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에는 단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무가 주는 기쁨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어쩌다 보니 나는 같은 것을 보고 읽고 있었다. 다큐에서는 소나무, 자작나무, 은행나무를 다뤘다. 방송을 통해 나무와 숲,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 책은 미야시타 나츠의 『양과 강철의 숲』이란 장편소설이다. 한 마디로 말하지만 무척 아름다운 성장소설이라 하겠다. 주인공 도무라가 조율사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룬 잔잔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향하 열정, 그리고 그 안에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만나는 일은 즐거운 감동을 안겨준다. 그러나 이 소설이 더욱 빛나는 건 잔잔하게 스며드는 아름다운 비유와 묘사 때문이다. 피아노를 통해서 보여주는 나무와 숲이라니. 나무와 피아노는 어울리지 않을 조합처럼 보이지만 무척 잘 어울린다.

 

 ‘건반은 총 여든여덟 개가 있고 각각의 건반에 한 줄부터 세 줄까지 현이 연결되어 있다. 강철 현이 똑바로 뻗고 그 현을 때리는 해머가 마치 목련 봉오리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는 광경을 볼 때마다 등이 꼿꼿하게 펴졌다. 조화를 이룬 숲은 아름답다.’ (25쪽)

 

 도무라는 우연하게 학창시절 학교 강당에서 조율사 이타도리가 조율한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 그 순간, 그는 숲을 떠올리고 자신의 진로를 결정한다. 조율을 공부하고 이타도리가 일하는 악기점에 취직한다. 그곳에서 피아노를 닦고 선배를 따라 피아노 조율을 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며 고객와의 응대와 피아노에 대한 것을 배우고 익힌다. 그럼에도 조율사로의 일은 쉽지 않다. 고객과 스스로에게 완벽하면서도 만족한 조율을 하고 싶지만 매번 좌절만 경험하는 것이다. 나는 피아노를 잘 모른다. 피아노를 떠올리면 아름다운 연주곡과 어린 시절 다니고 싶었던 피아노 학원 앞을 서성이던 모습만 따라온다. 그리고 연주자인 피아니스트가 전부다. 피아노를 조율하는 조율사는 이상하게 낯설게만 느껴졌다. 소리를 매만지는 가장 중요한 사람인데도 말이다. 소설은 조율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 세계로의 여행은 생경하면서도 신비롭다. 어쩌면 주인공 도무라가 산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피아노를 통해 숲을 보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숲을 떠난 온 도무라에게 숲은 언제나 가족이자 그리움이었다. 언제나 그곳에 자리한 나무와 숲.

 

 나무는 나무다. 내가 이름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그곳에 존재하며, 봄이 되면 싹이 트고 잎이 자라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는다. 이윽고 열매가 익으면 나무에서 떨어진다. 어린 시절, 가을날, 숲에서 놀다 보면 사방에서 열매가 투둑투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내 마음을 차분하게 진정시켰다. 내가 있어도 없어도 나무 열매는 떨어진다.’ (40쪽)

 

 소설은 조금씩 조율사로 성장하는 도무라와 함께 같은 듯 다르게 조율사로 살아가는 이들이 들려주는 조율에 대한 해석과 의미, 그리고 그들이 만나는 고객들의 이야기다. 단순하게 취미로 피아노를 치는 사람,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 피아노로 인해 변화하는 저마다의 이야기는 또 하나의 연주가 된다. 하나의 피아노는 연주자의 손을 만났을 때 숨을 쉬고 조율사의 손을 만났을 때 편안하게 노래를 한다. 도무라는 자신이 조율한 피아노를 연주하며 성장하는 쌍둥이 자매를 통해 더욱 조율이 주는 기쁨과 감동에 다가간다. 천부적인 재능이 아니라 부단한 연습과 노력으로 자신의 일을 찾아가는 과정은 많은 생각을 안겨준다.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이에게,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고민하는 순간과 만나는 이에게 이 소설은 따뜻하면서도 강한 응원과 격려가 된다. 피아노를 통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모습은 기대하지 않았던 감동으로 다가온다.

