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코아였다 - 알코올 중독자 딸의 상처와 극복의 기록
허선화 지음 / 책과나무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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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같지만 모두가 같은 삶을 살지 않는다. 나와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삶을 이루는 환경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이유로 친구가 되고 그런 거리를 두기도 한다. 아픔이나 상처에 공감하며 이해하거나 처음부터 그것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심리 때문이다.


허선화의 에세이 『나는 코아였다』에 대해서도 누군가 그런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나는 코아(알코올중독자의 자녀 COA: Children of the Alcoholics)란 단어를 몰라서 이 책이 궁금하기도 했다. 어쩌면 코아를 아는 이는 그래서 이 책이 불편하고 읽기 힘들 수도 있다.


지금은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안다. 도박, 마약 같은 범죄의 범주가 아니더라도 중독은 그 자체로 병이라고 인식한다. 정신의학과의 진료를 받아 상담이나 약물로 치료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그러나 70~80년대는 아니었다. 중독이라는 걸 몰랐다. 그저 남편이 술만 마시면 술 때문에 폭력적이 된다고 여겼다. 술만 아니면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아내와 아이들은 남편과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야 했다.


얼마나 힘들고 무서웠을까. 하지만 십 대의 저자에게 그렇게 말해준 이는 없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날은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저자의 아버지는 교사였다. 꽤 안정적인 직업이지만 교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예상 가능한 결과다. 가정을 지키는 중심은 어머니였다. 그리고 그 어머니를 위해 장녀였던 저자는 열심히 공부했다. 두 남동생을 챙기고 어머니를 도왔다. K- 장녀의 굴레였다.


물론 저자의 아버지도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병원에 입원하고 나오면 괜찮은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또 술에 빠져들었다. 기댈 수 있는 어머니가 있어 견딜 수 있었다. 안타깝게 저자가 열네 살에 교통사고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이후의 삶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어머니의 죽음으로 살림을 돌봐준 사촌 언니와 친척이 있었지만 임시였다. 그럼에도 저자는 서울대학교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성적이 좋았다. 그러나 여전히 저자는 자신이 원하는 걸 말할 수 없었다. 홍익대학교 4년 장학생이라는 선생님의 추천을 거부하지 못했다.


세상의 기준, 사람들의 기대, 그것에 철저히 맞춰졌던 나의 야망. 그건 진정한 내가 아니었다. 나는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며 독립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삶의 주체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45쪽)


홍익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러시아로 유학을 다녀온 저자의 이력을 보면 성공한 삶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저자의 내면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것도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아픈 아버지, 사회적으로 실패한 아버지를 남동생에게 맡기고 유학을 선택했을 때 지금껏 아버지를 돌본 시간에 대한 보상 같은 것. 그러나 그 이후의 삶은 더 큰 고통이었다. 고국을 그리워하는 향수병, 갑자기 찾아온 공황장애와 우울증으로 삶은 더 피폐해졌다.


코아는 외로움에 극도로 취약하다. 때로는 나처럼 다른 사람의 의존 대상이 되어 외로움을 극복하기도 한다. 남을 돌봄으로써 자신의 외로움을 극복하는 성향을 ‘동반 의존’이라고 한다. 코아는 나약하지 않고 강해 보여서 타인에게 의지 대상이 되지만, 실상 내면에는 충족되지 않은 의존 욕구가 자리하고 있다. 동반 의존은 코아가 해결해야 할 부정적인 관계 패턴이다. 건강한 상호 의존을 가로막지 때문이다. 코아가 그런 자신의 관계 패턴을 인식하고 노력하면 동반 의존을 줄여나갈 수 있다. 나 역시 지금까지도 노력 중이다. (216~217쪽)


코아인 저자의 이 에세이는 자신의 지난 삶을 천천히 돌아보는 기록이자 상처를 직시하고 치유하기 위해 노력한 일련의 과정이다. 강한 책임감도 일종의 코아의 특징이라는 사실. 생의 마지막까지 병원에 입원하며 보낸 아버지, 아버지가 왜 술에 빠지게 되었는지, 아버지의 상처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중독의 위험성에 무지했던 시절, 누구도 알코올 중독 부모를 둔 자녀의 감정을 돌보지 못했다. 코아였던 저자는 스스로 결정하고 성장해야만 했다.


