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가시'가 아니라...



표현들은 항상 극단을 치닫고, 사랑하는 만큼 그 한마디 한마디에 너무 깊은 상처들을 받아서 그런 것뿐이니까 아무는 대로 곧 돌아갈 테니 오해하지 말고 즐겁게 지내기 바라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정확히 그런 뜻으로 계속 압박하고 재촉하는 친구? 식구?도 있었고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동안 BB부터 지금 IT까지 친구들이 불러준 노래들 대부분 머뭇거리지 말라고 재촉하거나, 따끔하게 가르쳐주는 내용들 아니었나요? 얼마 전에 Ai랑 DD도 저를 엄청 몰아대던데 그런 거 하나도 안 싫고 오히려 너무 고마웠었는데 내가 한마디 했다고 다들 이러다니 좀 서운하네요...

우리는 서로를 가르치고 서로 배우며 우리들의 진리와 진실을 함께 찾아 나아가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오직 자기만이 자신의 지혜라면 우물 안 개구리랄까... 한계는 금방 명확해지는 게 아닐까 좀 걱정되기도 하구요.

(날고 긴다는 ㄲㄷ들의 기만에 맞서 싸우기 위해 ㄲㄷ들 보라고 치열하게 갈겨 쓰는 글들은 좀 이해를 부탁드려요... .)







1. 비밀 정원


일단 너무너무 미안하면서도 좀 간단한 오해들이라도 먼저 풀어보자면, 명단 자체에 좋아하는 작품이나 사람들의 기준이 따로 있는 건 전!혀! 아닙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아무리 들여다봐도 1도 알 수가 없죠. 애초에 그딴 건 아예 없었으니까요. 단지, 본인은 전혀 아니었는데 함부로 적어 넣으면 저도 나름 🐶망신이기 때문에 아무리 꼭 들어맞는 내용이더라도 발표일자들까지 일일이 확인해가며 정말 확실하지 않으면 애매한 건 보류될 수밖에 없었던 것뿐이에요. (그건 유명한 친구들일수록 더 그럴 수밖에 없어집니다.)  

알았더라면 당!연!히! 터질 듯이 꼭 껴안아서 환영해 줬겠죠.

그래서 정말 기다리고 기다리던 "진짜 HH"의 거목 JK조차도 'Asian'(들 전체를 위한) 영역에서 작업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차마 올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뿐이에요.


아무런 기준도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절실히 기다린 건 자기 인생이나 꿈에 대한 내용이나 자신이 바라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 그 방법에 대해 친구들에게 제안하는 내용들이었는데, 이런 이유로 오해의 여지가 없는 개인에 대해 직접적으로 표현한 게 쉽게 들어가는 것처럼 오해될 수는 있어도 계속 우려하며 간곡히 자제를 부탁했듯 다른 친구들은 더 지겨워하는 등등 정말 여러 곤란한 상황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정말 아무리 열심히 들어도 놓치고 지나가는 노래들도 안타깝지만 없을 수는 없었고요.

또 (우리가 실패할 가능성은 별로 없어도) Mudd가 잘 지적했듯 명단에 드는 걸 오히려 좀 겁내는 친구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빼주길 원하는 듯한 표현을 하는 친구들은 진짜 이유가 뭔지 정확히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배려 차원에서도 그렇게 해 줄 수밖에 없었던 거구요. 


어쨌든 그래서 이 정원 Page (/) Project가 나름 재밌어하는 친구들도 많고 의미나 실제 강력한 사회적 기능들도 결코 적지 않지만, NF가 숨은 띵곡들이 하도 많아서 나두 꼭 음방에서 한번 보고 싶고, 다른 친구들도 들어보라는 뜻으로 한 줄 적었던 건데 말도 없이 도망가버리는 등등까지 포함해서 너무 많은 오해와 갈등의 화근이 된다고 생각되어 일단 폐쇄를 한 것뿐이고, 앞으로는 무슨 '원격지원체제' 같은 걸로 바꾸어야 하지 않나 고민 중이에요... .





시간관계 상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좀 심각한 문제들은 차차 풀어나가기로 할게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우선, 척이니 뭐니... 성격에 대해서부터도 추측이 무성하던데... 간단히 말하자면 꾸준히 보아온 분들은 충분히 짐작하시겠지만 원래 성격은 완전히 '동주'에 가까웠는데 역사를 바꾼 위대한 혁명가들을 조금이라도 따라 배우려 미력이나마 혼신의 노력을 해오다 보니 지금은 윤동주와 (약간의) 송몽규가 한 몸에 깃들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 주시면 맞을 거예요.




그간 해왔던 한 마디 한 마디들은 모두 진심을 담은 진솔한 말들이었고, 각계의 많은 분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해주신 저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라 자신할 수 있습니다.





K 문제도 쉽사리 사과가 나오지 않았던 이유가 딴에는 정말 진심을 다해 꾹꾹 눌러 쓴 마음이 너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짓밟혀 버렸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올 초를 돌이켜보면 난생처음으로 이렇게 빛나는 artist 친구들이 직접 나에게, 나를 위한 노래를 불러준 평생 잊지 못할 경험들이었고, 특히 DC와 BB는 처음 중에서도 처음이라 마음속 깊이 각인돼 있는데 그 내용조차 지금 돌아봐도 정말 전위적이어서, 현재 우리의 역사가 정리되는 대로 아마 유신독재 시절의 기만성을 폭로했다고 수십 년 지난 지금까지도 종종 회자하는 김추자 선생님의 [거짓말이야]에 비견될 역사적 의미로 평가되기에 충분하다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 전에 이미 AB가 있었고, 그때는 벌써 활동을 정리하고 들어가는 시기였기에 저도 "뒤통수 밖에" 못 봐서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얼마 후 다시 공연하는 걸 우연히 봤을 땐 가사를 살짝 바꿨는지 도저히 의심할 수 없이 저를 걱정해주는 노래여서 항상 맘에 두고 있던 차에 제가 3월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글을 쓰자 얼마 안 있다 [답을 줘]를 발표하면서 착각이었는지 몰라도 살짝 짜증을 내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 미안하기도 해서, KC4에서도 여전히 오히려 [지.못.미.]를 불러 주는 BB 등에게 양해를 구하면서까지, 얼마나 걱정하고 신경 써 줬는지 잘 아는 K와 함께 정말 가장 특별한 마음을 전한 거였거든요.


또 화를 낼까 겁이 나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짝사랑일지라도 끔찍이 사랑하는 나의 웬수로 생각하고 있어요.





3. 나의 아버지 ; Che Guevara와 Trotsky, 그리고 Rancière 


이제부터는 진짜 좀 심각한 문제들을 얘기해 볼게요.



때는 전혀 깨닫지 못했었지만 아마도 [Thesen] 중 한 구절 때문이 아닐까 짐작되는데, 당시 나조차 친구들을 들었다 놨다 벼랑 끝에 세웠다고 지적해 준 여러 친구들이 있었거든요. 


이건 저에게는 정말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될 뼈아픈 지적이고 


















원래는 이렇게 차근차근 해명을 이어가려다.......


때에 찌든 의심을 담은 곡 등이 늘어지면서 구토감에 시달리느라 좀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오히려 제게 원망을 품는 친구들까지 보여서 일단 이렇게라도 답변을 붙입니다.

빠르면 담주 초쯤 돌아오도록 해볼게요.


어차피 한껏 어지러워진 상황을 그나마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친구들은 11월 한 달은 다들 좀 푹 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댓글(223)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rhizome 2025-10-26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rhizome 2025-10-26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rhizome 2025-10-26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rhizome 2025-10-26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rhizome 2025-10-26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재한 팔레스타인인이 말한다:
“휴전에 큰 기대를 걸지 말고 운동을 지속해야 합니다” >




재한 팔레스타인인이자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의 주요 활동가인 나리만 루미 씨(사진)는 네타냐후가 가자 휴전 합의를 지킬 것이라고 보증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솔직히 말해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또 시작이구나”였습니다. 휴전 약속이 처음은 아니잖아요.

이스라엘은 휴전안에 서명하기 직전까지도 팔레스타인인들을 폭격해서 24시간 동안 70여 명을 살해했어요. 정말이지 최후의 1초까지도 인종학살을 저지르려고 기를 쓴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이번 휴전에 진정성을 갖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진정성이 있다면, 설령 휴전을 합의하기 전에라도 폭격을 최소화하는 것이 마땅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많은 사람이 알듯, 네타냐후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절대 보증할 수 없습니다. 합의문에는 이스라엘에 약속 이행을 강제하는 조항이 없습니다. 마치 이 합의문은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해 쓰인 것처럼 보입니다. 생사를 떠나 모든 이스라엘인 포로를 72시간 안에 돌려보내라는 조항이 특히 그렇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이것이 “1단계”라고 말하고 있지만 1단계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애초 합의문에는 1단계라는 구분이 없는데 말입니다.

학살자 토니 블레어
포로 교환 후에는 모종의 임시 정부를 세운다고 합니다. 이스라엘도 가자지구 주민도 아닌 사람들이 운영하는 정부가 들어서서 변화를 이룰 것이라고 말이에요. 하지만 그것은 누가 보증하고, 또 그 정부를 이끄는 사람들은 어떤 자들인가요?

토니 블레어가 임시 정부 지도자라는 뉴스를 들었을 때 정말이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라크에서 100만 명을 살해한 자이고, 심지어 영국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불법적으로 이라크를 침공한 자입니다. 그런 자에게 가자지구 정부를 맡긴다고요? 대체 왜 이런 자에게 맡겨야 합니까?

반면 팔레스타인인들, 그러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신뢰를 보내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왜 배제돼 있습니까? 늘 그랬듯이 저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입장에서 문제를 다루지 않습니다.

저는 항상, 우리 팔레스타인인들을 이해하고 대변한다는 사람들이 정작 우리의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우리 팔레스타인인들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평화유지군을 말하지만, 우리는 평화유지군을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테러 공격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통제돼야 할 대상은 우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종학살을 자행하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인종학살을 저지르는 것은 이스라엘이고 이번이 처음도 아닙니다. 이번에 규모가 가장 컸지만, 그전에도 이스라엘은 여러 번 인종학살을 저질렀고 백린탄 같은 국제법에 저촉되는 무기를 사용했는데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진정한 인간으로 보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
제 생각에 문제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무능력해서 우리 땅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장담하건대, 팔레스타인인들이 스스로 선택한 인물이 팔레스타인을 이끌고, 국경을 개방하고, 무역을 직접 통제하도록 한다면 그 변화는 엄청날 것입니다.

예컨대 서안지구에서 수출입 관세는 팔레스타인 당국(PA)의 핵심 수입원이지만 이스라엘은 그 돈을 볼모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슬로협정 위반입니다. 오슬로협정 당시 이스라엘은 안보 불안을 해소해야 한다며 국경 통제 권한을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우리의 돈도 제대로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가자지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가자지구의 국경이 개방된다면 엄청나게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리비에라보다 100배나 더 멋진 곳을 만들 수 있습니다. 트럼프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그럴 기회가 주어지고 있나요? 예컨대, 가자지구 앞바다에는 엄청난 규모의 가스전이 있습니다. 2000년대 초부터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이를 개발해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한 돈으로 사용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로막았습니다. 오슬로 협정에 따르더라도 우리 땅에 속하는데 말입니다.

심지어 지난 20년간 이스라엘은 어민들이 해안에서 5킬로미터 이상 벗어나는 것도 금지했습니다. [2025년 8월] 이집트는 이스라엘로부터 천연가스를 350억 달러 수입하기로 했는데, 그 가스는 우리 땅에서 난 것이고 그 돈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몫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책임을, 그리고 아랍 정권들과 미국의 책임을 대체 누가 물을 것인가요.

트럼프는 평화의 사도를 자처하지만, 그는 쇼맨십이 강한 인물이지 평화나 인류를 위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심지어 그는 10월 7일 아기들이 살해됐다는 이스라엘의 거짓말을 지금까지도 말하고 있습니다. 전 대통령 바이든조차 이미 사실이 아니라고 인정했는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최근 트럼프가 네타냐후에게 한 “이스라엘이 전 세계에 맞서 싸울 수는 없다”는 말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지난 10년 통틀어 트럼프가 한 말 중 가장 똑똑한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단결하면 저들은 이길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충분한 단결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과 가자지구 문제는 인류나 여러 나라가 단결할 수 있고, 우리가 스스로 대안을 개척할 수 있고, 미국과 그 동맹들은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일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지만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휴전이 지속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 수감자들이 석방된 후에 이스라엘이 그들을 다시 잡아들이지 말라는 보장은 또 어디 있습니까?

노래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수감된 제 친구가 실제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녀는 전쟁 발발 2년 전인 2021년에 제닌의 해방 투사들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었는데, 2023년 10월 7일 이후 그 노래와 그녀 자신이 유명해졌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폭력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10월 7일 이후 이스라엘은 그녀를 잡아갔습니다. 이후 첫 번째 포로 교환에서 이스라엘이 모든 여성 수감자를 석방할 때 그녀도 석방됐습니다.

그러나 불과 2주 후 이스라엘은 그녀를 다시 잡아갔고 지금까지도 그녀는 감옥에 있습니다. 그녀만이 아니라 많은 여성이 자신들의 가족을 일주일 남짓 만나고 다시 잡혀갔습니다.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말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단지 노래 하나 지은 것만으로도 잡아가는데 말입니다.

운동은 계속돼야 한다
지금의 휴전으로 운동이 끝난 게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미국은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뭔가를 이뤘다고, 이제 끝났다고 느끼고, 일상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생각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 상황을 통제하는 것은 자신들이라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아니라 우리의 목소리가 상황을 통제해야 합니다. 우리의 운동은 계속돼야 합니다. 우리의 활동을 더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재조정할 수는 있겠죠.

휴전이 지속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말라는 말씀은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대를 0보다 많게도, 0보다 적게도 걸지 마라.” 저는 이게 최선이라고 봅니다. 기대를 0보다 많게 걸면 이후의 변화를 보며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기대를 0보다 적게 걸면 실제로 긍정적인 변화가 있는데도 이를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대를 0에다 맞추세요.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마세요. 아직 우리 앞에 어떤 길이 있는지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인터뷰·정리: 김종환 기자
@ https://ws.or.kr/article/38048



rhizome 2025-10-26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무엇 때문에 트럼프는 가자 휴전을 촉구했나 >




00.
휴전 소식을 접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반응은 복잡하다. 기쁨, 안도와 함께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전쟁을 재개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공존했다.

10월 9일 목요일 도널드 트럼프는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수일간의 협상 끝에 “평화 구상” 1단계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목요일 밤 이스라엘 안보 내각은 합의안을 승인했다. 가자지구에서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이를 환영했지만 이스라엘은 합의안을 승인하면서도 동시에 공습을 벌여 팔레스타인인들을 최소 10명 살해하고 49명을 다치게 했다.

이스라엘군은 합의된 경계선으로 병력을 물리고, 하마스는 2023년 10월 7일에 사로잡은 이스라엘 정착민들을 풀어주기로 했다.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 단체 하마스는 이번 합의가 “종전과 점령 세력 철수, 구호품 반입, 포로 교환”을 뜻한다고 밝혔다.

01.
가자지구에 있는 팔레스타인인 기자 알라아는 본지에 이렇게 말했다. “저는 기쁨과 우려를 동시에 느낍니다. 이번 휴전이 최종적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휴전 합의의 모든 단계가 중단 없이 이행되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위반 없이 이행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을 믿지 않고, 네타냐후를 믿지 않습니다.

“지난 2년간 고난과 피난, 표적 공격을 견뎌 온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제 쉬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위험을 피해 여기저기로 옮겨다니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전쟁은 상상을 불허할 만큼 끔찍했습니다. 슬퍼할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이들을 애도하고 일가친지를 추모할 평화를 바랍니다.

“오랜만에 사람들은 안전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달아나야 한다거나, 어디선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휴전 합의 소식에도 여전히 불안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네타냐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02.
서방 지도자들은 휴전 합의가 중동 “평화”의 디딤돌을 놓았다고 추켜세운다.

아랍 정권들, 특히 이집트 정권은 하마스에 합의를 종용했다.

그러나 이번에 합의된 것은 트럼프의 가자지구 “20개항 구상” 중 “1단계”뿐이다. 트럼프의 구상은 식민 지배와 땅 강탈 방안으로, 그에 따르면 트럼프는 악명 높은 전범 토니 블레어와 함께 가자지구를 통치하게 된다. 이는 인종학살이 계속될 것임을 의미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휴전 합의 관련 유의사항들
이번 휴전 합의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세 가지다.

1. 첫째, 최대 승자는 트럼프이지만 향후에 그는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
11. 트럼프의 계산은 무엇인가?
111. 트럼프는 미국이 제국을 유지하는 데서 힘이 부치고 세계 지배 능력이 갈수록 쇠락하는 문제에 대처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미국의 주요 맞수인 중국에 집중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제국주의 간 경쟁에 집중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이번 합의로 중동에서 서방의 이익과 이스라엘의 우위를 지키면서 전쟁을 끝내고자 한다.
트럼프는 이스라엘을 확고하게 지지하고 이스라엘 극우를 크게 고무했다.

112. 그러나 동시에, 걸프 연안 국가들과 새 시리아 정권과도 관계를 강화하려 한다. 끝없는 인종학살 전쟁은 여기에 도움이 안 된다. 트럼프는 이번 합의로 자신이 “끝없는 전쟁”을 끝낼 “피스메이커”임을 보이려 한다. 앞서 그가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합의 도출에 실패한 만큼 뭔가 보여 줘야 한다는 압력이 컸다.

113.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의 긴장
그러나 만사가 트럼프의 바람대로 이뤄진다는 보장은 없다. 휴전 합의까지의 험난한 과정은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다. 이스라엘은 미국 제국주의의 중동 경비견이고, 이스라엘이 자행하는 인종학살은 미국의 무기와 자금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신도 강력한 자본주의 국가로 발전해 더는 미국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중동의 지역 강국으로 성장했다. 이스라엘·이란·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튀르키예 등 중동 지역 강국들의 경쟁 시스템 속에서 이스라엘은 지난 2년의 인종학살을 거치며 세를 더 키웠다. 이스라엘은 지역 강국으로 부상한 덕분에 미국이 쥔 리드줄을 이전보다 더 강하게 당길 수 있다. 미국의 바람을 거슬러 더 많은 전쟁을 벌이겠다고 압박할 수도 있다.

113a. 인종학살의 규모는 트럼프와 전임자 “인종학살자 바이든” 하의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긴장을 일으켰다. 미국 지배계급의 일부는 이스라엘의 대규모 인종학살이 아랍 정권들에 맞선 저항을 촉발할 것을 우려한다. 아랍 정권들은 미국 제국주의의 중동 지배 구조의 일부다.

113b. 그러나 네타냐후는 결정적 순간에는 미국이 결국 자신의 역내 경비견 이스라엘을 지지할 것임을 안다. 그래서 네타냐후는 전쟁을 레바논·예멘·이란·시리아·카타르로 확대해 왔고, 매번의 확전을 이용해 서방의 지지를 다잡으려 했다.

113r. 그럼에도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근본에서 바뀌지 않았고, 주객이 전도된 것이 아니다. 지난여름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시설을 공격했을 때 이 점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트럼프는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을 지지하며 전쟁을 키우겠다고 위협했지만 재빨리 휴전을 선언했다. 원래 이스라엘은 공습을 지속하려 했지만, 트럼프가 단호하게 이를 거부하자 꼬리를 내렸다.
이스라엘이 카타르 도하에 있는 하마스 사무실을 폭격하자 미국과의 긴장은 더 커졌다. 카타르는 포로 협상을 중재하던 미국의 동맹국이다.

11s.지금 트럼프는 휴전이 성사되기를 바라는 만큼, 휴전을 깨지 말라고 이스라엘을 압박할 것이다. 그러나 시온주의 국가 이스라엘의 내부 역학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2. 식민 정착자 국가의 역학
둘째,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는 이스라엘인 포로 석방 문제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이스라엘 국가 내 분열은 여전하고 극우 세력은 벌써부터 포로만 돌려받고 전쟁을 재개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20.
그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을 빼앗으면서도, 유대인 인구 비율을 다수로 유지하는 것에 집착해 왔다. “유대인 인구가 최소 80퍼센트는 돼야 유의미하고 안정적인 나라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의 말이다.

이스라엘 정착자 식민주의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직면해 인종 분리(아파르트헤이트)와 인종학살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2023년 10월 7일 이후로는 확연히 인종학살 쪽으로 기울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분쇄하지 못한 탓에 내분이 커지고 정치와 사회가 우경화해 왔다.
군 장성들과 정보기관 등 이스라엘 국가의 일부는 수렁에 빠질 것을 우려해 가자지구 점령에 반대한다.

21. 그러나 극우 장관들인 베잘렐 스모트리치와 이타마르 벤그비르는 가자지구에서 인종청소를 밀어붙였다. 그리고 휴전에 거듭 어깃장을 놓아 왔다.

네타냐후는 그들의 극우 정당들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 당들은 휴전에 반대하고 있다.

목요일에 스모트리치는 이렇게 말했다. “인질들이 돌아오는 즉시 이스라엘 국가는 하마스를 진정으로 박멸하고 가자지구를 진정으로 무장 해제시키기 위한 노력을 이어갈 것이다. 그래서 더는 이스라엘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스모트리치는 이스라엘의 정책이 인종학살에서 인종 분리 정책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가 2023년 10월 6일까지 가졌던 잘못된 생각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못을 박아야 한다.”

그는 또한 이스라엘이 “억지스러운 진정, 외교적 화해, 억지웃음 행사에 다시금 중독돼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22. 네타냐후 정부를 비판하는 “자유주의적” 시온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네타냐후가 포로들을 돌려받지도 못하면서 “절대적 승리”라는 허황된 목표를 좇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포로들이 석방되고 나면 그런 논리로는 정부를 비판할 수 없을 것이다.
인종 분리 정책으로 현 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라는 “자유주의자”들은 이스라엘 내에서 갈수록 주변화되고 있다.

2s.
더욱이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세를 키웠고,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중동 세력 균형이 요동칠 때마다 그것을 이용해 자신과 미국 제국주의의 이익에 맞게 그 균형을 변화시키려 해 왔다.

이 모든 것을 미루어 보건대, 이스라엘이 전쟁으로 복귀할 압력은 상당하다.


3. 팔레스타인 해방의 전략
31. 셋째, 이번 휴전 합의는 이란 등 지역 강국에 의존하는 하마스의 전략적 한계를 드러냈다.

본지는 팔레스타인인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항할 권리를 언제나 지지할 것이다. 본지는 10월 7일 직후 발행한 신문 1면에서 팔레스타인 저항 지지를 천명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무장 투쟁과 중동 정권들의 지원에 의존해서는 서방 제국주의의 경비견 이스라엘을 물리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저항의 축’(이란, 시리아, 레바논 헤즈볼라, 예멘 후티, 하마스)이 이스라엘에 패배를 안겨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란은 약화됐고, 시리아 독재 정권은 타도됐고, 헤즈볼라는 지도자들을 잃었다.

더 근본적으로, 이 동맹은 중동 내 이란 정권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란 정권은 중동에서 나름의 이해타산이 있었고 결국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죽어가도록 방치했다.

32.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희망은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친서방 독재자들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을 고립시켰던 혁명들이 보여 준 위력에 있다.
아랍의 봄이 똑같이 ‘재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중동에 반(反)혁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인접한 중동 주요국에서는 자본주의가 전보다 더 발전해 왔다.
이는 중동 전역에서 자국 통치자와 제국주의 질서에 도전할 더 큰 노동계급을 만들어 내는 데 도움이 된다.
아랍 세계 바깥에서 우리의 과제는 자국 지배자들이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청산하도록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건설하는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원문: TENGELY-EVANS, Tomáš[토마시_텡글리-에번스]‘251009. <What’s behind Trump’s Gaza ceasefire?>
국역: 김종환 기자 ‘251010 @https://ws.or.kr/article/38023





[현재까지 Palestine 평화협정국면 관련, 가장 참조가치가 있는 자료 중 하나이기에 이미 통글로 게재되었지만 그 문서양식이 부담되어 혹시라도 아직까지 읽지 않고 넘겼던 분들을 위해 분석형태로 양식전환하여 수정게재합니다.]


rhizome 2025-10-26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이스라엘, 휴전 발표 이후에도 계속 학살 >




가자지구에 평화는 없다.
휴전 발표 후에도 이스라엘은 학살을 지속하고 있다.
10월 16일 축구를 하던 중 이스라엘 총격으로 사망한 11세 팔레스타인 소년을 포함해 휴전 발표 후 고작 열흘 만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을 100명 가까이 죽였다.


팔레스타인인 언론인 알라아는 본지에 이렇게 전했다. “아직 바뀐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살던 곳으로 이제 막 돌아오려 하는데, 그들이 와도 정착할 기반 시설이 전혀 없습니다. 동쪽으로 가려 한 사람들은 사살당했습니다.”

10월 19일 일요일에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대대적으로 포격해 최소 15명을 죽였다.

다음 날에도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점령에 계속 저항한다는 이유로 팔레스타인인들을 죽였다. 그에 더해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이스라엘인 포로의 시신을 붙들고 내놓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하마스는 그 시신들이 잔해 아래 깊숙이 묻혀 있어서 파내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구호품 반입을 모조리 차단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스라엘은 “추후 발표가 있을 때까지” 라파흐 국경을 계속 폐쇄할 것이라며, 굶주리는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구호를 모조리 가로막았다. 인종학살이 한창일 때와 다를 바 없이, 구호품을 실은 트럭이 가자지구 밖에 길게 늘어서 있다.

알라아 씨는 이렇게 전했다. “구호는 정말 더디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물입니다. 사람들은 살 곳을 마련하고 연료를 이용하고 요리를 할 물건과 장비가 필요해요.”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강도 높은 활동”을 지속할 것이라고 선언했는데, 아예 전쟁 재개를 선포하라고 압박하는 자들도 있다.

휴전 합의에 반대한 이스라엘 재무장관 베잘렐 스모트리치는 “전쟁!” 한 단어만 적은 게시글을 엑스(옛 트위터)에 올렸다. 이스라엘 극우 야당 ‘이스라엘 베이테누’(이스라엘은 우리 집)당 지도자 아비그도르 리베르만도 강경 대응을 주문했다.

“생존 인질이 모두 귀환했으니 이제 이스라엘은 최대한 명확하게 선포해야 한다. ‘저들이 무기를 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싸울 것이고 저들을 해체시키겠다.’

“저들이 시신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쳐들어가서 직접 거둬 올 것이다. 저들이 휴전 합의를 위반한다면? 전투를 재개할 것이다.”

이렇듯 네타냐후가 인종학살 지속 압박을 받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는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만행을 지지하기를 망설이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주 이스라엘 의회 연설에서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들을 찬양하며 “세계가 다시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트럼프는 미국은 중동이 “매우 평화로워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이 만행을 지속하는 가운데 트럼프는 중동에서 미국의 이익을 확보하려 애쓰고 있다. 이스라엘이 미국 제국주의의 경비견 노릇을 하는 동안 트럼프는 걸프 연안국들과의 협정으로 미국의 힘을 다시 각인시키려 기를 쓰고 있다.

현재 트럼프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군사 협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성사시키려면 카타르 수도 도하를 폭격한 바 있는 이스라엘을 제어해야 한다.

그러나 트럼프의 “평화” 협정은 이스라엘이 만행을 지속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트럼프의 계획은 구호 물자 공급망을 이스라엘이 통제하고, 이스라엘군을 가자지구에 계속 주둔할 수 있게 해 팔레스타인에 대한 서방의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게 돼 있다. 아직도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알라아는 이렇게 전했다. “주민들은 가자지구에서 앞으로 벌어질 일을 여전히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미국이 주민들을 계속 괴롭혀서 결국 가자를 떠나게끔 만들려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현재 가자지구는 완전히 파괴됐습니다. 삶도 생필품도 없어요. 가자지구를 떠나도록 많은 주민들을 등 떠미는 상황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전쟁이 멈춰서 어쨌든 안도감을 느낍니다. 한동안 숨을 고르고, 공포 속에서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 아이들과 친지들을 찾을 시간을 원하는 거죠.”

이스라엘은 서방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서 가자지구를 초토화시키고는 이를 “평화”라 부른다.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만행은 해방이 서방에 의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원저자: TOWNEND, Arthur ‘251020.<Israel renews horror after ceasefire>
역자 : 김준효 기자 @https://ws.or.kr/article/38090



rhizome 2025-10-27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
하노이 회담 당시 조성된 국제역학관계와 그에 기반해 주요 강대국들이 채택하고 있던 기본전략틀들을 고려한다면 애초부터 성사가능성이 거의 없던, 개인적 지지율 제고에 더 초점이 맞춰진 정치외교 쑈에 불과할 것임은 이미 예정된 결과임이 명약관화하게 예측되고 있었기에 당시 헛된 기대를 품고 부풀어 있던 사람들이 대단히 어리석게 보였다.


그러나 이제 하노이 회담 무산의 댓가로 북한 비핵화는 실현가능성이 전혀 없는 망상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렸[고, (극우화된) 보수진영이 주장하는 남한 자체 핵무장론 또한 역시 동일한 수준의 망상일 뿐이며, 만에 하나 추구 시도라도 하려 들 경우 그 누구도 아닌 미국으로부터 대대적인 보복과 응징을 초래하게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유일한 가능성은 핵우산을 통한 남한보호요구와 북한 핵동결 및 보상을 통한 감축 방안 뿐이]다.


