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에세이&
백수린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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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을 당신도 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조심스럽게 건넨 선물. 우리가 어느 순간 같은 문장에서 마음이 따뜻하게 차올랐을지도 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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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백 브라질 산타 루시아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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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잊고 있었다. 매달 커피 쿠폰이 발급 되고 있었다는 걸. 맛있는 커피, 책,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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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이해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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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관계에는 약간의 밀당이 있다. 업무적인 관계에서는 갑과 을에 해당하는 밀당, 가족 사이에서는 눈치라는 밀당이, 연애에서 밀당은 애정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면 맞을까. 알다시피 밀당은 피곤하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과 기세를 잡고 싶은 마음이 더해진 밀당은 상대가 손을 놓아 끝나기도 한다. 좋은 밀당은 존재할까. 확신이 없을 때까지 솔직한 마음과 애정 표현은 숨겨두기 마련이다. 아, 내가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피곤해진다. 오랜만에 읽은 연애소설 『사랑의 이해』 때문이다. 동명의 드라마 원작이라 입소문이 많이 났다. 소설은 2019년에 나왔고 그때에는 소설의 존재를 몰랐다. 드라마를 본 게 아니라서 드라마와 비교할 수 없다. 이혁진의 『누운 배』가 생각났을 뿐이다. 내가 만난 『누운 배』를 떠올리면 같은 작가일까 싶었다. 


소설은 은행에 근무하는 상수, 미경, 수영, 종현 네 사람의 연애 이야기다. 은행의 업무나 근무 형태, 은행원의 일상에 대한 부분도 많이 드러나 흥미롭다. 수영과 상수는 서로에게 호감을 있었지만 상수가 약속을 펑크 내는 바람에 사이가 틀어졌다. 상수는 업무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명하지만 수영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상수는 수영과 틀어졌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옆자리 수영에게 신경이 쓰인다. 수영이 청경 직원 종현과 사귀고 있다는 소문까지 들린다. 수영은 상수가 아닌 종현을 선택한 것이다. 은행 내부에서는 그 둘의 관계를 다 아는데도 정작 둘은 아니라고 발뺌한다. 


마음 한구석에 수영을 담았지만 상수는 대리인 미경과 연애를 시작한다. 프로젝트 때문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미경과 상수의 연애는 시작되었다. 당당하게 상사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모두의 축하를 받는다. 무엇 하나 빠질 게 없는 여자였다. 능력도 집안도 모든 남자가 연애와 결혼을 꿈꾸는 그런 상대였다. 그런데 상수는 그런 미경을 만날 때마다 자꾸 수영과 비교를 하곤 한다. 미경이 골라는 옷, 미경이 선택한 것들에 자신이 끼워 맞추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주도권이라고 할까, 둘 사이의 관계가 미경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는 게 분명했다.


미경은 좋은 여자였다. 좋은 연애 상대였고 아마 좋은 결혼 상대일 터였다. 좋다고 다 갖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갖고 싶지 않다고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좋다는 것은 그런 뜻이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다음에는 좋은 여자. 어른들이 누누이 얘기하고 부모님이 불경처럼 외며 등골 휘게 깔아 준 철로가, 궤도가 진즉부터 그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108쪽)


행복에는 늘 거짓이 그림자처럼 드리우기 마련인 듯했다. 아니, 어쩌면 거짓은 조명일지도 몰랐다. 행복이라는 마네킹을 비추는 밝고 좁은 조명. (148쪽) 


미경에게 상수가 느끼는 감정은 종현이 수영에게 느끼는 그것과 비슷했다. 경찰 시험을 준비하던 종현의 집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고 종현은 시험을 포기하고 더 많은 돈을 위해 다른 직장을 구하려 한다. 수영은 그런 종현에게 자신이 집에 들어와 생활하고 공부하라고 격려한다. 둘의 동거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현명한 선택처럼 보였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했고 서로를 위해 자신의 공간과 시간을 내어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영의 배려에 종현은 미안함이 커졌고 점점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두 사람이 함께 살게 된 것은 분명 사랑 때문이겠지만, 사랑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기울어 있었다. 아마 사랑일 것이라고, 그렇게 믿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도, 더 깊게 생각하는 거도 지금의 자신에게는 모두 사치였다. 어쩔 수 없는 일 같았다. (160쪽) 