집사님의 말은 아주 짧았다. “그동안 수고 많았네. 잘 살아왔어.”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내 눈에서 폭포 같은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서러움의 눈물도, 슬픔의 눈물도 아니었다 이해받은 데서 오는,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감동의 눈물이었다. 순간 나는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음을 깨달았다. ‘이거였구나, 내가 원했던 것이.’ 그리고 동시에 하나의 통찰이 섬광처럼 뇌를 0.1만에 스쳐 지나갔다. ‘죄책감! 그거였구나. 내가 아팠던 이유가.’ 집사님이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었다. 수고했다. 잘 살아왔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 뭔가가 풀린 것 같았다. 비밀의 문을 굳게 채워놓았던 자물쇠가 열리고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도 드러났다. (286쪽)


저자는 신을 의지하고 기도를 하고 공부하면서 회복되기를 바랐고 조금씩 회복되었다. 십 대였던 저자에게 누군가 네 잘못이 아니라고. 죄책감은 가질 필요 없다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자신과 같은 코아에게 그러 말을 건네고 있는지도 모른다. 완전한 치유는 아니지만 치유는 계속될 거라는 믿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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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민음의 시 308
김경미 지음 / 민음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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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의 시집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가 궁금했던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시집의 제목 때문이다. 바다, 빗소리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나는 작약에 꽂혔다. 작약을 취급하는 세계라니, 그 세계는 마치 나의 세계 같았다. 시집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그게 정확한 느낌이다. 잘 몰라서 읽고 잘 몰라서 좋다. 잘 몰라서 넘길 수 있고 잘 몰라서 다시 읽을 수 있다.


어쩌다 보니 이런 시를 먼저 읽는다. 그냥 지금 우리의 마음 같아서. 우리의 현실 같아서. 단단하지 않더라도 소멸하지 않았던 어떤 믿음이 한순간에 망가졌다. 망가졌으니 고치면 그만이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서 고치려 하지 않는다. 그냥 눈치를 보고 그냥 무리에 숨으려 한다. 해결과 수습은 시간 문제라는데,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행태를 지켜보자니 화가 난다.



늘 정확하게

네모반듯하거나 동그랗게

잘 지켜 준다니까


천 개의 연장통처럼 뭐든 다 들어 있거나

다 고쳐 준다니까


헛디뎠을 때

굴러떨어질 때

잘못 만났을 때


두드려도 문 안 열릴 때

두드린 적도 없는 문이 확 열렸을 때


해결과 수습은 시간 문제라는데


늘 시간이 없다 (「방법」, 전문)



시는 이래서 좋다. 나는 평론가가 아니니 내 맘대로 해석할 수 있고 내 감정에 끌리는 대로 취하면 그만이다. 다른 독자는 다른 방법이 있겠지만 말이다. 얼마나 많이 배우고 얼마나 많이 실패하고 얼마나 많이 상처를 입어야 인간 구실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더 배워야 할까. 그들이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공부는 끝이 없다는 걸 실천하려고 매번 인생 공부를 하려는 의도일까.



새와 저녁노을을 배우면

기차를 만들 수 있다


연도(年度)를 익히면 후회를 배울 수 있다


알파벳 여섯 개의 조합법을 배우면

배신하는 남자와 여자를 만들 수 있다


잠 안 오는 밤에

눈에서 제일 먼 엄지발가락을 주무르면

수면을 부를 수 있다


나사를 풀 때

심장과 바깥쪽

어느 쪽으로 돌려야 하는지는

수십 년째 외우지 못하고 헛돌지만


혀 닦는 법과

밤하늘의 별빛들만 제대로 습득해도

인간 구실을 할 수 있다 (「공부」, 전문)



그런가 하면 이런 시는 너무 슬퍼서 목이 멘다. 너무 아파서 심호흡을 한다. 무엇에 휩쓸리는도 모르고 이리저리 휩쓸리는 삶이 떠올라서. 그 삶이 하나가 아니라 무더기여서 아프다.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설령 도움을 청했다 해도 내미는 손이 없어서 잡을 손이 없어서 결국 혼자 안간힘을 쓰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결국에 닿지 않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기분. 다시 일어설 힘이 아니라 욕할 힘이 필요하다는 절절함이 느껴진다고 할까. 실컷 욕을 해도 괜찮다고 거든다. 아니, 나부터 한바탕 시원하게 욕을 해 볼까.