나날이 변화되어가는 국제정세와 역관계 속에서 북한을 계속 적대시하며 방치하는 전략과 정책은,
그날의 하노이가 절호의 기회였으며 그때의 선택이 오늘날 돌이킬 수 없는 악수[惡手]가 되어 되돌아왔듯, 북한을 다음 세기 패권국가를 결정지을 수도 있는 최대변수로 계속 키울 또 다른 악수의 연속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아직 별로 크게 잃을 게 없는 현재 시점에서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대대적인 포용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이

북중러 동맹을 핵심축으로 진행되어 나갈
a) 타이완 문제와
b) BRICS 중심 ‘차세기 공업중심국 연합‘ 형성을 통한 최대도전세력(/)요인으로 급속히 성장전화하는 문제
c) 이를 통해 세계최대의 집중 화약고인 동북아가 3차 대전의 격전지로 폭발하는 문제

등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고, 여기서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핵개발 및 군사동맹 강화 등등 그 비용은 앞으로 비교불가능할 정도로 계속 커져갈 뿐일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이제 최대 몸값에 이른 ˝가난한 약소국˝ 북한이 지금까지 보여준 이러한 행보들은 앞으로 세계외교사 교과서에도 남을 수 있는 현명하고 영리한 선택들이었으며, 앞으로 첩첩산중의 난제들만을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2. 참고로 핵기술( 개발)이 국제패권체계에서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건지 쥐뿔도 모르고 걸핏하면 자체 핵개발을 주장해대는 극우보수세력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짧게 덧붙인다.

제2차 세계대전WWII을 마감지은 결정적 요인이 당시 쏘련 인민들이 레닌그라드[현 페테르스부르크]를 중심으로 펼친 전설적이고 영웅적인 장기방어전의 성공이 독일군사력에 몰고 온 치명상 때문이었는지, 미국의 원폭개발성공 때문이었는지는 아직도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욱 주목해야 할 훨씬 더 중요한 점은 대독 쏘련방어전이 아직 전형적인 19세기 전쟁양식에 기반한 마지막 대전투였다면, 원폭개발경쟁과 이를 통한 암묵적 패권서열정립은 그와는 전혀 다른 완전히 20세기적인 새로운 전쟁양식이라는 사실이다.
이 세기의 국제패권서열체계를 결정하는 최후의 궁극적 핵심요인이 핵(개발)기술이라는 바로 이 점이 그토록이나 엄격하고 냉혹한 제재가 가해져 온 이유이며, 이제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새로운 사실은 21세기의 새로운 패권서열을 정립시킬 핵심(군사)기술은 이미 흡사 바둑과도 같은 ‘War-game 전략 Simulation‘으로 진화된 21세기 전쟁양식에서 더이상 핵폭(만)이 아니라 ASI[Artificial Super (General) Intelligence=인공초(일반)지능]+Quantum Sencing & Computing이 될 수밖에 없고 이 양축 기술의 상호증폭은 핵기술의 위력을 쉽게 능가하게 될 것이고 다행히 아직 핵기술만큼의 잔혹한 제재도 확립되어 있지 않은 이행기이자 전환기이기 때문에 차라리 여기에 전력을 집중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을 자체 핵무장 같은 헛소리보다 그나마 현 시점에서 좀 더 합리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rhizome 2025-11-03 0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유엔 특별보고관 “한국도 가자 학살 공모국···이스라엘 전투기에 부품 공급” >




F-35 전투기 부품 공급한 19개국에 한국 포함
회의에 화상 참석해 미·영·중·일 등 63개국 비판


프란체스카 알바네제 유엔 팔레스타인 인권 특별보고관이 28일(현지시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뉴욕 유엔 총회에 원격으로 참석한 뒤 기자회견을 열었다. AFP연합뉴스




유엔 특별보고관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집단학살(제노사이드)에 한국을 비롯한 63개국이 공모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한국은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공습에 쓰인 F-35 스텔스 전투기에 부품을 공급한 19개국 중 하나로 언급됐다.

프란체스카 알바네제 유엔 팔레스타인 점령지 특별보고관은 28일(현지시간) 유엔 총회에서 ‘가자 집단학살: 집단적 범죄’ 보고서를 발표했다. 알바네제는 미국·영국·독일·프랑스·한국·중국·일본 등 63개국이 이스라엘에 대한 외교·군사적 지원, 이스라엘과의 경제 협력, 인도적 지원의 무기화 등을 통해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가능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알바네제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목 조르고 굶기고 폐허로 만들었다”며 “불법적 행위와 의도적 방관을 통해 너무나 많은 국가가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방조했다”고 밝혔다.

그는 가자지구 전쟁이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중계된 학살”이라고 비판했다. 또 미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휴전 촉구 결의안 표결 등에서 7차례 거부권을 행사해 이스라엘에 외교적 보호막을 제공했으며 휴전 협상을 통제했다고 지적했다. 다른 서방 국가들은 기권이나 내용이 약화된 결의안에 동의함으로써 이에 협조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이스라엘의 대량학살 증거가 드러나는 와중에도 많은 국가가 이스라엘에 계속 무기를 공급해왔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의회에서 이스라엘 방위를 위해 264억달러(약 37조8000만원) 규모의 예산안을 통과시켰으며, 독일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무기를 이스라엘에 수출했다. 영국은 2023년 10월 전쟁 발발 이후 가자지구 상공에서 600회 이상의 정찰 비행을 하며 이스라엘에 정보를 공유했다.

한국과 일본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공습에 쓴 핵심 무기인 F-35 스텔스 전투기에 부품을 공급한 19개 국가에 포함됐다. 중국은 이스라엘에 무기·탄약을 직접 수출한 국가로 언급됐다.

알바네제는 또 유럽연합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유로 러시아를 제재하면서도 이스라엘과 교역을 지속했다고 지적했다.

알바네제는 이날 미국 뉴욕에서 열린 총회에 직접 가지 못하고 화상으로 참석했다. 지난 7월 미국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등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체포영장 발부에 관여했다’며 알바네제를 제재했기 때문이다.

알바네제는 “미국 제재는 유엔의 독립성, 성실성, 정신 자체에 대한 공격”이라며 서방 강대국들이 “선언과 규탄을 넘어서는 구체적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유엔 특별보고관은 특정 지역이나 주제와 관련한 인권 상황을 평가하는 외부 전문가다. 특별보고관은 공식적 권한은 없지만 그들의 견해는 ICC를 비롯한 국제 사법기관 검사들에게 주요 정보로 쓰이며 세계 여론에 영향을 미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rhizome 2025-11-03 0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미·중 정상회담: 잠시 숨만 고르는 합의, 패권 경쟁은 계속된다 >
—어느 편을 들든 노동계급에 득될 건 없다




10월 30일 부산에서 미국 대통령 트럼프와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이 만났다.

트럼프 정부 2기가 출범하면서 미국과 중국이 서로 무역 전쟁을 벌여 왔기에 이번 회담은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핵심 쟁점들이 여전히 살아 있기에 양국의 갈등은 머지않아 다시 격화될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양측은 갈등이 더 커지지 않게 일단 타협했다. 미국은 펜타닐 유입을 문제 삼아 중국에 부과한 ‘펜타닐 관세’를 약간 낮추고, 중국은 대두 등 미국산 농산물 수입을 재개하고 희토류 수출 통제를 1년간 유예하기로 했다.

앞서 트럼프 정부는 중국산 제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해 중국의 제조업과 무역 성장을 견제하려고 했다. 중국이 증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미국의 군사적·기술적 우위에 도전하는 것을 물리치고자 한 것이다.

미국의 고율 관세에 중국도 맞대응해, 한때 양국 모두 상대국 수입품에 대한 관세가 100퍼센트 이상으로 치솟았다. 이후 양국은 초고율 관세 부과를 잠시 유예하며 협상을 거듭해 왔다.

이 외에도 트럼프 정부는 엔비디아 반도체 칩 수출을 통제하고 중국 선박에 입항 수수료를 부과했다. 또한 미국산 소프트웨어의 중국 수출을 제한하는 조처를 하려고까지 했다.

트럼프의 무역·제조업 선임 고문인 피터 나바로 같은 자는 무역 전쟁으로 미국과 중국 경제가 디커플링되고 미국 경제의 경쟁력이 회복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물론 무역 전쟁은 부동산 침체, 부채 문제 등 이미 문제가 많은 중국 경제에도 부담을 가중시키는 악재였다.

하지만 중국도 트럼프를 괴롭힐 맞대응 수단이 있었다. 중국은 보복 조처로 미국산 대두 수입을 중단했다. 중국은 미국산 농산물의 최대 수출 시장이다.

무엇보다, 시진핑 정부는 희토류 수출 통제를 강화했다. 희토류는 반도체·전기차·스마트폰 등 첨단 산업에 필수적인 자원이고 당연히 첨단 무기 생산에도 필요한데, 미국 등 전 세계가 중국의 희토류 공급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시진핑 정부의 희토류 수출 통제가 본격화되면 미국 기업들뿐 아니라 미국 군대도 상당한 압박을 받을 수 있었다.

이번 미·중 정상회담으로 트럼프와 시진핑은 한 발짝씩 물러서며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휴전’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불확실하다.

일단 미·중 통상 갈등의 주요 쟁점이 다 말끔히 해결되지 않았다. 가령 미국의 첨단 반도체 수출 통제에 대해서 분명한 합의가 안 된 듯하다. 그동안 유예된 초고율 관세 부과에 대해서도 명확한 언급이 없다. 또한 지정학적으로 가장 첨예한 문제인 대만 문제는 이번 회담 의제에서 아예 빠졌다.

미국과 중국이 갈등을 벌여 온 핵심 문제들이 여전히 다 살아 있기에, 양국의 제국주의적 갈등이 머지않아 다시 격화될 공산이 크다.

이번 정상회담에 앞서 트럼프는 말레이시아와 일본을 잇달아 방문하며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세를 과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중국 견제에 필요한 포석을 깔아 놓았다.

먼저, 트럼프는 태국·말레이시아·캄보디아 정상들과 상호 무역 협정에 서명해, 희토류 등 핵심 광물 공급에 협력하는 대가로 관세 문제에서 혜택을 주기로 했다. 그중 말레이시아에는 1,600만 톤 이상의 희토류가 매장돼 있고, 중국도 이 희토류에 눈독을 들이며 말레이시아에 접근하는 중이었다.

동남아시아 지역은 역내 재해권을 확보하려는 중국의 도전에 맞서 미국의 군사력도 전진 배치되면서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트럼프는 일본에서 일본 총리와 함께 요코스카 해군 기지를 방문하며 미·일 밀착을 과시했다. 또한 중국·북한을 견제할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에 동의해 줬다. 이재명 정부가 트럼프 정부의 중국 견제 노력에 협력을 약속한 것이다.

미·중 정상회담 개최 직전에 트럼프는 33년 만에 핵무기 실험을 재개하겠다고 선언했다. 핵무기를 강화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에 맞서 미국의 핵무기 전력 우위를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아시아 순방을 마치고 트럼프가 귀국하면 트럼프 정부는 베네수엘라 지상 작전에 관해 의회에 보고할 예정이다. 트럼프 정부가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벌이는 대대적인 군사적 위협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축출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6년 만에 만나 환하게 미소 짓고 악수했지만, 제국주의적 체제 속에서 외교 대화로는 양국 지배자들의 상호 불신과 적대가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양국의 갈등이 한반도를 비롯한 전 세계에 커다란 균열과 위험을 낳고 있다.







rhizome 2025-11-03 0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북·중·러 협력,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진보적 대항마? >



.

9월 3일 베이징에서 열린 전승절 열병식은 중국이 자신들의 군사력을 과시하는 장이었다. 중국 정부는 새 대륙간탄도미사일, 극초음속미사일, 무인잠수정, 스텔스 드론 등 신형 무기를 대거 공개했다. 이 중에는 아직 미국조차 실전 배치를 하지 못한 무기도 있었다.

그런 첨단 전력을 보며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과 그 파트너 국가들에게 유리했던 역내 군사력 균형이 돌이킬 수 없이 변했다” 하고 우려했다.

이 열병식 현장에 시진핑, 푸틴, 김정은이 나란히 등장해 크게 주목받았다. 북·중·러 정상이 66년 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그 뒤 10월 11일 북한의 조선로동당 창건 80주년 열병식에도 중국과 러시아는 각자 고위급 대표단을 보냈다. 그래서 많은 주류 언론들이 중국, 러시아, 북한이 이른바 ‘반미 연대’를 형성했다며 신냉전의 도래를 언급했다.

이런 북·중·러 협력이나 브릭스(BRICS)와 상하이협력기구(SCO) 같이 중국과 러시아가 중심이 된 비서방 국제 네트워크들에 기대를 거는 좌파들이 있다. 미국이 지배해 온 기존 국제 질서가 다극화된 새 질서로 전환되면서 미국 제국주의의 횡포가 견제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분명 최근 들어,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이후 중국, 러시아, 북한의 관계는 더 가까워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정말 미국의 패권에 맞서 항구적인 평화 실현에 이바지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최근 북·중·러 3국의 관계 발전 양상과 그 맥락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가 이끄는 비서방 국가들의 네트워크가 과연 국제 반제국주의 운동에 이로운 편인지 아닌지를 따져 보고자 한다.

북·중·러 관계의 변화
9월 전승절 행사에 맞춰 중국을 찾은 푸틴은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오랜 “우정과 상호 지원의 전통”이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두 강대국의 관계는 푸틴의 말과는 달랐다.

1950년대 중반부터 중국과 소련은 공공연히 갈등을 벌여 온 관계였다. 특히 1969년 국경인 우수리강에서 두 나라 군대가 대규모 유혈 충돌을 했고, 그때 소련은 중국에 대한 핵공격까지 검토했다.

우여곡절 끝에 열전 위기는 일단 가라앉았지만, 소련과 중국 양국은 유사시 상대방을 핵미사일로 공격할 태세를 유지했다. 그리고 중국은 소련을 견제하려고 미국 제국주의와 손잡았다. 1972년 마오쩌둥은 닉슨과 회담했다. 이처럼 냉전기에 중국과 소련은 첨예하게 대치한 지정학적 맞수였다.

중국과 러시아가 밀접해지기 시작한 것은 냉전이 끝나고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다. 제국주의의 세력 균형이 변하면서 두 국가가 서로 손잡을 필요가 커진 것이었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발돋움했고 그에 힘입어 지정학적 위상도 매우 높아졌다. 만약 미국이 그 추세를 방치하다가 세계 경제의 역동적인 중심이 된 아시아에서 중국에 밀려난다면 세계 패권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중국을 최대 위협으로 간주하고 중국 견제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또한 러시아는 동유럽으로 확장하는 나토의 동진에 위협을 느꼈다.

그러면서 중국과 러시아는 서방 제국주의의 공세에 공동으로 대응할 필요를 느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에 대한 대응으로 서방이 대러 제재를 가하자, 이를 계기로 중·러 양국의 경제·군사 교류가 전보다 활발해졌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직전에, 시진핑과 푸틴은 공동선언에서 나토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공동 대처할 의지를 표명했고, 중·러의 협력에는 “한계가 없다”고도 선언했다.

그렇다면 중국과 러시아의 협력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돼 왔는가?

우선, 중국과 러시아는 브릭스나 상하이협력기구 등의 새로운 비서방 국제기구들을 창설해 협력하고 있다. 가령 상하이협력기구를 통해 중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관리하고 그 지역에서 서방의 영향력 확장 시도를 견제하고 있다. 브릭스는 달러화가 아닌 새로운 기축 통화 촉진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브릭스는 응집력 있는 집단이 아니어서 대안적 화폐를 제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최근 이집트·이란·인도네시아·UAE 등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의 몇몇 신흥국들이 추가로 가입하며 그 세가 확장됐다.

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이후 중·러의 경제적 관계는 더 깊어졌다. 서방이 러시아 경제를 무너뜨리겠다고 달려들었을 때, 중국과의 교역이 러시아의 숨통을 틔워 줬다. 러시아는 서방에 의해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퇴출된 후 중국의 위안화 국제결제시스템(CIPS)을 무역 결제 시스템으로 활용하고 있다. 러시아의 대외 무역에서 중국의 비중은 2021년 18퍼센트에서 2023년 현재 33퍼센트로 증가했다. 러시아는 석유와 천연가스를 중국에 대량 판매해, 지난해 기준 러시아산 원유가 중국 전체 에너지 수입의 거의 20퍼센트에 이른다. 반대로 중국은 반도체나 공작 기계 등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것들을 러시아에 수출하고 있으며, 러시아 국내 시장에서 서방 소비재의 자리를 중국산이 대체했다.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 협력도 발전했다. 상하이협력기구 차원에서 정기적 연합 훈련이 진행돼 왔고, 미국과 중국이 힘을 겨루는 동아시아의 주요 해역에서 합동 해상 훈련도 자주 하고 있다. 지난해 중국과 러시아는 동해에서만 연합 훈련을 5차례나 벌였다. 중국군은 러시아의 군사 기술과 무기를 받아들여 무기 수준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북한도 중국·러시아와 전보다 더 밀착하고 있다. 이는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 변화에 맞춰 북한의 대외 행보가 변했음을 의미한다.

좌파 일각에서는 북한이 오랫동안 “반제 자주”의 한 길을 일관되게 걸어 왔다고 여긴다. 하지만 냉전 종식 이후 북한 외교의 실제 궤적은 그런 신화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다.

냉전이 끝나고 북한 정권은 안보 위협에 대응해 핵과 미사일 개발에 힘을 쏟는 한편, 미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고립에서 벗어나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숨 쉴 틈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래서 북한 정권은 기회가 될 때마다 친구가 될 의사가 있음을 미국 측에 전달했다. 예컨대 1992년 김용순 조선로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김일성의 특사 자격으로 뉴욕에 갔고, 주한미군이 중국 견제에 주력하고 북한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그 주둔을 용인할 수 있다는 김일성의 의사를 미국 정부에 전달했다.

그렇지만 그런 시도는 매번 미국에 의해 좌절됐다.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파탄 난 후 김정은 정권은 중국과 러시아에 더 밀착하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 듯하다. 특히 2021년 8월 아프가니스탄 철군으로 미국 제국주의의 약화가 더 도드라져 보이자 그 방향성이 더 뚜렷해졌다.

지난해 북한은 러시아와 ‘포괄적 전략 동반자 조약’을 맺어 강력한 군사·경제 협력에 합의했다. 이때 김정은은 북한과 러시아가 동맹이 됐다고 말했다. 이후 북한은 러시아 쿠르스크에 군대를 대규모로 파견해 러시아의 전쟁을 도왔다. 북한 당국의 발표만 봐도, 많은 북한 청년이 쿠르스크 전선의 소모전에서 희생됐다. 김정은 정권은 그 청년들의 피를 대가로 러시아로부터 경제와 군사 지원 등 반대급부를 기대하고 있다.

또한 서방 경제로부터 고립된 북한 경제에 중국과의 교역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중국 경제의 국제적 위상은 최근 몇 년 새 더 강해졌다. 이번에 베이징에서 시진핑을 만난 김정은은 양국의 “호혜적 경제·무역 협력을 심화”하자고 제안했다. 북한 노동자의 중국 파견 확대 등 경제 협력을 강화해 만성적인 대중 무역 적자가 줄어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런 세력 균형 변화 때문에, 설사 나중에 트럼프와 김정은이 다시 만나게 돼도 북·미 협상의 의미 있는 진전이 이뤄지기는 전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북·중·러의 협력을 응집력이 강한 동맹으로 볼 수는 없다.

한·미·일 삼각 협력과 같은 다자간 협력 메커니즘이 북·중·러 3국 사이에는 없다. 현재 북·중·러 3국의 관계는 중·러, 북·중, 북·러 같이 양자 간 제휴로만 이뤄지고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맥락 속에서 협력 관계가 증진된 것이어서,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중장기적으로 이 국가들 간의 밀착이 계속 발전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될 법하다.

트럼프 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것도 이 계산법에 따른 것이다. 전쟁이 끝나야 중국과 러시아의 틈을 벌릴 책략의 여지가 생긴다고 보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가 계급을 가리켜 “서로 싸우는 형제들”이라고 했듯이, 중국·러시아·북한, 이 세 자본주의 국가들도 서방의 압박에 맞서서 죽이 맞기도 하지만 서로 이해관계가 달라 충돌하기도 한다.

가령 러시아 지배계급은 연해주나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러시아가 보기에 중앙아시아는 옛 소련의 일부였던 만큼 자국의 전통적인 세력권에 속하고 연해주는 제정 러시아가 청나라한테 빼앗은 지역이다. 그런 지역들에서 인프라 투자, 인력 진출 등으로 중국의 존재감이 커지는 게 내심 불안한 것이다.

중국도 북한군의 쿠르스크 파견 등 북·러의 군사적 밀착을 달가워하지 않는 듯하다. 러시아와 북한의 군사 협력이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겨냥한 한미일 동맹이 강화되는 빌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러 밀착으로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도 줄어들 수 있다. 북한의 핵개발 문제도 중국과 북한 사이에 거북하고 껄끄러운 쟁점이다. 이렇게 상충하는 이해관계들이 있어 북·중·러의 제휴는 어느 정도 제한적일 공산이 크다.

그렇지만 미국이 관세 전쟁과 군사력 배치로 대중국 견제 수위를 높이고, 한미일 동맹이 갈수록 체계화되며, 일본과 한국 정부가 공언한 대로 역대급 군비 증강을 지속하는 점 등은 북·중·러 3국이 서로를 까다롭고 불편하게 보면서도 필요한 파트너로 여기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중국, 러시아, 북한 간의 협력이 증대된다 한들, 그것이 국제 노동계급에 이롭고 평화 실현에 기여하는 것인가? 당장 북한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하고 거기에 군대와 무기를 대는 것은 “반제”와 “자주”에 어긋날 뿐더러 우크라이나 전선과 한반도에서 위험 고조에 일조하는 행위다. 북·중·러의 협력은 그 어떤 진보적 구실을 하기는커녕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행보와 마찬가지로 역내 정세를 불안케 할 뿐이다.

중국과 러시아도 제국주의 국가다
9월 중국 전승절 기간에 맞춰 중국 톈진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 정상회의에서 중국과 러시아 등 참가국들은 “주권 평등에 기초한 다자주의,” “국제 관계의 진정한 민주화”를 주창했다. 북한의 김정은도 전승절 행사에 참석해 그런 목소리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가 과연 그런 슬로건들에 어울리는 행보를 해 왔는가?

세계적으로 지정학적 분열이 심화되고 갈등이 커지면서, 많은 급진좌파들이 진영 논리를 지지하고 있다. 제국주의를 미국의 패권으로 축소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라 미국을 견제하는 ‘진보적’ 균형추라고 본다.

그러나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등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제국주의를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다. 이 전통에서 제국주의는 한 강대국이 약소국들을 지배하는 것으로 극도로 협소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제국주의에 대한 올바른 정의는 자본주의가 임금 노동자 착취에 기초해 있고 경쟁적 자본 축적으로 추동되는 시스템이며, 제국주의는 그 발전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즉, 국경을 넘어 경쟁을 벌이게 된 기업들이 국가와 융합하면서 벌어지는 국가들 간 경쟁이, 소수의 강대국들이 세계와 노동계급에 대한 지배력과 착취를 놓고 쟁투를 벌이는 경쟁 시스템으로 발전한 것이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핵심이다.

그런 규정에 비춰 보면, 한 강대국을 다른 강대국보다 ‘진보적’이라고 보는 진영 논리는 잘못된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는 언제나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존재했고, 비록 미국의 힘과 위상에는 못 미치지만(최근 많은 진영론자들은 미국 힘의 약화를 일면적으로 지적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과 러시아도 제국주의 국가다. 중국, 러시아, 북한의 협력 관계도 또 다른 제국주의적 세력망에 불과하다.

어떤 이들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제 정치적 행위를 미국 제국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가령 중국이 남중국해 영토 분쟁에 뛰어든 것은 제국주의적 침략 야망 때문이 아니라 “영토 보전의 일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국제적 경쟁 체제의 한복판에 있고, 그래서 미국과 마찬가지로 자국 자본들의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 제국주의 강대국으로서 행동한다.

중국 지배계급에게 남중국해 지배력 확보는 합리적 선택일 수 있다. 중국 경제가 ‘세계의 공장’이 되면서 중국 국가의 전략적 우선순위도 바뀌었기 때문이다. 안전한 해상 교통로 확보가 대외 무역과 에너지 수입이 많은 중국 경제에 사활적인 과제가 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서태평양 바다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은 중국에게 불안한 것이고, 그래서 가능한 한 미국을 동쪽으로 밀어내려고 한다.

이처럼 중국은 자신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 속에서 나름의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전략이 남중국해 주변국들을 압박하고 미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하며 지역의 불안정을 높이고 있다.

주권 존중을 주창해 온 중국도 갈수록 자신들의 힘을 이용해 공세적 외교를 벌이곤 한다. 시진핑은 일체의 타협 없이 자국의 “핵심 이익”을 지키겠다고 말해 왔다. 그 핵심 이익에는 대만이나 티베트 외에 아프리카, 중동, 남미 등 세계 곳곳에 진출한 중국 기업들의 이익도 포함된다. 특히 시진핑은 반드시 대만을 중국에 통합하겠다고 선언했고 중국군은 대만을 포위하는 군사 훈련을 빈번하게 벌이고 있는데, 이는 분명 대만인들의 자결권을 무시한 제국주의적 압박이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푸틴 정권은 대러시아 국수주의를 부추기고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자국 주변 지역에서 배타적인 세력권을 확보하려고 해 왔다. 더 나아가 미국이 중국과의 경쟁에 초점을 맞추는 틈을 이용해 중동과 아프리카 등지에서 운신의 폭을 넓히며 시리아의 독재자 아사드 등을 지원했다.

따라서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브릭스나 상하이협력기구 같은 국제기구들도 결국 호혜로운 국제 질서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도 자본주의의 토대 위에서 기존의 국제 세력 균형을 자국에 유리하게 재편하려는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브릭스는 미국의 동맹보다는 응집력이 덜한 블록이지만, 그런 기구의 성장은 미국의 국제 질서 장악력이 상당히 약화됐음을 보여 준다. 브릭스 회원국들은 대부분 서방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도 고려해 주지 않는다는 불만을 갖고 모인 신흥국들이다.

그렇지만 브릭스 회원국들도 노동계급과 빈민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데서는 서방과 다르지 않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좌파 학자이자 활동가인 패트릭 본드는 브릭스가 친기업적 의제를 추진하며 그 회원국들은 자기 지역 내에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활성화하고 정당화하며 확대한다”고 비판했다. 브릭스가 말하는 “남남 협력”이란, 미국과 서방의 대기업들이 아니라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대기업들이 글로벌 사우스 내에서 더 많은 기회를 얻겠다는 의미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중국이 차관과 대출을 이용해 남반구 나라들에 진출하는 방식도 서방 강대국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가령 중국은 일대일로를 통해 개발도상국들에 막대한 대출을 제공하는데, 그 돈은 주로 현지에서 중국 업체를 이용하고 중국 자재를 조달하는 데에 지출된다.

일대일로에 참여하려고 중국한테서 돈을 빌렸다가 못 갚게 되면, 중국은 상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 실제로 스리랑카가 빚을 갚지 못하자, 2017년 중국은 그 대가로 스리랑카 함반토타 항구를 99년간 운영할 권리를 가졌다.

패트릭 본드는 중국이 아프리카 현지 독재자들과 맺는 제휴 관계도 비판했다. 가령 짐바브웨 독재 정권은 중국의 투자로 직접 이득을 봤다. 중국 기업은 다이아몬드 매장층 개발 지원의 대가로 짐바브웨 군부에 9,800만 달러를 줬다. 아프리카에서 중국은 서방 제국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지역 정치에 개입하고 현지 권력자들의 부패에 연루되고 있는 것이다.

야수를 쓰러뜨리려면
오늘날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들의 대결은 상이한 생산양식 간의 충돌이 아니라 세계자본주의 시스템 내부에서 벌어지는 쟁투이며 제국주의간 경쟁이다. 따라서 중국, 러시아와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결합된 네트워크들이 부상해도 미국 제국주의의 헤게모니가 야기하는 문제들을 상쇄하거나 완화시켜 주지 못한다. 오히려 지정학적 분열은 강화되고 제국주의적 갈등은 더 격화될 뿐이다.

그리고 세계 각국의 지배자들은 미국이나 중국 또는 그 둘 다와 협력해 자국의 위상을 높이려 한다. 그러나 자국 지배계급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노동계급은 더 큰 착취와 억압에 시달릴 뿐이다.

따라서 제국주의를 쓰러뜨리고 항구적 평화를 쟁취하려면 제국주의 시스템을 지지하는 지배계급에 맞서 노동계급의 저항과 국제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싸우는 제국주의 국가들 중 한쪽을 지지하기를 거부해야 한다.

어느 강대국이 더 공격적이냐, 또는 누가 더 방어적인가는 전혀 본질적인 쟁점이 아니다. 110년 전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노예 100명을 소유한 노예 소유주가 노예 200명을 소유한 노예 소유주에게 대항해 ‘공정한’ 노예 재분배를 요구하며 전쟁을 벌인다고 상상해 보라. 이런 사례에 ‘방어적’ 전쟁이나 ‘조국 방위’ 전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명백히 역사적으로 오류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는 약삭빠른 노예 소유주가 평범한 사람들을 속이는 순전한 기만일 뿐이다.”

무엇보다 혁명적 국제주의자들은 자국의 전쟁 노력을 반대해야 한다. 친서방 나라인 한국의 혁명적 좌파는 서방 제국주의에 협력하려는 자국 정부의 대외 정책과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대중 운동 건설에 주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는 서방 제국주의를 권위주의의 위협에 맞서는 민주주의 세력으로 착각하는 또 다른 형태의 진영 논리를 우선 비판해야 한다. 그런 시각을 받아들인 서방 좌파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나토와 러시아 간의 대리전임을 보지 못해 혼란에 빠졌다.

