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61 | 162 | 16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일곱가지 색깔로 내리는 비
김미월 외 지음 / 열림원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소설가에게 사물과 일상은 내가 알고 있는 의미와는 또다른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그 의미는 소설 속에서 새롭게 태어날 것이고 그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때로 놀라고 부러워하며 슬퍼하기도 한다. 같은 공간에 대한 기억이 각자 다르듯 같은 소재나 주제를 다룬 소설이라도 소설가에 따라 다르다. 그런 소설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삼십대의 여류 작가(김미월, 김숨, 김이설, 윤이형, 장은진, 한유주, 황정은)가 모여 비를 테마로 쓴 소설집『일곱가지 색깔로 내리는 비』은 더욱 그랬다. 비를 좋아하기에 더 좋았고 비라서 더 기대가 컸다.   

 누구나 비 오는 날이나, 비에 관한 그리움 하나 간직하기 마련이다. 비가 그런 것이다. 소설은 사전적 의미인 비를 떠올리게도 하지만, 습한 기운이 가득하다. 비로 기억되는 어떤 추억을 떠올리기 보다 소설 속에서 나는 비를 만난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습하고 눅눅한 비가 아닌 새로운 비와의 만남이다.   

 김숨의 <대기자들>은 치과 치료를 기다리는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를 드러낸다.  주인공에겐 암투병중인 어머니가 있었고, 이혼 절차 중인 아내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그에게 뭔가를 바라고 있었다.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대기자들의 풍경은 왠지 쓸쓸하도 처량하다. 대기자는 수동의 의미를 지녔다. 누군가가 자신을명해줘야 한다. 그러니까 여전하게 대기하고 있지만, 확인시켜주지 않으면 아무도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것이다. 그건 소설 속 비와 같다. 

 “비가 오네”?  
 대기자들 중 누군가 뜬금없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비는 아까부터 내리고 있었다.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비가 다 그친 뒤에 깨닫지 그랬나. 나는 짜증이 나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비가 다 그친 뒤에나. 그러나 비가 그친 뒤에나 비가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비는 내리는 동안에만 비일 것이었다. 그친 뒤에는 비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닐 것이었다. p. 66~67

 지붕 위로 날라오는 티슈를 모으며 왜 티슈를 뿌릴까 호기심을 불러오는 장은진의 <티슈, 지붕, 그리고 하얀 구두 신은 고양이>는 따뜻했고, 마법사와 비의 이야기인 윤이형의 <엘로>는 한 편의 아름다운 환상 동화를 만난 듯했다. 고교시절 백일장에서 남의 시를 훔쳐 적어 1등을 한 주인공의 비오는 날 시와 연상시킨 김미월의 <여름 팬터마임>은 가장 보편적인 비에 대한 추억을 떠올렸다.  

 김이설의 <키즈스타플레이타운>은 부드러운 비가 아닌 폭력적인 비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폭행으로 유린당한 상처를 지닌 화자인 의 남편은 소아성애자다. 어린이 실내 놀이터 사장인 남편은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손을 댄다. 화자는 남편의 행동을 모른 척 한다. 사모님이라 불리는 호칭과 명품들과 과거를 보상받는 삶이라 여긴다. 아픔과 상처는 치유되었다고 치부하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가 내릴 때마다 자신을 옭아매는 기억과 마주한다. 

 펑, 하는 소리와  곧이어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날카로운 남편의 비명 소리도 섞였다. 나가보니, 바람과 빗물이 온 집 안을 집어삼킨 것 같았다. 외벽 통 유리 한 짝이 바람에 박살 난 것이었다. 남편이 유리 파편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알몸이 유리에 긁혀 온통 붉은 자국이었다. 남편이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가까이 가지 않아도 남편 눈에 박힌 주먹만 한 유리 조각이 보였다. 순간, 붉은 피가 솟구쳤다. 눈이 아니라 목이었다. 핏줄기가 뿜어졌다. 훅, 훅, 훅 - 심장박동을 따라 검붉은 줄기가 리듬을 탔다. 바람 때문에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베란다가 피범벅이 됐다. 시뻘건 몸뚱이가 갓난아이처럼 보였다. p. 194

 순간, 오래 묵은 체증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김이설의 소설은 끔찍한 소재로 불편하고 잔인하나 묘한 쾌감이 있다. 현실에서 이뤄질 수 없는 결말을 소설을 통해 후련하게 해준다고 할까. 

