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는 장맛비처럼 강한 바람과 함께 비가 내렸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의 손길이 너무 커서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따뜻한 겨울은 차가운 겨울을 준비하고 기다려온 이들에게 걱정을 안겨준다. 뉴스를 통해 마주한 겨울철 축제의 현장은 속상함 그 자체였다. 얼마나 많은 시간 계획하고 공을 들였을까 싶은 마음에 괜히 나도 속이 상했다. 지역마다 계절에 따라 축제를 연다. 그 축제를 위해 떠난 기억과 현재의 간극은 크기를 잴 수 없을 만큼 크다. 먼 기억 속에는 행사의 첫 회를 즐겼던 순간이 아련하게 남았다.

그제부터 어제까지 내렸던 겨울비는 그쳤고 하늘은 여전히 뿌옇다. 미세먼지 때문일까 생각하다 겨울이니 그런가 하고 여긴다. 새해의 인사를 나누면서 건강에 대한 안부를 묻는 일이 많아졌다. 즐겁고 복된 새해라는 것보다는 무탈한 새해를 맞으라는 바람을 전한다.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앞둔 이들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뿌듯하면서도 불안한 것 같다. 부모라는 이유로, 가족이라는 이유로 뭔가 도움이 되고자 하면서도 그 도움을 전할 방법을 찾기 못해서 그저 안타까운 마음을 붙잡고 있다. 구체적으로 도움을 청하지 않을 때는 그저 곁에 가만히 머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지도 모른다.

지난 연말에는 친구를 만났다. 크리스마스에 만난 친구는 친구의 남편도 함께였다. 부모님의 건강으로 인해 분주한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었지만 그들의 마음이 마냥 무겁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이별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그 이별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모든 것은 후회로 남는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에 바쁜 시간을 쪼개 길을 달려온 친구를 통해 듣은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이별에 관한 것이었다. 가족의 죽음을 감당하는 일은 충분한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충분하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상실과 애도 사이에서 무너지지 않고 일상을 지키는 일은 위대한 일이다. 우리의 삶은 그런 위대함의 조각들이 모여 완성된다. 담담하게 죽음을 말하는 친구 앞에서 울고 있는 건 나였다. 몇 년 전 우리의 위치는 반대였다. 같은 자리에서 죽음을 말하는 일이 삶이었다.

 

 

 

 

2020년에도 보통의 날이 이어지고 몇 권의 책을 검색한다. 시인으로 등단한 장혜령의 자전적 소설과 윤이형의 소설, 제목이 주는 울림 때문인지 그 고독에 닿고 싶은 소설이 눈에 들어온다. 흐린 날에는 햇빛이 더욱 간절하다. 길게 늘어나는 그림자가 보고 싶다. 하늘의 해를 향해 고개를 들고 눈이 시리도록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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