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책 말들의 흐름 4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계절은 겨울에서 봄으로 이동했다. 누군가 다시 운동을 시작하고 누군가 조금 더 길고 먼 산책을 시작할 것이다. 정점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코로나 시국에 가끔씩 펼쳐보던 한정원의 『시와 산책』은 마음의 산책으로 충분한 책이었다. 분면 봄인데 겨울의 시간을 보내는 요즘, 위로로 다가오는 문장이 많았다. 말 그대로 제목에 충실한, 저자가 산책하며 마주하고 생각한 시들이 있는 책이다. 내게는 모두 낯선 시였고 이름만 겨우 아는 시인이 있었다. 아무렴 그건 상관없었다. 그저 나는 한정원의 글을 따라 읽고 분위기에 취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득하고도 아득한 어느 시절의 거리를 헤매는 듯했고 반가운 골목과 공원을 만나는 듯했다. 그러니 이 책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기는 조금 어려울 듯하다. 그냥 나는 이런 문장이 좋아서 그곳에 오래 머물렀을 뿐이다.


방금 지나온 계절이 겨울이라서 그럴까. 나는 한 번도 겨울의 마음으로 겨울을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어느 계절이든 그 계절을 살기보다는 다음 계절이나 다른 계절을 꿈꾸며 살아온 것이다. 이 겨울이 어떻게 지나갔고 어떻게 지냈는지는 그 계절에는 알지 못하고 지나온 후에야 조금 그 계절의 상처와 아픔을 돌아보았다. 그건 저자의 말처럼 고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삶에 대해서도 그렇다. 말로는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나는 지금 너무도 아프다고 몸부림을 쳤지만 그 안에서 고요하게 그것과 대면하지는 못한 것이다.


겨울을 겨울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듯해도, 돌이켜보면 그런 시선을 갖지 못한 적이 더 많다. 봄의 마음으로 겨울을 보면, 겨울은 춥고 비참하고 공허하며 어서 사라져야 할 계절이다. 그러나 조급해한들,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한동안 떠날 것이다. 고통이 그런 것처럼.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고통 위에도 계절이 지나간다. 계절마다 다른 모자를 쓰고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는 어쩌면 바뀌는 모자를 알아채주는 정도의 일만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19~20쪽)


걷는 일은 그런 마음을 알아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걷는 일은 자동차나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때로는 원하는 방향으로 때로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향할 수 있다. 아무 곳에서나 멈출 수 있기에 주변을 둘러볼 수 있다. 저자가 고양이를 만나고 밥을 주기 위해 멈추는 것처럼. 매일 보는 풍경도 천천히 걸으면 다르게 보인다. 같은 자리에 있는 사물이 여러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듯 속도는 그만큼 중요하다. 그렇다고 천천히 걷거나 삶의 여유를 가지라는 그런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보통의 순간들, 동네를 걷고 물가를 걷고 호수 가장자리를 걷는다. 우리가 그러한 것처럼. 다만 그가 고른 단어가 아름답고 신비롭다. 시인이라서 그런 걸까. 4월의 한가운데서 호수를 걷다가 호수를 향해 앉아 있는 노인의 등을 보면서 늙음에 대해 생각한다. 벚꽃이 찬연한 봄 속 노인의 모습은 어떤지 외롭게 다가온다.


빛을 흡수하거나 반사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색이라면, 무엇이든 마음에 들이고 보내며 일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도 색이 있을 테니까. 어느 물감도 따라잡지 못할 만큼 찬연한 색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쩌면 그는 이제 색이 바랬다고, 혹은 아예 색을 잃었다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늙음일 것이다. (67쪽)


늙음을 색으로 비유한 부분을 읽노라면 나는 지금 선명했던 어떤 색에서 점차 흐려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아니, 내게 색이 존재하기는 했을까 싶다가, 아니 여전히 나는 나란 색으로 여기 있다고 아무나 붙잡고 주장하고 싶다. 모든 게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봄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봄을 맞이한 게 감사하면서도 유독 이 봄은 슬프기만 하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봄이라는 게 아프다. 어디 하나 반가운 소식이 없으니 이 봄이 고통스러운 이는 나뿐이 아닐 것이다. 무작정 걷던 날이 내게도 있었다는 게 다행일까.


어쩌다 보니 시는 빠지고 산책으로만 다가온 책이다. 저자가 걷는 길을 나도 걷는다. 행간을 따라 무심하고 무감하게 걷는다. 골목에 트럭을 두고 과일을 파는 아저씨를 만나고 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에게 과일을 건네는 길을 걷는다. 발목을 접질러 깁스를 하고 걷지 못하던 순간에는 나도 따라 멈추고 산책을 하며 열매, 나무껍질, 돌멩이를 주우면 나도 같이 춥는다. 책을 읽는 일 역시 산책과 닮았다. 한장한장 읽어가면 나도 어디론가 조금씩 걷고 나가아고 있으니까. 내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만난다. 맑음이 아닌 흐린 날에 다정함을 건네는 이토록 아름다운 생각 앞에 도착한다.


나는 흐린 날을 다정히 맞는 편이다. 침침한 빛, 자욱한 사물들, 묵직하게 흩어지는 향. 흐린 날에는 모든 존재가 자신을 잠잠히 드러낸다. 내 안의 언어와 비언어조차 소란스럽지 않다. 그 세계가 몹시 안온하고 충만해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을 정도이다.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는 햇빛은 온기를 주는 동시에 대상을 퇴색시킨다. 지나친 빛 속에서는 노출과다 사진 속 피사체가 그러하듯, 내가 배경 속에 희석되거나 본디와 다른 모습이 되고 만다. 그러나 진심이나 맹세는 흐린 날에는 건네져야 할 것 같다. 햇빛은 사랑스럽지만 구름과 비는 믿음직스럽다. (136쪽)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리의화가 2022-03-11 11: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목도 내용도 넘넘 좋습니다^^ 산책은 몸 뿐 아니라 마음을 돌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날씨가 따뜻해져서 이제 걷기 더욱 좋은 계절이 왔네요. 더욱 열심히 걷고 생각하고 실천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2-03-15 12:01   좋아요 1 | URL
네, 책 속에 수록된 시도 참 좋습니다. 말씀처럼 산책은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기에 참 좋다고 생각해요.
거리의화가 님, 산책의 즐거움을 만나는 봄이면 좋겠습니다.

얄라알라 2022-03-13 22: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흐으. 아름다워요. 봄이지만, 아직 낮에 많이 걷지 않으니 봄이 온 것을 잘 못느끼던 차에 자목련님의 글 밤에 읽으니 갑자기 걷고 싶어졌습니다.

자목련 2022-03-15 11:59   좋아요 1 | URL
밤의 산책도 참 좋지요. 봄꽃이 가득한 거리를 걷는 일, 이렇게 쓰는 것만으로도 경쾌한 기분이 들어요.
봄, 환하게 이어가세요^^

서니데이 2022-04-09 0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새파랑 2022-04-09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 좋은 책으로 당선 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

자목련 2022-04-12 08:57   좋아요 0 | URL
이 좋은 책이 더 좋아졌습니다!

thkang1001 2022-04-09 1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2-04-12 08:57   좋아요 0 | URL
감사드리며, 평온한 4월 이어가세요^^

thkang1001 2022-04-12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고마우신 말씀! 감사합니다! 자목련님께서도 행복한 4월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