 황정은의 <낙하하다>는 죽음을 비가 떨어지는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니, 죽어가는 과정인지 모른다. 그녀의 소설은 하나의 문장이 기초하여 반복되고 확장되어 새로운 의미로 태어난다. 삼 년째 떨어지고 있는 화자는 비이며 죽음이다. 떨어지며 마주하는 풍경과 생각들이 함께 떨어진다. 바닥에 닿았을 때 그것들은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까. 우리가 마주하는 비가 비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 해 본 적이 있는가?  

 애초 빗방울이란 허공을 떨어져 내리고 있을 뿐이니 사람들이 빗소리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빗소리라기보다는 빗방울에 얻어맞는 물질의 소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런 물질에도 닿지 못하는 빗방울이란 하염없이 떨어져 내릴 뿐이라는 이야기였다. p.204~205

 한유주의 소설 <멸종의 기원>은 인상적이었다. 화자인 에게 할아버지는 ‘불행하라’는 유언과 ‘날씨표시상자’를 남겼다. 소설을 불행을 찾아 나서는 여행처럼 보인다.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은 엄마, 타지에서 직장을 다니는 아버지, 혼자 지내는 내 곁에 있는 건 날씨표시상사뿐이다. 건기에는 왕이 우기에는 여왕이 나타나는 상자였다. 그러나 언제나 왕뿐이었다.  화자가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여왕은 등장하지 않았다. 왕은 마치 불행을 암시하는 듯 여겨진다. 그러다 날씨표시상에서 태엽을 발견한다. 왕과 여왕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유언은 정말 불행하라는 것이었을까. 묘한 여운이 남는 소설이다. 

 비가 내릴 때마다 듣는 음악이 있고 비가 내릴 때마다 읽는 시집이 있고, 비가 내릴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계절마다 비는 각기 다른 감성을 자극한다. 『일곱가지 색깔로 내리는 비』라는 제목 때문이지 자꾸 단편에 어떤 색이 떠오른다. 무기력한 회색, 날 것 그대로의 선홍빛, 환상적인 노랑, 기분좋은 녹색, 빠져드는 보라, 명쾌한 파랑처럼 그들만의 색을 찾는 즐거움이 있다. 김미월과 한유주의 소설은 처음이라는 이유로 색다른 느낌이었다. 좋아하는 소설가가 있다면 그의 소설을 가장 먼저 읽어도 좋다. 끌리는 제목이 있다면 그 소설을 먼저 읽어도 역시 좋다. 일곱편의 소설을 다 읽었을 때 당신의 비는 어떤 색으로 떠오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소의 감정 - 제20회 편운문학상 수상작 민음의 시 158
김지녀 지음 / 민음사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시를 읽었다. 간간히 시를 읽었지만, 한 권의 시집을 끝까지 읽은 건 정말 오랜만이다. 작년 한 해 읽은 시집이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시를 안주지 못했다. 아니, 시를 읽지 못했다는 게 더 맞다. 김지녀의 시집 『시소의 감정』을 시작으로 시를 만나는 시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김지녀의 시집을 읽으면서 시인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시가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아니, 그건 시를 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리라. 시인에게 모든 것은 시로 귀결되는 건 당연한지 모른다. 아니, 시를 쓰는 동안만 시에 집중할까.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걸 안다. 나는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튼 김지녀의 시는 시가 가진 거리감보다 조금 가깝게 느껴졌다. 내게 그러했다는 말이다.  이런 시 때문이다. 

