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
제시카 아우 지음, 이예원 옮김, 김화진 독서후기 / 엘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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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예정된 만남은 아니었을까 싶은 책이 있다. 비비언 고닉의 에세이 『사나운 애착』을 읽고 돌아가신 엄마와 보낸 시간이 떠올랐다. 그 시간은 너무 짧았고, 한 공간에 같이 지내본 기억이 거의 없다. 논과 밭으로 일하러 가신 엄마, 공부한답시고 학교로 도망친 나. 그러니 여행은 우리 생에 없었다.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 방을 얻기 위해 여관에서 하루, 대학 졸업 때 자취방에서 같이 누운 게 전부였다. 그러니 엄마와의 여행을 다룬 제시카 아우의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는 내게 아리고 아픈 소설이었다. 연이어 엄마와 딸에 대한 글을 읽은 일은 예상하지 못한 복잡한 감정을 몰고 왔다. 


150쪽 분량의 이 소설은 화자인 ‘나’와 엄마의 일본 여행 기록이다. 도쿄, 오사카, 교토로 이어지는 여행기는 일본의 미술관과 박물관, 작은 가게, 식당에서 볼 수 있는 일본의 풍경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담아낸다. 동시에 모녀의 과거를 소환하여 그들의 현재와 과거 시간을 들려준다. 서로 다른 도시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모녀는 다른 시간에 각자 도쿄에 도착한다. 그간의 사정을 풀어낼 만도 한데 모녀의 대화는 단조롭다. 흔한 잔소리가 걱정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묘하게 둘의 관계가 이상적으로 보인다. 


가장 친밀하면서도 내밀한 관계이자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 그것은 알 수 없는 통증을 불러온다. 소설을 읽는 이라면 반드시 통과하는 어떤 시간과 감정이라 고 할까. 딸이든 아들이든 엄마와 단둘의 여행이 있다면 그 여행의 기억과 추억을 불러온다. 누군가 늦지 않게 둘만의 여행을 계획하고 예약을 서두를지 모른다. 엄마, 혹은 아빠와의 여행을 말이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일본을 둘러보는 과정에 독자는 저절로 여행에 합류한다. 그런 점을 매력이라 볼 수 있지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건 엄마와 딸, 두 사이의 거리와 그 안에 흐르는 감정이다. 홍콩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정착해 살아야 하는 엄마의 시간, 성장하는 내내 엄마를 이해하기 어려운 딸. 그 기억의 조각이 여행하는 동안 하나둘씩, 떠오른다. 낯선 언어를 배우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자친구를 사귀는 그런 평범한 일상이지만 언제나 나를 지배하는 건 엄마의 가르침이라고 할까. 아니, 엄마의 문화와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갈망 같은. 


엄마를 이해하는 일은 타인을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어쩌면 엄마에게 닿고자 하는 여행이 아닐까 싶다. 비단 엄마와 ‘나’뿐 아니라, 언니와 ‘나’, 연인 로리와 ‘나’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살면서도 서로가 품은 기억은 같지 않다. 때문에 여행의 기록은 마치 꿈이나 상상처럼 다가온다. 선명하기보다는 흐릿한 안개가 가득한 곳을 헤쳐 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엄마를 생각했고 언젠가 그러니까 아직 오지 않는 어느 날, 한 번도 보지 못한 엄마 집에 단 한 가지 임무를 위해, 엄마가 한평생 쌓아온 소유물을 정리해 모두 치우고 꾸리러 언니와 함께 가게 될 것을 생각했다. 그 집에서 발견할 온갖 것들을 생각했다. 패물과 사진 앨범과 편지와 같은 사적인 물건도 있겠고, 꼼꼼하고 잘 정돈된 삶의 표지도 있겠지. 계산서와 영수증, 전화번호, 주소록, 세탁기기와 드라이어 사용 설명서 같은. 욕실에 있을 반쯤 쓴 향수와 크림이 든 유리병과 용기. 엄마가 매일 치르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길 그리도 꺼리던 의식의 흔적. (126쪽)


돌아가신 엄마가 견디고 살아냈어야 할 것들에 대해 가만히 생각한다. 소설 속 엄마처럼 낯선 언어를 배우고 낯선 나라에서 삶을 살지 않았지만 조심하면서 살았던 엄마. 엄마의 마음은 무엇으로 가득했을까. 문득 궁금하면서 쓸쓸해진다. 엄마와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어디가 좋을까 상상하다가 고개를 젓는다. 너무도 멀어진 엄마와 나 사이, 그 사이엔 그리움만이 쌓였다. 


가만가만 말하는 소설이다. 가만히 상대를 응시하고 가만히 말을 건네고, 가만히 속엣말을 듣게 되는 그런 소설. 한 번 더 말해 달라고 부탁해야 할 것 같은 소설. 알 것 같으면서도 도통 잡히지 않은 모호함이 만들어내는 아름답지만 쓸쓸한 외로움이 전해지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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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3-16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움만 쌓이네...

어느 노래 가사였던가요.
그리움이 쌓이기 전에 더 좋은
추억들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럴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이
살아가는 시간들이 아쉬울 따름
입니다.

가만가만한 소설, 만나 보고 싶네요.

자목련 2023-03-17 09:18   좋아요 0 | URL
이 소설, 묘한 분위기가 가득합니다. 영화나 드라마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매냐 님은 어떻게 만나실까 궁금하네요^^

2023-03-16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7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