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던 11월의 마지막 날이다.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면서 12월이라도 잘 살아보자고 혼잣말을 한다.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잠을 자면서 김장 김치로 채워진 냉장고를 보면서 중얼거리는 거다. 김장을 하지 않고도 김장 김치로 냉장고를 채우는 날들이다. 고마운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더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제대로 거절을 하지 못해서 그런 걸까. 냉장고는 고무줄처럼 늘어나지 않는데, 내가 하루에 한 포기씩 김치를 먹는 것도 아닌데. 물론 마음의 소리다. 어쨌거나 맛있는 김치를 먹는 겨울이 남았다.

 

 어제는 제법 긴 통화를 했다.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였고, 그런 전화에는 어떤 상심이 스며들기 마련이다. 그 상심 때문에 자주 연락을 못했으니까.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 제법 괜찮아졌다고 말하면서 좋지 않은 이야기를 전한다고 미안해했다. 살면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나는 많이 힘들었겠다는 말을 건넸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이 현실에서도 일어난다는 걸 우리는 안다. 현실에서 일어나니까 영화가 되고 소설이 된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게 세상사라는 걸 알면서도 그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나를 피해 가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12월에는 상심의 자리에 소소한 기쁨이나 즐거움 같은 게 도착했으면 좋겠다.

 

 핸드폰 메모장에는 이런 메모가 있다. 12월에는 멀리 사는 친구에게 시집 선물하기(그녀가 좋아하는 시인의 이름도 적혀있다), 성탄 카드 보내기. 어려운 일이 아닌데 지키지 못 할 때가 더 많다. 받기만 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는 12월로 만들어야 할 텐데. 더불어 나에게 보내는 마음도 나쁘지 않겠다. 마음을 전할 책으론 필립 로스의 『아버지의 유산』, 문학동네시인선 100 기념 티저 시집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정여울의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에서 골라도 훌륭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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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7-12-01 0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 12월을 맞이하는 기분이 점점 달라져 가요.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네요. 정갈한 글 잘 읽고 갑니다.

자목련 2017-12-01 07:10   좋아요 1 | URL
네, 엊그제가 1월이었나 싶은데 벌써 12월이에요. 제대로 살고 있는 건지, 사는 게 참 두렵다는 생각도 들어요. 건강하고 평온한 12월 시작하세요^^
 

 

 곳곳에 눈이 내렸다. 폭설이 내린 곳도 있고 눈이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곳도 있다. 11월인데 겨울의 절정에 다다른 것처럼 세상이 하얗다. 겨울과 눈은 잘 어울리는 조합니다. 그러나 사고 소식도 들려서 걱정은 커진다. 첫눈이 내릴 때 지인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을 거라고 말했었다. 이 계절에 가장 적절한 선택이다. 첫 문장으로 잘 알려진 소설이지만 때로 그 소설을 추천한 작가로 기억하기도 한다. 내게는 그렇다는 말이다. 바로, 김연수. 그는 이런 글을 썼다. 사랑과 소설이라니. 사랑 같은 소설, 소설 같은 사랑을 꿈꾸게 만든다.

 

 사랑이란 두 사람이 어떤 나라를 함께 여행하는 일과 비슷해요. 두 사람만이 가본 이상한 나라. 그러다가 헤어진다면 그 나라에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혼자서 국경선을 넘는 일. 출국심사를 받기 전, 그가 동고동락했던 현지인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헤어질 때가 되어 “당신은 좋은 여자”라고 말하는 건 남자들의 상투적인 수법이지요. 그건 예의상 하는 말에 불과해요. 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명한 별사도 있었잖아요. 하지만 이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며 허둥지둥 출국 심사장을 빠져나와 그 나라의 국경을 넘어가자마자, 그들은 알게 되죠. 이제 자신이 다시는 그 나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걸. 자신은 영원한 입국거부자의 신세가 되었다는 걸. 모든 게 끝나고 나면 사랑했던 기억은 상투적으로 회고됩니다. 모든 여행의 기억이 낭만적으로 떠오르듯이. 그때가 되면 다들 알게 될 거예요. 상투적으로 회고되는 그 모든 기억 속에서 가장 낯선 말이 그 말이었다는 걸. 당신은 좋은 여자야.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왜 헤어진 것인지. 모두지 이해되지 않는 그 말. 당신은 좋은 여자야.

 

 김연수가 읽고 선택한 문장을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어쩌다 보니 그가 읽은 소설과 시를 계속 말하고 있다. 소설가가 선택한 시라면 어떨까. 그의 소설과 그의 산문집은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책이다. 뭐랄까, 김연수만의 고요하고도 활동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해야 할까. 김연수가 고른 시, 그리고 시에 따른 그의 느낌. 『우리가 보낸 순간- 시』는 날마다 시를 읽는 마음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렇게 눈으로 시작된 하루는 더욱 그렇다.

