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호수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정용준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헤어진 연인이 우연하게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반대로 작정하고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우선은 만나야 할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무엇 때문에 굳이 헤어진 연인을 만나고 싶은지 말이다. 주고받아야 할 무언가가 있을 때 가능할까. 아니, 그것도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다. 산뜻하고 좋은 이별은 없다. 그러니 아름다운 이별은 더더욱 없다. 버리고 싶은 감정을 정리하기 위한 만남은 가능할까.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말라비틀어진 감정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으지도 모른다. 정용준의 짧은 소설 『세계의 호수』속 무주와 윤기처럼 7년이란 시간이라면 가능할까.

 

소설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헤어진 연인이 7년 만에 만나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이야기다. 아니다, 나의 마음도 모르는데 상대의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건 오만이다. 소설처럼 둘 사이의 흔적이 가득한 공간이 아닌 먼 타국에서의 만남이라면 그런 감정에 연연하지 않을까.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드는 윤기는 빈에 왔다. 빈의 대학 한국학과에서 자신의 시나리오를 번역해 연극을 하는 행사에 초정을 받은 것이다. 그곳은 7년 전 떠난 무주가 사는 스위스의 장크트갈렌과 가까운 곳이었다. 빈에 왔으니까 무주가 산다는 곳이 생각났고 그래서 메일을 보냈다. 연락하지 말라는 무주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윤기는 무주가 자신을 떠났다고 확신했다. 권태기 정도로 여겼던 연애 4년, 이별은 예정된 게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니 무주에게 묻고 싶었다. 왜 나를 떠났냐고, 우리가 헤어진 이유가 무엇이냐고. 만날 사람이 있다며 떠난 스위스에서 그 사람과 결혼해 딸 하나를 낳고 살고 있는 무주는 7년 전의 그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았다. 어색하면서도 반가운 느낌, 그 묘한 감정이 어떤 형태의 것일지 설명할 수 없지만 조금 알 것 같다. 아직 삭제하지 못하고 휴대전화에 남겨진 전화번호의 주인공을 만나는 상상을 하니 그랬다.

 

무주는 장크트갈렌의 삶에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단조로우면서도 평온한 일상을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윤기가 뭔가 더 깊게 알려고 하면 틈을 주지 않았다. 단단한 알맹이는 보여주지 않으려 계속해서 껍질만 벗기고 있다고 할까.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무주와 윤기는 서로에서 속했던 시간에 대해 추억하는 동시에 그것이 과거일 뿐이라는 걸 인정했다. 과거를 살아가는 건 윤기뿐이었다. 무주는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을 선택한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무주는 헤아리기 어려운 마음을 갖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고 속이 비치지 않는 바다와 같다. 무주는 마음을 말하지 않고 묘사도 하지 않았다. 간혹 무슨 말을 하더라도 눈동자와 표정에서는 어차피 전해지지 않을 거라는 어두운 전망이 보였다. 말해보라고, 설명해보라고 채근하면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그저 나를 안아줬다. 걱정 마, 괜찮아, 이런 말만 했다. (101~102쪽)

 

한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 소설은 이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온몸을 다해 마음을 전해도 상대에게 닿지 못한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울까. 7년 전 무주가 윤기에게 받은 상처가 그러했지만 윤기는 정작 알지 못했다. 상대와 나 사이의 감정이 완벽하게 전달될 수 있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빈에서 번역을 도와주던 민영이 장크트갈렌의 ‘세 개의 호수’를 추천했을 때 윤기가 ‘세계의 호수’로 들은 것처럼 그 차이는 엄청나다.

 

난 너와 다시 연락하고 싶어 친구처럼 지내고 싶고. 또 난 너와 다시는 연락하고 싶지 않아 친구처럼도 지내고 싶지 않고. 어떻게 하면 너와 연락하고 친구로 지내기 위해 연락하고 싶지 않은 이유와 친구로 지내고 싶지 않은 이유를 없앨 수 있을까? (135쪽)

 

우리의 감정은 수시로 변한다. 단단했다고 믿었던 사랑은 한순간 물컹해지고 괜찮다고 여겼던 마음은 괜찮지 않다. 소설 속 윤기가 하는 말놀이처럼 말이다. 어떤 이유로 헤어졌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이들이 생각나는 시간이었다. 내가 그러하듯 그들도 나를 잊었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 한 쪽이 아린다. 이별의 유효기간이라는 게 있을까. 나만의 유효기간을 정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어진다.