 에이, 라는 점에서 그들은 동일하다 
 낮에도 밤 같은 방에서  
 작은 여자 A는 
 밥 먹고 잠잔다 그리고 가끔, 웃는다 
 아직 오지 않은 애인을 위해 
 문을 걸어 잠그고  
 요리를 한다 매일 
 작은 여자 A와 무관하게 
 큰 여자 a는 계란을 삶는다 
 아직 떠나지 않은 애인을 위해 
 고개를 숙이고 
 흰자에서 노른자를 골라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러나 웃는다 가끔, 
 초인종이 울리기도 한다 
 작은 여자 A와 큰 여자 a는 
 말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 
 문을 열거나 하지 않는다 
 그들은 에이, 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작은 여자 A와  큰 여자 a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덜컹거린다 
 서로를 알아채지 못한다  - p. 30~31 <A 그리고, a> 전문  

 재미있는 구조의 이 시는 슬프기도 하고 마음이 울컥하기도 한다. 작은 여자A 와 큰 여자a는 같은 여자이거나 다른 여자이거나 그럴 수 있다. 아니면 당신이거나 나 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이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 주의깊게 관찰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시인은 애정을 갖고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문득, 내가 밥을 차리는 모습이나 물이 끓는 주전자를 바라보는 모습이 어떨까 묘사하고 싶어진다. 뜨거운 김이 나오는 주전자 입을 주시하며 비스듬히 서 있는, 단단하게 굳은 얼굴로 식탁에 앉자 큰 김치통에서 김치를 꺼내어 작은 접시에 덜어 놓는, 걸레를 빠느라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베란다에 기대어 분주하게 출근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모습 말이다.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또 하나의 시가 있다. 

 키가 계속 크는 사람과 키가 계속 크지 않는 사람이 만
나 악수를 하고 있다

 아주 커다란 바지를 입으면서 바지 밑단으로 빠져나오는
또 커다란 발을 보면서
 키가 계속 크는 사람은 구부정하게 버스를 타고
 어깨동무도 없이 길거리를 타박타박 걷고 대문짝만한
이빨을 보이면서
 아래로 아래로 눈길을 주고

 계속 키가 크지 않는 사람은 아주 작은 신발을 신고 발
닿지 않는 의자에 앉아 발을 흔들거리다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모자를 벗고 손을 내밀면서
 위로 위로 눈을 맞추고 있다

 키 큰 사람과 키 작은 사람이 저렇게 나란히 서서 기타
를 치고 노래한다면
 이 끝과 저 끝의 중간쯤에서 슬픔도 만나 몽글몽글한
웃음이 될까
 가슴 닿는 포옹 한 번쯤  할 수 있을까
 
 커다란 손이 작은 손을 감싸 쥐며 악수를 하고 있다
 키가 커서
 키가 작아서
 슬픔과 슬픔이 만나서 반갑게 웃고 있다 - p.61 <슬픔과 악수하는 사람들> 전문


 김지녀의 시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먼저 이야기 하고 싶었던 시는 바로, 시집을 열면 마주하는 첫 번째 시다. 이 시는 시집의 마지막 시를 읽을 때까지 맴돈다. 그건 이 시집 전체를 보면 좋은 건 아닐 수 있다. 대표적인 시로 각인되는 건 무조건 좋은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반할 수 밖에 없는 정말 아름다운 시다.

  이것은 귓속에 자라나는 돌멩이에 관한 기록이다 

 귓가에 얼어붙은 밤과 겨울을 지나 오랫동안 먼 곳을  
흘러왔다 
 시간을 물고 재빠르게 왔다 부서지는 파도의 혀처럼 
 모든 소리들은 투명한 물결이 되어 나에게 와 덧쌓이고 
 뒤척일 때마다 일제히 방향을 바꿔 내 귓속, 돌멩이 속 
으로 돌돌 휘감겨 들어간다 

 이것은 소리가 새겨 놓은 무늬에 대한 기억이다
 
 돌멩이의 세계에는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 
 창문을 닫고 누워 처음으로 지붕이 흘려보내는 말을 들 
었을 때 나는 캄캄한 밤을 떠다니는 한 마리 물고기에 불 
과했다 몸에 붙어 있는 비늘을 하나씩 떼어 내고 조금씩 
위로 올라가 지붕에 가닿을 듯 그러나 가닿지 못하고 지붕 
위에서 소리들은 모두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사라졌다 빗 
소리가 해를 옮기는 동안, 내 귀는 젖어 척척 접히고 나는  
자꾸만 아래로 가라앚아 갔다 천천히 단단해지며 돌멩이 
가 또 한 겹, 소리의 테를 둘렀던 것이다 

