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짧은 이별이든 긴 이별이든, 영원한 이별이든 말이다. 그러니 이별에 대한 이야기는 아픔을 동반한다. 사랑하는 이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건, 만질 수 없다는 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경험했다 하더라도 이별은 그 자체만으로도 슬픔이다. 그것이 나의 것이든 타인의 그것이든 섣불리 위로해서는 안 된다. 각자의 슬픔은 각자의 방식대로 끌어안아야 하기에. 맥스 포터의 『슬픔은 날개 달린 것』도 그만의 방식으로 슬픔을 말한다. 아니, 부재를 인정한다. 이 소설은 독특하다. 아내를 잃은 남자와 엄마를 잃은 두 아이, 그리고 까마귀가 등장한다. 까마귀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물론 까마귀는 그 무엇으로든 대체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 소설의 저자는 까마귀를 테드 휴스의 시에서 가져왔다. 실비아 플라스의 전 남편 말이다. 아, 우리는 그 시인과 시를 몰라도 괜찮다. 물론 알면 이 소설의 중심으로 더 가까이 들어갈 수 있겠지만.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아내를 애도할 시간은 나중으로 미뤄진다. 장례식을 치러야 하고 손님을 맞아야 하고 아이들을 챙겨야 한다. 친구와 지인의 진심을 이해하지만 그들의 방문이 귀찮다. 그냥 슬픔에 허우적거리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찾아드는 상실의 아픔. 그것은 삶을 지배하고 때로 부수고 망가트린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아내와 엄마를 그리워하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때 한 마리의 까마귀가 나타난다.

 

고개를 아래로, 병뚜껑, 휘적취적.

고개를 아래로, 대걸레, 깡충깡충.

그는 내게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어.

그게 내가 여기 온 이유지. (39쪽)

소설은 남자, 아이들, 까마귀, 세 화자가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치 우화나 동화처럼 들린다. 아직 엄마를 잃었다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천방지축의 아이들과 아내가 그리워서 일상을 유지하는 게 너무 버거운 남자, 그리고 그 둘을 지켜보며 제멋대로, 그러나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꾸짖고 어루만진다. 이런 형태의 소설은 없었기에 이건 대체 뭐지 하는 마음으로 읽다가도 남겨진 가족의 슬픔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까마귀가 등장할 때마다 그렇지 이제는 일상을 살아내야지 하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왜 우리는 슬픔과 함께 살아가면 안 되는가, 왜 우리는 지속적인 애도를 표현하면 안 되는가, 누군가에게 따지고 싶게 만든다. 애타는 마음을, 고통스러운 순간을 그냥 내버려 둬도 괜찮은 게 아닐까.

​나의 이 그리움이란 어쩌면 이리도 물리적인 것인지. 아내가 너무 그리워서, 그 그리움은 금으로 만든 거대한 왕자, 콘서트홀, 천 그루의 나무, 호수, 구천 대의 버스, 백만 대의 차, 이천만 마리의 새들 그 이상이다. 도시 전체가 아내에 대한 나의 그리움이다. (77쪽)

하나의 관념으로서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는 건 멍청한 사람들이나 하는 생각이다.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슬픔이 장기 프로젝트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서두르길 거부한다. 우리가 떠안은 이 고통은 그 속도를 올리거나 바로잡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144쪽)

슬픔은 단단하고 견고한 성처럼 우리의 일상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삶은 멈췄다가도 다시 이어지는 것, 남자와 두 아이들도 아내와 엄마의 유골과 이별해야 할 때가 왔음을 직시한다. 그것과 이별해야 할 시간을 정해놓은 이는 없지만. 소설의 제목처럼 슬픔은 날개 달린 것이라 언제든 날아갈 수 있을 테니까. 한 편의 산문처럼, 한 편의 시처럼, 한 편의 희곡처럼 읽힌다. 사랑하는 아내를 향한 남자의 독백,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들의 울부짖음, 그 모든 것은 텅 빈 무대에 홀로 앉은 까마귀에게 흡수된다. 까마귀는 은유적인 존재다. 알고 있다. 허상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부재로 존재하는 사랑이 있다는걸. 슬픔의 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까마귀의 말처럼 절망하지 않게 된 것뿐.

누군가 이 책을 읽는다면, 혹시 그가 슬픔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나는 이 책과 함께 『쥘과의 하루』를 읽었으면 좋겠다. 하루하루 같은 일상을 살아온 남편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하루 동안 혼자만 느끼는 이야기. 죽음을 느낀다는 게 조금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 공간에 머무르는 마지막 하루, 그 하루가 남겨진 아내에게 특별한 의미가 된다. 언젠가 마주할 이별을 미리 연습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고 연습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상실과 애도에 대해 소설 속 문장처럼 나만의 배경을 떠올리듯 노란빛의 책들이 전하는 부드러운 포근함이 위안으로 다가올 수도 있으니까.