휩쓸려서 얼굴을 떨어뜨린 적이 있었다

시간을 버린 적도 많았다


휩쓸려서 폐허라는 말을 사랑하고

포도나무 밑 그늘이란 말을 좋아해서

곤란했던 때도 있었다


신발을 구겨 신듯

성격에 휩쓸려

인간에게도 바다에게도 가지 못했다


후회에는 갔다


나 혼자 내 힘으로

매번 (「휩쓸리다」, 전문)



나 없는 사이에 부가 내 발목을 훔쳐갔다

바닥에 주저앉았는데

바닥이 아니라고 했다


다시 보니 손목도 없어졌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다들 뭔가 애써 감추고 있는 눈치다


바닥에 앉으면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더니


별빛들이 매일 그런 식으로 계단을 오른다더니


다시 보니

목도 눈도 훔쳐 가고 없다


욕 좀 해도 괜찮을까요? (「바닥」, 전문)



진정된 마음으로 이제 이 시를 말해보자. 그래, 이 시였다. 이 시집의 표제 말이다.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를 마주하는 시. 상상하게 된다. 미용실 의자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아니, 나 이거나 당신일게 분명하다. 나도 “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란 말을 기억했다가 꼭 말해보고 싶다.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살아 있는 게 너무 재밌어서

아직도 빗속을 걷고 작약꽃을 바라봅니다


몇 년 만에 미장원엘 가서

머리 좀 다듬어 주세요, 말한다는 게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말해 버렸는데


왜 나 대신 미용사가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잡지를 펼치니 행복 취급하는 사람들만 가득합니다

그 위험물 없이도 나는

여전히 나를 살아 있다고 간주하지만


당신의 세계는

어떤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오래도록 바라보는 바다를 취급하는지

여부를 물었으나


소포는 오지 않고


내 마음속 치욕과 앙금이 많은 것도 재밌어서

나는 오늘도

아무리 희미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바다 같은 작약을 빗소리를

오래오래 보고 있습니다 ( 「취급이라면」, 전문)



어떤 이별을 상상하기도 하고 영원한 작별을 그려보기도 한다. 소식이 끊긴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일까. 아니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미련한 태도일까. 그 무엇이든 상관없다. 나는 이곳에서 여전히 바다 같은 작약을 빗소리를 오래 오래 보고 있으니까. 작약을 만나려면 한 계절을 기다려야 하는데 조바심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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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12-12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김경미 시인의 시보다 이 시집은 공감도가 더 높아졌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건 또 왜인지 모르겠네요.
도서관에 있는지 검색해보고 없으면 구입해야겠어요.
나의 세계가 취급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도 생각해보게 되고요.

자목련 2024-12-15 10:21   좋아요 0 | URL
잘은 모르지만 이 시집의 시 가운데 일상을 다룬 시와 공감할 수 있는 시가 많았던 것 같아요.
나인 님도 즐겁게 만나실 바라요^^

꼬마요정 2024-12-12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뭔가 울컥 합니다.
‘후회‘는 배우자마자 쓸 수 있는 것 같아요ㅠㅠ

자목련 2024-12-15 10:25   좋아요 1 | URL
그쵸, 그 부분은 정말 울컥해요!
후회는 조금 천천히 써도 좋은데...

전야제 2024-12-13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드려도 문 안 열릴 때
두드린 적도 없는 문이 확 열렸을 때˝
이 구절에 꽂혀서 저도 이 시집 꼭 읽어야겠어요!
항상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목련님의 감수성으로 섬세하게 어루만져주시는 따뜻한 글 덕분에 힘이 납니다!^^

자목련 2024-12-15 10:26   좋아요 1 | URL
아마도 다른 시도 많이 꽂히지 않을까 싶어요!
저야말로 이렇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큐브 창비교육 성장소설 13
보린 지음 / 창비교육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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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이라는 시간은 딱 1년만 고생하면 다음으로 나갈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고3은 중요하다고 말한다. 스트레스를 동반하지만 이 시간만 지나면 뭔가 다 해결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냥 고등학교 3학년일 뿐인데 말이다. 강원도 고성의 바닷가 마을에 사는 ‘연우’가 어느 날 큐브에 갇힌 설정으로 시작하는 보린의 『큐브』에서도 마찬가지다. 연우도 고3이다.