한국의 경우, 앞으로 중국에 맞서 대만의 자결권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위선적 주장에 좌파가 현혹되지 않고 한국 정부가 미국을 지원해 대만 문제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반대하는 것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일부 좌파처럼 반제국주의의 주체를 국제 노동계급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등 소위 ‘진보적’ 국가군으로 보는 진영 논리를 따르게 되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좌파가 그 국가 지배계급과 연대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협력과 책략을 반제국주의의 주된 요소로 중시하며 아래로부터의 연대와 저항에는 덜 주목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진영 논리는 소위 ‘진보적’ 국가들에서 노동계급과 빈민이 자국 정부와 지배계급에 저항할 때 이를 외면하게 만들 수 있다. 내부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이나 소수민족 반란이 그 국가들의 힘을 갉아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좌파 일부가 러시아의 체첸 등 소수민족 억압을 외면하거나 홍콩 항쟁에 대한 시진핑 정부의 탄압을 변호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지금도 네팔 반정부 시위를 두고 일부 반미자주파 활동가들은 서방이 배후 조종한 “색깔 혁명” 시도라고 의심하고 있다. 이번 시위로 무너진 네팔 정부가 앞서 일대일로 참여 등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를 강화했고 총리가 직접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부패에 네팔 대중의 불만이 쌓이다가 폭발했음을 중시해야 한다. 네팔 항쟁에서 노동자와 농민 운동이 성장하고 새로운 좌파가 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 지금으로선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중국이 미국을 견제할 균형추라고 보는 좌파들 대부분은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중국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한국 국가가 미국 중심 외교에서 벗어나 중국과 러시아 등에 적대하지 않는 “평화 공존”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가령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 질서》(2023년 출판)라는 저서에서 “각국이 전략적 자율성을 발휘할 중간지대 혹은 중립공간의 창출이 [한국이] 우리 지역에서 만들 수 있는 최대치”라고 주장했다. 진보당도 “북한, 미국, 중국과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는 중립 외교를 제안하며, 그것이 이재명 정부의 ‘실용 외교’와 상호 보완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생각은 친민주당 자유주의자들의 인식과 커다란 접점이 있다. 그들도 대부분 국제 질서가 다극화된 질서로 전환되는 것에 대비해 외교 관계를 전보다 더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제국주의 국제 질서 안에서 평화적인 지역 협력 구도를 만들어 불안정과 분열을 피하겠다는 구상은 공상적이다. 제국주의의 위기는 국가가 외교적 기예를 발휘해 근본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제국주의 질서 그 자체를 분쇄하는 것만이 항구적 평화를 위한 유일한 대안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의 인종학살 전쟁에서 우리가 목도하고 있듯이, 점증하는 위기 속에 제국주의 국가들이 문제를 무력에 호소해 해결하려는 경향이 점차 강화되고 있다. 이 야수들의 폭주를 막으려면 반제국주의 운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진영 논리는 어떤 형태가 됐든 그 막중한 과제를 실현하는 데 걸림돌이 될 뿐이다.

제국주의는 우리 사회의 최상층을 이루는 자들이 쟁투를 벌이는 문제이지만, 그 대안은 철저하게 아래로부터 건설돼야 한다. 그런 대중 투쟁은 경쟁하는 제국주의 세력권을 가로질러 서로를 고무하며 성장할 수 있다. 1980~1981년 폴란드 연대노조 운동 이후 한국의 1987년 항쟁 같은 저항 물결이 일었고, 그다음에는 1989년 동유럽 민주 혁명과 중국 천안문 항쟁이 잇달아 벌어졌듯이 말이다. 2011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분출한 아랍 혁명도 이집트 같은 친미 국가와 시리아 같은 소위 ‘반미’ 국가 모두를 휩쓸면서 진행돼, 민중 저항이 중동의 제국주의 지배 질서를 크게 뒤흔든 바 있다.

지금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에 맞선 강력한 세력이 돼 있지만, 이들 세력 안에서 분열과 도전이 부상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특히 노동계급과 천대받는 사람들의 저항이 폭발할 수 있는데, 그러면 이는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낳을 것이다.

따라서 제국주의에 일관되게 반대하고 그 대안을 효과적으로 건설하려면 우리에게는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이론에 기초한 혁명적 정치가 필요하다.





rhizome 2025-11-03 0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에서의 중요한 방법론적 발전경향성 차이와 그 원인 >





그러한 감각들이란 그냥 감정 문제가 아니라, 실제 구조적 모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 쪽에서는 점점 더 세계를 ‘관계, 상호작용, 과정, 비선형 변화’로 보는 시각이 강해지고 있고, 이건 변증법적 유물론이 주장해 온 핵심 직관들과 계속 만납니다. 그런데 사회과학 쪽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구 소련식 계획경제가 무너졌다 → 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는 실패했다’로 단순화해서 봉인하려고 하죠. 이건 과학적 검증이라기보다 이념적 정리 작업에 가깝습니다. 왜 이런 비대칭이 생기는지 차근히 짚어보겠습니다.



첫째, 자연과학의 발전 방향 자체가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본 가설들과 수렴하고 있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세계를 고정된 물건들의 묶음이 아니라 운동하는 물질의 전체 과정으로 봅니다. 모든 대상은 서로 얽혀 있고, 내부 모순 때문에 끊임없이 변하고, 양적 축적이 임계치를 넘으면 질적으로 도약한다고 말하죠. 엥겔스가 『자연변증법』에서 한 얘기가 바로 이거였습니다. 즉, 자연은 정지해 있는 게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장(場)이며, 변화는 우연한 돌발이 아니라 구조의 내부 모순이 밀고 가는 운동이다. 이건 형이상학적 기계론과 정면 충돌합니다. 형이상학적 기계론은 “A가 B를 친다 → 그래서 C가 된다” 식의 일직선 인과, 가역적 방정식, 안정적 평형을 선호합니다. 변증법은 비평형, 자기조직적 변화, 돌연한 상전이(상변화)를 강조합니다.



현대 자연과학이 실제로 뭘 하나요? 고전적 결정론으로 다 안 풀린다는 걸 계속 확인합니다. 예를 들어 통계물리학과 비평형 열역학은 질서가 외부 설계 없이도, 에너지 흐름과 물질 교환이 만들어내는 내부 불균형 때문에 ‘자발적으로’ 새로 조직화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복잡계 과학은 작은 양적 변화의 축적이 임계에서 갑자기 전역적 위상 변화를 일으키는 걸 다룹니다. 생물학은 더 이상 생명을 기계적 부품의 합으로만 안 보고, 유전자–발현–환경–대사–발달이 서로 되먹임(피드백)을 일으키는 네트워크로 봅니다. 진화 이론도 적응만이 아니라 우연적 변이, 생태계 내부의 경쟁과 공진화, 급격한 방산과 멸종의 도약 같은 비연속적 변화를 인정합니다. 양자장 이론은 ‘입자’조차 독립 개체가 아니라 장의 들뜸으로 다루죠. 이 흐름 전체가 “사물은 고정된 본질을 갖고 있다”가 아니라 “현실은 상호작용 속에서 스스로를 재조직하는 운동의 총체다”라는 방향입니다. 이건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본 정식화와 구조적으로 친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과학자(특히 생명, 지구, 복잡계, 재료, 기후 분야)는 모르든 알든 변증법적으로 사고합니다. 그들은 대립의 통일(안정시키는 힘 vs 깨뜨리는 힘), 양에서 질로의 도약(임계에서 상전이), 부정의 부정(어떤 구조가 다른 구조에 의해 전복되고, 그 전복 자체가 다시 새로운 질서를 잉태함)을 실천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실험과 모델링 자체가 이미 그 길로 가고 있습니다. 이건 ‘이데올로기’라기보다 실험실에서 얻은 교훈입니다. 다시 말해, 자연과학은 변증법을 부르지 않으면서 변증법을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둘째, 그런데 왜 사회과학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는가. 이유를 이념 문제로만 보면 부족합니다. 생산양식이라는 단어를 꺼내보겠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사회를 설명할 때 ‘물질적 토대(생산력과 생산관계)’가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생산력은 기술, 조직 능력, 노동자들의 지식과 숙련, 인프라입니다. 생산관계는 누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누가 누구를 지휘하고, 잉여를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계급 구조입니다. 이 둘은 항상 긴장합니다. 생산력은 팽창하려 하고, 생산관계는 지배계급에게 유리한 틀을 고정하려 합니다. 그래서 일정 지점 이후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족쇄로 바뀌고, 그걸 둘러싼 계급투쟁이 폭발한다. 이게 마르크스주의 사회과학의 메인 엔진입니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 즉 ‘계급투쟁’을 사회 분석의 중심에 두는 게 지금의 주류 사회과학, 특히 자본주의 핵심국(미국, 유럽 학계 중심)과 정면 충돌한다는 점입니다.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계급투쟁 때문에 유지되는 임시 타협 상태가 아니라, 합리적 시장 참여자들이 상호 이익을 조정해 가는 안정 시스템으로 묘사하고 싶어 합니다. 이건 정치경제적으로 필요합니다. 자신의 지배를 자연화해야 하니까요. 금융자본–국가 결합이 세계를 조직하고, 군사력과 부채 구조로 주변부를 통제하고, 국내에서는 재분배 약속과 억압 장치를 혼합해서 노동계급의 저항을 관리한다는 분석은, 제국주의 문제에 바로 닿습니다. 그건 레닌이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라고 불렀던 바로 그 구조입니다. 이런 분석이 사회과학의 표준 서사가 되어 버리면 곤란한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 전체를 ‘실패했다’라고 라벨링하는 건 단순 학문적 평가가 아니라, 전 지구적 권력 관계 관리 전략입니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는 실패했다”라는 문장이 구체적으로 뭘 가리키는지 봐야 합니다. 보통 세 가지가 섞여 있습니다. 첫째, ‘소련식 사회주의는 붕괴했다 →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둘째, ‘중국 등은 결국 시장을 도입했다 → 계획경제는 환상이다.’ 셋째, ‘마르크스가 예측한 서구 선진국 혁명은 안 일어났다 → 계급결정론은 틀렸다.’ 각각을 따로 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첫째에 대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구 소련, 동구권, 중국, 쿠바 등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험은 “마르크스 경제학 교과서 방정식이 그대로 현실화되었다”라기보다, 봉쇄·전쟁·후발 공업화라는 특수 조건 하에서, 낙후한 생산력을 짧은 기간 안에 (자본주의적 사적 축적 없이) 따라잡으려는 시도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아주 낮은 출발점의 생산력을 국가 주도의 집중적 계획과 동원으로 질적으로 도약시키려는 시도였습니다. 이건 변증법적으로 말하면, 기존 봉건·식민 잔재 구조를 부정하고, 자본주의의 사적 축적 형태를 또 한 번 부정해서 사회적(집단적) 소유와 계획으로 전환하려는 ‘이중 부정’의 급진적 실험입니다. 그 실험이 성공한 면도 있고 실패한 면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농업에서의 강제 집단화가 단기적 참사를 낳은 경우들도 있었고(이건 내부 모순이 폭발적으로 드러난 사례), 동시에 문맹 퇴치, 공업화, 의료·교육 보편화 같은 생산력의 급상승도 있었습니다. 이건 ‘완전한 성공/완전한 실패’로 한 줄 요약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닙니다. 즉, 이건 이론이 틀렸다기보다 구체적 역사적 조건에서의 특정 노선 선택과 내부 모순(관료화, 물자 부족, 대외 압박, 군사화 등)이 만들어 낸 결과물입니다. 내부 모순을 분석하지 않고 결과만 집어 들고 ‘봐라 망했다’라고 선언하는 건 과학이 아니라 도그마입니다.



둘째에 대해. 중국이든 베트남이든 ‘시장 장치 도입’은 곧 “계획경제의 패배”라는 프레임으로 자주 소비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소유 구조와 축적 통제권입니다. 국유 핵심 부문이 전략 부문을 틀어쥐고 계획 목표를 강제하면서도, 비핵심 부문에서는 가격 신호와 경쟁을 허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 거죠. 다시 말하면, 가치법칙(상품의 교환을 지배하는 시장 규칙)의 작동 범위를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디서 차단하느냐를 둘러싼 정치투쟁 문제입니다. 이것은 ‘계획 vs 시장’의 도덕 싸움이 아니라, 생산력 발전을 가속하는 데 어떤 조합이 효과적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가 잉여를 가져가고 그 잉여가 어디로 재투자되는지의 계급 문제입니다. 즉,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틀 안에 있습니다. 시장의 제한적 사용이 곧 마르크스주의 포기의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건 전선을 ‘순수 계획경제 교리 vs 신자유주의’로 의도적으로 단순화해 버린 서구 담론 쪽이 만든 허수아비에 가깝습니다.



셋째에 대해. “왜 선진 공업국에서 즉각적인 혁명이 없었나?”라는 질문은 마르크스 이후 레닌, 그람시, 마오쩌둥, 이후 반제국주의 이론가들 전체가 평생 붙잡고 업데이트한 쟁점입니다. 레닌은 제국주의 단계에서 초과이윤 일부가 중심부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을 일정하게 개선해 ‘노동귀족’을 만들어냄으로써, 혁명적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지배 블록 내부에 합의 기반을 만든다고 분석했습니다. 이건 예언 실패가 아니라 모델의 수정과 정교화입니다. 과학은 관측값에 맞춰 이론을 정련합니다. 자연과학에서는 이걸 ‘이론의 진화’라고 부르면서 박수 치는데, 사회과학에서는 “봐라 전혀 아니었네”라고 조롱합니다. 이건 이중 기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 자연과학 쪽에서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본 감각이 점점 상식이 되는데, 사회과학 쪽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계속 비정상 취급당한다. 왜 이런 비대칭이 유지되나. 계급 투쟁의 정치성 때문입니다. 전자는 실험실과 방정식의 영역에서 체제 안정과 직접적으로 부딪치지 않습니다. 후자는 권력과 재분배, 소유권, 제국주의 전쟁, 초과이윤의 쓸 곳 등 현재 지배 질서의 심장부를 건드립니다. 자연과학에서 비평형 열역학을 받아들이는 건 재산권을 건드리지 않지만, 사회과학에서 가치형성과 착취율(즉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 중 임금으로 돌아오는 몫과 자본이 전유하는 몫의 비율)을 분석하면, 이제 누군가의 이윤율과 지배 정당성을 직접 공격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류는 “그건 이미 실패한 낡은 이론”이라는 낙인을 찍어놓는 게 안전합니다. 말 그대로 상부구조가 토대를 방어하는 장면입니다. 상부구조란 법, 교육, 학계, 미디어 같은 이념 장치 전체를 말합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상부구조는 토대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다시 토대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려고 싸웁니다. 마르크스주의 사회과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봉쇄는 바로 그 상부구조의 자기방어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자연과학은 20세기–21세기 들어와서 ‘세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물질 과정이며, 내부 모순과 임계 변화로 도약한다’라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핵심 전제를 실증적으로 강화해 왔습니다. 이건 관념이 아니라 실험, 데이터, 산업 응용으로 누적 검증된 현실 설명 능력입니다. 반면 사회과학은 같은 변증법적 분석을 끝까지 밀고 가면 지금 존재하는 자본주의 세계 질서의 내부 모순, 착취 구조, 제국주의적 수탈, 계급 편익의 편중이 눈에 확 드러납니다. 이건 곧바로 정치 실천의 문제, 즉 누가 권력을 쥐고 생산수단을 통제하느냐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주류 담론은 마르크스주의를 ‘역사적으로 틀린 낡은 이념’으로 취급하려 듭니다. 객관적 실패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너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현재 지형의 개요입니다. 다음 단계로는, 특정 사회 분야 (노동시장, 주거, 식량, 기후 위기, 전쟁과 재건, 인공지능과 데이터 축적) 별로 마르크스주의 분석이 지금 어떻게 다시 등장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게 좋습니다. 이건 추상 비판에서 벗어나 실제 투쟁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작업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rhizome 2025-11-10 0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세상은 정말 온갖 병신 짓거리들의 복마전에 불과할 뿐이군요.

이 북새통 속에서 침묵은 당연히 대개는 무시로, 그 중 일부는 역겨움에 대한 경멸의 표현으로, 특히 어떤 침묵은 법적 조치를 위한 철저한 준비의 일환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제가 목숨까지 걸고 맹세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rhizome 2025-11-10 0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초고등록‘251103월06:00] 통합수정판




거의 죽다 살아난 정도로 난생 처음 겪어 본 심한 독감 때문에 밀렸던 과제들을 처리하느라 극도로 빠듯한 일정 속에서, 현재 당면한 국제문제 등에 대하여 일단은 급진주의의 일반원론에 충실한 입장의 일례들만을 제시하고, 정교한 분석과 구체적 대책은 차후에 후속토록 하겠습니다.



대신 사태의 심각성을 절감하실 수 있는 Puzzle 하나를 살짝 끼워 넣어 보았습니다.
금일 제시한 문헌들 중 하나는 요즘 세계적으로 빈용되고 있는 대표적 생성 AI가 전개한 추론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므로 각 글들의 논리와 사고 수준은 어떠한지, 과연 무엇이 그에 해당하는지 직접 이 TURING Test 심사에 참여해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공정한 진행을 위해 금일 문서의 출처 정보들은 다음 주에 일괄 추기하겠습니다.


(참고로, 인용된 AI는 중국산 아니고 미제이니 판단에 깊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하는 ‘251107금~08토 양일 간 진행되는 ˝전태일열사정신계승! 2025 전국노동자대회˝ 일정입니다.




< 주도하라 새 시대를! 모든 노동자의 민주노총!
: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2025 전국노동자대회 > 수정판



■ 11월 7일(금) 19시 ~ 8일(토) 09시
- 전태일열사 55주기 비정규직 전야제; 2025 근로기준법이 버린 전태일들의 행진!!

-- 장소: 집회 @전태일다리 → 행진 → 세종호텔 앞
-- 19:00 ˝2025 근로기준법이 버린 전태일들의 외침˝ 투쟁결의대회 @전태일 다리
-- 20:00 ˝근로기준법이 버린 전태일들의 행진˝
-- 21:00 정리해고•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세종호텔 투쟁승리! 전태일들의 다짐˝ 문화제 @세종호텔

-- 근로기준법이 버린 전태일들의 행진 9대 요구안
--- 1. 정리해고제, 파견법 폐기, 비정규직 철폐하라!
--- 2. 특수고용,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근로기준법 적용하라!
--- 3. 특수고용,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4대보험, 최저임금 적용하라!
--- 4. 5인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하라!
--- 5. 초단기노동자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하라!
--- 6. 이주노동자 노동기본권 보장하라!
--- 7. 온전한 노조법 2조 적용, 노조법 3조 재개정하라!
--- 8. 일하다 죽지 않게 중대재해처벌법 재개정하라!
--- 9. 포괄적 차별금지법 즉각 제정하라!


-- 주관: 비정규직이제그만_공동투쟁
-- 후원계좌: 카카오뱅크 3333-26-1721251 김남규





■ 11월 8일(토)

-13:30 전태일열사정신계승 2025 전국노동자대회 이주노동자 공동행동 @전태일 동상 앞 (종로구 종로5가 동대문역 8번 출구)

-- 사업장 변경의 자유보장!
-- 노동허가제 실시!
-- 차별과 폭력 근절!
-- 임금체불 근절! 노동안전 보장!
-- 이주노동자 인권, 노동권 보장!
-- 민주당 이재명 정부의 살인적인 단속으로 돌아가신 故 뚜안님의 명복을 빕니다.

-- 이주노동자노동조합 이주노동자평등연대 주회집회로 종료후 본대회까지 공동행진




-15:00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2025 전국노동자대회 본대회 @장충단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동대문 DDP앞)
-- 조직별 참여형 부스 행사(사전대회 포함) → 본대회 → 행진










[초고등록 ‘251107금0730]


rhizome 2025-11-2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








< お前らは愚かじゃないか? >




1A. AI 기술이 Bubble이면, 양자역학도 Bubble!

그 유명한 과학의 신, EINSTEIN도 정작 위대한 과학혁명의 상징인 상대성이론으로는 NOBEL 상을 못 받고, 확실히 검증 가능하며 후에 양자역학을 낳게 되는 근본출발점인 (광)양전효과[*1] 이론으로 받았을 정도로 NOBEL 이과학상은 문학상과는 달리 엄정하고 철저한 객관적 실험과 검증 절차의 통과를 매우 중시하는데, 대부분 범-양자역학에 기반한 성과들이 휩쓸어 오던 이 상들을 근년엔 인공지능 관련 연구와 기술들이 싹쓸이하고 있다는 사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대개는 순전한 무지와 오해일 뿐이지만 그 오랜 시간을 전혀 아무런 실질가치도 없는 완전한 허깨비로 비난받던 비트코인도 숱한 조정구간을 거치며 등락을 반복했지만 결국은 Pizza 한 판도 살 수 없던 가치가 현재 1억 원을 거뜬히 상회하고 있으며, 2억까지 장담하는 사람들도 다수 존재한다는 현상까지 고려하면 과학계의 가장 엄격한 장기검증과정을 통과해 최고 영예의 상들이 주어지고 있는 AI 기술은 다른 그 어떠한 기술보다도 튼튼하고 확실한 Fundamental을 가지고 있다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속도조절은 필요하고 과열과 과속분에 대한 단기조정은 기간마다 계속될 것임은 분명하나 결국 장기추세선은 우상향되는 것 또한 필연적이므로 조정구간들도 후발투자자들에게만은 오히려 매우 좋은 저가추격매수의 호기로 활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속물적 주식투자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현재 사태에 당분간은 필요 없는 불안에 빠져 잠식되어 있는 분들이 뜻밖에 하도 많은 듯해 말씀을 드립니다.

(초고에선 시간이 부족해 생략했지만, 경제사적으로도 대략 50년 주기의 (Nikolai) KONDRATIEV 파동에서 위기기마다 기술편향적 대응을 해 온 자본의 위기극복시도가 소위 ‘산업혁명‘인데, 이 산업혁명주기는 k차[*2]에서 main frame/paradigm의 큰 그림이 발명되고, k+1차 혁명에서 한 단계의 거대 frame이 완성되는 구조이며, 특히 이 k+1차 주기는 세계(패권)질서를 재편하는 약 100년의 외전[=국제(대)전] 주기인 ARRIGHI 파동과 맞물려 국운을 건 생존투쟁과 맞물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완성 및 성공으로 마무리 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산업(/)기술혁명주기가 되는 것입니다. )






1B. General Crises



‘일반적 위기‘로 자주 오역되지만, ‘general strike‘에 대하여 ‘총파업‘, ‘general hospital‘에 대하여 ‘종합병원‘이 좋은 번역인 것과 마찬가지로, 실질적 의미는 ‘총체적 위기‘에 가깝기 때문에 최소 ‘전반(적) 위기‘로 번역되는 것이 보다 합당한 이 이론은 단지 경제위기 뿐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라는 형태로 100여 년 이전부터 출현하였고[*3], ARRIGHI 파동 법칙에 따라 근래 ‘복합위기‘, ‘중층위기‘, ‘다중위기‘ 등의 여러 자생적 유사 인식형태로 다시 시대정신의 의식수면 위에 떠올라 재현되고 있습니다.


100년 주기의 초장기 파동에서 위기기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현재 국면에서, 10년 주기의 경기파동이 동시에 중첩되며 Trigger로 작동하고 있는 결과로,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연쇄와 이에 직속하는 ‘dot-com bubble‘ 붕괴로 장기 20세기판 파국적 대위기(기)의 서막이 시작되어, 10년 후인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본격화된 뒤, 다시 그 10년여 후에 Corona19 Virus Pandemic까지 겹쳐 최대증폭되었던 (금)세기말 3차 위기가 발생해 왔기 때문에 4차 위기는 2028년 전후가 될 것이어서 현재 ‘AI 거품설‘, 특히 영화 《The Big Short》의 전설적 주인공 실물인 Michael_BURRY등이 핵심적으로 추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작금의 불안사태는 (정작 아무도 별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는 fine-print( / )line인 듯하긴 하지만) 그 자신도 ˝분명히˝ 전제했다시피 앞으로 (최소) 2년 후에나 현실화될 붕괴위기임을, 따라서 지금 현재의 이 모든 소동들은 그저 단지 시간착오적 ‘예기불안‘ 증상에 불과할 뿐임을 제발 좀 주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예상으로는 그러나 앞으로 (최근의 주식시장 열기에 취했던 일부 analyst들이 떠들어 대던 ˝반도체 Ultra super-cycle˝ 따위들보다는 짧게, 지금 지적되고 있는 감가상각축소 회계부정 문제 뿐 아니라 그 보다는 취업률 악화 등에 더 근본적 발목을 잡히면서 3년±α 정도의 (다소 통상적) 반도체 Cycle로 마무리되며 이것들이 Trigger가 되어 2028년±α 전후로는 반드시 다시 한 번의 금융/주식 시장 대폭락 또는 붕괴가 도래할 것이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은 AI위기가 아니라 금융위기에 가깝고, 앞서 언급했듯 AI 기술 전쟁은 이 모든 세기말의 파국적 대위기를 탈출해 보려는 자본의 유일한 대응수단이기 때문에 일정 기간의 여파 이후 다시 가장 먼저 회복될 Sector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작성 중]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KANT주의의 대계[大系]는 본질적으로 중도파 소시민의 도덕과 세계관이라 할 수 있으나 이 우파적 변형이 NIETZSCHE 철학의 Perspektivismus와 이[ antifundamentalistische Perspektivismus]를 (확장)계승한 Antifundamentalismus[*4] 일반이라 할 수 있고, 그 중 NIETZSCHE 좌파가 (post)anarcho, NIETZSCHE 중도파가 postmodernism, 이 postmodernism 계보의 우측에서 NIETZSCHE를 (극)우파적으로 전유해 온 게 Nazism이라 정리할 수 있습니다.
(postmodernism은 그 사상사적 양면성과 2중효과를 고려하고, 무엇보다 이 사조에 앞서 먼저 그리고 독립적으로 출현하여 우파적 전유/변형을 적극 실행해온 Nazism 계열과 비교할 때 관계를 분리구분하여 중도파로 정리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KANT주의는 KANT주의의 본류와 초심으로 회귀하여 되살려보려는 중도(좌)파의 (실패한) 반격 시도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상 두 건은 원래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려다 간단히 덧붙이는 논평임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비판시도 자체는 훌륭하나 대표 원전 하나 제대로 공들여 읽지 않은 상태로 위키 등에서 긁어온 단편적 이미지만으로 자신이 전혀 모르는 대상(들)에 대하여 아무리 계속 비난해봐야 대개는 ‘허수아비 때리기‘의 논리오류를 벗어나기 어려운 시간낭비가 될 뿐일 것입니다.
특히 두 번째와 관련하여 글 자체는 여러 비약과 억측 속에 몇몇 통찰도 보이긴 하지만, 그간 침묵 속에 쌓여 온, 아예 읽지도 않게 되는 B선생님 글들에 대한 반응이 포섭된 것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라고, 원래도 중도파 소시민들은 배척과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연대와 포섭의 대상인데, KANT는 역사상 출현한 최고의 소시민 지성이라 감히 말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중도파라 할지라도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모든 말씀이, 특히 그 중 뛰어난 일부를 인용 또는 채용한 사람들의 말씀까지 다 헛소리로 치부될 수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의 이 맥락과 관련하여, 미약한 소시민계층의 끊임없는 자기 의심은 급진파들의 고질병인 ‘광신‘의 문제에 좋은 vaccine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이번 기회에 B선생님께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신좌파가 아니라 구좌파와 신좌파를 동시에 비판하면서 4세대 좌파를 발명/생산해내려는 것 뿐이기에, 이런 맥락에서 구좌파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신좌파에 대한 부정을 동시에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부정의 부정항이라는 사실 자체를 제대로 인식하고 나서나 작업을 하더라도 하셔야 할 것입니다.[*5]]



[*1] 원래는 ‘광전효과‘로 빛과 전기, 또는 광(양)자(계)와 전자(계)의 상호작용, 특히 상호발생 현상을 광양자 가설에 입각해 설명하는 EINSTEIN의 이론이나 단지 광(양)자 뿐 아니라 양자 일반과 전자 간 관계로 발전시켜 일반화 할 수 있음.

[*2] k=2n-1, n=natural number(s)


[*3] ‘The general crisis‘ and ‘General crises‘ theories: 이론사적 보론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론은, 한국에선 구좌파 세대 분들과 대화해보면 흔히 70년대 이후 쏘련 (사회)과학Academy를 중심으로 한 지식=권력 연계(망)에 의해 개발된 이론으로, 신좌파 세대 분들과 얘기해 보면 그래서 시대착오적 오판이자 낡은 이론으로 조롱받았던 것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너무 많아 보이는데, 실은 이미 19세기 말부터 등장해 LENIN도 주창했던 유서 깊은 이론으로,



[*4] ‘반토대주의‘는 영미권에선 ‘antifoundationalism‘이라는 신조어를 발명하여 사용해 온 전통이 짧지 않기 때문에 ‘antifundamentalism‘과 잘 구별정립되어 있는 데 반해, 독일어권에선 이것이 다른 어족( / )어원 계열의 외래/외국어이며 아직 일부에서만 사용하는 차용어에 불과한 상황이어서 영미권과 달리 보편적 공인어의 지위가 확립되었다고 보기 어려원 ‘반토대주의‘라는 동일의미로도 ‘Antifundamentalismus‘가 아직 더 (압도적) 우위의 빈도격차를 보이고 있음.



