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이행 (양장) - 러시아혁명의 현재성과 21세기 이행기의 새로운 혁명 전략
제8회 맑스코뮤날레 엮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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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무엇보다 존경하는 선생님들의 의견에 감사드립니다.

건의드렸던 (연속)이행하는 2 track 전략론 중 일단( 최소한 결정적 반증 연구들이 (충분히) 축적되지 않는 이상)은 MF track을 유보하는 것으로 정리하겠습니다. 

[   이러한 제1전제 하에, 이하는 반론의 맥락은 전혀 아니고 진심을 다한 경청을 약속드리는 전제 하에 사태의 다른 측면들에 대한 일말의 재검토도 부탁드려본다는 의미 정도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그런데 이렇게 되면 결국 이런 (평면적) 적록보라란 그 본질이 확장된 SF(, 즉 이원/이중체계론이었던 SF가 확장된 삼원/삼중체계론으)로, 번역하면 적록보라=생태적 SF 또는 생태사회주의 feminism이 되어 이를 보강할 접합과 교차/중첩 원리에 대한 집중연구가 후속되지 못하면 결국 다원주의 신사회운동(론)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어서 약간의 우려는 남습니다.

설령 이 접합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도 기존의 가장 유력한 접합 paradigm은 급진민주주의로 보이는데 여기서는 계급체계, 성체계, (인)종체계가 구별되지 않고 모두 (피억압)소수자/종으로 통합식별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다원주의적 신사회운동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 더이상 이것을 Marx주의라고 부를 수는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는 Feminism 진영과의 연대를 얻는 대신 IS(T) 등 전통적 좌파 진영과의 연대를 잃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IST 계열은 현재 이미 영국 SWP 차원에서부터 ’Feminism’이라는 용어조차 사용하지 않고 대신 ’여성해방(론)’이라는 용어를 고수하며 교차성 이론은 물론 심지어 사회(적) 재생산론에도 다소 비판적인 등 매우 강경한 원형 MF를 견지하고 있어 향후 국내 IST group과 아무리 원활한 소통과 연대를 위해 노력해도 성과를 도출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 제기되는 몇가지 우려들과 향후 과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2.1. 半봉건/半자본주의론 및 Macro-(사회)구성체론과 (그 연장/변종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다중체계론

2.2. 역사변동의 경향

      ; 여타 (비자본주의) 체계의 (내부)식민화로서의 자본주의(적 통합)

        →전일적 자본주의 체계의 압도적 전면화와 여타 체계의 (완전) 통합/변성( 경향) 

        →말기 자본주의 (신)MF의 필요성




3. 환원주의 대 ’일반화와 접합’

3.1. Marx주의를 포함한 각 체계-저항이론들의 일반화(와 (meta-)접합) 과제

3.1.1. Marx주의의 쇄신-전화와 재구성으로서의 일반화, 역사적 Marx주의

3.1.2. Feminism의 일반화와 모두를 위한 (feminism(으로서의)) 여성없는 feminism


3.2. 비접합적 병치 대 접합

3.2.1. 상호 경청과 공감을 넘어선 접합

3.2.2. 환원주의를 넘어선 관계들의 섬세한 해명으로서의 접합





4.1. 우리가 놓치고 있는 Gender 장(場)에서의 계급투쟁 관점 : 운동사적 고찰


"자본주의"를  총체적 (사회)구성체로 보지 못하고 협애한 계급체계로만 국한시켜 이해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 결과 각 체계들의 문제를 극도로 악화시키는 공통 주적이 (갈수록 명백히) 그 근본 배후로서의 자본주의라는 사실을 자각 못하는 것도 큰 문제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반/탈자본주의 운동(/)론을 여성주의처럼 노동자(계급) 정체성 운동으로 단순화하는 것 또한 심각한 오류이며 노동자(계급) 혐오에 다름아닙니다. 전통적 사회주의자들 이래로 Marx주의자들과 반자본주의자들은 그간 정치/운동사에서 명멸해 온 그 수많은 계층들, 가장 고통받고 핍박받는 계층들과 자살폭탄 terrorist들을 포함한 가장 용감하고 전투적인 급진 분자들 그 모두를 주의 깊게 고찰하고 연구한 결과 정말 여러가지 이유들로 가장 빠르고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위해 노동자 계급을 자기 목숨을 바칠 주군이자 핵심주체로 의도적으로 선택해 왔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회-역사 전체와 그 끊임없는 변동, 그에 의한 계급 계층들의 구성변화와 변성 및 명멸, 그리고 새로운 주체들의 출현 등에 대한 치밀한 고찰과 연구는 항상적으로 지속되어야만 하겠지만, 어쨌든 이런 점에서 Marx주의자들이 정체성운동가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며, 그런 주장은 단지 어떤 심각한 몰이해와 인지으류를 투영할 뿐입니다. 



모든 feminism들은 그 자체(만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특히 현재의 feminism은 기울어진 운동장만을 바로잡(으려)는 反봉건-反가부장제적 민주주의 요구 단계를 뛰어 넘어 스스로 모든 적대와 증오의 근원을 해체하는 反자본주의적 탈근대 communism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제(반)민주주의와 communism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연대/연합전선을 중시하는 단계(적 성장전화)론과 (계급의) 독자세력화를 기반으로 일관된 급속이행을 추구하는 연속(R)론 계열로 대립해왔다고 할 수 있는데 강경한 원형MF가 연속R론이라면 건의드린 SF에서 MF로 연속이행하는 2 track 전략론은 현실을 고려한 성장전화론(ND) 또는 그보다 오히려 양자의 종합(PD)으로의 양보라 할 수 있는데 비해, 현재 (비접합적으로)  평면화된 병치/병렬적 적록보라론은 다원주의적 연대/연합전선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21세기 NL 민족주의 같은 이론적 구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일고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특히 연대/연합전선론들 간의) 미묘한 차이는 사실 (계급)당파성/주도권과 이에 의해 결정되는 R/이행의 속도라 할 수 있는데 이 ’계급권력/당파성 및 이행 즉 사회변화 속도’ 대 ’다원적 연대/연합’이라는 양극단의 가치판단체계에 따라 {NL-ND-PD-PTSR} pattern과 이것이 21세기 Feminism시대에 조응한 {평면화된 (다원주의적) 적록보라 - 성장전화하는 생태적 SF - (MF 주도(권) 하에) 연속이행하는 ESF - 자율주의 등의 (사회재생산론 계열) 신(E)MF - 강성 원형/고전 MF} 등의 pattern으로 Spectrum 분포를 나타내게 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흔한 오해와 달리 PD가 연속R론을 간직한 (양자) 종합의 계보라는 증거는 ND와 대비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데, ND는 계급주도권이 확고하지 않아 매우 불확실하고 불안정적인 그래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단계 R론으로, (최소한) 2개( 이상)의 R을 상정하고 있었던데 반해 PD계열엔 궁극적으로 단 하나의 R만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NL이 최대폭의 연대/연합전선론을 감행할 수 있었던 이유가  강력한 외부의 R기지를 상정했기 때문이라면, 그 계보의 평면적 적록보라 병치론은 NL보다 더 위험하고 불확실한 결과를 초래할 (전락의) 위험이 있어보이는 것은 여기에는 더이상 어떠한 외부기지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상은 운동사의 연장선 상에서 현재 국면과의 연관성을 밝히기 위해 조희연선생님 등의 사료에 대한 필자의 연구관점을 압축했음.]



4.2. 모든 feminism들을 동질화하면서 이상화를 통해 과도한 기대와 희망을 품게 되는 비판적 관점 상실의 문제



4.3. MF를 ’Antifeminism’과 등치시키면서 현재의 구체적 맥락과 국면에서의 그 긍정적 기능과 역할, 성과를 과소평가하는 문제



 




S. 

따라서 결론적으로는 이러한 갈등과 문제들을 해결한 4세대 feminism 발명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불변적 제1 공통과제로 재확인돼야 할 것이나,

그 이전까지는 이상과 같은 이론 구도에 입각해 (최근 결성된 영영페미 조직 연합체인 "범페미네트워크" 등까지를 포함하는 각종 feminism 단체, 조직들에( 대해)서) 좌파 feminism 진영 MF세력에 1순위를, SF세력에 2순위를(, 그리고 여력이 있다면 3세대 feminism세력에 3순위를) 두고 (배타적) empowering 지원, 연대 사업들을 전개해 나아감으로써 이들( 좌파 feminism)의 Hegemony 형성을 돕는 것이 체제이행을 위해서는 가장 현실적 구체적 정치(/)실천 방안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RF나 LF적 요소/분자들이 과도하게 지지되면 Feminism 진영 전체가 우경화되거나 혼란에 빠져 동요 등이 증폭되면서 지배세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역용되거나 과거 성폭력 사건을 악용한 조직적 진보단체 와해 공작 운동 등 사례에서 보여진 것처럼 상호협력은 커녕 좌파 진영(/)조직들과의 갈등과 분열 심화 위험도 더욱 커질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반자본주의 의식과 체제이행에의 의지가 전혀 없고 오히려 red complex와 혐오에 절어 있으며 체제 내에서의 문제해결을 추구하는 반동적 feminism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실지로 이들은 이렇게 진보/좌파 운동에 비판적이고 대부분 독자적 요구들에만 고착되어 있다는 점 등등에서 농민이나 식민지 민족주의자들과 매우 유사한 행동학의 지배를 받는 방정식으로 설명될 수 있음. 다중체계론이 (강경하게) 고수된다는 가정 하에 (이들까지와의) 완전한 연합을 이루기 위해선 21세기 내부식민주의시대에 조응하는 Marxist paradigm의 (도시(/)Network (해방자치구*) 근거지 기반) neo-Maoism적 대전환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전망됨.)

이들 LF, RF에 대하여는 (상호)교차성이론과 Nancy Fraser Solution을 중심으로 더욱 집중적으로 적극 선전설득함으로써 일단 다중체계론자들로 견인전화시키면서 통합해내야만 할 것입니다. (이 작업이 효과적으로 진행되면 실천적으로 판별선에 다소의 변동이 일어날 수 밖에 없으나 이에 대해서는 당분간 전략적 침묵이 불가피함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commune/soviet/autonomia/•••••)



X. 

희망적인 측면은 Nancy Fraser model이 적록보라나 심지어 급진민주주의와도 대체관계가 아닌 보완관계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Fraser의 의도와 달리) 경제투쟁-인정투쟁-정치적 대표는 각 진영과 연계된다기보다 한 주체/모든 주체가 해방을 위해 평생을 벌여나가야 할 전인적/전방위적 투쟁의 분야들을 지시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차라리 Bob Jessop과 강내희선생님의 ’문화정치경제학’적 통합 model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Marx주의(와 계급투쟁)를 경제 특히 분배 투쟁으로만 해석하는 Fraser의 이해에는 다소 문제가 있어보이며, 각 진영이 위에서 제기한 일반화 과제를 달성하고나면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될 전면화된 (/) 전방위 해방(/)투쟁(론)의 모습(일 뿐)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 참고자료 >


   현재 Marx주의 진영을 둘러싼 시급한 Feminism 쟁점들은 사회(적) 재생산론, (상호)교차성, 특권이론/배당이론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하는 이들에 대하여 성립 가능한 Marx주의적 관점들 중 하나의 범례/전형을 제시해주고 있어 우선 검토의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특히 이번 Communnale에서의 논의와 관련해 가장 빠르고 간편한 선행 논의 자료들로서 참조할 만하기에 이후 논구의 발전을 위해 여기에 옮겨 게재합니다. 




< 참고자료 1 >과 < 참고자료 2 >는 다중체계론으로서의 SF 및 ’(상호)교차성’ 이론의 한계와 불충분성을 지적하며 이에 맞서는 MF 진영의 단일체계론으로서의 ’사회(적) 재생산’(이)론에 대해 논의하는 글들로서,


< 참고자료 1 >은 작성자가 국내 IST 조직의 여성문제 담당 최고참자로 학술이론분야를 주로 전담하고 있고 다중체계론과 단일체계론의 대립관계를 선명하게 서술하고 있어 일독의 가치가 있으나, 다만 본 글은 최근 국역출간된 영국 SWP 소속 Judith Orr의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에서 사회재생산론을 신중하고 엄밀하게 다룬 257~265쪽의 기본 입장이 사전 검토를 토대로 훨씬 더 공격적으로 변주되어 있다는 한계를 가지고 (주로는) MF계열 내부 논쟁에 집중하고 있는데, 여타 Trotskyist (International) 계열들**도 공유하는 입장이라 속단할 수 없으며 더구나 Orr 자신도 상기 Text를 면밀히 독해하면 사회재생산론 자체에는 호의적이며 Engels를 비판한 "일부 사회재생산 이론가들"을 짧게, 그리고는 가사노동 유급화론자들만을 비판하고 있는 것과 비교됩니다.

( 특히 본 8차 대회와 긴밀히 연관된 ’SF 다중체계론 대 MF 단일체계론’ 쟁점보다는 유물론적 MF 단일체계론 계열 내부의 논쟁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사회(적) 재생산론을 비판하는 부분은 애석하게도 결정적으로, 전통의 고용노동 중심 ’착취’ 체계로 파악할 수 없는 가사노동, 돌봄노동 같은 전통적 여성노동 뿐 아니라 그 연장으로서의 외주노동, Platform노동, 청년노동 등등 최근 현대(/)말기자본주의의 광범위한 내부식민주의적 간접/비고용 노동 영역 ’수탈’ 체계 확산 등에 관한 최신 연구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어 Online channel과 독자 특성 상 집중시간( ; attention span) 등을 고려해 약간의 단순재배치 편집을 가했음.


MF계열 내부논쟁과 관련해서는 상기 분파들(=**) 이외에도 ICC, ICT 등 Left-com 계파 등등의 입장 표명이 요구되며, 그에 따른 꾸준한 추가조사도 필요함.)




< 참고자료 2 >는 (Canada의 IST 조직인 International Socialists 출신들로) ’90년대 중반 이후 현재는 Canada 급좌파 조직인 ‘the New Socialist’ Network (/) Group***의 주요 활동가이면서 Toronto 소재 York 대학 정치학과장을 역임한 교수로 세계 경제, 여성 억압, 변혁운동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많은 책과 글을 써 왔으며 한국에도 『글로벌 슬럼프』(그린비)가 번역 출간된 바 있는 David McNally, 그리고 노동력과 노동계급의 사회(적) 재생산이 공장의 작업장을 넘어서서 인종과 젠더의 교차 속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해 온 Susan Ferguson 두 분의 자본주의와 gender, 인종 억압 간 총체적 상호관계에 대한 MF적 통합 분석을 소개하면서 인종과 gender 문제를 통합하는 계급투쟁의 전략에 대한 고민을 던지는 Interview입니다.

(***the New Socialist Network (/) Group은 Canada에서 노동운동의 전통적 연대세력이었던 중도좌파 신민주당(NDP)의 신자유주의로의 경도, 신자유주의 공세의 강화와 대중투쟁의 고양 속에서, 광범한 좌파 결집 및 혁신과 재구성을 위한 시도로 활동가들에 의해 조직됐던 “반자본주의적 좌파건설을 위한 운동구조”(Structured Movement for Anti-capitalist Left) 회의의 후신으로 (추정되며) SMAL은 당시 새로운 급좌정당 건설에 대해서는 결론을 유보하나, 단순한 연합(coalition)을 뛰어넘은 운동구조(Structured Movement) 창출을 목표로 하였으며, 이후 New Socialist Project 등의 이름으로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고 있음. (이에 대해 국제적 대분류로는 IST 파생계열(split)로 보려는 논자도 존재.))


< 참고자료 3 >은 상기한 긴급논점의 하나일 뿐 아니라 (다중체계론 구도가 고수될 경우에는 더욱더 사활적인) "접합"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첫 출발점이 될 ’교차성’ 개념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는 영국 SWP 계열과 달리 그로부터 분리돼 나온 RS21(;Revolutionary Socialism in the 21st Century) group 소속 Shanice McBean이 분리 이전 SWP 시절 그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썼던 글입니다. (SWP와 국내 IST 측에는 분파문제와 연계되어 민감한 (con)text일 수 있음을 양지 부탁드립니다.)



**Trotskyist 계열 중 국제 조직들의 현황


1. Committee for a Workers' International (CWI)

2. Coordinating Committee for the Refoundation of the Fourth International (CRFI)

3. United Secretariat of the Fourth International (USFI)

4. Fourth International (ICR) = 일명 FI (La Verité) or FI (International Secretariat)

5. International Bolshevik Tendency

6. 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Fourth International (ICFI)

7. International Communist League (Fourth Internationalist) (ICL-FI)

   ←= the International Spartacist Tendency

8. International Marxist Tendency (IMT)

   ←= the Committee for a Marxist International

9. International Socialists (IST, ISM, ISO)

10. Internationalist Communist Union (ICU)

11. International Workers League – Fourth International (IWL-FI)

12. International Workers' Unity – Fourth International (IWU-FI)

13. League for the Fifth International (L5I)

14. League for the Fourth International (LFI) : split from (ICL-FI)

15. Revolutionary Communist International Tendency

16. Trotskyist Fraction – Fourth International (TF-FI)

17. Workers International to Rebuild the Fourth International (WIRFI)


이하는 공식적 국제 구조 없는 Trotsky주의 국제 연대 운영체들

18. Alliance for Workers' Liberty

19. Freedom Socialist Pa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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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1 >


" 사회재생산 이론과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 "



   작성자 : 정진희

   출    처 : https://wspaper.org/article/17000


최근 몇 년 새 서구의 일부 좌파들 사이에서 사회재생산 이론이 주목받고 있다. 사회재생산 이론이 단일하지는 않다. 마르크스주의뿐 아니라 비마르크스주의 전통의 다양한 이론가들이 있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리즈 보겔의 책이 2013년 재출간된 뒤 그의 사회재생산 이론이 부흥하고 있다.


사회재생산 개념은 사회과학에서 여러 의미로 사용된다. 가장 단순한 의미는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과 관련된 기관들이 재생산되는 것, 즉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자신을 유지하는지를 가리킨다. 페미니즘 이론에서는 자본주의에서 여성들이 가족 내에서 수행하는 노동력 재생산 노동(가사노동)과 자본 축적 사이의 관계를 가리키는 데 주로 사용된다.


보겔의 사회재생산 이론은 1970년대 가사노동 논쟁에서 많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제안한 ‘이중체계’론의 대안으로 제시됐다. 1983년 처음 출판됐다가 2013년 재출판된 보겔의 책 제목이 이런 의도를 잘 나타낸다. 그 제목은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차별 — 단일 이론을 향해》이다.


많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급진 페미니즘의 ‘가부장제’ 개념을 수용해 이중체계론을 제시했다. 여성 차별을 자본주의와 별개로 작동하는 ‘가부장제’의 산물로 설명하며, 상품 생산과 착취의 영역과 사사화(私事化)된 가족의 영역을 분리해 별도로 작동하는 것으로 취급했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생산과 재생산의 분리를 극복하고, 가족이 여성 차별에서 하는 구실을 자본주의 체제 전체 속에서 파악한다.


자본주의에서의 여성 차별을 유물론적이고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1970년대 이후 초역사적 가부장제 이론이 득세하고, 뒤이어 포스트모더니즘 ·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페미니즘에서는 한동안 유물론과 총체적 설명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문화주의적 서술과 파편적 경험을 나열하는 서술이 페미니즘을 지배했다.


그동안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차별과 관련된 제도로 가족에 주목해 왔지만, 주로 가족 내의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지, 가족제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는 구실을 다루는 논의는 흔치 않았다.


사회재생산 이론이 다시금 사사화된 노동력 재생산과 자본주의 체제의 관계를 핵심 쟁점으로 부각시킨 것은 반가운 일이다. 여성 차별을 단지 남성들의 태도나 관념 문제로 취급하지 않고 유물론적으로 이해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보겔의 사회재생산 이론

마르크스는 노동력을 “인간이 지닌 정신적 · 육체적 능력이 결합된 것으로 사용가치(어떤 형태든)를 만들어 낼 때 사용하는 능력”이라면서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이 아주 독특한 상품이라고 규정했다. 마르크스는 자본 축적이 지속되려면 생산조건의 구성요소로서 노동력이 재생산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이해했지만, 노동계급 가족이 하는 구실을 적절히 이론화하지는 못했다.


보겔은 계급사회에서의 노동력 재생산 방식에 관한 통찰에 바탕을 두고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 가족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방식을 이론화한다. 보겔은 계급사회에서의 여성 차별이 “세대 재생산 과정”에서 남녀가 “다른 지위”를 차지하는 데서 생겨난다고 봤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대체로 일어나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형태”로서 가족을 지목한다.


보겔은 계급사회에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세 과정이 있다고 본다. 첫째, 직접 생산자들이 에너지를 충전해 다시금 일터로 갈 수 있게 하는 각종 일상 활동들이 있다. 둘째, ‘종속계급’에서 노동하지 않는 구성원들(너무 어리거나 늙었거나 병들었거나 다른 이유로 노동인구에 포함되지 않은)을 유지하는 활동이 있다. 셋째, 종속계급 중 사망했거나 더는 일할 수 없게 된 구성원들을 대체하는 과정이 있다.


보겔은 “사회에서 성별의 지위가 다른 데는 물질적 요인이 있고 생물학은 그 일부”이지만, 어느 사회든 성차를 사회관계에서 떼어놓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즉, 여성이 아이를 낳고 젖을 먹여야 한다고 해서 여성이 꼭 차별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성별] 분업과 개인의 차이가 지닌 사회적 중요성은 그런 차이들이 뿌리내린 실제 사회의 맥락에 따라 구성된다.”


그래서 여성은 계급사회에서 노동을 해도 가정에서 맡은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성은 “직접생산자”가 될 수 있지만 “노동력 재생산에서 다른 책임을 맡는다는 것이 바로 계급사회 여성 차별의 뿌리”라고 지적한다.


보겔은 “개별 가족 가정 안에서 끊임없이 긴장이 조성되는 상황에서 여성 차별이 오직 남성에 의한 차별이고, 여성 차별이 역사를 초월해 존재하는 적대적인 성별 분업에서 비롯했고 가족에 체화된 것”처럼 보기 쉽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여성의] 가사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의 재생산에 필요한 것이고, (성별 분업이나 가족 자체가 아니라)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 차별과 불평등이 지속되는 물질적 기초”라고 명료하게 말한다.


이처럼 보겔의 사회재생산 이론은 가족을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자 만들고 유지하는 제도로 보는 음모론적 설명과는 다른 유물론적 설명이다. 가사노동을 남성이 아니라 자본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본다.


가족은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동력인가?

사회재생산 이론가들이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서 가족이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지적한 것은 옳다. 그들뿐 아니라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자본주의에서 여성 차별을 구조화하는 제도로서 가족에 주목해 왔고, 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서 가족의 경제적 · 이데올로기적 구실을 강조하며 여성 차별과 착취를 유기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크리스 하먼은 가족이 자본주의 사회관계를 재생산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경제적 구실을 한다고 말했다. 노동계급의 가족은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지배계급의 가족은 부를 물려준다는 것이다.