이유도 모른 채 투명한 정육면체 큐브에 갇혀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지구 둘레를 돌고 있다. 같은 반 친구들은 연우를 찾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다. 연우는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무기력 그 자체다. 잠이 쏟아지고 잠에서 깨면 배가 고프다. 다행인 건 언제나 유부초밥이 있었다. 이상한 건 어디선가 ‘채집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빨간 공, 언제나 같은 자리, 정육면체 한가운데 떠있다. 홀로그램 비슷한 것으로, 연우가 깨어날 때는 투병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모래시계처럼 아래에서부터 빨갛게 차오른다. 가끔 매미 소리를 낸 다음 메시지를 보여 준다. 넌 채집되었다, 근처에 먹을 게 있다, 의식을 통제할 거다, 내용은 딱 세 종류다. 공이 완전히 빨갛게 채워지면 큐브 안팎의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온다. 연우 자신만 빼고. (19쪽)

연우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는데 어느 순간 ‘항상성 붕괴……부접합……조사종료……’란 말이 뜬다. 그리고 연우는 다시 교실로 돌아온다. 놀라운 건 연우가 큐브에 갇힌 아니 채집된 시간이 무려 1년이었고 실종 상태였다는 것이다. 돌아온 연우는 일상을 되찾으려 하지만 자신만 빼고 모든 게 달라진 현실을 확인한다. 연우가 좋아하던 해고니는 꿈이었던 서퍼가 아니라 서프 숍에서 일을 하고 다른 친구들도 대학에 갔다. 연우도 대학 입시를 위해 도서관에 다닌다.

연우에게도 변화가 있다. 그건 연우만이 아는 비밀이다. 큐브에 갇혔을 때 채집된 장치와 거기에 복제된 자아인 젤리 곰이다. 작고 귀여운 젤리 곰은 연우가 말을 할 때마다 연우와 같은 목소리로 말을 한다.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 목소리는 진짜 연우의 마음 같다. ‘나는 우연우, 너야’라고 말하는 젤리 곰이라니. 이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조금씩 연우는 또 다른 연우인 젤리 곰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연우는 1년 전 해고니에게 하려 했던 고백을 하지만 해고니는 연우가 고성을 떠날 거라며 받아주지 않는다. 연우는 해고니가 좋아서 고성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한다. 아버지도 예전과 다르게 연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한다. 막연하게 대학에 가려고 했던 마음을 돌아본다. 그리고 해고니가 왜 서퍼가 아니라 서프 숍 직원으로 일하는지 왜 바다를 무서워하는지 알게 된다.

연우는 큐브에서 빠져나왔지만 여전히 갇혀 있었고, 1년이 지났어도 지난여름 교실의 공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때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아무것도 리셋하지 못한 채, 되풀이되는 과거의 한순간 속에 갇혀 있었다.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알지 못한 채, 해고니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던 그때 그 순간 속에. (178~179쪽)

보린의 『큐브』 는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모른 채 대학 입시만을 위해 살아가는 고3의 고민을 SF라는 설정을 통해 보여준다. 연우가 큐브에서 보낸 1년이라는 시간은 인생 전체로 보면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고3이라는 시간도 다르지 않다. 앞으로 살아갈 인생을 위한 고민은 1년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니까. 연우 같은 고3이나 청소년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닐 것이다. 여전히 원하는 바를 찾지 못하고 과거의 한순간(큐브)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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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서울 경기권에 어마 무시한 첫눈이 내렸다.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엔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았다. 첫눈이라는 걸 확인할 정도가 전부였다. 11월에 내린 첫눈과 함께 가을은 감쪽같이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가을은 아직 남아있다. 곳곳에서 붉은 단풍나무와 노란 은행잎을 볼 수 있다. 그래도 12월이니 마음은 겨울로 이동한다.


12월이라고 쓰고 보니 마음이 바쁘다. 딱히 잡힌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뭔가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게 있는 것만 같다. 그런 게 있던가.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 한 해의 마지막이 달이라는 게 뭔가 압박으로 다가온다. 30일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 올해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 그러나 반문한다. 그럼 뭘 했어야 하지? 나름의 계획들은 언제나 그렇듯 무산되고 목표는 달성되지 않았다. 아, 모르겠다. 12월이라서 그런가 보다.


