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아두는 책이 늘어나면서 조립식 책장을 들였다. 책장이라기보다는 책꽂이가 더 알맞은 크기였다. 작은 그곳에 책을 꽂아두는 일은 맛있는 사탕의 껍질을 만지작거리는 것처럼 설렜다. 그리고 제법 책장의 형태를 갖춘 책장을 구입했다. 그 이후 그곳을 채우는데 정성을 쏟았다. 같은 크기의 책장을 하나 더 채우고 나는 더 이상 책장에 대한 욕망을 키우지 않는다. 키우지 않는다고, 다짐하고 다짐한다.


 여러 경로를 통해 그곳에 방을 만든 책은 때로 긴 잠을 자다가 떠나기도 하고, 모두 떠나고 혼자 남기도 한다. 아주 가끔 출판사 별로 책을 정리한다. 이런 즐거운 이벤트에 참여하려고 말이다. 내가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출판사의 책은 무엇인지, 이름만 다르고 하나의 출판사에서 나온 열매는 무엇인지, 고유한 이미지를 지키는 출판사의 책도 찾아보고, 시리즈로 유명한 출판사의 책도 찾아본다. 


 이동진과 정혜윤의 신간이 반가운 위즈덤하우스의 책을 찾아보니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책은 바로 이 두 권이다. 임경선의 『자유로울 것과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이다. 책을 찾기 전에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가장 최근에 읽은 이승우의『사랑의 생애, 한귀은의 『그녀의 시간이 떠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었다. 특히 한귀은의 산문을 애정한다. 전미정의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는 친구에게 선물했는데 친구가 읽고 한동안 그 책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원재훈 시인이 만난 작가들의 이야기 『오직 글쓰고 책읽는 동안만 행복했다』를 읽을 때 정말 즐거웠다. 잊고 있던 책과의 추억이다. 내용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그 책을 만났을 때의 부푼 마음이랄까. 책을 읽는 인간은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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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덥다, 여름이니까. 그래도 더위가 너무 빨리 온 것 같다. 바람이 그립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나는 작년에 선풍기를 사용한 날이 많지 않다. 그러나 올해는 장담할 수 없다. 마트에서 할인하는 아이스크림을 냉장고에 넣어두는 날이 많아졌고 국이나 찌개를 끓이지 않는다. 대충, 먹는다. 대충, 살고 있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그래도 아직까지는 아침 산책을 나가고 성경을 읽고 짧은 기도를 드린다. 나를 위한 기도, 병원에 있는 언니를 위한 기도, 누군가를 위한 기도. 기도가 참 좋다는 걸 새삼 깨달는다. 기도를 하는 동안 나는 단순해진다. 복잡한 것들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걸 느낀다. 기도는 어렵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아주 짧다. 책도 읽는다. 김영하를 만났고 젊은작가(강화길, 박민정, 최은영, 김금희, 백수린)의 소설을 읽는다.

 

 완벽한 여름을 위해 비가 필요하다. 도대체 비는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주말에 많은 비를 만나고 싶다. 아주아주 많은 비. 빗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여름밤. 완벽한 여름, 쏟아지는 비, 김애란의 소설과 박준의 산문, 김엄지의 소설도 다시 읽어도 좋겠다. 그리고 황인찬의 시를 곁들이면 그럴듯한 여름이지 않을까.



 여름 연습

 

 

 무정한 포유동물과 무심한 조류들이 이곳에는 많았는데

 무료한 식물들을 손 내밀어 만져 보면

 왠지 소름이 돋았다

 

 나는 걸었다

 

 흐르는 땀을 의식하지 못하는 채로 새인지 벌레인지 우

는 소리를 듣지 못ㅎ는 채로 숲길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 채로

 

 이 여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격발되는 것이 있다면 격발되는 것이고 죽어 가는 것이

있다면 죽기로 된 것이다 총소리가 들릴 이유가 없는데 총

소리가 들리는 것은

 

 또 어떻게 된 것일까

 

 나는 계속 걸었고 나는 계속 먹었고 나는 계속 쉬기만

했다 그러다 보면 총소리가 또 다시 들려왔는데 쓰러지는

것이 없었다

 

 무고한 벌레들이 내 눈으로 자꾸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여기서 뭘 하면 좋을까 할 수 있다면 좋을까

 정말 그럴까

 

 인간으로 있는 것이 자주 겸연쩍었다

 

 무엇인가 자꾸 내 눈 밖으로 나오려 했는데 완전히 망가

지니 이 여름 속에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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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7-06-22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 산책과 기도, 그냥 이 단어만으로도 청량감이 들어요.