 언젠가 산꼭대기로 치솟아 발견될 물고기와 같이, 내 귓속에 
는 소리의 무늬들이 비석처럼 새겨져 있다 p. 15~16 <耳石> 전문 


 김지녀의 시는 일상의 관찰과 기록, 동화적 소재를 통해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 슬픔을 달래는 작업을 하는 듯 보인다. 시 <오르골 여인>를 보면 태엽을 감아요 어떤 예감처럼 팽팽한 느낌이 나쁘지 않/죠 누군가 벽을 타고 오르고 있어요 그리다 만 벽화 같아/요 내 얼굴을 밟고 지나간 발자국 같아요/ <기린과 나> 에선 껌벅이는 눈, 기린이 긴 혀로 날름거리며 나를 핥고 있다 / 나는 콧등에서 발등까지 순식간에 흐물거리다 녹아내린다 / 이것은 적도가 내 몸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 / 한차례 소나기 후, 오후가 끈적해졌기 때문 / <마녀의 저녁 식사>란 시도 그렇다. 그림자는 남쪽으로 걷지요 동시에 / 난 북쪽으로 떠나요 / 슬픈 얼굴로 그림자를 행해 안녕, / 크게 손을 흔들며 안녕, / 그림자와 멀어질수록 자꾸 웃음이 나요/

 이런 시도 좋다.

 이곳에서 나는 망명한 짧은 역사(歷史)가 된다  

 나는 내 방이 없다
 창문과 책상과 침대가 없다 
 침묵은 나와 다른 시간에게 겸손해지는 일 
 
 당신은 나를 짚어 가며 아무 곳에나 쉼표를 찍고 두세 
페이지를 쉽게 건너뛸지도 모르지만 
 나를 떠나 다시 나에게로, 회귀본능의 어류처럼 
 내 기억은 당신의 길 밖에 있다 

 가는 비가 내리면, 나는 당신이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책의 어디쯤에서 
 선사시대의 금 간 유물처럼 단단해진다 
 들춰 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오늘 내 말은 비석처럼 차가워지고 

 당신은 종이에 물을 뿌려 나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묻어 나온 것들은 간혹, 당신이 읽어 낼 수 없는 나의 여 
백이거나  
 서쪽에서 동쪽으로 번지는 먹구름이거나 
 나는 여기서 쉼, 표를 찍는다 

 당신을 쓸며 간 바람의 필체를 그냥, 
 흔들림이라 말할 수 없듯이 
 누웠다 일어나는 일은 내게 오래도록 잠수했다 
 물 위로 떠오르며 내뱉는 호흡 같은 것이다 

 어제와 같은 길을 걷는 일 
 그것은 흐르고 흘러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비 온다 가지 않는 비가, 내 역사를 소란스럽게 두드리 
며 간다 

 당신이 책을 덮은 뒤에 내 체온은 더욱 뜨거워질 것이다 - p.  80~ 81  <이 말을 당신의 의자에 앉아 쓰고 있다> 전문  


 시를 읽는 동안 나는 책이 된다. 그리고 비를 만나고 빗소리를 듣는다. 진짜 비가 내리는 깊은 밤에 읽게 되다면 더 좋겠다. 비가 오면 나는 이 시집을 꺼내들고 귀를 열어 빗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럼 그 밤에 나는 슬픔을 달래주는 시의 속삭임을 듣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자인간
아베 고보 지음, 송인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상자인간’이란 상자 속에서 사는 사람을 뜻한다. 걸인이나, 부랑자를 떠올리는 건 당연하다. 집이 아닌, 상자를 뒤집어 쓰고 밖을 볼 수 있는 시야만을 확보한 채 거리를 다니는 사람 말이다. 그런 사람을 주의 깊게 지켜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정말 상자인간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런 경우가 아닌 자발적으로 상자인간으로 살고자 한 사람이 있다. 소설은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전직 카메라맨이었던 화자인 나가 왜 자청해서 상자인간이 되었는지, 그 이유부터 궁금하다. 이 궁금증은 왜 『상자인간을 쓰게 되었는지 작가인 아베 고보에게 묻는 것과 같다.   