기분이 좋아지는 책 이야기를 하자. 단 두 권이 주는 만족과 행복. 어제 도착한 책이다. 김소연 시인의 『생활체육과 시』, 스콧 피츠제럴드의 『바질 이야기』. 잠자냥 님의 리뷰를 읽고 구매했다. 땡투도 함께. 표지도 너무 근사하다. 책 구매에 있어 표지가 미치는 영향은 이렇게 크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 작고 가볍다. 그러니 금방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미루지 않고 바로 읽어야만 가능하다.







김소연의 『생활체육과 시』는 아침달의 ‘일상시화’ 시리즈다. 난다의 ‘시의적절’ 시리즈와 비슷하다. 시를 좋아하는 이이라면 시인의 산문과 시를 함께 읽을 수 있다. 두 시리즈를 비교해도 좋을 것 같다. 출판사의 같은 듯 다른 기획, 독자의 선택의 폭은 다양해진다.


일기예보를 자주 찾아본다. 폭설이 올까 무서우면서도 눈을 기다리기도 한다. 겨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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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12-03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바질책 샀어요ㅋㅋㅋ˝생활체육과 시˝는 제목이 독특하네요. 꼭 무슨 교양과목 중에 있을 것 같은;;

자목련 2024-12-04 12:57   좋아요 0 | URL
12월엔 바질~~
<생활제육과 시>는 정말 강의 제목 같기도 해요^^

구단씨 2024-12-03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바질이야기.
소개글 흥미로워서 궁금했는데, 저도 이번 기회에 장바구니에 쏘옥~ 합니다.

여기는 첫눈이 완전 함박눈 수준으로 내리다가, 거의 매일 비가 내리다가 그럽니다.
겨울이 추운 건 당연한데, 조금만 추웠으면 좋겠네요.

자목련 2024-12-04 12:58   좋아요 0 | URL
바질, 같이 읽어요!
너무 춥지 않은 겨울, 적당한 추위를 기대해요^^

희선 2024-12-08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해 마지막 달도 조금 있으면 삼분의 일이 가겠습니다 늘 십이월엔 한 게 없네 하는군요 2024년에 더 한 듯합니다 눈이 많이 와서 피해도 있다고 하는데, 눈을 못 본 저는 부럽기도 합니다 눈이 와도 피해가 없으면 좋을 텐데...

자목련 님 감기 조심하세요


희선

자목련 2024-12-09 15:31   좋아요 1 | URL
어느 지역은 폭설로 피해가 크고 어느 지역은 눈을 보기 힘들죠.
희선 님도 아프지 마시고 따뜻하고 건강한 날들 이어가세요^^
 
운명의 꼭두각시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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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하지 않고 학습하지 않은 삶은 바깥에 있다. 일부러 안으로 들이지 않는다면 생이 끝날 때까지 바깥에 존재한다. 자연스럽게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통로가 되는 것, 소설이 아닐까 싶다. 윌리엄 트레버의 장편소설 『운명의 꼭두각시』을 읽으면서 그랬다. 아일랜드의 역사를 잘 모르는 나는 이 소설을 통해 그것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 지독하게 아픈 역사의 상처와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에 대해서. 소설은 한편으로는 역사소설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 그들의 사랑에 관한 소설로 각인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역사를 다른 소설을 바깥에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 그 결과는 한강의 2024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진 건 아닐까.


윌리엄 트레버의 『운명의 꼭두각시』는 시대적 배경과 없다면 내가 느낀 것처럼 복잡하게 다가올 소설이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편에서 반대였던 독일군과 싸운 아일랜드가 독립을 원했지만 그것은 이뤄지지 않았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루기 위한 아일랜드와 영국 사이의 갈등과 싸움은 계속된다. 그 과정에서 배신과 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서로를 적대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애나 우드컴은 영국인이지만 아일랜드 남자와 결혼했다. 킬네이에서 퀸턴 가문의 안주인으로 어려움에 처한 아일랜드를 도왔다. 그런 애나 우드컴의 증손자이자 주인공인 윌리의 어머니도 영국인이었다. 그들이 사는 로크 지방은 서로 다른 종교를 존중하며 각자의 신념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그들의 평화를 지켜주지 않았다. 윌리의 개인교사인 킬개리프 신부와 가업인 제분소를 운영하던 아버지 윌리엄 퀀턴도 시대에 희생된 이들이다. 킬개리프 신부는 아일랜드의 제국주의 혐오자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아버지는 영국이 아일랜드의 독립을 막고자 파견한 왕립 경찰대 ‘블랙 앤드 텐즈’가 스파이를 처단하는 명목으로 생을 마감했다. 퀀턴 씨의 저택은 불길에 휩싸였고 집안에 있던 가족들의 죽음도 있었다. 잔인하고 끔찍했다. 남편과 두 딸을 잃은 윌리의 어머니에게 남은 생은 화염으로 무너진 저택 그 자체였다. 저택을 재건할 의지는커녕 삶을 살아가기 힘들 정도였다. 위스키에 취한 일상을 보내는 큰 딸을 윌리의 외조부모는 그냥 볼 수 없었다. 딸이 걱정되어 수차례 편지를 보내며 아일랜드를 방문하겠다 하지만 윌리의 어머니는 편지를 읽지 않는다.