노동계급 가정에서 주로 여성이 수행하는 재생산노동(청소, 요리, 빨래, 양육, 간병 등)이 현재와 미래의 노동력을 재생산해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가족은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중요한 구실을 한다. 양육에는 단지 먹이고 입히는 것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규범을 새로운 세대에게 전수하는 사회화도 중요하게 포함된다. 가족이 험난한 세상의 안식처라는 이데올로기는 고용주들이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비용을 개인들에게 전가하는 구실을 하고, 구조적 불평등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해 보수적 가치관을 확산시키는 데도 유용하다.


그러나 가족이 이처럼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해서 자본주의 체제를 움직이는 핵심 동력인 것은 아니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가족이 자본 축적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임금노동 착취와 대등하거나 비슷한 수준으로 취급하는데, 이는 가족이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동학을 이루는 것처럼 오해하게 한다.




·····················[  중간부 후치 편집  ]·····················




여성해방의 전략

가족과 자본 축적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착취와 여성 차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며, 이것은 여성해방의 전략에 큰 함의가 있다. 페데리치처럼 가정주부가 잉여가치를 생산한다고 보면 가정주부가 자본주의 변혁의 핵심 주체가 된다. 페데리치는 몇 년 전 국역 출판된 저서의 서문에서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 운동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과장되게 서술했다.


“자본주의는 노동력 비용을 억제하기 위해 부불재생산노동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했다는 점에서, 또한 이 부불노동의 근원을 소진시키기 위한 성공적인 캠페인은 자본축적 과정에 파열구를 내고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공통적인 지형 위에서 자본과 국가에 맞선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안겨 주었다는 점에서,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운동은 우리에게 혁명적이었다.”


물론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력 재생산이 사사화되는 것은 대부분의 여성에게 큰 부담을 안겨 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불만은 여성들이 특정 시기에 차별 반대 운동에 참가하는 동기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재생산 사사화에 따른 부담과 차별에 자극받아, 가정주부들이 자본가나 국가에 맞서 집단적인 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이지는 못한다. 부유한 여성들은 노동계급 여성을 보모나 가정부로 고용해 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또 계급적 이해관계 때문에 재생산 부담을 사회가 책임지는 조처에 흔히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 특히, 노동력 재생산이 개별 가족 내에서 이뤄지는 방식은 가정주부의 고립을 낳아 무기력감에 빠지게 한다. 이는 착취가 노동자들을 한데 결집시켜 집단으로 고용주에 맞설 잠재력을 부여하는 것과 대조된다.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는 운동의 이론적 가정 하나는 여성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곳이 가정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생산은 대부분 가정 밖에서 이뤄지므로, 가정은 여성들이 가장 강력한 곳이 아니라 가장 약한 곳이다. 여성이 가사노동을 거부한다고 자본가들이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니고, 고립된 가정에만 머무는 여성은 무기력감을 느끼기 쉽다.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는 운동은 당시 여성운동에서도 호응이 적었다. 그 운동의 가정이 비현실적이었고 가사노동을 ‘여성의 일’로 여기는 고정관념을 강화할 위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운동은 자본주의 하에서 주로 여성이 개별 가정에서 맡아 온 고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전혀 제공하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착취 개념을 단순히 도덕적 의미로 이해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핵심적 사회관계를 이해하는 개념으로 사용했기에 착취의 이중성을 이해했다. 즉 착취는 단지 비참함만 뜻하는 게 아니라 그런 고통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페데리치는 착취를 단지 고통으로만 여긴다. 그는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가 “해방이 아니다”라며 동등한 노동 참여를 요구하는 여성운동을 비판했다.


한편, 보겔은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의 약점을 인식했지만, 효과적인 여성해방의 전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보겔은 여성 차별의 기원을 설명하지 않고(엥겔스를 이중체계론의 원조로 오해해 엥겔스를 크게 깎아내린다), 계급투쟁이 여성해방에서 어떤 구실을 하는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보겔이 옛 소련과 동유럽 같은 스탈린주의 체제를 ‘사회주의’로 본다는 점과 관련 있다. 스탈린주의 체제를 무계급 사회로 가정하니 이들 사회에서 여성 차별은 착취와 무관한 게 된다. 착취와 차별을 분리하는 이중체계론의 유산이 남아 있는 것이다.


보겔은 자본주의에서 여성이 처한 이중적 상황을 가사노동과 평등 침해로 보고, 여성이 계급을 뛰어넘어 단결할 수 있다고 여긴다. 노동계급 여성만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가사노동에 종사하지만, 민주적 권리 문제에서는 모든 여성이 차별을 겪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착취와 차별의 구실을 대등하게 여기며 계급투쟁의 결정적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는 경향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특징이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 사이에 계급적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지만, 착취가 여성해방 투쟁에서 어떤 잠재력을 제공하는지 간과한다. 보겔은 클라라 체트킨이 여성을 노동자로서만 강조해서 임금노동에 참여하지 않는 노동계급의 아내와 딸들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체트킨뿐 아니라 마르크스, 엥겔스, 룩셈부르크, 콜론타이, 레닌, 트로츠키 등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두 여성 노동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를 두고 마르크스주의 여성 해방론을 계급 환원론으로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많다.


그러나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저작을 찬찬히 읽어 보면 그들이 여성 차별을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경제적 착취로 환원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여성 노동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첫째, 자본주의에서 근본적 분단선은 성이 아니라 계급이고, 둘째, 여성이 노동자가 되면 단지 자본주의 체제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는 핵심 주체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보겔은 자본주의 내 법적 평등은 한계가 있으므로 사회주의가 필요하다고 보지만, 범계급적 여성운동을 창출하는 전략을 제시한다. 그는 광범한 여성운동이 사회주의 운동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모든 계급의 여성이 불평등과 천대를 겪는다고 해서 여성들의 이해관계가 단일하지는 않다. 여성운동의 역사를 보면, 특정 쟁점(선거권, 낙태권)에서 여성들이 일시적으로 단결할 수는 있었지만 그런 투쟁에서도 계급적 차이 때문에 번번이 분열했다.


여성들이 차별받는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사회주의 운동에 동참할 수 있다는 가정은 비현실적이다. 지배계급 여성은 물론, 중간계급 여성들조차 노동계급 여성들과 동일한 이해관계를 지니지는 않는다.


물론 중간계급 여성들이 노동계급 여성들의 적은 아니고, 중간계급 여성들이 제기하는 요구들은 흔히 노동계급에게도 중요한 요구다. 동일임금, 공공보육시설 확충, 낙태권 등 중간계급 여성들과 노동계급 여성들 모두가 공감하는 요구들이 있고 이런 쟁점에서 이들이 함께 운동을 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간계급 여성들이 자본주의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노동계급과 같지 않고, 이 때문에 그들의 이해관계는 흔히 노동계급과 충돌한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중간계급 여성들이 단일한 집단은 아니다. 하층 중간계급 여성들의 삶은 노동계급 여성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상층 중간계급 여성들의 삶은 그렇지 않다. 상층 중간계급 여성들도 차별을 겪지만 그들은 체제 내에서 특권을 누리기도 하므로 (예외적 개인들을 제외하면) 자본주의 체제를 분쇄하기보다 체제 내에서 평등을 얻기 바란다. 중간계급에 기반을 둔 페미니즘 조류들은 여성이 기업과 국가기구 요직으로 진출하는 전략을 추구해 왔고, 이 과정에서 종종 지배계급 일부와 동맹한다.


따라서 특정 쟁점을 놓고 노동계급 여성들이 중간계급 여성들과 단결하는 것은 때로 필요해도(이때 노동계급 여성들이 독자적 계급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 정치적 독립성이 중요하다), 사회주의적 좌파가 초계급적 여성 동맹 전략을 옹호할 수는 없다. 그런 전략은 실천에서 몇 가지 문제를 낳는다.


첫째, 여성운동의 단결을 강조하면서 여성운동 내에 존재하는 전략적 차이를 흐릴 수 있다. 여성운동 내에 친자본주의적 계급협력 사상이 커다란 영향력이 있기에 전략적 차이를 흐리는 것은 위험하다. 보겔이 있는 미국의 여성운동에서 주류 세력은 민주당 같은 지배계급 정치인들과 연계해 왔다. 이 때문에 주류 페미니즘은 매우 온건한 방식으로 활동했고, 민주당 집권기에는 낙태권 제한을 포함해 많은 후퇴를 수용했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여성운동에서도 주류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체제 내 평등을 추구하면서 민주당 같은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과 연계해 왔다. 그래서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몇몇 개혁 입법 성취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지만, 김대중 · 노무현 정부에서 정부의 반노동계급적 정책을 상당 부분 수용하는 등 매우 모순된 구실을 했다.


둘째, 여성 차별에 맞선 투쟁이 더 광범한 노동계급 투쟁과 연결될 필요성을 간과하게 된다. 물론 여성들은 차별에 맞서 스스로 싸워야 하지만, 여성들만의 투쟁으로는 효과적인 투쟁이 되기 어렵다. 나아가 여성 차별의 근원인 자본주의 계급사회를 전복하는 것은 여성들만의 투쟁으로는 아예 불가능하다.


여성 해방과 계급투쟁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여성들의 차별 반대 운동뿐 아니라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이 중요하다. 여성차별을 구조화하고 지속시키는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낼 잠재력이 있는 사회세력은 노동계급뿐이기 때문이다. 노동계급만이 자본주의 이윤에 타격을 가해 체제를 뒤흔들 수 있는 대규모 투쟁을 벌일 수 있는 사회 세력이다. 노동계급 투쟁은 자본주의에서 계급세력 균형을 바꾸고 대중의 자신감을 높이는 결정적 방법이다.


노동계급이 자신감 높을 때는 자신의 힘을 착취뿐 아니라 차별에 맞서는 데도 사용할 수 있다. 노동계급 투쟁 고양기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착취뿐 아니라 차별에도 반대해 대규모 투쟁을 벌이는 일이 흔히 일어났다.


노동계급 투쟁의 결정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노동계급 아닌 여성들의 투쟁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노동계급 중심성이라는 개념은 노동계급 투쟁만이 중요하다며 노동계급이 아닌 다른 피억압자들의 투쟁을 기각하는 노동자주의와 전혀 다르다. 레닌은 모든 차별받고 천대받는 집단이 스스로 투쟁하고 조직할 권리를 옹호했고, 혁명가들의 임무는 “인민의 호민관”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동계급을 중시하는 전략은 여성의 권리 쟁취 투쟁에서도 중요하다. 1975년 영국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부와 우파의 낙태권 공격에 맞서 낙태권이 단지 여성만의 쟁점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문제라며 낙태권 투쟁에 노동조합이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사업장과 노동조합 지부들에서 노조원들의 지지를 끌어내려고 애썼다. 이런 노동자 조직화 덕분에 영국 노총(TUC)은 최대 7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거리 동원을 이끌었고, 이렇게 노동조합 운동에 기반을 둔 낙태권 투쟁은 합법 낙태를 제한하려던 우파의 시도를 좌절시킬 수 있었다. 반면, 노동운동이 훨씬 약했던 미국에서 낙태권 투쟁은 의회 로비에 치중했고, 이 때문에 우파의 낙태권 공격에 제대로 맞서지 못했다. 오늘날 미국에서 합법 낙태의 범위는 엄청나게 축소됐다.


여성 차별에 맞선 투쟁의 성패는 그 투쟁이 노동계급 운동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느냐에 달려 있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 차별에 맞선 투쟁이 성공하느냐는 노동계급이 전진하느냐 후퇴하느냐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19세기 중후반~제1차세계대전 전에 일어난 대규모 여성 선거권 투쟁은 단지 페미니스트들만의 운동이 아니었다. 노동운동이 발달한 나라들에서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 노조와 사회주의 단체 등에 속한 노동계급 활동가들의 구실이 매우 컸다.


러시아에서 여성의 완전한 참정권이 보장된 것은 볼셰비키가 이끈 노동계급 혁명이 성공한 뒤에 이뤄졌다.(당시 여성의 완전한 참정권이 보장된 나라는 몇 안 됐고, 프랑스에서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야 여성 투표권이 온전하게 보장됐다.) 러시아 혁명은 이혼 간소화, 동일임금 법제화 등 많은 개혁 입법을 이뤄냈고, 세계 최초로 낙태를 합법화하고 동성애 합법화도 이뤄냈다.


이런 성과는 러시아 혁명이 쇠락하면서 후퇴했고 마침내 스탈린의 반혁명으로 노동계급 전체가 패배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스탈린 치하에서 착취가 엄청나게 강화되면서 여성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조치들이 죄다 사라졌고, 낙태가 불법화됐고 어머니로서 여성상 강조 등 전통적 가족 이데올로기가 강화됐다.


따라서 차별과 천대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투쟁이 승리하려면 노동계급 투쟁과 연대해야 하며, 나아가 사사화된 재생산 부담을 전면 사회화하고 인간의 필요에 바탕을 둔 사회를 건설하려면 자본주의 시스템이 제거되고 노동자들이 의사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은 본질적으로 여성해방과 별개 투쟁이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여성 대다수는 노동계급의 일원이고 여성 노동자 수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페미니즘 이론에서는 여성이 노동계급의 중요하고 핵심적인 일부라는 점을 종종 간과하지만, 여성 노동자들은 오늘날 자본주의 생산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전 세계 노동인구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어도 40퍼센트이고, 성인 여성의 적어도 55퍼센트가 임금노동에 종사한다(세계은행 조사). 한국에서도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여성 임금노동자 수는 8백40만 명가량 돼, 전체 임금노동자 수의 44퍼센트를 차지한다.


여성이 노동자가 되면 고된 노동과 차별이라는 이중의 굴레에 시달리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착취와 차별 모두에 맞설 수 있는 집단적 힘을 지닌 존재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들과 함께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여성 노동자들은 러시아 혁명부터 21세기 아랍 혁명까지 노동계급 투쟁과 사회 변혁운동의 중요한 일부였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벌어진 긴축 반대 투쟁에서도 공공부문 노동자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들의 참가가 중요했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 들어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스스로 조직하고 싸워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물론 노동계급의 잠재력이 늘 현실화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노동계급 투쟁은 여러 약점을 안고 있고, 노동계급 내에 존재하는 여성 차별은 노동계급을 종종 분열시켜 노동자 운동을 약화시키곤 한다.


오늘날 여성 노동자 수와 비중이 늘어나면서 노동운동에서 차별 문제는 더욱 중요해졌다. 여성 차별은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과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할 수 있는 힘을 약화시킨다.


따라서 노동계급이 해방되려면 착취와 차별 모두에 맞선 단결된 투쟁이 필요하다. 노동계급이 분열된 상태에서는 착취에서도 해방될 수 없다. 노동계급 의식은 불균등하기에 노동계급 투쟁은 고용주나 정부 관료에 대한 도전뿐 아니라 흔히 노동계급 내부의 사상 투쟁을 수반한다. 노동계급은 집단적 투쟁을 통해 자신감을 얻고 의식을 발전시키며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노동계급 투쟁의 역사를 보면, 노동계급은 자신의 조건 개선뿐 아니라 차별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서도 싸울 수 있고, 나아가 사회 전체를 변혁하는 투쟁을 벌일 수 있는 혁명적 잠재력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실제 투쟁에서 배우면서 이런 잠재력을 현실화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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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는 중간편집이동부로 본 8차 대회와 밀접하게 연관된 ’SF 다중체계론 대 MF 단일체계론’ 쟁점보다는 유물론적 MF 단일체계론 계열 내부의 논쟁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사회(적) 재생산론을 비판하는 부분으로 전통적 고용노동 중심 ’착취’ 체계로 파악할 수 없는 가사노동, 돌봄노동 같은 전통적 여성노동 뿐 아니라 외주노동, Platform노동, 청년노동 등등 최근 현대자본주의의 광범한 내부식민주의적 간접/비고용노동영역 ’수탈’ 체계의 확산 등에 관한 최신 연구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어 Online channel과 독자 특성 상 집중시간( ; attention span) 등을 고려해 후치 편집했으므로 이 쟁점에 큰 관심없는 분들은 약독해도 무관함.  ]


일부 사회재생산 이론가들은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창출한다면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사노동이 임금노동만큼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탈리아 자율주의 페미니스트 실비아 페데리치는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적 노동’이고 자본 축적에 꼭 필요한 노동이라며 여성이 가정에서 재생산노동을 하는 노동자라고 주장한다. 페데리치는 “마르크스주의는 상품 생산 이외의 가치 생산을 보지 못한다”며 “가사노동을 생산적 노동으로 보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적 노동관을 수용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중략)·······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크리스 하먼이 지적했듯이, 자본주의 체제의 원동력은 국가가 여성 차별을 위해 사사화된 재생산 제도를 유지하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이윤을 향한 경쟁적 자본 축적 압력이다. 자본주의가 이전 계급사회와 구별되는 역동성을 지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가족은 별도의 동학을 지니는 게 아니라 이런 자본 축적 압력에 종속된다. 가족은 지배계급이 축적을 지속하기 위해 이용하는 메커니즘(기제)의 하나다.


사실, 여성이 전업주부로만 있는 것은 자본가들에게는 여성을 노동자로 착취해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을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력 재생산 부담을 개별 가족에 떠넘기는 것이 자본가 계급에 상당한 경제적 이득을 준다고 해서 자본가들이 여성을 전업주부로 가정에 묶어두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이유이다. 자본가 계급에게 여성을 노동자로서 착취하는 것의 중요성은 심지어 경제 불황기에도 감소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가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여성의 고용률을 끌어올리려 애쓰는 것이 단적인 사례다.


자본주의 국가가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등 양육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출산휴가와 부모휴가 등 양육을 지원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더 많은 여성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내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여성의 대량 노동시장 진출이 미래의 노동력 재생산 위기를 부르지(18~19세기 초반 영국 산업화 때 심각하게 나타났듯이) 않도록 하기 위한 조처이기도 하다.


물론 여성의 임금노동 참가가 확대되고 이를 위해 국가의 노동력 재생산 지원이 늘어난다 해도, 자본주의 하에서 가사와 양육에 대한 대대적인 사회적 투자가 지속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장기 호황기(1940~60년대)에 여성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가사와 육아에 대한 투자가 선진국들에서 상당히 늘어났지만 그때조차 투자 규모는 제한적이었다.


더욱이 지금처럼 자본주의가 장기적이고 심각한 위기에 처한 시기에는 과거에 이뤄진 부분적 사회화 조처(노동력의 안정적 수급 필요성과 노동계급의 압력이 작용해 만들어진 복지제도)도 지배자들의 심각한 공격을 받는다.


그래서 가족은 오늘날에도 노동력을 저렴하게 재생산하는 주요 제도로 남아 있고, 경제 위기와 불황을 제거할 수 없는 자본주의 하에서 사사화된 재생산 제도는 결코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하의 여성차별은 그 양상이 바뀔지언정 결코 사라질 수는 없다. 자본주의에서는 사회적 생산과 사사화된 재생산 사이의 모순을 제거할 수 없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착취적 생산관계에 바탕을 둔 이윤 추구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직접 창출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해서 가사노동이 여성을 얼마나 짓누르는지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페데리치의 주장처럼 자신들이 1970년대에 처음으로 ‘숨겨진 여성 노동’을 발견한 것도 아니다. 콜론타이, 체트킨, 룩셈부르크, 레닌, 트로츠키 등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미 여성의 과중한 가사부담이 여성의 동등한 사회 활동 참가를 가로막는다고 여러 차례 지적하며 해결책을 모색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뒤 볼셰비키는 공공식당 · 공공세탁소 · 어린이집 등을 지어 가사와 양육을 사회화하고자 애썼다.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직접 생산하지 않는다고 해서 잉여가치 생산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무급 가사노동은 현재 노동자들의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절감하고 미래의 노동자를 기르는 구실을 하므로, 잉여가치 창출에 간접적으로 기여한다.


그러나 가사노동과 잉여가치의 관계는 기껏해야 간접적인 것이고, 모순도 있다. 과중한 가사노동은 종종 여성의 사회적 노동 참여를 제한해 자본가들이 잉여가치를 얻을 기회를 줄이기도 한다. 여성이 전업주부로 남아 있거나 양육 책임 때문에 장시간 근무를 기피하는 것은 자본가들이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는 것을 방해한다.


가족관계를 생산관계처럼 설명하는 것은 자본주의 가족제도의 모순을 가리기도 한다. 자본주의에서 가족이 유지되는 이유가 단지 지배계급의 필요 때문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꾸리고 헌신하는 이유가 자본가들을 위한 노동력을 재생산하려는 생각 때문은 아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기 위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자본주의에서 가족은 모순된 제도이다. 가족에서 사람들은 불평등과 천대를 경험하기도 하지만, 서로 기대고 위안을 찾기도 한다. 가족의 이상과 현실은 상당히 다르지만, 생산과 사회 전반을 통제할 수 없는 노동계급의 남성과 여성은 비혁명적 시기에 대개 가족을 통해 소외를 극복하려고 한다.


생산과 노동력 재생산

사회재생산 이론가들이 모두 가사노동을 임금노동과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다. 보겔 같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는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을 단순히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보겔은 가사노동에는 사용가치가 있지만 교환가치는 없으므로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이 아니고 따라서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을 직접 비교할 수 없다고 본다. 그는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 운동의 이론적 가정(모든 여성은 가사노동자로서 착취받는다)에 반대했고, 그 운동이 가사가 여성의 일로 여겨지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비판적이었다.


보겔은 가사노동이 자본 축적에서 모순된 구실을 한다고 옳게 지적했다. 가사노동은 노동력 재생산에 기여해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기여하지만, 여성의 가사노동 참여 시간이 길면 그만큼 사회적 노동 참여 기회가 줄어들어 잉여가치 창출을 저해한다고 설명한다. 보겔은 자본주의에서 임금노동이 발전하면서 가사노동이 상품화돼 가사노동 시간이 감소하고,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 증가로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국가 개입이 발전한 것을 지적한다. 보겔은 자본 축적 논리 때문에 자본주의에서는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의 모순이 사라질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보겔도 가사노동이 자본 축적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과장하는 약점이 있다. 가사노동이 가치를 창출하지는 않지만 잉여가치 전유 과정에서 핵심적 구실을 한다고 보며,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사회를 재생산하는 데서 임금노동과 유사한 수준으로 필수적이라고 본다.


보겔은 자본주의에서 노동력 재생산 과정 전체를 이론화하고자 마르크스의 필요노동 개념을 확대했는데, 이것은 마르크스의 개념에 혼란을 초래할 뿐, 별로 유용하지 않다. 보겔은 필요노동을 사회적 성분과 가내적 성분으로 나누고, 가사노동을 필요노동의 가내적 성분으로 규정했다. 이렇게 필요노동 개념을 확대한 이유는 노동력 재생산이 실제로 이뤄지려면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이 결합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필요노동 개념은 생산과정에서 노동자가 수행하는 노동시간을 두 부분으로 구별한 개념이다. 즉, 노동자의 하루 노동일 중 자신의 생계를 위해 노동한 시간(필요노동)과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는 시간(잉여노동)을 구별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필요노동 개념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적 노동이 아니라 교환을 통해 비교되는 추상적 노동을 뜻한다.


