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2
최은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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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꺼내는 일은 어렵다. 상처를 직시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고통을 동반한다. 단순하게 지난 일이니까 이제는 괜찮지 않냐고 묻는 질문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슬픔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처럼 상처도 그렇다. 최은미의 『어제는 봄』은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주저하게 만든다. 소설 속 수진이 쓰고 싶지만 쓸 수 없는 양주 이야기, 그 실체를 전부 보여주지 않은 소설에 대해 답답해할 수 없는 이유가 그렇다. 나는 소설 속 수진이 될 수 없고, 설령 수진과 닮은 상처를 지녔다 해도 나의 상처와 수진의 그것은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공감하고 이해한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종류의 것들. 상처의 안과 밖에 존재하는 두 가지의 삶을 살아간다. 소설은 수진의 현재와 과거를 교차로 들여준다.


10년 전 신춘문예로 소설가가 된 정수진은 결혼을 했고 딸아이를 키우며 소설을 쓴다. 그녀를 소설가로 인정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원고 청탁도 없고 강연 의뢰도 없다. 남편도 조금씩 그런 수진이 지겹다. 딸 소은이 학교에 가고 나면 그는 의식처럼 카페에 가서 소설을 쓴다. 자신의 의지대로 소설가로의 삶을 유지하려는 안감힘이라고 할까. 써야 할 이야기가 있기에 그렇다. 바로 양주 이야기다.


나는 양주 이야기를 10년째 쓰고 있었다. 한 이야기를 10년 동안 붙들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지겹고 힘든 일이었다. 스스로의 능력이 의심스러워지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선우 경사의 답변 속에서 어떤 단어들을 볼 때, 나는 그 단어 하나만 갖고도 양주 이야기를 바로 끝장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소설도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17~18쪽)


그렇다면 독자는 이제 궁금하다. 양주 이야기라니, 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수진은 자신의 소설을 통해 그것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아버지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부모님 사이의 일에 대해서 시시콜콜하게 털어놓지 않는다. 그 죽음에 관련된 범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경찰관 이선우를 만날 뿐이다. 이선우만이 수진을 작가라 부르고 존중한다. 둘의 만남은 점차 개인적인 만남이 되고 서로의 삶에 개입한다. 상대의 시간을 상상하고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려는 욕망이 자란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나는 거울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3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내가 혼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그래도’와 ‘아직도’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가리면 가려지는 것들이지 않은가. 그래도 아직은 살아 있는 선들이 있지 않은가. 그래도 아직은 푸른 핏줄이 보이지 않는가. 그래도 아직은 붉고, 그래도 아직은 물기가 남아 있지 않은가. (42~43쪽)


좋은 엄마와 아내의 역할로도 괜찮아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지난 시간은 돌아보지 않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아이의 안전을 위해 선생님을 돕고 학교 행사에 참여하고 보통의 엄마처럼 보인다. 그러나 수진은 그런 삶을 선택할 수 없다. 상처 밖의 자신은 그런 모습이지만 상처 안에서 살아가는 수진은 결핍된 무언가로 힘들다. 자신의 내면을 채운 불신과 불안, 깊은 상처를 달랠 수 없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소설로 써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오롯이 글을 쓰는 것으로만 수진은 자신을 확인하고 삶을 지탱할 수 있다. 수진이 소설을 완성하고 상처 밖으로 나올 수 있을지, 건조하고 무감한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선택할지 여전히 불투명하다. 다만 독자인 나는 작가의 이런 목소리를 응원할 뿐이다.


나를 극복하고 너에게 가는 길은 이렇게 멀어서, 나는 여전히 매일매일 1층으로, 엘리베이터 밖으로, 유리문 너머로, 니가 나를 기다리던 곳으로, 힘을 다해 달려 나간다.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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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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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삶이 다른 한 사람만을 향한다. 하루의 시작과 끝이 그녀를 향해 열려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시간마저 그녀로 채운다.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와 보낸 짧은 시간의 기억은 더듬고 그녀를 위한 글을 쓴다. 부질없는 사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는 닿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릴 수 없다. 함께 할 수 없을지라도 그녀로 인해 인생이 완결되기를 바라는 간절함. 고독하면서 쓸쓸한 사랑이다. 그럼에도 고독한 생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힘이 사랑이다. 『사랑의 역사』라는 진부한 제목의 소설에서 그 사랑을 확인하다. 사랑의 근원은 무엇이며 사랑은 어떻게 기록되고 간직되는가 생각하게 만든다. 