 화자인 는 머리부터 허리까지 오는 커다란 골판지 상자 속에서 생활하는 남자다. 상자 안에 그에게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이자 절대적인 물건들만 존재한다. 가장 중요한 것이 상자이니, 다르게 말하자면 상자이외의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상자인간은 상자 밖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야 확보를 위한 프레임을 통해 보여지는 세상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해도 좋다. 

 상자 밖에서 바라본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좀 더 세밀하게 볼 수 있고, 좀 더 열심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도심 한 복판 속에서 사람들은 상자인간을 인식하지 못한다. 극단적이지만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어떤 관심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것인지 모른다. 

 소설엔 친절하게 상자를 만드는 법을 설명한다. 누구나 원하면 상자인간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해서, 소설엔 다양한 시선이 등장한다. 진짜 상자인간, 가짜 상자인간, 상자인간이 탄생되기 전 누군가를 훔쳐보기 위한 관음증에 해당하는 경우까지 말이다. 그건 결국 하나의 시선이자, 작가의 시선이었다. 

 상자인간에게 상자를 사러 접근한 간호사, 그 여자에게 상자를 사오라고 요구한 의사가 한 자리에 모여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부분은 특히 흥미롭다. 상자를 버릴지 말지 갈등하는 나와 그 상자를 원하는 의사. 같은 공간임에도 상자 속과 밖의 엄연하게 구분된다. 그건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관점이랄까.  
 
 나는 상자인간의 결말이 너무 궁금했다. 과연 이 남자가 상자를 벗고 나올 수 있는지, 아니면 상자와 함께 생을 마감하는지 말이다. 1973년 발표된 소설, 그 당시에도 사람들은 타인에게 무관심했나 보다. 놀랍게도 소설의 모든 이야기는 상자인간이 자신의 상자 속에 남긴 낙서임을 고백하다. 그러니까 소설 처음에 말한대로 상자인간이 상자 속에서 상자인간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기이하고 기발하지만 어려운 소설이라 하겠다.  실은 커다란 상자안에서 나를 의식하지 않은 상대를 지켜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구체적으로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겠지만 상자 안에 웅크리고 있으면 무슨 기분일까 상상하게 된다.

 아베 고보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건 무엇일까. 상자라는 국한된 공간에서 소유는 무의미하다. 그러니 욕망이 부질없음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존재함으로 견뎌야 할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누구나 때로 익명의 상자인간을 꿈꾸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필립 로스의 책은 처음이다. 해서, 옮긴이가 이 소설에 대해 표현한 필립 로스식이라는 말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울분』을 통해 만난  필립 로스는 나쁘지 않았기에 그의 다른 소설을 만난다면 그때는 필립 로스식이라는 말에 수긍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여튼 울분은 제목이 갖는 의미를 잘 살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소설은 1950년 대 초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마커스의 집안은 유대교로 정육점을 운영한다. 그는 부모님을 도와 정육점 일을 거들었으며 성실하고 바른 청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또래의 아이들이 일탈을 시도할 소지가 없는 아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에 아들이 발을 내딛을 세상은 너무도 불안했고 위험이 가득했다. 그런 과도한 애정이 마커스를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만들었다는 걸 아버지는 알지 못했다.  

 ‘실제로 아버지는 미쳤다. 소중한 외아들이 성인이 되어가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삶의 위험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걱정 때문에 미쳐버렸다. 어린 소년이 성장하고, 키가 크고, 부모보다 찬란한게 빛난다는 것, 그때는 아이를 가두어둘 수 없으며 아이를 세상에 내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바람에 겁에 질려 미쳐버렸다.’ p. 20 

 대학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마다 자동적으로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아주 사소한 선택으로 인해 한 순간에 뒤바뀔 수 있는 게 삶이라고 믿었다. 물론 그건 옳았다. 때문에 아버지에게 마커스는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같았다. 그런 부모의 기대를 알기에 모범적인 대학생활을 유지하려 했다. 클럽에 들어가 어울리지 않고, 여자친구도 사귀지 않으려 했고, 아르바이트와 강의만 열심히 들었다. 자칫 잘못하면 한국전쟁에 끌려가 죽음을 맞이한 사촌들처럼 될 수도 있었고, 원하는 법 공부도 할 수 없고 아버지처럼 정육점 주인이 될 수도 있으므로 나름대로 자신을 다스리려 했다. 

