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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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법 요란하게 청소를 한다. 대청소까지는 아니더라도 철 지난 옷들과 묵혀두었던 짐들을 꺼내 정리하는 일이다. 책장의 책들도 자리를 바꾸고 서랍장에 안착한 먼지를 털어낸다. 그러다 잊고 있었던 물건, 잃어버린 줄 알았던 것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어쩌면 이사는 그런 일이 아닐까 싶다. 삶이 움직이는 일, 놓쳤던 것을 붙잡고 붙잡고 있던 것들과 이별하는 일 말이다. 이사를 주제로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는 많다. 전세사기, 부실공사, 이삿짐이나 집 상태를 꼼꼼하게 살피지 못한 경우에 발생하는 당혹감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웃에 누가 사는지, 그들의 성향이 어떤지, 집의 이력에 대해서는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공포의 대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자꾸만 의심한다.


마리 유키코의 『이사』는 그런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것들에 대해 작정한 듯 그려낸 이야기들이다. 이사를 경험한 이라면 한 번쯤 경험한 일들 말이다. 부동산 중개인과 집을 보러 다니고, 집 안을 살피고, 관리비를 메모하고, 이삿짐센터에 견적을 내고 이사 후 정리를 하면서 일상의 평온을 유지하는 것들. 그 안에 숨겨진 불안이나 공포까지 포착한다. 일상 곳곳에 도사린 공포가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사를 위해 집을 구하는 과정에 꼭 필요한 건 무엇일까. 과거와 다르게 층간 소음과 범죄를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가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싶다. 집에서 발견한 작은 구멍까지 살필 수밖에 없는 주인공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살고 있는 집의 전 거주자가 살인범이라는 사실이 이사의 계기가 되었다. 다시 그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공포, 어떻게든 새로운 집을 구해야 했다. 얼마나 안전한 집인가, 새로운 항목이 생긴 것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라도 놓칠 수 없다는 각오로 집안 전체를 둘러보는 「문」의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에 몰입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은 안전한 곳일까? 자꾸만 집안을 돌아보고 살피게 된다. 어젯까지 가장 편안한 공간이었던 집은 사라지고 만다. 붙박이장, 혹은 베란다에 내가 모르는 공간이 있는 건 아닐까.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아랫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인사만 겨우 하는 앞집 아주머니는 어떤 사람일까. 나쁜 사람은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


마리 유키코는 이처럼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어야 할 집, 그 안에 숨겨진 공포를 포착한다. 이사를 결정하고 물건을 정리하는 「수납장」 도 마찬가지다. 아빠가 없던 주인공이 어린 시절 그린 아빠의 얼굴, 그림을 발견하고 추억하는 이야기라고 여기면 오산이다. 그림 속 주인공인 옆집 아저씨와 엄마의 관계와 느닷없이 이사를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나중에 알게 된 아저씨의 죽음. 이사를 해야만 하는 남모를 속 사정이 있었던 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든다. 한 번 생긴 의심은 점점 더 커지고 구체화된다. 이삿짐센터에서 전화로 고객 응대를 하는 일을 하는 「책상」의 주인공은 전임자의 편지를 발견하고 공포에 휩싸인다. 사무실 냉동실은 사용하지 말라는 사장 누나의 경고. 그 모든 것이 오해라고 해도 너무 섬뜩하다.


그저 소설일 뿐이라고 여길 수 없는 건 사실적인 이야기라서 그렇다. 일상이라는 공포가 가득하다. 옆집 부부의 싸움이 사소한 다툼에서 폭력으로 변하는 과정이 불러오는 무서움을 말하는「벽」, 사무실이 이사하면서 의도적으로 한 사람에게 모든 짐을 전달한 「상자」, 인터넷 공포물 게시판의 글들로 채워진「끈」에서 벌어진 사건의 당사자가 언제라도 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사’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는 건 집을 찾는 기간에 한정된다. 집이 결정되면 그때까지 두근대고 설레던 기분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일상에 매몰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바쁜 이사 준비와 뒷정리가 오히려 고통으로 다가온다. 특히 이사 당일부터 며칠간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가벼운 신경쇠약에 걸린다. (「끈」, 197쪽)


장마와 더위에 지친 날들, 서늘한 분위기로 채워진 마리 유키코의 『이사』는 정말 잘 어울린다. 여름 특선 영화나 드라마를 본 것 같다. 친절하게도「작품 해설」이란 장치로 가장 완벽한 재미를 안겨준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얼마나 섬뜩하고 얼마나 기발한지는 말할 수 없다. 그건 당신의 몫이므로. 다만 현실과 소설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상상은 하지 않기를. 일상 곳곳에 숨겨진 공포의 그림자와 마주하는 일은 소설로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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