 

 어떤 시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오고 어떤 시는 첫사랑의 아픈 기억을 꺼내온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들고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정도로 어려운 시도 있다. 내가 읽은 시와 그가 읽은 시의 접점을 찾는 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읽고 이야기하는 시. 하나의 시를 통해 우리는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아무 때나 꺼내 읽어도 좋은 아름다운 시. 아름답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문장들. 시가 있어 시를 통해 새롭게 만나는 세상, 그리고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문장. 그리고 11월이 아니었더라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이런 글들. 안현미의 시 「시간들」에 대한 김연수의 글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안현미의 시보다 김연수의 글이 좋아서 계속 이 글만 읽고 싶어진다. 매년 십일월이 되면 펼치고 싶다.

 

 십일월은 온몸으로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우는 달이랄까요. 어느 밤, 무심결에 창문을 열고 집 앞 골목을 바라보노라니 작은 정원의 나무에서 숨을 쉴 때마다 한 장씩 나뭇잎이 떨어지고 있더군요. 멀리서 아이가 달려가는 듯한 그 소리. 떨어지는 잎들을 보며 도루왕보다 더 빨리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했더라면 그 희미한 소리, 하지만 마치 온 세상이 떨어져 내리는 듯 내 마음을 장중하게 울리던 그 소리를 듣지 못했겠죠. 그리고 몇 개의 낮과 몇 개의 밤이 다시 지나가고 난 뒤, 나뭇잎들은 모두 떨어져 내렸어요. 청소부는 나무의 발치에 떨어진 잎들을 한데 모아 자루에 넣었죠. 그 자루에 나무의 한 해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면 그 소리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요? 잎이 떨어지는 소리들이 어딘가에 있다면, 그 목소리들, 당신이 내게 들려준 수많은 말들도 거기에 있는 걸까요? 지나간 날의 소리들은 어떤 귀로 들어야만 하는 걸까요?

 

 11월은 유독 길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올해도 그렇게 지나간다. 짧은 것보다 긴 게 낫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12월에 대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올해는 11월을 견디기 힘들 뿐이다. 그래서 황현산의 산문집 속 이런 문장을 찾아 읽었다. 오직 11월을 위한 문장처럼 다가온다. 차갑고 선명한 공기를 건넨다고 할까. 11월을 향한 애정이 기지개를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같다.  

 

 11월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마른 잎사귀들이 떨어지고 나면 감춰져 있던 나무들의 깨끗한 등허리가 드러난다. 꽃 피고 녹음 우거졌던 지난 계절이 오히려 혼란스러웠다고, 어쩌면 음란하게 보이기까지 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한 시절의 영화는 사라졌어도 세상을 지탱하는 곧은 형식들은 차가운 바람 속에 남아 있다. 마른 석류보다 더 작은 새들이 주목의 붉은 열매를 쪼다가 돌배나무의 앙상한 가지로 날아올라간다. 높은 가지에서 관목 숲으로 미끄러지듯 떨어져내릴 때는 바람에 날리는 낙엽과 구분하기조차 어렵다. 이제 겨울이 오면 저것들은 어디에 몸 붙이고 살아갈까. 그러나 새들은 욕망도 불안도 떨어져 쌓인 나뭇잎들 속에서 벗어두고 한 알의 맑은 생명으로만 남은 듯하다. (240, 241쪽)

 

 한 계절을 산다는 것, 한 계절을 보낸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자꾸만 생각하는 11월이다. 어제 수능을 마친 아이를 둔 지인에게 고생했다는 문자를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그들에게 11월은 얼마나 힘들고 버거웠을까. 우리는 모두 11월을 산다. 아니다. 우리는 11월을 사는 게 아니라 오늘을 사는 것이다. 11월이 아니라 그저 오늘을 견디는 것. 나는 내 감정에 취해 11월이라는 달에 너무 많은 것을 주렁주렁 달아놓으려 하고 있다. 아직 11월은 끝나지 않았다. 11월의 문장도 계속되겠지만 김상혁의 시로 마무리해도 괜찮겠지. 모두의 11월을 위해, 11월의 안녕을 바라며.