사랑의 역사이니 분명 누군가의 사랑의 기록일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아름다운 로맨스를 기대하기엔 엉뚱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열쇠공으로 살아온 팔십 대 노인, ‘레오 거스키’의 하루는 혼잣말을 하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일상이다. 가족도 없이 아침을 맞이하고 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그에게도 분명 사랑의 시간이 존재했을 터. 그렇다면 ‘레오 거스키’가 사랑한 여인은 누구일까. 왜 그녀는 곁에 없을까. ‘레오 거스키’에게 사랑의 시작과 끝은 단 한 사람, ‘앨마 메러민스키’뿐이었다. 수줍고 서툰 감정을 나누며 서로에게 다가간 소년과 소녀. 그들은 폴란드의 작은 마을에 살았고 우정을 쌓았고 첫사랑의 감정을 키웠다. 레오는 오직 단 한사람 앨마만을 위한 글을 썼다. 그러나 안타깝게 앨마와 꿈꿨던 미래는 2차 대전으로 무너졌다. 앨마는 미국으로 떠났고, 레오는 폴란드에서 죽음의 위협을 피해 숨어 지냈다. 그리고 결국엔 레오도 친척이 있는 미국으로 왔다. 어쩌면 누군가는 레오가 글을 쓰고 있다는 점을 단번에 주목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막연하게 삶의 마지막에 헤어졌던 앨마를 만나는 게 아닐까 기대했다. 적어도 레오와 앨마는 미국에 있으니까. 


이제 소설은 다른 이야기로 시선을 돌린다. 열네 살 소녀 ‘앨마’가 등장한다. 이 소녀가 혹시 레오의 손녀일까. 나는 혼자 생각했다. 레오와는 단 하나의 연결점도 찾을 수 없는 소녀다. 엄마와 남동생과 살고 있다. 아빠의 죽음으로 인해 힘든 사춘기를 보내며 아빠에 대한 모든 것을 기억하려 애쓴다. 그러면서도 아빠를 그리워하는 엄마가 안쓰러워서 아빠란 말도, 아빠와의 시간도 언급하지 못한다. 앨마의 이름은 <사랑의 역사>란 책의 여주인공의 이름이라고 한다. 그 책은 아빠가 우연하게 서점에서 발견하고 엄마에게 선물한 책으로 스페인어로 쓰인 책이었다. 책의 내용도 모르면서 소녀 앨마는 자신에게 이름을 준 주인공 앨마가 궁금하다. 


소설은 노인 레오와 소녀 앨마의 이야기를 교차로 들려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레오의 이야기보다 엉뚱하고 발랄한 소녀 앨마의 이야기에 더 집중했다. 소녀 앨마는 아빠를 잊지 못하고 삶의 의미도 찾지 못하고 번역만 하는 엄마에게 뭔가 신나는 일, 그러니까 새로운 사랑을 찾아주고 싶어 한다. 주변을 둘러보고 엄마와 어떻게든 이어주고 싶지만 결과는 실패다. 드디어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엄마에게 한 권의 책을 영어로 번역해달라는 의뢰하는 한 남자. 편지를 보낸 ‘제이컵 마커스’란 남자가 번역을 부탁한 책은 <사랑의 역사>였다. 이 책이 그 책일까. 앨마는 엄마인 척 남자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에 대해 알아가려 한다. 그리고 엄마가 번역한 <사랑의 역사>를 읽으면서 주인공인 앨마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앨마 메러민스키’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을 한다. 앨마의 호기심과 엄마를 향한 사랑이 너무 예뻐서 ‘제이컵 마커스’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리고 소설의 제목인 <사랑의 역사>속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소설 <사랑의 역사>는 어떤 이야기일까. 점점 더 궁금해졌다.