 

 음악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음악을 들은 기분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만 들을 수 있는 음악. 가즈네의 지금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계속 이어져온 음악. 짧은 곡을 연주하는 동안에 몇 번이나 반복해서 물결이 일렁였다. 가즈네의 피아노는 세계와 이어진 샘이어서 마르기는커녕 듣는 사람이 설령 하나도 없었더라도 계속 샘솟아왔다. (197쪽)​

 

 영롱하고 투명한 피아노 연주를 들은 듯한 소설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무와 피아노를 다룬 『슈베르트와 나무』가 생각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무 칼럼리스트 고규홍과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김예지가 함께 나무를 만나는 이야기다. 나무처럼 편안하고 햇살처럼 포근해서 기분이 좋아지는 책이다. 본다는 것에 익숙해져서 다른 감각을 잊은 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색다른 자극을 전한다. 고규홍과 김예지는 같은 나무를 보고 느낀다. 안내견 찬미와 함께 매일 걸었던 길에서 만나는 나무와 꽃은 이전의 그것이 아닌 나무로 다가온다.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고 귀를 기울인다. 고규홍이 나무에 대해 설명해주면 김예지는 감각에 더해 기억한다. 우아한 아름다움을 뽐냈던 꽃이 진 목련나무를 천천히 만난 김예지가 들려주는 말은 철학적이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여겨 다른 무엇으로는 확장시키지 못한 사유였다.

 

 ‘나무는 제 향기와 빛깔에 따라 다른 소리를 가진다. 바람이 몰래 다가와 잎을 스쳐 지나는 소리가 나무마다 다를 뿐 아니라, 나뭇가지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 또한 분명 다르다.’ (『슈베르트와 나무』, 53쪽)

 

 “나무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면 믿으시겠어요? 뭐라고 딱 잘라서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나무의 크기뿐 아니라 나무의 생명 에너지 같은 기운이 분명히 내 주위에 드리워졌다는 느낌이 있어요. 사람을 압도하는 무엇인가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어요.​” (『슈베르트와 나무』, 254쪽)

 

 두 사람의 나무 체험을 통해 김예지는 눈이 보이지 않아 걸림돌이라 여겨졌던 나무와 음악이 닮았다는 걸 발견하는 것처럼 두 사람의 여정의 끝에 서면 나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나무가 더 좋아졌고 눈이 아닌 몸으로 나무를 만나고 싶어졌다. 한 번 쯤 눈을 감고 나무를 안아보고 나무 잎사귀를 만져보고 나무 기둥에 코를 대보고 싶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나무를 통해 느낀다. 봄을 품고 있을 나무를 상상하게 만든다. 『양과 강철의 숲』과 『슈베르트와 나무』은 묘하게 닮았다. 행간에 퍼지는 숲의 향기와 피아노 소리를 듣는 순간, 진짜 휴식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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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런거리는 유산들
리디아 플렘 지음, 신성림 옮김 / 펜타그램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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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쁜 일이 생기거나 나쁜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은 가족이다. 남보다 못한 가족이라는 말도 맞지만 말이다. 어제는 작은아버지와 통화를 했다. 사촌 동생의 한의사 합격에 대한 축하 인사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친밀하게 교류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강한 줄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명절에 아버지 형제를 만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진다. 당연한 일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설이 다가오는 시기라 그런지 식탁 위에 놓인 사진을 들여다본다. 많지 않은 식구들, 봄날의 햇살 아래서 다들 환하게 웃고 있다. 아버지를 보내고 찍은 사진이다. 