 

이별은 같은 세계의 양끝을 향해 걸어가는 거라면 작별은 각각 다른 세계로 걸어가는 느낌이 들어요.(…) 그러니까 헤어진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이 없는 세계에서 작은 책상에 앉아 혼자만 펼칠 수 있는 책 한 권을 갖는 일이다. (작가노트 중에서)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19-10-16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니 방금 동시에 좋아요 누른 거 실화입니까...정용준 소설 괜찮던데 이거도 궁금해집다. 상세한 감상평 감사합니다.

자목련 2019-10-17 11:43   좋아요 1 | URL
같은 시각에 한 공간에 머물렀다는 신기함. 정용준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그의 소설도 그러하고요. 별점은 별개고요. ㅎ

수이 2019-10-16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용준 작가 소설 좋아하는데 읽다보면 좀 많이 평상시보다 가라앉게 되어서 기분 좋은 날에는 좀 피하게 되는 거 같아요. 새로운 신간이 나왔네요. 작가노트 문장들 좋아요. 그리고 이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음에 대한 이야기_라고 말씀하신 문장도 좋구요. 종종 과거 연인들이 궁금해질 때도 있는데 다시 만날 기회로 만나게 된다면 정말 어색할 거 같아요. 이별이라는 게 온전하게 둘이 합의해서 된다고 해도 어느 한쪽이 상대방의 마음을 무참히 짓밟게 되는 과정을 피할 수는 없으니까요.

자목련 2019-10-17 11:45   좋아요 0 | URL
수연 님이 받은 그 기운을 저도 알 것 같아요. 최근 단편은 초기작보다는 그 가라앉고 어두운 분위기가 좀 덜한 것 같아요. 그래서 때로는 일부러 찾기도 하고 미루기도 하는. 네, 작가노트의 짧은 글이 더 좋았어요.
저도 소설을 읽으면서 누군가 떠올리게되더라고요. ㅎ

다락방 2019-10-16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으니 이 책을 몹시 읽고 싶어지네요. 저도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자목련 2019-10-17 11:45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의 리뷰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이렇게 댓글로 만나 더 반갑고요.

책읽는나무 2019-10-16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날 확률이라??
첫 문장에 흠칫!!...멈춰서 곰곰 생각해 보게 만들었어요.
그렇네요?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드라마에선 정말 80%가까운 확률이지 싶던데...현실에선?^^
아..그러고보니 제 친구 하나가 자목련님이 말씀하신 작정하고 만난 경우에 속하긴 합니다.헤어진 둘은 각자 가정을 꾸렸고 그러다 내 친구가 이사를 했는데 헤어진 옛 남친이 같은 아파트 그것도 같은 동에 살고 있었더랍니다.아파트 입구에서 우연히 만나 어색하게 얘기를 나누다 알게 되었고...작정하고 만나 점심을 먹으면서 각자 살아온 얘기를 나누었고,서로 잘살자고 행복을 빌어줬노란 얘기를 들으면서 아~~저런 이야기를 서로 기분좋게 나눌 수 있는 상황이란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좀처럼 상상되지 않더라구요.
그냥 영화나 소설 읽는 듯한 기분이랄까요??^^
느낌은 쉽게 상상되진 않지만,어떤 이미지 같은 풍경이 곧 떠올랐었는데 그것은 오랫동안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긴 합니다.
오랜만에 긴 댓글을 주절주절 달고 갑니다^^

자목련 2019-10-17 11:48   좋아요 0 | URL
소설이나 드라마의 일이라고 여겼던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더라고요. 동창회를 통해서 만나기도 하고 정말 우연처럼 마주하는 경우도 있고요. 친구 분의 경우처럼 불편한 사이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서로의 행복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한 권의 소설로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