앨마의 엄마가 번역한 내용을 소개하는 부분을 보면 소설보다는 아포리즘의 형식을 빌린 사랑의 고백이자 연서처럼 느껴진다. 분명 소년 시절 레오가 ‘앨마 메러민스키’를 위해 쓴 소설이 맞는 것 같은데. 작가의 이름은 다른 사람이다. 그는 누구일까. 조각을 하나씩 연결을 시켜 이야기가 완성되는 동안, 독자는 감탄한다. 한 권의 책으로 이어진 사람들의 놀랍고 신비한 인연.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이 결국엔 하나의 이야기 <사랑의 역사>로 모인다. 저마다의 사랑의 역사에 대해 들려준다고 할까. 첫사랑의 애틋한 기억으로 일생을 견뎌온 레오와 ‘앨마 메러민스키’의 사랑의 역사, 영원한 사랑으로 기억될 소녀 앨마의 엄마와 아빠가 만든 사랑의 역사, ‘앨마 메러민스키’의 흔적을 찾아가는 열네 살 소녀 앨마가 만들어갈 사랑의 역사. 


내가 무슨 일을 하건, 혹은 어떤 사람을 찾아내건, 나는-그는-우리 중 누구도-엄마가 간직한 아빠의 기억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마침내 이해했다. 엄마를 슬프게 하면서도 위안을 주는 그 기억으로 엄마는 세상을 만들어냈고, 다른 사람은 불가능해도 엄마는 그 안에서 살아남은 방법을 알았다. (277쪽)


일생 동안 한 사람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이 진정한 사랑이라 해도 그 사랑이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사랑은 부족함 없이 아름답다. 사랑은 그런 게 아니던가. 조금씩 사랑에 대해 알아가는 소녀 앨마를 통해 우리는 느낀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확신과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책임지고 감당해야 한다는 걸 배운다. 슬프면서도 유쾌하고 고요하면서도 소란스러운 즐거움이 가득한 소설이다. 사랑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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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윤성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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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소설은 모두 흔해빠진 라디오 사연의 다른 버전일지도 모른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야기였는데 너라는 화자로 바뀌거나 먼 과거에 일어난 기억 속 장면인데 지금 마주하고 있거나 하는 것처럼. 결국엔 인생도 시시콜콜한 것들의 조합이라는 위안일까. 분명 좋은 소설을 읽었는데 이렇게 헛헛한 느낌이 남은 것일까. 아니다, 그들의 사연이 나의 그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소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로 매듭을 지어야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다른 소설을 읽었을 때는 소설 속 주인공이 어떤 시간을 살고 있을까. 그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았다. 마지막 문장이 끝나면 그게 끝이었는데 자꾸만 <어느 밤>의 할머니는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파묘>의 이순일은 여전히 사위의 눈치를 보며 큰딸의 살림을 도와주고 있는지, 한세진은 그런 엄마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을까 한 번씩 상상하게 된다.


여성의 삶을 다룬 이야기라 그런지도 모른다. 2019 김승옥 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7편은 모두 여성작가의 소설이다. 윤성희와 황정은의 단편에만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권여선의 <하늘 높이 아름답게>는 같은 성당에 다니며 봉사활동을 하는 노년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함께 봉사를 하면서도 어떤 삶을 견디며 살아왔는지 몰랐던(아니, 알고 싶지 않았던) 한 여인의 죽음을 각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다. 종교와 봉사라는 하나의 울타리에 속했지만 그 안에서 저마다 자신의 울타리를 지키느라 틈을 내주지 않았다. 같은 시대를 살아왔지만 결코 같은 삶을 살았다 할 수 없는 그들이었다.