 

 십일월은 내년을 기대하기에도 한 해를 돌아보기에도 좀 이르다. 자동차 정비를 핑계로 부모에게 꾼 돈으로 아이를 지우거나 그런 일을 겪고 내가 개종을 해도 지인들은, 십일월은 참 조용한 달이야, 하고 낮게 중얼거리고는 차를 따뜻하게 끓이기 시작할 만큼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애인과 모텔 전기장판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아버지를 잃게 된 어머니의 나이를 생각하면서. 십일월 우기에 태어났다는 신에 대해 생각하면서. (「십일월」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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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엔 오늘 첫눈이 내렸지만 이곳엔 어제 첫눈이 내렸다. 첫눈이라는 것 외에는 큰 감흥이 없다. 다만 여느 해와 다르게 첫눈이 내리는 광경을 다른 이들과 함께 보았다는 점이다. 예배를 드리러 가는 차 안에서 우리는 첫눈을 보았다. 확인할 수 없는 크기의 첫눈이 아니라 제법 눈송이가 큰 눈이었다. 우리는 저마다 첫눈이 온다고 말했다. 교회에 도착하기 전까지 첫눈에 대해 추위와 김장에 대해 말하였다. 말을 하는 이는 노부부였고 나머지는 추임새를 거들기도 했고 웃음으로 답하기도 했다. 언제 김장을 해야 하는지, 배추 값은 어떤지, 추워서 큰일이라는 둥 소소한 일상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에 감사까지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다시 겨울을 맞고 첫눈을 보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교회에 들어서면서 나누는 인사는 역시 첫눈이 온다는 것이었다. 예배를 드리는 도중에도 첫눈은 계속 내렸다. 작은 창문으로 보이는 눈발이 참 고왔다. 쌓일 정도는 아니라 곧 그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눈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가을은 없다.

 

 겨울이 온 것이다. 첫눈이 내렸고 따뜻한 내의를 입을까 고민하는 날들이 되었다. 장갑은 꺼냈고 덧신을 챙겼다. 더위보다는 추위를 덜 타는 편이지만 추운 겨울은 싫다. 더운 여름은 쓸쓸하지 않지만 추운 겨울은 왜 쓸쓸한 것일까. 사람과 사람의 온도가 더해져야 겨울을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주 지진 소식은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포항에 지인이 살고 있기에 남다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안전지역이라는 건 없다는 생각,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사는 게 뭔지. 마음이 계속 어지럽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행동할 수 있는 동력과 함께 그곳이야말로 사람의 온도가 필요하겠다 싶다. 얇지 않은 겨울이 지속되길. 적당히 두툼한 옷과 적당히 두툼한 마음, 적당히 두툼한 하루가 쌓이기를.

 

 내게도 적당히 두툼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 마음이 책에서 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두툼함을 기대한다. 조남주, 최은영, 김이설, 최정화, 손보미, 구병모, 김성중이 참여한 페미니즘 소설 『현남 오빠에게』와 최근에 배수아의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을 읽은 탓일까. 신간 소설집 『뱀과 물』도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다. 배수아는 여전히 도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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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11-20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긴 오늘 비처럼 날리는 눈이 내렸어요. 처음에는 비가 오는 줄 알았어요.
자목련님이 계신 곳에서는 어제 눈이 내렸네요. 어제는 추수감사절이었다고 하는데, 좋은 시간 보내셨는지요.
저도 얼마전에 배수아 신작 소식 들었어요.
자목련님, 따뜻한 밤 되세요.^^