자목련 2017-06-22 11:44   좋아요 0 | URL
여름이라는 계절의 옷을 입었기에, 더욱 그렇겠죠.
blanca 님, 더위와 친하게 지내는 여름이길 바라요^^
 

 

 어떤 사람에겐 나무가 꽃 필요해. 잘 살기 위해서. 흔들리

는 나뭇잎을 보며 그 소리를 듣는 일이. 어떤 사람에겐 남

의 행복이, 또 남의 고통이 필요해. 어떤 가치 없고 무고한

타인의 죽음이 필요하고. 흔들리는 나무 밑에서 그런 비극

을 떠올리며 어쨌든 좀 슬픈 것 같은 순간이 필요해. ‘어떤

사람은 그냥 걷다가도 죽는대. 사랑하다 죽고. 사랑을 나누

다가 기쁨이 넘쳐서 죽고. 산에서 죽고. 바다를 건너다 죽는

대.’어떤 사람에겐 행복이 필요해. 꼭 나무를 보듯 불행이

필요하고. 어쨌든 어떤 믿음, 소망, 관용, 이런저런 이야기

가 필요해.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자신, 옆 사람, 어떤 사람

그것도 아니면 크든 작든 사람을 닮은 그 무엇의 기쁨과 슬

픔이. 우리에겐 우리와 비슷한 형상에 대한 사랑이 필요해.

어떤 나쁜 마음이라도. 잘 살기 위해서. 조각난 팔과 다리.

터지고 일그러진 얼굴에 대한 말이 꼭 필요해. (「어떤」, 전문)

 

 

 학창시절에 시를 암송하던 때가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이 결정되고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지금과는 다른 시대였기에 가능했을 시간. 국어 선생님의 추천으로 책도 읽었고, 요즘 아이들에게는 가능하지 않을 시간이 아닐까 싶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시도 나오고 소설도 나오고. 그건 좋을 걸까. 좋은 시가 많았던 시집이다. 그러니까 내게는 그러했다.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그러나 강한 기운이 전해지는 시집. 김상혁의 다른 시집은 읽어보지 않았으니 그의 시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좋아하는 시를 반복해서 읽는 것, 기록하는 것, 기억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어떤」이란 시가 참 좋아서, 계속해서 읽고 있다. 소리 내어 누군가에게 말하듯 말이다. ‘어떤 사람’이란 말 대신 누군가의 이름을 넣어 읽어 보기도 한다. 아니, 내 이름을 넣는다. 아침마다 만나는 나무의 놀라운 변화를 생각한다. 계절을 오롯이 껴앉는 나무들.

 

 

 하나같이 슬픔의 왕들이에요 나에게도 병원이 필요하지만 나 같은 게 병원에 와도 되는 걸까, 이런 슬픔에도 치료가 필요할까, 동그랗게 둘러앉았는데 나는 고개도 못 들고 (「슬픔의 왕」, 중에서)

 

 

 너무 슬플 땐 무서운 게 없더라네요 아무래도 내겐 공포를 지나질 수 있는 슬픔 같은 건 없으니까, 내가 무언가를 말해도 되는 걸까, 나의 멀쩡한 집과 가족을 어떻게 설명할까 (「슬픔의 왕」, 중에서)

 

 

 슬픔이 넘치는 세상, 절망이 차오르는 세상에 이런 시는 어떤 위로가 될까.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아가는 이들처럼 슬픔에 무뎌진 삶을 어떻게 달랠 수 있을까. 어떤 시는 그렇다. 시를 읽노라면 눈물이 나고, 시를 읽노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언제부턴가 여름이란 단어를 사랑하고 있는 걸 확인한다. 여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으니 말이다. 무성한 풀들, 생명력 넘치는 식물들의 천국 같은 계절. 그 안에서 나도 그들에게 기대어 살아가고 싶은 욕망이 자란다. 그 여름이 내가 알지 못하는 여름일지라도.


 그렇지만 네가 밟은 것, 밟아서 더 깨뜨린 것, 더 깨뜨려서 흩어진 것, 그런 지겨운 것이 죽은 새, 웅덩이, 부서진 울타리, 뒹구는 손을 덮어준다. 풀과 꿈을 키워준다. 다가올 여름과 지나간 여름 사이 슬픔이 있다면 너는 오늘과 슬픔 사이에 있고 싶다. ( 「너의 여름 속을 걷는 사람에게」, 중에서)

 

 

 저녁은 헤어지기 좋은 시간이다. 지치기도 쉬운 시간이구. 하지만 제 손으로 머리칼을 털며 고갤 숙이고 있는 장면만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런 말도 가능하다. 내가 매일 현관으로 쓰러지며 쏟은 별과 모래를 아침마다 네가 예쁘게 비질한다고. (「가정」, 중에서) 