따라서 무급 가사노동은 마르크스가 말한 의미의 필요노동이 될 수 없다. 2013년 개정판에서 보겔은 (그 이유를 자세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가사노동을 필요노동의 일부로 이론화한 것이 설득력이 부족함을 인정했다.


가사노동을 필요노동의 한 요소(가내적 요소)로 이론화할 경우 상이한 사회적 관계에 놓인 노동을 한데 묶어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의 차이가 흐려지게 될 수 있다. 그러면 자본 축적에서 임금노동 착취가 핵심이라는 점이 흐려진다.


자본주의에서 생산과 사사화된 노동력 재생산 단위(가족)는 상호작용하지만, 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해서는 생산이 훨씬 더 중요하다. 자본주의의 역동성은 가족이 아니라 경쟁적 축적에서 비롯하고, 가족은 생산의 변화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 비록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족의 경제적 · 이데올로기적 구실은 바뀌지 않았지만 가족의 규모와 형태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생산이 바뀌면서 크게 변화해 왔고, 특히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 증대는 결혼과 가족에 대한 대중의 태도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물론 보겔은 가족이 축적 논리에 종속돼 계속 변화한다고 보지만, 자본주의에서 여성의 구실을 대부분 재생산에 초점을 둬 설명한다. 선진 자본주의에서 여성의 임금노동 참가가 증대해 온 경향을 언급했지만, 오늘날 여성의 다수가 임금노동에 참가하고 생애주기에서도 갈수록 긴 시간 일한다는 사실, 즉 여성이 자본주의 생산에서 핵심적 구실을 한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보다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모순에 집중한다. 보겔도 가사노동 논쟁의 약점(무급 가사노동에만 초점을 둬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를 경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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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2  >

" 여성 억압 - 상호교차성을 넘어 사회재생산으로 "
Susan Ferguson & David McNally  Interview


원문 출처:
https://viewpointmag.com/2015/10/31/social-reproduction-beyond-intersectionality-an-interview-with-sue-ferguson-and-david-mcnally/
번       역:  김민재

 
Q)) 사회재생산 개념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겠습니다. 리즈 보겔이 1983년에 쓴 고전인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 재출간에 맞추어 최근에 그 책에 쓰신 서문에서, 두 분은 보겔이 “노동력이 존재 가능하도록 하는 조건” 즉 노동력이 생물학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세대적으로 재생산되는 방식을 연구한 것이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그의 고유한 기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중요한 논점에 근거해서, 임금노동의 존속과 생산 바깥에서의 계급 형성 과정을 위해 필수적인 활동·관계들의 내적 연관성을 규명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사회재생산이 어떻게 마르크스주의 계급 분석의 범주들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의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중요성은 무엇인가요?
 
A)) 가장 먼저, 범주 변화의 문제가 있습니다. 질문하면서 지적하셨듯이 사회재생산 접근은 우리가 노동력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습니다. 기존 마르크스주의 분석에서 노동력은 그저 원래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생산의 주어진 요소로요. 기껏해야 자연적이며,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재생 과정의 산물로 이해되었습니다.
 
노동력을 사회화하는 것과 역사와 사회 및 문화 속에 노동력이 박혀 있음을 밝히는 데 있어서 사회재생산 페미니즘은, 먼저 노동력이 그저 원래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노동력은 오직 직접적인 노동/자본 관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특정한 일련의 젠더화되고 성애화된(sexualized) 사회적 관계 즉 이른바 사적 영역에서, 그리고 이 영역을 통한 재생산을 통해 자본의 입장에서 이용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임을 밝힙니다.
 
또한 사회재생산 페미니즘은 자본에 대한 노동력의 모순적 지위를 우리가 더욱 예리하게 이해하도록 해줍니다. 우리 자신의 사회적 재생산의 모든 측면들(우리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생존하고자 하는 것)을 축적에 필수적인 것인 동시에 축적의 장애물로(왜냐하면 자본은 임금, 복지수당, 세금을 통해 그 비용을 간접적으로 지불하기 때문입니다) 파악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회재생산 페미니즘 초기 세대들의 핵심적 통찰이었습니다. 하지만 보다 최근의 학문적 연구가 시사하는 것처럼 이 접근은 또한 노동력 그 자체가 더 복잡하고 차별화되는범주임을 드러냅니다. 사회재생산의 관계를 잘 살펴보면, 자본주의적 가치 추출이 그것을 점점 더 균일화시키려는 추진력으로 작동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노동력이 동일하지는 않다는 것이 명확해집니다.
 
특정한 노동자들은 강화된 억압에 대해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정말로 점점 더 취약해지고 있습니다. 자본축적의 법칙이 작동하는 방식이 달라서가 아니라, 작업장을 넘어선 억압적 관계가 노동력의 사회관계를 매개하며, 노동자들을 단지 자본의 문 앞으로 등 떠밀 뿐 아니라, 다양한 수준의 모멸과 비인간화를 보여주며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는 말씀하신 두 번째 질문인 사회재생산 접근의 이론적 중요성으로 이어집니다. 한편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재생산하기 위해서 하는 무급노동과 다른 편에서의 임금노동 사이의 상호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사회재생산 페미니즘은 사회적 총체에 대해, 복합적으로 분화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핵심적인 이론적 기여입니다. 이중체계 분석으로부터 상호교차성 분석으로 이행할 때, 급진적인 사회이론가들은 복잡하게 얽힌 경험적 세계의 상을 우리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했죠. 몇 가지 예를 들자면 가부장적인, 인종화된, 백인 정착민의 식민주의적 관계를 떠받치는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및 심리적 동학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훌륭한 상호교차성 설명은 그 어떤 특정한 억압적 관계도 다른 것과 분리될 수 없음을 제대로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설명들은 예컨대, 왜 그리고 어떻게 이성애화된 관계들이 다른 방식이 아니라 이 방식으로 가부장적 관계들과 교차하는지에 대해(가족은 왜, 비록 시간이 지나면서 그 형식이, 예를 들어 동성 결혼을 포섭하기 위해 변화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애규범성과 가부장제가 항상은 아니지만 일상적으로 승인되는 사적 제도로 남아 있는지에 대해) 그 어떤 정합적인 설명도 발전시킨 바가 없습니다.
 
한 가지 이유는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이 사회적 총체, 즉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들이 그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교차하는 전반적인 과정 혹은 동학을 부적절하게 개념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동학은 아예 이론화되지 않거나, 아니면 그저 중립적이며 그 자체로는 권력관계가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전제됩니다. 물론 이는 서로 구별되는 억압들이 함께 구성요소가 된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런 억압들을, 공간 속에서 교차하거나 맞물리긴 하지만 존재로서는 구별되는 체계들로 취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사회재생산 접근은 자본주의라는 총체성을 상정합니다.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전체는 우선 첫 번째 단계에서, 노동자(스스로를 그리고 자신들의 세계를 재생산하기 위해 일하는 모든 사람들, 즉 사회 재생산자를 의미합니다)들을 생활수단(또는 사회재생산 수단)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하에서의 있는 그대로의 실재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았을 때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가능한 것의 영역을 어느정도 틀 짓습니다. 당연히 노동/자본 관계 속에서 가능한 것을 틀 짓지만, 작업장 너머의 젠더화된, 인종화된, 이성애화된 관계들 역시 틀 짓습니다.
 
자본주의의 결정력을 말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적 근본주의로 회귀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 결정 개념에 기계적 인과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가부장제와 인종주의는 직접적으로 자본의 필요에 기능한다고 전제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자본이 생겨나라고 해서 생겨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축적에 대한 자본주의 체제의 불가피한 명령이 가능한 것의 범위를 한정 짓는다는 점에서 결정력이 있는 것입니다. 특정한 가능성들(예컨대 작업장에서의 여성 참여의 수준이나 임신중지에 대한 권리)은 투쟁을 통해 바뀌겠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았을 때,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재생산하는 바로 그 관계들 자체는 상당히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가장 잘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 관계들을 끊임없이 바꿀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며, 이는 사실 노동력에 대한 자본주의의 필요에 지장을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선택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는 등 을 포함하여 온갖 종류의 관계를 맺으며 삽니다.
 
남성, 여성, 그리고 트랜스젠더들은 집안일과 육아를 동등하게 분담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팔리지 않을 그림을 그리거나, 허공을 바라보거나, 거리에서 인종주의와 맞서 싸우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 중 자본주의에 기능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두 자본을 위한 노동력 재생산보다 인간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특정한 형태의 억압 관계들이 노동력을 자본의 문으로 떠미는 일을 (저해하기보다) 용이하게 하는 한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및 다른 억압을 지탱하고 인간들 사이에 대안적 형태의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강력한 힘(그것이 제도이든 국가, 시민사회, 자본의 실천이든)이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작업장 너머에서 자신들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정도(예컨대 여성이 자신의 임금노동과 재생산노동, 몸의 조건들을 통제할 수 있는 정도 또는 인종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주거, 육아, 식료품 분배를 통제할 수 있는 정도)는 자본주의 내에서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억압적인 실천과 제도들이 자본주의 하에서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 이유가 있고, 자본주의가 살아남는 한 그것들이 계속 투쟁의 쟁점이 되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사회재생산 이론의 정치적 중요성이라는 마지막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재생산이 직접적 노동/자본 관계, “경제적” 교환과 운동 법칙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이는 서로 다르게 젠더화되고, 성애화되고, 인종화된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는 혼란스럽고 복잡한 일련의 살아있는 관계에 핵심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을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인종화되고, 성애화되고, 젠더화된 몸, 실천, 그리고 제도들이 중요하다는 사실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인종주의와 성차별은 자본주의의 “진짜” 혹은 “이상적인” 기능으로부터 어떤 식으로 분리될 수 있는 역사적 일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종주의와 성차별은 자본의 강탈과 축적의 실제 과정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하며, 그 과정을 정말로 활동적으로 촉진한다는 의미에서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같은 논리로, 노동력의 사회적 재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인종주의, 성차별 혹은 그 어떤 억압에 대한 도전이든 자본의 재생산을 방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운동”이나 비(非)작업장 투쟁이 계급투쟁인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즉, 그런 투쟁들은 그 자체로 본질상 잠재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이라는 것입니다. 작업장 투쟁이 언제나 맹아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작업도구를 내려놓는 일이 자본가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듯이 인간의 삶에 대한 차등적인 멸시를 끝장낼 것을, 생계수단에 대한 온전한 공동의 접근권을, 우리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요구하는 운동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 어떤 하나의 운동도, 하나의 작업장 투쟁도 그것만으로는 자본가들의 심장을 완전히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매번의 파열음은 자본주의의 몸통 전체에 울려 퍼지고, 그럼으로써 그 심장박동을 잠재적으로 약화시킵니다. 그렇기에 사회재생산 접근의 정치적 중요성은 오로지, 명확한 반자본주의적 지향을 바탕으로 해서 여러 전선들에서 일어나는 투쟁의 중요성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에 있습니다.
 
Q)) <Socialist Register>의 최근호에 실린 글에서 두 분은 특히 북미의 맥락에서 사회재생산과 이주노동 사이의 연관성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이민이나 이주의 문제는 유럽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에 의해서는 광범위하게 다루어진 적이 있지만 미국, 캐나다, 멕시코에서는 포괄적 현대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이것을 정교하게 설명하기 위한 작업이 비교적 거의 없는 편입니다.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만(Rosemary Hennessy의 최근 책이 떠오르네요) 대체로 이민자 권리 조직들의 정치가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의 언어로 명확히 설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두 분의 글이 이주와 인종화(racialization)를 계급과 젠더 분석에서 불가분한 것으로 조망하는 더 큰 프로젝트에 기여한다고 보시나요?
 
A)) 네, 그렇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사회재생산 이론은 노동력 형성의 심장부에 있는 모순을 이끌어내고 분석하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결국 자본주의는 노동을 동질적이고 서로 교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동시에 시장에서 그저 자본이 사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노동력이라는 분리된 상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마르크스의 적절한 표현을 빌리자면, 노동력의 “담지자”인 구체적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추상노동을 할 능력은 구체적인 사람들에 묶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실제의, 차별화된 장소와 공간에 존재합니다. 노동력이 실제 사회관계 속에서 생산되고 재생산되어야 하듯이, 이런 관계들 역시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존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체제의 또 하나의 경향이기도 한데, 자본의 공간은 인종과 제국의 지배 체제에 따라 분화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노동력의 살아 있는 “담지자”들에 대한 실제 태도에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그 사람들이 인종적으로 멸시되고 있거나, 자본주의적 축적의 중심 구역에서 아웃사이더의 위치에 있다면 말입니다.
 
“노동(labor)”이라는 개념을 부동산이나 투자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시장을 가진 상품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급진 정치경제학의 상당 부분에는 경제주의적 요소가 있습니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노동력의 담지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찰을 계속 밀고 감으로써, 그리고 그들의 생산과 재생산의 조건들에 대한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그런 요소들 모두를 분명히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재생산의 구체적 장소들을 이론화하는 것은 가정과 지역사회 차원의 실천들(초기 사회재생산 이론의 핵심적인 통찰력입니다)뿐만 아니라, 국민국가들 내부 및 국민국가들 사이의 인종화된 사회적 위계질서 속에서 그런 가정들과 지역사회들의 사회지리적 위치를 주의 깊게 볼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주 문제가 전면으로 나오게 됩니다. 결국 오늘날의 노동력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축적의 중심 구역 바깥의 저임금 현장에서 대량으로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본이 생산, 분배와 정보 네트워크를 세우기 위해 노동력이 저렴한 지역으로 이주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농, 북구 부유층 가정에서의 육아, 또는 그곳의 건설, 식당 및 호텔 서비스 등 공간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작업의 경우에는 저렴한 노동력(과 그 인간 담지자들)이 그 작업이 직접 요구되는 장소로 이동되어져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 인간 담지자들이 일반적으로 절박하기 때문에, 그들은 온전한 법적, 정치적 권리 및 시민권의 제안 없이도 가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갖는 차별적인 지위를 초래하고 강화된 불안정성, 멸시 및 억압이 거기 수반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물론 많은 논평가들이 임시직 노동자 체제와 그것이 수반하는 예속의 형태에 대해 풍부하게 기술한 바 있습니다. 이 작업의 상당 부분은 매우 가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재생산 접근은 후기 자본주의에서의 이주노동의 역할과 여기에 관련된 계급 형성의 다차원성, 특히 젠더화되고 인종화된 차원을 더 완전하게 파악하는 방식으로 이주노동을 이론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딱 하나만 사례를 들자면, 유급 고용의 장소로부터 가정 재생산의 장소가 공간적으로 분리되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이를 적절하게 이론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국경을 넘어가는 이주노동자들의 물리적 이동뿐만 아니라 그들의 임금의 상당한 액수가 (송금이라는 형태로) 역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그리고 그러한 송금에 의존하고 있는 자본주의 핵심으로 이주 가능한 세계 산업예비군을 구성하게 될 아이들의 양육 및 교육 작업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합니다.
 
사회재생산 분석은 그러한 사람들의 흐름과 임금의 흐름을, 그리고 공간적으로 국가적으로 분리된 임금노동의 실천과 사회재생산을 복합적이면서도 단일한 사회적 과정으로 연결할 역량을 갖고 있습니다. 이주는 그래서 흥미로운 부산물 정도가 아니라, 자본과 세계 노동계급의 재생산에 중심적인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방법은 인종화와 차별적인 지위를, 어떤 의미 있는 젠더 및 계급 분석과도 내적으로 연결합니다.
 
Q)) 수 퍼거슨 선생께서는 보다 광범위한 맥락, 구체적으로는 자본주의 권력관계 내에서 계급, 젠더, 인종의 관계적 성격을 개념적으로 통합하는 접근으로서의 캐나다 사회재생산 페미니즘의 출현과 중요성에 대한 글을 쓰셨습니다. 특히 <정치경제학 연구(Studies in Political Economy)> 같은 저널이나 <집 안에 숨겨진(Hidden in the Household)> 같은 영향력 있는 간행물 모음집에 실린 초기 이론가들의 작업부터 Stephen Gill, Isabella Bakker, David Camfield, Alan Sears 같은 보다 최근 이론가들과 Himani Bannerji 같은 비평가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캐나다 사상계에서 사회재생산 분석이 계속 이렇게 두드러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 호주의 Kate Davison이 작년 런던 역사유물론 컨퍼런스에서 말했듯이, 1970년대와 1980년대 캐나다에서 “사회재생산 그룹(party)”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왜 다른 곳이 아니라 여기였는지는 그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지요. 우선 1970년대 초기에 영어권 캐나다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주류적 페미니즘이 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중요한 것입니다(퀘벡에서는 노동조합과 좌파 민족주의 사회운동에 주요하게 뿌리를 둔 좌파적 페미니즘이 자리 잡았습니다).
 
Meg Luxton과 Heather Jon Maroney는 그렇게 된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합니다. (1)사회민주주의의 강세(미국과 달리 캐나다에서는 1930년대부터 사회민주당이 정치적으로도, 선거에서도 의미 있는 존재감을 가져 왔습니다). (2) 보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는 제도나 실천의 상대적 부족(공산당이 더 큰 존재감을 가졌던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이런 근원적 조건들이 사회주의적 사상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지적, 정치적 문화를 만들어 내고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고 합니다.
 
공산당(CP)의 영향을 받는 마르크스주의와 스스로를 차별화한 단체의 회원으로서(데이비드는 1970년대 중반에, 수는 1980년대 초반에 국제사회주의 조직(International Socialists)에 가입했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을 둘러싼 많은 논쟁에 참여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리즈 보겔의 책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을 발견했습니다. 비록 우리 단체 회원들 사이에서 보겔의 텍스트에 대한 관심은 널리 공유되지 못했고 노골적으로 적대적 반응을 접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통합적인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적 접근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옳은 것들로서 보겔의 지향을 계속 숙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영어권 캐나다와 퀘벡 모두에서 노조 내부에 대해 진짜 어느 정도의 견인력을 발전시킨 방식이었습니다. 1970년대에 걸친 간호사와 병원 노동자들의 파업이 그랬듯이, 소매업 및 은행 노동자들 사이의 노동조합 운동이 이 점에서 매우 중요했습니다.
 
우리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온타리오에서는 1978년에 여성 비율이 현저히 높은 자동차 부품 노동자 파업이 좌파와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니켈 광업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분출했는데, 여기서 “파업을 지지하는 아내들(Wives Supporting the Strike)”이라는 슬로건 하에 조직된 여성들이 핵심적인, 힘을 북돋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1980년대 초반 노조 조직률이 매우 높은 철강 산업에 여성이 고용되도록 하려는 캠페인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은 페미니즘 쟁점이 노동조합과 공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리고 이는 젠더 억압과 계급 착취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강력하게 주장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진짜 신뢰를 받도록 했습니다. 복합적인 다양성 속에 노동이나 계급 경험과 관련이 있는 페미니즘이 발전할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맥락이 제공된 것입니다.
 
물론 일부에서 포스트구조주의 담론에 기반을 둔 페미니즘이 부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적 형태나 사회재생산 형태를 포함한 페미니즘적 정치경제학은 여전히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대학 내에서, 이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이론적 작업의 상당 부분은 1970년대 말에 처음 발간된 저널 <정치경제학 연구(Studies in Political Economy)>에 수록되었습니다.
 
페미니스트들(특히 Meg Luxton, Bonnie Fox, Wally Seccombe, 그리고 Pat and Hugh Armstrong)은 대부분의 정치경제학 프레임 속에 있는 남성적 편견을 들춰내기 시작했습니다. Margaret Benston의 선구적 작업에 의지하여, 이런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 가사노동 논쟁의 결점을 둘러싸고 길을 탐색했습니다.
 
비록 Himani Bannerji가 지적한 것처럼 그들은 너무 자주 구조주의적 접근에 얽매였고 인종화된 여성의 경험을 이론화하는 것을 부차화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물론적이고 단일한 언어로 젠더와 계급을 이론화하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이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사회재생산에 대한 지적인 관심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Q)) 캐나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집단에서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사상의 영향은 어떤 것이었나요? 특히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와 실비아 페데리치는 이론적 프레임으로서의 사회재생산의 발전에 고유한 기여를 했습니다. 또한 그들의 작업은 미국에서는 꽤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이 전통과의 직접적인 연결이 조금이라도 있었나요?
 
A))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는 우리가 알기로 영향력이 있어 왔던 유일한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입니다. 그녀의 작업에 의해 영감을 받아서 특히 토론토에서 “가사노동에 임금을”을 위한 소규모 공동체들이 몇 군데 형성되었지만, 비교적 주변적이었고 결코 노동조합에서 일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접근에 대한 진지한 대안을 구성하지는 못했습니다. 여성을 노동조합에 가입된 임금노동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가사노동자로서 여성을 조직하겠다는 생각보다 더 우세했습니다.
 
달라 코스타의 작업은 가사노동 논쟁의 일부로 여겨졌고, 그래서 건설적인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실비아 페데리치의 저술이 매우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비록 여기서는 ‘가사노동에 임금을’ 흐름과 관련해서보다는 인클로저, 시초축적, 그리고 여성의 몸이라는 쟁점들에 대한 통찰력과 재고찰과 관련해서 더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지만요.
 
Q))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우리는 이론적 분석이 항상 현장에서의 사회운동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최근에 그리고 오늘날에 두 분들로 하여금 사회재상산과 계급 형성을 연구하도록 자극한 투쟁의 현장은 어디였나요? 여기서 이야기해 주실 특정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A)) 우리의 경험 중 일부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좌파들이 계급과 젠더를 통합하려고 실천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분투했던 복합적인 방식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둘 다에게 특히 중요했던 것은 1980년대 중-후반 온타리오에서 있었던 임신 중지권 투쟁에 개입했던 것이었고요. 이 운동에 참여하면 자본주의 사회가 재생산에 대한 여성의 자유에 대해 얼마나 적대적인지 확연히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 둘 다 관심을 갖게 되었던, 온갖 종류의 흥미로운 이론적이고 전략적인 질문들을 제기합니다. 하지만 특히 1990년대 중반 이래로 우리가 조금 덜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 환경에서 정치적으로 작업을 시작했을 때(특히 ‘New Socialist 네트워크’에서요), 우리는 계급과 젠더를 구성하는 차원으로서 인종과 인종화에 대해(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섹슈얼리티와 신체적 능력에 따른 차별에 대해) 훨씬 더 진지하게 연구할 필요성을 점점 더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반인종주의 및 이주 정의(migrant justice) 운동에 대한 우리의 지지는 확실히 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러 개의 억압의 축들이 “상호교차”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상호교차성 이론이 중요한 질문들을 제기했고 중요한 통찰들을 해냈기는 하지만, 이 이론은 왜 이러한 여러 가지 억압들이 후기 자본주의(late capitalism)에 걸쳐 존재하고 재생산되는지를 설명하는 데, 그리고 그들의 상호작용 방식을 설명하는 데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사회재생산 이론은 총체적이면서도 통합된 접근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런 영역에서 잠재적으로 더 잘 갖춰져 있습니다.
 