천천히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바깥세상을 두껍고 하얗게 덮고 있었다. 풍경이 그녀의 눈앞에서 회오리치고 있었다. 인적 없는 거리에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어떤 움직임도 세상을 그 겨울잠에서 깨우지 못했다. 이것이 이별을 위한 완벽한 배경임을 그녀는 깨달았다. (『쥘과의 하루』중에서)

“이상한 온기와 아름다움을 지닌 책”이라는 한강의 추천사는 책을 읽기 전에는 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슬픔이 반드시 아름답고 따듯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각자의 슬픔을 충분히 영위할 수 있는 어떤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걸 말해주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 더, 읽고 난 후 더 깊은 여운이 전해지는 소설이다. 조금은 퉁명스럽고 조금은 얄미운 까마귀 한 마리가 언제나 내 곁에도 찾아와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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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의 첫 번째 시집을 애정 한다. 주변에 선물도 하고 시집을 추천해달라는 이들에게는 무조건 박준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뒤를 이은 산문집도 좋았다. 가만가만한 일상을 들려주는 그의 목소리가, 그 안에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과 지긋이 바라보는 슬픔이 따뜻하게 느껴졌다고 할까. 그러니 나는 그의 두 번째 시집도 기다렸고 사랑해야 맞다. 사랑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저 좀 아쉽다는 말이다. 뭐가 아쉬운 걸까. 잘 모르겠다. 여하튼 좀 그렇다.

봄이라 할 수 있는 날들이다. 수줍은 매화의 손짓과 어디선가 고운 자목련의 자태도 보였다. 그러니 봄이었다. 그래도 이런 시가 어울리는 요즘이다. 자의반 타의 반 집안에 갇힌 시간이 많다. 이 날들도 언젠가는 추억이 되겠지. 불안과 염려로 채워지는 시간에 만나는 시, 그래서 더 오래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비는 당신 없이 처음 내리고 손에는 어둠인지 주름인

지 모를 너울이 지나는 밤입니다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 모

여 있다는 광장으로 마음은 곧잘 나섰지만 약을 먹기 위

해 물을 끓이는 일이 오늘을 보내는 가장 중요한 일이 되

었습니다 한결 나아진 것 같은 귓병에 안도하는 일은 그

다음이었고 끓인 물을 식히며 두어 번 저어나가다 여름

의 세찬 빗소리를 떠올려보는 것은 이제 나중의 일이 되

었습니다 (「겨울비」, 전문)

 

그래도 나는 이런 시가 더 좋다. 봄을 앓는 사람들의 마음을, 여전히 삶이 고달프고 어두운 누군가를 달래주는 것 같다고 할까. 죽는 일이 사는 것만큼 어렵다는 생각을 해본다. 죽고 싶은 마음을 추제하지 못했던 순간, 누군가 가슴에 숨겨져있지 않을까. 상실과 괴로움, 그리고 절망이 앞을 가린다 해도 겨울이 지나 봄이 오듯 우리도 그렇게 살아간다. 살아가야 한다는 절실함이 모두에게 전해지길 바란다.

얼마 전 손목을 깊게 그은

당신과 마주 앉아 통닭을 먹는다

당신이 입가를 닦을 때마다

소매 사이로 검고 붉은 테가 내비친다

당신 집에는

물 대신 술이 있고

봄 대신 밤이 있고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 대신 내가 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내가

처음 던진 질문은

왜 봄에 죽으려 했느냐는 것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당신이

내게 고개를 돌려

그럼 겨울에 죽을 것이냐며 웃었다

마음만으로는 될 수도 없고

꼭 내 마음 같지도 않은 일들이

봄에는 널려 있었다 (「그해 봄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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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03-06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제목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자목련 2020-03-10 12:52   좋아요 0 | URL
네, 아름다운 제목에 반하고 시에 반하고...
 

 

어제, 예배를 드리러 나가는 아침에는 눈이 그치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은 차가웠고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이 시려웠다. 소파에 가지런히 놓고 온 장갑 생각이 간절했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더 많이 추웠다. 그래도 눈이 더 내릴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창밖으로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눈을 잊은 이들에게 자신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침대에 눕기 전에 창을 열어보니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그리고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 밤 사이 눈은 더욱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고 다가오는 봄을 주춤하게 만든다고 할까. 그래도 이번 눈에는 봄눈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아주 오랜만에 눈을 담았다. 모든 사물 위에 눈이 내렸다. 운동기구에도 눈이 내려앉았고 자동차 위에도 눈이 내렸다. 잠시 눈의 세상이 되었고 그 뒤에 모두 숨은 것만 같다. 이상하게도 눈이 내린 풍경이 든든하다. 든든하다니, 뭐가 든든하다는 말인가 싶겠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곧 사라질 눈을 바라본다는 일이 나쁘지 않다. 사라졌다고 해서 눈이 내렸던 날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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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2-18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눈을 만났네요 저도 사진 찍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어제 새벽에 내리는 것만 봤습니다 지금도 내릴지도 모르겠군요 어제보다 더 많이... 아까 쌓인 거 보고 왔어요 예전에는 새벽에 눈 오면 밖에 나가서 그걸 찍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는군요 그래도 눈 반가워요 겨울이 아주 가기 전에 와서 더 반갑습니다

오늘도 춥겠지요 자목련 님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희선

자목련 2020-02-18 17:44   좋아요 1 | URL
예전에는 눈만 오면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게으름 때문인지 잘 안 찍어요. ㅎ
제대로 된 눈이 내린 날이라 저도 반가웠어요. 내일부터는 날씨가 풀린다고 해요. 희선 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그게 무엇이든 시작이 중요하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나는 시작에 있다. 무슨 밀이냐 하면 뭔가 쓰려고 하는데 쓰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냥 이렇게 시작이라도 하는 것이다. 텅 빈 화면을 바라보면서 다른 창을 열었다가 인터넷 급상승 검색어를 클릭하고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인데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 것일까.