사랑으로 시작된 관계는 사랑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순간과 마주한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걸 감당할 수 없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하려 애쓰는 순간 사랑은 사랑에서 벗어나 책임으로 변질되다. 그 책임에 수반된 희생은 서로를 갉아먹고 균열을 만든다. 시험에 떨어진 종현의 괴로움과 처음 동거를 제안한 수영은 지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수영과 종현의 사랑은 적당한 거리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한 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서로가 보듬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활에 지쳤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에 지쳤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외롭게 견디는지 종현은 알아주지 않았다. 스스로 파 내려간 갱도 속에 혼자 있었다. 종현도 원치 않게 굴러떨어진 구덩이였고, 올라올 수 없으니 더 파 내려갈 수밖에 없다는 것 역시 알았지만, 수영 자신 역시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쳤으니까. 사랑이나 생활 어느 한 가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생활에, 생활해 가야 하는 사랑에 지쳤으니까. (224~225쪽)


어디든 사랑은 시작되고 끝나지만 『사랑의 이해』에서 배경이 은행이라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수많은 돈이 오가지만 그 돈의 주인이 되는 일은 어렵다는 걸 실감 나게 그려낸다. 사랑에 있어 자본은 얼마나 중요한 기능을 하는지 5포 세대를 떠올리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사랑한다면 계급과 지위는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결혼만 현실이 아니라 사랑 역시 현실적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사랑의 이해는 가능할까. 사랑의 믿음이라면 가능할까. 잘 모르겠다. 네 사람에게는 가능했을까? 미경과 만나면서도 수영을 만나면 쉼 쉬는 기분을 느낀 상수, 자신을 사랑하는 상수의 마음을 이용하면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종현을 놓을 수 없는 수영. 그 모든 관계를 끝낼 수 있는 이가 바로 자신이라는 걸 아는 수영. 드라마에서는 어떤 결말을 맺었는지 모르겠지만 소설 속 넷의 관계가 다다르는 끝은 가장 현실적인 맺음이 아닐까 싶다. 사랑의 이해나 믿음을 떠나 그들에게 사랑의 성장은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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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먼지 2023-03-20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사귀지 않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사귀는데 사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좋아하는 상황.. 이게 뭔가요 진짜ㅠㅠ

자목련 2023-03-21 15:08   좋아요 1 | URL
오래전 연애 프로그램, 엇갈린 사랑의 작대기를 보는 듯한.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 묘사는 좋습니다. ㅎ

페넬로페 2023-03-20 1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드라마로 먼저 봤는데 정말 고구마가 맞더라고요~~사랑이 이리 어려울까도 싶었지만 사랑말고도 아직까지 사회적 차별이 존재한다는게 어이 없었어요.
책을 읽을지는 고민했는데 안 읽기로 했습니다^^

자목련 2023-03-21 15:10   좋아요 2 | URL
사회적 차별, 과연 언제야 사라질까요. 페넬로페 님 댓글 덕분에 드라마는 패스하기로 ~~

난티나무 2023-03-21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드라마로 봤어요. 하아… 은행이라는 ‘꽉 막힌’ 조직과 계급과… 그 안에서 과연 사랑이 가능하기나 할까요. ㅠㅠ

자목련 2023-03-21 15:10   좋아요 0 | URL
난티나무 님도 고구마였나 봅니다. ㅎ 서열, 조직, 계급, 줄서기, 은행 뿐일까 싶어요.

레삭매냐 2023-03-21 1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과 책임, 그리고 기울기
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네요.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은행이 네 사람이 벌
이는 사랑의 무대라는 점이
상징하는 점이 크다는 생각
이 들었습니다.

결혼도 사랑도 결국에는
‘레알‘이었습니다.

자목련 2023-03-22 11:07   좋아요 2 | URL
네, 배경인 은행이라서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사랑, 결혼은 어렵고 사는 건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ㅎ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
제시카 아우 지음, 이예원 옮김, 김화진 독서후기 / 엘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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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예정된 만남은 아니었을까 싶은 책이 있다. 비비언 고닉의 에세이 『사나운 애착』을 읽고 돌아가신 엄마와 보낸 시간이 떠올랐다. 그 시간은 너무 짧았고, 한 공간에 같이 지내본 기억이 거의 없다. 논과 밭으로 일하러 가신 엄마, 공부한답시고 학교로 도망친 나. 그러니 여행은 우리 생에 없었다.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 방을 얻기 위해 여관에서 하루, 대학 졸업 때 자취방에서 같이 누운 게 전부였다. 그러니 엄마와의 여행을 다룬 제시카 아우의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는 내게 아리고 아픈 소설이었다. 연이어 엄마와 딸에 대한 글을 읽은 일은 예상하지 못한 복잡한 감정을 몰고 왔다. 