하지만 초기 사회재생산 이론의 몇몇 중요한 결점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反인종주의 그리고 反식민주의 이론 및 실천의 가장 훌륭한 부분에서 배우려는 많은 노력과 진정성 있는 헌신이 요구됩니다. 자본주의와 노동계급 형성이 어떻게 공간적으로 조직되는지 강조하면서 말입니다. 수잔은 몇몇 글에서 자본주의의 공간들이 어떻게 해서 항상 인종화되고 식민주의적인 지를 보여주며 이 과제를 수행해 왔습니다.
 
그리고 <Socialist Register> 최신호에 우리가 합동으로 기고한 글은 국민국가의 지평을 철저히 넘어섬으로써, 노동계급의 재생산을 이주가 중심적인 특징인 전지구적 현상으로 간주하며 분석을 더 심화시키려는 노력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지금이 이 분야에서 특히 더 흥미진진하고, 도전적인 역사유물론적 작업을 하기에 적합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진짜 사회적 투쟁의 살아 있는 맥박은 앞으로 수년 간 이 분야에서의 작업을 계속 추동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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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3 >


" 억압과 착취, 마르크스주의와 ‘상호교차성’ "


 작성: 샤니스 맥빈 (Shanice McBean)

 번역: 박상우

 원문출처: http://rs21.org.uk/2013/08/13/what-is-intersectionality/

 국문출처: http://www.anotherworld.kr/144



상호교차성이 이야기하는 세 가지 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모든 형태의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한다. 둘째,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한 사람의 경험은 다른 사람의 경험과 다르다. 왜냐하면 각자가 처한 억압과 착취의 물적 토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익숙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상호교차성이 말하는 세 번째는 쉽게 잊혀지는 이야기이고, 내 생각에 억압에 대한 SWP(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이론이 이 부분에서 심각하게 취약하다.


이것은 바로, 한 형태의 억압이 다른 형태의 억압에 의해 규정되거나 또는 다른 형태의 억압을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이 성차별적으로 나타날 수 있고, 또는 여성억압이 인종차별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런 현상들에서는 서로 다른 억압들을 따로 떼어서 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우리는 이미 모든 억압이 자본주의에 그 물적 토대를 두고 있다는 면에서 다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모든 착취와 억압이 서로 얽혀있다는 주장은, 최소한 모든 억압이 동일한 사회적 구조에 근간하고 있다는 상호교차성에 대한 인식이 미약하게나마 이미 [좌파의 생각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상호교차성은 더 나아가서, 예를 들면 흑인 여성이 한 편으로는 성차별주의를 경험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성차별주의와는 별개인 인종차별주의를 경험한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현실에서, 흑인 여성이 겪는 성차별주의는 종종 그들의 피부색에 의해 규정되고, 그들이 겪는 인종주의는 그들의 성에 의해 규정된다. 


흑인 여성으로서 겪는 여성 억압은 백인 여성이 겪는 여성 억압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지배계급 여성들이 겪는 억압이 노동 계급 여성들이 겪는 억압과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오늘날 존재하는 상호교차성 이론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 여섯 번째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인간적 본질은 어떤 개개인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이다.”




억압의 경험 차이는 중요하다


즉, 당신이 누구인가에 따라 억압에 대한 경험도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아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상호교차성 이론이 유용한 기술적 도구(descriptive tool)인가? 우리는 한 예로 영국에서의 여성운동사를 볼 수 있다. 1971년 스케그니스 (Skegness)에서 열린 여성해방운동(Women’s Liberation Movement - WLM) 전국대회에서 출산권을 주요 골자로 하는 세 번째 요구안이 통과되었다. 특히 이 요구안은 낙태와 피임에 대한 여성들의 접근권을 요구했다.


물론 이 요구안은 흑인이건 백인이건 관계없이 모든 여성에게 혜택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그 때까지 불법적 낙태시술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노동계급 여성들이 혜택을 보았다. 피임 역시, 원하지 않는 아이를 갖지 않을 수 있게 해주었고, 일하는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나는 출산권 요구가 불완전했다고 주장한다. WLM은 출산권에 대한 성차별적 제한이 어떻게 인종차별화되고 섹슈얼리티에 의해 영향을 받는 지 보지 못했다. 만일 알았더라면, 그들은 레즈비언 여성들의 아동입양권도 요구했을 것이며 미국의 유색인종 여성들과 연대해 강제불임시술 반대 요구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요구를 하지 못한 것은 부분적으로 운동 내부(특히 미국)에 존재하던 동성애 혐오와 인종차별주의라는 물적 조건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불완전한 이론이 불완전한 실천을 낳은 것도 사실이다. 


WLM은 여성 억압이 특정한 여성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 보지 못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고, 누구와 관계를 맺고, 어떤 사람들을 운동으로 조직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맹점이 결국 레즈비언들과 유색인종 여성들을 소외시켰고, 나는 이것이 후에 WLM이 분열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다른 요소들과 함께).


오늘날 SWP의 여성 해방 이론은 백인의 관점에서 나왔다고 보여질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여성문제에 관한 모임에서 우리는 자주 여성들이 엄마가 되지 않을 권리를 위해 싸워왔다는 이야기를 한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나, 인종과 관련해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노예제 하에서, 미국의 흑인 여성들은 엄마가 아니라 노예번식의 수단으로 인식됐다. 마치 우리가 사육장에서 어린 동물을 엄마로부터 뺏는 것처럼, 노예 주인들이 아이들을 노예 엄마로부터 빼앗아서 다시 노예로 파는 일은 흔했다.


오늘날에도 흑인 모성을 인식할 때 이런 병적인 잔재가 남아있는 걸 볼 수 있다. 특히 미국에서, 흑인 여성들은 엄마가 되기에 부적합한 존재로 여겨지고, 통상적으로 출산을 하지 않도록 권유를 받는다. 유색인종 여성들이 불임시술의 가장 주된 피해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엄마로서 적합하다고 인식되기 위해서 싸워왔다. 오늘날 영국에서도 유사한 문제를 볼 수 있다. 무슬림 엄마들이 아이를 너무 많이 낳고, 복지를 축낸다며 어떤 비난을 받는지를 보자.


이것은 흑인 여성에게서 여성성과 모성이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게 아니다. 예를 들면 노예제 폐지 직후에는, 흑인 여성들이 자주 백인 중산층의 아이들을 돌보는 가정부로 고용되었었다 (이것이 흑인유모라는 고정관념(“Mammy” stereotype)을 낳았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흑인 여성에게 영향을 끼친 성차별주의가 노예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걸 볼 수 있다. 이는 흑인여성이 겪는 성차별주의는 인종차별화되었고 서양의 백인여성이 전형적으로 겪는 성차별주의와는 실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호교차성 이론은 파편화를 낳는가?


어떤 사람들은 상호교차성 이론이 파편화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는 흑인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는 흑인이면서 동성애자이면서 장애를 가진 여성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식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일단 나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억압 받는 흑인이자 동성애자인 장애인인 노동계급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뭐가 문제라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처한 억압의 특수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과 관련지으려고 하는 건 좋은 시도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경험의 특수성에 대한 관심이 분열과 분리주의로 이어지는가이다.


사실 오늘날  -  예를 들면 대학 캠퍼스에서 -  상호교차성 이론이 사용되는 방식은, 정확히 그 반대 방향으로 작동한다. 상호교차성은 연대에 대한 호소이다. 억압에 관심있는 모든 이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억압에 존재하는 미묘한 차이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파편화가 아니다. 연대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이다.


그러나, 물론 상호교차성이 다른 개념, 예를 들면 억압받는 사람들 자신만이 곧 억압에 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조직자라는 개념과 결합하면 파편화를 낳을 수 있다. 여성들을 조직하던 것이 흑인 여성들만 따로 조직하는 것이 되고, 그 다음에는 동성애 흑인 여성만의 분파를 만드는 식으로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론적 명확성을 가져야 한다. 상호교차성과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분리주의적 조직 사이에는 어떠한 내재적인 연관성도 없다.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호교차성이 주장하지 않는 입장들을 가지고 상호교차성 이론을 비난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 원리들을 스탈린주의와 결합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렇다고 그 원리들이 내재적으로 스탈린주의적이지는 않지 않은가.


계급은 상호교차성에 어떻게 들어맞는가?


어떤 이들은 상호교차성이 계급을 단순히 억압의 여러 형태 중 하나로만 보기 때문에 노동 계급을 근본에 둔 마르크스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것이 상호교차성이 사용되는 설명적 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상호교차성이 그 자체로 무엇[착취나 억압의 원인]을 설명하는 이론이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호교차성은 왜 억압이 존재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억압의 다양한 구조들이 혼재됨으로써 나오는 각자의 억압에 대한 미묘한 경험 차이를 설명하려는 것이고,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삶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만일 상호교차성과 함께 사용하는 설명적 틀이 계급을 억압으로 [동일하게] 취급한다면, 상호교차성 역시 계급을 또 하나의 억압으로 취급한다. 예를 들어, 특권 이론(previlege theory)의 틀 안에서 상호교차성을 사용한다면, 상호교차성 이론에 관한 비판을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권 이론에 대한 비판과 상호교차성 이론에 대한 비판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특권이론의 틀 안에 상호교차성을 두고는, 특권이론이 끌어낸 결론으로 상호교차성 이론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만일 마르크스주의라는 틀 안에서 상호교차성을 이용한다면, 계급의 문제는 즉시 해결된다. 마르크스주의 틀 안에서 상호교차성은 다양한 사회 관계가 억압받고 착취받는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잘 묘사하는 연구가 될 수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전지구적 경제 위기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으로 특징지워진다. 계급 적대감이 주된 위치를 차지 하고, 더 많은 젊은 청년들이 상호교차성의 영향으로 계급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일보전진이다. 비록 그들이 계급 착취를 억압의 한 형태로 부르는 실수를 하더라도 말이다.


내 경험으로는, 대학 캠퍼스 내의 젊은 여성들 사이의 여성주의는 매우 상호교차적이다. 이 여성주의자들은 계급 정치에 상당히 개방적인데, 이는 WLM 시기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상당히 낯선 것이다. 상호교차성은 계급 착취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억압과 착취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새로운 이론적 지형은 우리와 여성주의와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여성주의는 더 이상 계급 정치에서 벗어나는 노선이 아니고, 많은 젊은이들이 계급 정치로 나아가게 하는 첫 걸음으로 작동한다.


경험의 정치?


나는 또한 상호교차성이 “경험의 정치”에 기반해서 개인의 경험을 물적 현실보다 우선에 두고 있고, 또 그렇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한다고 들었다. 다시 한번 상호교차성은 경험들을 묘사할 뿐이지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겠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우리가 노동자들의 경험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리고 그 경험을 역사 유물론적으로 설명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일반화해서 실천에 옮겨야 한다.


상호교차성도 마찬가지다. 만일 우리가 흑인 레즈비언의 경험에서 출발한다고 하면, 그 경험을 마르크스주의적 방법을 사용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마르크스주의가 흑인 레즈비언들에게 그들이 처한 특정한 억압에 대한 이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해방을 위해 싸우도록 하는 해석과 수단을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상호교차성의 중요성


그래서 이것이 왜 중요한가? SWP 안에 대체 동성애자인 젊은 흑인 여성이 몇이나 되는가? 나는 나 한 명 밖에 모른다. 아마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계급 안에는 많이 있다. 물론 우리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투쟁으로 끌어 모은다. ‘전쟁저지 연합’(Stop the War)과 반 나치동맹을 통해 당에 흑인 멤버들이 유입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얼마나 남아 있는가? 내가 당의 한 지도적 동지로부터 듣기로는 별로 많이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노동계급 성원들이 직면하고 있는 억압의 [구체적] 특수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억압받는 사람들을 정말로 끌어들이고 계속 유지할 수 있겠는가? 성소수자 흑인 여성들로 가득찬 당을 세우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가? 토니 클리프가 말한 대로, ‘우리는 19세의 흑인 레즈비언들이 [혁명운동과 조직의] 리더로 부상하길’ 바란다.


이런 종류의 사업은 자동으로 되는 게 아니다. 느긋하게 앉아서 다음 번 투쟁의 고양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지금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투쟁의 고양기에 우리는 ‘모든 억압받는 이들의 호민관’으로 불릴만한 당을 만들어야 하는 우리의 역할을 망각하고 말 수도 있다. 우리가 억압받는 자들의 경험에 대해 알리고 이야기하는 혁명가들이 되어서, 그들의 투쟁을 혁명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이끌어야 한다.


여성 억압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 여성을 조직으로 끌어올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흑인 여성이나 성전환 여성들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일 그들이 SWP를 자신들을 위해 뭔가 해주는 조직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저 가만히 있을 것인가?


억압에 저항하는 정치 투쟁의 중요성은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억압은 노동 계급을 분열시키고 우리를 약하게 만든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흑인이든 백인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성전환자이든 아니든, 동성애자이든 이성애자이든, 양성애자이든 모두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싸움에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억압에 대항하는 최고의 투사들로 보여져야 한다.


만약 우리의 정치가 정말로 전세계 노동 계급을 향한 것이라면, 우리는 전세계 노동계급의 특수성과 미묘한 차이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전세계 노동계급의 여성화와 인종화에 대해 그리고 이것이 국가가 승인하는 유색인종 여성에 대한 성적 학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인가?


혁명가로서 우리는 어떤 쟁점이 영국에서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대중 봉기를 일으킬 것인지 미리 알 수 없다. 그러나 역사는 종종 노동자들에게 힘과 활력을 주는 것이 억압을 둘러싼 문제들에 대한 운동이었음을 알려준다. 


조나스 리스턴 (Jonas Liston)이 블로그에 썼듯이, 1930년대 미국 공산당이 행한 반인종주의 작업들이 (흑백 노동자들) 공통의 경제 투쟁을 위해 흑인 노동자들과 백인노동자들을 같이 조직해야 할 때가 되었을때 조직에 엄청난 힘을 실어 주었다. 실천적으로 그들이 흑인들의 투쟁에 진지하다는 것을 이미 증명했다.


우리는 상호교차성이 점점 관심을 모으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특정 억압 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투쟁이, 특히 젊은 활동가들 중심으로,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특히 트랜스젠더 해방 운동에 대한 첫 논의들이 진행되고, 흑인 여성주의와 그들의 투쟁이 갈수록 현대 여성주의 안에서 가시화되고 있다는 강력한 조짐이 있다.


경제 위기 시기에, 유색인종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에 비해 가장 심각한 어려움을 겪어 왔다. 성전환 여성들은 홈리스가 되거나 직장에서의 부당 해고, 성적 신체적 학대, 경찰의 부당함에 노출될 위험이 제일 크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좌파들이 이런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이러한 이유로 나는 설사 우리가 “상호교차성”이라는 용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더라도, 그 방법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는 언제나 모든 종류의 억압에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 


하지만 이를 위한 첫 번째 작업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특정한 사람들이 어떤 억압을 받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호교차의 방법론이 중요하다. 상호교차성은 모든 여성이 같은 방식으로 여성 억압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우리에게 그 미묘한 차이들을 논의할 수 있게 해주며, 그럼으로써 우리가 억압받는 사람들의 가장 광범위한 집단에 연관될 수 있게 해준다. 에이몬 맥칸(Eamonn McCann)이 2013 [영국의] 맑시즘 폐막식에서 [SWP의 성폭력 논란을 겨냥해서] 말했듯이, 사회주의자 조직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경험과 진지하게 관계맺고 있을 때 그 사람들에 의해서 진지하게 받아들여 진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의미인가?


이 논의에서 지금까지 가장 어려운 질문은 이것이 실천에서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이 질문에 답할 정도의 경험이나 지식은 없지만, 중요한 몇 가지 제안과 질문을 던지겠다. 일단 우리는 여성 억압에 대한 우리의 이론을 살펴보고, “여성”이 단일한 집단이 아니라는 상호교차성의 핵심 개념을 기억하면서 이론을 확장, 심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출판물에서 억압의 구체성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는 억압의 지역적 쟁점들을 가지고 더 많이 조직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적인 이민국 (UK Border Agency)이 런던에서 과도하게 활동 중인데, 이것에 관해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겠는가? 경찰의 무단 검문과 폭력에 대한 문제들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집회 시위의 자유 지키기 행동’ (Defend the Right to Protest)이 지역에서 이용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더 자주 억압 문제에 관한 정치 투쟁을 작업장으로 가져갈 수 있을까? 노동 조합을 억압의 문제에 관한 풀뿌리 투쟁들과 연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내 정치적 본능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는 것이 우리를 ‘억압받는 이들의 호민관’이라 불릴 수 있는 혁명 조직으로 만들어 줄 실천으로 이끌어줄 것이라 말한다. 흑인 여성과 성전환자들, 레즈비언, 장애인들  - 더 광범위한 노동 계급의 요소들  -  이 가득찬, 분열을 뚫고 모두가 나란히 혁명적 미래를 향해 싸우는 억압받는 이들의 호민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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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35인의 여성/노동/계급 이야기
낸시 홈스트롬 엮음, 유강은 옮김 / 메이데이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본서에 대해 심광현선생님께서 {교수신문}에 발표하셨던 서평입니다. 관심있는 분들께 좋은 참조점을 제공해 줍니다.
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5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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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활 - 11호 - 2016년 가을 혁신호
말과활 편집부 지음 / 일곱번째숲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0.  우선 존경하는 여러 선생님들 앞에서 본의 아니게 물의를 일으키게 된 점 머리 숙여 진심어린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앞으로 뼈를 깎는 자기 반성을 통해 조금이라도 덜 부끄러운 인간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하지만 작은 변명을 하자면, 오늘따라 컨디션도 극도로 안 좋았지만 외관 상 지정 성별이 남성으로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이미 (Sedgwick 노선에 대해 발언하던) 초반부터 "질문이냐 지적이냐", "mansplain이냐" 등등 계속 딴지걸며 제대로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는 한 여성 때문에 그때그때 적절한 대응을 하는 것처럼은 보였어도 내적으로는 그 심리적, 감정적 충격을 사후 처리하느라 갑자기 뇌에 부하가 걸려 결국 사고와 발언의 흐름이 끊겨버리면서 헤매게 되어 지연된 것이어서 이런 종파주의적 방해와 저지 행위엔 유감이 있고, (더구나 누군지도 모른 채) floor에는 언제나 질문만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편견이야말로 사악한 Stalin주의의 핵심 본질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러나 무엇보다 이러한 차단을 통해 그 결과 제 발언이 심지어 Lenin주의로 곡해되는 둥 결정적으로 중요한 몇 가지 오해들이 초래됨으로써 반드시 이것만은 바로 잡아야 할 필요가 있기에 본 글의 작성에 이르게 되었으니 상기의 반성을 필수 전제로!!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해 되도록 짧게만 마무리 하고 여성/썽 주체들의 독자적 post-mEgalian Strateg(er)y가 수립될 때까지 당분간 침묵 속의 기다림을 수행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다소 거슬리는 형식/외(형)적 요소들이 있었더라도, (attitudinal) noise와 message를 현명하게 분리하여 이하의 충정어린 간언을 차분히 검토해 주시기를 간구드립니다.





1.  먼저 손희정선생님의 답변과 전적으로 동일하게 문화와 정치경제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제 발언의 근본 취지입니다. 그러나 따라서 사태와 현상의 정치경제적 측면을 완전히 망실한 현재 feminism 진영의 편향된 연구 방향은 재고되어야 할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현장에 20시 30분경에 도착한 관계로 김신현경선생님의 발표는 전혀 듣지 못 했지만, 이후 발표자[ 실은 토론자]들의 인용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논조는 추측할 수 있었기에 선생님의 사유에는 이미 당시부터 많은 부분 동의하고 있었으나, 제 발언은 선생님 개인이나 심지어 오늘 토론회 (panelist들) 자체만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었기에 이 부분을 깊이 양해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김신현경선생님의 시도와 같은 전환이 더욱 적극적으로 그리고 대대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환을 통해 손희정선생님이 우려하신 바와 같은 소위 적들의 일부에 대한 면죄부[/사면 효과]가 정말로 발생하게 되는데 저는 이것이야말로 (Post-mEgalia적) 대전환으로서의 "연대를 가능케 할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인문주의 (문화연구) 분파가 생산해내는 정치적 최대 해악은 혼돈된 주적 개념과 교란된 대적 전선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메갈과 Womad 내 활동 대중이 공격하고 있는 남성들의 대다수는 남성동성애자들을 위시한 사회적, 생물학적 약자들일 뿐이며, 심지어 인문주의 연구자 층위에서조차 자신의 paradigm을 가장 깊은 층위에서 위태롭게 지탱해 주고 있는 이런 근본적 설정들은 매우 즉자적이고 즉물적인 대중들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기에 따라서 소위 "약한 남성들과의 연대"가 가능한지 안 한지 같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을 본질적으로는 그들과 똑같이 순전히 개인적인 감으로!! 그리고 호/불호로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손희정선생님(의 우려)처럼 이런 (잠정적!!) 사면 효과의 발생이 싫어서 아예 정치경제((학)적) 연구 자체의 철회를 고려한다는 것은 단순히 목적론적 본말 전도일 뿐만 아니라 황우석에 버금가는 연구윤리 위반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면 가능한 주체들은 방치해 둔다면 결국 그 폭발 직전의 들끓는 불만에 가득 찬 해석의 공백을 싸구려 fascist ideologue들이 메우게 됨으로써 주적의 수중에 장악되어 mEgalian들을 때려잡는 fascism의 하수인과 행동대원들로 역이용 당할 것이기에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반드시 적극적 견인을 통해 전취해 와야만 합니다.


2.1.

지금 총체적 사태는 (참석자) 여러분들이 안이하게 생각하고 계시는 것보다 훨씬 더 엄중하고 위험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Russia-Ukraina/e 戰 양상을 띨) 국지화된 21세기 3차대전으로서의 동북아/한반도 전쟁 가능성이 점점 가시화되어가고 있고 이는 은폐된 세계대공황과 양적 완화 실패( 가능성)에 근본적으로 연동되어 있으며 이런 세계 경제 전망과는 별도로 한국 경제는 전쟁과 상관없이 위기를 피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점점 더 fascism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부상할 수 있습니다.



2.2.  신자유주의와 (고전적) Fascism의 관계, 그리고 혐오의 정치학

앙자는 구체적 앙태에서

축적 위기에 몰린 독점자본의 노골적 폭력 체제라는 공통 본질을 기반으로, 경제위기의 최대체감피해자로서 몰락해가면서 신분상승의 닫혀가는 좁은 문 앞에서 하층계급과 자신을 구별짓고 그 차별성을 극대화시켜 appeal하고자 열망하는 Petit Bourgeoisie 중(하)위 계급을 혐오의 정동을 통한 주체화의 열정으로 무장한 중심 주체로 동원해 냄으로써 (여성과 잉여계층을 포함한) (최)하층계급들에 대해 (복지 및 부양 부담 일소와 노골적 차별 및 배제를 위한) 무자비한 폭력을 실현해 낸다는 공통점이 있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양자는 상호 대립 길항하는 2개의 진영이 아니라 위기의 정도와 국면에 따라 자유자재로 전환되는 Janus의 두 얼굴일 뿐이며 위기가 심화되면 자유방임을 표방하는 신자유주의라는 가면을 벗어 던지고 극단적 폭력체제로서의 Fascism이라는 진짜 얼굴이 드러나게 되는 것.


