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이야기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0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빛나지 않아도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빛을 간직하고 있기에 아름답다. 언제든 빛을 뿜어낼 준비가 돼있다고 할까. 빛을 발산하지 않아도 빛을 알아봐 주고 발견하는 이가 있으면 충분하다. 설령 그런 존재가 없더라도 내 안에 빛이 있다고 믿으면 괜찮다. 빛은 용기가 되기도 하고 사랑이 되기도 하고 비밀이 되기도 한다.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집 『마지막 이야기들』 은 그런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윌리엄 트레버가 마지막으로 남긴 이야기들, 10편의 짧은 소설은 그래서 아름답다. 윌리엄 트레버가 주목하는 것은 평범하면서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간직한 삶이다. 당연한 것 같지만 절대 당연할 수 없는 것들, 그것을 묘사하다. 그러니 뻔하고 지루한 일상은 어디에도 없다.


뭔가 수상하고 비밀스러운 일이 일어날 것처럼 시작하지만 그저 평범한 일상일 뿐이다. 마치 당신의 삶도 그렇지 않냐고 묻는 것처럼. 누구나 자신만의 비밀은 있기 마련이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은 너무도 많으니까. 그리하여 윌리엄 트레버는 독자에게 궁금증과 여운을 남기고 그들의 삶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것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우리네 삶이라고.


아버지가 남겨주신 집에서 피아노 레슨을 하는 여자와 천재적 소질을 지닌 소년 제자와의 이야기 「피아노 선생님의 제자」에서 제자가 다녀갈 때면 집 안의 물건이 하나씩 사라진다. 그러나 여자는 소년을 추궁하지 않는다. 그녀는 다음을 기약했던 것일까. 다리가 불편한 장애를 지닌 남자와 그를 돌보는 여자가 사는 「장애인」에서도 비슷하다. 페인트칠을 하러 온 형제의 눈에 비치는 둘은 뭔가 수상하다. 장애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그의 죽음을 눈치채지만 여자도 형제도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윌리엄 트레버는 그들만의 사정이 있음을, 우리도 그렇지 않냐고 가만히 말을 건넬 뿐이다.





윌리엄 트레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그래, 그렇지, 그럴 수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변화무쌍한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남자의 법적인 아내 ‘애니타’ 와 동거 중인 ‘클레어’가 친구였다는 소위 막장 드라마 같은 「다리아 카페에서」도 누군가의 삶이지 않는가. 남자가 죽고 남겨진 저택을 팔아야 한다면 이런저런 사정을 ‘애니타’에게 털어놓는 ‘클레어’. 계절이 바뀌고 한때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그 집을 서성이던 ‘애니타’는 집 안으로 들어간다. 친구의 존재를 찾을 수 없는 공간은 쓸쓸함이 가득하다. 남편은 죽고, 친구는 사라졌고 그녀는 다리아 카페에서 자신의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고 원고를 읽는다.


집을 판다는 표지판은 치워졌다. 다른 사람들이 그 집에서 산다. 클레어가 쓸쓸한 고독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것, 그걸 애니타는 지금 뒤늦게 쓸쓸한 고독 속에 받아들인다. 사랑이 오기 전, 우정이 더 나은 것이었을 때 있었던 모든 것을. ( 「다리아 카페에서」, 64쪽)


우리가 생에서 애써 감추려 했던 것은 정말 그럴만한 것일까. 묻지 않았던 말들이 바람 따라 날아가지 않고 가슴속에 쌓아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감추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은 옳은 것일까. 자신의 집 청소부였던 젊은 여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과 연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젊은 여자의 삶을 궁금해하는 「모르는 여자」 속 화자 역시 말을 쌓아둔다. 왜 젊은 여자가 자살을 선택했지는 끝내 알 수 없다. 「여자들」에서도 그런 비밀이 등장한다. 엄마가 죽은 걸로 아는 딸은 아빠의 극진한 돌봄으로 성장해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간다. 학교 주위를 맴돌며 우연하게 딸과 만나는 중년의 여자들. 이처럼 쉽게 이해를 구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언제든 등장한다. 그래서 비밀이 존재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뻔하면서도 뻔하지 않은 게 우리네 삶이라는 걸 안다. 그런 이유로 삶은 살만하다. 『마지막 이야기들』에서 가장 긴 여운을 남긴 건 「겨울의 목가」다. 어느 시골 농장의 딸 ‘메리 벨라’와 가정교사 ‘앤서니’의 첫사랑을 다룬 뻔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어린 소녀의 첫사랑은 미완으로 끝나고 가정교사는 지도 제작가가 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린다. 시간이 지나 둘은 그 목장에서 재회한다. 일꾼들과 농장을 운영하는 메리 벨라와 앤서니는 과거의 감정을 확인한다. 아내와 아이를 버리고 메리 벨라를 택한 앤서니, 둘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의 불행을 딛고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잠깐이라고 행복을 누리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복잡하고 미묘한 여러 마음의 하나라고 하면 맞을까. 앤서니는 아내를 떠났듯 메리 벨라를 떠나 집으로 돌아간다. 메리 벨라는 예전과 다르지 않게 농장의 하루를 시작할 뿐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을, 느끼는 것을 느끼고 간직하며 살아갈 뿐이다.


