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마음 바깥에 있었습니다 - <고통을 달래는 순서>의 김경미 시인이 차곡차곡 쌓아올린 일상의 풍경
김경미 지음 / 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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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시인의 시집을 소장하고 좋은 기억을 갖고 있기에 그녀의 산문을 읽고 싶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녀가 전업시인인 줄 알았다. 그런 경우가 정말 드물다는 걸 알면서도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누구나 반할 만한 차분하고 우아한 김미숙의 목소리로 진행하는 프로라서 더욱 반가웠다. 하지만 김경미 시인의 일상에 대한 기록이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청취자를 대상으로 하는 원고라서 그런지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한 글이었다. 그러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글이었다. 누구나 글 속의 그나 그녀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익숙한 저자의 책이나, 에피소드를 언급하면서도 자연스레 우리의 일상과 접목시킬 수 있는 능력, 역시 작가여서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종종 정글에 비유하는 글에서 생존과 경쟁만 보는 데 사자를 떠올리면서 이런 생각을 나눌 수 있다니 말이다.

좋아하는 이들과의, 가까워지고 싶은 누군가와의 약속이 적혀 있는 탁상 달력을 보면 저절로 설레고 행복해집니다. 그거야말로 내가 사자 같은 맹수들의 세계가 아닌 다정하고 따뜻하고 유쾌한 인간 세계에 살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중의 하나일 테니까요. (「우리는 사자가 아니므로」중에서, 52쪽)

하루하루 휴가 날짜를 꼽으면서 더운 여름을 견디는 보통의 우리,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씩 특별한 장소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여유를 부리는 걸 알고 있기에 그 소소한 행복을 불특정 다수의 청취자에서 전할 수 있다. 올해에는 코로나19로 인해 멋진 휴가를 계획할 수 없기에 더욱 그렇다. 홈캉스를 즐기는 이들에게 라디오, 음악, 그리고 이런 글은 좋은 친구가 될 것이다. 어떤 글은 청취자가 보낸 사연 같고, 어떤 글은 어느 시절 라디오에 엽서를 쓰던 나의 이야기 같았다. 진행자가 읽고 음악이 흐르는 동안 가만히 사색에 잠겼을 수많은 주인공들의 감정을 응집한 글이라고 할까.

이런 글도 그래서 더 와닿았다. 매년 일 월이 되면 스스로 자책하는 시간으로 보냈는데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면 여유롭고 풍성하게 나의 나이를 사랑할 이유가 많았다. 눈에 보이는 만족스러운 성장이 아니더라도 한해 한해 쌓이는 그 무언가가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그동안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아쉬워만 했습니다. 늘어 가는 숫자만큼 나의 인격이 성장하고 인간관계가 넓고 깊어진다는 생각은 해 보지 못했습니다. 해가 갈수록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하나씩 늘어 가는 것에 한숨만 지을 줄 알았지 내 인생의 울타리가 한 뼘씩 커져 가는 건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중에서, 257쪽)

매일매일 일정한 시간에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글이 세상에 퍼지는 느낌은 어떨까? 그가 쓴 시를 독자가 읽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제목 그대로 글은 마음 바깥에 있는 우리를 안으로 불러들인다. 괜찮다고 덮어두었던 감정을 자세히 보라고, 지금 당신의 마음은 어떠냐고 묻는다. 당신의 글로 인해 산뜻해진 것 같다고, 더운 여름에 자두 한 알을 한 입 베어 문 것처럼 달콤한 기분이라고 답한다.

그러고 보면 늘 행복하고 낙천적인 생각만 하자, 그렇게 살자 하는 지나친 낙관주의도 그리 바람직한 게 아닙니다. 기쁨과 행복만이 아니라 분노와 슬픔과 두려움까지도 골고루 활용하면서 ‘더 감정적’이 되는 게 정식적으로 훨씬 더 건강한 삶인 거죠. (「고장 난 자동차」중에서, 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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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7-30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라디오 방송 작가는 시인이 많이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허수경 시인도 예전에 라디오 방송 작가 했다고 하잖아요 허은실도 생각나고 이병률도 생각나네요 또 누가 있을지... 방송으로 하는 건 거의 사라지기도 하겠지요 이렇게 책으로 나와서 작가는 좋을 듯합니다


희선

자목련 2020-07-31 15:43   좋아요 1 | URL
그렇네요.희선 님의 댓글을 보니 모두 시인이네요. 방송으로 듣는 것과 책으로 읽는 건 그 느낌이 다른 것 같아요.
희선 님, 건강한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