었다 (「작약의 본생담」 , 전문)
먼 산 작약
산작약
옆 작약
백작약
저수령 넘어 은풍골로 작약을 보러 간다
당신 없이,
백자인을 먹으면 흰머리가
다시 검어진다
잠을 잘 수 있다
백자인을 먹으면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간다
측백나무의 씨
온석 같은 열매 속에는
백자인 여섯 알이
가만히
들어 있다
저수령 넘어 은풍골로 작약을 보러 간다 (「작약을 보러 간다」, 전문)
사진첩에서 작약을 찾았다. 백작약, 사라 작약, 레드 참 작약. 작약이 피고 지던 순간을 떠올린다. 올해의 작약이 준 행복들. 그리고 곧 수국이 가져다줄 기쁨도 생각한다. 물론 『초록의 어두운 부분』에 수국에 관한 시도 있다. 그 시는 수국을 마주할 때 읽어야지.
시가 있어 좋다. 시로 작약을 만나서 좋다. 이런 시를 써 준 시인이 고맙다. 유희경의 「심었다던 작약」에 이어 이제 조용미의 작약도 기억할 것이다. 책장에 조용미의 다른 시집이 있다. 모아두기만 한 시집을 펼치는 여름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