 

 

 아침을 기대할 수 있는 저녁, 헤어지기 좋은 시간이면서 만남을 기다리는 시간. 저녁이 없는 삶이 아니라 저녁을 꿈꾸는 작고 소박한 시를 읽는다. 시인이 남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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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이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었다. 바다가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작년과 올해의 여름은 조금 다르게 형성될 것 같다. 매년 5월과 6월에는 작약과 수국을 보러 수목원에 다녀왔는데 올해는 아무런 계획이 없다. 항상 언니와 같이 다녔기 때문이다. 쉽게 행했던 일들이 쉽지 않은 일들이 되었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맹목적인 믿음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확인한다. 그럼에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건 나무뿐이다. 거대한 바람과 비가 나무를 뽑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아침마다의 산책은 조금 게을러졌다. 오늘도 눈을 뜨고 침대를 벗어나는데 15분의 갈등이 있었다. 햇빛의 세기가 강해지는 날들이 되었다. 나뭇잎이 우렁우렁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자세히 보지 않아서 언제 꽃을 피우는지 몰랐던 산딸나무의 꽃을 보았고 곧 자귀나무의 꽃도 만날 수 있다. 며칠을 벼르다 오늘 아침에는 산딸나무 꽃을 담았다. 나뭇가지가 높아서 꽃을 담기가 힘들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무럭무럭 자라는 나무처럼 내 키도 계속 자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도 하는 아침이었다. 산딸나무 사진과 함께 좋아하는 가로등의 사진도 찍었다. 오랜만에 찍은 거라 괜히 미안했다. 다음엔 종종 만나는 고양이도 담아야지.

 

 

 

 

 

 

 

 

 싱그러운 소설을 읽고 싶다. 싱그러운 소설이 뭐냐고 묻지는 말아주길. 여름 같은 소설, 청명한 기운이 도는 그런 소설. 초록의 냄새를 맡는 듯한 소설. 그러나 읽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 책이란 도도한 존재다. 나를 읽어 봐, 나를 읽어야만 너랑 말을 할 거야, 하는 그런 존재. 싱그러움을 기대하는 소설로는 김영하의 『오직 두 사람제7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히라노 게이치로의 『마티네의 끝에서다. 시집은 신영배의 『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 은 어떨까. 여름에 만나기를 기대하는 소설과 시집은 2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가인 강화길의 소설과 신철규의 첫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이다. 아, 최진영의 장편소설도 있다.

 

 

 

 

 

 

 

 

 

 

 

 가뭄이 길어지고 있다. 시원한 빗줄기를 기다린다. 내일과 모레,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지만 과연 얼마나 내릴지 알 수 없다. 붉은 장미는 조금씩 시들어가고 이웃의 블로그에는 작약의 사진이 올라온다. 언니의 퇴원 후 작약 대신 수국을 보러갈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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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한때 잘 참는 아이였다. 기다리는 일도 잘 했다. 그건 아주 나쁜 습관이었다. 그런데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참고 기다리는 동안 온간 말들이 켜켜이 쌓였다가 사라졌다.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 없어서 그랬던 적도 있었지만 기다리는 그것이 무엇이든 늦은 이유를 따지고 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 통증을 참고 말았다. 미련하고도 미련하게. 과거의 일이지만 현재도 참는 편에 속한다. 특별히 몸 어딘가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다. 이상이 생긴 건 작은언니다. 목 디스크가 심해져서(안타깝게도 심해진 상태에서 병원에 찾았다) 입원 치료를 앞두고 있다. 서울에 있는 병원이다. 이럴 땐 서울에 살고 싶다.

 

 작은언니의 일상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언니를 바라보면서 그 지경까지 몰랐냐고 크게 화를 내지 못했다. 화를 낸다고 해서 언니의 불안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차피 벌어진 상황,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아주 잘 안다. 청소년인 조카에게 엄마의 상황을 전달했고 언니에게 생각을 많이 하지 말라고만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별 의미가 없을뿐더러 내일을 걱정한다고 오늘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분명하면서도 차분하게 말했다. 병가를 낼 수 있는 직장(유급이면 더 좋겠지만)이라 다행이라고, 기간이 길지 않아 다행이라고, 수술이 아닌 다른 선택으로 치료를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그리고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말했다.