¶ (혁신호 발간 기념 참조)☞ 박찬종. "금융화: 현대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 {말과활} 11호




((참고로, 따라서 좌파도 Bolshevism 대 자유/자율/자주(관리) 사회주의 및 anarchism 간에 불구대천의 영구대립적 선악 2분법과 독선적 유일진리관의 사고방식을 지양하고 각 정세 국면에 민감하게 연동하며 유연하고 신속기민하게 이동전환할 수 있는 다양하고 체계적인 좌파-통치성 유형들을 끊임없이 발명해 내야 한다는 것이 후기 Foucault에 대한 졸고들의 행간 취지였던 것입니다.))







최종 결론:  막연한 약자들과의 윤리적 연대가 아닌 반Fascism 연대 전선으로!!!






마지막으로 Sedgwick 노선에 대한 비관은 상기 1항의 맥락에서 그 연장으로서 본의 아니게 서동진, 최원선생님 등과 궤를 같이 하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이 자료들에 대해서도 적극 검토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 ☞ 최원. " ’정동 이론’ 비판 ―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의 쟁점을 중심으로". 『라캉 또는 알튀세르(; Lacan sive Althusser)』 난장. ’2016.

¶ (혁신호 발간 기념 참조)☞ 서동진. "마음의 관상학에서 벗어나기 ― 감정과 체험의 유물론 1". {말과활} 11호.



[참고 자료]


한국 노동 시장에서의 세대별 남녀 취업 현황 및 임금 격차












[추  기]


    본서를 통틀어 가장 흥미로운 글들 중 하나는 단연 [흐름과 초점] column으로 기획번역소개된 Nancy Fraser의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의 도래"라 할 수 있는데 현재의 세계사적 단계에서 모색될 수 있는 (강력한) 하나의 대안 paradigm model 제시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Nancy Fraser model에 대한 본격 검토는 다른 공간에 할당키로 하고 여기서는 (마무리에 해당하므로) 보다 긴급한 단상들만을 추가하는 것으로 갈음하겠습니다.

먼저 가장 아쉬운 부분인 매우 독특한 Nancy Fraser식 Feminism 분류법에 대한 평가인데 그는  2세대 1막, 2막, 3막이라는 명명을 창안하고 있는데 그 세부 내용을 검토해보면 그가 말하는 2세대 feminism이란 사실상 좌파 feminism으로 1막은 좌파 feminism 1세대로서의 MF[ =Marxist feminism]를, 2막이 그에 대한 반동/반발로서 가부장제 주적론과 정체성 정치로 발화한 RF[ =Radical feminism( ≠Radicalist feminism; (3세대) 급진(민주)주의 feminnism)]를 주축으로한 주류 2세대 feminism과 좌파 feminism 2세대로서의 SF[ =Socialist feminism ;사회주의 feminism](내 온건우파)의 혼합을, 3막으로 3세대 (좌파) feminism을 의미(하고자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좌/우파의 정치적 분류축(과의 교차)을 사상하고 시간축 하나로만 모든 feminism들을 분류하려는 오류로 복합/통합주의자로서의 자기위반일 뿐이며, 이러한 2세대 feminism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과장은 그의 출발점=출신지=고향과 혼동된 좌파 지향성의 표식/흔적이고, 진정한 2세대의 부정성에 대한 비판과 탈주를 가능하게 할 상대화를 가로막는 감옥으로서의 (분류) 도식일 뿐으로 사료됩니다.


다만, 이러한 착상의 그나마 긍정적 측면을 최대한 재활용해 세분화라는 구도로 정당화하면 2.1세대는 그래도 계급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SF[ =사회주의 feminism으]로, 2.2세대는 이것을 완전히 망실해버린 채 극단적 2분법의 정체성 정치로 빠져버리게 된 RF로, 2.3세대는 이들의 해악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본질로 표방하며 등장한 3세대의 좌파, 즉 (postmodern 및) poststructuralist 급진(민주)주의 feminism으로 합리화해 볼 수 있겠으나, 밝힌 바와 같이 2.3세대는 2.2세대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그 과업이자 본질이고 무엇보다 기반하고 있는 근본적 paradigm이 매우 상이하기 때문에 양자는 같은 세대로 묶이기 어려워 보입니다. 아무리 적극적으로 긍정화해도 2.3세대로 정위 시도해 볼 수 있는 2세대 말 3세대 초(기) feminism은 사실은 2세대 feminism 전체에 대한 비판에 더 주력하는 2세대 post-feminism이었고 이러한 반립을 통해 이후 미세한 차이를 보이며 3세대 feminism으로 계승, 정립되어 나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작성자 본인의 전고들에서 제시된 분석/분류 model에서의 LF[ =Liberal feminism]에 대한 결과적 과소평가가 반성될 수는 있는데, 이는 한국을 포함하는 많은 나라들에서 LF가 본격적 (대중)운동으로 출현하지 못하고 누락, 미발현, 압축-이월/월경하거나 좌파 1세대 대중 feminnism운동의 영향과 연동/혼합되어 출현했었기 때문에 먼저 (자가) 시도된 바대로 0세대 feminism으로 분류하거나 아니면 1세대 우파/중도 feminism 등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공히 모든 1세대 feminism( 분파들)의 근본 동력과 기반은 누가 뭐래도 어쨌든 전고에서 밝힌 바와 같이 경공업 중심의 근대 산업자본주의 초기 값싸고 복종적인 여성 노동력의 대규모 동원과 이를 위한 여성 (대상) 대중교육 도입이며 LF는 그 대중 기반 동력의 특수한 일파적 반영이었을 뿐이고 이 계급 분파들의 LF는 이를 (분)기점으로 같은 LF계보라도 그 내부에서 이전의 극히 제한되고 수동적인 소수 elite 여성들의 선각자적 0세대 LF(/)운동과 이후 시대 분위기에 편승해 본격 대중운동으로 발화한 1세대 우파/중도 LF로 양분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당시의 시대 분위기(, 특히 1세대 안에서의 좌/우파 관계, 작성자의 model에 기반하여 좀 더 정밀히 표현하면 1세대 좌파 feminism과 1세대 우파 feminism 간 관계)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서술은 다음의 자료를 참고할 수 있음.

¶ ☞ Orr, Judith (2015). Marxism and women’s liberation. Bookmarks Publications.

국역본: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역: 이장원. 간: 책갈피. ’2016.















(여담으로 별표 평가점수제는 선호하지 않으나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Review 작성 자체를 할 수 없는 system이라 어쩔 수 없이 표시했고, 별 5개는 주로 명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중요한 책들에 주기 위해 자제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혁신호의 기개가 느껴지는 본서에는 잡지류로서는 최고점을 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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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또는 알튀세르 - 이데올로기적 반역과 반폭력의 정치를 위하여
최원 지음 / 난장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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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기다리던 책이었는데 드디어 출간되었네요.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하며 이하는 이를 기념하고 본서(의 의미와 중요성 등)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다른 채널에 이미 ’2013년 12월에 게재했던 글이지만 몇가지 중요한 착상들을 제시하면서 당시 반응도 나쁘지 않았기에 일단 그대로 옮겨 싣습니다.

당시는 Zizek 을 필두로 소위 (Slovenian) 후기 Lacan주의 좌파가 국내에 소개된 이후 Zizek 최초 방한 등 엄청난 각광을 받던 시기로 거의 찬양 일색에 현재와는 여러 국면 상 미묘한 차이가 있었고 중심 문제도 당시는 ’Lacan-Zizekian solution/paradigm에 대한 (정밀한) 좌파적 평가와 대응’에 가까웠었기에 이 국면 변화와 차이들에 대한 개정 시도는 가능하다면 추기 형식으로 첨가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0.

    본 주제는 이미 일본에서의 선례를 통해 실증된 바와 같이 향후 국내 (및 국제) 이론 정세에 있어서 Zizek(ian들)의 운명은 물론이고, 실재계 및 (과학과) ideology(의 외부) 문제에 대한 입장 등을 둘러싼 post주의-문화이론 진영, (Balibar-)Zizekian 대 (창조/비판/초월적) ((신))실재론 계열의 (귀환) 성패 여부 등등을 포함하여 주요 변수들을 결정할 매우 심대한 잠재적 폭발력을 내포하고 있는 일종의 (정치)철학 및 정신분석학 상 근본문제(, 그 현대적 version)를 형성한다고 판단되기에 약간의 주요 관련 사항들을 첨부하고자 합니다. [이하 본문 경어 생략]




1. 제1논점에 대하여

    "인셉션인가, 호명인가"라는 전체 제목 바로 그 자체에 해당하는, 전체를 장악한 부분으로서의 이 제1논점은 사실 (이하의 다른 두 논점에 비해) 그렇게 실재적 중요성을 갖고 있다거나 위협이 되는 논점으로 보기 어려우나 원천적으로 Althusser : Lacan 논쟁 당시 Althusser 측의 대응 전략에 약간의 오류가 있었고, 두 논점보다는 상대적으로 (Slavoj )Zizek=(Mladen )Dolar(=(Terry )Eagleton) 진영의 비판적 문제 제기에도 일정 정도 합리적 핵심과 더구나 약간의 난해성까지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일정 부분 Althusser의 패배나 치열한 백중전처럼 보일 수도 있는) 가장 대표적 (제1)논점으로 간주되어 온 경향이 있다.

(

당시 Althusser의 대응에 오류가 발생한 가장 큰 원인은 아무래도 (이후 Foucault의 방법적 실천에 의해 대표적으로 극복/복구되는) 당시 구조주의의 역사적 오류로서의 반역사주의적 사조/사고방식의 과잉, 특히 모든 역사((주의)적) 고찰을 목적론으로 등치시켜 비판하는 과도한 일반화-단순화의 오류와, 더불어 그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초기 구조주의적 발생론에 의해 오염된) 발생학 일반에 대한 ((무의식적)) 편견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초기 구조주의적 발생론'이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데 

첫째는 초기 Cremonini에서 특징적이며, Saussure와 Levi-Strauss의 원-구조주의에서 강조되는 모든 구조들의 동심원적 유사(발생)성, 즉 부단히 확장되는 동심원적 무한 연쇄 구조(로서)의 발생론이고, 

둘째는 Lacan의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에 특징적인 주체 형성의 내적 거울/원환 구조, 주체와 대상 간에 형성되는 욕망의 원환 구조, 즉 "라캉이 욕망하는 주체의 형성을 설명하면서 분석하는...환상공식( ⃟ a)에서 빗금 쳐진 주체와 대상 a 사이에 삽입하는 돌아가고 있는 사각형의 구조"[from 최원](로서)의 발생론이다. 이 때문에 Althusser는 발생학 일반에 대해 원환의 반복(성)이라는 편견을 갖게 됐고, 이러한 반복성에 대한 제1논점에서 즉각적으로 발생론이라고 반비판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하지만 이 논점에서 제기된 비판 자체에 대한 본질적 답변은 오히려 주체의 형성과 변화/변형( 기제;mechanism)에 관한 사유인 발생학적 접근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결정적으로 Althusser 자신 대신 그 제자들, 즉 (기관-신체론과 '-되기'의 주체-변형론을 포함하는) Deleuze에 의한 주체의 (내적) 개체 발생학과 Foucault에 의한 주체의 (외적) 계통 발생학에 해당하는 ((각종 규율 및 훈육 장치 등) 주체 (생산 장치들)의) 고고학과 계보학 그리고 주체의 해석학 및 주체 생산의 technology론 등을 통해 이미 거의 완전한 형태로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특히 신자유주의 (위기) 국면 이후) 이 논점과 관련하여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더욱 중대한 치명적 문제, 혹은 남겨진 과제는 (거시적) 대안/대항 주체의 대량생산 공법, 공정과 technology 개발/발명 과제라는 점이  반드시 특기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하 제2논점과 제3논점은 사실 매우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로 궁극적으로 하나의 단일한 근본문제로 이어진다. 

2. 제2논점에 대하여 : Balibar의 후퇴와 Zizek화, 그리고 정치의 신학화를 초래한 미묘한 이단점 또는 접점으로서의 ideology=정신(분석)의 외부 문제


3. 제3논점에 대하여: (그에 대한 모든 비판을 유효하게 하는) Zizek의 급소

Zizek(=Badiou)의 공허한 관념론( 경향)의 뿌리, 기표(/)구조 중심의 공백, (그(들)의 '공산주의'라는) 빈 기표, (그) 장막 뒤의 (궁극적) 부(존)재

자신의 아버지를 유물/실재론이라 착각하고 있는 관념론 계보의 장자(들)


    일본에서의 실례




    그리고 최근 국내 비판들의 경향례


      국내 사민주의자들의 비판 ; 홍준기의 예

          홍준기, "지젝의 ‘공산주의’가 공허한 이유"

              , LE  MONDE  diplomatique 한국어판 63호, '2013/12/11

             @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479 .


     전통 (구)좌파적 비판들

         박가분, "교양주의 좌파들의 답"


S. 결론 : 정세 전망과 Zizek(ian 진영)에 대한 전략적 입장의 결정.

S.1. (사상전의) 정세 전망

    한국에서 다소 특이하게 폭발적인 Zizek의 인기는 우리가 따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아도 그리 오래지 않아 사그러들 가능성이 농후하다.

    a. 고질적인 대중의 자생적 권태와 피로감: 

대중의 인기 감정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더구나 현재 대규모 청중의 대부분은 여러 경로로 확인되듯이 그저 단순한 호기심에 몰려 들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고 그들의 얄팍한 호기심은 곧 자기-기만적으로 매우 쉽게 충족되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

    b. 이와 반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비판자들의 Zizek 연구는 어쨌든 나름대로 점차 심화되어 실체(적 진실)와 (치명적) 급소들에 가까이 근접해 가면서 국제적 평균 경향(성)에 도달하게 되고, 그 평균도 '핵심적 비판들의 확산'에로 점근선을 그려가게 될 것이다.

    c. 철학적 사유( 방법)의 깊이와 pattern의 내적 한계: Zizek은 이미 세계적 석학이자 동시대 생존 지성들 중 가장 주목받고 있는 왕성한 활동 철학자이지만 Deleuze등의 철학사적 독창성과 심오함에 비견하여서(만) 드러나는 제한적 면모이겠는데, 그의 (사유 (및) )방법적 특질 내지 본질은 정밀한 독해와 예리한 비평, 적확한 적재적 인용으로 대표되는 사상-정보, 사람들( 간)의 광범한 망라적 연결, 즉 (hyper-)link라 할 수 있고 이런 면에서 그는 후술하겠지만 (방법론적으로) Derrida의 계보에 속하며 좀 더 정확히는 Linkage 시대의 Derrida, 또는 'linked Derrida'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상기 홍준기는 다소 경박해 보이나 일면 유사한 언급을 하고 있는데, 이런 류의 관측에 방증을 덧붙이면, 예를 들어 그의 경제(분석)론은 대개 Maurizio Lazzarato, Franco Verardi, Carlo Vercelone 등등 (Italian) 자율주의자들의 생명자본주의-인지자본주의론( 인용)에 크게 (사실은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communism론은 홍준기의 생각처럼 완전히 공허한 관념이나 공백의 빈 기표만은 아니어서 최근의 논고들을 잘 읽어 보면 나름대로 약간의 구체적 진전을 보이고 있기도 한데, 그러나 그 진전의 핵심 대부분도 실은 Negrian( 자율주의자)들의 '공통적인 것', '공통재', '공유재', '(network )공유지' 등을 중심으로 한 '공통되기'로서의 (새로운) communism론으로 부터 온 인용( 또는 도용)에 불과할 뿐이다. (이 경제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정의는 작은 첫 걸음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심대한 첫 걸음이다. 계열 내에서는 operaismo 시기와 post-operaismo 시기를 나누면서 사상(사)적으로는 (자유, 자립 등을 기치로 하는) 모든 pan-anarchism과 communism 계열을 나누는 근본적이고 '위대한 전환'이기 때문이다.) Zizek 본인은 Negri에 대하여는 제국론과 그에 기반한 Europe 통합 (헌법) 찬성 등등의 오류 때문에 강한 거부감을 표하고 있지만 그 (동료) 후학들과 제자들의 (이론적) 성과에 대하여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주요 참조(점으)로서 폭넓게 인용/수용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다시 말해, 그의 communism론은 Badiou와 Negrian/자율주의의 연결적 인용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홍준기가 무시했고 우리도 간과하기 쉬운 중요한 사실 한가지는 그 인용과 비평(적 comment)의 놀라운 열정적 광범성과 적확성이다. 그(의 방법)는 일개 독서와 인용, 비평(을 하고 있는 것) 뿐이지만, (그것을 광적으로 수행하는) 광적인 열독가이며 연결자이기 때문에 어떤 반열에 오를 수 있었거나 있는 것이다.


    x. 반경향의 변수들 첫번째는 (위 c항 후반 요소에서 기인하는) Zizek의 가소성과 유동/유연성이다.

Zizek의 체계는 변화의 속도와 폭이 꽤나 큰 편이고 더구나 항상/여전히 모색 중이며 무엇보다 대단한 열독가, 교신자에 엄청난 다(산)작가이자 배우, 감독이고 결코 만만찮은 논쟁가로서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하는 경이적인 활력/역능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제기되는 비판들에 어떠한 입장(변화)과 반론(/)반응들을 취해 나갈지는 상수항이 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많지 않아 보인다.

심지어 사유의 깊이, 체계 및 논리의 완전성(이 반열에 오르건 안 오르건), 한마디로 실력과 전혀 상관없이 대중문화의 좌파 icon (/) 연예인으로 지속적 인기를 구가할 수도 있다.

    y. 정치경제적 정세 변동



S.2. 전략적 입장

S.2.1. 전략적 과제와 전선의 배치

    a. 절대적으로 더욱 중요한 대적 전선은 언제나 신자유주의와 그에 완전히 포섭/포획된 (정책적) 대리 수행자로서의 자유-사민주의[also by 박노자, 북구 실정들에 대한 비판적 보고]

    b. (자유±사민주의의 완전 포획과) 좌파들의 지리멸렬 : 구조적 위기에서 몰락과 죽음까지

    c. 반자본/반신자유주를 위한 급진 좌파들의 대대적 단결과 협력의 절체적 필요성


S.2.2. 동원 가능한 자원들 \ 그나마 남은 극소 우수 자원으로서의 Zizek

    상기의 모든 한계와 오류들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우리의 돌격대장 Zizek의 장점들은

  a. 현재 전 세계 대중들이 가장 관심을 집중해 귀 기울이고 있는 (거의 유일한) 급진 좌파

  b. 뛰어난 전투성들; 탁월한 논쟁력과 연구+저술력, 전투적 문제의식, (그나마) 현실 정치 참여를 감행하는 실천적 (국제) 행동주의 철학자

  c. Lacan주의의 본질을 의심케 할 정도로 원래부터 실망스러웠지만 최근 보수주의적 전향을 노골화함으로써 더욱 큰 실망을 선사하는 Lacan의 수재적 수제자, 정통 적자이자 사위 Jacques-Alain Miller와 달리, Zizek은 이상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Lacan주의 좌파로서 정신분석의 비판/전복/좌파적 재해석과 적극 활용을 주도.

  d.


S.2.S. 전략적 입장 \ 대응 방침

현 국면에서 어렵게 일어난 급진 좌파 및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communism에 대한 관심과 인기의 불씨를 섣부르게 비판이란 미명으로 짓밟아 꺼(뜨려) 버린다고 해서 대의를 위해 과연 어떤 유익이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주의와 (자기) 반성(적 회개/회심)을 전제적 기반으로 (하는),

Zizek(ian들)에 대한 1차원적 반작용으로서의 대립/대결 의식 극복과      적극적 공동 방어→상호 혁신하는 협력적 보완 또는 비판적 지지

 




Z. 남겨진 문제


    그러나 이러한 전략적 결정 뒤에도 여전히 남는 미해결의 (이론적) 과제는 '과연 우리에겐 (정치신학적) 광신도가 되는 길[by Alberto Toscano]밖에는 없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특히 Foucault와 Feyerabend 등 anarchism적 인식론에 의한) '현대 (주류) 인식론의 붕괴'가 해결되지 않는 한 본질적으로 답변될 수 없는 그야말로 지난한 난제와의 전투가 될 것이다. 게다가 바로 이러한 맥락이 (근본주의자로서 급진좌파의 실질적 근본 대안의 (발명) 부재 문제와 함께) 현 시대적 국면에서 'Marx주의의 위기', 그 변형(/)확장형인 '좌파의 구조적 위기'의 (철학적) 근본 원인을 형성하고 있기에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우리의 (정치-철학적) 입장, 또는 Marx주의의 특권적 지위는 과연 어떻게, 무엇으로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인가?'









A. 보론

A.1. Cremonini와 구조주의

    그런데 본 주제와 관련하여 얻은 또 하나의 재미있는 착상이자 의미심장한 발견은 Cremonini의 개인 작품사가 전체 구조주의의 역사라는 계통 발생을 압축하는 개체 발생 과정이었다는 사실이다.

초기 Cremonini의 작품들은 정확히 Saussure와 Levi-Strauss적 초기 (동심원/동일성) 구조주의와 (중기는) Lacan의 거울(/원환)-구조주의를 형상화하고, 후기 작품들은 Althusser적 후기 (유물론) 구조주의를 제시한다.



A.2. 구조주의의 계보학 (가설)

A.2.1. 핵심 가설

    가설의 핵심은 구조주의 계보(학)에 2개의 기축 판별선이 있는데, 

그 제1축이 구조 동일성 강조 대 구조 간 차이 강조의 대립, 그 대립의 변형/구체형인 동일 구조로서의 동심원(적) (구조) 중심의 존재 인정 여부이며, 이에 의해 (초기)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가 근원-핵심적으로 분기하고,

 

제2축이 바로 상기 (본문) 논쟁의 제3논점에 의해 분기되는 실재론=유물론 대 관념론의 대립으로 (후기 구조주의를 포함하여) 구조주의 내부에선 구조 중심을 빈 공백으로 보거나 언어(/언설/담론) 등(으로 보거나) 평평한/(거울-)대칭/등가적인 다른 기표(/)구조=체계로 보는 등에 의해 결국 (현실/실재적) 참조점=누빔점을 소실/제거하는가(: 관념론), 본질적으로 비대칭/비등가적인 즉 더 무거운 다른 구조=체계나 실재(계), 물질 등으로 보는가(: 유물론)에 따라 분기하며,

탈구조주의에선 (동일(한 단일) 구조 중심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구조 중심이 아니라 구조들 간 관계가 평평하고 대칭/등가적인 것으로 보는가, 비대칭/비등가적이어서 (중층의) 심급을 구성한다고 보는가에 따라 분기한다. 즉, 요약하면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를 통틀어 이론 체계가 아무리 화려하고 복잡하더라도 구조 중심(에 참조점=누빔점)이 없거나 모든 구조들의 관계가 평평하다고 상정하여 중심이나 심급 자체가 없으면 post-modernism 등 관념론의 계보가 된다.