최은미의 <운내>는 독특하고도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산주님이 있는 운내의 수련원에서 성장기의 두 소녀가 겪는 평범하지 않은 일상. 그것은 때로 폭력적이며 보호받지 못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부모와 떨어져 수련원에서 보낸 그 시간이 과연 추억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모두 자신의 인생을 사느라 때로 곁을 내주지 못한다. 가족일지라도 그렇다. 부모와 자식은 무엇인가, 산다는 건 뭘까, 자꾸만 같은 질문을 던지는 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윤성희와 황정은의 단편이다. 남편의 믿고 의지하며 평생을 살았고 자식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어느 밤>의 화자는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다. 큰 소리를 내지도 않고 미움이 커져만 가는 남편이 좋아하는 것들로 밥상을 차린다. 하지만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고독으로 외롭고 힘들다. 놀이터에서 킥보드를 훔쳐 밤마다 킥보드를 탄다. 어느 밤엔 결국 넘어지고 일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런 화자를 발견한 청년과 나누는 짧은 대화가 이 소설을 관통한다. 독서실에 다니며 고시공부를 한다는 거짓말을 하고 사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청년.


나는 그래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든 거라고. (「어느 밤」, 27쪽)

나는 청년에게 지금은 술래를 피해 얼음이 된 거라고 말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곧 누군가 땡 하고 외쳐줄 거라고 얼음땡 놀이란 그런 거라고. (「어느 밤」, 27쪽)


구급차가 오고 할머니는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청년은 할머니의 부탁으로 킥보드를 제자리에 갖다 놓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제와 같은 일상을 이어갈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번쯤 안부가 궁금한 이들이다. 그들이 조금은 괜찮아졌는지, 회복되고 있는지.


황정은의 「파묘」는 제목 그대로 무덤을 파내 화장을 하는 과정에 다룬다. 엄마 이순일의 조부의 묘를 파묘하는 일이다. 큰딸도 아니고 장남도 아닌 둘째 한세진이 엄마 이순일 모시고 묘가 있는 철원으로 향한다. 이순일이 만든 음을 간단하게 제를 지내고 파묘는 진행된다. 묘가 있는 그곳은 이순일에게 친정과 같은 곳, 그러나 이순일의 남편과 자식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이다. 그걸 알기에 이순일은 파묘를 결정했다. 누군가 그곳을 돌보고 지켜주기를 바라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 묘가 이순일 남편의 가족이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파트 경비를 하는 남편의 식사를 챙기고 큰 딸의 아이들을 돌보는 이순일이 둘째 한세진에게 살림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한 세대가 다른 세대로 이어지거나 끝나는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예전과는 달라진 관습과 문화, 그리고 가족 구성원의 단절과 연대까지.


언제까지 혼자 그러고 살 거냐고. 이제 그만 집에 들어와 살림을 물려받을 준비 해야지.

(…)

나는 내 살림 해야지.

너 하는 게 살림이냐.

살림 아니면.

결혼도 안 하고 사는 게 그게 무슨 살림이냐.

내 집에서 나 사는 게 살림이지. 내 살림도 바쁜데 내가 어떻게 엄마 살림을 해요. (「파묘」, 157쪽)


큰딸은 결혼했고 아들은 뉴질랜드로 갔으니 이순일의 일상의 고단함과 속상함을 토로할 대상은 한세진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세진은 이순일의 말을 들어줄 뿐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한세진의 말대로 그녀는 그녀의 살림을 해야 하므로. 모든 게 변하는 세상, 살아간다는 것만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이순일과 한세진은 그들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을 것 같다. 어떤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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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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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법 요란하게 청소를 한다. 대청소까지는 아니더라도 철 지난 옷들과 묵혀두었던 짐들을 꺼내 정리하는 일이다. 책장의 책들도 자리를 바꾸고 서랍장에 안착한 먼지를 털어낸다. 그러다 잊고 있었던 물건, 잃어버린 줄 알았던 것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어쩌면 이사는 그런 일이 아닐까 싶다. 삶이 움직이는 일, 놓쳤던 것을 붙잡고 붙잡고 있던 것들과 이별하는 일 말이다. 이사를 주제로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는 많다. 전세사기, 부실공사, 이삿짐이나 집 상태를 꼼꼼하게 살피지 못한 경우에 발생하는 당혹감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웃에 누가 사는지, 그들의 성향이 어떤지, 집의 이력에 대해서는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공포의 대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자꾸만 의심한다.


