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스무 번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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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때때로 하나만 말해주고 전부를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 하나가 아주 중요한 힌트였다고 여기면서. 하지만 상대는 그것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 그 이상으로 확장될 때 비로소 어떤 형체를 상상할 수 있을 정도다. 편혜영의 단편집 『어쩌면 스무 번』을 읽으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소설을 읽는 일과 마음을 읽는 일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편혜영의 소설에는 확연하게 실체를 공개한 적이 없는 듯하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말이다. 소설 전반의 분위기는 언제나 불안과 공포가 가득하다.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 무엇에서 시작되었는지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독자가 모두 아는 알고 있다는 전제로 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두려움과 공포는 우리 일상 곳곳에 포진되어 있으니까.



편혜영은 슬그머니 그것을 던질 뿐이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8편의 단편은 하나같이 불운하고 불행하다. 막연하게도 어떤 희망이나 행운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저 살아간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편혜영은 몇 개의 조각만 보여준다. 그 조각으로 퍼즐 전체를 상상하는 일, 인물의 과거나 상처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라고 할까.



표제작 「어쩌면 스무 번」에서는 한적하고 고요한 시골의 전원주택에 대한 평화로운 상상을 깨부순다. 치매에 걸린 장인을 돌보기 위한 마지막 선택지라는 사실이 서글프다. 수면제를 먹고 장인이 잠든 그 시간만이 화자인 ‘나’와 아내에게 휴식의 순간이라는걸. 부부에게 찾아온 방문객으로 인해 인지하는 현실적 문제. 한 폭의 그림처럼 여겨지는 전원주택은 안전한 곳도 독립된 곳도 아니었다. 그나마 화자에게는 모두를 피해 옥수수밭에서 숨어 혼자 바라보는 달이 유일한 위안이다.



이랑에 앉아 옥수숫대 사이로 서서히 해가 지는 걸 지켜봤다. 붉은빛을 띠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건 무시무시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조금 더 기다리면 하늘에 희미하게 달이 떠올랐다. 운 좋게 둥근 달을 보는 날이면 옥수수밭에 숨어서 이렇게 꽉 찬 보름달을 얼마나 더 보게 될까 싶어졌다. 어쩌면 스무 번. 기껏해야 그 정도라고 생각하면 눈가가 시큰해졌다. (「어쩌면 스무 번」, 27~28쪽)


막다른 골목으로 내쫓기는 기분, 한 번쯤 경험했을 것이다. 편혜영의 소설 속 인물은 모두 그러하다. 바닥을 쳐야 일어설 수 있다는 그런 회복력이 아니라 끝도 없이 마주하는 막다른 골목. 「호텔 창문」속 ‘운오’는 사촌 형의 죽음으로 인해 살아남았다는 기억만으로도 살아가는 일이 힘겹다. 자신의 잘못이라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죄책감으로 평생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그 기억의 늪에서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그런 부채감은 어디에나 있다. 「플리즈 콜 미」의 ‘미조’는 딸을 유학 보내고 모든 게 잘 될 거라 여겼다. 하지만 퇴직 후 무리하게 벌인 사업이 망하고 치매에 걸린 남편이 실종되고 공부 대신 결혼을 선택한 딸은 아르바이트를 한다. 남편의 실종 후 미조는 술에 의지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딸과 사위가 있는 미국에 다니러 와서도 그들 몰래 술을 마신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미조는 알 수가 없다. 남편의 마지막 행선지에 대해 경찰과 딸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한 이유도 잘 모르겠다. 그건 딸도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미조에겐 비밀이 돼버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저 잘 살고 싶었고 잘 살기 위해 약간의 비밀과 가면이 필요했다. 가장 가까운 사이라는 가족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용실을 하며 홀로 아들을 키우는 「좋은 날이 되었네」 속 모자도 그랬다. 아들은 아들대로 어머니를 생각하고 어머니도 자신의 방식으로 아들을 대했다. 누구에게도 어머니는 양육에 대해 관심과 조언을 얻지 못한 채 아들을 키웠다. 사실은 서로에게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알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판단했다. 아들은 어머니의 건물만 믿고 대출을 하고 투자를 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많은 걸 묻지 않았고 자신의 형평에 대해서도 전하지 않았다. 자꾸만 늘어나는 아들의 빚처럼 어머니에게도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 아들이 모르는 사이 건물은 남에게 넘어갔고 아이를 봐주는 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심지어 그 아이를 학대하고 아이의 아버지에게 가위를 휘두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생각해 보면 어머니와 나는 서로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지만 언제나 사이가 괜찮았다.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것으로 충분했다. (「좋은 날이 되었네」, 190쪽)


산다는 건 모르는 것들을 조금씩 알아가는 일이다. 안다고 해서 그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질병이나 죽음은 곁을 내주며 살아가고 어느 방향에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불운과 불행을 막을 방패는 항상 한발 늦게 준비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를 준비하고 대비하는 보험을 파는 아줌마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다룬 「미래의 끝」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완벽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도 발견하게 된다. 여전히 비밀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편혜영의 소설은 불편한 비밀을 하나 더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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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1-05 16: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노트북으로 자목련님 서재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네요
저 고양이는 항상 저 자리에 있나봐요
너무 예쁩니다.
당선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1-11-09 09:42   좋아요 0 | URL
네, 얼마 전부터 고양이가 저 자리를 지켜요^^

새파랑 2021-11-05 17: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자목련님~! 책과 표지가 자목련님하고 잘 어울리는거 같아요^^

자목련 2021-11-09 09:41   좋아요 0 | URL
새파랑 님, 감사드리며 저도 축하드려요.
저와 잘 어울린다는 말씀에 이 소설집이 더 좋아질 것 같습니다.
포근하고 다정한 하루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1-11-05 18: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자목련 2021-11-09 09:40   좋아요 1 | URL
^^*

초딩 2021-11-07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

자목련 2021-11-09 09:40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