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공장 - 소설가 김중혁의 입체적인 공장 산책기
김중혁 글.그림 / 한겨레출판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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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물건이든 어렵지 않게 살 수 있는 세상이다.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지갑을 들고 마트나 백화점에 가거나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면 된다. 빠른 속도로 안방까지 배달이 가능하다. 때문에 그러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공장에 대해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다. 하루가 다르게 신기한 물건을 만드니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어린 시절 기억 속 고모는 형광등을 만드는 공장에 다녔다. 기억이란 참 묘해서 아직도 형광등을 볼 때마다 그 상표가 생각난다. 그리고 뉴스를 통해 종종 보았던 정갈한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러니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은 정말 신선한 발상이다. 학생도 아닌 소설가가 공장을 산책하고 취재하다니. 유쾌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만 같았던 기대는 딱 맞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가 들려줄 다음 공장 이야기가 기다려졌다.

 

 김중혁 작가가 소개하는 공장은 우리네 일상에서 친근하게 다가오는 물건들을 만드는 곳이다. 종이를 만드는 제지 공장, 매일 먹는 음식을 만들 때 꼭 있어야 하는 간장 공장, 여성의 몸과 항상 함께 하는 브래지어 공장, 사랑을 나눌 때 필요한 콘돔 공장, 영화가 먼저 떠오르는 초콜릿 공장, 그곳에 가면 왠지 아름다워질 것 같은 화장품 공장, 지구를 만드는 지구본 공장 등 15개 공장이다.

 

 소설가답게 그가 맨 처음 소개한 공장은 제지 공장이다. 전자책의 등장으로 종이책이 사라지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종이로 만든 신문을 읽고, 잡지를 구독하고 책을 읽는다. 아마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제지 공장이 무척 반가웠을 것이다. 나무에서 생산된 펄프로 종이를 만들고 종이로 만들어진 것들은 다시 폐지가 되고 다시 재활용이 된다. 순환,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말인가. 

 

 

 

 

 

 ‘제지 공장 마당에는 엄청난 양이 재생 펄프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는데, 마치 잔잔한 파도를 보는 듯했다. 펄프는 겹겹이 쌓여 있었고, 까마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거긴 정말 바다 같았다. 종이로 가득 찬 바다, 나무로 만든 바다, 우리가 버린 바다, 누군가 되살린 바다.’(22쪽)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게 된다는 말처럼 좋아하는 물건을 만드는 공장에선 김중혁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콘돔과 브래지어 공장에서는 글에서도 부끄러움이 느껴졌지만 스스로 가방 중독자라 고백하며 가방 공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 그가 얼마나 가방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명품이 아닌 오롯이 나만을 위한 가방 말이다. 그의 말대로 결핍이 불러온 중독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방이 없었고, 내 책상이 없었다. 가방만이 유일한 내 것이었고, 내 가방엔 내 것을 넣을 수 있었다. 가방을 들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평안해지고, 안전한 곳에 있는 것 같고, 모든 게 준비돼 있는 것 같았다. 가방은 축소한 집 같다. 가방에 달린 주머니들은 각각 하나의 방이고, 그래서인지 나는 수납 공간이 많고 주머니가 여러 개 달린 가방을 유독 좋아한다.’(82쪽)

 

 하나의 물건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생경하고 재미있지만 그것에 담긴 김중혁의 시선과 사연을 들을 수 있어 더욱 좋다. 지금과 다르게 모든 게 귀했던 시절 초콜릿과 피아노는 부의 상징이었다. 김중혁이 추억하듯 피아노는 특별했다. 나와는 다른 세계의 아이들만 만질 수 있는 악기였고, 어른이 되면 꼭 배우고 싶은 악기였다. 그래서 어른이 된 후에도 여전히 피아노는 애틋한 존재다. 예쁜 얼굴의 화장품 판매 아주머니에게 엄마는 립스틱이 아닌 손과 얼굴에 바를 수 있는 크림을 샀다. 누군가와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점점 찾기 어려운 대장간 공장, 음악의 의미를 되새기는 엘피 공장, 냉장고의 맥주를 꺼내게 만드는 맥주 공장, 모두 다 유익하고 재미있다. 특별히 인상적인 공장은 지구본을 만드는 공장과 김중혁의 글 공장이다. 한국이 지구본을 얼마나 잘 만드는지 처음 알았다. 거기다 나라의 수도가 바뀔 때마다 수정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니, 정말 몰랐다. 김중혁은 지구본을 보며 우주 속 티끌보다 작은 우리의 존재에 대한 글을 썼지만 나는‘세계는 넓다’며 포부를 크게 가지라며 지구본을 아이들에게 사주는 부모가 생각났다. 

