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큰 늑대 파랑
윤이형 지음 / 창비 / 2011년 1월
평점 :
윤이형의 소설은 두 번째다. 『셋을 위한 왈츠』은 놀라웠다.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의 이야기였다. 그녀가 만든 인물들은 지구가 아닌 다른 별에서 온 그런 인물처럼 여겨졌다. 『큰 늑대 파랑』 역시 독특했고, 그녀의 상상력을 따라가기에 나는 힘든 독자였다. 소설들은 SF 소설이나 게임의 한 장면에서 볼 듯한 공간 설정과 인물이 등장한다.
핵전쟁으로 멸망한 지구, 그 먼 미래 사회의 이야기인 <스카이워커>의 사람들은 과거에 알려하지 않는다. 아니 현재만이 중요한 것이다. 주인공 지현은 트램펄린 선수다. 한 방향으로만 뛰어오를 수 있는 그녀에게 중력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벽 너머 사람들과의 만남은 자신의 삶을 뒤흔들어놓았다. 하나의 기준만을 보려 하기 때문에 지현이 살고 있는 세상은 언제나 하나였다. ‘다가가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고, 열어두지 않으면 이해받을 수 없다.’ p. 47 지현은 세상을 바꾸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녀의 말은 미래나, 현재나 동일하게 적용된다.
첫 단편은 나를 어지럽게 했다. 문장을 읽고 있었지만, 그 공간을 상상할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타고난 기질 외에 원하는 성격, 능력을 튜닝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완전한 항해>, 좀비가 등장하여 서로 죽고 죽이는 <큰 늑대 파랑>,현실과 가상을 구별하기 힘든 <이스투아 공원에서의 점심>,자기의 본체와 분리체를 만들 수 있는 인간들의 이야기<결투>도 마찬가지다. 모두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완전한 항해>가 특히 그러했다.
주인공 창연은 해마다 생일을 맞이해 자신을 투닝한다. 과거의 내가 미술에 관해 몰랐다면 그 방면에 유능한 누군가의 죽음을 이용해 창연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동시에 죽음을 맞이한 그는 창연이 되는 것이다. 50번 째 생일을 맞아 창연의 몸으로 튜닝을 할 대상은 인간의 형상을 지닌 1cm도 안되는 ‘루’족의 창이란 여자였다.
창은 가보지 못한 세상을 꿈꾸었다. 달 가까이 날아가고 싶었다. 인간의 삶을 동경하기도 했지만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사랑했다. 해가 바뀔수록 보여지는 창연은 완벽한 사람으로 변화했지만, 그를 창연이라 할 수 있을까. 여러 인물이 통합된 모습, 진짜 나를 설명할 수 없고 나를 구성하는 기억도 존재하지 않는 삶이라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에 비해 미세한 생물체에 불과한 창은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선 것이다. 곧 죽음이 닥칠걸 알았지만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닐까.
<로즈 가든 라이팅 머신>의 이비와 몽식,<맘>에서 엄마를 찾는 딸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이 두 단편에서 작가 스스로의 이야기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아니, 대부분의 독자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미치도록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이비는 상대적으로 그런 글을 쓰는 친구 몽식이 부럽다. 부정적이고 더러운 상황 묘사를 하더라도 몽식의 글은 언제나 따뜻했고 아름다웠다.
그런 몽식이 이비에게 <로즈 가든 라이팅 머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 기계가 몽식의 문장을 새롭게 탄생시키고 있었다. 정말 이런 기계가 등장하는 날이 온다면, 기뻐해야 할까. 몽식은 자신의 글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고 고백하며 혼란스러워한다. 몽식에게 이비가 남긴 글은 모든 글쓰는 이에게 큰 위로를 준다. 창작의 고통으로 힘겨워하는 작가들에게 말이다.
‘여러자기로 힘들겠지만, 몽식아, 어쨌든간에 나는 네 글을 정말 좋아한다. 너는 가짜라고, 네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가짜를 진짜게 되게 하는 게 글쓰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고, 따지고 보면 순수하게 독창적인 것은 사실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또 뭔가를 하나 더 만들어 가만히 놓아보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p. 266
<맘>은 특히 윤이형을 떠올리게 한다. 80일 동안 사라진 엄마를 찾는 과정을 담은 소설을 통해 엄마의 삶과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이 단편에도 50년 후의 미래를 경험하고 돌어오는 타임머신이라는 장치가 있긴 하다. 그러나 엄마를 닮은 딸이지만, 정적 엄마가 살아온 삶과 그녀가 원하는 것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딸의 모습은 현실과 가장 가깝다. 먼 미래로 사라진 엄마를 소재로 소설을 쓰는 딸을 통해 어떤 상황이든 글을 써야 하는 작가의 숙명이 느껴진다.
『셋을 위한 왈츠』에서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을 만났다면 『큰 늑대 파랑』에서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느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큰 늑대 파랑>이 더 좋다. 소설은 시공간을 초월하며 중력을 지배하는 세상, 어쩌면 곧 현실이 될지 모르는 미래로의 시간 여행이 가능한 세상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신세계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은 너무도 놀랍고 신기하여, 읽는 동안 3D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중요한 건 환상적인 환타지로 내세운 이미지 속에 이 시대의 자화상과 이 사회의 고민들이 담겨있다는 점이다. 단절된 관계, 소통을 원하는 사회, 현실을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