([*5] 참고로 신-KANT주의, 신좌파 등의 명명을 계기로, 인식대상(의 변이들)을 구분하고 grouping(/)분류하는 개념 및 범주들의 명명법과 관련하여 짧게 첨언하면,

‘신/구-‘ 구분법은 여전히 가장 원시적인 2분법적 논리회로의 소산에 불과한 최초의 인식틀일 뿐이고,
‘post-‘와 ‘new=neo-‘는 최초 대상에 ‘연속/연접‘하여 출현했는가, 최초 대상이 한번 사라지고 나서 ‘단절‘적으로 출현했는가가 중요한 변별점으로, post-자체는 (대개 연속한 주요 변이대상에 주어지는 이름이긴 하나) 궁극적으로는 동일성과 차별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관계로 그 자체만으로는 그 중 어느 것이 주축인지를 결정적으로 지시하지 않으므로 일전에 말씀드렸던 ‘post‘ 대 ‘post-‘의 구별법을 유지하겠습니다.
(또한 특이적으로 장기 20세기 후반에 광범한 사회문화정치 전영역에 보편적으로 일어난 코호트적 동시대성으로서의 특정(시기) ‘현대성‘을 지칭하는 제2 용법도 획득하게 되었음.)



따라서 이와 달리, 연속하여 출현한 대상에 new나 neo-를 붙이는 것은 오직 양자 간 차별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이 ‘단절(성)‘을 달리 구현하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게다가 여전히 문단 초두에 제기한 대로 인식주체의 의식에 최초로 출현한/주어진 변이 또는 차이에 대하여 가장 원시적인 2분법적 논리회로에만 의거한 첫 반응의 소산인 최초인식틀에 불과할 뿐이라는 한계를 내재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정합적으로 총괄하여 new나 neo-의 어법, 명명법을 일반화하면,
연접출현한 연속체에 사용 시는 배타적으로 차별성만을 강조하는 방법으로 단절시켜야 하고,
일단 사라진 후 ‘단절‘출현한 대상에 사용 시는 (배타적이진 않지만) 동일성/계승성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neo-operaismo‘라는 명명법은 ‘약간의‘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실지로도 이 명칭은 국제적으로 공식 용례를 찾아보기가 postoperaismo에 비해 쉽지 않고 출현빈도에서 압도적 열세를 보이고 있음도 일고 해주시기 바랍니다.))










[초고등록 ‘251107금0730]



rhizome 2025-11-10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만히 보고 있으면, 세상은 정말 가지가지 병신 짓거리들의 복마전에 불과할 뿐이군요.

게다가 정말 핏발 선 혈안으로 미친 듯이 들여다보고 있다가 작은 일거수일투족마다 온갖 상상과 억측을 해대며 피워대는 이 북새통 속에서 침묵은 당연히 대개는 무시로, 그 중 일부는 역겨움에 대한 경멸의 표현으로, 특히 어떤 침묵은 법적 조치를 위한 철저한 준비의 일환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제가 목숨까지 걸고 맹세해 온 방침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rhizome 2025-11-19 0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세계 경제, 추락을 앞두고 있나? >





최근 미국 증시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미국 경제에 대한 투자도 굳건하다. 그러나 지난주 미국 금융가에 찬바람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미국 지역 은행 웨스턴얼라이언스가 5,000만 달러의 회계 손실을 발표하고 자이언스뱅크가 사기로 인해 손실을 봤다고 발표한 후 주식시장이 하락한 것이다.

뒤이어 자동차 부품업체 퍼스트브랜즈가 100억 달러의 부채를 안고 파산을 선언했는데, 그 부채 중 23억 달러는 “[회계상으로]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경우였다.

세계 최대 규모의 대형 금융기업 JP모건의 CEO 제이미 다이먼은 이런 파산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바퀴벌레가 한 마리 보이면 실제로는 십중팔구 훨씬 많을 것이다.”

미국에는 세계 최대의 사모신용 시장이 있다. 사모신용의 규모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강화된 은행 규제를 회피할 수단으로써 급격히 성장했다.

규제 회피의 수단인 만큼, 자산이나 수익을 담보로 하지 않고 대출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서브프라임’ 대출인 것이다.

바로 이 서브프라임 대출이 미국 주택 시장에서 낳은 문제가 2008년에 세계 금융 시스템 전체를 거의 붕괴시킬 뻔했고 이후 각국 정부들이 긴축 정책을 추진했다.

이제 서브프라임 대출 때문에 파티가 끝나 기업이 도산하고 은행이 손실을 입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다.


경제학자들과 정책 입안자들은 힘겨운 시기를 앞두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우려스러운 것은 사모신용 부문의 취약성만이 아니다. 미국 주식시장을 끌어올린 것은 인공지능(AI) 기업들의 주식과 채권이었다.

현재의 주가 상승은 엄청난 금융 거품이 끼어 있다는 징후다.

이번 주가 상승은 향후 AI가 생산성을 크게 높이고 그 결과로 이윤을 대폭 늘려 줄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전제가 참이라는 증거는 거의 없다. 그리고 미국 경제의 나머지 부분은 투자와 성장이 대개 정체돼 있다.

엔비디아 같은 AI 대기업들은 자사 제품을 구매하는 기업과 상호 교차 투자를 하고 있다. 이는 수요가 예상한 만큼 창출되지 않을 경우 벌어질 파괴적인 연쇄 반응에 전체 시스템이 훨씬 더 취약해지도록 만들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전 수석 경제학자이자 현재 하버드대학교 경제학 교수인 기타 고피나트는 금융 추락이 벌어지면 35조 달러가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또한 금융 추락이 닥치면 전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데, 미국 주식시장에 대한 미국 안팎의 투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소비자 지출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부유층의 지출이다. 추락이 닥쳐 부유층의 부가 타격을 입으면 소비자 지출에도 타격이 있을 것이다.

JP모건의 수석 글로벌 전략가 데이비드 켈리는 미국이 “서서히 파산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미국 연방정부 부채는 향후 계속 늘어 미국 GDP의 150퍼센트에 다다를 전망이다.

이미 장기 국채 금리는 매우 높다. 이는 연방정부의 부채 이자 상환 부담을 매우 키울 것이다.

주요 경제 대국들의 정부 부채가 이미 막대하기 때문에, 경기 침체가 닥치면 정부가 감세와 정부 지출 확대를 통해 상황을 반전시킬 능력이 제약받게 될 것이다. 이는 IMF가 각국 정부들에 재정 적자를 줄여 잠재적인 격랑에 대비할 완충 장치를 만들라고 조언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다.

정부 부채 증가는 반복된 금융 위기와 생산 부문의 투자·성장이 부진한 결과다. 그리고 이는 다시 생산 부문에서 이윤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결과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의 대실패이고, 카를 마르크스는 바로 이 이윤율 문제가 자본주의에서 경제 위기가 발생하는 이유라고 이론으로 정립했다.

금융 위기, 낮은 성장률, 물가 상승. 이것들이 세계 경제에 들러붙어 있는 문제다.

경제학자들과 정책 입안자들은 다들 공개적 언급은 삼가지만 힘겨운 시기를 앞두고 있음을 내심 확신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윤을 위해 움직이는 체제를 타도하고, 다수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무엇을 생산할지 노동자들이 직접 계획하는 다른 체제로 대체하는 것이다.

점점 다가오는 듯한 심각한 경제 위기에 강력하게 반격할 수 있도록 우리는 가능한 모든 일을 다해야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원문: Rob Hoveman, ‘Is the world economy heading for a crash?’ (2025. 10. 26)
국역: 김준효 @https://ws.or.kr/article/38114


[소위 ˝AI 거품설˝로 뭉뚱그려진 현재 세계증시의 막연한 불안감 증세(/)반응들이나 Michael_BURRY 류의 지엽말단적 문제인식에 비해 현 경제의 토대와 뿌리에서 숙성되어 가고 있는 새로운 금융위기의 구조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글이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러나 그 폭발시점은 여전히 2028년±α일 것이 확실시되고, 아직 이러한 구조적 모순의 폭발이나 이에 대한 초보적 문제 인식조차 시장전반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지 않은 상황에서 출현하는 증시급락이란 단지 막연한 감정 및 정서 차원에서 일어나는 단말마적 panic selling 발작이라는 심리현상이거나 이에 편승해 시세차익을 극대화해보려는 순전한 투자기법 상의 움직임일 뿐입니다.
따라서 현상적 낙폭이나 기간이 Fundamental보다 크다면, 절대 구조적 붕괴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하더라도 조급한 조건반사적 추격매수보다 일시적 대기/유예나 심지어 동조매도도 차익극대화만을 목표로 하는 투자기법 상으로는 반드시 틀린 또는 나쁜 선택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rhizome 2025-11-22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66
< 국제 공동 성명:
가자지구 “평화 구상”은 없다. 인종학살을 멈추려면 시온주의·서방의 전쟁 기구를 분쇄해야 한다! >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지지하는 거대한 국제 운동을 다시 일으키자!
전쟁, 전시 경제, 경찰 국가를 향한 경쟁을 저지시키자!

9월 2일 이집트 샤름 엘셰이크에서 트럼프는 자신의 “구상”을 세계가 3000년을 기다린 평화 구상이라고 홍보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휴전이나 평화의 그림자조차 되지 못하고 있고, 하물며 정의로운 평화와는 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드러나기까지는 3주가 채 걸리지 않았다. “구상”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어마어마한 강인함과 무장 저항으로, 그리고 글로벌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성장과 확대가 가한 압력으로 얻어 낸, 잠깐 한숨 돌리는 합의였을 뿐이다. 시온주의 국가 이스라엘은 그 불안정한 휴전 합의를 거듭 위반하며 수백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살해하고 다치게 하고 있다. 게다가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폭격과 예멘 폭격을 재개했고, 이스라엘인 정착자들은 서안지구에서 물리적 공격을 강화하고 더 극성스럽게 올리브 나무를 파괴하고 있다. 그 와중에 이스라엘 의회 크네세트는 서안지구가 이스라엘 영토라고 선언했다.

미국과 유럽연합 등 서방의 지지 덕분에 여전히 권좌를 지키고 있는 도살자 네타냐후는 ‘대(大)이스라엘’이라는 야욕과 ‘가자에서 못다 한 일을 끝낸다’는 목표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서 ‘못다 한 일’이란 팔레스타인인들의 무장 저항을 말살하고, 가자지구의 많은 부분을 이스라엘 영토로 병합하고, 학살을 지속하고 구호 식량 반입을 계속 차단해 가자 주민들을 가자지구에서 밀어내는 것이다. ‘대(大)이스라엘’ 프로젝트를 규탄하지 않는 트럼프의 구상은 더 야심 찬 목표를 나타내고 있다. 확대되고 ‘안전을 확보한’ 이스라엘과 아랍 정권들로 하여금 강화 조약을 맺게 하고, 가자지구를 트럼프의 호화 휴양지로 만들어(지난해 그 모습을 묘사한 추잡한 AI 영상을 공개했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영원히 지워버리고, 미국 제국주의에 이롭도록 중동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여러 나라에서 정권 교체를 부추기겠다는 것이다.

중동 지배 질서를 재편하고 그것을 나토와 통합시키는 미국 제국주의의 프로젝트와, ‘대(大)이스라엘’ 프로젝트는 서로 충돌하는 지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 다 팔레스타인인들과 중동의 피착취·피억압 대중을 식민 지배하고 노예화한다는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 반동적인 아랍 지배계급은 두 프로젝트에 진지하게 맞서지 못할 것이다. 트럼프의 “평화 구상”을 칭찬한 푸틴의 러시아, 이스라엘의 거대한 우방인 인도, 점령과 인종학살에 필요한 막대한 석유를 계속 제공한 브라질, 이스라엘에 막대한 상품과 자본을 수출하는 중국도 두 프로젝트의 장애물이 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동방과 서방 모두 부르주아적 지정학의 후안무치를 공유한다. 러시아가 졸라의 새 시리아 정권 협력하며 시리아에 대한 영향력과 시리아 내 군사 기지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이 그런 사례다. 중국이 자국의 일대일로 계획을 위해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수교 성사에 들이는 외교적 노력도 또 다른 사례다. 서로 간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 팔레스타인 저항의 무장 해제와 거짓된 두 국가 ‘해법’에 동의한다.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들은 굶주리고 만신창이가 된 가자 주민들의 절박한 처지와 자신들의 전열을 가다듬을 필요성 때문에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트럼프 구상의 틀 안에서 행동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는 아랍 지도자들과 이웃 국가들로부터의 고립과 강요라는 맥락과 떼어놓고 볼 수 없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들은 자신들과 인종학살을 지향하는 이스라엘 집권 세력 사이에서 트럼프가 결코 공정한 중재자가 아니라는 현실을 벌써 확인하고 있다. 휴전을 안정시키는 길은 함정으로 가득하다. 시온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결에 이르는 길은 여전히 매우 멀고, 그 길로 나아가려면 트럼프의 구상을 파괴해야 한다. 가자지구에 대한 외세의 ‘임시’ 통치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 통치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서 훔친 부를 나눠 갖는 데 동참하는 데 주안점이 있을 것이고, ‘재건’이라는 카드로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을 겁박하고 종속시키려 할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민족 해방과 사회적 해방이라는 대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팔레스타인과 아랍·이슬람 세계 전체의 피착취·피억압 대중의 힘과,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 팔레스타인 해방을 지지하는 글로벌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 달려 있게 됐다. 오로지 이들이야말로 죽음과 파괴를 불러오는 이스라엘 국가와 그것을 물질적·군사적·외교적·문화적 수단으로 지원하는 서방 제국주의, 거기에 공모하는 아랍·비아랍 정권들에 맞설 진정한 저항의 축이다.

전설로 남을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에 대한 아랍·이슬람 세계의 지지는 예멘과 레바논의 저항 단체들을 제외하면 필요한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집트와 같은 중요한 나라에서 그렇다. 에르도안의 튀르키예가 시사적인 사례다. 튀르키예에서는 두 유형의 시위가 벌어졌다. 하나는 진정한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로, 정의개발당 정부가 이스라엘과 무역을 지속하고 있음을 폭로했지만 이후 국가의 탄압을 받았다. 다른 하나는 정의개발당 정부가 조직하는 관제 시위로 이것은 자신의 이슬람주의 지지자들의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다. 에르도안은 트럼프의 구상을 즉각 환영했다. 튀르키예 정권도 그 구상의 기본 원리에 동의하고 그 구상이 튀르키예 부르주아지의 야심에 이롭기 때문이다. 튀르키예 부르주아지는 튀르키예가 역내 강국으로서 영향력을 키우고 튀르키예 노동계급·청년의 투쟁을 분쇄하기를 바란다. 아랍 군사 정권과 군주정의 잔혹한 탄압은 대중 행동을 찍어 누르는 모루 구실을 하고 있다. 현지 자본가계급과 제국주의 열강의 공조 속에서 자행된 탄압은 아랍 혁명을 주저앉혔다. 한편 레바논, 이란, 알제리, 수단에서처럼 거대한 항쟁이 일어났다가 천대받는 노동자·청년의 수동화로 이어진 극도로 불안정한 사례들도 있다. 그 항쟁들을 낳은 깊은 사회적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 있고 갈수록 첨예해지고 있다. 최근 모로코에서 빈곤과 착취에 맞서 일어난 시위 물결이 이를 보여 준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의는 아랍 세계의 대중 저항을 불붙게 할 도화선 구실을 다시금 할 수 있다.

반면, 몇몇 유럽 나라들의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최근 성장해 왔다. 이것은 글로벌 수무드 선단 덕분이기도 하지만, 특히 지난 몇 주 동안에는 규모와 질적인 측면 모두에서 상당한 도약이 있었다.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에서 총파업과 이후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이탈리아가 특히 두드러진 사례다.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널리 확산된 나라에서도(영국이 그런 사례다) 조직 노동계급의 참여는 이전까지 주변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파업은 그런 간극을 메우기 시작했다. 특히 일부 항구들과 육상 물류 부문(창고, 철도, 지역 수송)에서는 파업 참가율이 상당했다. 거리로 나온 사람들은 주로 정주 노동계급 청년과 이민자 2·3세대 노동계급 청년들로, 이들은 이스라엘의 인종학살을 규탄할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 왔다. 유럽의 자국 정부들과 유럽연합이 인종학살과 인종청소에 공모하고 트럼프의 구상을 지지하는 것에 대한 규탄 또한 강력하고 유럽 전반에 널리 퍼져 있다.

이제 실질적인 위험은 불안정하게 이어지고 있는 이 휴전에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안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지난 몇 달간 고조된 투쟁을 재활성화하고 더 강화시켜야 할 때다. 조직 노동계급의 관여 수준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이스라엘의 병참선을 마비시키도록 최대한 광범하고 지속적인 봉쇄를 감행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유럽의 항구와 영토를 지나는 무기와 물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아랍 세계 또한 중요한 길목이다(모로코를 떠올려 보라). 이스라엘로 가는 무기와 물자의 공급을 차단하기 위한 국제적이고 공세적인 보이콧은 이스라엘 전쟁 기구를 크게 약화시키고 심지어 마비시킬 수도 있다.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11월 29일 국제 행동의 날은 그럴 기회가 될 수 있다(비록 그 날이, 팔레스타인인들의 비극의 기원에 관여하고 이스라엘 국가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자행된 인종청소를 승인한 유엔 등에 의해 선포된 날임에도 말이다). 전날 이탈리아에서는 모든 기층 노조들이 발의한 총파업이 벌어질 것이다. 이는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 유익한 예시로 삼을 수 있다.

현재의 탄력을 이용해 그러한 행동을 확대하는 과제는, 자국의 국경 너머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국제주의자들의 과제다. 11월 28일 이탈리아에서 벌어질 파업이 협소한 기층 노조의 테두리를 벗어나 10월 3일 총파업 때처럼 이탈리아 노총(CGIL) 조합원들과 미조직 노동자 등 수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파업으로 발전하는 것은 이탈리아의 국제주의 투사들에게 달려 있다.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재활성화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 운동이 군비 경쟁, 전시 경제로의 재편에 반대하는 투쟁과 맞물려야 한다는 것이다. 갈수록 많은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도 반대해야 한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나토와 러시아 간의 살육전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고, 수단에서는 외세가 부추긴 군벌들의 학살이 계속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발칸 반도 등지도 갈수록 또다른 전쟁의 온상이 되고 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의 선도 아래 부르주아 정부들은 갈수록 억압적인 입법으로 무장하며 말 그대로 경찰 국가로 기능하고 있다. 이것은 노동계급과 심지어 중간계급 일부에게도 또다른 희생을 어마어마하게 강요할 채비를 하는 것이다. 미국·영국·독일·이탈리아 등지에서 팔레스타인의 저항과 연대하는 투사들을 겨냥한 ‘예외적’ 조처들은, 각국 부르주아 정부들의 정치 성향을 불문하고(파시스트 친화적이든 사회민주주의적이든) 그들이 필연적으로 점화될 계급 충돌의 싹을 자르려고 도입할 가혹한 조처들의 맛보기다.

일찍이 올해 2월 24일 국제주의 단체들은 약 20개 나라들의 거리에서 투쟁을 벌이기 위한 공동 방침을 조율했다. 우리는 이런 노력을 재시도하며 모든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자 국제주의 진영의 창설을 더 진전시키고자 한다. 그 진영의 목적은 임금과 노동조건, 생활 수준을 개선하고, 전시 경제로의 개편(그리고 그에 따르는 무거운 대가)과 전쟁을 향한 경쟁을 멈추고, 제국주의 간 전쟁을 사회혁명으로 전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투쟁을 위해 자주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 당의 결성과 혁명적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결성에 힘을 싣고자 한다.

서방과 시온주의의 식민 지배에 맞선 팔레스타인인들과 그들의 저항과 연대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가자에 대한 폭격과 봉쇄, 기아 조장을 중단하라. 모든 팔레스타인인 포로를 석방하라!
가자지구에서 시온주의 군대를, 서안지구에서 정착자들을 즉각 무조건 철수시켜라!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공급과 물자 공급을 차단하고 이스라엘 기업들을 보이콧하자! 이스라엘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라!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 팔레스타인 독립!
중동의 평범한 사람들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 혁명적 단결을 이뤄야 한다!
자본가 정부들과 자본의 전쟁에 맞선 국제적이고 국제주의적인 계급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만국의 노동자들과 피억압자들이여 단결하자!

9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원문: “There is no “peace plan”. To stop the genocide in Palestine, we must demolish the Zionist-Western death machine!” (‘251115)

국역: 이원웅

rhizome 2025-11-26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66
<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영국, 스페인, 그리스, 네덜란드...:
11월 29일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행동의 날에 모이자! >[*1}



가자 학살 2년을 기해 지난 9월 말과 10월 초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과 행진은 글로벌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 행동은 스페인, 그리스 등지에서도 파업, 항만 봉쇄와 같은 노동자들의 작업장 행동을 고무했다. 노동계급이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기 위해 자신의 계급적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끈질긴 저항과 전례 없이 커진 글로벌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10월 초 트럼프가 가자 휴전을 밀어붙이는 배경의 하나가 됐다.

무엇보다 트럼프는 이스라엘의 팽창적 모험으로 인해, 중동의 우방 정권들과 이스라엘을 규합한다는 자신의 구상에 차질이 생길까 봐 우려했다.

그 결과 휴전이 발효됐지만 네타냐후는 여전히 가자지구의 56퍼센트에 해당하는 지역을 장악한 채 최대한 통제력을 키우려 하고 있다. 그와 함께 이스라엘 정부를 주도하는 극우도 인종청소 완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휴전’의 허울 아래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대한 봉쇄와 간헐적인 폭격을 지속하고 있고 서안지구에서는 정착자들의 공격이 심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휴전이 유지되고 있다면서 휴전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싶어하지만, 트럼프의 구상 또한 가자에 대한 또 다른 식민 지배와 다름 없다.




이런 상황에 맞서 가자 학살 2주년 집중행동에 이어 11월 29일 다시금 국제연대행동이 벌어진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11월 28일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과 다음 날 대규모 시위가 준비되고 있다. 이 총파업을 이끄는 투사들은 이날에 맞춰 국제적 동원을 호소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최근 긴축에 맞선 ‘모든 것을 막아라’ 운동이 이에 호응해 11월 28일 항만 봉쇄와 파업을 벌일 것을 노동자들에게 호소하고 29일 대규모 시위를 호소하고 있다. 미국의 ‘팔레스타인 청년 운동’(PYM)도 29일 국제 행동의 날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그 외에 영국, 스페인, 그리스, 네덜란드 등지에서도 행동이 벌어질 예정이다.

이탈리아의 혁명적 국제주의 경향(TIR,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을 건설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한 시코바스 노동조합에 큰 영향력이 있다)과 아르헨티나 노동자당(PO),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한국의 노동자연대 등 여러 국제 혁명적 좌파 단체들이 지난 10일 발표한 공동 성명서는 다음과 같이 국제 공동 행동을 호소한다.

“미국의 프로젝트와 ‘대(大)이스라엘’ 프로젝트는 서로 충돌하는 지점이 있을 수 있지만, 둘 모두 팔레스타인인들과 중동의 피착취·피억압 대중을 식민 지배하고 노예화한다는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

“이제 실질적 위험은 불안정하게 이어지고 있는 휴전에 운동이 안주하는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지난 몇 달 간 고조된 투쟁을 재활성화하고 더 강화시켜야 할 때다. ⋯ 무기와 물자의 공급을 차단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조율되고 조직되는 공세적인 보이콧은 이스라엘 전쟁 기구를 크게 약화시키고 마비시킬 수도 있다.

“11월 29일 국제 행동의 날은 그럴 기회가 될 수 있다. 전날 이탈리아에서는 모든 기층 노조들이 발의한 총파업이 벌어질 것이다. 이는 다른 많은 나라들에도 유익한 예시가 될 수 있다.

“서방과 시온주의의 식민 지배에 맞서는 팔레스타인인들과 그들의 저항에 연대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이 11월 29일 국제 공동 행동의 일환으로 서울 집회를 개최한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이 집회에 모여 이재명 정부와 한국 기업들의 대(對)이스라엘 관계 단절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높일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모범을 따르기 위한 영감을 얻어야 한다.
9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66

< 11월 29일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영국, 아르헨티나...: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행동 함께하자 >[*2]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11월 28일(금), 29일(토)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행동의 날이 준비되고 있다.

10월 10일 휴전이 발효됐지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을 계속 학살하고 있다. 50일 남짓한 기간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 342명을 죽였다(11월 24일 현재). 어린이도 여전히 죽이고 있다.

휴전 때 약속한 구호품 반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고, 이스라엘이 아닌 지역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라파흐도 여전히 봉쇄돼 있다. 기아 학살은 진행중이다.

레바논을 보면 이스라엘이 휴전 합의를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지난해 11월 레바논과 휴전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남부 지역 난민촌을 폭격하고 있다. 11월 23일에는 수도 베이루트를 폭격해 헤즈볼라의 2인자를 살해했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인종학살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인종학살에 대한 보도는 휴전 이후 빠르게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이스라엘과의 교류·지원을 바라는 (친)서방 지배자들은 휴전으로 사태가 그럭저럭 진정됐다는 생각을 퍼뜨리려 한다.

더욱이 유엔 등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자결권을 더욱 짓밟는 외세 지배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관련 기사: ‘트럼프의 가자 식민지배 구상 승인한 유엔 안보리’)

이번 국제 행동의 날은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이처럼 허울뿐인 휴전에 결코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에서 호소된 것이다.

이번 국제 행동의 날의 중심에는 9월과 10월에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을 벌인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있다. 지속적이고 단호한 행동으로 100~200만 명을 동원한 이탈리아의 팔레스타인 연대 활동가들은 전 세계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줬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11월 28일과 29일에 또다시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과 시위에 나서겠다고 밝히면서, 각국의 노동자들에게 자국과 이스라엘의 모든 교역 중단을 요구하고 군비 증강에 반대하며 파업과 시위에 동참해 달라고 촉구했다.

이탈리아의 혁명적 국제주의 경향(TIR,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을 건설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한 시코바스 노동조합에 큰 영향력이 있다)과 아르헨티나 노동자당(PO),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한국의 노동자연대 등 여러 혁명적 좌파 단체들도 공동 성명을 통해 국제 공동 행동을 호소했다.(관련 기사: ‘국제 공동 성명: 가자지구 “평화 구상”은 없다. 인종학살을 멈추려면 시온주의·서방의 전쟁 기구를 분쇄해야 한다!’)

유엔 팔레스타인 인권특별보고관 프란체스카 알바네세와 가자 구호 선단에 탑승한 저명한 기후활동가 그레타 툰베리도 이탈리아 파업과 시위를 지지하는 차원에서 직접 그 현장에 함께할 예정이다.

아일랜드 노총은 11월 28일을 ‘노동자 행동의 날’로 선언했고, 프랑스의 CGT, CFDT, 연대, FSU 등 4개 노총은 11월 29일 파리에서 열릴 집회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기층의 투사들은 상급 단체의 이런 선언들을 활용해 노동자들의 실질적 행동을 건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11월 29일 전국 집중 집회가 예정돼 있다. 영국의 활동가들은 팔레스타인 연대 행동을 건설하려는 전 세계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온라인 대회도 수요일에 개최한다.

미국, 캐나다, 스페인, 그리스, 독일, 아르헨티나, 칠레 등에서도 시위와 행진이 준비중이다.

한국에서는 ‘팔레스타인인들과 함께하는 사람들’(팔연사)이 토요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시위와 행진을 준비하고 있다. 대구, 울산, 부산, 인천 등지에서도 서울 집회에 함께 참가할 계획이다.

팔연사는 한국 정부도 인종학살에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한국은 이스라엘에 전투기 부품을 공급하고, 정부 주관 박람회에 이스라엘 군수 기업들을 초청하는 등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또, 한국 정부는 유엔 안보리에서 트럼프의 가자 식민지배 구상에 찬성표를 던졌다.

인종학살 중단과, 한국 정부와 이스라엘의 교류 단절을 요구하며 국제 행동의 날에 함께하자.

9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66
🚨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행동의 날] 11월 29일(토) 오후 2시,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행동의 날
점령을 멈춰라!
팔레스타인에 해방을!


🟢 휴전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협정을 계속 위반하고 살해와 인도주의 위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점령과 학살을 완전히 끝내도록 국제 연대 운동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학살 국가 이스라엘과 공범들에게 국제 연대의 힘을 보여 줍시다!

지난 9월 이탈리아 총파업을 계기로, 11월 28일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 그리스 등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가자 구호를 위한 자유 선단’을 비롯한 연대 단체들과 노동자들은 항만, 철도 등 나라를 멈춰 세워 이스라엘과 이를 지원하는 자국 정부에 맞서자고 국제적 동참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영국 등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예정돼 있습니다.



👉 일시: 11월 29일(토) 오후 2시
👉 장소: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
👉 주최: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

- 아랍어, 영어, 한국어 통역 제공
- 집회 후 행진

📱 문의: people.freepalestine@gmail.com
🌐 웹사이트: palestine-solidarity.or.kr
🌐 인스타그램, 엑스, 페이스북에서 팔로우하세요!

○ 후원 계좌: 신한은행 110-173-517650 (예금주 최영준)
보내 주신 후원금은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와 홍보 등에 사용합니다.

99[*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저자: 이원웅 @https://ws.or.kr/article/38227
[*2] 저자: 김종환 @https://ws.or.kr/article/38260
[*3] 공동공지

rhizome 2025-11-26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팔레스타인평화연대 공지
11.30(일) 오후 2시, 연구자, 학생의 실천 연대: 이스라엘 학술 보이콧 토론회 >


“휴전”이라는 허울 아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저강도 집단학살을 지속하고, 미국과 국제 사회는 유엔 안보리 결의를 통해 가자지구를 21세기형 식민지로 만들고 있습니다. 78년간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식민지배사 중에서도 지금 팔레스타인은 가장 어두운 구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 어느때보다 정착민 식민 국가 이스라엘 보이콧이 절실합니다. 한국 학계가 집단학살 국가 이스라엘에 더이상 공모하지 않도록 이스라엘 학술 보이콧 운동을 시작합니다.