 

 당연히 가장 속상한 건 언니다. 누구도 그 아픔을 대신할 수 없다. 누군가는 목 디스크가 별거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언니에겐 대단한 것이다.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 안다고 믿는 것은 다르다. 각자의 인생은 각자의 퍼즐로 만들어지니까. 우연일까, 나는 소노 아야코의 『약간의 거리를 둔다』를 읽었고 많은 위로를 받았다. 어쩌면 이 책은 내가 아닌 언니에게 더 필요한 책인지도 모르겠다. 삶에 대한 태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들려준다. 성급하게 말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온전히 좋은 책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다. 진부한 인생의 조언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는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인생은 좋았고, 때론 나빴을 뿐이다. (74쪽, 「인생은 좋았고, 때로 나빴을 뿐이다」, 중에서)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는 드라마 속 대사처럼 인생이 그러하지 않을까. 너무 낙관적인 게 아니냐고 말한다면 비관적인 것보다 훨씬 나은 거 아니냐고 답하겠다. 당신은 조르바처럼 살고 싶은 욕망이 없느냐고. 어쩄든 소노 아야코의 글은 힘이 세다. 읽는 이에 따라 다르게 스며들겠지만 스며들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둠 없이는 빛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다. 인생이라고 다를 리 없다. 행복은 여간해서는 그 실태를 알아차릴 수 없지만 불행을 배우는 순간, 불행과 다른 행복의 존재를 상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불행은 생각만큼 손해는 아니다. 행복에 대한 갈망은 오직 불행한 가운데 키워지기 때문이다. 절망적인 운명을 똑바로 응시하지 않는 한, 희망의 본질에서 빛나고 있는 삶의  비밀은 영원히 드러나지 않는다. (62쪽, 「불행한 사람만이 희망을 소유한다」, 전문)

 

 속상한 일이 생길 때마다, 걱정거리를 만날 때마다 스프링을 생각한다. 외부의 힘에 변형된 물체가 원래의 모양으로 되돌아가려는 힘을 말이다. 아픈 감정, 상처가 아물고 본연의 마음을 갖는 힘을 생각한다. 언니는 목 디스크라는 외부의 힘에 의해 변형됐고 입원과 퇴원 후, 그리고 회복을 위한 장기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언니를 지켜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언니의 몸과 마음의 준비가 끝날 때까지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무조건 다가갈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은 거리를 두면 아름답다는 말처럼 말이다. 언니와 나의 거리도 그렇다. 가족과 친구, 연인, 그들 사이에 거리가 필요하다.

 

 거리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의미를 갖는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떨어져 있을 때 우리는 상처받지 않는다. 이것은 엄청난 마법이며 동시에 훌륭한 해결책이다. 다른 사람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내 경우엔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면 세월과 더불어 그에게 품었던 나쁜 생각들, 감정들이 소멸되고 오히려 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건 아닌가, 궁금함이 밀려온다. (121쪽, 「떨어져 있을 때 상처받지 않는다」, 전문)

 

 『약간의 거리를 둔다』와 닮은 듯한 시집도 있다. 정호승의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를 함께 읽으면 더 좋겠다.  희망을 거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희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에는 희망이 없다 희망은 기쁨보다 분노에 가깝다

희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절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은 절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다

희망만 있는 희망은 희망이 없다

희망은 희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보다

절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이 중요하다


희망에는 절망이 있다

나는 희망의 절망을 먼저 원한다

희망의 절망이 절망이 될 때보다

희망의 절망이 희망이 될 때

당신을 사랑한다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전문

 

 

넘어지면 넘어지는 대로 넘어져라

결코 넘어지지 않으려고 하지 마라

굳이 뒤돌아보지 말고

넘어지더라도

그 누군가의 가슴에는 넘어지지 마라

오로지 자기의 슬픔 가슴에 넘어져라

하늘이 보이면 하늘을 보고

구름이 보이면 구름의 길을 따라 흘러가라

땅에 손을 짚으면 땅이 되고

물에 팔을 짚으면 그대로 물이 될 때까지

넘어지는 것이 일어서는 것이 될 때까지

일어서기 위하여 다시 넘어지게 될 때까지

누구 손을 내밀어도 선뜻 잡지 말고

아침이슬에 빛나는

풀잎의 긴 손을 잡아라 「넘어지는 법」, 전문


 

 우리가 사는 시대는 희망은 사라지고 절망만 남은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인의 시처럼 절망이 있기에 희망이 존재하는 것. 저마다의 절망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꽃은 얼마나 강하고 단단할까. 언니는 잠시 넘어졌다. 언니에게로 말이다. 이제 일어설 것이다. 일어서기 위해 넘어지게 된 거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제법 병실에 익숙하지만 언니는 그렇지 않다. 병실에서 언니가 더 건강해지고 일과의 거리, 사람과의 거리, 그리고 자신과도 약간의 거리를 두기를 바란다. 약간 쉬기, 약간 혼자 있기, 약간 울기, 약간 웃기. 말이 되는 말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약간이라는 말,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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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30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31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