 마커스에게 대학생활은 수많은 유혹(이를테면 사랑과 자유)를 뿌리쳐야 할 시험대같았다. 그러나 피끓는 청춘인 그에게 사랑은 다가왔고 마커스는 혼란스럽다. 올리비아, 그녀가 마커스를 뒤흔들기 시작한다. 올리비아를 향한 열정을 감당할 수 없다. 그녀가 이혼한 부모를 두었고 자살을 기도했으며 방탕한 소문에 휩싸여있어도 상관없었다. 욕망과 욕정이 뒤범벅된 관계여도 좋았다. 올리비아의 문제를 시작으로 모든 것이 쓰나미처럼 마커스에게 달려든다. 무조건 채플을 참석해야 하는 대학의 입장도 불만이었고, 시시콜콜 자신을 간섭하는 아버지도 싫었다. 그의 상태는 태풍의 눈과 같았다.  

 분명 마커스에게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했다. 문제는 조언자가 너무 많았고 마커스가 흡수하기엔 너무도 거대한 애정들이었다는 점이다. 맹장수술로 입원하자 찾아온 어머니는 병실에서 올리비아와 만난다. 어머니가 어떤 말을 할지 마커스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를 위해 그녀와 헤어지겠다고 말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건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마커스의 섣부른 오만이었다. 결국 스스로 울분을 다스지지 못한 마커스의 삶은 불행한 마감을 하게 된다.

 독립된 자아로 온전하게 설 수 있는 시기는 언제일까. 아버지의 조언대로 살았더라면, 채플로 인해 교수와 대립하지 않았다면 마커스는 원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마커스는 완전을 위해 자신의 불완전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싶었을 뿐이다.  청춘을 즐기는 일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일이, 내 생각을 고집하는 일이, 과연 그걸 잘못이라 말할 수 있을까

 아주 매력적인 소설이다. 필립 로스는 거침없이 문장으로 마커스의 감정을 묘사했다. 그건 통쾌했고 알싸하고 짜릿하며 아름다웠다. 두려움 없이 써 내려간 느낌이랄까. 소설 속 시대와 60년이라 시간 차를 두고 있지만 경제상황이나 시대적 상황을 제외하곤 뜨거운 청춘의 몸부림은 그 시대나 지금이 같았다. 그들의 분노와 갈망을 안다고 해도 나는 마커스가 아닌 그의 아버지나 어머니의 편에 설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인생이니 어찌하랴. 그래도 간절하게 원하는 그 무언가에 다다르지 못해 분해하는 주인공 마커스의 모습이 내내 맴도는 이유는 무엇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큰 늑대 파랑
윤이형 지음 / 창비 / 201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윤이형의 소설은 두 번째다. 『셋을 위한 왈츠』은 놀라웠다.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의 이야기였다. 그녀가 만든 인물들은 지구가 아닌 다른 별에서 온 그런 인물처럼 여겨졌다. 『큰 늑대 파랑』 역시 독특했고, 그녀의 상상력을 따라가기에 나는 힘든 독자였다. 소설들은  SF 소설이나 게임의 한 장면에서 볼 듯한 공간 설정과 인물이 등장한다.    

 핵전쟁으로 멸망한 지구, 그 먼 미래 사회의 이야기인 <스카이워커>의 사람들은 과거에 알려하지 않는다.  아니 현재만이 중요한 것이다. 주인공 지현은 트램펄린 선수다. 한 방향으로만 뛰어오를 수 있는 그녀에게 중력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벽 너머 사람들과의 만남은 자신의 삶을 뒤흔들어놓았다.  하나의 기준만을 보려 하기 때문에 지현이 살고 있는 세상은 언제나 하나였다.  ‘다가가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고, 열어두지 않으면 이해받을 수 없다.’ p. 47  지현은 세상을 바꾸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녀의 말은 미래나, 현재나 동일하게 적용된다.   