 

 김중혁의 글 공장은 말 그대로 김중혁의 소설이 물건이 되는 것이다. 글감이라는 재료를 분류하고 숙성하여 소설, 수필, 그림 세 개의 생산 라인으로 이동한다고 설명한다. 좋은 글(물건)을 생산하기 위해 사용하는 노트와 연필을 그림으로 보여주는데 문구를 좋아하는 이라면 정말 탐이 날 정도였다. 이 산책기가 특이한 점은 각각의 공장에 대한 특징을 그림으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제품의 특징과 공장의 분위기를 포착한 그림은 사진 이상의 생생함을 전달한다.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공장 산책기다. 만약 내게도 공장 산책의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거울 공장, 커피 공장, 양말 공장에 가고 싶다. 장소에 따라 얼굴이나 체형이 다르게 보이는 거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하고, 커피향으로 둘러싼 공장에서 황홀한 기분으로 일하는 경험도 하고 싶다. 알록달록 예쁜 양말 공장에 가면 사시사철 차가운 발을 감싸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과거와 달리 공장이라는 이미지는 사람 대신 기계가 일하는 모습이 겹쳐진다. 하지만 김중혁의 산책기에서 알 수 있듯 공장에는 사람이 있었다. 기계를 작동하고 관리하는 건 사람이다. 똑같은 과정을 하루 종일 반복하고, 불량 제품을 찾아내고, 자신의 자리에서 정성을 다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니까 공장은 사람들을 위한 물건을 만드는 곳이며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신성하고 귀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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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도를 사랑한다 - 경주 걸어본다 2
강석경 지음, 김성호 그림 / 난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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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점 높아지는 가을 하늘은 투명한 도자기를 떠올린다. 가마 속 뜨거운 열기를 견디고 나온 맑은 도기 찻잔에 차를 마시면 가을을 마시는 느낌이 날 것 같다. 강석경의 『이 고도古都를 사랑한다』는 그런 차 맛이 난다. 커피향이 아닌 은은한 차향(茶香)을 닮았다.

 

 신라 천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지켜온 경주를 걷는다. 석굴암,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포석정, 안압지 밖에 모르는 내가 남산, 감포, 월성, 황룡사지, 교동을 알지도 못하는 지명을 따라 읊으며 걷는다. 경주는 그저 관광지에 불과했다. 그러니 강석경의 산책로는 신이한 경로였다.

 

 강석경이 들려주는 손금처럼 이어진 경주의 골목, 아름다운 곡선미를 뽐내는 고분들, 폐허가 되었지만 여전히 장엄한 신라의 일부로 남은 궁궐터가 전부다. 골목 담 위에 떨어진 감을 먹거나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갈아입는 능의 풀과 꽃들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오늘도 대릉원 담을 끼고 걸어오다 담 위로 솟은 능선을 보며 미소 지었다. 능에는 풀이 돋기 시작했고 초록 풀을 비집고 노란 들꽃이 깔려 있었다. 바람이 부니 까까머리에 돋아난 풀들이 파르르 물결쳤다. 어던 사심도 구속감도 없으며 순수 자체인 생명들이 우주의 자유를 합창하는 듯했다.’(42쪽)

 

 눈 닿는 곳마다 고분이 보이는 경주,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보물이 있을 것 같은 곳이다. 발길 닿은 곳마다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도시. 그러므로 경주는 거대한 박물관이다. 이를 아는 강석경은 경주가 품은 태곳적 이야기를 듣고자 노력한다. 걷기를 통해, 삶을 돌아보고 생의 근원을 갈망한다. 그러다 경주를 만든 사람들, 경주를 지킨 사람들, 경주를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 창작과 예술을 이야기한다. 그러니 이 책은 작가 강석경의 내밀한 일기이자 떨리는 고백이기도 하다.