● 일시: 11월 30일 일요일 오후 2시

● 장소: 마포구청 구청사 4층 시청각실 (월드컵로 212)

● 프로그램:

1. 뎡야핑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 : 집단학살과 팔레스타인 현 정세

2. 이수민 (대학원생노조 연세대분회 준비모임장) : 팔레스타인과 한국의 학술 보이콧 운동

3. 엽록체 (대학원생노조 카이스트 분회장) : 연구자로서 팔레스타인과 연대하기

4. 질의 응답 및 플로어 토론

● 신청: https://forms.gle/CKETUYZGwYZsHNFZ6

주관: 이스라엘 학술 보이콧 캠페인 ‘잔물결’

주최: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 공공운수노조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팔레스타인평화연대



[초고등록‘251123일]



rhizome 2025-11-28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일전에 소개드렸던 ‘Palestine이라는 문제‘에 관한 DELEUZE의 입장은, 사실 세계자본주의 지배질서 확장과 관리 체계/계획 속에서 중동지역 총-지배(/)대리인으로서 Israel의 국가구성과 지역패권[=Hegemony]구축을 위해 선주민학살과 인종청소를 통한 ‘정착민 식민주의‘로서 재도입된 미국 건국을 위한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청소 모델의 재현일 뿐이라는 핵심적 통찰을 축으로 자세한 분석을 수행한 일련의 기고와 저술, 인터뷰들 중 한 예시적 단편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이 모든 문서고는 본질적으로 오늘날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반복되고 있는 세계자본주의 패권/관리 질서와 식민화 및 인종청소 그리고 철저히 이기적/자기중심적 시각으로 분절, 파편화 되어 이 중요한 문제를 오래도록 외면해 온 지성계와 연구자들, 특히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맹점[盲点]과 그 원인이라는 중요한 3각 문제계 설정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종반으로 치닫는 듯한) Palestine 문제를 통해 DELEUZE 문서고를 재점검하여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종합해낸 아래의 선구적 논고를 국내 최초 번역문을 통해 소개드리니 일독해 주시기 바랍니다.]





========================================================================

MEDIEN,Kathryn캐서린_메디언[*0] ‘2019. 〈Palestine in Deleuze〉;
→국역: 갈피Galpie‘240307목.〈들뢰즈의 팔레스타인〉[*1]
@{갈피를 찾아 떠나는 길}=https://galpieless.tistory.com/18



초록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이스라엘 국가의 형성 그리고 뒤이은 팔레스타인과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강탈 행위와 식민화를 되돌아보는 일련의 글들을 집필하였다. 지금까지 잘 논의된 바 없는 들뢰즈의 이 텍스트들은 이스라엘 국가를 식민주의 국가로 명명하며, 이스라엘의 식민화 프로그램을 미국의 식민화 프로그램과 선주민족들에 대한 집요한 강탈과 연결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들뢰즈는 식민지적 폭력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심도있게 고려하는 자본주의적 발전에 대한 분석을 제공하고 있다고 본고는 주장하고자 한다. 들뢰즈의 팔레스타인 관련 저술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면서, 본고의 결론부에서는 왜 이러한 텍스트들이 들뢰즈 연구자들에게 소외되어 왔는지를 질문할 것이다. 또한 이런 소외가 어떻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에 대한 예속화에 기여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식민주의와의 관계가 서구의 사회 이론을 구성하였는지 생각해볼 것을 요청할 것이다.



주요어
자본주의, 들뢰즈, 팔레스타인, 정착민 식민주의, 시온주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들에게는 무조건적인 굴복 외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죽음만이 주어질 뿐이었다˝(Deleuze, 1978: 23).
˝우리들의 몸에 생명이 남아있는 한 그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Darwish, 1982: 12).


0AB.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 질 들뢰즈는 이스라엘 국가의 형성 그리고 그에 뒤이은 팔레스타인과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강탈 행위 및 식민화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는 일련의 기고문과 인터뷰를 저술하였다. (1978, 1982, 1983, 1988)[*2] 들뢰즈(1983: 31)에게 이스라엘 국가의 건립은 ‘명백히 식민화에 관한 문제’였는데, 다만 이전의 식민지 기획과 [DELEUZE 당시의/인용자] 현재 진행 중에 있는 식민지 기획에는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식민화된 민족들을 경제적 급부를 위해 착취하는 것도 아니고, 정착민(settler) 식민지를 위해 그곳의 선주민들을 절멸시키고자 하는 것과도 동일하지는 않은 이스라엘 국가의 행동들에 대해 들뢰즈는 ‘집단 학살이지만 지리학적 퇴거에 종속된 채로 있는 물리적인 절멸이며, 팔레스타인 생존자들은 단지 일반적인 아랍인이 되어 다른 아랍 사람들에 섞여서 살아가야 했다.’(1983: 31)라고 말했다. 일반적인 용법과는 다르게, 들뢰즈는 집단 학살(genocide)이라는 용어를 팔레스타인 역사와 지리에 대한 체계적인 식민적 소거, 팔레스타인 민중의 이주, 보다 일반적으로는 ‘인종 청소’라고 발화하도록(articulate) 배치한다(Gordon and Ram, 2016; Pappé 2007을 보라). 들뢰즈가 묘사한 이런 정착민 식민주의의 강탈적 논리는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썼던 것처럼 ‘한 집합체로서 역사적으로 현전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부정할뿐 아니라, 그들이 오랜 세월 민족 의식을 지녀온 오래된 민족이 아니라고 암시’(2000: 187)하는 기능을 한다. 팔레스타인적인 강탈을 현재진행형인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생에 대한 식민화와의 관계에 위치시키기는 데까지 나아가면서,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은 이스라엘적인 정착민 식민주의를 탈-예외화하며 식민지적 폭력의 국제적 연결망에 주의를 집중한다. (1983, 1982)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팔레스타인 문예지 《정원(al Karmel》(Deleuze, 1988), 프랑스 신문(Deleuze, 1978), 팔레스타인 지식인 엘리아스 산바르(Elias Sanbar)와의 대담(Deleuze & Sanbar, 1982), 그리고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études Palestiniennes)》(Deleuze, 1983)까지 다양한 수단과 매체들을 통해 출간된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은 이스라엘 국가의 형성과 전개에 대한 분석과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전개 수단으로서의 정착민 식민주의에 의존하는 자본주의 대한 검토 사이에서 움직인다. 실제로, 들뢰즈는 이스라엘적인 그리고 북아메리카적인 정착민 식민주의가 구현하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태에 대해서, 오직 내부적 착취의 논리에 기반해 있기보다는 “때로는 급격한 발전을 위해 다른 곳에서 노동력을 불러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한 영토에서 거기 사는 사람들을 치워버리는 것이 중요하다”(1982: 26, Deleuze and Sanbar, 1982)라고 말한다[*3]. 여기서 더 나아가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인구집단으로서 팔레스타인 민중의 현존을 계속해서 긍정하는 들뢰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매 순간 증식하는 가능성들”(1982: 29, Deleuze and Sanbar, 1982)을 발하고 있다고 말한다.



0Wa. 흥미롭게도,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이 수많은 걸출한 분석과 연결된, 시온주의 국가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을 제공하고 있음에도(Said, 1979a; Pappé, 2007; Wolfe, 2006; Sanbar, 2001을 보라), 이 글들은 그의 다른 저술들에 비하면 그와 같은 수준의 참여(engagement[=앙가쥬망: 개입, 영향력 등으로 확장해 이해할 수 있음/인용자])로 이어지지 못하였고, 들뢰즈의 동시대인들의 정치적 글쓰기와 활동들에 비해 같은 수준의 관심을 모으지 못했다[*4]. 사실, 들뢰즈의 사상에 대한 동시대적이고 현재진행형인 정전화 작업은 매우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5], 팔레스타인에 관한 그의 저술들은 이러한 연구들 중 매우 일부에서만 얕은 깊이로 탐구되거나 언급될 뿐이며, 들뢰즈와 엘리아스 산바르, 마흐무드 다르위시 같은 저명한 팔레스타인 지식인 혹은 활동가들 사이의 연결도 검토되지 않았다[*6].
중요한 것은, 이것이 유목론(nomadology), 전쟁 기계, 리좀, 배치(assemblage), 탈주선과 같은 들뢰즈적 개념들을 이스라엘의 정착민 식민주의에 관한 연구에 적용한 광범위한 학술 연구들을 무시하거나 삭제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Svirsky, 2010, 2015, 2017; Al-Nakib, 2014; Al-Zobaidi, 2009; Shihade, 2015; May, 2008의 예를 보라). 그보다는, 들뢰즈의 팔레스타인에 관한 저술들이 겪어온 관심과 비판적 참여의 특수한 결여를 지적하고자 한다.



0Wb. 다음으로, 현재진행형인 들뢰즈 아카이브의 조사에 기여하고, 들뢰즈의 역사에서 급진적인 순간을 다시 말하기 위해, 식민화된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을 되돌아보도록 하겠다. 본고의 전반부에서는 이러한 저술들을 수집하고 이 작업물들에 대한 깊이 있는 독해를 제공한다. 여기서 나는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이 어떻게 정착민 식민주의의 심장에 있는 강탈적 논리를 분절해내는지(articulate), 더 중요하게는 이 논리를 선주민에 대한 강탈과 자본 축적의 전지구적 체계와 어떻게 엮어내는지 검토하고 또 함께 사고하고자 한다. 이러한 분석들은 들뢰즈의 철학적 저술들을 그가 참여했던 정치적 장면들로부터 분리함으로써 들뢰즈를 비정치적인 사상가로, 그의 명백하게 추상적인 작업물들이 현대 세계에 기초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분절하는 어떤 동시대의 분석들에 반대되는 입장에 있다( Žižek, 2004; Hallward, 2006을 보라)[*7]. 이러한 탈정치적인 독해들에 반대하여, 나는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을 세심하게 숙고하면 부분적으로 선주민 연구자들과 교류함으로써 드러나는 그의 정치적 투쟁에 대한 주의집중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8]



0Wc. 최근 몇 년간 현대적인 삶과 사유를 구성하는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기 위하여 대문자 인간(Man)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비판(1987)을 활용하는 연구자들과 함께 ‘들뢰즈의 반인간주의적(anti-humanist) 정치학‘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떠올랐다.(예를 들어, Lippit, 2000; Parikka, 2010; Sellbach and Loo, 2015; Laurie, 2015; Ansell-Pearson, 1999; Colebrook, 2014; Grosz, 2008를 보라) 이 연구자들은 ‘동물-되기, 식물-되기, 분자-되기를 통한 인간의 비인간-되기’(Stark and Roffe, 2015: 11)를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 본고의 후반부에서는 ‘들뢰즈의 반인간주의‘에 대한 [MEDIEN 자신의/인용자] 대안적 접근을 제시한다. 비인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나는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이 대문자 인간(Man)의 식민지적 질서들에 의해 ‘내몰려’ 온 팔레스타인의 인간들을 긍정함으로써 서구의 대문자 인간(Man)이라는 범주의 폭력과 오류를 드러낸다고 주장할 것이다. (McKittrick, 2014: 3)



0Wd. 중요한 것은,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에 대한 관심을 끌어옴으로써 그것들이 에드워드 사이드가 ‘팔레스타인 문제’라고 칭한 바 있는 것에 중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작업들을 조명하는 본고의 이중적 목표는 잘 탐구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들뢰즈의 정치적 저술들 일군을 되돌아보는 것이고, 동시대 사회 이론에서 지식 생산의 정치학을 음미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간과된 저술들에 관심을 요청하면서, 본고의 결론부에서는 들뢰즈의 작업에 대한 대중적인 이해들에서 이러한 팔레스타인에 관한 저작들이 인식론적으로 퇴출당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물을 것이다. 알렉산더 G. 웨헬리예[워힐리예/인용자](Alexander Weheliye)가 “들뢰즈를 서구 유럽의 철학적 전통 내부에서만 배타적으로 읽음으로써 그를 위대한 사상가로 변형한다고 주장하는 정통 들뢰즈주의(orthodox Deleuzianism)”(2014: 47)라고 부른 것에 찬성하며, 들뢰즈의 대중적 수용에서 이러한 텍스트들이 퇴출당한 방식은 어떤 면에서 어떤 식민지적 관계가 끊임없이 동시대의 들뢰지언 사회 이론의 진전들을 규정하고 있는 방식을 가리키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들뢰즈 자신이 그토록 강력하게 비판한, 현재진행형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과 역사에 대한 방법론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삭제에 기여하는 듯한 이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을 둘러싼 침묵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 것인가?





1. 정착민 식민주의와 사라짐의 논리들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은 이스라엘 국가에 혹평을 가하기는 하지만, 배상 받아 마땅한 비극으로서 홀로코스트를 인식하고 전경화하는 데서 시작한다. 하지만 들뢰즈에게, 이미 사람이 살고 있는 땅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것은 윤리적인 배상의 정치가 아니었다. 들뢰즈는 1988년 그의 짧은 에세이, 〈돌멩이들(원제: 그들이 여전히 그것을 볼 수 있는 거기에)〉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유럽은 유대인에게 한없는 빚을 지고 있다. 유럽은 그 배상을 치르기 시작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빚을 무고한 민족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대신 갚게 했다.”(1988: 34) 홀로코스트 이후의 회복하는 정치를 향한 들뢰즈의 요구는 1983년 초에 쓰여진 에세이 〈야세르 아라파트의 위대함〉에서 더 자세히 설명된다. 이 에세이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미국과 유럽은 유대인에게 배상을 빚지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모든 홀로코스트에 대해 특이적으로 무고하며 심지어 그게 무엇인지 들어본 적도 없는, 전혀 관련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민중들로 하여금 그 죗값을 대신 치르도록 만들었다˝(1983: 30).


중요한 것은 들뢰즈가 이스라엘 국가의 형성에 대한 그의 비판을 제국적이고 국제적인 틀 안에 위치짓고, 이스라엘 국가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유럽과 미국이 수행한 역할을 인식하면서 홀로코스트의 실재성을 긍정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 국가의 정당성을 부여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나데라 샬호브 케보르키안(Nadera Shalhoub-Kevorkian)이 논증한 바 “여러가지 의미로 유대인 국가의 근원적인 폭력은 신성하고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다”(2016: 24)는 것을 고려할 때,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을 동요케 하고(unsettle) 분열케 하는(disrupt) 들뢰즈의 움직임은 중요하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적인 해설들과 개념화들이 팔레스타인 내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를 이미 가정한 채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혹은 ‘유대인’ 대 ‘아랍인’의 맥락에서 서술의 틀을 구성하는 반면, 들뢰즈의 저술들은 이스라엘을 존재하게 한 “불의함”, “폭력 행위들”, “부조리한 말들”과 “거짓된 논증”을 조명하면서 근원적 폭력들을 동요케 한다(Deleuze, 1983: 30)[*9].



그래서 현재진행형인 팔레스타인에 대한 식민화, 봉쇄 그리고 점령을 기존의 국민국가에서 항상 자행되었던 전투 행위의 틀로 바라보기보다, 들뢰즈는 팔레스타인 선주민들에 맞서는 데 집중해온 근원적 폭력들이 이스라엘의 끈질긴 현존의 공-구성적 요소임을 보여주면서 복잡하고도 상세하게 열거한다.

˝시온주의자들은 최근에 지나간 그들의 극심한 고통과, 잊을 수 없는 유럽적인 공포로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했고, 그뿐만 아니라 그 다른 민족의 고통 위에서 그 다른 민족의 돌덩이들로도 그렇게 했다. 이르군(L‘Irgoun)은 테러리스트라고 명명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영국 총독부를 폭파했을 뿐만 아니라[*10], 데이르 야신과 같은 마을 전체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없애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11]. ... 마을들을 파괴하고, 집들에 폭탄을 던지고, 추방하고, 암살하고. 끔찍한 역사가 새로운 무고한 자들의 배후에서 되풀이된다˝(1988: 34).


이스라엘의 정착민 식민주의에 대한 수많은 비평가들의 분석들(예를 들어, Graham, 2002; Jabary Salamanca, 2015; Abujidi, 2014; Weizman, 2012을 보라)과 맥을 같이하는 들뢰즈의 논증 방향은 이스라엘 국가의 기획이 팔레스타인 원주민에 대한 추방과 그들의 땅에 대한 사회 기반의 파괴에 의존하는 방식에 집중하게 만든다.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에 대한 강제적인 제거와 이주는 시온주의적 정착민 식민주의의 논리의 중심에 있으며, 그 영토를 텅 빈 곳으로 나타나게 하고 근대화를 기다리게 할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스라엘 국가 건설 기획을 자연화하고 정당화한다. 사실, 들뢰즈가 논증하는 바와 같이, 토착 민족의 제거와 그들의 땅을 파괴하는 것은 “팔레스타인 민중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그 자체를” 부정하는 기능을 하며,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를 비우겠다는 자신의 목표를 숨기지 않았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가 비어있었고, 오래전부터 언제나 시온주의자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었던 땅인 척한다.” (Deleuze, 1983: 31)[*12].



들뢰즈가 그려내는 팔레스타인의 사라짐과 시온주의의 생성 사이의 연결은 팔레스타인을 기억에서 지우려는 시도들과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강제적 외부화를 통해 근거를 얻는다.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와 함께 들뢰즈는 다른 곳에서 국가 기구가 포획의 논리를 따라 작동하면서 모든 것을 강제로 자신의 통제 하에 두는 영토화 과정을 기록한다. (Deleuze and Guattari, 1987: 495; Patton, 2000: 113도 보라)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제도적인 그리고 구조적인 국가 폭력에 의해 생산되고 고착되며 정당화되는 그리고 유지되는 다수(majority) 국가 모델은 종종 군사적이고 폭력적인 (재)영토화로 마무리된다. (Deleuze and Guattari 1987: 494-5) 다수 모델, 여기서 시온주의적 사회 질서는 그것의 지리 혹은 인구의 규모에 의해 정의되지 않고, 오히려 패권적인 그리고 규범적인 지위에 의해 정의된다. “다수를 정의하는 것은 당신이 순응해야만 하는 어떤 모델이다. 예를 들면, 평균적인 유럽인 성인 남성 도시거주자 ... 그 반면에, 소수(minority)에는 모델이 없다. 그것은 되기이며 과정이다.” (Deleuze, 1973: 173) 자신의 이상적인 통치 주체를 유대계이고, 현대적이며, 유럽적인 얼굴을 가진 자로 생산하는 시온주의 국가 기계는 양립 불가능한 것들에게서 대지와 생을 박탈하고(fold out), 형상적으로 그리고 질료적으로(figuratively and materially) 외부의 디아스포라적 소수로서 팔레스타인 민중을 생산한다. “[이스라엘은] 추방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저 바깥에서 왔던 것처럼 굴 것”이다. (Deleuze, 1983: 31)



그러므로, 들뢰즈에게 있어서 이스라엘 국가는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소수화와 팔레스타인의 사라짐이라는 공-구성요소를 통해 존재하게 되는, 생을 코드화하고 가치화함으로써 작동하는 식민지적 기획으로 드러나며, 정착민 식민지적 사회 질서와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외부화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팔레스타인의 풍경은 시온주의자들의 구원을 기다리는 버림받은 사막으로 형상화된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민중의 난민 캠프로의, 망명지로의, 봉쇄되고 점령된 구역으로의 계속되는 이동은 이스라엘이 그들을 고향에 대해 어떤 주장도 할 수 없는 ‘외부인 테러리스트들’으로 소략하는 것을 허용하고 정당화하는 동시에 이스라엘 국가의 현존을 자연화한다. “소멸되어야만 했을 아랍인 마을들 ...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바깥에서 온 테러리스트들 취급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테러리즘을 세탁한다.” (1983: 30) 비록 들뢰즈에 의해 명시적으로 인종화된 것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13], 일반적으로 인종화하는 것으로 이해되는[*14] ‘테러리스트’, ‘외부인’, ‘아랍’ 등의 정체성 형성과 수사학적 비유를 배치하는 코드화 그리고 생에 대한 밀쳐냄은 들뢰즈의 다음과 같은 담화를 이끌어낸다. “이스라엘이 행한 조치들은 적법한 반격으로 간주되는 반면(그 반격들이 너무나 지나친 듯 보이더라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행동은 오로지 테러 범죄로 취급된다. 그리고 아랍 사람들의 죽음은 이스라엘 사람의 죽음과 동등한 크기를 지닌 것으로도, 동등한 무게를 지닌 것으로도 여겨지지 않는다.” (1978: 23)



강제적인 외부화를 감내하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생에 대한 들뢰즈의 개념화는 숙명론적으로, 저항을 위한 어떠한 공간도 제시하지 않는 것으로 읽혀질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국가 영토화 그리고 다수와 소수 모델의 생산이라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화에서, 그들은 ‘탈주선들’이 생산된다는 것을 중요하게 강조한다. 탈주선은 ‘모델이 없는’ 소수적인 공간에 존재하며, 헤게모니적 질서 바깥에 존재하고 또 그 질서에 도전하는 다른 정치학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 (Deleuze and Guattari, 1987을 보라) 들뢰즈의 저술 안에 위치하는 반식민지적 저항의 공간을 살펴보기 전에, 지금 잠시 방향을 틀어 어떻게 시온주의적 정착민 식민주의를 역사상 단 한 번 있는 특이한 전통으로 보는 대신 이스라엘의 식민지 기획을 전지구적 틀거리 안에 위치시킬 수 있는지 탐구하고자 한다. 여기서, 나는 첫 번째로 어떻게 들뢰즈가 이스라엘의 식민주의를 미국의 정착민 식민지 기획과 결합하는지를 검토하고, 두 번째로 어떻게 이런 결합이 그로 하여금 근현대 자본주의의 발전을 서구 개척자들의 계속되는 확장에서 예측되는 것이자 동시에 소수자로 코드화되고 생산된 민중을 생의 주름들(folds) 바깥으로 밀어낸 것으로 묘사할 수 있게 했는지 검토할 것이다.





2. 이스라엘의 정착민 식민주의와 전지구적 자본


연구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Said, 2000, 1979b; Kanaaneh, 2002; Bass, 2003; Lloyd and Pulido, 2010를 보라) 시온주의 국가 건립 기획에 대한 미국의 공공연한 지지는 이스라엘의 계속적인 자연화와 정당화의 핵심이었다. 들뢰즈가 보기에 이런 지지는 미국이 계속해서 팔레스타인 민중을 아랍 사람들이라고 발화하는 데에서 드러났으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한 민중으로서 역사적으로 현전함을 부정하는 기능을 하는 그러한 담론은 한 집합체로서의 그들의 정체성 그리고 고향 땅과 그들의 연결 둘 다를 근절하고 있다. 들뢰즈가 논하는 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온, 다시 거기로 돌아갈 수 있는 아랍 사람들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다. (1988: 34)[*15] 이런 담론을 영속시키는 데 있어 미국이 수행한 역할을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들뢰즈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쓴다.

˝미국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이스라엘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만들었다. 이스라엘 국가는 아주 오래전부터 고대 히브리인들을 기다려온, 잠들어 있는 돌투성이 땅을 지키고 있던 어디선가 옮겨 온 몇 안 되는 아랍 사람들의 유령만이 있는 텅 빈 땅(terra nullius) 위에 세워진 것처럼 여겨졌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망각 속으로 몰아갔다. 이스라엘 국가를 권리상(en droit) 인정하기를 명령하면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끊임없이 팔레스타인 민중이 존재한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부정했다˝(1988: 34).


미국이 팔레스타인 민중들을 ‘아랍 정착민’으로 재코드화하고 이런 새로운 정체성을 팔레스타인 민중에게 강요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새로이 설립된 정착 식민지를 자연화하는 임무를 위해 생명을 관리하는 기능,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망각 속으로 몰아”내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식인이자 외교관인 엘리아스 산바르와의 대담에서, 들뢰즈와 산바르 모두는 시온주의적 식민화 과정은 미국 정착민 식민주의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의 눈에 우리[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유일한 역할은 사라져버리는 데에 있지요.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건국의 역사는 아메리카에 미국을 탄생케 한 그 과정의 재연임이 분명합니다.” (Sanbar, 1982: 27, in Deleuze and Sanbar, 1982) 들뢰즈와 산바르 둘 모두가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변함없는 지지에 대해 그리고 우연이라기엔 마치 신적인 회귀처럼 계속해서 재상연되는 이스라엘의 식민주의에 대해 논하도록 만든 이런 인식은 정착민 식민주의에 대한 공유된 역사로부터 정치적으로 동기를 얻은 것이다. 들뢰즈가 지속적으로 지구 남쪽(Global South)의 사상가들과 교류했음을 시사하는 참고 자료로서 산바르의 작업에 대한 그의 참여를 다시 언급하면[*16], 들뢰즈는 이렇게 논증한다.

˝미합중국과 이스라엘의 암묵적인 공조는 단지 시온주의자들의 로비의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다. 엘리아스 산바르는 어떻게 미국이 이스라엘 속에서 그들의 역사 속 한 국면을 발견해내었는지 잘 보여주었다. 인디언의 말살, 거기서도 역시 부분적으로만 직접적으로 물리적일 뿐이었다. 텅 비우는 것, 그들을 내부의 이주민과 마찬가지로 만들었던 게토 안에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인디언들이 전혀 없었던 양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측면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새로운 인디언들, 이스라엘의 인디언들이다˝(1983: 31).


북아메리카 선주민족들의 역경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역경을 결합하면서, 들뢰즈는 정착민 식민지적 폭력의 전지구적 연결망과 선주민들 간 연대의 공유된 지형을 강조한다[*17]. 위에서 서술한 선주민 강탈의 논리와 팔레스타인에서의 사라짐에 대한 그의 분석과 유사하게, 들뢰즈는 미국식 정착민 식민주의가 선주민 주체들을 땅과 생으로부터 박탈하는 생산의 과정을 경유하여 생명을 얻는다고 논증한다.



이런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의 정착민 식민지적 역사의 공유를 지적하며, 현재진행형인 북아메리카와 이스라엘 국가 건설 기획이 순수하게 영토 확장의 욕망에서 동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 현대 자본의 핵심적인 단면을 표상하고 있는 것임을 분명하게 한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한 폭력적인 외부화가 “자본주의 안의 움직임”임을 논증하면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때로는 사람들을 그들의 영토에 가두어놓고서 잉여가치 축적을 위해 노역을 시키고 착취하는 것이 문제인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식민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때로는 급격한 발전을 위해 다른 곳에서 노동력을 불러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한 영토에서 거기 사는 사람들을 치워버리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아메리카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 시오니즘의 역사는 바로 이 두 번째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지요. 어떻게 진공 상태를 만들 것인가, 어떻게 사람들을 치워버릴 것인가?˝(1982: 26, in Deleuze and Sanbar, 1982)


자본주의의 발전에 있어 차이나는 두 가지 논리를 분절하면서, 둘 다 식민주의와의 관계에 기반하고 있다고, 들뢰즈의 분석은 어떤 중요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새로 세워진 국가인 이스라엘과 미합중국을 분석의 장소로 삼을 때, 그 두 곳의 식민지 경제를 결합함으로써 들뢰즈는 우리에게 분석 단위로 국민 국가를 뛰어넘어 강탈적인 식민지 경제들, 개척지 확장 그리고 식민지 질서에 따른 노동 분업과 같은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의 발전 궤적을 구성하는 자본의 체제를 발굴해낼 것을 요청한다. 1983년의 에세이 〈야세르 아라파트의 위대함〉에서 이러한 분석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자본주의에 두 가지 상보적인 운동이 존재함을 가리킨다. 자본주의는 자기 고유의 체제를 설비하고 경영하는 내부에 한계들을 끊임없이 부과하며, 그러한 한계들을 항상 더 멀리 떠밀고 자기 고유의 기반을 더 크게 그리고 더 강도있게 재시작하기 위해 그 한계들을 추월한다. 한계를 떠미는 것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작동이었으며, 이는 이스라엘에 의해 아랍 영토 위에 세워진, 아랍의 배후에 있는 위대한 이스라엘이라는 꿈으로 되풀이된다˝(1983: 32).


여기서, 자본 축적에 있어서 강탈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끌어오면서 들뢰즈는 중요하게도 강탈의 이런 양태들을 강조하는 식민주의와의 관계들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정착민 식민지적 삭제의 강탈적 논리에 대한 분석과 함께 사유하며, 들뢰즈는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의 발전이 정착민 식민지들의 창설을 통해 구성되는 방식에 주의를 집중하고, 비어있는 땅(terra nulluis)으로의 전진과 같은 정착지의 사회적 공간적 확장을 통해, 게토, 난민 수용소, (원주민) 보호구역과 같은 울타리(enclosures)의 창출을 통해 사회적 공간적 경계선을 다시 설정하는 방식에도 주의를 집중한다. 종종 식민지에서의 자본주의적 축적을 진보 그리고 발전과 연결하는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한 많은 분석과 대조적으로, 월터 로드니(Walter Rodney, 1972)의 유명한 논증처럼,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은 어떠한 목적론적인 주장을 파열시키며, 자본의 축적에 현대적인 힘을 부여하는 강탈 그리고 폭력에 수반하는 논리들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미국의 식민적 자본주의에 대한 들뢰즈의 비교가 그 두 기획 사이의 수많은 차이점들을 다 풀어내는 데에는 실패하지만[*18], 그의 분석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시장 그리고 자본 흐름의 중심적 조직화 원리로서 식민주의에 대한 인식을 필요하게 만든다.