마리 유키코의 『이사』는 그런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것들에 대해 작정한 듯 그려낸 이야기들이다. 이사를 경험한 이라면 한 번쯤 경험한 일들 말이다. 부동산 중개인과 집을 보러 다니고, 집 안을 살피고, 관리비를 메모하고, 이삿짐센터에 견적을 내고 이사 후 정리를 하면서 일상의 평온을 유지하는 것들. 그 안에 숨겨진 불안이나 공포까지 포착한다. 일상 곳곳에 도사린 공포가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사를 위해 집을 구하는 과정에 꼭 필요한 건 무엇일까. 과거와 다르게 층간 소음과 범죄를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가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싶다. 집에서 발견한 작은 구멍까지 살필 수밖에 없는 주인공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살고 있는 집의 전 거주자가 살인범이라는 사실이 이사의 계기가 되었다. 다시 그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공포, 어떻게든 새로운 집을 구해야 했다. 얼마나 안전한 집인가, 새로운 항목이 생긴 것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라도 놓칠 수 없다는 각오로 집안 전체를 둘러보는 「문」의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에 몰입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은 안전한 곳일까? 자꾸만 집안을 돌아보고 살피게 된다. 어젯까지 가장 편안한 공간이었던 집은 사라지고 만다. 붙박이장, 혹은 베란다에 내가 모르는 공간이 있는 건 아닐까.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아랫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인사만 겨우 하는 앞집 아주머니는 어떤 사람일까. 나쁜 사람은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


마리 유키코는 이처럼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어야 할 집, 그 안에 숨겨진 공포를 포착한다. 이사를 결정하고 물건을 정리하는 「수납장」 도 마찬가지다. 아빠가 없던 주인공이 어린 시절 그린 아빠의 얼굴, 그림을 발견하고 추억하는 이야기라고 여기면 오산이다. 그림 속 주인공인 옆집 아저씨와 엄마의 관계와 느닷없이 이사를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나중에 알게 된 아저씨의 죽음. 이사를 해야만 하는 남모를 속 사정이 있었던 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든다. 한 번 생긴 의심은 점점 더 커지고 구체화된다. 이삿짐센터에서 전화로 고객 응대를 하는 일을 하는 「책상」의 주인공은 전임자의 편지를 발견하고 공포에 휩싸인다. 사무실 냉동실은 사용하지 말라는 사장 누나의 경고. 그 모든 것이 오해라고 해도 너무 섬뜩하다.


그저 소설일 뿐이라고 여길 수 없는 건 사실적인 이야기라서 그렇다. 일상이라는 공포가 가득하다. 옆집 부부의 싸움이 사소한 다툼에서 폭력으로 변하는 과정이 불러오는 무서움을 말하는「벽」, 사무실이 이사하면서 의도적으로 한 사람에게 모든 짐을 전달한 「상자」, 인터넷 공포물 게시판의 글들로 채워진「끈」에서 벌어진 사건의 당사자가 언제라도 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사’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는 건 집을 찾는 기간에 한정된다. 집이 결정되면 그때까지 두근대고 설레던 기분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일상에 매몰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바쁜 이사 준비와 뒷정리가 오히려 고통으로 다가온다. 특히 이사 당일부터 며칠간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가벼운 신경쇠약에 걸린다. (「끈」, 197쪽)


장마와 더위에 지친 날들, 서늘한 분위기로 채워진 마리 유키코의 『이사』는 정말 잘 어울린다. 여름 특선 영화나 드라마를 본 것 같다. 친절하게도「작품 해설」이란 장치로 가장 완벽한 재미를 안겨준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얼마나 섬뜩하고 얼마나 기발한지는 말할 수 없다. 그건 당신의 몫이므로. 다만 현실과 소설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상상은 하지 않기를. 일상 곳곳에 숨겨진 공포의 그림자와 마주하는 일은 소설로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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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마음 바깥에 있었습니다 - <고통을 달래는 순서>의 김경미 시인이 차곡차곡 쌓아올린 일상의 풍경
김경미 지음 / 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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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시인의 시집을 소장하고 좋은 기억을 갖고 있기에 그녀의 산문을 읽고 싶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녀가 전업시인인 줄 알았다. 그런 경우가 정말 드물다는 걸 알면서도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누구나 반할 만한 차분하고 우아한 김미숙의 목소리로 진행하는 프로라서 더욱 반가웠다. 하지만 김경미 시인의 일상에 대한 기록이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청취자를 대상으로 하는 원고라서 그런지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한 글이었다. 그러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글이었다. 누구나 글 속의 그나 그녀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익숙한 저자의 책이나, 에피소드를 언급하면서도 자연스레 우리의 일상과 접목시킬 수 있는 능력, 역시 작가여서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종종 정글에 비유하는 글에서 생존과 경쟁만 보는 데 사자를 떠올리면서 이런 생각을 나눌 수 있다니 말이다.