매년 정월대보름에는 더위를 팔았다. 유독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가족들에게 마구 더위를 넘겼다. 그런데 올해는 잡곡밥이나 땅콩, 밤 같은 부럼도 없는 그런 날로 지나갔다. 주말 밤 식탁에 놓인 땅콩을 보고 정월대보름이구나 싶었다. 하늘을 보고 커다랗게 둥근 달을 찾는 일도 잊었다. 사소한 일상을 놓쳤다고 할까. 놓쳐도 서운할 일이 아닌데 올해는 그냥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이런 작은 일상의 여유조차 사라진다. 당연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메르스 사태를 떠올리면 공포에 휩싸였던 그 여름이 재생된다. 폐 질환을 앓던 큰언니가 병원 일정을 뒤로 미뤘던 기억도 소환된다. 그 여름이 지나고 5년 뒤 이 겨울은 다시 하나의 두려움으로 남을 것이다.

주일에는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다. 같은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의 사고였다.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어르신들이 다치셨다. 모두 입원하셨고 치료 중이다. 모두 다 건강하게 회복하시고 퇴원하시길 바란다. 어제는 놀랍고도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 ​언론과 방송 모두 봉준호 감독의 수상에 대해 전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난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은 일어나는 것이다.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발생하면 항상 생각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할 수 일을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생각의 끝에서 만나는 나의 자리다.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싶은 거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욱 속상한 마음이다. 가장 잘 알면서도 열심을 내지 않는 것.

언제나 그렇듯 마음은 다시 책으로 향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읽을 거라는 마음, 그리고 지금 읽는 중이라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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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는 장맛비처럼 강한 바람과 함께 비가 내렸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의 손길이 너무 커서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따뜻한 겨울은 차가운 겨울을 준비하고 기다려온 이들에게 걱정을 안겨준다. 뉴스를 통해 마주한 겨울철 축제의 현장은 속상함 그 자체였다. 얼마나 많은 시간 계획하고 공을 들였을까 싶은 마음에 괜히 나도 속이 상했다. 지역마다 계절에 따라 축제를 연다. 그 축제를 위해 떠난 기억과 현재의 간극은 크기를 잴 수 없을 만큼 크다. 먼 기억 속에는 행사의 첫 회를 즐겼던 순간이 아련하게 남았다.

그제부터 어제까지 내렸던 겨울비는 그쳤고 하늘은 여전히 뿌옇다. 미세먼지 때문일까 생각하다 겨울이니 그런가 하고 여긴다. 새해의 인사를 나누면서 건강에 대한 안부를 묻는 일이 많아졌다. 즐겁고 복된 새해라는 것보다는 무탈한 새해를 맞으라는 바람을 전한다.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앞둔 이들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뿌듯하면서도 불안한 것 같다. 부모라는 이유로, 가족이라는 이유로 뭔가 도움이 되고자 하면서도 그 도움을 전할 방법을 찾기 못해서 그저 안타까운 마음을 붙잡고 있다. 구체적으로 도움을 청하지 않을 때는 그저 곁에 가만히 머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지도 모른다.

지난 연말에는 친구를 만났다. 크리스마스에 만난 친구는 친구의 남편도 함께였다. 부모님의 건강으로 인해 분주한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었지만 그들의 마음이 마냥 무겁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이별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그 이별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모든 것은 후회로 남는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에 바쁜 시간을 쪼개 길을 달려온 친구를 통해 듣은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이별에 관한 것이었다. 가족의 죽음을 감당하는 일은 충분한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충분하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상실과 애도 사이에서 무너지지 않고 일상을 지키는 일은 위대한 일이다. 우리의 삶은 그런 위대함의 조각들이 모여 완성된다. 담담하게 죽음을 말하는 친구 앞에서 울고 있는 건 나였다. 몇 년 전 우리의 위치는 반대였다. 같은 자리에서 죽음을 말하는 일이 삶이었다.

 

 

 

 

2020년에도 보통의 날이 이어지고 몇 권의 책을 검색한다. 시인으로 등단한 장혜령의 자전적 소설과 윤이형의 소설, 제목이 주는 울림 때문인지 그 고독에 닿고 싶은 소설이 눈에 들어온다. 흐린 날에는 햇빛이 더욱 간절하다. 길게 늘어나는 그림자가 보고 싶다. 하늘의 해를 향해 고개를 들고 눈이 시리도록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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