 

 ‘죽은 사람들은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마음껏 그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우리 안에 계속 존재한다. 하지만 반대로 그들 쪽에서는 우리를 더는 생각할 수 없다. 대화는 오로지 상상 속에서만 이어진다. 그들에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40~41쪽)

 

 아버지를 기억할 물건은 거의 없다. 반대로 큰언니의 흔적이 남은 물건은 아주 많다. 우리는 그냥 이렇게 큰언니와 함께 산다. 다만 곁에 없을 뿐이다. 사라진다는 건 어떤 것일까. 가끔 생각한다.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것, 다시는 만질 수 없는 것, 대화를 나룰 수 없는 것, 특유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것. 소소한 것들을 함께 나누지 못한다는 건 때로 비통함을 몰고 온다. 곧 첫눈이 올 것이다. 나는 그 소식을 큰언니에게 전할 수 없다. 아니, 전할 수 있다. 눈이 온다는 걸 말하면 그것을 큰언니가 듣는다는 걸 믿으니까. 사촌동생의 한의사 합격 소식을 마음으로 전하면서 함께 기뻐한다.

 

 사라져서 곁에 없다는 것, 그것이 죽음의 실체일까. 죽음에 대해 말하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주인을 잃고 남겨진 물건들의 이야기를 하면 맞을까. 주기적으로 큰언니 집에서 일정의 시간을 보낸다. 그것엔 나를 기다리는 나무들이 있고 살아 있음을 증명하듯 윙윙 거리는 커다란 냉장고가 있다. 계절마다 이불장을 환기 키시고 이불을 꺼내 소독한다. 큰언니를 증명하는 신분증, 여권, 일기장, 영수증은 아직도 그곳에 남았다. 천천히 정리해도 괜찮다는 이유로, 미뤄둔 일이다. 유산을 정리한다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럴 때마다 리디아 플렘의 『수런거리는 유산들』 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는다. 책은 부모님의 유산으로 남겨진 집을 정리하면서 상실의 슬픔과 애도를 기록한 책이다.

 

 부모님의 공간은 그들의 부재를 증명한다. 병원에 계시다고 믿고 싶어도 현실은 거짓을 곧 드러낸다. 저자는 부모님의 집을 정리하는 게 싫고 두렵다. 왜 자신이 그러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화가 난다. 남겨진 자의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주저한다. 건강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잡다한 것들, 어머니가 소중하게 간직한 손수 만든 옷들, 외가와 자신이 태어났을 상황에 대한 기록들.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에게 보낸 750통의 편지. 저자의 부모는 젊은 시절 나치 수용소에서 보냈고 그곳에서 살아남았다. 잔인한 고통의 시절을 살아온 그들의 연애편지를 읽기가 겁나는 건 당연하다. 외동딸에게 그 경험을 들려주고 싶지 않다. 털끝만큼도 그 시절에 닿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한 번도 그 편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기에 그것은 영원히 봉인되어야 맞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알지 못하는 부모님을 만나는 건 얼마나 기쁘고 감격적인 일인가. 사랑을 담아, 서로를 그리워하며 안타까워하는 편지를 통해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더 사랑할 계기가 되었다. 부모님의 삶을 향한 의지와 자신을 향했던 사랑도 함께. 큰언니의 일기장을 발견했을 때 나의 기분도 그러했다. 내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어느 해의 일기장을 펼쳤다가 낯익은 글씨체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여행의 흔적이었다. 여행을 좋아했던 큰언니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곳에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죽음은 이렇게 우리 가까이에 머물고 있다.

 

 슬픔은 더욱 깊어진다. 허전함과 결핍함, 동요의 순간들과 함께. 상냥함이 깃든 슬픔이 퍼지는 것은 더 나중이다. 부드러운 아픔이 떠난 사람의 이미지를 둘러싼다. 죽음이 우리 안에 똬리를 틀었다. 그 흐름에는 지름길이 없다. 거기서 빠져나올 수도 없다. 죽음은 삶에 속하며, 삶은 죽음을 껴안는다. (119~120쪽)

 

 그러니 부모님의 죽음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들의 공간과 물건을 영원히 간직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한꺼번에 정리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당연한 게 아니다. 사라졌다고 해서 사라진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이미 안다. 사랑하는 이들의 부재는 크면 클수록 그들의 존재감도 커진다는 걸 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애도의 기록이자 죽음에 대한 『수런거리는 유산들』이 증명한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많이 안다고 자부한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누군가는 죽음을 준비하며 살기도 하고 누군가는 죽음과 멀찌감치 떨어져 지내기 위해 노력하고 누군가는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려 한다. 죽음은 그렇게 우리 삶에 존재한다. 동시에 부재한다. 며칠 후 명절에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며 다시 또 대화를 통해 떠난 가족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리움의 두께가 얼음처럼 단단해진다.

