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 눈이 내렸다. 폭설이 내린 곳도 있고 눈이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곳도 있다. 11월인데 겨울의 절정에 다다른 것처럼 세상이 하얗다. 겨울과 눈은 잘 어울리는 조합니다. 그러나 사고 소식도 들려서 걱정은 커진다. 첫눈이 내릴 때 지인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을 거라고 말했었다. 이 계절에 가장 적절한 선택이다. 첫 문장으로 잘 알려진 소설이지만 때로 그 소설을 추천한 작가로 기억하기도 한다. 내게는 그렇다는 말이다. 바로, 김연수. 그는 이런 글을 썼다. 사랑과 소설이라니. 사랑 같은 소설, 소설 같은 사랑을 꿈꾸게 만든다.

 

 사랑이란 두 사람이 어떤 나라를 함께 여행하는 일과 비슷해요. 두 사람만이 가본 이상한 나라. 그러다가 헤어진다면 그 나라에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혼자서 국경선을 넘는 일. 출국심사를 받기 전, 그가 동고동락했던 현지인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헤어질 때가 되어 “당신은 좋은 여자”라고 말하는 건 남자들의 상투적인 수법이지요. 그건 예의상 하는 말에 불과해요. 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명한 별사도 있었잖아요. 하지만 이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며 허둥지둥 출국 심사장을 빠져나와 그 나라의 국경을 넘어가자마자, 그들은 알게 되죠. 이제 자신이 다시는 그 나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걸. 자신은 영원한 입국거부자의 신세가 되었다는 걸. 모든 게 끝나고 나면 사랑했던 기억은 상투적으로 회고됩니다. 모든 여행의 기억이 낭만적으로 떠오르듯이. 그때가 되면 다들 알게 될 거예요. 상투적으로 회고되는 그 모든 기억 속에서 가장 낯선 말이 그 말이었다는 걸. 당신은 좋은 여자야.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왜 헤어진 것인지. 모두지 이해되지 않는 그 말. 당신은 좋은 여자야.

 

 김연수가 읽고 선택한 문장을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어쩌다 보니 그가 읽은 소설과 시를 계속 말하고 있다. 소설가가 선택한 시라면 어떨까. 그의 소설과 그의 산문집은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책이다. 뭐랄까, 김연수만의 고요하고도 활동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해야 할까. 김연수가 고른 시, 그리고 시에 따른 그의 느낌. 『우리가 보낸 순간- 시』는 날마다 시를 읽는 마음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렇게 눈으로 시작된 하루는 더욱 그렇다.

 

 어떤 시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오고 어떤 시는 첫사랑의 아픈 기억을 꺼내온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들고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정도로 어려운 시도 있다. 내가 읽은 시와 그가 읽은 시의 접점을 찾는 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읽고 이야기하는 시. 하나의 시를 통해 우리는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아무 때나 꺼내 읽어도 좋은 아름다운 시. 아름답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문장들. 시가 있어 시를 통해 새롭게 만나는 세상, 그리고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문장. 그리고 11월이 아니었더라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이런 글들. 안현미의 시 「시간들」에 대한 김연수의 글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안현미의 시보다 김연수의 글이 좋아서 계속 이 글만 읽고 싶어진다. 매년 십일월이 되면 펼치고 싶다.

 

 십일월은 온몸으로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우는 달이랄까요. 어느 밤, 무심결에 창문을 열고 집 앞 골목을 바라보노라니 작은 정원의 나무에서 숨을 쉴 때마다 한 장씩 나뭇잎이 떨어지고 있더군요. 멀리서 아이가 달려가는 듯한 그 소리. 떨어지는 잎들을 보며 도루왕보다 더 빨리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했더라면 그 희미한 소리, 하지만 마치 온 세상이 떨어져 내리는 듯 내 마음을 장중하게 울리던 그 소리를 듣지 못했겠죠. 그리고 몇 개의 낮과 몇 개의 밤이 다시 지나가고 난 뒤, 나뭇잎들은 모두 떨어져 내렸어요. 청소부는 나무의 발치에 떨어진 잎들을 한데 모아 자루에 넣었죠. 그 자루에 나무의 한 해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면 그 소리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요? 잎이 떨어지는 소리들이 어딘가에 있다면, 그 목소리들, 당신이 내게 들려준 수많은 말들도 거기에 있는 걸까요? 지나간 날의 소리들은 어떤 귀로 들어야만 하는 걸까요?

 

 11월은 유독 길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올해도 그렇게 지나간다. 짧은 것보다 긴 게 낫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12월에 대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올해는 11월을 견디기 힘들 뿐이다. 그래서 황현산의 산문집 속 이런 문장을 찾아 읽었다. 오직 11월을 위한 문장처럼 다가온다. 차갑고 선명한 공기를 건넨다고 할까. 11월을 향한 애정이 기지개를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같다.  

 

 11월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마른 잎사귀들이 떨어지고 나면 감춰져 있던 나무들의 깨끗한 등허리가 드러난다. 꽃 피고 녹음 우거졌던 지난 계절이 오히려 혼란스러웠다고, 어쩌면 음란하게 보이기까지 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한 시절의 영화는 사라졌어도 세상을 지탱하는 곧은 형식들은 차가운 바람 속에 남아 있다. 마른 석류보다 더 작은 새들이 주목의 붉은 열매를 쪼다가 돌배나무의 앙상한 가지로 날아올라간다. 높은 가지에서 관목 숲으로 미끄러지듯 떨어져내릴 때는 바람에 날리는 낙엽과 구분하기조차 어렵다. 이제 겨울이 오면 저것들은 어디에 몸 붙이고 살아갈까. 그러나 새들은 욕망도 불안도 떨어져 쌓인 나뭇잎들 속에서 벗어두고 한 알의 맑은 생명으로만 남은 듯하다. (240, 241쪽)

 

 한 계절을 산다는 것, 한 계절을 보낸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자꾸만 생각하는 11월이다. 어제 수능을 마친 아이를 둔 지인에게 고생했다는 문자를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그들에게 11월은 얼마나 힘들고 버거웠을까. 우리는 모두 11월을 산다. 아니다. 우리는 11월을 사는 게 아니라 오늘을 사는 것이다. 11월이 아니라 그저 오늘을 견디는 것. 나는 내 감정에 취해 11월이라는 달에 너무 많은 것을 주렁주렁 달아놓으려 하고 있다. 아직 11월은 끝나지 않았다. 11월의 문장도 계속되겠지만 김상혁의 시로 마무리해도 괜찮겠지. 모두의 11월을 위해, 11월의 안녕을 바라며.

 

 십일월은 내년을 기대하기에도 한 해를 돌아보기에도 좀 이르다. 자동차 정비를 핑계로 부모에게 꾼 돈으로 아이를 지우거나 그런 일을 겪고 내가 개종을 해도 지인들은, 십일월은 참 조용한 달이야, 하고 낮게 중얼거리고는 차를 따뜻하게 끓이기 시작할 만큼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애인과 모텔 전기장판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아버지를 잃게 된 어머니의 나이를 생각하면서. 십일월 우기에 태어났다는 신에 대해 생각하면서. (「십일월」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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