150쪽 분량의 이 소설은 화자인 ‘나’와 엄마의 일본 여행 기록이다. 도쿄, 오사카, 교토로 이어지는 여행기는 일본의 미술관과 박물관, 작은 가게, 식당에서 볼 수 있는 일본의 풍경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담아낸다. 동시에 모녀의 과거를 소환하여 그들의 현재와 과거 시간을 들려준다. 서로 다른 도시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모녀는 다른 시간에 각자 도쿄에 도착한다. 그간의 사정을 풀어낼 만도 한데 모녀의 대화는 단조롭다. 흔한 잔소리가 걱정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묘하게 둘의 관계가 이상적으로 보인다. 


가장 친밀하면서도 내밀한 관계이자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 그것은 알 수 없는 통증을 불러온다. 소설을 읽는 이라면 반드시 통과하는 어떤 시간과 감정이라 고 할까. 딸이든 아들이든 엄마와 단둘의 여행이 있다면 그 여행의 기억과 추억을 불러온다. 누군가 늦지 않게 둘만의 여행을 계획하고 예약을 서두를지 모른다. 엄마, 혹은 아빠와의 여행을 말이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일본을 둘러보는 과정에 독자는 저절로 여행에 합류한다. 그런 점을 매력이라 볼 수 있지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건 엄마와 딸, 두 사이의 거리와 그 안에 흐르는 감정이다. 홍콩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정착해 살아야 하는 엄마의 시간, 성장하는 내내 엄마를 이해하기 어려운 딸. 그 기억의 조각이 여행하는 동안 하나둘씩, 떠오른다. 낯선 언어를 배우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자친구를 사귀는 그런 평범한 일상이지만 언제나 나를 지배하는 건 엄마의 가르침이라고 할까. 아니, 엄마의 문화와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갈망 같은. 


엄마를 이해하는 일은 타인을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어쩌면 엄마에게 닿고자 하는 여행이 아닐까 싶다. 비단 엄마와 ‘나’뿐 아니라, 언니와 ‘나’, 연인 로리와 ‘나’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살면서도 서로가 품은 기억은 같지 않다. 때문에 여행의 기록은 마치 꿈이나 상상처럼 다가온다. 선명하기보다는 흐릿한 안개가 가득한 곳을 헤쳐 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엄마를 생각했고 언젠가 그러니까 아직 오지 않는 어느 날, 한 번도 보지 못한 엄마 집에 단 한 가지 임무를 위해, 엄마가 한평생 쌓아온 소유물을 정리해 모두 치우고 꾸리러 언니와 함께 가게 될 것을 생각했다. 그 집에서 발견할 온갖 것들을 생각했다. 패물과 사진 앨범과 편지와 같은 사적인 물건도 있겠고, 꼼꼼하고 잘 정돈된 삶의 표지도 있겠지. 계산서와 영수증, 전화번호, 주소록, 세탁기기와 드라이어 사용 설명서 같은. 욕실에 있을 반쯤 쓴 향수와 크림이 든 유리병과 용기. 엄마가 매일 치르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길 그리도 꺼리던 의식의 흔적. (126쪽)


돌아가신 엄마가 견디고 살아냈어야 할 것들에 대해 가만히 생각한다. 소설 속 엄마처럼 낯선 언어를 배우고 낯선 나라에서 삶을 살지 않았지만 조심하면서 살았던 엄마. 엄마의 마음은 무엇으로 가득했을까. 문득 궁금하면서 쓸쓸해진다. 엄마와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어디가 좋을까 상상하다가 고개를 젓는다. 너무도 멀어진 엄마와 나 사이, 그 사이엔 그리움만이 쌓였다. 


가만가만 말하는 소설이다. 가만히 상대를 응시하고 가만히 말을 건네고, 가만히 속엣말을 듣게 되는 그런 소설. 한 번 더 말해 달라고 부탁해야 할 것 같은 소설. 알 것 같으면서도 도통 잡히지 않은 모호함이 만들어내는 아름답지만 쓸쓸한 외로움이 전해지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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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3-16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움만 쌓이네...

어느 노래 가사였던가요.
그리움이 쌓이기 전에 더 좋은
추억들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럴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이
살아가는 시간들이 아쉬울 따름
입니다.

가만가만한 소설, 만나 보고 싶네요.