 

 무의식이 과연 죽음을 아는지, 단지 이별만 아는 건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다. 영원히 헤어진다는 건 무슨 뜻일까? 영원히라는 건 또 무슨 뜻일까? 사는 법을 배우려면 인생을 송두리째 쏟아부어야 할까? 우리는 성인이면서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 어린아이로 남을 수 있을까? 몸속에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켜켜이 간직하는 나무들처럼? (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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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1-26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즐거운 설연휴 보내세요.
새해엔 소망하시는 일 이루는 한 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목련 2017-01-30 11:58   좋아요 1 | URL
건강하고 행복한 연휴 보내고 계신가요?
일기예보와는 다르게 포근한 날들이어서 편하게 지낸 것 같아요.
항상 다정한 서니데이 님의 인사 고맙고 감사합니다.
 

 

 겨울을 살고 있다. 많은 눈이 내렸고 바람이 강하게 분다. 겨울다운 날들이다. 지난주에는 친구 집에 다녀왔다. 지난주는 방탕의 주였다. 그냥 전화통화를 하다가 즉흥적으로 약속을 잡았다. 지척에 살지만 3년 가까이 얼굴을 보지 못한 친구다. 부끄러움이나 속상함을 감추지 않아도 괜찮은 친구다. 그러니까 나의 모든 것을 아는 친구인 것이다. 뜨거운 유자차를 마시고 딸기와 빵을 뜯어 먹으며 일에 대해,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오후 늦게 길어진 햇살에 몸과 마음을 기댄 시간이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이를 먹고 그리고 늙어가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우리 제법 좋은 사이다.

 

 곧 설 명절이 다가온다. 떡국을 먹고 예배를 드리고 잠시 떨어졌던 가족을 만난다. 외국에 계신 선생님은 이즈음 한국이 그리울 것이다. 그리운 곳이 있다는 건 슬픈 건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대상이 있다는 건 삶의 이유가 되기도 하니까.

 

 친한 동생이 명절 선물로 책과 컵을 선물했다. 그녀는 좋은 책을 고르는 안목이 높다. 설빔을 받은 것처럼 즐겁다. 나는 그것을 기다릴 것이고 기다리는 동안 충만해질 것이다. 그리고 나도 몇 권의 책을 고른다. 조금 느리고 천천히 내게 와도 좋을 책들. 고독에 대한 아름다운 글을 기대하는 올리비아 랭의『외로운 도시』, 유홍준의 『안목』, 임경선의 『자유로울 것』, 다치바나 다카시의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 그리고 착한 가격의 한국문학 『호텔 프린스』.

 

 

 

 

 

 

 

 

 

 

 

 

 

 늙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그건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는 말이다. 한치 앞에 닥칠 일도 모르며 사는 게 삶이라는 생각이 가슴 한구석에 뿌리를 내렸다. 주어진 시간에 대해 낭비가 아닌 제대로 된 소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 늦었지만 한 해의 리스트를 쓴다. 별반 다르지 않은 것들, 건강, 감사, 사람, 그리고 어떤 것.

 

 쌓였던 눈은 녹지만 겨울은 계속된다. 곧 봄이 올 거라는 생각은 잊는다. 겨울을 사는 일, 겨울에 사는 일, 지금의 계절은 겨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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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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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려진 것들, 알고 있는 게 전부는 아니다. 그럼에도 전부를 알려는 이는 많지 않다. 자신이 속한 기관과 사회에 대해서도 그렇다. 자신이 해야 할 일만 할 뿐 잘못된 것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누군가는 그렇게 사는 게 속 편한 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나의 기관이 상징하는 이미지, 그것은 누가 만든 것일까. 경찰서, 법원, 변호사 사무실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곳이지만 거부감이 든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방문해서는 안 될 곳처럼 여겨진다. 판사 문유석은『미스 함무라비』를 통해 그런 편견이나 두려움을 내려놓게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우리는 대체로 법원과 판사에 대해 잘 모른다. 그뿐 인가, 뉴스를 통해 수없이 많이 들어온 고소, 고발, 원고, 피고라는 용어도 정확하게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대화나 협의를 통해 분쟁을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도 법의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법을 잘 안다고 억울한 일이나 사건 사고에서 원하는 결말을 이끌어내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법 없이 산다는 건 거짓말이다. 가기 싫어도 경찰서에 갈 일도 생기고 법원의 조정을 받을 일도 생긴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게 우리네 삶이니까.