자목련 2017-11-22 12:37   좋아요 2 | URL
오늘은, 아침에 비가 조금 내렸어요. 완연한 겨울로 들어가는 것 같아요.
서니데이 님, 감기 조심하시고 따듯한 오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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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책, 그리고 여과지까지,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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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공간이 특별한 공간으로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추억을 간직할 때 그러하다. 매일 지나치면서 마주하는 꽃집, 카페, 슈퍼가 이전과 다른 공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장미 한 송이를 사러 간 꽃집에서 주인과 나눈 작은 대화로 기분이 좋아졌을 때 세상의 모든 꽃집이 아닌 그 꽃집에서 나의 꽃 이야기는 시작된다. 카페도 마찬가지다. 업무상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며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던 카페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한다면 그곳을 떠올릴 때마다 얼마나 충만할까. 나만의 이야기를 간직한 카페, 그리고 하나의 테이블만이 들을 수 있는 사연들. 김종관의 『더 테이블』을 읽으면서 존재하지 않는 그 카페를 상상한다. 누군가는 영화로 만났을 이야기.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오롯이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같은 공간, 같은 테이블에서 마주한 네 커플. 서로에 대한 감정을 서툴게 말하며 서로에게 대해 다가가는 예쁜 커플(경진, 민호), 유명 여배우와 예전 남자친구의 어색하면서도 반가운 남녀(유진, 창석), 상견례 대행을 부탁하는 자리로 만난 가짜 모녀(은희, 숙자), 서로가 사랑하면서도 결혼을 선택할 수 없는 커플(혜경, 운철)의 사연을 차례로 들여주는 이야기. 순간순간 나는 테이블이 된다. 상대가 모르게 조금씩 마음을 다스리는 감정을 읽는다. 에피소드 중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을 알려주는 은희와 자신의 딸이 결혼했던 날짜와 같다며 웃는 숙자. 가짜 모녀 사이를 연기하는 이들이지만 어느덧 진짜처럼 마음을 전하고 나누는 그들의 이야기는 먹먹하면서도 따뜻하다. 그리고 또 하나. 사랑하면서 서로를 선택하지 못하는 혜경와 운절의 대화가 맴돈다. 왜 마음 가는 길이랑 사람 가는 길이 달라지는 건지 모르겠어. 아픈 이별인데도 담담하면서도 차분하게 한 컷 한 컷 찍었을 것 같은 영화의 한 장면을 상상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공간의 분위기, 그리고 사람들의 표정을 상상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어떤 느낌으로 이 책을 읽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감각적이면서도 섬세한 연출로 담아냈을 인물의 내면. 그리고 테이블에서 벗어난 그들의 다른 이야기는 어땠을까. 그런 이야기가 이 책에 있다.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치 어딘가에서 그들이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영화가 담아낼 수 있는 이미지와는 다른 감각의 글들이다. 영화 「더 테이블」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공간에 대한 이야기들. 감독 김종관의 만들고 싶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김종관 감독의 팬이라면 이 책을 통해 더욱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지나간 텅 빈 공간에 이야기들이 남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도, 창밖 거리에도, 내가 보았던 것들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203쪽)

 

 인생의 중요한 일은 그곳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지만 어느 테이블 어느 의장에 앉은 사람들은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중이다. (206쪽)

 

 아주 짧게 머문 그 공간에서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을 그들. 어쩌면 그 공간이었기에 가능했을 마음은 아니었을까.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순간을 담아두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단 하루 동안 그 테이블에서 벌어진 일들, 단 하루 동안 그 테이블이 듣고 느꼈을 감정들. 만남 혹은 헤어짐이 있는 공간, 더 테이블이다. 따뜻한 온도가 필요한 시기, 당신과 마주하고 싶은 공간, 더 테이블이다. 

 

 그런 공간을 생각하자니 저절로 추억에 빠져든다. 한 바퀴를 도는 게 정말 힘들었던 학교 운동장은 이제 너무 작은 놀이터로 변해버렸다. 시험 때마다 자리를 잡겠다고 줄을 섰던 대학 도서관에서 빈둥거리던 시절도 그립다. 그 도서관은 학교가 이전했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공간과 후배가 아는 공간은 다른 것이다. 봄이면 벚꽃이 예뻐서 사진 찍으러 오는 외부인이 정말 많았는데 그때는 그걸 몰랐다. 언제나 지나고 나면 모든 게 소중하고 아름답다. 윤대녕의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속 공간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사라진 공간과 여전히 우리 곁에서 존재를 증명하는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나의 추억도 들려주고 싶다. 카페과 같은 역할을 했겠지만, 나는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다방, 그리운 주황색 공중전화기, 한때 열심히 다녔던 노래방, 말만 들어도 괜히 설레는 공항과 말하는 것으로도 마음이 아픈 병원. 김종관의 책에서 만난 이들과 달리 윤대녕의 책에서 마주하는 이야기는 모두 자신과 친구와 연인, 그리고 가족이라서 그런지 공간이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작가가 기억하고 묘사하는 공간은 왜 이리 멋지고 매력적이란 말인가.

 

 어둠이 내리면 도서관 내부는 조용히 웅성거리며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나만의 자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즈음이 바로 유령들이 깨어나는 시각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돌연 긴장한 상태가 되어 사위를 두리번거리거나 거역하기 힘든 호기심에 이끌려 어두운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말해 무엇하랴만 도서관은 죽은 말들의 세계였고 그러므로 밤마다 유령들이 출몰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은 사실상 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책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고 혹은 저자가 살아 있다고 해도 글쓰기를 마치는 순간 필연적으로 유물로 변하게 마련이었다. (205쪽) 

 

 우리가 기억하고 우리를 기억할 공간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공간에 온기를 만들어 준 사람들도. 그냥 밥 한 끼가 아니었던 식당, 수많은 사람들의 들고나는 보통의 영화관이 아니었던 그 공간, 우리들의 약속 장소였던 그 카페. 그곳에서 바라본 풍경, 그곳에서 매만졌던 커피 잔.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내 표정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나만의 더 테이블은 여전히 그곳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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