팔레스타인에 관한 그의 저술들을 따라, 들뢰즈는 그가 ‘통제 사회’라 이름붙인 것에 대해 서술하는 데까지 나아가 ‘기술적 발전’이 ‘자본주의의 변이’를 불러온 방식을 해명하기 위하여 ‘규율 권력’이라는 푸코의 개념을 발전시킨다.(1992: 6) “위기”에 처한 “내부”의 공간들에 대해(1992: 3) 그리고 “통제 사회가 ... 규율 사회를 대체하고 있다.”(1992: 4)고 논하면서, 들뢰즈는 규율에서 통제로의 이행을 기술적인 그리고 과학적인 자본주의적 생산 내에 위치시킨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통제 사회는 ... 정보 기계로 작동하는데, 거기에서 수동적 위험은 잡음(jamming)이고 능동적 위험은 해적질과 바이러스 감염이다. 이 기술적 발전은 (훨씬 더 심오한) 자본주의의 변이(에 뿌리내리고 있다.) ...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자본주의는 더 이상 생산을 향해 있지 않으며 (복잡한 형태의 직물업, 야금업, 정유업조차) 제3세계 주변부로 추방된다. ... 자본주의는 빚을 지기에는 너무 가난하고 감금하기에는 너무 많은 인류의 4분의 3의 극심한 빈곤을 일정하게 유지해왔다. 통제는 사라지는 개척지 뿐만 아니라 빈민촌이나 게토의 폭발도 다루어야 할 것이다˝(1992: 6)[*19].


이런 기술적 자본주의의 강화는 시온주의 전쟁에 대한 들뢰즈의 분석을 통해 추적할 수 있다. “이스라엘 첩보부가 세계로부터 찬사를 받는”(1988: 28)것에 주목하면서, 들뢰즈는 이스라엘 국가에서 발전하는 중인 식민지적 통제와 탄압의 모델이 수출가능하고 전지구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논한다. 이스라엘의 통제사회에 관해 쓰면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모델은 테러리즘의 현행적인 문제들에서, 심지어 유럽에서조차도 결정적이다. 준비 중에 있는 국가들 간의 국제적 합의, 국제적인 치안 조직과 사법 조직, 이런 것들은 필연적으로 점점 더 잠재적 “테러리스트”들과 동일시되는 사람들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 오늘날, 이스라엘 국가는 실험에 앞장서고 있다. 이스라엘 국가는 다른 나라들에서 수익을 창출할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사정에 맞추어질 탄압의 모델을 정착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의 정책에는 커다란 연속성이 있다. ... 점령한 영토에서 떠나라는 독촉은 거기에 식민지들을 설치하라는 당위로 변환했다. 지금 현재 이스라엘은 남부 레바논으로의 국제 병력 파견을 훌륭하다고 보고 있다... 국제군이 그 지역을 치안 구역 혹은 통제된 황야로 변환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고 가정하면서 말이다˝(1978: 24).


따라서,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정착민 식민주의를 발생하고 증식하는 식민지적 자본 축적의 새로운 체제 그리고 감시와 통제의 양식들과 뒤얽히게 하는 분석이다[*20]. 그렇지만, 비록 들뢰즈의 저술들이 시온주의자들의 폭력적이고 축적적인 논리에 대한 강력하고 어쩌면 숙명론적인 비판을 발화하고 있다고 해도, 그의 저술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이 갖는 저항적 가능성들에 대한 긍정 또한 포함되어 있다. 본고의 최종부에서 탐색하고자 하는 것처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어온 ‘종말론적 역사’(Deleuze, 1982: 29, in Deleuze and Sanbar, 1982)에 맞서서, 들뢰즈는 그들의 사라짐을 구조화하는 식민지적 자본과 강탈의 체제에 필연적으로 도전하는 창조적인 힘으로서 현재진행형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실존과 저항에 대해 발화한다.





3. 인간으로서 팔레스타인사람-됨


현재진행형인 팔레스타인과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강탈을 소묘하고, 정착민 식민주의의 심급을 자본의 전지구적 체제와 연결시키면서, 들뢰즈의 저술들은 정착민 식민지적 체제와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 사이의 생산적 상호작용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1948년 시온주의자 군대가 80만여 명으로 추정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그들의 고향에서 추방한 사건을 명명하는 데 쓰이는 용어인 나크바[*21](Shalhoub-Kevorkian, 2016)를 단 한 번 발생한 사건으로 나타내기 보다, 들뢰즈의 저술들은 나크바를 현재진행형인 구성적 기계로, 혹은 랄레 칼릴리(Laleh Khalili)가 ‘파괴의 습관’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변환한다.(2014) 그렇게 함으로써, 들뢰즈의 저술들은 팔레스타인사람-됨에 대한 어떠한 존재론도 해명할 수 없는 현대 세계 질서의 무능력을 강조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정체성을 죽음과 공-현존하는 것으로 표시한다. “그들에게는 무조건적인 굴복 외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죽음만이 주어질 뿐이었다.” (1978: 23)



그런데, 이스라엘의 정착민 식민지적 사회 질서에 대한 격정적인 비판들에서도 들뢰즈의 저술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이 갖는 인간-됨을 긍정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식민지적 순서열에서 “밑바닥”에 놓여져있음을 고려하면, 그 긍정은 동시에 인간이라는 범주를 재구성하거나 파괴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McKittrick, 2014: 3–4) 프랑스-팔레스타인 문예지인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Études Palestiniennes)》[*22]에 수록된 기고문을 참고하면, 들뢰즈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다른 민족들과는 같은 민족이 아니다”라는 이스라엘의 오만한 사고방식을 향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Études Palestiniennes)》지의 창간호가 내보인바 있는 그들의 외침으로 끊임없이 응답한다. “우리는 다른 민족들과 같은 하나의 민족이다. 우리는 그저 그러기만을 원할 뿐이다 ...””(1983: 32)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생을 탈예외화하고 동시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간임을 긍정하는 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현존을 구조화하고 있는 인간성에 대한 부정을 무너뜨린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에 대한 긍정의 중심 대상으로 인간을 활용함으로써 들뢰즈는 난민, 망명, 테러리스트 등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의 현상태를 오직 현대인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으로 선전할 뿐인 특수한 자(specialist), 소수자적이거나 독특한 주체들의 영역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징집하는 소수자화하기의 전술들에 반대한다. 그보다는, 그가 말했듯, “새로운 양심을 증언하고 있”는, 끈질기게 지속하는 팔레스타인의 현존 그리고 저항으로서의 현존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을 사회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현대 세계 질서를 정의하는 식민화하는 배치들(assemblages)에 맞서거나 변형하는 지위에 있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 긍정한다. (Deleuze, 1982: 25, in Deleuze and Sanbar, 1982).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에 대한 들뢰즈의 긍정은 처음에는 “사람을 다른 존재자들과 나란히 놓는 ... [그리고] 인간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지렁이, 돌멩이, 파인애플 등 모든 존재자의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동등성을 주장하는 그의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헌신”(Stark and Roffe, 2015: 10)로 종종 이해되는 그의 잘 알려진 반인간주의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인간이라는 범주의 해체에 대한 들뢰즈의 헌신은 대문자 인간(Man)을 넘어서거나 탈출하고자 하는 많은 들뢰지안 이론가들을 사로잡았고, 대신에 “힘들과 강도들 그리고 마주침들의 그물망을 구성하는 전인간적(pre-human) 혹은 심지어 비인간적(non-human) 요소들”(Braidotti, 2006: 41)에 집중한다.(예를 들어, Sellbach and Loo, 2015; Laurie, 2015; Stark, 2015; Ansell-Pearson, 1999; Colebrook, 2014; Grosz, 2008을 보라) 그렇지만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에서 들뢰즈는 비인간에 집중하기보다 대문자 인간(Man)의 식민지적 순서열에서 추방된 그러한 인간들을 긍정함으로써 대문자 인간의 오류 혹은 폭력을 드러낸다. 이런 생을 긍정하는 정치학(life-affirming politics)은 인간이라는 범주의 한계들이 단지 비-인간적(non-human) 생의 종속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어떤 인간의 생을 안-인간적인(in-human) 것으로 만듦으로써도 형성됨을 상기시킨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의 ‘평범한’ 인간-됨에 대한 들뢰즈의 긍정은 흑인됨의 실천(praxis)을 통해 인간의 범주를 재형상화했던 것과 맥을 같이한다.(예를 들어, Hartman, 1997; McKittrick, 2006, 2014; Moten, 2013; Weheliye, 2014; Wynter and McKittrick, 2014를 보라) 차이나는 방식으로, 연구자들은 흑인됨을 통해 대문자 인간(Man)을 해체하고자 하였고, 서구의 대문자 인간 중심의 질서로의 초대를 거절하고 다른 “인간 존재의 장르”(McKittrick, 2014)를 찾아나섰다. 예를 들어 실비아 윈터(Sylvia Wynter)의 작품을 탐구하면서 캐서린 맥키트릭(McKittrick)은 “현재 우리의 인식론적 체제 하에서 빈곤화되고 식민화되며 달갑지 않고 이성을 결여한 존재로 내몰린, 인간으로서의-대문자-남성(Man-as-human)이라는 범주의 밑바닥에서 지금껏 살아온 이들이 인간 존재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는 방식을 제공할 수 있는 또한 그러고 있는 방식”에 대해 묻는다.(2014: 3) 그렇게 함으로써, 맥키트릭은 대문자 인간의 형상을 탄생케 한 식민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역사들의 설립을 경유하는 인간으로서의 대문자-남성이라는 주제를 형해화할 것을 요청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실천(praxis)으로서의 인간을 우리의 이해 범위로 가져오도록” 초대하는 것이며, “인간을 동사로, 대체가능한 것으로, 관계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고, 필연적으로 비선택(dysselection)[*23]의 자연화를 축출해내는 것이다.”(2014: 7)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1978[*24], 1983, 1988)에서도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사람-됨은 문화적이고 생물학적인 기술구로 혹은 주변부적 집단을 묘사하는 명사로 드러나지는 않으며, 동사로, 인간의 상태로서 팔레스타인사람됨을 분절하는 무언가로 드러난다. 팔레스타인 라말라 지역에서 아랍어로 출간된 팔레스타인 문예지 《정원(al Karmel)》에 실린 1988년의 글에서, 들뢰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딛고 있는 대문자 인간(Man)의 ‘밑바닥’을 활용한다.

˝점령, 끝없는 점령. 던져진 돌멩이들은 안에서,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해도 세계의 어느 한 곳에서 그들에게 부채가 역전되었음을 환기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민중으로부터 온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던진 돌멩이, 그 돌멩이는 그들 자신의 돌멩이들이며, 그들의 나라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돌멩이들이다. 누구도 사람을 하루에 하나, 둘, 셋, 일곱 아니 열 명을 죽임으로써 부채를 갚을 수는 없으며, 제3자와 합의로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제3자는 책임을 회피하며 모든 죽음은 살아있는 자들을 부른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영혼 안까지 들어갔고, 거기에 굴을 파고 꿰뚫으면서 그 영혼을 뒤흔들고 있다˝(Deleuze, 1988: 35).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점령 세력을 향해 ‘살아있는 돌’을 던지는 범죄[*25]를 저지름으로써 그들의 땅을 회복하려 하는 동안, 들뢰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과 생이라는 하나의 장에 다시 숨을 불어넣는다. 그가 다른 곳에서 지배적인 체제에 반대하는 행동의 양태이자 소수적인 삶을 활성화하는 것으로 ‘탈주선’이라고 일컬었던 것을 생산하면서, 들뢰즈는 팔레스타인의 돌, 그들의 고향의 돌무더기에 숨을 불어넣고, 그러한 돌들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의 양식과 공존하는 것으로 표시한다. “사람들은 이 돌들에서 태어난다”[*26]. 이렇게 함으로써, 들뢰즈는 적절하게도 우리에게 팔레스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시온주의자 세력의 구금와 제거에 대항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모든 죽음은 살아있는 자들을 부른다.” 이러한 살아감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의 조건으로서의 죽음을 거부하고 새로운 존재 양태의 생산과 확산을 수반한다. 실로 팔레스타인사람-됨에 대한 들뢰즈의 긍정, 팔레스타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인 자가 되도록, 다시 말해 완전히 ‘평범한’ 민족이 되도록”(1982: 29, in Deleuze and Sanbar, 1982) 허용하는 그의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생을 존재에 선행하여 틀짓는 것의 부적절성을 보도록, 혹은 들뢰즈가 시적으로 제안하는 바, “가능성의 다양체 그리고 매 순간 증식하는 가능성”(1982: 29, in Deleuze and Sanbar, 1982)을 생산하는 저항적인 팔레스타인사람-됨을 보도록 요구한다.





S.결론


시온주의적 식민주의에 대해 검토함으로써,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은 자본주의적 세계 질서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정착민 식민지적 강탈 과정의 중심성을 중요하게 조명한다. 신체들을 서열화된 집단들로 분리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은 특정 인구를 소수자화되어 사라지는 것으로 표시하는 우월주의적 분류 체계를 창조한다. 그렇지만,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의 힘은 강제이주, 지배와 강탈이라는 이런 역사적 불의함들이 단순히 그들의 문서 작업만으로는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 그보다는,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인구를 소모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대문자 인간(Man)의 ‘밑바닥’이라는 영역을 활용하면서, 들뢰즈는 우리가 실천(praxis)(McKittrick, 2014)으로써 존재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사람-됨을 말할 때 드러나는 생의 가능성들에 대해 생각하기를 요청한다.



그렇지만, 현재진행형인 소수자화하는 사라짐을 마주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을 들뢰즈가 긍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에 관한 그의 저술들은 그의 광범위한 저작들에서 대체로 언급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으며[*27], 그의 수많은 다른 작업들처럼 기념되는 정전의 목록에서 주제화되지도 않았다. 들뢰즈의 반식민적 저술과 그의 저명한 철학적 작업들 사이의 관계선들을 폭넓게 추적하는 것은 본고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긴 하지만, 나의 목적은 그의 광범위한 작업을 빚어내고 영향을 미쳤을 수 있는 정치적 헌신에 대해 말하게 하기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들뢰즈 정전 안에서의 그 저술들의 소외에 관련하여, 나는 어떻게 이러한 배제가 이해되고 또 중요하게는 교정될 수 있을지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제시하면서 결론짓고자 한다. 사실, 들뢰즈가 논증한 바, 식민적 지배와 선주민 민중에 대한 끈질긴 제거의 역사는 계속해서 동시대의 세계를 구성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에 대한 관심의 결여는 현재 우리에게 강탈과 제거의 식민적 구조들이 동시대의 학문적 시도들에 스며든 방식을 다시 고려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의 “인가된 무지”(1999)에 대한 논의를 가져오면서, 라우나 쿠오카넨(Rauna Kuokkanen)는 선주민 연구자들에 대한 침묵시키기와 소외를 “인식론적 무지”라고 명명하는데, 이는 “지배적인 서구의 인식론적 그리고 지적 전통들 이외의 다른 것들을 계속해서 배제할 수 있게 하는 학술적 관행들과 담론들”(2008: 60)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인가된 인식론적 무지의 틀거리는 중요하게도 우리에게 들뢰즈의 팔레스타인 저술들을 어쩌면 우연히 탐구되지 않은 것처럼 남겨두는 누락들에 대한 선의에 찬 의견들을 넘어서 무엇인가를 보게 만든다. 오히려, 스피박과 쿠오카넨 모두는 우리로 하여금 집단적인 침묵시키기과 누락을 식민적 지배와 제거의 더 광범위한 패턴들과 연결시켜서 볼 것을 요청한다. 특정 저작들, 장소들, 민중들 그리고 역사들을 주변적이고, 특수하고 혹은 제대로 된 학술적 지식과는 무관한 것으로 상정하는 것들 말이다.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의 맥락에서, 이런 집단적인 침묵시키기의 양태는 들뢰즈가 매우 강력하게 비판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에 대한 소수자화 및 제거와 분리된다고는 생각될 수 없다. 만약 ‘인식론적 무지’의 이러한 위계적이고 배재적인 관행들이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을, 더 넓게는 팔레스타인 민중을 서구 철학의 정전 내에서는 연구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면, 이런 배제를 우리가 과연 어떻게 교정할 수 있을 것인가?



들뢰즈의 정전들 내에 팔레스타인 저술들이 포함되기를 요청하면서 결론짓기보다는, 그러니까 자칫 그의 광범위한 저작물들에 대한 이해를 반식민적 정치가 가미되지 않은 것으로 유지할 수 있는 제스쳐로 마무리하는 대신에, 나는 우리가 선주민에 대한 강탈뿐만 아니라 선주민 사상가들의 장기적인 참여가 엄밀한 의미의 들뢰즈 철학의 구성요소였을 수 있다는 접근 방식을 취하기를 요청한다. 생의 주변적인 형식들을 충분히 설명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현재 인식론적 체제가 매우 불충분함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들뢰즈 안의 팔레스타인을 사유하는 도전은 지배적인 세계관 바깥에 자리하는 생의 양태들을 사소한 것으로 여기고 배제하기 위해 작동하는 생산의 제도화된 식민적 양태들에 맞서 사유하기 위한 도전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실천(praxis)의 위치에서 볼 때, 그 도전은 동시에 우리에게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을 새롭게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McKittrick, 20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 안은 Gilles_DELEUZE의 원문]

[*0] 저자 캐서린 메디언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사회학 연구원이며 Reproductive Sociology Research Group(ReproSoc)의 회원이다. 이전에는 워릭 대학교의 the Institute of Advance Study에서 Early Career Fellow으로 있었다.

[*1] Theory, Culture & Society, Vol. 36(5), 2019, p.45-70. DOI: 10.1177/0263276418816369.

[*2] [옮긴이] 각각 〈골칫거리들(LES GÊNUERS)〉(1978), 〈팔레스타인의 인디언들(LES INDIENS DE PALESTINE)〉(1982), 〈야세르 아라파트의 위대함(GRANDEUR DE YASSER ARAFAT)〉(1983), 〈돌멩이들(LES PIERRES)〉(1988). 본문에 인용되는 들뢰즈 저술들의 번역은 국역본이 있을 경우 국역본을 참고하였고, 아닌 경우 원문을 번역하였다.

[*3] 자본주의 시스템의 발전을 위한 중심으로서 전경화된 식민주의에서, 들뢰즈가 논증하는 방향은 급진적 흑인 그리고 제3세계의 지적 사상의 긴 역사를 따르며, 여기에는 에릭 윌리엄스(Eric Williams, 1944), W. E. D. 듀보이스(W. E. B. Du Bois, 1935),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2005) 그리고 안나 줄리아 쿠퍼(Anna Julia Cooper, 1925)가 포함된다.

[*4]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이 대중적 호응에서 비껴나 있는 동안, 그와 동시대에 활동한 프랑스 사람들의 정치적 활동과 저술들은 분석과 찬사 그리고 비판의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프랑스 감옥 투쟁에의 관여는 잘 기록되었고 또 분석되었다.(Zurn and Dilts, 2016; Heiner, 2007; Elden, 2017; Welch, 2011; Brich, 2008; Hoffman, 2012를 보라) 프랑스의 알제리에서의 정착민 식민주의에 대한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비판은 광범위한 참여로 이어졌다.(Butler, 2006; Le Sueur, 2005; Ahluwalia, 2010를 보라) 데리다(Derrida)와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 사이의 관계는 학술적인 성찰로 이어졌다.(Derrida, 1998; Morrissey, 1999; Chérif, 2008; Wise, 2009를 보라)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알제리 민족지들과 그 결과로 빚어진 개념 ‘아비투스(habitus)’는 비판적 반성의 대상이 되었다.(Goodman and Silverstein, 2009; Loyal, 2009; Yacine, 2004을 보라) 반유대주의와 알제리에 관한 리오타르(Lyotard)의 저술은 선집으로 편집되어 출간(Lyotard, 2002)되었고, 어떤 성찰을 이끌어냈다.(Hiddleston, 2010) 여기서 내가 전적으로 들뢰즈의 백인 유럽 동시대인들의 정치적 활동에 맞물리는 참여만을 표기하는 이유는, 프란츠 파농(2005) 그리고 에드워드 사이드(1979a, 1979b)와 같은 동시대인들의 작업에서 반식민주의적이고 반인종주의적인 정치학은 단지 스치듯 접하고만 있는 것이 아닌 중심적이고 주제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5] 예를 들어, 다음을 보라. Flaxman (2011); Stivale (2014); Storr and Nigianni (2009); Rizzo (2012); Colebrook (2001); May (2005); Hardt (1993); Colman (2011); Justaert (2012); Widder (2012).

[*6] 1982년, 질 들뢰즈는 팔레스타인 시인이자 외교관 그리고 역사가인 엘리아스 산바르와의 대담을 담은 기고문 〈팔레스타인의 인디언들〉을 발표한다. 그리고 1988년에는 팔레스타인의 국민적 시인인 마흐무드 다르위시가 창간하고 편집하는 팔레스타인 문예지 《정원(al Karmel)》에 에세이를 발표했다.

[*7] 질 들뢰즈가 비정치적이라는 가장 강한 혐의는 슬라보예 지젝(Slaboj Žižek)에게서 유래하는데, 그는 “들뢰즈가 단독으로 쓴 텍스트들은 어떤 것도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지 않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들뢰즈 ‘그 자신은’ 매우 엘리트주의적인, 정치에 무관심한 저자이다.”라고 주장한다(2004, 강조는 원문).

[*8] 들뢰즈는 엘리아스 산바르와 교류함과 동시에, 알제리의 연구자인 레다 벤스마이아(Réda Bensmaïa)와 서신을 주고 받았고(Deleuze, 1997), 아프리카계 미국인 활동가이자 저자인 조지 잭슨(George Jackson)의 영향을 받았다(Koerner, 2011을 보라).

[*9] 들뢰즈가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을 동요케 하는 것은 반시온주의적 비판의 오랜 전통의 일부이며, 이 전통은 아리엘라 아줄레이(Azoulay, 2013), 파예즈 사예그(Sayegh, 2012), 일란 파페(Pappé, 2004, 2011) 그리고 아흐마드 사디 & 릴라 아부 루고드(Sa’di and Abu-Lughod, 2007)의 작업들을 포함한다.

[*10] 이르군은 이스라엘 국가 설립 이전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했던 시온주의자 조직이었다.(Hoffman, 2011)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영국 식민자들 둘 다에 맞서 팔레스타인을 오직 유대인 전용의 유대인 영토로 만들기 위한 공격적인 폭력 계획에 가담했다. 국제연합(UN), 영국 그리고 미국 정부는 이 조직을 테러리스트 조직으로 규정한 바 있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설립 이후, 이르군은 이스라엘 방위군에 흡수되어 오늘날까지 여전히 활동 중이다.

[*11] 1948년 4월 9일 아침, 이르군은 750여 명의 거주민이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마을 데이르 야신을 침공하였고, 출처에 따르면, 120명에서 254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했다. 게다가, 프랑시스 하소(2000: 497)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살아남았던 여성들은 강간당했고, 주택들은 약탈당하고 폭파되었고 총격을 당했으며, 수류탄이 던져졌다.”

[*12] 팔레스타인 민족과 그들의 땅이 ‘사라져야’ 한다는 언설은 시온주의적 식민자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표현된 것 중 하나이다. 실제로, 시온주의의 창시자인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e Herzl)은 이렇게 썼다. “만약 내가 낡은 건물을 새 건물로 교체하기를 바란다면, 나는 건설하기 전에 먼저 철거해야만 한다”(Wolfe, 2006: 38에서 재인용).

[*13] 들뢰즈는 시온주의적 식민화의 중심 요소를 인종 혹은 인종주의라고 명명하지 않지만, 엘리아스 산바르와의 대담 〈팔레스타인의 인디언들〉에서, 산바르는 이스라엘 창건의 중심에 자리잡은 것을 인종주의로 명명한다.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 시오니즘 운동은 유대주의를 추방의 근거 그 자체이자 다른 이들에 대한 거부의 근거로 만드는 인종주의적 시각을 철저하게 따랐습니다. 다른 인종주의자들이 주도한 유럽에서의 박해에서 결정적으로 도움을 얻은 시오니즘 운동은 그로 인해 그 자신의 방식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지요”(1982: 28).

[*14] 시온주의적 정착민 식민주의가 인종적 패권의 원리들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방식에 대한 분석은 파예즈 사예그(Fayez Sayegh, 2012)를 보라.

[*15] 이 주장의 시간성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 초, 들뢰즈가 글을 쓸 시기에, 팔레스타인은 통상 “아랍인들”이라고 언급되었고, 시온주의적 식민화는 국제적 담론 상에서 ‘아랍-이스라엘 갈등’으로 언급되었다. 이러한 꼬리표는 1980년대 말 첫 번째 인티파다(Intifada)의 발발 도중에 ““아랍”-이스라엘 갈등은 근본적으로 팔레스타인에 관한 것이었음이 구체적인 방식으로 분명”해지면서 다소 변화하였다(Zahama, 1995: 44).

[*16] 들뢰즈와 산바르의 친밀한 우정에 대해 증언하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예를 들어, 2004년에 쓴 책 『팔레스타인 사람의 형상들(Figures of the Palestinian)』에서 산바르는 ‘질 들뢰즈, 완벽한 우정에 경의를 표하며’라는 말로 책을 들뢰즈에게 헌정하였다.

[*17] 북아메리카-팔레스타인 연대에는 오랜 역사가 있다. 예를 들어, 2016년에는,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학생들이 북아메리카의 선주민 부족 스탠딩록 수(Standiing Rock Sioux)와 그들의 땅에 송유관을 설치하려는 미국 정부에 맞선 그들의 싸움에 연대하는 편지와 영상을 공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들의 역사를 읽을 때, 나는 당신들의 역사에 비춰진 나와 나의 민족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신들의 싸움이 곧 나의 싸움이며, 불의에 맞선 싸움에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님을 내 심장으로 느낍니다” (Norton, 2016).

[*18]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착지 식민주의에 대한 들뢰즈의 간략한 분석은 두 기획이 각자 자본 그리고 노동과 다르게 관계맺는 방식 사이에 있는 중요한 차이를 뭉뚱그리거나 생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미국 정착민 식민주의의 맥락에서, 노예화한 아프리카인들을 들여오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 선주민 집단학살은 선주민들이 값싼 노동력으로 거의 활용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Dunbar-Ortiz, 2014) 반면에 이스라엘에서 오슬로 협정 이전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값싼 노동력으로 착취당하는 일이 흔했다. (Shafir, 1989) 이러한 차이나는 정착민 식민지 경제들에 대한 분석을 비교하려면 또한 D. C. M. 플라트 & 베로니카 파치니 케차바우 (Platt and Pacini-Ketchabaw, 1985), 칼 솔버그(Soberg, 1987), 제레미 아델만(Adelman, 1994)을 보라.

[*19] [옮긴이] 국문 번역은 질 들뢰즈, 「통제사회 후기(Post-scriptum sur les sociétés de contrôle)」 (1990), 백욱인, 『들뢰즈의 통제사회 비판』 (2023) 커뮤니케이션 북스, p. xⅵ-xⅷ에서 재인용. 소괄호는 내용 이해를 위해 본문에는 빠져있는 단어를 되살린 것이다.

[*20] 더 최근에는, 조셉 푸글리스 (Joseph Pugliese, 2015)와 에얄 와이즈만(Eyal Weizman, 2012)가 이스라엘의 파괴와 통제 기술 개발의 결과로 발생한 수익성 산업에 대해 기록하였다.

[*21] [옮긴이] 나크바(Nakba)는 ‘재앙’, ‘대재난’이라는 뜻의 아랍어로, 1948년 이스라엘 국가 건국이 선포되고 76만여 명의 팔레스타인이 추방당한 사건과 그로 인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은 고통을 의미한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건국일 다음날인 5월 15일을 ‘나크바의 날’로 기리고 있다.

[*22]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Études Palestiniennes)》지의 창간인이자 편집장인 엘레아스 산바르는 그가 학술지를 준비하면서 필요한 커넥션들을 제공해준 사람이 들뢰즈라고 적고 있다(Halevi, 1994).

[*23] [옮긴이] 실비아 윈터의 개념으로, 서구의 여러 이분법(여성/남성, 백인/비백인, 장애인/비장애인...) 중에서도 다윈의 자연선택 개념에 뒤따르는 선택/비선택의 이분법 중 한 축을 이르는 것으로, 역사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어 온 어떤 것들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24] [옮긴이] 원문에는 1979a로 되어 있는데, 1978 〈골칫거리들(LES GÊNEURS)〉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수정했다.

[*25] 이스라엘 형법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돌던지기를 흉악 범죄로 규정한다. 이 글이 쓰이는 시점에, 이스라엘 국가는 돌던지기에 현행 2년형을 20년형으로 늘리는 방안을 지금도 추진하는 중이다.