 

 책은 소설 형식으로 법원의 일상을 보여준다. 법원이라는 공간에서 인간이 아닌 판사로 존재하는 사람들, 판사와 인간 사이에서 오가며 고민하고 갈등한다. 법의 틀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듯 보이지만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이다. 가상의 서울중앙지법 44부 합의부 재판부에서 한세상, 임바른, 박차오름 세 명의 판사가 맞는 다양한 사건은 언론을 통해 익숙한 것들이다. 술에 취한 여제자를 성추행한 교수의 사건, 의료사고로 죽은 아들에 대한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어 시위를 하는 할머니, 잊힐 권리를 주장한 국회의원, 아버지의 재산으로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는 형제들의 분쟁사건, 불륜을 저지른 아내가 남편을 죽인 사건. 특정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한 우리 이웃의 이야기다. 누군가는 억울하다고 누군가는 부당하다고 누군가는 정당방위를 외친다.

 

 소설 속 사건을 읽다 보면 처음엔 원고의 편에 섰다가 피고의 말을 들으면 그쪽으로 기울기도 했다. 그러다 마음속 나의 판결과 판사의 판결이 같으면 기뻐하고 다르면 화가 나기도 했다. 하나의 사건에 딸린 기록지의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말은 정말 놀랐다. 양쪽의 말을 모두 정독해야 하는 일, 그리고 법률에 맞게 최선의 판결을 해야 하는 판사의 노고를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에서는 등장하는 세 명의 판사는 가장 현명하고 지혜롭게 판결을 내리려고 노력한다. 밤을 새워 기록을 읽고 또 읽으며 법 앞에 만민이 평등하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말이다. 특히 초임 판사 박차오름은 더욱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소설 속 판사의 모습은 픽션이니 진짜 판사의 모습을 소설 속 그것과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

 

 “법정에서 가장 강한 자는 어느 누구도 아니고, 바로 판사야. 바로 우리지. 그리고 가장 위험한 자도 우리고. 그걸 잊으면 안 돼.”(281쪽)

 

 그럼에도 소설을 읽고 난 후 마치 거대한 성역과 군주처럼 여겨졌던 법원과 판사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은 작아지고 멀게만 느껴졌던 거리도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다.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것이라도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바라보는 법원이라는 숲은 너무 멀리 있다. 그 안의 판사라는 나무도 마찬가지다. 튼튼하게 잘 자란 나무가 좋은 숲을 이루듯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실행하는 판사들이 믿음의 법원을 만들 것이다. 그리하면 법원이라는 숲은 그들만의 숲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린 모두의 숲으로 그 안에서 누군가는 쉼을 얻고 위로를 받을 수도 있겠다. 그런 숲을 희망한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 그 숲을 지키고 관리하는 건 우리 모두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 시작은 관심이고 실천으로 『미스 함무라비』를 읽는 것은 아주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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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의 달인 - 2014년 제45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구효서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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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까운 사이일수록 함부로 대한다. 그래서 가족과 친구에게 받은 상처는 회복되기 어렵다. 두고두고 마음 깊은 속에 자리 잡아 그것은 거대한 괴물처럼 자라기도 한다. 곁에 있어 소중한 줄 모르고 산다는 식상한 말로 대신할 수도 없다. 구효서의 『별명의 달인』은 이처럼 가장 가까운 이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우리 주변의 모습처럼 편안하고 한편으로는 생경하다.