자목련 2023-03-17 09:18   좋아요 0 | URL
이 소설, 묘한 분위기가 가득합니다. 영화나 드라마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매냐 님은 어떻게 만나실까 궁금하네요^^

2023-03-16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7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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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사랑하는 일보다 어렵다. 사랑이란 범주에 이해가 포함되는 거라 볼 수도 있겠지만 사랑은 가슴이 하는 일이고 이해는 머리가 하는 일이라 여겨서다. 가강 가까운 가족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 중 하나다. 도무지 모르겠다. 왜 그러고 사는지 말이다. 당신들의 삶을 강요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독립된 존재로 보고 거리를 두면 그나마 괜찮을 텐데, 그게 참 안된다. 내 핏줄, 내 부모, 내 형제, 나와 떼어낼 수 없는 존재라 어쩔 수 없다. 그러니 한평생 빨치산으로 사회주의자로 살아온 아버지를 이해하는 일, 당연 불가능해 보인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정지아의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그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와 함께 살아온 이들, 그들이 겪은 세상이다. 


아버지 ‘고상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구례로 내려온 딸 ‘고아리’. 장례식장에서 죽은 아버지와 보내는 짧은 시간, 그곳으로 모여든 이들이 아버지가 살아온 삶의 증인이자 역사였다. 이름도 낯선 이들,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아버지의 죽음에 한달음 달려온다. 딸이라는 자격으로 그들을 맞이하고 인사를 나누지만 불편한 마음을 감추기가 쉽지 않다. 장례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일사천리로 알아서 진행하는 사람들, 한때 동지였던 이들, 아버지와 반대편에 있던 이들, 연좌제 때문에 남보다 못한 사이로 지냈던 친척들이 오직 한 사람 아버지 때문에 한자리에 모였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생의 처음이 그러했든 생의 마지막도 모두에게 둘러싸여 배웅을 받는다. 장례식 또한 축제가 맞았다. 그들이 꺼내든 아버지와의 인연은 오래전 잊고 있던 아버지의 시간을 불러온다. 아버지로 인해 죽음을 당한 가족들, 그로 인해 평생을 형제가 아닌 원수처럼 지냈다. 아버지와 같은 빨치산이었지만 아버지처럼 살아남지 못하고 먼저 떠난 이들의 후손은 아버지를 원망했고 부러워했다. 살아남은 아버지에게는 그 사실이 부채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하나둘 떠오르는 아버지와의 기억, 사회주의자로 같은 뜻을 품고 살아온 어머니와 진정한 민중에 대해 투닥거리며 보낸 날들, 감옥에서 나와 어렵사리 얻은 자신을 극진하게 아끼고 보듬어준 아버지, 구례로 내려와 「새농민」이 알려주는 대로 농사를 짓는 아버지, 자신을 감시하는 형사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아버지, 마을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내일처럼 달려가 도움을 주던 아버지. 그에게 사상이나 이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촌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뜻을 꺽지 않았던 아버지. 모든 일에 “긍게 사람이제.”라는 말을 습관처럼 달고 살았던 아버지. 


아버지 ‘고상욱’이 살아온 사회가 역사의 일부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내가 빨치산이나 사상범에 대해 안 건 그 아주 먼 나중이었다. 그러니 연좌제나 빨치산을 가족으로 둔 삶에 대해서는 소설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얼마나 순화된 내용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온 시대가 그랬다.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선을 긋고 그들은 그르다 말했다. 아버지는 그 선 자체였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 선을 자유롭게 오가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아버지를 알고 지낸 이들은 세대, 계층, 의식 구분 없이 모두가 아버지에게 덕을 보았다. 


딸은 생각한다. 아버지는 과연 누구였을까. 어떤 사람이었을까 알고 싶다. 한 번도 제대로 묻지 못한 질문으로 남았다. 이제는 묻을 수도 답을 들을 수도 없다. 아버지와의 화해는 끝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안타깝고 애절하다. 화장한 아버지를 아버지의 발자취가 남은 곳을 다니며 아버지의 마음 몇 점을 남겨두는 딸을 아버지는 흡족할 것 같다. 아버지를 이해하는 일은 여전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한국 근대사의 무거운 한 축을 담은 소설이지만 무거움에 취하지 않는다. 하나의 축제의 장으로 왁자지껄한 수다와 유머와 정이 넘친다. 아버지이자 고달픈 생을 살다간 한 인간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으로 시작된 화해와 용서를 담담히 전할 뿐이다. 어쩌면 작가는 자전적 소설이라 조금 더 신중을 기했을지도 모른다. 혁명가, 사회주의자, 이념가가 아닌 아버지의 해방일지. 그가 모든 것에서 해방되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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