이것이 본문 주제와 관련하여 가지는 함의는, 결국 구조주의 내부에(서)도 유물론 전통과 관념론 전통이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제3논점의 실질적 의미이고 이런 점에서(는) Althusser는 유물론적 구조주의 계보, Lacan은 관념론적 구조주의 계보를 각각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Saussure(~Lacan)의 영향으로 언어/언설/담론 중심(주의)적이었던 구조주의는 관념론적 (초기) 구조주의,

이후 이에 대한 Althusser 주도의 본격 반성과 비판으로 개시된 변형기의 1단계가 유물론적 후기 구조주의, 2단계가 구조=체계=장치들 간 차이의 강조( : (이행기 또는) 전기-탈구조주의)와 아예 그를 넘어 관계 자체를 무시하고 구조주의 전체를 폐기하며 완전히 절연하는 (3단계) (후기-)탈구조주의기(/postmodernism)~비구조주의기)로 (구분해) 계보화해 볼 수 있다.


구조주의 계보에서 Althusser가 가지는 비판/이탈의 의미는 '이질적 구조(들)의 발견'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질적 구조'란 바로 Cremonini의 후기 작품들이 극명하게 가시화한 image들에서처럼 단일한 유사~동일성의 동심원 구조 속에 포섭되지 않고 (항상) 그 중심 또는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구조/장치/세계를 말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다시) 두 가지 의미를 가지(며 계보의 발전사에도 추보적으로 반영되)는데, 

첫째는, 그리고 처음에는 대타자로서의 (객관적) 실재계이고/였다가

나중에는(/)둘째로 구조 외부의 이질적 구조'들'로서의 타자 일반(들 간의 차이(와) 관계)의 발견으로 확장된다. 계보사에서는 첫째가 후기 구조주의 또는 (비언어적) 구조주의 유물론이고 둘째가 (전기) 탈구조주의가 된다.


이런 점에서 Althusser는 구조주의의 (실질적) 마지막 사상가이자, 탈구조주의의 아버지, 그 입구였다는 점에서 후기 구조주의자로 명명하는 것도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는 더 엄밀히 말하면 Cremonini적 후기 구조주의, 즉 유물론적 구조주의에서 이후 구조/체계들 간의 동심원적 유사~동일성 보다는 차이와 그 마주침으로서의 중층 심급을 강조하는 (전기) 탈구조주의로 이행해 나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탈구조주의는 구조와 체계들 간의 무차별적 평등/등가성 주장을 통해 n개의 과학론 등으로 나아가는 (언뜻 평화로워 보이지만 결국 어느샌가 신자유주의 같은 죽음의 덫에 빠지게 되는) 몽롱한 다원주의, 상대주의, 주관주의적 관념론들과는 달리 비록 (중층적) 복잡계를 구성(하지만 그러)할지라도 이들간의 ((비유적 의미를 포함하여) 특히 질량/중량-)비대칭/비등성가성으로부터 야기되는 엄밀, 엄정한 (말 그대로) "심급" "관계"에 대한 추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충실한 유물론(적 탈구조주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과도하게 단순화된 상상적 동일성 사고로서의 형이상학으로 부터 이탈과 탈주를 가능케 해줬던 결정적 요인은 (Alrhusser의 ((Marx주의적) 유물론에 깊이 새겨진)) 현실주의/실재론 (정신)이라 말할 수 있다.



(   그리고 바로 이 점에 Marx(주의)적 현실주의 실재론(으로서의 유물론)에 의해 철저히 재해석, 재전도되지 못한 Hegel주의( 변증법)의 핵심 문제도 같이 놓이게 된다. 왜냐하면 헤겔의 모순은 외관상으로는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어서 서로 구별되는 것같지만, 각 모순은 절대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소외의 계기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지위를 부여받으며, 결국 모두 절대이념에 환원된다. 헤겔 변증법에 자리잡고 있는 이러한 단선/평면적 모순개념과 '표현적 총체성'은 결국 각 심급들을 하나의 원리나 심급에 환원하는 환원주의를 야기할 뿐이다. 헤겔 자신은 한 사회의 구체적 영역들의 수준에서 어떤 지배적 모순도 인식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모든 수준이 그 총체성의 통일적 원리에 비추어 동등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주어진 상황의 복합/복잡성을 비대칭/비등가적 구조들의 심급들로 파악하지 못하는 Hegel주의 변증법 자체는 본질적으로 관념론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소위 '차이의 철학들'은 역사의 특정 국면에서 분명 진보적 긍정성을 갖는다. 다만 언제나 차이=진리 ↔ 동일/보편=폭력적 포섭의 형이상학이라는 절대화된 단순 도식이야말로 진정한 형이상학적 이분법의 적자라 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A.2.2. 보조/연장 가설

(이런 점에서 post-modernism(의 본질)을 자유주의 좌파의 관념론적 탈구조주의로 파악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무방할 수 있다 하겠다.)


((문제는 Lacan의 구조주의인데, 그는 ((제1논점과도 연관하여)) 원환의 구조 동일성을 강조하는 초기 구조주의와 (제(2+)3논점으로부터) 구조 중심(에 참조점=누빔점)이 없거나 모든 구조들의 관계가 평평하다고 상정하여 중심이나 심급 자체가 없는 post-modernism을 계통적으로 연결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Lacan))                 : 약한 가설

(post-modernism):중간 가설




  참고로 Zizek은 최근 저서 『Less than nothing』 ( 국역 : 『헤겔 레스토랑』, 『라캉 카페』)에서 Heidegger→Derrida→Lacan→(신)신-Hegel주의에 이르는 독특한 계보 가설을 제안했는데, 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Lacan주의와 Hegel주의를 연결/접합시키려는 그의 노력에 (Lacan주의의) (탈)구조주의적 계보(/)요소를 '차이의 존재론'으로 본격 추가 도입해 Hegel주의의 약점을 극복하려는 시도로 이는 본 토론회 주제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현상학→(그에 대한 비판 그러나 결국 관념론적 계승으로서의) 기호학→언어학적 구조주의 (정신분석)→다시 Hegel주의로 이어지는 철저한 관념론의 계보로는 결코 Hegel주의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고 성공적으로 구원해 내기가 그리 쉽진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 근거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a. 무엇보다 Zizek은 여전히 Lacan : Althisser 논쟁을 핵심으로 하는 (구조주의의) 계보에 대한 (역전된) 오해를 기반으로 그의 철학적 계보학을 전개하고 있고,

b. 이러한 (탈)구조주의 계보(의 도입)를 통한 Hegel주의의 비판과 개조/극복은 Althusser가 이미 그의 지적 생애 전반에 걸쳐 당시 (좌파) 지배담론이었던  Hegel주의(적 Marx주의)와의 투쟁이라는 과업으로 설정, 전개했던 내용의 반복일 뿐이며,

c. 결정적으로 그 반복에서 '차이 철학'의 전투적 계보이자 적통이랄 수 있는 Althusser-Deleuze로 이어져 온 유물론 전통, 즉 전투적 실재론 계보를 그 영향력에 대한 견제를 위해 의식/무의식적으로 배제해 버린 개악된 반복이라는 이유 등등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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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먼저 정말 웬만하면 이런 글은 쓰지 않는데, 자제하고 자제하다 시국이 하도 악화 일로로만 치닫고 있고, 이 책이 그 학문-사상사적 위치에 비해 국내에서 대중들의 (특히 東京大에 대한) 뿌리 깊은 사대주의로 과대 평가가 증폭되면서 상황 악화의 일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판단하에 올리게 되었으니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각론 상도 많은 오류 사항들이 있지만 각설하고 전체 Frame을 지탱하는 기반 논리축들의 핵심모순 중 정세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항들에 한정해서만 집중 언급키로 하겠습니다.

 



별로 진지한 서평의 가치도 없는 이 책은 일부 무비판적 독자 계층을 구닥다리 2세대 무뇌 페미니스트로 만들어 줄 강력한 입문 장치입니다.




1. 과장된 강경 Gender 2분법의 진영논리


원저자 우에노 지즈코[=上野 千鶴子]는 학문적으로 이미 너무 낡았으며, 따라서 치명적으로는 정체성( 구성(요소들))(에서)의 ’교차(성)[=intersection(ality)]’ 개념{*a} 등을 새로운 방법론과 개념틀로 제공하며 핵심적 발전과 기여를 해 온 Judith Butler 주도 3세대 feminism 등의 연구 성과들을 전혀 뼛속 깊이 체화하지 못한 채 낡고 오형성된 범주적 진영 논리만을 전형적으로 반복 재현하며 모든 주체들을 성별로만 분할해 균질화하는 단순 2분법적 사고를 전개, 강화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깊은 슬픔과 고통, 그리고 그 말할 수 없는 억울함을 층분히 이해하고 또 최선을 다해 함께 싸우려 노력하고 있지만, 이 책은 독자로서의 당신과 한국 사회를 GENDER 2분법에 갇힌 범주적 남녀갈등과 성대결의 진영논리로만 몰고 갈 것이며, 이 낡디 낡은 paradigm의 외국서적을 이제야 읽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명백한 퇴행에 불과한 행위이고 우리( 사회)를 불필요한 극단적 성대립으로 몰아 넣을 뿐입니다.



그 억울한 속풀이, 한풀이와 푸닥거리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 책은 그것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정의롭다 하더라도 지적이나 비판 등 여성에 대한 모든 부정적 견해는 아무리 사소한 것도 전부 혐오로 받아들이는 등 대화 자체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과도한 편집증적 피해망상과 증오심만 갖게 할 뿐, 얄팍한 사이비 정신분석을 넘어서는 진지한 궁극적 원인구조 분석과 대안 제시가 전혀 없어 그냥 문제의 근원은 남성성(의 증명/인증 (행위)) 자체이기 때문에 모든 남성들이 다 구제불가능한 악마들이라 그 어떤 연대나 협력도 불가능하고 노화나 Gay화 등을 통해 더이상 남자이기를 포기할 때에만, 그때 가서는 어떨지 모르겠다는 식의 황당한 관점을 퍼뜨리며, 당신 주변의 모든 남자 사람과 친구들에 대한 밑도 끝도, 무엇보다 출구도 없는 증오와 적개심에 휩싸이게 만들어 우리 모두를 괴롭힐 것입니다. 이런 책을 그렇게나 판매하고 성대결 사태를 이 지경까지 만드는데 한 결정적 역할을 했다면 최선을 다 한, 최소한 조금이라도 책임있는 대책과 답변을 내놓아야 했지만, 최근 방한강연에서조차 선생에겐 정말 답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mirroring에 공식적 반대입장을 강조하고, 비폭력(의 학습)과 평화를 주장한 정도를 다행이라 해야 하다니.....




2. Gender 이기주의


반면 다른 gender들에 대하여는, 물론 비교는 전혀 안 되겠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눈물을 보여선 안된다는 등 자신들의 gender규범 때문에도) 구구절절 표현하지 않고 있을 뿐 나름대로 겪어내고 있을 저마다의 고통들에 완전히 눈 감게 만들면서 "남성도 가부장제의 희생자"라는 구닥다리 2세대의 표준 이론조차 제대로 충실히 구현해내지 못 하고 있는 그야말로 값싼 선동 서적에 불과합니다.



(이런 무책임한 편집증적 선동가에게, 여타 gender들에 행한 여성의 가해 상호성에 대한 자기 성찰 따위까지를 기대한다는 것은.....

그의 Frame에 입각하면 여성에 대한 어떠한 지적과 비판도 모두 심각한 여성혐오이자 폭력인 것은 두 말 할 나위도 없고, 심지어 여성의 자기성찰이나 반성 또한 여성들의 여성혐오이기 때문에 골수 Gender-Narkissist{*b}(로서)의 절대적, 무조건적 자기옹호만이 권장되어야 한다는 meta-messege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동성의 모든 추잡한 욕망과 술수, 거짓말과 가해 행위 등은 전부 삭제하고 사상시켜 완성해낸 여성-gender에 대한 순수 피해자 표상, 즉 순(전무)결의 피해자로서(/)만의 자기 표상은 결국 전도된 (gender) Narkissism으로서의 자기연민입니다.)


이것은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남성 전체에게만 돌리는 그저 체계화된 남성혐오사상일 뿐입니다.



上野선생은 강연에서, 일본에서는 이미 1982년부터 그리고 근래엔 한국은 물론 세계 많은 국가들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여아선호 현상에 대해 그 원인으로 첫째, 남아에게는 교육[과 취업]의 실패가 [사회적으로]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는 막중한 육아 및 교육부담과 둘째, 초고령화에 따른 부양에서의 기대용이성 2가지를 언급했는데 제2원은 아직 ’출가외인’ 문화가 지배적인 한국실정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고, 제1원은 양날의 칼이라서 반대로 남성들이 교육과 취업에서 받는 사회적 압박과 고통의 비교불가능한 비대칭성을 동시에 웅변해주는 분석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반드시 발생할 수 밖에 없고, 또한 앞으로 더욱더 가속점증할 이들 교육이나 취업에 실패하는 많은 수의 남성 문제와 대책에 대해서도 (더구나 사회학자로서는) 당연히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만 上野는 시종일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에게 이들은 그저 적군이고 경쟁자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태도가 독자 대중들을  통해 계속 확대된다면 이들은 곧 극우 폭력세력이나 미치광이 범죄자, terrorist가 되어 우리 곁으로 되돌아올 수 밖에 없는 우리 공동체의 이웃이자 가족이고 친구들입니다. 이런 식의 GENDER 이기주의{*b}적 태도가 계속 된다면 우리는 급증하는 흉악(/)보복 범죄와 그로 인한 극도의 hysteria적 불안과 공포의 일상적 만연, 이를 빌미로 한    테!러!방!지!법!   등 기만적 안전을 표방하는 파쑈 치안경찰국가, 수용소국가의 도래라는 악순환을 결코 막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본격적인 생지옥, 헬조선은 아직 오지도 않았습니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와 끊임없이 반복되는 각종 공사장 붕괴 등 사건사고와 산재 및 인재들, ...세월호, 가습기 살균제 등등 도저히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우리 생활 주변 곳곳에서 호시탐탐 우리의 목숨 자체를 노리며 도사리고 있는 탐욕적 자본의 손길들과 천안함, 연평해전, 일본의 극우보수화 및 재무장 추진과 미국의 적극 방조, 각국의 핵무장 시도와 해상 영토분쟁, 제주 강정 해군기지, THAAD배치, 그리고 이 모든 (동북아) 국제질서의 핵심에 놓여있는 세계경제위기와 그로 인한 미중 갈등 및 폭력화 등등 날로 고조되어만 가는 전쟁 위기 상황 속에서 어느 지정성별이 조금 더 특혜를 받고 있는 것 같다고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타자의 성 전체를 악의 근원으로 마녀사냥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유라 보기 정말 어렵습니다. 그들은 어차피 전쟁 한번 나면 가장 먼저 끌려나가 이유도 모른 채 개죽음 당할 존재들이기도 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더구나 날로 심화되어가는 신자유주의 양극화와 경제위기 속에서 우리 모두는 정도만 조금씩 다를 뿐 그 누구도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고 Gender 상관없이 나날이 한발한발 자살로 인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체제의 희생양이고 구조의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성/gender 차별을 조장하고 지속적으로 재생산함으로써 여러 이득을 보고 있는 배후의 숨은 구조와 진정한 지배자를 찾아내 함께 힘을 합쳐 저항하는 작업이 정말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시국입니다. 어느 한 gender의 힘으로는 그야말로 어림도 없는 일인데다 소모적 상호자기파괴와 더욱 심화된 억압이라는 역효과만 가져 올 2분법적 성대결 사고는 상황을 파탄으로만 몰고 갈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모든 문제의 원인을 언제나 다른 Gender에게만 돌리면서 비난을 일삼거나 그들의 고통은 철저히 무시하고 심지어 다른 소수 gender들은 그 존재 자체도 부정{*c}해버리는 등등 순혈 여성을 제외한 모두가 여성혐오세력(일 뿐)이라면서, 모든 Gender간 협력과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들 뿐 아니라 너무 무책임하게 그런 문제엔 아예 관심도 없는 이러한 극단적 Gender 이기주의 frame의 폐해는 아시는 바와 같이 한국에서도, 전형적 주류남성들에게 뿐 아니라 언제나 고통받는 대표적 성소수자 집단이어왔던 Gay들에 대하여까지 최근 ’똥꼬충’이라는 극악하고 반인권적인 무차별 공격을 감행해댄 일부 자칭 ’페미니즘’ 집단과 이로 인한 내부분열 및 자기붕괴로 잘 드러난 바 있습니다만, 上野선생 자신도 본서에서 이와 매우 유사한 입장에 미련을 두고 있어, 이것이 설령 모든 남성이 Gay화되어 더이상 ’남자’이기를 포기하게 된다 하더라도 연대와 협력은 모르겠다고 말해버리는 너무나 무책임하고 자가당착적인 자기모순{*d}의 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 ’8. 上野 대책의 비판’ 절 참조




3. 정신분석학적 시대착오


上野선생의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오류들을 야기한 원인들 중 다른 한가지는 그가 정신분석학을 본격적으로 따로 공부하지 않고 이 책의 핵심 idea의 거의 모든 것을 그대로 빌어 온 Eve Sedgwick의 저작 속 낡은/초기 Freudian 정신분석학의 껍데기 일부에만 간접적으로 입각하고 있어 이런 Gender 2분법의 오류를 그나마 극복, 수정할 수 있는 정신분석학 상의 사회(학)적 표상인 ’대타자’ 등의 개념이 대부분 도입되어 있지 않고 사안에 따라 서로 다른 체계와 계열의 정신분석학들이 혼종되어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대타자’는 주체의 성별과 관계없이 주체의 지평을 완전히 초월해 있는 MASTER이자 지배자이기 때문에 어리석게 이들 간의 강력한 지배-피지배와 억압-예속 관계, 그리고 철저한 위계와 서열 관계 등은 전혀 보지 못한 채 동일 평면 상에서 뒤섞어 혼동해버리면서 모두 지배자 group으로서만 추상한 ’남성 연대[; homo-social]’ 같은, 비현실적 상상을 차단해 주는 필수적 개념틀입니다. 사회는 이 대타자가 지배하는 상징계에 의해 질서지어지는 것이지 上野계에서 생각하듯 "서로를 남자로서 인정한 남성들의 유대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시겠지만 이 ’대타자’는 인격체조차 아닙니다. 도처에 무수한 권력망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 복잡계 Network의 시대에 차별과 폭력의 Cartel로서의 권력체계는 원시부족 때처럼 그렇게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습니다.{*a}


Levi-Strauss 인류학은 현대사회에서 allegory로 해석하면서 (고도)추상화 등의 변형작업을 거쳐야지 단순하게 직접대입하면 본서에서와 같이 우습고 황당한 결론으로 빠져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j}




4. 성차


이 외에도 생화학적 성차와 정신분석적 성차, 사회문화적 gender차 간 (엄밀한 구분과) 괴리, 불일치에 대한 골화된 사유감각이 부족하고 복잡한 주체의 성차화 mechanism에 대한 숙고도 없어 (주로 일본어 해설소개서들을 통해 파편과 일단을 전혀 접하지 않은 것은 아닌 듯 보이지만) 결국 본서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관점은 해부학적 생물학주의 2분법과 실질적 차이가 없이 성별은 그냥 의심할 수도 변경할 수도 없게 주어진 사고의 출발점이자 대전제로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기에 성차(화)는 주체 간 작은 switch에 불과{*e}하다는 식의 Lacanian 정신분석학과 그에 기반해 전면화된 3세대 feminism{*f}의  진보와 발전의 흔적이 실제적으로 용해되어 있지 않음으로써 이렇게 극도로 과장된 고정성별관념이 2분법적 성대결 구도를 끊임없이 촉발, 자극하고 고착, 강화하는 전형적 2세대 사고의 답습을 보여줍니다.




국제 Feminism 운동이 일찌감치 2세대를 넘어 ’여성 없는 feminism’을 표방하는 3세대로 대체된 데에는 치열한 실천과 절실한 이유들이 있었고, 이러한 2세대 feminism이 몰고 왔던 각종 폐해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처절한 반성과 피땀흘린 극복 노력이 있었던 결과인 것입니다.




5. ’혐오’ 개념


사실 이 책의 핵심적 방법론은 다른 게 아니라, 피해를 강조하기 위해 종국적, 영구적 추방과 축출을 목표로 하는 격렬한 극단 감정으로 정의되어 있는 ’혐오’라는 개념을 그와 전혀 상관없이 ’비하’나 ’차별’ 정도를 의미하는 매우 느슨한 자의적 정의만으로 출발해 수시로 은밀한 재정의를 반복하며 무책임하게 남발하다 결국 ’타자로서 대우하는 행위 전체’라는 배후 의미로 최대(한) 일반화시켜 ’남성성 (증명)’과 동일한 의미로까지 확장함으로써 모든 gender간 관계들을 전부 ’여성혐오’로만 환원하고, (권말에 이르면)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결국 ’남성성’ 그 자체라는 결론으로 치닫고 마는 ’개념 마법’ 뿐입니다.




6. 무동기-무조건적 여성혐오 model과 현실-현대적 수정 model


이 외에도 이 책이 기만하고 있는 현실관계들로는 모든 여성들과 특히 여성성이 그 자체로 배제되는 것처럼, 또는 적어도 대다수의 여성들이 그러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사실은 ’이 model과 실제 사회( system)’ 내부로 결합/편입/수용되고 있는 여성들의 인구가 이 책이 과장하고 있는 묘사에 비해 너무나 많다는 점, 이 Sedgwick-上野 model에선 결정적으로 왜 동성(성)은 선택되고 이성(성)은 혐오, 배제되는지 필수, 필연적 동기와 이유도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 또 실제/실재적으로도 사회가 전혀 여성들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고에서도 누누히 밝힌 바와 같이 오히려 필수적으로 더 많은 여성들에 의존해서 그들(의 유/무급 노동(력))을 적극적으로 착취, 수탈해야만 유지될 수 있다는 점 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도/이 때문에도 이 model은 다음과 같이 결정적으로 수정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즉, 여성이라는 사실이나 여성성 때문에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여성이 자신의 여성성을 (극대화하여) 증명하거나 또는 반대로 (上野가 ’출세전략’이라 칭한, 그러나 ’(명예)남성화 전략’이라 칭해야 하는 바) 자신의 여성성을 억압하고 대신에 (남성성,) 특히 노동력과 생산성을 증명하는 전략으로도 얼마든지 받아들여지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본서에서처럼 아무 이유없는 성별에 따른 (무조건적) 배제 모형, 즉 남성성은 수용하고 여성성은 혐오하여 배제시키는 모형보다, system이 그 편입 조건이자 관문과 채널로서 남녀 공히 각 gender들에게 서로 다른 편협하고 차별적인 gender 규범, 편견과 고정관념, 이상형을 부과, 요구하고 있는 모형으로  이를 통해 그 구체적 규범과 (선입)관념들을 밝혀내고 위계와 차별성을 비판하며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론 체계입니다. 이 긴급 수정된 model이 그나마 훨씬 더 현실적일 뿐 아니라 3세대의 발전(내용)에도 근접합니다.