 

 각자의 방식으로 과거의 연인을 그리워하는 「화양연화」, 남편과 딸을 잃고 삶을 내려놓은 여자의 공허한 눈빛에서 절망을 읽는 「저 좀 봐줘요」, 갈망하는 삶을 찾아 고국을 떠난 누나의 목소리에서 어떤 불안을 감지하는 「나뭇가지에 앉은 새」, 상대의 특징을 꿰뚫어 별명의 달인이 된 친구라면 아내가 왜 떠났는지 이유를 알 것 같은 「별명의 달인」까지 구효서의 소설 속 인물은 모두 가장 가까운 이에 대해 잘 모른다. 안다고 착각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 닮았다는 걸 우리는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보통의 부자 관계와는 다른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인 「바소 콘티누오」에서 음악을 향한 열정이 그렇다. 자기만의 방식대로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와 막내아들. 자신의 결혼을 반대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막내아들은 아버지를 모시고 같은 공간에서 그의 뜻을 거부하지 않고 살아간다. 음악에 대한 애정이 가장 완벽하게 닮은 부자의 모습은 나란히 걷는 연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주보기는 분명 아니지만 외면도 아니다. 마주보기보단 더한 마주보기라는 걸, 알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완강히 마주보기를 꺼리는, 두 사람에게 작용하는 동일한 종류의 의지가 실은 모종의 연대거나 유대라는 걸. 그리움, 혹은 면구(面灸)의 유대.’ (「바소 콘티누오」, 25~26쪽)

 

 아버지와 아들이 그러하듯 「모란꽃」에서는 어머니와 딸이 그렇다. 어린 시절 집에 있던 펄 벅의 소설 표지의 꽃에 대한 형제들의 기억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저마다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의미나 목적을 두지 않고 글쓰기를 하는 화자는 엄마의 중얼거림을 생각한다. 누군가의 답을 듣기 위한 말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로하고 견디기 위한 말들이었다. 형제들의 기억 속에 표지가 모란꽃 아니더라도 그 책을 기억하며 그 시절을 공유할 수 있었다.

 

 ‘엄마는 쉴새없이 중얼거렸다. 숨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시상 참 모를 것투성이여, 나가 왜 사는 중 알았으면 진즉 못 살았을 것이다…… 엄마의 엄청난 말들이 허공에 흩어졌다. 글로 쓰니까, 허공에 흩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쓸모 있는 내용도 아니고, 다시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들이었으나, 흩어져 사라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모란꽃」, 80쪽)

 

   ‘그 속절없는 일에 애초부터 무슨 이유나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었질 않은가. 버릇처럼 숨처럼 그래온 것뿐이니까. 40년간 하염없이 이어져오기만 한 거였으니까. 그리고 이어져갈 거니까.’ (「모란꽃」, 112쪽)

 

 그게 무엇이든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놓치고 절망의 늪에서 그 존재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삶은 이전과는 다른 무엇이 될 것이다. 그런 이유를 붙이자면 암 투병 중 병원에서 사라진 형과 언어장애가 있는 동생의 이야기「6431-워딩.hwp」에서 동생에게 말(글)을 가르쳐준 형은 그런 존재였다. 형은 모두에게 사라진 존재지만 동생은 끊임없이 그와 소통하는 기이한 이야기.

 

 ‘나에겐 말과 글이 따로일 수 없다. 허공에서 흩어지되 무시로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거듭 뜻을 일깨우는 게 형의 말이라면, 내 말은 언제든 다시 들춰볼 수 있는 글이 된다.’ (「6431-워딩.hwp」, 142쪽)

 

 가족과 함께 읽으면 하나의 추억을 소환해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숨쉬는 것처럼 편안하고 쉬운 일상은 어디에도 없지만 숨쉬는 것처럼 지속되는 일상에 대하여. 닮았지만 닮지 않은 이야기들, 알 것 같지만 어렵게 다가오는 이야기. 시간이 지나서야 자신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가족에게서 나를 발견하는 가족의 이야기. 구효서는 똑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하나 같을 수 없는 게 삶이라는 걸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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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7-03-04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