 

 ‘내가 그릇을 좋아하는 이유는 비어 있기 때문이다. 차라도 담겨야 제구실을 하겠지만 나는 바라보는 것이 더 좋다. 무엇이든 담을 용의를 지니고 겸손하게 비어 있는 모양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다.’(99쪽)

 

 ‘도를 닦는다는 생각 없이 똑같이 반복하다보면 자기 반영이 먼저 된다. 창작 이전에 자기 실상을 볼 수가 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번뇌. 바느질중에 번뇌에 휘둘리기도 하지만 번뇌를 놓고 쉬고 몰입하다가 군더더기가 떨어져나간다. 일 분, 십 분, 백 분 장시간 인욕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단순하기 때문에 닦여진다. 그러니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근본 이치를 터득해야 한다.’(163쪽)

 

 그는 마치 경주를 손금처럼 품은 듯 걷고 또 걷는다. 향토사학자인 고 윤경열 선생 인터뷰를 계기로 경주에 홀려 경주에 정착한 이방인이 아닌 생활자의 산책이라 더욱 생생한 경주를 만날 수 있다. 같은 이유로 이방인인 독자는 조금 낯설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든 생활자가 아닌 방문객은 모두가 여행자가 아니던가. 그러니 경주 지도 한 장을 꺼내들고 하루 종일 천천히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길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강석경의 이 책을 통해 새로운 경주를 꿈꾸고 경주로 달려갈 채비를 끝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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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 주떼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2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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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까. 비밀이니 너만 알아야 된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어디서 들은 이야기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그렇다. 김혜나의 소설 <그랑 주떼>는 말하지 못했던 비밀 아닌 비밀에 관한 것이다. 내 잘못이 아닌데도 절대 말해서는 안 되는 상처를 꺼내 이제야 소독약을 바르는 그런 이야기다.

 

 주인공 예정은 동네 무용원의 발레 강사다. 전문적인 발레 수업이 아니라 자세 교정이나 체중 감량을 위해 수강한 수강생을 가르친다. 열다섯 늦은 나이에 예정이 발레를 시작한 건 친구 미국에서 온 전학생 리나 때문이다. 약간의 사시 때문에 왕따를 당하던 예정에게 리나가 친구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리나가 다니는 무용원에서 리나를 기다리다 발레 선생님에게 큰 발과 높은 발등 칭찬을 듣는다.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던 칭찬, 그것이 발레와의 첫 만남이었다. 하지만 예정은 발레를 하기에 좋은 신체 조건에 비해 춤을 추지 못했다. 연습을 하고 동작을 익혀도 춤은 늘지 않았다. 결국 발레리나가 아닌 발레 강사일 뿐이다.

 

 원장 대신 수업을 진행하고 학원을 청소한다. 얼핏 원하던 꿈을 이루지 못한 청춘의 절망에 대해 들려주는 듯하다. 그러나 유치원 아이들이 도착하면서 예정은 흔들린다. 작고 여린 아이들의 몸짓과 마주하면서 과거의 자신을 떠올린다. 여덟 살에 성폭행을 당하고 고모네 오빠까지 몸을 더듬었던 잔혹한 기억과 대면한다. 두려움과 공포에 울부짖는 예정에게 어른들은 윽박지르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다짐만 받을 뿐이다. 그런 예정에게 발레와 리나는 가장 큰 위로였다.

 

 ‘리나의 이야기가 내 안에 가득 차오를수록 나는 점점 가벼워지고, 나는 점점 사라져 갔다. 내 몸이 사라지고, 내 이야기가 사라지고, 내 삶이 사라지는 듯했다. 무겁기만 하던 나의 이야기가, 바닥으로 가라앉기만 했다. 나의 몸이, 공기와 같이, 산소와 같이, 무한히 가볍고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모두 다 사라져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 것만 같았다.’ (63~64쪽)

 

 하지만 리나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마음은 상처받을까 겁을 내고 손을 놓고 만다. 점점 커지는 가시를 숨긴 채 어른이 된 예정은 이제야 그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저 자신도 환한 아이였고 그 빛을 감추는 법을 알지 못한 연약한 아이였다는 걸 말이다.