좋아하는 이들과의, 가까워지고 싶은 누군가와의 약속이 적혀 있는 탁상 달력을 보면 저절로 설레고 행복해집니다. 그거야말로 내가 사자 같은 맹수들의 세계가 아닌 다정하고 따뜻하고 유쾌한 인간 세계에 살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중의 하나일 테니까요. (「우리는 사자가 아니므로」중에서, 52쪽)

하루하루 휴가 날짜를 꼽으면서 더운 여름을 견디는 보통의 우리,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씩 특별한 장소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여유를 부리는 걸 알고 있기에 그 소소한 행복을 불특정 다수의 청취자에서 전할 수 있다. 올해에는 코로나19로 인해 멋진 휴가를 계획할 수 없기에 더욱 그렇다. 홈캉스를 즐기는 이들에게 라디오, 음악, 그리고 이런 글은 좋은 친구가 될 것이다. 어떤 글은 청취자가 보낸 사연 같고, 어떤 글은 어느 시절 라디오에 엽서를 쓰던 나의 이야기 같았다. 진행자가 읽고 음악이 흐르는 동안 가만히 사색에 잠겼을 수많은 주인공들의 감정을 응집한 글이라고 할까.

이런 글도 그래서 더 와닿았다. 매년 일 월이 되면 스스로 자책하는 시간으로 보냈는데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면 여유롭고 풍성하게 나의 나이를 사랑할 이유가 많았다. 눈에 보이는 만족스러운 성장이 아니더라도 한해 한해 쌓이는 그 무언가가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그동안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아쉬워만 했습니다. 늘어 가는 숫자만큼 나의 인격이 성장하고 인간관계가 넓고 깊어진다는 생각은 해 보지 못했습니다. 해가 갈수록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하나씩 늘어 가는 것에 한숨만 지을 줄 알았지 내 인생의 울타리가 한 뼘씩 커져 가는 건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중에서, 257쪽)

매일매일 일정한 시간에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글이 세상에 퍼지는 느낌은 어떨까? 그가 쓴 시를 독자가 읽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제목 그대로 글은 마음 바깥에 있는 우리를 안으로 불러들인다. 괜찮다고 덮어두었던 감정을 자세히 보라고, 지금 당신의 마음은 어떠냐고 묻는다. 당신의 글로 인해 산뜻해진 것 같다고, 더운 여름에 자두 한 알을 한 입 베어 문 것처럼 달콤한 기분이라고 답한다.

그러고 보면 늘 행복하고 낙천적인 생각만 하자, 그렇게 살자 하는 지나친 낙관주의도 그리 바람직한 게 아닙니다. 기쁨과 행복만이 아니라 분노와 슬픔과 두려움까지도 골고루 활용하면서 ‘더 감정적’이 되는 게 정식적으로 훨씬 더 건강한 삶인 거죠. (「고장 난 자동차」중에서, 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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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7-30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라디오 방송 작가는 시인이 많이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허수경 시인도 예전에 라디오 방송 작가 했다고 하잖아요 허은실도 생각나고 이병률도 생각나네요 또 누가 있을지... 방송으로 하는 건 거의 사라지기도 하겠지요 이렇게 책으로 나와서 작가는 좋을 듯합니다


희선

자목련 2020-07-31 15:43   좋아요 1 | URL
그렇네요.희선 님의 댓글을 보니 모두 시인이네요. 방송으로 듣는 것과 책으로 읽는 건 그 느낌이 다른 것 같아요.
희선 님, 건강한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