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윤성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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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소설은 모두 흔해빠진 라디오 사연의 다른 버전일지도 모른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야기였는데 너라는 화자로 바뀌거나 먼 과거에 일어난 기억 속 장면인데 지금 마주하고 있거나 하는 것처럼. 결국엔 인생도 시시콜콜한 것들의 조합이라는 위안일까. 분명 좋은 소설을 읽었는데 이렇게 헛헛한 느낌이 남은 것일까. 아니다, 그들의 사연이 나의 그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소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로 매듭을 지어야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다른 소설을 읽었을 때는 소설 속 주인공이 어떤 시간을 살고 있을까. 그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았다. 마지막 문장이 끝나면 그게 끝이었는데 자꾸만 <어느 밤>의 할머니는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파묘>의 이순일은 여전히 사위의 눈치를 보며 큰딸의 살림을 도와주고 있는지, 한세진은 그런 엄마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을까 한 번씩 상상하게 된다.


여성의 삶을 다룬 이야기라 그런지도 모른다. 2019 김승옥 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7편은 모두 여성작가의 소설이다. 윤성희와 황정은의 단편에만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권여선의 <하늘 높이 아름답게>는 같은 성당에 다니며 봉사활동을 하는 노년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함께 봉사를 하면서도 어떤 삶을 견디며 살아왔는지 몰랐던(아니, 알고 싶지 않았던) 한 여인의 죽음을 각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다. 종교와 봉사라는 하나의 울타리에 속했지만 그 안에서 저마다 자신의 울타리를 지키느라 틈을 내주지 않았다. 같은 시대를 살아왔지만 결코 같은 삶을 살았다 할 수 없는 그들이었다.


최은미의 <운내>는 독특하고도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산주님이 있는 운내의 수련원에서 성장기의 두 소녀가 겪는 평범하지 않은 일상. 그것은 때로 폭력적이며 보호받지 못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부모와 떨어져 수련원에서 보낸 그 시간이 과연 추억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모두 자신의 인생을 사느라 때로 곁을 내주지 못한다. 가족일지라도 그렇다. 부모와 자식은 무엇인가, 산다는 건 뭘까, 자꾸만 같은 질문을 던지는 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윤성희와 황정은의 단편이다. 남편의 믿고 의지하며 평생을 살았고 자식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어느 밤>의 화자는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다. 큰 소리를 내지도 않고 미움이 커져만 가는 남편이 좋아하는 것들로 밥상을 차린다. 하지만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고독으로 외롭고 힘들다. 놀이터에서 킥보드를 훔쳐 밤마다 킥보드를 탄다. 어느 밤엔 결국 넘어지고 일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런 화자를 발견한 청년과 나누는 짧은 대화가 이 소설을 관통한다. 독서실에 다니며 고시공부를 한다는 거짓말을 하고 사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청년.


나는 그래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든 거라고. (「어느 밤」, 27쪽)

나는 청년에게 지금은 술래를 피해 얼음이 된 거라고 말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곧 누군가 땡 하고 외쳐줄 거라고 얼음땡 놀이란 그런 거라고. (「어느 밤」, 27쪽)


구급차가 오고 할머니는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청년은 할머니의 부탁으로 킥보드를 제자리에 갖다 놓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제와 같은 일상을 이어갈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번쯤 안부가 궁금한 이들이다. 그들이 조금은 괜찮아졌는지, 회복되고 있는지.


황정은의 「파묘」는 제목 그대로 무덤을 파내 화장을 하는 과정에 다룬다. 엄마 이순일의 조부의 묘를 파묘하는 일이다. 큰딸도 아니고 장남도 아닌 둘째 한세진이 엄마 이순일 모시고 묘가 있는 철원으로 향한다. 이순일이 만든 음을 간단하게 제를 지내고 파묘는 진행된다. 묘가 있는 그곳은 이순일에게 친정과 같은 곳, 그러나 이순일의 남편과 자식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이다. 그걸 알기에 이순일은 파묘를 결정했다. 누군가 그곳을 돌보고 지켜주기를 바라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 묘가 이순일 남편의 가족이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파트 경비를 하는 남편의 식사를 챙기고 큰 딸의 아이들을 돌보는 이순일이 둘째 한세진에게 살림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한 세대가 다른 세대로 이어지거나 끝나는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예전과는 달라진 관습과 문화, 그리고 가족 구성원의 단절과 연대까지.


언제까지 혼자 그러고 살 거냐고. 이제 그만 집에 들어와 살림을 물려받을 준비 해야지.

(…)

나는 내 살림 해야지.

너 하는 게 살림이냐.

살림 아니면.

결혼도 안 하고 사는 게 그게 무슨 살림이냐.

내 집에서 나 사는 게 살림이지. 내 살림도 바쁜데 내가 어떻게 엄마 살림을 해요. (「파묘」, 157쪽)


큰딸은 결혼했고 아들은 뉴질랜드로 갔으니 이순일의 일상의 고단함과 속상함을 토로할 대상은 한세진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세진은 이순일의 말을 들어줄 뿐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한세진의 말대로 그녀는 그녀의 살림을 해야 하므로. 모든 게 변하는 세상, 살아간다는 것만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이순일과 한세진은 그들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을 것 같다. 어떤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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