 

‘아이들의 생김새는 모두 달랐다. 몸이나 얼굴뿐만 아니라, 머리, 어깨, 가슴, 겨드랑이, 배꼽, 허벅지, 종아리, 발가락…… 심지어 피부 색깔까지도 모두가 다 달랐다. 그러나 그 어던 아이도 밉거나 이상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다, 저마다의 빛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 빛을 감추거나 숨기는 법을 결코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 아이들 모두가 다 저마다의 빛으로 홀연히 빛났다. 아주 어렸던 그때의 나에게도, 이토록이나 아름다운 빛이 존재하고 있었을까? 흘러나오고 있었을까?’ (124~125쪽)

 

 무거운 소재인 성폭력과 왕따를 다뤘지만 상처와 슬픔을 무척 아름답고 섬세하게 다룬 소설이다. 가만히 다가와 슬픔을 매만지는 손길이 느껴진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비밀 상자를 매어놓은 끈을 풀어도 괜찮다고 위로한다. 상처가 다 아물 때까지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나만의 상처를 보여주고 이야기를 들려주게 만든다. 그리하여 높게 그랑 주떼를 뛰며 공중으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랑 주떼 - 공중으로 날아올라 두 다리를 일자로 벌리는 발레 동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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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여자는 위험하다 - 그리고 강하다
슈테판 볼만 지음, 김세나 옮김 / 이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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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언제나 내 생각에 충실히 따를 뿐이다. 나는 절대로 사람들이 원하는 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루 안드레아스살로메, 164쪽)

 

 생각과 다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는 건 정말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과 의지를 혼자만 간직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이유로 실천하는 삶을 존경하는지도 모른다. 슈테판 볼만의 <생각하는 여자는 위험하다>에 소개된 여성들의 삶도 그렇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다. 수많은 질타, 압박과 고통을 견디면서 말이다.

 

 과거, 많은 여자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살았다. 가까운 예로, 엄마나 할머니 세대는 남아 선호 사상으로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러니 여자는 여자답게, 남자는 남자답게 란 말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 전반의 주요 결정자는 남자가 많기에 <생각하는 여자는 위험하다>라는 반어적인 제목의 책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슈테판 볼만이 주목한 위험한 여자는 표지를 장식한 아웅 산 수 치를 시작으로 잘 알려진 마거릿 대처, 수전 손택, 레이철 카슨, 시몬 두 보부아르, 그리고 내게는 조금 낯선 앙겔라 메르켈, 루 안드레아스살로메, 에미 뇌터 등 모두 22명이다. 얼핏 여성 해방운동에 국한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인류를 의해 희생한, 불평등하고 부당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저항한 삶을 살아온 이들이다. 언제나 그렇듯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세상에 알렸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다거나 명예를 얻은 건 아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아웅 산 수 치는 15년 간 가택연금을 당했고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 본연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던 안나 폴릿콥스카야의 삶은 의문의 죽음으로 끝났다. 앙겔라 메르켈은 정치적으로 성공했지만 동독 출신 이혼녀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고 위대한 물리학자 리제 마리트너는 여자라는 이유로 연구소 정문을 이용하지 못했다.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더욱더 정진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 시작한 것에서 나도 온전히 싹을 틔운다. 『작은 것들의 신』을 시작할 때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 나는 한 번도 내가 처한 상황을 괴로워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적이 없다. 내 비밀은,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하면서 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아룬다티 로이,73쪽)

 

 22명 모두 열정적으로 소모하는 삶을 살았고 살고 있다. 여전히 주변인으로 아웃사이더로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과 응원을 건넨다. 더불어 우리 시대는 위험한 생각이 부족하다. 평화를 위한 위험한 생각, 개혁을 위한 위험한 발언, 공존을 위한 위험한 시도 말이다. 우리 스스로 위험한 생각을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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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들의 세계사 - 2014년 제47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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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라는 무대에서 민중은 주인공이 아니다. 주인공은 때로 전쟁이며, 쿠데타며, 학살이다. 그들의 역할이 분명한 단역이라는 걸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역사도 다르지 않다. 특히 1980년대가 그러하다. 그 시절은 누구에게나 잔혹한 이미지로 남는다. 과거가 되었지만 여전히 통증은 지속된다. 직접적으로 개입된 적 없는, 방관자 같았던 관객에게도 말이다. 이기호의 <차남들의 세계사>는 그 시절의 이야기다. 