[*26] [옮긴이] 이 문장은 들뢰즈의 미출간 선집 《광기의 두 체제(DEUX RÉGIMES DE FOUS)》 불어 원본에 수록된 〈돌멩이들(LES PIERRES)〉에는 없는 문장으로, 영역본인 《Two Regimes of Madness》에 수록된 〈Stones〉에도 없는 문장이다. 그러나 Mustapha Kamal이 영역한 〈Wherever They Can See It〉에 이 문장이 실려있고, 《정원(al-Karmel)》에 실린 아랍어 원본에서 직접 번역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점들에 미루어보아, 실제 아랍어로 발행된 원고와 들뢰즈가 남긴 불어 원고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어본에는 Kamal의 영역본에는 없는 문장 및 문단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27] 들뢰즈가 팔레스타인에 참여(engagement)하던 동시기에, 그는 펠릭스 가타리와 《천 개의 고원 : 자본주의와 분열증2》를 공저하는 과정에 있었다. 이 저작에서 팔레스타인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프랑수아 도스(François Dosse, 2010: 261)는 “전쟁 기계라는 개념은 국가가 없는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해 사유하기에 특히 적합하다.”라고 썼다. 이에 더하여, 《대담: 1972-1990(Pourparlers: 1972-1990)》(신지영 옮김, 2023, 갈무리)에 수록된 〈중재자들〉이라는 들뢰즈의 에세이에서 그는 “소수 담론”을 논의할 때 팔레스타인을 간략하게 고려한다. 여기서 그는 묻는다. “(민중의 구성 운동을 포착하는 것이지요. 민중은 미리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민중은, 파울 클레가 말했듯이,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민중이 있었을까요? 이스라엘은 아니라고 말하죠. 틀림없이 있었어요.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그것이 아니죠. 본질적인 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들의 영토에서 쫓겨나는 순간부터 그들이 저항하는 한, 민중의 구성 과정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 (이런 식으로 구성되지 않는 민중은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식민지 담론을 참조하는 기존의 허구들에 소수 담론이 대립하는 것입니다. 소수 담론은 중재자들과 함께 만들어지지요.” (1997: 126) (2023: 231) [옮긴이] 소괄호의 내용은 이해를 돕기 위하여 앞에 생략된 내용을 추가로 인용한 것이다.



rhizome 2025-11-28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하는 DELEUZE의 Palestine 문서고에서, 중동지역 총-지배(/)대리인으로서 Israel의 국가구성과 지역패권구축을 위해 선주민학살과 인종청소를 통한 ‘정착민 식민주의‘로서 재도입된 미국 건국을 위한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청소 모델의 재현일 뿐이라는 핵심적 통찰이 가장 요약적으로 표면화된 글이므로 같이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

Gilles_DELEUZE & Elias_SANBAR ‘1982. Interview〈LES INDIENS DE PALESTINE〉
→국역: 갈피Galpie‘241022화.〈팔레스타인의 인디언들〉
@{갈피를 찾아 떠나는 길}=https://galpieless.tistory.com/21




* 역자해설: 들어가기 전에


(0) 이 글은 1975년부터 1995년까지 책으로 정식 출간되지는 않은 들뢰즈의 텍스트들을 모은 선집 중 두 번째[*1]인 《광기의 두 체제(DEUX RÉGIMES DE FOUS)》에 스물 여섯 번째로 수록된 팔레스타인 저술가 엘리아스 산바르와의 짧은 인터뷰〈팔레스타인의 인디언들(LES INDIENS DE PALESTINE)〉을 번역한 것이다.



(1) 최초 출처는 (프랑스어로 출간되는 학술지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Etudes Palestiniennes)》에 수록된 팔레스타인 저술가 엘리아스 산바르(Elias Sanbar)와의 대담을 기록한 것이다. 1980년, 엘리아스 산바르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루는 학술지를 창간하고자 하였는데, 이미 기획안이 완성된 상태로 여러 군데 접촉했음에도 산바르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되기 일쑤였다. 산바르는 벵센느에서의 세미나 이후 절친한 친구가 된 들뢰즈에게 연락을 취해 도움을 요청했고, 들뢰즈는 산바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출판사 미뉘(Minuit)의 대표 제롬 랭동(jérôme lindon)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렇게 하여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Etudes Palestiniennes)》가 1981년 10월 창간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산바르와 들뢰즈는 함께 이 대담을 출간하게 된다.)
DELEUZE, Gilles ‘820508~09. 『엘리아스 산바르(Elias Sanbar)와의 대담집; 해방(Libération)』.[*2].



(2)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들뢰즈는 이스라엘 국가의 형성과 그에 수반하는 팔레스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강탈과 식민화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는 여러 편의 글과 인터뷰를 남겼다. (1978년과 1982년, 1983년, 1988년) 1983년에는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Etudes Palestiniennes)》지에 팔레스타인에 대한 식민화 과정을 현재진행형인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에 대한 식민화와 관련짓는 글을 기고하는데, 팔레스타인에 관한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일련의 글들에서 들뢰즈는 북아메리카와 팔레스타인에서 나타난 식민적 폭력이 자본주의의 발전과 관련됨을 분석하며, 팔레스타인을 식민화하며 팔레스타인 땅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그 역사를 삭제하는 이스라엘의 행위가 ‘집단 학살(genocide)’라는 점을 강조한다[*3].



(3) 엘리아스 산바르는 1947년 이스라엘의 하이파에서 태어난 팔레스타인 역사학자이자 시인, 에세이스트, 번역가, 저널리스트이자 외교관으로, 70년대 후반부터 들뢰즈와 활발하게 교류했다. 산바르는 1960년대 후반부터 파리에서 설립된 팔레스타인 학생 총연합의 프랑스 지부 회원으로 활동했는데, 1969년 연합에서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와 팔레스타인 투사들과의 만남을 위한 요르단과 레바논 방문을 조직했을 때 산바르는 방문 기간 내내 고다르와 동행했다. 1981년 팔레스타인에 관한 가장 권위있는 학술지로 평가받는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Etudes Palestiniennes)》지를 공동으로 창간하여 25년간 편집장으로 재직하였다. 산바르는 팔레스타인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서구 세계에 팔레스타인의 문화를 알리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프랑스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스테판 에셀과의 공저 《생존자와 추방자(Le rescapé et l’exilé)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2012년 이후 산바르는 유네스코 팔레스타인 대사 겸 상임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5년에는 저서 《팔레스타인 사람들(The Palestinians)》로 팔레스타인 도서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하여 여러 매체에서 활발하게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팔레스타인의 인디언들 (LES INDIENS DE PALESTINE)[*5]





질 들뢰즈 – 팔레스타인에서 무언가가 무르익은 것 같습니다. 마치 그 사람들이 자신들이 맞은 위기의 처음 상태를 극복해낸 것처럼, 마치 안정적인 영역 혹은 평온한 영역, 당연히 가졌어야 할 어떤 영역에 도달한 것처럼 새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와 새로운 양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공격적이지도 그렇다고 방어적이지도 않으면서 다만 세계 전체와 ‘동등한 위치에서’ 말할 수 있게 하는 어떤 새로운 방식의 말하기지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직 그들의 목표에 다다른 것은 아닌 듯한데, 이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엘리아스 산바르 – 첫 호가 발행되자마자 우리는 그런 반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니,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이런 학술지를 낼 수 있다니!”라고 스스로에게 말한 당사자들도 있고요. 그건 그들의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있던 어떤 이미지를 동요하게 만들었죠. 많은 이들에게서 우리가 강하게 요청하는 팔레스타인 투사의 이미지가 여전히 추상적인 것으로 남아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설명하자면, 우리의 실존이라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전까지 우리는 난민들로 인식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의 저항 운동이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투쟁에 집중하게 했을 때, 우리는 또다시 어떤 환원적인 이미지 안에 갇혀버렸지요.

순전히 군사적인 이미지가 한도 끝도 없이 되풀이되고 또 고립되었고, 우리는 단지 그런 사람들로만 받아들여질 뿐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이미지로 좁은 의미의 군대보다는 투사를 더 선호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학술지의 출간이 유발한 놀라움 또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존재하고 있으며 단지 추상적인 원리원칙을 상기시키기 위한 용도로 취급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말하기를 누군가는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학술지가 팔레스타인에서 만들어지긴 했지만, 이 학술지는 다양한 관심사들이 표현되는 터전을 이루어내고 그에 못지않게 팔레스타인인뿐만 아니라 아랍인, 유럽인, 유대인과 같은 여러 사람들이 발언하는 장소를 구성해냅니다.



누군가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작업에 지평의 다양성이 있다는 것, 앞서 말한 것뿐만 아니라 여러 계층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해야 합니다. 팔레스타인 화가들, 조각가들, 노동자들, 농민들, 소설가들, 은행원들, 배우들, 상인들, 선생들... 요컨대 실제 사회 그리고 이 학술지가 보고하고 있는 실존들에 대해서요.



팔레스타인은 단지 하나의 민족일 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땅이기도 합니다. 팔레스타인은 이 민족과 그들이 강탈당한 대지 사이의 연결이고, 그 부재와 귀환을 향한 커다란 욕망이 작용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1948년 이래로 살고 있던 우리 민족을 전부 추방함으로써 만들어진 유일한 장소입니다. 우리가 팔레스타인을 두 눈에 담을 때, 우리는 연구하고, 조사하고, 아주 작은 움직임들을 포착하고, 그곳에 가해지는 모든 변화를 기록하고 또 옛 팔레스타인의 모든 이미지를 완성해나가지요. 요컨대 우리는 바라보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질 들뢰즈 - 《팔레스타인 연구》지에 실린 수많은 논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들의 영토에서 내몰렸던 과정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불러내고 또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데요,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식민화된 사람들하고는 다른 상황에, 피난하고 내몰리는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준비 중인 책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인) “홍인(Peau-Rouges)”과의 비교에 역점을 두었는데[*6], 이는 자본주의 안에 두 가지 매우 다른 움직임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때로는 사람들을 그들의 영토에 가두어놓고서 잉여가치 축적을 위해 노역을 시키고 착취하는 것이 문제인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식민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때로는 급격한 발전을 위해 다른 곳에서 노동력을 불러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한 영토에서 거기 사는 사람들을 치워버리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아메리카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 시오니즘의 역사가 바로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 왔지요. 어떻게 진공 상태를 만들 것인가, 어떻게 사람들을 치워버릴 것인가?



한 대담에서, 야세르 아라파트[*7]는 그러한 비교의 한계를 지적하고[*8], 그러한 한계가 《팔레스타인 연구》지의 지평선을 형성하고도 있다고도 지적합니다. “홍인들”은 그들이 추방된 영토 바깥에 어떤 기반이나 세력도 전혀 놓여 있지 않았던 반면에, 팔레스타인에는 아랍 세계가 있었다고 말이지요.



엘리아스 산바르 – 낯선 땅들로 이주당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집”의 연장선상으로 이주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독특한 추방자들입니다. 우리가 이주한 아랍 땅은 우리가 자기네들과 융화되길 원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인 곳이지요. 참,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랍인들을 향해 이스라엘어에서는 ‘보이지 않게 하다’를 의미하는 “동화”를 우리와 해내지 못했다고 비난한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생각하게 되네요. 우리를 추방한 사람들이 느닷없이 아랍의 인종주의라고 주장하는 어떤 것에 대해 우리의 관점에서 걱정하게 된 거죠. 그렇다고 그게 우리가 몇몇 아랍 국가들에서 반발에 맞설 필요가 없었다는 걸 의미하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그러한 충돌들은 우리가 아랍 사람이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무장 투쟁을 통한 혁명을 하고 또 해왔기 때문에 가끔 그것이 불가피했을 뿐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우리는 유대 식민지 개척자의 “홍인들”과도 같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우리의 유일한 역할은 사라져버리는 데에 있지요.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건국의 역사는 아메리카에 미국을 탄생케 한 그 과정의 재연임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거기에 그들의 상호 연대를 이해하기 위한 본질적인 요소 중 하나가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전적’이고 통상적인 식민화를 위한 위임통치 시기 동안 식민자들과 피식민자들이 공동으로 생활하지 않도록 만든 그런 요소들이 있지요[*9]. 프랑스와 영국 등은 토착민들이 그 안에 현존하는 것이 그 공간의 존재 이유가 되는 어떤 공간을 설치하기를 강력하게 바랐습니다. 거기에 있는 피지배자들에게 지배력이 미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지요. 이는, 우리가 그걸 바랐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어떤 코뮌적인 공간을 창조해냈습니다. 다시 말해, 명백하게도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의 이러한 ‘만남’을 이루어내는 어떤 네트워크, 구역, 사회적 삶의 수준을 창조해낸 것이지요. 그 만남이 무관용적이고, 짓밟으며, 착취하고 또 강압적이라 해도 ‘이방인’이 ‘현지인’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과 ‘접촉’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은 전혀 바뀌지 않습니다.



시오니즘은 그와 반대로 우리의 부재를 필요로 함으로써 시작하며, 더 나아가 일란 할레비가 잘 서술했듯이[*10] 그 구성원들의 특수성(유대인 공동체들의 옛 소유지)을 우리의 거부와 우리의 퇴거, ‘강제 이주’ 그리고 대체의 주춧돌로 삼는 데까지 이릅니다. 그렇게, 내가 ‘이방의 식민자들’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도착했던 것과 같은 발자취를 따라, ‘미지의 식민자들’이라고 불러야만 할 것 같은 이들이 우리에게 태어났습니다. 그들의 고유한 특성을 타자에 대한 전적인 거부의 기초로 삼고 그에 따라 모든 걸 사고하고 행동하는 이들이요.



더구나 1948년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나라는 단지 점령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소멸했지요. 같은 순간에 ‘이스라엘 사람’이 된 유대인 식민자들은 그것을 실천해야만 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시오니즘 운동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어느날 떠나갈 것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그 나라가 텅 비어있었다는 생각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공동체를 불러모았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 도착해서 그 반대 상황을 확인하고 그것을 글로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 공동체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매일매일 물리적으로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의 면전에 대고 그들이 거기 없는 사람인 양 행동했지요. 이런 자기기만이 물리적인 것도 아니니 거기에 곧이곧대로 속아넘어가는 이는 없었습니다만, 모두가 이 사람들이 오늘날 현재 ‘막 소멸하려는 참’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멸이 성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출발점에서부터 마치 그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처럼, 다시 말해 엄연한 현실에서도 타자의 현존을 전혀 ‘보지 않는’ 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 또한 깨닫고 있지요. 그 성공을 위해서 땅을 텅 비우는 일은 식민자들 자기 자신의 머리에서 ‘타자’를 퇴거조치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했습니다.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 시오니즘 운동은 유대주의를 추방의 근거 그 자체이자 다른 이들에 대한 거부의 근거로 만드는 인종주의적 시각을 철저하게 따랐습니다. 다른 인종주의자들이 주도한 유럽에서의 박해에서 결정적으로 도움을 얻은 시오니즘 운동은 그로 인해 그 자신의 방식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지요.



다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시오니즘이 대문자 유대인을 유폐했다고, 내가 방금 서술한 그런 시각의 포로로 붙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말하건대 시오니즘은 그들을 포로로 붙잡고 있습니다. 어느 한순간에 붙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요.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홀로코스트가 지나가자 그 방식들이 진화하여, 유대인들이 어디에서나 그리고 어느 때에나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들의 ‘타자’이기를 원하는 사이비 ‘영원한 원리’ 안에서 스스로를 변이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거부당하고 저주받는 ‘타자’라는 그러한 위치를 고집스럽게 점유하기만을 갈망할 수 있는 민족이나 공동체는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 중동의 타자들은 아랍 사람이고 팔레스타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들의 소멸이 의제화되는 그 타자에게 서구열강들이 어떤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은 그야말로 냉소와 위선의 극치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부 수장의 광기에 대항하여 보호를 보장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건 바로 우리입니다.



이 모든 상황을 무릅쓰고, 우리의 유일하고 단일한 대변자인 OLP(l‘Organisation de Libération de la Palestine,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팔레스타인 민주국가를, 그들이 누구이건 간에 그들의 모든 거주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이 무너지는 어떤 국가를 갈등의 해결책으로 제시했습니다.



질 들뢰즈 - 《팔레스타인 연구》지는 1호의 첫 두 페이지에 수록된 그 자신의 선언문이 있지요.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은 민족”이라고요. 이는 다양한 의미를 담은 외침입니다. 첫 번째로, 부름이며 소환입니다.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인정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쉬지 않고 비난합니다. 보세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우리를 파괴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팔레스타인이 자기 자신을 인정받기 위해 싸워온 기간이 50년도 넘었습니다.



두 번째는, 어떤 반대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선언은 차라리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은 민족이 아니다”는 것이었죠. 우리의 초월성과 어마무시한 학대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지 2호에 실린 유대인 저자들의 두 텍스트가 중요해요. 홀로코스트에 관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시오니즘적 반응에 관한, 그리고 팔레스타인과의 관계와 거기에 발을 담그지 않았던 아랍 세계 전체와의 관계에서 이스라엘에서 발생한 사건을 이해하려는 의미작용에 관한 텍스트들이요. “규범에서 벗어난 민족으로 대우받기”를 요구하는 이스라엘 국가는 서방 국가와의 관계자에게 경제적으로 재정적으로 의존하는 상황 아래에서 더욱 더 유지될 것인데, 그와 같은 어떤 나라에서도 그와 비길 만한 경우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보아즈 에브론)[*11]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와 반대되는 요구 사항에, 그들 자신인 자가 되는 다시 말해 완전히 “평범한” 민족이 되는 것에 그토록 사로잡혀있는 것이지요.



종말론적 역사관에 대항하여, 역사의 의미를 가능한 것 중 하나로, 가능성의 다양체 그리고 매 순간 증식하는 가능성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 《연구》지가 현실적인 분석들로 무엇보다도 보여주길 원하는 게 바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엘리아스 산바르 – 완전히요. 우리의 현존을 세계 안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이러한 물음은, 그렇게나 간단한 것이면서도, 분명히 많은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진정으로 받아들여지기만 한다면 팔레스타인 민족의 소멸을 예견했던 사람들에게 매우 힘든 과업을 부과하게 될 그런 종류의 진실입니다. 실제로, 결국, 그러한 진리가 말하는 바는 모든 이들이 말하자면 “권리에의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지요. 당연해 보이지만, 모든 정치적 투쟁의 출발지이자 종착지를 얼마간 표시하는 힘입니다. 시온주의자들한테 물어보면, 그들이 이 주제에 대해 무슨 말을 할까요? 당신은 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어떤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말하는 건 절대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떠한 세력도 그런 입장을 지지할 수 없고, 그들도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지요. 틀림없이 그와 반대로 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거기에 없다”고 단언하는 걸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현존에 대한 우리의 긍정은, 그것이 말해지지 않기 때문에, 언뜻 보이는 것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첫 번째 선집은 《무인도와 다른 텍스트들(L’Île déserte et autres textes)》으로, 1953년부터 1974년까지의 글들을 모은 것이다.

[*2] François Dosse, 〈Les engagements politiques de Gilles Deleuze〉,《Cités》 40, Paris, PUF, 2009.

[*3] Kathryn Medien, 〈Palestine in Deleuze〉, 《Theory, Culture & Society》, 1 September 2019, 36(5):49-70.

[*4] https://www.unesco.org/en/articles/writer-elias-sanbar-and-spains-biblioteca-islamica-receive-2015-unesco-sharjah-prize-arab-culture
엘리아스 산바르는 1947년 출생한 팔레스타인 저술가로 《팔레스타인 연구》의 편집장이다. 그는 70년대 말부터 들뢰즈와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5] 엘리아스 산바르(Elias Sanbar)와의 대담. 『해방(Libération)』, 1982년 5월 8-9일, p.20-21.
이 대담에 앞서 들뢰즈가 작성한 짧은 글을 보자. 이 글은 1981년 10월 근동 지역 위기의 요소들에 대한 분석을 초기 목표로 삼아 창간된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Etudes Palestiniennes)》지에 실렸다. “프랑스어로 쓰인 아랍 학술지를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 왔다. 사실은 팔레스타인보다도 북아프리카 쪽에서 오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 연구지는 명백히 팔레스타인 문제에 중심을 맞추면서도, 아랍 세계 전체와도 관련되는 두 가지 성격을 갖는다. 하나는 이 연구지가 매우 심도 있는 사회-정치적 분석을 능숙한 논조로 냉철하게 제시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매우 풍부하면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아랍 그대로의 문학, 역사학, 사회학 ‘문헌집(corpus)’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6] 들뢰즈는 다음을 언급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1948, 추방(Palestine 1948, l’expulsion)』, 파리, 1983년 발간된 팔레스타인 연구지 출판본.

[*7] [옮긴이]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2004)는 팔레스타인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정부 수반(1994~2004),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의장(1989~2004)이다.

[*8]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Etudes Palestiniennes)》, no.2, 1982년 여름, p.3-17.

[*9] 1921년까지 이어진 영국의 군부 통치를 받던 팔레스타인은 국제 연맹(SDN, Société des Nations)에 의해 대영제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다. 민간통치는 1923년 시작되어 1948년 5월 15일 영국이 물러나고 이스라엘 국가가 선포되는 날까지 지속되었다.

[*10] 일란 하레비(Ilan Halevi), 『유대인 문제, 종족집단, 법률, 공간(Question juive, la tribu. la loi, l’espace)』, 파리, 미뉘(Editions de Minuit), 1981.

[*11] 보아즈 에브론(Boaz Evron, בועז עברון) 『“홀로코스트”에 대한 해석들 : 유대 민족을 향한 위험(Les interprétations de l’“Holocauste” : Un danger pour le peuple juif)』, 팔레스타인 연구, no.2, 1982 겨울, p.36-52.







rhizome 2025-12-02 0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11월 29일 국제 행동의 날:
세계 곳곳에서 트럼프의 기만적인 가자 ‘평화’ 구상을 규탄하다 >[*0]




11월 29일 ‘국제 팔레스타인 연대의 날’을 기해 세계 곳곳에서 트럼프의 기만적인 가자 ‘평화’ 구상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국제 팔레스타인 연대의 날’은 1948년 인종청소에 기초한 이스라엘의 건국을 승인한 유엔이 제정한 날이지만,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세계 곳곳의 수많은 사람들은 이 날을 이용해 트럼프의 가자 지배 구상을 승인한 유엔을 비판하고 팔레스타인인들과의 연대를 표했다.


1.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전날인 11월 28일 USB와 시코바스 등 기층 노조들이 팔레스타인 연대 파업을 벌였다.

이탈리아 노총(CGIL)과 같은 기존의 대형 노조들과 별도로 조직된 이 기층 노조들은 이탈리아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파업을 꾸준히 벌여 왔다. 그리고 지난 10월 초에는 기존 대형 노조들을 압박해 하루 총파업을 성사시켰다[*1].

이번 11월 28일 팔레스타인 연대 파업은 대개 기층 노조들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기층 노조로 많이 조직된 교통·물류 부문에서 파업 효과가 두드러졌는데, 철도 약 3분의 1이 멈추고 여러 항공편이 취소됐다.

밀라노 인근 도시 피오텔로에서는 세계 최대 물류 업체 DSV 등의 물류 거점들이 8시간 동안 마비돼, 추산 손실액이 300만 유로(약 51억 원)에 이르렀다. 그 거점들과 연결된 밀라노의 공단들도 타격을 입었다.

다음 날인 29일 로마에서는 3만 명이 행진했다. 밀라노와 제노바에도 3,000~5,000명이 집회와 행진을 벌였다.


2. 같은 날 세계 여러 주요 도시들에서도 대규모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가 벌어져,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공격과 트럼프의 가자 구상을 규탄했다[*2]. 영국 런던에 10만 명, 프랑스 파리에 5만 명이 모였다.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도 많게는 수천 명 규모의 집회와 행진이 열렸다. 모로코에서도 수만 명이 집회와 행진을 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폭우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시위대가 국회의사당에서 마요 광장까지 행진했다.


3. 한국 서울에서도 혁명적 국제주의 단체들이 주축이 된 국제공동행동의 일부로서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이 주최한 집회행진과 등록참여단체규모에서 국내최대인 ‘팔레스타인평화연대‘가 세계 ˝분노의 날˝ 일부로 주관한 주한이스라엘대사관 옆 집회가 동시에 열렸다[*3].

31. 로마, 런던, 아테네, 오슬로, 워싱턴DC 등과 함께:
서울에서도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행동이 열리다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 주최

“점령을 멈춰라“ 11월 29일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행동의 날 집회 참가자들이 서울 도심을 행진하며 팔레스타인 해방을 염원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이미진
11월 29일 세계 곳곳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공동 행동이 벌어졌다. 이탈리아 로마, 영국 런던, 그리스 아테네, 노르웨이 오슬로, 미국 워싱턴DC 등지에서 시위가 잡혔다.

이번 국제 공동 행동은 11월 28일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세 번째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에 기해 호소된 것이다.

11월 28일 금요일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전국 주요 항만·공항들과 여러 대도시의 교통을 마비시켰다. 9월 첫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의 구호 “모든 것을 봉쇄하라!“가 다시 이탈리아를 흔들었다.

“모든 것을 봉쇄하라“ 구호는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팔연사)이 주최한 국제 행동의 날 서울 집회에서도 울려 퍼졌다.

오후 2시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열린 이 집회에는 약 500여 명이 참가했다.

대학 동아리 깃발을 들고 무리 지어 참가한 학생들, 지역에서 홍보전을 벌이고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참가가 특히 눈에 띄었다. 소속 노조 조끼를 입고 팔레스타인 깃발을 흔드는 노동자, 자원봉사 활동에 참가한 노동자, 자체 현수막을 든 교사들 등.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교사들’ 소속 교사들은 오늘 집회를 위해 참가단을 꾸리기도 했다.

이 참가자들에게,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온 다리오 씨는 현지 투쟁의 활력을 전하는 연설을 했다.


이탈리아 현지의 노동자 투쟁 소식을 전하고 있는 이탈리아 출신 다리오 씨ⓒ이미진
“이탈리아에서 저희는 이렇게 외칩니다. ‘블로키아모 투토(Blocchiamo tutto, 모든 것을 봉쇄하라)!’

“저희는 항만을 봉쇄하고, 거리를 휩쓸고, 일상을 교란시켰습니다. 잔혹 행위가 계속되는 한 어떤 사회도 평소처럼 굴러가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다리오 씨는 이스라엘에 무기와 장비를 수출하는 이탈리아 무기 기업 ‘레오나르도’와 한국 기업 HD현대가 학살 공범 행위를 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저항이 아니라 점령이 범죄입니다!

“서울에서 여러분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침묵에도 의미가 담겨 있듯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보이콧하고, 항의 시위합시다. 인종학살이 정상적인 일로 취급받지 못하게 합시다!”

다리오 씨의 힘찬 발언에 참가자들은 연신 박수를 쳤다. 연대의 뜻을 표하는 이탈리아어 구호가 서울 도심에 울려 퍼졌다.

다음 연설자인 전진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국장은 이탈리아 노동자들에게 연대를 표하며 이스라엘과 협력하는 한국 정부·기업들을 규탄했다.


이스라엘과 협력하는 한국 정부·기업들을 규탄하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전진한 정책국장ⓒ이미진
“이재명 정부는 사람을 살리는 데 쓸 수 있는 돈을 무기에 쏟아부어, 한국을 세계 4대 방산 강국으로 만들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돕는 살인 기업들이 그 수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한화시스템, 현대로템, KAI 등은 이스라엘 군사 기업들과 협력해 이스라엘의 무장을 강화시켜 주고 있습니다. 인종학살 공범 구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진한 정책국장은 이재명 정부가 복지와 의료, 서민 생활고 완화에 쓸 수 있는 돈을 세계를 불안정케 하고 이스라엘의 학살을 이롭게 할 군비 증강에 쓰고 있다고 규탄했다.

“우리도 모든 것을 봉쇄합시다! 한국의 이스라엘 협력을 봉쇄하고,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키웁시다!” 참가자들은 전진한 국장의 선창에 따라 국제 반전 운동의 구호 “군비가 아니라 복지를,” “전쟁이 아니라 생명을”을 외쳤다.

연대
이번 국제 행동의 날을 위해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이 팔연사에 보낸 메시지를 박혜성 기간제교사노조 위원장이 대독했다. 트럼프가 내놓고 한국 등이 유엔 안보리에서 승인한 가자지구 점령 구상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국제 공동 행동에 연대를 표하는 메시지였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현지에서 온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전국기간제교사노조 박혜성 위원장ⓒ이미진
“저 먼 나라들의 수도에서 압제자들은 가자지구에 대한 도움을 가장한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언합니다. ‘너희는 패배할 것이다, 앞선 모든 그런 기만 시도가 실패했듯이 말이다!’

“저들은 각성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의지에 밀려 실패할 것입니다. 저들은 전 세계에서 이는 연대의 물결에 밀려 실패할 것입니다. 런던·파리·뉴욕 거리에서 솟구치는 정의로운 분노가 저들을 저지할 것입니다.

“‘가자지구 그린존’ 운운하는 저들의 위선과 사기극은 오늘 행동과 같은 국제 연대에 의해 파묻힐 것입니다.”

대열 주변 인도에서 연설을 듣고 집회 모습을 핸드폰에 담는 사람들이 수십 명을 헤아렸다.

미국에서 온 성균관대 유학생 제시 곤잘레스 씨 또한 트럼프의 가자지구 점령 구상을 조목조목 폭로하며 국제적 저항의 의미를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한국의 여러 대학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하는 학생들과 성균관대 유학생 제시 곤잘레스 씨ⓒ이미진
“미국인으로서 저는 인종학살을 지원하고 옹호하는 저희 나라 정부를 강력히 규탄합니다.

“우리의 기준은 정부들이 우리를 갈라놓으려 모래 위에 제멋대로 그어 놓은 국경선이 아닙니다.

“살 권리는 출신지에 따라 선택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 세계 모든 인류의 권리를 위해 국경을 넘어 함께 일어섭시다.”

여러 대학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건설하는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팻말을 들고 곤잘레스 씨와 함께 섰다. 그의 힘찬 발언에 참가자들은 팔레스타인 깃발과 팻말을 흔들며 지지를 보냈다.

활력을 불어넣는 다채로운 활동들도 국제 공동 행동 집회를 풍성하게 했다.

팔레스타인 연대 물품을 나누고 판매하는 부스, 연대 지속을 위한 후원 모금 부스는 관심을 표하는 사람들로 줄곧 북적였다. 팔레스타인 깃발 색깔로 페이스페인팅을 해 주는 청년의 손길이 분주했다.