일꾼들이 의자를 뒤로 밀치고 일어선다. 붉은 타일이 깔린 바닥에서 그들의 장홧발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메리 벨라는 불안감을, 그리고 어쩌면 연민을 감지한다. 그녀는 그것들을 웃어넘기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변함없는 사랑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그에게는 그 사랑이 그녀의 그림자들 사이에 존재하고 그녀에게는 그와 함께했던 방들과 장소에 있음을 일꾼들이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 사랑이 시들지 않을 것임을, 길고 긴 느린 죽음이나 평범해진 사랑은 없을 것임을 일꾼들이 알 수 있기를 바란다. (「겨울의 목가」, 206쪽)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설명한다고 한들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삶에는 이해를 구할 필요가 없는, 이해받지 않아도 될 사정이 있다는 걸 살아갈수록 깨닫는다. 거장인 윌리엄 트레버는 이미 알고 있었고 소설로 들려준다. 그가 획득한 삶의 지혜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 아름답고도 신비로운 삶의 이야기들을 말이다.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4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페 2023-07-17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엄지 척👍👍❤️❤️
이 책의 울림과 여운이 너무 강해 아직 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데 너무 잘 정리해 주셨어요.
저와 자목련님과의 느낌이 꼭 같아요^^

자목련 2023-07-18 09:02   좋아요 1 | URL
❤️❤️❤️❤️
읽지 못한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을 더 읽고 싶다 생각했어요.
여전히 비가 많이 옵니다.
건강하고 안전한 하루 보내세요^^

은오 2023-07-17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윌리엄 트레버는 징짜너무 좋다는 말씀들만 계속 들리네요. 알라딘 소설덕후분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윌리엄트레버 저도 얼른 도전하겠습니다!! 얼마나 좋을지 궁금....😆

잠자냥 2023-07-17 12:19   좋아요 1 | URL
안 자니...?

은오 2023-07-17 12:25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이 제피로회복제라 잠따위 안자도 쌩쌩합니다

잠자냥 2023-07-17 12:27   좋아요 2 | URL
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갑자기 전 급피곤해지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윌리엄트레버 2번째 마니아입니다....(첫 번째였는데 내려갔네요?! 새파랑님이 올라오셨나! ㅎ)
암튼 은오님에게도 트레버 한 사발 권합니다~

은오 2023-07-17 13:06   좋아요 2 | URL
왜 급피곤해지신건지 전 도무지모르겟지만... 잠자냥님.... 왜 또 저 상상하게만드시죠? 그러니까 잠자냥님이 두번째 마니아인 작가의 책을 저한테 한사발이나 권하신다는건 거의 결혼신청 아닌가요?! 내가 이 작가를 좋아하니까 나랑 결혼할 너도 이 작가의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그런거잖아요?....헐... 😳

잠자냥 2023-07-17 13:14   좋아요 1 | URL
나원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밥 먹다가 실소와 함께 밥알이....ㅋㅋ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3-07-18 09:03   좋아요 1 | URL
은오 님이 만난 윌리엄 트레버는 어떤 느낌일까요?
방학 끝나기 전에 만나시면 리뷰 기다려볼까요?

은오 2023-07-18 10:50   좋아요 0 | URL
자목련님!! 일단 기다리진마시고 왜냐면 읽을책이 너무많아서 무작정 소중한 자목련님을 기다리시게할순없기때문입니다.. 잊고계실때쯤 리뷰가 올라올지도....?! 🤭😍

자목련 2023-07-19 08:37   좋아요 1 | URL
은오 님이 만나는 다른 책들의 리뷰 즐겁게 기다려요!
그래도 방학에 많이 누워있기도 하세요💕

은오 2023-07-19 08:55   좋아요 0 | URL
💕💕💕💕💕

새파랑 2023-07-19 0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겨울의 목가>가 가장 좋았는데 자목련님도 그러셨다니 반갑네요~!!
아직 읽지 않은 트레버의 작품이 있으시다니 부럽습니다 ㅜㅜ 다른 작품들도 번역되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자목련 2023-07-19 08:39   좋아요 2 | URL
각가의 매력이 넘쳤던 소설집이었어요.
읽지 않은 트레버의 작품이 있다는 게 좋습니다. ㅎ
시원한 하루 이어가세요^^

그레이스 2023-07-26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싶네요^^

자목련 2023-07-26 11:07   좋아요 0 | URL
그레이스 님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