 

 주인공 나복만은 고아원 출신으로 원주에서 택시기사로 일한다. 애인 김순희와 동거하며 결혼을 꿈꾸는 소박한 청년이다. 그런 그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경찰과 형사의 감시 대상이 된다. 과연 나복만은 그럴만한 사람인가? 택시 운전 중 사소한 사고를 내자 자진하여 경찰서에 신고를 하는 시민일 뿐이다. 교통과가 아닌 정보과를 찾은 게 잘못이었다. 나복만은 글을 몰랐다. 당시 원주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의 주범이 도피처로 선택한 곳이었다. 물론 그들은 원동 성당 최기식 신부의 권유로 모두 자수하였다. 이쯤에서 그 사건은 마무리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군사 정권을 향한 과잉된 충성이 나복만의 삶을 뒤흔들었다. 정보과 형사들은 나복만을 그 사건과 결부시켰다.

 

 그는 억울했다. 그러나 억울함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죄였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것은 분명 아는 죄와는 다른 것이었다. 하나의 걱정이, 모든 것의 걱정으로 변화되고, 하나의 두려움이, 수십 가지의 두려움으로 연결되어 버리는 마법.(60쪽)

 

 나복만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문에 이름이 실린 것도 몰랐다. 앞으로 자신에게 펼쳐질 일이 얼마나 심각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직장 동료에게 경찰서에서 조사받은 내용을 털어놓을 뿐이다. 경찰과 정보과 직원이 자신과 관련된 모든 걸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연락이 닿은 적 없는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왔으며, 자신이 원동 성당의 신부들의 지시를 받는다는 소설을 쓸 수도 있다는 몰랐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읽지 못하고, 아무것도 읽을 수도 없는 세계. 눈앞에 있는 것도 외면하고 다른 것을 말해 버리는 세계, 그것을 조장하는 세계(전문 용어로 ‘눈먼 상태’되시겠다.), 그것이 어쩌면 차남들의 세계라고 말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179쪽)

 

 1980년대 안기부에선 모든 게 가능했다. 협박과 회유로 시작하여 끝내는 고문으로 모든 걸 인정하게 만들었다. 진실을 알리려는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랬다. 우리의 나복만은 아주 쉬운 상대였다. 부모 형제 없는 고아였고 글을 모르니 없는 죄를 만들기에 적절했다. 안기부 직원이 써 준 글을 그대로 옮겨 써야 했다. 나복만은 모든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안기부 직원을 태우고 택시를 몰던 그가 전봇대를 들이받고 사라진 건 가장 잘한 일인지도 모른다. 평생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살아야 하는 운명을 선택한 것이다.

 

 다 포기하고 나니까 막 화가 났습니다. 제가 도로교통법 말고 또 뭐가 걸릴 게 있다고…….’ (302쪽)

 

 이기호는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유쾌한 톤으로 비통한 마음을 감춘 채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자, 이것을 다시 왼쪽으로 모로누운 채, 한번 들어 보아라. 자, 다들 인상 펴고 이것을 계속 들어 보아라. 자, 이것을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를 떠올려 보며 들어 보아라.’소설을 통해 그들의 심경을 대변하는 듯하다.

 

 원주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이 소설은 소설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누군가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알려준다. 절대로 그런 삶이 존재하는 세상은 없어야 한다는 단호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소설이다. 그 시절 얼마나 많은 나복만이 존재했을까. 어떻게 삶은 견디며 살아왔을까. 가슴이 답답해진다. 혹시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나복만이 존재하면 어쩌나 정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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