따라서 이 수정 model을 위 §3절의 대타자에 의한 상징계 model과 통합하면, 이 강고한 상징계 지배질서에서 자리/’의자’ 하나를 어떤 주체에게 할당해 줄 때 그것은 막연히 그 성별에 의해서만 낭만적이고 자동, 범주적으로 편입/배제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 철저한 계산에 의해 개별 주체 하나하나를 최대한 이용하고 뽑아 먹을 수 있도록 복잡하고 중층적인 자리들의 체계 안에 배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정말로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이 계산서의 내역과 계획, 그리고 그 (작성 등의) 절차와 mechanism을 규명하고 해체나 대체할 방법을 찾아내는 작업이지 동기도 해명 안되는 성적 연대와 배제라는 뿌연 안개 속 낭만주의 원경화 한 장 손에 들고 분노와 적개심에 치떠는 광기가 아닙니다.




7. 중간 요약


이상의 모든 문제점들은 Gender 2분법과 그에 기반한 여성-Gender 이기주의 및 Narkissism(의 결합)으로 요약되는데 이것, 특히 여성-Gender 이기주의야말로 결과적으로 분리주의 등 대부분의 2세대 feminism들을 포괄적으로 기타 세대 feminism들과 대별시켜 주는 가장 큰 특징이 되어버렸고 후사건적 역사해석에서 2세대 feminism의 가장 결정적 퇴행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이 이기주의와 Narkissism은 분리불가능한 동일체의 양면에 불과한 개념쌍이고 자신의 모든 욕망과 술수, 잘못 등은 전부 사상시켜 만들어낸 여성-gender의 순수 피해자 표상은 결국 전도된 (gender) Narkissism으로서의 자기연민입니다.




8. 上野 대책의 비판


이 엉성한 이론은 자연히 대책에 있어서도 남성(성)-포기 등 그 자체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망상적 요구로만 귀결될 뿐 아니라 설령 모든 남성들이 남성되기를 포기한다고 해도 문제가 결코 해결되지 않는, 논리적으로 해가 있을 수 없는 Frame이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東京大교수라던 그가  이렇다 할 대안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근본적 이유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망상 속에서나마 모든 남성들이 남성이기를 포기한다 해도 이번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여성혐오가 이미 모든 여성들 속에도 깊숙이 내재해 있고 사회 전체에 공기처럼, 중력처럼 퍼져 있는데 우리가 무슨 짓을 한들 도대체 어떻게 없앨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편집증적 피해망상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 어설픈 염세주의적 세계혐오 정신분석이 말하지 못하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진실이 있는데 그것은 대타자와 (남아/남성) 주체 간에는 동일평면에서의 유대가 불가능한 지배- 예속 관계일 뿐 아니라 또한 그 예속 주체에게는 대타자-살해라는 강력한 욕망도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대타자에 의한 인구 대다수의 주체화 과정은 ’남성’이라는 "성적 주체" 로서의 인증과 homo-social에의 편입을 통한 유대/연대가 아니라 ’거세’ 후 상징계에의 진입/배치를 통한 예속/식민-주체화입니다. (따라서 Freud에서도 이미 자궁 속에서 거세되어 나온 것으로 상정되는 여성/여아와는 본질적으로 별 차이도 없습니다.)

그런데 上野가 남성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매우 ironic하게도 남성(되기) 포기하기, 역시 거세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대타자, 즉 가모장(주의 fascism)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게다가 이 가모장주의 fascism과 여성-gender 이기주의에서 더 황당한 건 이 거세가 가부장 대타자에겐 ’상징적 거세’일 뿐인데 上野선생은 그야말로 ’실질적 거세’, 생물학적 거세까진 아니지만 화학적 수준의 거세를 요구하며, 더구나 이런 거세남들이 ’초식남’ 등의 이름으로 현실에 출현하자 선생 스스로 증언했듯 "아..막상 실제로 보니 남자답지 못해 별로 (성적) 매력을 못 느끼겠네"라며 (여성들이) 외면하고 무시하며 돌아서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선생도 자신의 이론적 요구가 그대로 이루어진 이러한 사태와 그 미래에 대해선 (그래서) 너무나 무책임하게 "그것은 어떨지 모르겠다"고 말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上野 이론이 퇴행적인 이유는 동계의 분리주의 등 여타 2세대 feminism 분파들에서는 Sedgwick처럼 여성들의 homo-social과 homo-sexual 연속체로서의 Lesbian 공동체 같은 탈주/도피 노선이나 여성권력에 의한 남성권력의 견제와 균형 (또는 초극단주의에서 ’대체’) 등 그래도 현실적 대안을 추구하는데 반해 上野는 바로 이렇게 오분석된 문제의 근원으로 인해 남성성 자체의 포기 등 황당한 요구를 무책임하게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9.  삼각구조의 회전과 바꿔치기


문제는 동일한 (신)성가족 3각형의 구조 자체에서 끊임없이 파생되어 나오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구조는 그대로 둔 채 구조 내에서 요소와 인자들의 성별이나 자리 바꾸기만 반복하려는 (이런 2세대적) 사고방식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이것이 한 columnist가 언급했다는 " 무뇌아적 Feminist들이 구조는 그대로 둔 채 남성들만 공격해 권좌에서 끌어 내리려 한다"는 지적의 또 다른 숨은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명한 3각 구조도 사실은 어머니, 아버지와 중성/무성적 자식으로 구성되나 上野(계) model에선 아무 이론적 근거도 없이 이 3각 구조가 은밀하게 회전하거나 모두 동료/동년배들로 혼합(/)대체되어 있는 것도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여전히 준거점=권력자(이자 동료로서 결합된 2중체)이면서, 그와 함께 내부/중심의 상위에 있던 어머니만 어느새 완전히 사라진 채 처음부터 언제나 항상 외부 하위에만 있던 타자 여성으로 대체되고 이것이 논점의 은밀한 일탈을 은폐합니다. 이러한 눈속임을 통해 도대체 왜 아버지가 자신의 연인이자 아내인 어머니를 쫓아내고 아들만을 선택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 소문난 딸바보들이 너무나 애지중지하는 딸자식은 왜 내쫓고 아들만 남겨 놓았는지 등등을 설명해야만 하는 책임으로부터 도망쳐 숨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사실, 현대/후기근대 핵가족의 회전 3각구조에서는 특히나 오히려 돈-벌어-오는-기계로서 친밀한 가족관계와 소통에서 소외된, 손님같은 실각한 아버지가 아니라 가족/가정 전체의 총지배인인 어머니가 이 3각형의 최상위 정점을 차지하고 있거나 적어도 최소한 ’아버지-어머니’쌍이 수평-대등한 윗변을 형성하는 평행4변형이나 능형 등 4각((형)을 구축하는) 구조가 대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만약 권력자 없는 완전한 동년배 모형이나 (친모계) 융합 2중체 모형이었다면) 딸의 3각 구조에서는 역으로 자신과, 준거 동성이나 동료/친구 , 그리고 외부 남성으로 구성되어 역전된 거울 권력 구조가 되므로 반대로 그 남성 1인이 끊임없는 여성집단 내 공동평가와 비교, (뒷)담화의 객체와 대상이 되고 종국적으로 선택 또는 배제 당하는 약자의 위치가 됩니다.)

▶{ 연구자용 Memo 3 (((& *j))) }




10. 따라서 남겨진 우리의 전략적 과제라면 차라리 다음과 같은 문제를 다루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gender/성별 2분법의 공고화와 대항/거울 성별부족 결집이라는 심각한 역효과를 감수하면서 여성부족 (/) Network 강화 결행을 통한 체제 내 불평등만의 보정을 시도할 것인가, 아니면 보편주의 성평등 교육과 성범주교란 교육에 집중하면서 아예 성별 체계 자체와 동성 부족들을 뒤흔들고 해체하는 작업으로 직접 이행할 것인가?

양자 모두 (각 세대의 합리성을 대표하며) 각자의 장점과 단점들을 가지고 있는 방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11. 식민주의 지식유통


마지막으로 이 낡아빠진 사이비 정신분석과 그에 기반한 2세대의 극단주의 feminism이 어떻게 Sedgwick과 上野를 거쳐 2016년까지 살아남아 한국이라는 변방에서 때늦은 돌풍을 일으키며 이렇게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는 정말 탈식민주의 지식생산양식 연구 상에서도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고 보여집니다.

이제는 제발 지금 여기의 우리를 우리의 힘으로 분석한 사유들이 bestseller가 되고 행동의 제1준거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2010년대 중반에 갑자기 다시 심화된 여성공격은 원시부족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원인과 구조, 작동 기제에 의거해 직접적으로는 경제위기에 의해 추동되고 있으며 따라서 막연하고 초역사적인 추측과 대책이 아닌 정밀한 고유의 해법이 요구되는 문제임은 너무나도 명확하고 이것은 그리 어려운 분석도 아닐 뿐 아니라 이미 많은 결과물들도 안 나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결론 >>


1. 총 요약


요약하면 이 글은 여성과 (성)소수자들에 대한 만연한 폭력과 차별, 무시비하라는 현실을 부정하는 글이 전혀 아닐 뿐 아니라 그 심각한 구조적 성차별과 물리적 폭력, 문화적 비하 등의 현실에 대하여는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음을 전적으로 인정하지만, 그럴수록 막연한 연민과 공감/동정이나 광적 분노, 반사적 증오보다 문제의 가장 빠르고 확실한 실질적 해결을 위해 적확한 대응책을 도출(가능하게 )해 줄 정밀한 원인구조분석이 더욱더 중요하다는 견지에서, 그러나 본서와 같은 접근법은 낡은 전형적 gender 2분법에 기초한 여성-gender 이기주의 및 Narkissism의 진영논리로 성대결만을 부추길 뿐, (그로 인해 더욱) 숨은 구조의 원인분석, 현실적 대안 창출을 통한 문제해결과 무엇보다도 이를 위한 성/gender 간 대화와 협력을 어렵게 하고,  게다가 피해를 강조하기 위해 ’혐오’라는 개념을 무책임하게 남발하며 모든 gender간 관계들을 전부 ’여성혐오’로만 환원하고 있는 등의 문제점들 때문에, 결정적으로 책임감있는 현실/실질적 대안(제시)도, 검증도 불가능한 상상적 추측에 불과해 차라리 신화나 신앙에 가깝다는 점 등은 또한 반드시 지적되어야만 할 본서의 치명적 오류들 중 일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해를 방지하고자 논지를 더욱더 간명화하기 위해 비유로 예시하면, 전라도가 체계적 지역차별에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부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강조될 필요조차 있음을 적극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문제의 모든 원인이 ’경상도민 연대’로서의 화랑도이고, 경상도 (사람들) 자체이니까 중앙정부나 권력구조, 사회체계 재편이 아니라 경상도민들 전체와 그 하나하나에 대해 경상도민이기를 그만둘 것[=경상도에 거주하지말 것~경상(스)플레인{*g}이며 아주 공격적이고 화난 것처럼 들리니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 말 것 등등]을 강요하면서 시장통에서의 개싸움을 부추기는 것도 모자라 전라민국 (분리)독립운동을 선동하(거나 만나본 적도 없는 서양인들을 일방적으로 이상화한 싸구려 fantasy를 퍼뜨리면서 이들과 손잡고 경상도를 물리치자{*h})는 식의 시대착오적이고 생각없는 유사과학에는 반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i}

이러한 상황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차별관계에서도, 원청노동자와 하청노동자, 좀 거칠게 말해서 남성화된 유급노동자와 모든 여성화된 무급노동자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정시기 가부장제 하의 개별가정에서 완전히 실권했던 일부 비참한 극단적 가정주부들은 최종고용주의 무급하청노동자라 할 수 있음.) 

이 모든 경우에서 차별과 불평등의 원인이자 최종 책임자인 고용주는 화살을 피하기 위해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며, 어차피 구조조정이란 미명하에 대대적인 인원감축도 해야하는 마당에 그들끼리 서로 싸우다 죽어버리기를 바라지 함께 단결해 자신에게 도전할 것을 언제나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장막 뒤에 숨어서 점잖게 중요한 순간 마다 상호 분열과 대립을 조장할 고의적 차별 장치들 몇가지만 신설 배치 조정하고 있는 MASTER PUPPETEER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런 현실을 전혀 보지 못한 채 결국 공기나 중력처럼 세상(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여성혐오’일 뿐이고 반면 ’남성혐오’ 같은 건 있을 수도 없다는 식의 초극단적 여성이기주의에 불과한 잘못된 사상이기 때문에, 이런 어설픈 주장을 계속 하면 당연히 사회 곳곳으로부터 이를 지적하고 수정, 반대하려는 반발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데 이 上野적 세계관에 의하면 이것이야말로 다시 ’여성혐오’이기 때문에 (이번엔 진짜 극우여혐세력 뿐아니라 중도나 상당한 우호집단들까지 여혐세력으로 만들거나 몰아감으로써) 결과적으로 이런 주장을 하면 할수록 여성혐오가 줄어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심해질 수밖에 다른 가능성이 없게 되는 그런 논리구조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2. (무뇌페미를 넘어선) 대안적 feminism들


따라서 이와 같은 치명적 오류들을 내포하고 있는 본서에 비한다면 신간 서적들 중에는 차라리 약간의 비판을 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한두 편을 제외하면 진지한 서평의 가치가 충분하고 gender ’혐오’ 문제를 둘러싼 최신 Feminism들의 다양한 경향들과 관점들을 보여주고 있는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가 낫고, 그보다 『젠더와 사회』나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은 더욱 훌륭하며, 그러나 이상의 문헌들이 FEMINISM을 구성하는 여러 관점과 입장의 feminism들을 망라해서 보여주는 장점 때문에 동시에 낡은 2세대적 관점들도 여럿 혼합되어 있으므로 이후 반드시 Judith Butler의 여러 저작들, 『젠더 트러블』{*k}과 특히 최신 번역서인 『젠더 허물기』 등은 어느 분파이든 필히 읽어야만 할 필독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서적들도 완벽한 해답은 못 되고 여러 난점과 문제들을 안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3세대 feminism도 벌써 그 생명력을 다 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최소한 이것들을 비판하고 극복하면서 우리 모두를 위해 더 나은 대안과 살 길을 발명해내려는 협력 작업은 현재="동시대"의 국제적/지구적 사유 최전선에의 동참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력이 되신다면 설득력도 떨어지며 지나치게 광범하고 평면화된 과도한 일반화를 넘어서, 이런 (검증도 안되는) 어설픈 관념적 정신분석{*j}보다는 (문화)정치경제학을 전투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여성권력강화를 위해 훨씬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할 것이기에 이를 적극 권장합니다.
특히 탈식민주의 제3노선이라 할 제 생각과 너무 똑같아 정말 깜!!놀!!했던 Maria Mies[=마리아 미즈] Sylvia Federici[=실비아 페데리치]의 책들은 가사노동과 성노동 등 여성경제의 거의 모든 문제도 다 포괄하고 있어 여성과 Feminist들을 위한 정치경제학 입문으로는 너무나 훌륭한 성경이 되어 줄 것이며{*l}, Gibson+Graham[ 현재까지 국역서는 깁슨-그레엄으로 『그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 깁슨-그레이엄으로 『타자를 위한 경제는 있다』 ]도 (개인적으로는 최선이라고 생각진 않지만{*l}) 역시 이런 점에서는 실질적 대안 경제학 입문으로 좋고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m}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은 그 연장선에서 포괄적 문제들에 대한 종합적 입장을 안내해 주고 있어 반드시 검토해 주시기를 강력히 권장드립니다.
특히, 최신간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은 가부장제, 정체성-정치, 특권 이론, Queer 이론, 이중체계론, 교차성, 사회재생산 등 현대 Feminism의 다양한 이론들과 임신중절권, 가사노동, 외설 문화와 영상, 성매매 등 쟁점들을 포괄하며 Feminism의 역사와 현안들에 대한 Marxism계열로부터의 최신 분석과 대안들을 알기 쉽게 제시하고 있는 가장 따끈한 Guide Book이기에 필독을 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P.S.1}



3. 무엇을 할 것인가? 대안-품행들을 위한 첫걸음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목표도 전략전술도 전선도 그야말로 그 무엇도 없는 (Online) 백병전, 아니  진흙밭 개싸움 같은 개별 이성들을 향한 소모적 욕설전쟁을 멈추고, 『여혐혐』처럼 (그 이성들도 반대로 훨씬 더 한 역피해도 충분히 겪어 봤을 법한) 시시콜콜하고 편집증적인 피해의 고문서고들과 뒤섞인 평면화된 피해목록 말고, 가장 심각하고 실제적인 여성들만의 피해와 그 해결을 위한 통일된 구체적 요구를 남성들과 사회에 반드시 달성해야 할 전략적 목표로서 (제도적, 정책적 과제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서로 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이 욕설전쟁은 서로에 대한 증오감정만 더 증폭시켜 SNS 상 여혐발언이 ’mirroring’ 이후 오히려 연간 9배 폭증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거울관계의 어설픈 Vulgar feminism은 일베충들의 여성공격이 현재의 feminism을 결정적으로 자극했듯이, feminism이 싫어 ISIS/L로 떠났다는 김군처럼 다시 일베 등을 구심으로 똘우남들을 모아 단결시키는 역효과만 가져 올 것입니다.
부디 누구보다 악바리[ <악발이]지만 결국엔 (아무도 그 소리를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 너무나 무력하고 왜소한 양아치(,) 욕쟁이 할머니가 아니라  지혜롭고 용감해서 저절로 믿음이 가는 Feminist 전사들이 되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모든 것들을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인기도서 한두 권의 개인적 독서가 아니라 주변의 친구, 동료들과 함께 On/Offline에서 지속적 (Feminism) 학습, 토론, 강의, 활동을 위한 모임들을 결성하고, 모임들 간 Network과 연대를 조직해 여성-(성)소수자 정치권력화를 향한 대장정으로 부단히 나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장 시급하고 절박하며 또 강력한 첫 번째 고지는 권력, 특히 제반 사회변화를 위한 권력의 핵심 중 핵심이라 할 입법권력의 장악을 위해 (먼저 각 지지정당들에 대한 압박으로부터 출발하여) 최소 50% 이상으로 육박해가는 ’국회의원 및 각급 지자체 의원(후보) 여성 및 성소수자 (/) 성평등 강제할당제 ’ 도입 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당장 한 표가 아쉬운 야권 내의, 사활적 대당관계에 있으면서 특히 여성 친화적인  두(세) 정당만을 대상으로 더욱 경쟁을 유도하여 더 많이 더 빨리 할당제를 구현하는 정당에 합심 몰표로 판도를 바꿔주는 방법을 반복하면 높은 수준의 할당제가 정당 체계 전체로 확산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성패와 속도를 결정하는 것은 당연히 여성 투표의 결집도가 되겠지만 요즘같은 Online 백병전의 열정과 energy라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입니다.{*n}








그럼 건투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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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석  >>



{*a} 

개인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의 교차와 그에 따른 소속집합(/)범주들의 동시 중첩에 의해 복합적으로 구성되는 하나의 매듭으로서의 정체성의 양태.

사회 전체에 촘촘히 얽혀있는 복잡한 거미줄 같은 차별과 폭력의 그물망이 바로 이 ’교차( 정체)성’에 대한 검문의 체계를 통해 중층적으로 행사됨.



{*b} →$’7. 중간 요약’ 절 참조.



{*c} 강경한 gender 2분법

上野 (2012 : 37~39) 



{*d} Gay 공격의 근거 사상




{*e} 

Freudian 정신분석학에서는 ’남근’이 문자 그대로의 생물학적 남근을 가리킨다면, Lacanian에선 상징적 남근, 즉 상징 자지를 지칭할 뿐이며 남녀 간의 생물학적 성차 또한 무시되고 ’주체’ 개념으로 통일되는 근본적 시대상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f}

실제 Judith Butler의 debut작이랄 수 있는 Gender Trouble에서는 표피적으로는 Lacan 계열의 ’여성 가면론’에 대한 부분비판과 Freud 부활을 시도하는 장이 있는데 이는 그야말로 부분적 시도일 뿐 드러나지 않은 3세대 paradigm의 거대한 심층 기저에는 (최근작 중 하나인 『젠더 허물기』에까지 계속되는  이러한 현대적 전환(으로서의 (특히) Lacanian paradigm)에 대한 노골적 검토(와 대결시도의 gesture)가 놓여있음을 부정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다.



({*g} 경상(스)플레인

이 주제엔 별 관심도 없고 이하는 경미한 제언 정도에 해당하나 잠깐 관찰한 바에 의하면, 최근 대부분의 gender 간 대화와 협력을 파탄내고 있는 남성 공격의 제1 menu가 ’(여성) 혐오’라면, 제2 menu로 거뜬히 등극한 것은 단연 ’(mans)plain’이라 할 수 있는데, SNS에 거의 상주하고 있는 듯한 한 여성의 정리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가 SNS 대화를 하고 있으면 다른 여성이 나타나 "그건 mansplain!"이라 지적하고, 이에 남성이 발끈하며 대화가 종료되는 예외없는 pattern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하므로, 말 나온 김에 짧게만 첨언하면, 그 훨씬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강조해왔듯, (몰-화자적인) 정보-지식 및 사실의 보고 취합과 교류, 그리고 직설적 문제해결은 대부분 남성화법의 제1목적이고 여성화법과 달리 여기서 공감과 동의[; 소위 ’우쭈쭈’]는 거의 언제나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권력관계에서 자유로운 현상은 전혀 아니지만, 그렇다고 feminist들의 오해처럼 완전히 지식-권력 과시와 상대 비하로만 보기도 어려운 측면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인식은 전체로서도 본원적으로 불완전할 뿐 아니라 개인들의 인식은 너무나 제한적이고 분산돼 있기까지 하므로 우리는 모두가 서로를 더 열심히 가르치고 모두가 서로에게서 더 열심히 배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가르치려는, 또는 보고 행위 자체만으로 거부감을 갖고 차단하는 것은 종국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mansplain이 기분 나쁘다면 욕하고 싸우기 보다 대신 더 줗은 지식과 지혜를 더 열심히 가르치려 하는 방법이 서로의 발전을 위해서도 더 나을 것으로 보입니다.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욕설과 개싸움이 아니라 이렇게 형성된 설득과 동의, 인정에 기반한 대안 Hegemony가 여성 gender와 소수자 권력의 강력한 토대가 될 것이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h} ’양남’ 찬양론 

서양백인들은 그 십자군전쟁과 남북 America 원주민 말살, 반인간적 흑인노예무역, 제국주의와 세계대전 등등이 잘 보여주듯 인류역사 상 가장 폭력적인 남성성의 현신이었으며 이들은 이미 Viking 등 게르만 제민족의 시절 때부터 거의 언제나 약탈강도와 강간, 살인을 일삼는 전쟁 상태에 있었고, 현재도 上野선생이 방한 시 전한 ’160519일 발생 20세 오키나와 여성 납치강간살해 사건처럼 미군에 의한 현지여성 강간살해사건들은 주둔국들 최대의 사회문제 중 하나이어 왔음을, 미국 본토 내에서도 총기난사 사건들과 더불어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심각한 인종차별은 흑인차별이 아닌 유색인종 차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점잖기만 한 듯 했던 독일인들이 순식간에 유색인종 말살에 혈안이 될 수 있음도, 역시 Fascism의 고향 Italia에서의 최근 이별통고 여성에 대한 차내/차체 방화살인사건과 함께 늘 상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너무 웃프게도 ’양남’ 찬양론자들은 자신들을 결코 유색인종에 포함시켜 생각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음. 이런 Meta 인지 능력은 자기 객관화와 타자화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데 上野류에 따르면 이런 객관화, 타자화 자체가 곧 혐오이므로 자기객관화란 여성의 자기혐오만을 뜻하게 되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하고 따라서 이런 Meta 인지는 발달하지 못한 채 결국 항상 다시 Narkissism으로만 인도되어 자신에 대해서는 언제나 예외적인 유아 사고만을 하게 되며 그 고질적 역사 건망증과 복합돼 바로 자기 자신이 양남들에게는 이런 경멸과 폭력의 표적이자 장본인이란 생각을 도저히 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설령 그 폭력의 화신들이 매우 기적적으로 개과천선해 요즘 좀 신사흉내를 내느라 용쓰고 있다 쳐도 전혀 아무런 근거없이 막연하게 그들이 백인여성들을 대할 때와 자신을 대할 때 완전히 동일하게 행동할 것이라는 fantasy의 fantasy를 상상하고 있음.