그리하여 윌리의 이모가 사촌 메리엔을 데리고 퀸턴가에 오게 된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윌리와 메리엔의 만남 말이다. 그야말로 운명적인 만남이다. 윌리와 메리엔 사이의 사랑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시대의 불운 같은 건 잊어버리고 둘 사이의 사랑이 폐허가 된 킬네이를 다시 세우며 살아가면 좋았을 것이다. 윌리와 메리엔에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은 둘 사이의 절절한 마음을 잘 보여준다. 윌리의 시선에서 들려주는 처음은 조금 복잡하고 어렵지만 메리엔의 등장으로 독자는 퀀텀가를 떠날 수 없게 된다. 소설은 윌리와 메리언, 그리고 그들의 딸인 이멜다의 관점으로 그들의 사랑과 남겨진 이들의 삶을 들려준다.


비가 내렸다. 광택이 나는 나무관 위에서 조약돌 하나가 덜그럭거렸다. 당신이 고개를 숙이고 턱을 가슴 쪽으로 세계 누르는 것을 보았다. 한두 번 당신은 얼굴에 손을 올렸다. 당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통 같은 고뇌가 나를 사로잡았다. 당신이 간절히 원하는 위로를 해줄 수 없었고, 손을 잡을 수도, 정직하게 당신만을 위해 울 수도 없었다. 우리는 돌아서서 모두가, 비를 긋기 위해 우산을 들고, 무덤에서 멀어졌다. (194쪽)


아름다운 퀸턴가의 비극과 그곳에서 피어나는 사랑. 그러나 윌리는 사랑이 아닌 퀸턴가의 복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킬네이를 떠나야 했고 돌아올 수 없었다. 그가 떠난 킬네이엔 메리언과 딸 이멜다가 있었다. 아버지는 볼 수 없었지만 이멜다는 잘 성장했다. 하지만 운명은 이멜다를 그냥 두지 않았다. 퀸턴가의 비밀을 찾아 나서고 운명의 그늘은 이멜다를 조종한다. 노년이 돼서야 메리언과 재회한 윌리는 이멜다를 지킨다.


반쯤 탄 집이 아무리 음울해도,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아도 당신이 거기 속했으므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그곳이었다. 내 존재의 모든 세부, 내 몸의 모든 혈관, 모든 흔적, 내 모든 친밀한 부분이 눈을 감고 쓰러지고 싶게 만든 그 부드러움으로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263~264쪽)


“내 말은, 이멜다, 일이 그렇게 된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일은 우연히 일어난단다.” (291쪽)


어렵고 힘든 소설이었다. 밖에 있던 나는 소설을 통해 아일랜드의 아픈 역사 속으로 아주 살짝 들어간 기분이다. 운명의 소용돌이에서 힘겹게 살아남은 사람들.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이다. 아일랜드와 영국의 아픈 역사는 물론이고 윌리와 메리언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모든 걸 포기할 수 없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굴곡진 삶을 버티고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서로를 향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그들은 사랑했고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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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1-27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예언자의 노래> 읽었는데, 그 책은 가상현실이구요, 이 리뷰 보니 이것도 얼른 읽고 싶네요. 아일랜드 작가들은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자목련 2024-11-28 17:30   좋아요 1 | URL
아일랜드 작가를 많이 만난 건 아니지만 그들만의 결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레이스 님도 즐겁게 만나시길 바라요.

2024-11-27 1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1-28 1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