 첫 단편은 나를 어지럽게 했다. 문장을 읽고 있었지만, 그 공간을 상상할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타고난 기질 외에 원하는 성격, 능력을 튜닝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완전한 항해>, 좀비가 등장하여 서로 죽고 죽이는 <큰 늑대 파랑>,현실과 가상을 구별하기 힘든 <이스투아 공원에서의 점심>,자기의 본체와 분리체를 만들 수 있는 인간들의 이야기<결투>도 마찬가지다. 모두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완전한 항해>가 특히 그러했다.  

 주인공 창연은 해마다 생일을 맞이해 자신을 투닝한다. 과거의 내가 미술에 관해 몰랐다면 그 방면에 유능한 누군가의 죽음을 이용해 창연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동시에 죽음을 맞이한 그는 창연이 되는 것이다.  50번 째 생일을 맞아 창연의 몸으로 튜닝을 할 대상은 인간의 형상을 지닌 1cm도 안되는 ‘루’족의 창이란 여자였다. 

 창은 가보지 못한 세상을 꿈꾸었다. 달 가까이 날아가고 싶었다. 인간의 삶을 동경하기도 했지만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사랑했다. 해가 바뀔수록 보여지는 창연은 완벽한 사람으로 변화했지만, 그를 창연이라 할 수 있을까. 여러 인물이 통합된 모습, 진짜 나를 설명할 수 없고 나를 구성하는 기억도 존재하지 않는 삶이라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에 비해 미세한 생물체에 불과한 창은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선 것이다. 곧 죽음이 닥칠걸 알았지만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닐까.  

 <로즈 가든 라이팅 머신>의 이비와 몽식,<맘>에서 엄마를 찾는 딸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이 두 단편에서 작가 스스로의 이야기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아니, 대부분의 독자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미치도록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이비는 상대적으로 그런 글을 쓰는 친구 몽식이 부럽다. 부정적이고 더러운 상황 묘사를 하더라도 몽식의 글은 언제나 따뜻했고 아름다웠다. 

 그런 몽식이 이비에게 <로즈 가든 라이팅 머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 기계가 몽식의 문장을 새롭게 탄생시키고 있었다. 정말 이런 기계가 등장하는 날이 온다면, 기뻐해야 할까. 몽식은 자신의 글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고 고백하며 혼란스러워한다. 몽식에게 이비가 남긴 글은 모든 글쓰는 이에게 큰 위로를 준다. 창작의 고통으로 힘겨워하는 작가들에게 말이다.  

 ‘여러자기로 힘들겠지만, 몽식아, 어쨌든간에 나는 네 글을 정말 좋아한다. 너는 가짜라고, 네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가짜를 진짜게 되게 하는 게 글쓰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고, 따지고 보면 순수하게 독창적인 것은 사실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또 뭔가를 하나 더 만들어 가만히 놓아보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p. 266 

 <맘>은 특히 윤이형을 떠올리게 한다. 80일 동안 사라진 엄마를 찾는 과정을 담은 소설을 통해 엄마의 삶과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이 단편에도 50년 후의 미래를 경험하고 돌어오는 타임머신이라는 장치가 있긴 하다. 그러나 엄마를 닮은 딸이지만, 정적 엄마가 살아온 삶과 그녀가 원하는 것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딸의 모습은 현실과 가장 가깝다. 먼 미래로 사라진 엄마를 소재로 소설을 쓰는 딸을 통해 어떤 상황이든 글을 써야 하는 작가의 숙명이 느껴진다.  

 『셋을 위한 왈츠』에서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을 만났다면 『큰 늑대 파랑』에서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느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큰 늑대 파랑>이 더 좋다. 소설은 시공간을 초월하며 중력을 지배하는 세상, 어쩌면 곧 현실이 될지 모르는 미래로의 시간 여행이 가능한 세상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신세계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은 너무도 놀랍고 신기하여, 읽는 동안 3D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중요한 건 환상적인 환타지로 내세운 이미지 속에 이 시대의 자화상과 이 사회의 고민들이 담겨있다는 점이다. 단절된 관계, 소통을 원하는 사회, 현실을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61 | 162 | 16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