그러나 만연한 길거리 성폭력 현실을 다룬 인기도서 『악어 프로젝트』가 소위 문화의 세계중심이라는 FRANCE를 고발한 책이란 걸 잊지 않는다면, 당신이 전해 들은 짧은 Europe 여행 경험담 속 신사들은 단지 그 여행객이 유색인이라 쳐다보지조차 않았던 것일 수 있음.)




((({*i}

또한 ’꼴페미’란 바로 이런 류의 주장들을 너무나 무책임하게 남발하거나 아무 생각없이 적극 동조하는 사람들과 그 vulgar feminism을, 응급상황에서 충격적 효과가 필히 요구될 때만 극히 제한적으로 비칭하는 수사적 용어임.)))



{*j}

(실패한) 정신분석은 현대의 세속종교에 해당하고 특히 上野 분석의 이 경우는 그야말로 점쟁이 보살이나 무당의 살풀이 굿판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上野 Text를 되살려낼 수 있는 유일한 CPR[=심폐소생술/인공호흡법]은 뒤집어 이 책을 allegory로서 역독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저자의 의도를 배반하면서 ’남성’과 ’여성’을 "남썽"과 "여썽"으로 읽고, 소수의/상위 ’지배자( 동맹)’ 대 ’(모든 )피지배자’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k}

2세대 feminism(의 폐해)에 대한 반성과 그 전복 및 해체를 직접적 주요 동기로 하여 저술된 『젠더 트러블』은 이런 점에서 그 파괴력이나 전복력이 가장 크고 또 그만큼 가장 유명세를 떨친 출세작임이 분명하지만, 입문자들에겐 꽤나 난해할 수 있기에 이해가 보장되지 않고, 내용에 대해서도 이후 많은 논의 전개가 있었으므로, 명징성과 파괴력은 다소 떨어지나 논의에 대한 Butler의 답변과 이후의 발전 및 자기정정을 담고 있으며 가독성도 좋아진 『젠더 허물기』도 입문용으로는 적극 추천됨.



{*l}

단, Maria Mies 등은 대안경제에 있어 지나치게 자립과 자급만을 강조하면서 결과적으로 고립주의노선을 강화해 나가는데 이는 Foucault에 관한 졸고들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명백한 anarcho 경향으로 (재생산의/을 포함한 포괄적) 사회화와 공통되기 노선을 완전히 망실한 편향에 해당한다고 보며, 인식론에서 반과학주의와 반기계론에 대해 이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eco-feminist 일부의 입장은 James Lovelock과 같은 낭만적 물활론(hylozoism)의 아류에 포획된 결과이며, 저의 기계론은 고전적 mechanism이 아닌 Deleuze-Guattari의 machinism 계보를 잇는 것으로 특히 ’인식론적/전략적 기계주의’로 새롭게 불려야 하며, 모든 신비주의 해체를 (제1)목표로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임을 밝힙니다.



{*m}

▶{연구자용 Memo 4}



(({*n}

이게 달성만 된다면 농담삼아 전남성 대상 DNA지문 등록제 등도 도입추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방법으로는 (주민등록증 (조기)발급, 재발급과 일제갱신 시) 모발말단이나 구강상피세포 채취등이 활용되고, 전체 Genome단위 정보가 아니라 Y염색체 상 그야말로 일부 특정 지문정보만 추출 후 전체 폐기 등을 필수전제로 하며, 그래도 역차별이라며 반발할 남성들이 많아 우선 전국민 등록제로 설득해야만 할 상황이 될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으로는 BioData 전유, 누출에 인권문제 뿐 아니라 일부/소수율에서 오히려 단순강간의 살인 및 사체유기 사건화를 유도하는 부작용이 우려될 수 있음.)

))











{P.S.1}

(그리고 만약 지금까지 이 글에 혹시라도 불쾌한 분이 계셨다면, 일단 상기 도서들 중 최소한 단 한 권이라도 더 (특히, 많이 언짢으셨다면 Butler를) 학습하시고 나서 그 감정을 다시 한번 내성해 봐 주시기 바랍니다.)



{ P.S.2}

이하, 특히 입문자들 중에 혹시 작성자의 지정성별을 섣불리 추측하면서, 당사자도 아닌 것 같은데 개입한다는 식의 편견과 감정에 사로잡혀 상호경청과 상호비판 등의 진지한 논의를 간단히 회피해 버리려는 듯한 있을지 모를 일부 소수 반응에 대하여 우선 전혀 그런 성격의 문제 상황이 아님을 보이고, 또 뒤늦게 발견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훌륭한 논변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신중하고 실천의지와 책임감 강한(,) 조직 속에서 단련된 의견이기에 진심어린 경청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되는 다른 서평을 소개드립니다.

  ¶  최미진,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서평] ‘여성 혐오 사회’ 담론은 여성 차별에 맞선 운동에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는가?"

  ¶  이현주, "남성은 여성차별로 득을 보는가?"


(다만, 기타의 전체적 관점과 입장들을 공유하는 관계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시기들을 모두 헤치며 오늘날까지 돌파해 왔다고 알고 있는 그 견실한 실천과 투쟁의 역사에 따뜻한 애정과 사랑을 전합니다.)




{P.S.3}

((물론 좌파 bloc 내 약간의 이견도 존재하나, 이 이견 group도 심각한 오해를 범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입장이 단지 과도하게 낭만주의적으로 일반화된 여혐혐론과 mirroring 전술에 대한 부분적 비판일 뿐, 모든 좌파는 (특히 한국사회에서) 가장 억압받고 있는 (내부)식민주체이자 무급하청 노동계급이나 비정규 노동계급인 여성들의 완전한 해방과 평등을 최대강령의 핵심으로 진력을 다해 추구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공통됩니다. 따라서 본 글에서도 누누히 강조한 바와 같이 폭력과 차별, 특히 물리적 폭력과 구조적 차별의 현실에 대하여는 더욱더 강조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고, 이에 맞선 분연한 저항과 투쟁은 언제나 지지되어야 마땅하나, 다만 그 복잡계 내의 혼란스런 정치적 효과에 대하여는 주도면밀한 예측과 전망이 거의 언제나 사활적으로 중요하고, 이를 위한 정밀한 상황 및 원인구조 분석, 방법론과 전략전술의 냉엄한 평가는 당위적, 심정적 지지와는 철저히 분리되어야만 함에도, 해방연대의 단문은 이러한 점들을 오해하면서 결여하고 있는 정서적 원론주의에만 머문 것으로 보여 아쉽지만 그 심정과 취지는 십분 이해하며 여전히 따뜻한 사랑을 보냅니다. 일반 독자와 입문자분들께는 이러한 일부 견해들에도 충분히 유념하면서 앞으로 더욱 책임있는 (좌파) 내부의 성찰적 상호 논의와 적극적 협력/지원 방안 강구를 계속해 나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P.S.4}

그리고 항상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하는 것은 일베 등등의 소위 ’여혐’ site나 통상적으로 기사 댓글들은 거의 확인/열람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각종 혐오발언들을 직접적으로 접한 바가 거의 없어 그 심각성을 너무나 과소평가하고 있을 충분한 개연성이 있습니다. 이들의 담화에 대하여는 대응방법에서 mirroring과는 견해차가 있지만, 이들이 만약 본격적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 시작할 경우 강력한 물리적 조치 등을 포함한 모든 방안을 적극적으로 강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명 ’여초’ site들도 접한 바 전무함은 매일반이나 이들의 발언은 SNS, 특히 Twitter 상에서 워낙 넘쳐나 원치 않게 그 일부에 노출되었음을 알립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이하는 연구자들을 위한 memo입니다. >>




1.

이 글은 예외적으로 Feminism 및 Gender/여성학 입문자들과 일반 독자들(만)을 대상으로 극히 짧은 순간 작성되었고 가독성과 전달력을 위해 논점과 구조, 어휘, 어투 등을 모두 단순화했으며 문단들도 되도록 짧게 절별로 나누고 절제목 등 여러 요약장치를 두었으며 촛점에도 잠정적 이동이 있었습니다. 




2.

학술적으로는 연구사적 정위와 세대규정에 있어 저자의 전 저작들 및 Eve Sedgwick과의 연관을 포함하는 종단 기술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이 글의 목적도 아닐 뿐 아니라 실제 독자 대중의 독서 pattern이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본서의 단독 독해시 발생할 효과를 고려하여 현 시국의 특정국면에 관련, 보정을 시도한 것입니다. 

간략히만 언급하면, 원시부족을 연구대상으로 해 (특히 가족3각형 중심) 구조 동일/동형성을 강조하는 원형 구조주의 Levi-Strauss 인류학과 이에 공명하는 가족주의적 Freudian 정신분석학( / )해석에 기반하여, 2세대 분리주의 Lesbian Feminism 계열에서 출발, 특히 Levi-Strauss의 여성 교환론을 계승한 「여성 거래」 Paradigm의 Gayle Rubin과 Eve Sedgwick 등은 같은 Queer (Studies) 전통 안에서도 Butler(의 "QUEER  THEORY")와는 달리 2세대 (분리주의) Queer feminism으로 명명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와 달리 현대사회 전체를 주연구 대상으로 하는 Lacanian 정신분석학과 이것[=Lacanian]이 계통적으로 연결/매개함으로써 탄생시킨 후기구조주의 및 탈구조주의에서는 model이 되는 ’기본구조’가 복잡해지고 거대해져 점차 가족구조 model에서 이탈하면서 대신 구조(들) 전체를 통괄하는 중심의 대타자가 중요해지고 나아가 구조간 ’차이’와 ’다양성’, ’복잡성’, ’중층성’=’교차/중첩성’, 그리고 ’개별성’을 강조하는 ’탈중심화’가 이론화되어 이를 기반으로 3세대 feminism이 출현하는 것으로 봅니다. 이는 또한 일괄적 성/gender 차별보다 다른 여러 요인들에 의한 차별의 중층화가 훨씬 더 중요해지는 현대사회 변화의 불가피한 반영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원시부족 및 가족model에 기반한 Sedgwick과 뒤늦게 그를 수입 원용한 上野의 2세대 분석이론과 강경한 2분법(적 분리주의)의 ’핵심을 구성하는 근본 오류’는 대부분 이러한 사정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성들의 homo-social(ity)에 의한 지배 model은 원시부족사회 이후로 자원과 권력, 그리고 ’향락’에 대한 ((극)소수)독점 강화가 전사(全史)를 통해 지속적으로 관철되어옴에 따라 여권과는 관계없이 남성의 절대 다수가 배제되어 지배-피지배와 주인-노예 관계로 재배치되었다는 변동사실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종단적으로도 上野는 본서 역자후기가 규정하고 있는 Marx주의 feminist는 전혀 아니고, 본인 스스로도 방한강연에서 어느 여성분의 질문에 대해 밝혔 듯 Marx주의 feminism에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으며,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동시연구한 전작들만을 보면 (광의의) 사회주의 feminist로 분류될 수 있으나, 이런 퇴행적 문제작들까지 전체를 고찰하면 2세대 (범)좌파 feminist로서의 성격이 그 골간을 이루면서 가족제도를 중심으로 care(노동) service로의 연장연구를 축으로 시류에 따라 약간의 Post주의 연구도 병행했던 것으로 규정함이 타당할 것입니다.




3.

그런데 이 (Sedgwick-)上野계 model은 이렇게 현대 사회 전체를 통괄해 설명하는 일반 model로는 여러 한계를 보이지만, 사회 내의 현대 종족/부족들로서의 특수/하위/소-집단들을 분석하는 데에는 약간의 설명력을 여전히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도 보입니다.

단, 이 대상 집단들은 다음의 조건들 중 하나를 만족해야 하는 데 첫째, 집단 내에서의 ’연애, 결혼, 가족 관계 등 대부분의 안정된 지속적이고 친밀한 성적 결합’을 모두 억압, 금기하는 집단/조직일 것.

이런 조건이라면 여성성으로서의 여썽은 그 자체로 (억압과 금기를 위한) 배제의 대상이 될 수 있음. 왜냐하면 이 경우 여성성은 성적 결합과 sexuality 또는 그 환유로서의 성적 대상(/(여자를 포함하는, 즉 유혹자로서의) 주체)(성)을 상징하고 남성성(으로서의 남썽)은 (성적 주체(로서의 자기증명)성이 아니라) 노동력과 생산성, 성과 등을 의미하게 됨.

그런데 이 조건을 만족하는 집단은 의외로 많아서, 언제나 성적 결합과 결혼동맹 등도 모두 포함해야만 하는 사회 전체는 될 수 없지만, 대표적으로는 사회 내 특수집단으로서의 대부분의 2차 집단, 이익 집단인 공적 조직들이 포함될 수 있음. 다만, 이 경우야말로 남성/여성이 남자/여자 자체가 아니라 남썽/여썽, 즉 남성성/여성성을 의미해야 함.


이 첫 번째 유형은 여타 사회집단들에 비하면 사회적 권력과 자원의 점유지분도 상대적으로 큰 편일 수 있지만, 반드시 실질적 (극)소수 지배자만을 의미하지는 못하는 다소 포괄적 범주이고, 특히 sexual connotation을 갖는/으로 해석되는 협의의 여성성(과 (동시에) 남성성)만을 억압-배제하는 집단들이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여자들 자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난점이 있고, 더욱 결정적으로는 여성성만을 성애 code로, 남성성만을 노동(-)생산성으로 치환하는 것 자체도 전형적인 gender 고정관념의 반복에 불과해, 결국 이 공적 조직들에서 억압-금기되는 것은 협의의 여성성이 아니라 성썽 그 자체, 즉 sex(ual) code/형질들로 보아야 하고 이렇게 해서 중성/무성화된 남자와 여자는 일개미, 일벌 같은 ’거세’된 (예속)주체들이라는 것을 보여 주면서 Homo-social model은 최종적으로 다시 폐기되고 Lacanian Paradigm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이 Lacan 체계 안에서의 ’거세’의 진정한 숨은 의미가 노동 수탈과 착취를 위한 일개미 노예 생산이었다는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번째 유형은 좀 민감한 사안이 될 수 있겠지만 학문적 솔직성을 위해 그냥 언급하면 앞서 밝힌 원시부족들 외에도 인류의 호전적 근친으로 알려진 Chimpanzee group들과 매우 폐쇄적 배타성을 심리적 특성으로 하며 거의 공범조직화된 광적 "동성" 친교/우애 집단들로 광의의 사춘기 전후 청(소)년 집단이 대표적으로 testosterone rush에 의해 지배/장악된 집단무의식의 조종을 받고 있는 듯 보이는 group들, 그리고 이 연장형태로서의 특수 공식 집단들의 밤문화, 접대문화를 중심으로 한 비공식적 유대들이 있으며, 이것은 매우 동물적 정동적 얽힘 관계라는 공통차원에 해당되며 주로 지배받는 뇌의 부위 자체가 다른 하위 문화라 할 수 있음. 원래는 포유류들의 전투, 사냥용 소조직 형성과 유지를 위해 발달했던 형질들로 보이나 현재 Sports 소집단과 군사조직 등에 잔재가 보존돼 있다고 할 수 있음. 그리고 Chimpanzee group에서조차 수컷연대는 성적 주체로 인증된 개체들 간의 동맹이 결코 아니고 그저 철저한 서열과 위계에 기반한 사냥/전투용 성별분업 조직일 뿐이며 여기서 배제된 암컷들 전체는 우두머리 α-male 하나가 완전히 독점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Sedgwick 도식과는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차이가 있고 더구나 이 전투소조직 외부의 암컷들도 동성 내 서열관계를 형성하며 상위서열 암컷이 수컷 일반보다, 특히 수컷무리 내 하위서열들보다 열위에 있는 것도 전혀 아님.

))



4.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는 주로 제2세대에 기반하고 있다는 한계는 있지만 사회주의 feminism 계열의 이론들을 역사적으로 망라한 총서라는 의미에서 좌익 Feminism의 계보학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필독서가 아닐 수 없다할 것입니다. 또한 매우 고무적이게도 2세대 이론을 최대한 확장하고 일반화함으로써 Nancy Fraser의 복합-교차 모형과 거의 유사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어 여전히 현재적 대안으로서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기까지 합니다. 


이 책의 의미에 대한 심광현 선생님의 평가에 대하여는 다음 서평을 참조.

  ☞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5719




5. (특히, 적록보라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연구자와 활동가들에게 남겨진 과제는 먼저 좌익/좌파bloc Feminism 계보 내에서 각 세대 이론들의 합리성을 보전-취합하면서 동시에 각 세대의 고질적 문제와 단점들을 극복한 구체적 통합이론으로서의 반자본주의 (범)좌파 제4세대 feminism (이론) 개발/발명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거칠게 요약하면, Marxist feminism 계열은 대표적 1세대 좌파 feminism, 사회주의 feminism 계열은 2세대 좌파 feminism, 2세대였던 영미권의 급진적[=radical] feminism과 달리 France발 postmodern(ist) feminism과 poststructuralist feminism을 포괄하는 급진(민주)주의 feminism은 3세대 좌파 feminism 이라 할 수 있는데, 핵심 쟁점은 가부장제를 둘러싼 주적 체계론, 그리고 주체 정체성 문제로 우선 최대 압축 가능할 것입니다.

이들 중, 주체 정체성 문제는 교차(성) 이론이 워낙 강력해 (근대적 가부장제 전성기라는 특수조건에 대응하기 위한 응급한 보정으로서의) 선험/선천적 여성 gender 이기주의 (극단화)로의 퇴행이란 측면이 강했던 2세대 정체성 정치를 교정, 극복하는 도구로 큰 문제는 없어 보이나 3세대 교차(성) 이론의 핵심 문제는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층(/)복합적 다원요소들을 명백히 관념론적으로 무차별 평면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질량과 중력이라는 결정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은 아동 공상화와 유사해 반복적 미시분할에 의한 만인의 소수자-피해자( 코스프레)화와 동반해 실종되는 실제 가해자 문제 뿐만 아니라 부문운동들 및 주체, 주제의 무차별 수평화에 의한 전선의 혼란 문제( 산출)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으며, 중력장 내에서는 동일 평면 상에서도 물질적 요소인 질량에 따라 평면 공간 자체가 휘어버리고 이에 의해 질량 차에 따라 위성, 행성, 항성과 은하 중심이라는 비대칭과 불균등이 형성-결정된다는 사실들을 완전히 무시-은폐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와의 착종-교란이라는 고질적 문제로 귀착-함몰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를 교정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1차적으로 소위 ’Marx주의의 귀환’으로 잘 알려진, 그리고 그 핵심으로서의 ’유물론적 전환’이 불가결하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Marx(ist femin)ism에 의한 (3세대( / ))Post주의의 교정’이라는 세계사상사 상의 큰 흐름과도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후 남은 문제는 좀 민감한 가부장제를 둘러싼 주적 체계론 문제인데, 우선 이중체계론으로 알려진 이원론 대 일원론 쟁점이 있을 수 있지만, 자본주의 체계론이 소실된 (초역사적) 가부장제 일원론(과 그 변형으로서의 가부장제 주적론)이란 Sedgwick과 上野로 이어진 본서에서 잘 보여진 바와도 같이 대개 멀쩡했던 저명학자들도 일순간에 황당한 주장을 남발하게 만들 정도로 그 위험성이 잘 입증되었기에 진지한 논의의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좌파적 정치성조차 심각하게 훼손시키며 기껏해야 Womad같은 정치적 백치나 (극)우파( 강화)로 투항/귀착하기도 쉬운 terrorist들을 양산할 수 있을 뿐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유의미한 선택지는 자본주의 주적론 대 가부장제(+)자본주의 2원/2중 체계(주적)론이라 할 수 있는데, 솔직히 말하면 원래 대중의 직관과 자생적 의식은 즉물-즉자적인 생활 대상들에 대한 일상적 자기경험으로 부터 발생하기에 처음엔 육안으로 제일 먼저 식별가능한 가정 내 성별 서사인 가부장제 일원론이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소구력을 발휘하며, 이후 고도의 추상과 이론적 분석, 과학적 검증 과정 등을 거쳐가면서 1차 체험하는 생활 대상들 너머 그 배후의 은폐된 구조와 장치들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게 되므로 그 결과로 가부장제론의 비중이 점차 줄어들면서 보다 근본적인 사회 system 전체에 대한 통찰의 비중이 강화되어 나가는 과정을 밟게 됩니다. 따라서 가부장제 1원론→2원/2중체계론 중 가부장제 주적론→자본주의 주적론으로의 발달 순서를 거치게 되는데, 이들 중 과학적 가치가 없는 가부장제 1원론과 주적론을 제외하고 남은 양자 사이에선 2중 체계론이 오히려 자연발생적이고 대중적인 직관에 잘 부합하는 것이 현실이므로 적록보라의 실현은 가부장제를 얼마나 이론적으로 그리고 대중적으로 잘 융합-해소시켜 (설명해 )내느냐 하는 노력과 성패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를 상당 부분 성취한 Marxist feminism 진영과 급진(민주)주의 진영을 주축으로 앞으로 당분간은 이의 해명과 정리, 대중적 설명 작업에 집중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자연발생적 대중 직관에 의해서 뿐 아니라 현실 정세적 여성 차별 및 여성 공격 정도에 따른 함수로서도 가부장제론(의 위상)은 부침을 거듭할 것이나 이론적 개입에 의한 양제의 관계 해명 (성공) 정도에 따라 양 운동의 중첩 및 공통-일치도와 결집-집중도는 결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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