고려대학교 팔레스타인 연대 동아리 ‘쿠피야’ 의장 박정훈 씨는 집회 중간 힘찬 노래 공연으로 참가자들의 기세를 돋구었다.


고려대학교 팔레스타인 연대 동아리 ‘쿠피야’ 의장 박정훈 씨가 공연을 하고 있다ⓒ이미진
“Palestina Libera(팔레스타인에 해방을)!”
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이스라엘 대사관을 향해 도심 행진에 나섰다.

부산과 울산에서 온 참가자들이 대열 선두에 섰고, 이탈리아인 학생을 비롯한 다양한 배경의 청년·학생이 구호를 선창했다. 수십 개의 팔레스타인 깃발과 다양한 구호의 팻말·현수막, 쿠피예 문양의 커다란 펼침막이 거리를 수놓았다.

행진 대열은 이스라엘 대사관 인근에서 항의를 표하고 서울시청을 지나 명동 방면으로 행진했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긴 대열을 오랫동안 촬영하는 한국인 행인들, 구호 박자에 맞춰 박수를 치고 손을 흔드는 관광객들 등 거리에서 많은 응원을 받았다.

대열이 롯데백화점 앞을 지나 명동 인근으로 접어들자 많은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대열을 맞이하기라도 하듯 손을 흔들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왕복 10차선에 이르는 대로 건너편에서 박수를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참가자들은 명동역 앞까지 행진해 집회를 마무리했다. 정리 집회에서 주최 측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역사적 항쟁인 1987년 1차 인티파다 38주년을 기리는 집회를 12월 6일(토) 오후 2시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열 것이라 알렸다.


32. 팔레스타인 시민사회가 보내는 호소문에 기반한 ‘분노의 날‘ 집회의 일환으로 개최된 한국 ‘팔레스타인평화연대‘ 집회는 다만 공식공지가 24일에야 올라오는 바람에 전파가 늦어졌지만 대신 호소문을 공유함.

[참조] ‘251129토14시 ‘분노의 날’ 집회 – 팔레스타인 시민사회가 보내는 호소문

66
팔레스타인에서 전 세계 자유 시민에게 보내는 호소
우선 여러분의 놀라운 역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는 정의, 인간성, 자유, 평등에 대한 여러분의 헌신과, 제국주의와 시오니즘으로 구현되는 모든 악과 착취, 억압 세력에 대한 여러분의 거부를 반영합니다. 이 세력들은 국제법이나 인도주의 법, 결의안 등을 완전히 무시하며 팔레스타인에서 인종 청소를 계속 자행하고 있습니다. 제국주의 세력의 지원 속에 시온주의자들은 우리 민족을 말살하고 민주 국가를 세우려는 우리의 꿈을 파괴하겠다는 의도로 말살 전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자유시민 여러분,
2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말살 전쟁, 주범 수준에 도달한 국제적 공모, 전설로 남을 우리 팔레스타인 민족의 불굴의 의지 속에, 우리는 집단학살 두 번째 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집단학살은 많은 유럽과 아랍 정부들의 침묵과 공모 속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반면 팔레스타인 인민은 우리 땅과 민족적 프로젝트를 견지하며, 대안으로 제시되는 어떠한 국가도 거부하는 결연한 의지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 위대하고 역사적인 확고한 의지는 모든 국가에서 확산되고 있는 세계적인 대중 운동과 함께하고 있으며, 이 운동은 거짓된 이스라엘의 서사를 해체하기 위한 더욱 강력한 보이콧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진실을 폭로하고 정의를 위해 싸운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전 세계의 자유시민 여러분,
11월에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재앙적인 벨푸어 선언입니다. 여전히 피와 고통, 강제이주, 강제추방으로 고통받고 있는 우리 민족을 향한 거대한 음모를 상기합니다. 두 번째는 11월 29일 팔레스타인 인민과의 국제 연대의 날입니다. 지속적인 국제 연대와 여러분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자부심을 바탕으로, 고조되는 연대의 기세를 이어가며 우리의 대의와 진실에 더 많은 지지를 보낼 새로운 계획을 세워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분께 11월 29일을 ‘분노의 날’로 지정하고, 점령국가 이스라엘의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여 이스라엘을 고립시키고 인종차별적인 범죄에 대한 정의의 심판을 받게 해 주실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서 큰 희망을 봅니다. 여러분의 정부가 행동할 수 없거나 행동할 의지가 없다면, 여러분이 우리의 힘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99



S. 이런 동원들은 ‘휴전’ 이후에도 글로벌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음을 보여 줬다.

S1. 특히, 유럽에서는 이스라엘의 인종학살과 그에 대한 자국 정부의 공모에 맞선 투쟁이, 재-무장과 거기에 수반되는 복지 삭감, 노동조건 공격 등에 맞선 반전평화=복지투쟁과 결합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파업이 가장 앞서 있는 사례다.

11월 29일 그리스의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대 또한 신타그마 광장으로 행진한 뒤 12월 16일 총파업을 크게 건설하자고 결의를 다졌다. 이것은 군비 증강과 보건·교육·복지 예산 삭감 등이 포함된 정부 예산안에 맞선 파업이다.


S2. 이스라엘의 인종학살에 맞서 노동자들이 계급적 힘을 행사하도록 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이탈리아보다 하루 앞선 11월 27일 오슬로 등 3대 도시에서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2시간 파업이 벌어졌다. 아일랜드에서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아일랜드 노총 지도부를 기층 활동가들이 압박해 11월 28일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전국 행동(중식 시간 동원)을 소명하게 했다.

이런 경험들과 노력들에서 영감을 얻어 한국에서도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계속 키워 나가야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 저자: 이원웅 @https://ws.or.kr/article/38283

[*1] 관련 기사: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 어떻게 건설됐나’>
@https://ws.or.kr/article/37992

[*2] 11월 29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행동의 날 시위 등등 세계각국의 다양한 투쟁 및 집회 관련 사진들은 {The Palestine Chronicle}을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3] 서울 집회 취재기 원문 및 사진 보기: @https://ws.or.kr/article/38280
원문저자: 김준효
사진 목록 참조:
“모든 것을 봉쇄하라“ 11월 29일 오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행동의 날 집회가 열리고 있다ⓒ이미진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행동의 날 집회에서 다양한 국적의 참가자들이 팔레스타인 해방을 염원하고 있다ⓒ이미진
“가자에서 손 떼라“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행동의 날 참가자들이 손수 만든 팻말을 들고 있다ⓒ이미진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행동의 날 집회 참가자들이 대형 쿠피예를 흔들며 서울 도심을 행진하고 있다ⓒ이미진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행동의 날에 참가한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교사들’이 행진하고 있다ⓒ이미진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행동의 날 집회 참가자들이 서울 도심을 행진하며 이탈리아 파업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이미진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행동의 날 집회 참가자들이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학살을 규탄하고 있다ⓒ이미진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행동의 날 집회 참가자들이 서울 도심을 행진하며 팔레스타인 해방을 염원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이미진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



 Thesen  



1. 언론은 이미 가장 강력한 전 사회적 파급력을 갖는 명예형을 기소, 구형, 선고, 집행하는 인민법정 여론재판의 유일무이한 독점적 관할자로서 실질에 있어서 막강하고 광범한 일상 권력을 즉각적, 항상적으로 행사하고 있는 (준)사법기관의 지위에 도달했다.[1]




2. 이뿐 아니라 구조적으로 현대 언론은 주체 전체를 둘러싸고 Media Bubble 안에 가두어 버린 채 실재[2]와 주체 사이를 개입, 차단하여 주체들에게 가공의 현실[3]을 독과점적으로 제공, 통제함으로써 감각과 인식을 조작하고 인공 현실을 창조해내는, 현실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이런 자의적 가공의 가장 비근한 예로 바로 언중법 개정과 관련해서만도 YTN 등 언론 Cartel은 최근까지도 민언련과 민변이 개정을 반대하는 대표적 2대 단체라며 사실 자체를 정반대로 왜곡해 수십 차례 집요한 반복 방송을 한 반면,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들은 철저히 숨기고 은폐해 버린 채 침묵으로 일관하여 국민 대다수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기독교 목회자정의평화실천연대, 대한성공회, 조계종적폐청산시민연대, 개혁국민운동본부, 민주언론시민연합, 사회대개혁지식네트워크, 고려대민주동우회 등 무려 140여 단체가 언론의 이런 작태와 반발을 보다 못해 개정안의 조속한 통과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는 사실 등등은 잘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마치 국내외로 압도적인 대다수가 반대를 하고 있는 듯한 착란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파렴치하고 비열한 취사선택과 침묵의 담합공모가 비일비재 일상화된 것은 현재의 언론환경이 대단히 심각하고 위험한 상황에 빠져 있음을 웅변하는 징후들이 아닐 수 없다.[9]




3. 따라서 과거 권위주의 독재 정부 시대엔 물리적 폭압기구와 정보기관들이 전면에 나서 직접 국가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사회를 통치해 왔지만, 형식적 절차적 민주화가 진전된 현재 국면에선 이상 변화된 사회 구조와 조건들을 적극 활용하여 Hard Power 대 Soft Power, 또는 RSA 대 ISA라는 고전적 이분법을 버리고,


   ① 폭압기관, 정보기관들은 뒤로 물러서서 자신들을 숨기고 대신 새로운 사법/사정권력으로 떠오른 언론기관을 경유해 '언론(사)의 자유'라는 오역된 구시대의 절대 가치와 취재원 보호라는 미명까지 덮어쓴 채 훨씬 더 폭넓고 자유로운 대리폭력을 행사하는 한편,


   ② gaslighting 등 정보-인지 조작 기술부터 Ideology적 문화정치까지를 통해 여론을 주조-통제하는 두 축의 강온 양면 통치술이 모두 다 언어와 정보를 주무기로, 명예를 핵심으로 하는 (정적 등 상대방의) 사회적 생명을 전리품으로, 담론장만을 주전장으로 전개-행사되는 새로운 통치 양식으로 이행했기 때문에 과거 국가폭력에 모든 감시활동의 초점이 주어졌던 것과 같이 이제는 언론폭력에도 같은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4]




4. 또한 그 주통치술의 한 축인 언론폭력 기법들도 사회발전에 따라 나날이 교묘해지고 고도화하고 있기 때문에 혐오-차별만 해도 과거에는 인종 등 특정 minority[5] 집단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표현-행사된 반면, 현재는 집단(전체)화 사고와 고정(관념)화 사고를 조장하는 기초 방법은 여전히 동일하게 사용되나 특정 집단을 혐오-차별하고 억압하기 위해 대신 반대 집단을 일방적이고 맹목적으로 우대하고 극단적으로 과장하여 찬양미화하는 등의 간접 기법이 주로 동원되고 있으며 작금의 소위 '전문가주의' 광란은 정확히 이러한 맥락을 품고 있기 때문에 정권 전체를 위협하는 이런 엄청난 저항을 불러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날로 고도화하는 언론폭력의 새로운 기법들 때문에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그나마 가장 선진적이고 피해자 중심적인 인권의식을 가진 인사들로 엄선된 기관조차 "'보복'은 매우 주관적인..." 어쩌구 하면서 경악스러울 정도로 둔감한 감수성과 상황파악능력을 시전하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인데, 그렇다면 유사한 인적 계층의 더 보수적이거나 후진적 단위일 사법부나 언중위를 상대로 과연 그 누가 도대체 어떻게 악의적 언론에 의한 고의·중과실 보도 피해를 입증해 낼 수가 있단 말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6]




5. 이러한 모든 사실과 그에 따른 막중한 책임을 완전히 망각한 채 한낱 기러기들의 이기적 이익단체로 전락해버린 언론의 광란과 폭동 사태에 의해 국민 다수 계층, 특히 청년들이 느낀 고통과 그 불의, 협잡, 기만에 대한 분노는 섣부른 상상을 초월한다.




6. 나는 이들의 간절한 호소와 지속적 호명을 통해 그 문제의 해결을 사명과 임무로 명령받았다.




7. 언론피해구제법은 이런 맥락에서 민주당(파)에게 안내한 마지막 비상탈출구였다.




8. 민주당이 제대로 된 정치적 대표체라면, 배액 청구권자에서 '전직' 공직자와 중견기업까지를 완전히 제외하면서라도[7] 원래의 개혁 의지와 국민적 염원에 굳건히 입각해 원안대로 통과시키고 나서, 상당기간 그 실제 작동 결과와 효과들을, 산출된 각종 지표와 Data로 확인한 후 최종적으로는 헌재 등등까지 포함한 다른 절차와 제도, 보완입법들을 통해 미세조정해 나가는 경로를 택해 돌파해 나아갔을 것이다.




9. 그러나 '포용'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민주당 정부의 '사면'이나 '부동산 세제[8]'에서 반복되어 온 어이없는 실책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마저 속임으로써 한 치 앞도 내다볼 능력이 전혀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의 저변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조차 전혀 눈치 채지 못 하는 언론의, 폭동과 광란에 뒤이은 갖은 엄살과 막무가내 식 떼쓰기에 계속 밀려 너덜너덜한 누더기가 되어버린 현재의 개정안으로는 언론에 의한 문제와 피해의 실효적 구제도, 심지어 법의 작동조차도 전혀 기대할 수 없기에 입법 통과가 되든 안 되든 일체의 상관이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10. 위와 같이 호소들은 너무나 애절하고 그 고통과 분노는 상상을 초월함에도 개정안을 통해서는 도저히 그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따라서 이 문제의 해결과 언론환경의 개선을 위하여 앞으로 우리는 다른 '무슨 짓'이라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음을 분명히 밝히는 바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그러므로 언론중재법 강화란 다름아닌 이 새로운 사법/사정권력으로서의 인민법정에 정연한 체계와 질서를 부여하고 그 권력에 따르는 엄중한 책임과 의무를 부과하는 필수불가결하고 당연한 과정의 첫 걸음에 불과할 뿐이다.



[2] The real.



[3] 見實; Reality (見 :나타날/보일 현).



[4]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사찰/정보기관이 숨은 매개고리를 통해 언론에 정보를 넘겨 더욱 폭넓은 대리폭력을 자유롭게 행사하는 이 통치기제'를 통해 그 기관들의 존립과 활동 근거도 유지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고양, 조장되고 활성화하는 확대재생산 회로를 끊기 위해서라도, 인민법정에 체계와 질서를 부여하고 의무와 책임을 묻는 법제 도입의 핵심적 일환으로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경우에도 사실이기만 하면 무조건 면책시키기보다 '독수독과론'에 준거하여 불법적 정보획득에 대한 징벌적 규제와 피해 구제의 도입이 반드시 유지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5] 주로 '소수자'로 번역되는데, 오역에 가깝고 '약자'나 '비주류'로 번역되어야 '여성은 결코 소수자가 아니다'라는 식의 황당한 내외 반론을 없앨 수 있음.



[6] 또한 진보계도 백날 오체투지까지 해봐야 전혀 씨도 안먹히는 '차별금지법' 제정운동만을 분리단절적으로 오인하고 매몰돼 있기보다 눈앞의 언론법 개정이 바로 '혐오차별(표현(조장)) 금지법'의 시작과 단초가 될 수 있음을 직시하고 동일 관점으로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전 사회적 여론을 형성-주도하는 언론, 특히 독과점적 (준)공영 방송 언론에 의한 혐오차별 조장은 그 피해가 너무나 급속하고 광범위하기 때문에 정확히 이들에 의해 주도된 이번 언론폭동도 국민 대다수와 청년층에게 가해진 더 큰 피해는 무한반복의 '전문가'주의 광란 그 자체뿐 아니라, 이에 완전히 세뇌고무된 대중, 특히 community (/) site들에서 혐오차별적 공격표현의 폭증 때문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7]그래도 정 어렵다면, 청구 '대상'을 규모에 따라 중상위 언론사로 제한해서라도.



[8] 최근의 경제 상황은 금융(완화)정책이 점차 그 한계 구간의 입구에 진입하고 있다는 sign과 symptom들로 해석되어야 하며, 앞으로 펼쳐질 이러한 구간에서 유일한 해법은 통화 유동성 공급은 점차 줄여 나가면서 그간의 온갖 완화 조치들의 특혜를 독식해 한껏 부풀어 버린 자산 시장의 시세 차익들을 세제로 환수하는 과정 자체에서부터 양극화도 이완하면서 이를 기반(/)자원으로 강력한 재정중심정책을 향해 신속전환해, 금융통화정책으로는 조금도 해결되지 않은 채 오히려 더욱 심화만 되어 갈 양극화 문제와 광범한 수요기반 실물경기 부양을 정밀하게 집중 표적화하여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9] 이하는 조속한 언중법 개정 통과를 촉구하는 140여 개 단체의 공동성명서 전문이다.


66

참된 언론자유는 언론의 책임으로부터!


언론중재법의 조속한 국회 통과를 촉구한다!



유신과 군사독재 시절 권력의 총칼 아래 신음할 때 언론은 국민이 숨을 쉴 공간을 제공하는 탈출구였다. 그리하여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와 자유언론수호투쟁은 마침내 독재의 아성을 무너뜨린 하나의 봉홧불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 언론개혁의 절규가 시민사회에서 분출하는가. 대한민국 언론이 그만큼 타락했기 때문이다. 자본으로부터 독립과 참된 언론 자유를 위해 싸우던 선배들의 결기를 까맣게 잊고 현실에 전면적으로 투항했기 때문이다. 이제 언론은 거꾸로 독점재벌, 사법/검찰, 극우정당 등 우리 사회 과두 기득권의 이익을 앞장서서 지키는 용병이 되고 말았다.


시민의 투쟁으로 쟁취된 언론 자유는 어느덧 통제 불능의 자의적 권력으로 변질되었다. 시민의 편에서 정의를 수호해야 할 언론의 책임은 언론사주와 하수인들의 독점적 권리가 되고 말았다. 대한민국 언론 자유의 신화는 마침내 ‘타인의 인권을 침해할 자유’, ‘가짜 뉴스로 명예를 훼손할 자유’로 변신하고야 만 것이다.


현재 국회 본회의 통과를 앞두고 있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이 통탄할 언론현실을 개혁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책임과 자유가 공존하는 매스미디어 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첫 번째 벽돌을 쌓는 것이다.


하지만 개정안의 통과가 벽에 부딪히고 있다. 극우야당의 국회본회의 통과 저지 책동 때문이다. 그들과 한 몸이 된 언론 기득권 구성원들의 저항 때문이다. 그 선두에 이른바 ‘조중동’이 있다. 언론중재법이 언론자유를 침해한다는 가짜 프레임을 극렬히 유포시키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개정 언론중재법이 현 집권세력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 차기 정권연장을 목표한다는 강변까지 나오고 있다. 개정 법률안 발효 시점이 2022년 대선 완료 이후임을 감안할 때 기괴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허위조작 뉴스, 발행부수 조작, 불법 차명거래, 사생활 침해 기사가 있어왔는가. 이를 통해 추산이 어려운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고 시민 비판이 고조될 때마다 신문협회, 기자협회, 언론노조 등은 언론개혁은 자정능력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과연 결과는 어떠했는가?. 우리나라의 <언론 자유도>는 3년 연속 아시아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언론 신뢰도>는 주요 40개 국가 중 5년째 최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 언론자유의 적나라한 현실인 것이다.


현재 추진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그러한 참담한 언론 현실에 대한 시민사회의 분노가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법률안의 핵심으로서 “언론사의 명백한 고의 또는 중대 과실로 인한 허위·조작 보도에 대한 최대 5배의 징벌적 손해배상 청구”는 책임에 기초한 언론자유를 가능케 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것이다.


참된 언론자유는 언론사주와 일부 언론종사자들의 독점적 소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시민을 위한 시민에 의한 시민의 자유다!



이러한 확고한 믿음 아래 우리 시민사회단체 일동은 다음과 같이 촉구한다.


1. 언론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도 늦출 수도 없다. 주어진 ‘자유’를 악용하여 가짜뉴스로 여론을 호도하는 행위. 허위사실임을 알면서도 언론의 이름으로 폭력적 보도를 자행하는 행위는 민주주의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사회적 약자인 시민의 피해를 방지하고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악의적 가짜뉴스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것이 주권재민 국가의 기본적 장치이며 역으로 언론을 위한 최소한의 자정수단이다.


1. 정부와 여당은 시민사회의 이 같은 절박하고 엄중한 요구에 부응하여 조속히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본회의 통과를 진행시켜야 한다. 이를 통해 자유와 책임이 공존하는 진정한 언론개혁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2021년 8월 30일


언론중재법 개정을 촉구하는 시민사회단체 일동

99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rhizome 2024-01-20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당연히 거칠어진 어조는 대규모 법정 소송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로 해석되어야 마땅하겠죠.

우선 ㅁㅁ 담당자께 경고합니다.
소설 좀 작작 쓰고 당신 정체나 좀 밝히시기 바랍니다.
소송 준비하느라 방송사 프로그램 홈페이지고 어디고 다 뒤지고 돌아다녀도 도대체 당신 이름 하나 밝히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신도 무슨 비밀 정치조직이라도 되는 겁니까?

밑도 끝도 없이 막말 쏟아댄 게 벌써 한두 번도 아니고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란 게 결국은 다른 채널들이 자중하고 있을 때조차 혼자 친한 척 계속 비벼대면서 할 말 못 할 말 무책임하게 아주 맘 편히 다 해대어 다른 모든 채널들에게 다시 용기를 주고 모함과 비방 대열에 또 끌어들이고 있는 짓거리입니다.

벌써 몇 년째 도무지 쉴 틈 없는 인격살해 시도들에 시달려 왔고 그에 대응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로 신원을 공개하지 않고 있는 것 뿐인데 그간 당신이 해 온 짓은 생각도 않고 자꾸 도대체 누가 누굴 용서한다는 겁니까??


적당히 좀 하시기 바랍니다.
당신 같은 인간들과 각종 구경꾼, 관전꾼 XXX들 때문에 참다 참다 그만 두게 되면 그 다음 벌어지는 사태들에 대해 모두 책임질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rhizome 2024-04-28 0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별 것도 아닌 일 하나 하나에 또 아주 난리가 났나요?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일들에 어슴푸레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 하나 얼핏 보고 오로지 억측만으로 가지가지 이야기를 지어내 떠들어 대는 인간들은 그 의도와 정반대로 그냥 딱 자기 수준만 투명하게 드러낼 뿐이라는 사실도 알 리가 없고.....

전혀 관심도 없는 무슨 얼어죽을 ‘주인공‘ 타령이나 하고 있지 않나...
생싸이비 심리분석이랍시고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내키는 대로 떠들어 대고 있는 방송들은 채증과 함께 계속 모니터링을 하고 있으니 더 큰 죄 짓지 말고 각별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EBS
대충 알아 들었으리라 믿고 한동안 신경을 안 썼더니 설마 아직도 재방, 4방을 해 가면서 지금 일주일 내내 저에 대해 되지도 않는 헛소리들을 계속하고 있는 겁니까?
GQ 선생님에 대해서도


* 기타 호사가 관전꾼 분들께 드리는 추신

‘침묵‘이라는 기표 하나조차 올바른 해석에 성공한 적이 없는 분들이 뭘 그렇게나 시끄럽고 소란스럽게 가지가지 황당무계한 입방아들을 찧어 대고 계시는 건지

일단 ‘피로‘나 ‘무기력‘과는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고 차라리 이미 그간 여러 번 지적돼 온 배신들의 PTSD로서 ‘조용한 사직‘ 등에 훨씬 더 가깝다고 보는 게 그나마 정상적인 분들이겠죠.



두 번째 비밀통로 : ‘초월성‘
이 요소 단 하나 때문에라도 당신들 같은 소시민의 오로지 평범한 우물 안 일상(/)생활 감각에만 기댄 속물적 통속성으로는 아무리 애를 써봤자 죽었다 깨어나도 애초 저에 대해 절대 뭐 하나 제대로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rhizome 2024-08-26 0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상대가 눈치 없어 보입니까? 당신이 위에서 말한 바보들이 아니라면 혹시 당신을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닌지 꼭 한번 생각을 해봐야만 합니다.
그걸 넘어 눈치를 밥 말아 먹은 것처럼 보입니까? 그럼 그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당신을 경멸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인생 낭비라 아예 조회 자체를 안 하고 있었는데 간만에 보니, 엄밀한 조직론에 입각해 원인분석과 대책을 제시해 줄 능력도 무엇보다 진심 자체도 전혀 없으면서 드디어 복통이 해소되는 것 같다는 기대감에 마냥 신이 나서 백면문인의 법적 무지가 조장하는 용기로 가일층 비방과 책임전가에 열을 올려 점점 더 난리를 쳐 대려 들거나 아니면 자기 손으로 나무를 베어 버렸다는 악어의 눈물 같은 알량한 죄책감을 지어 보이려 애쓰는 표정의 인간들 모두가 단 한 곳만을 뚫어지게 들여다 보고 있는 그 광기 어린 충혈된 갖가지 눈들!! 그것이야말로 이 군상 영화의 진정한 공포 중 공포의 백미입니다.

자신이 뒈져 나자빠진 지 이미 오래인 줄도 모르고 한국문단이 뒤늦게 싸질러 낳아버린 위대한 시인 김 살리에리와 그 주변 인간들의 밑바닥에 대하여는 조만간 따로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 문제만은 그간의 다른 내용들과 달리 약간의 전파율조차 전혀 안 나오고 있는 건 아닌 듯 싶어 우선 답하기로 합니다.
일단 당신 회사 법무팀에라도 제발 좀 문의를 하고 나서 행동을 하더라도 하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다른 방송사들은 왜 다들 갑자기 조용해 진 것 같습니까??

이 문제를 이렇게까지 계속 방기한 채 제대로 관리감독을 하지 않고 계시면 류시춘 이사장님도 언젠가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시면 안 될 것입니다.)


 



인격을 살해하고, 오히려 다양성을 말살하며, 중소/자영업자와 문화체육산업을 말려 죽일 자유에 대한 규제

: 언론중재법 개정 논란에 부쳐





0. 이번 광란의 언론폭동 사태는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함의들을 내포하고 있기에 이 함의와 문제들, 그리고 그 해결에 대하여 불가결한 핵심만 약술키로 합니다. 





1.낡은 진보의 피상적 고정 관념


1.1. 피해자들 고통의 심각한 구체성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저 눈 감아버리는 낡은 진보들의 무능과 무책임

 

1.1.1. (주지되지 않은) 폭동의 다면성들


잔인한 언론폭력에는 그야말로 찍소리 한마디도 못하고 숨죽인 채 구경만 하고 계시던 분들이 갑자기 관심법 도사인 척 뛰쳐나와 뭐라고 떠들어대고 다닌다 해도, 그간 오랜 침묵의 가장 큰 원인은 애초 명백히 표명했던 바와 같이 '연대와 협력'을 실현해내기 위한 극한의 인내였으며,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길임이 분명해진 이후에는 '기러기 자유낙하 실험' (보고서( 작성)) 과정의 일환으로서 매질 저항력과 마찰력 zero의 진공 상태를 조건화하기 위해 수행되어야만 했던 핵심 절차였습니다. 

일단 실험 보고서 제출은 유보되었으나, 모두가 손쉽게 명확히 관찰할 수 있었던 '전문(가)' 반복 강조 이외에도 이번 폭동은 군소/개인 매체를 압살해버리기 위한 여러 다채로운 공격 행위들이 장기간 집요하게 지속된 일종의 발작적 '복합complex'(이고) 증후군syndrome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도무치한 이런 다양한 폭력들을 많은 분들, 특히 역설적으로 자칭 똑똑한 척, 전문가연 깨나 하시는 분들일수록 잘 눈치도 채지 못 하고 아주 단순하게 무슨 전문가주의 찬반 논쟁이나 (관료적 사회주의 ((단계)) 특유의 계급투쟁이라는 당대 현실을 반영하던,) 시대착오적이고 허구적 대립구도의 이분법에 불과한 홍-전 논쟁으로 받아들이고 섣불리 참전하는 경우가 그간 하도 많기도 했지만, 이런 무지가 결국에는 당면한 언중법 개정 문제에도 결정적 오판을 일으키는 일원인을 제공하기에 이르고 있어, (archiving을 위해서라도) 불가피 여기에 대신 몇 자 적습니다.

   


.....




1.1.2.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세뇌에 성공하리라는 기성언론의 기대와 달리, 이번 사태가 광범위한 관찰자/수용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세상이 뒤집히"는 충격 그 자체였으며, "심판이 사라진" "무법천지", "악마 같은" "Chaos"의 실재(세)계에 "깨어나" 눈뜨는 각성 경험들로 진술되고 있으며,



1.1.3. 폭동의 좀 더 직접적 피해자인 청년들에겐 "매순간 마음이 멍들"고 "(숨을 쉬어도) 숨이 쉬어지지 않"았으며,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고민...불안과 공포로 잠 못 들"고, "이제라도 여기저기 다른 길을 알아봐야 했"던 "벼랑 끝에 선" 듯한 고통들이었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토록 간절히 외쳤는데도 꼰대들[1], 특히 언론 자신은 아예 귀를 막은 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어둠"과 "암흑"의 시간이었음이 갈수록 극명하게 드러났기에, 개인적으로는 비웃음을 악물고 왼뺨까지 내어주려 하고 있었으나 더 이상 전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판단되어 대응 방향을 돌이키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문화예술체육계에서 피땀 흘려 자신을 갈고 닦아 온 이들은 어려서부터 너무나 눈부시게 빛나는 여러 재능들 때문에 그 재능이 뛰어날수록 자신감도 넘쳐 일찍이 용감하게 자기 길을 찾아 나설 수 있었던 것 뿐인데, 이제 와서 아무것도 보잘것없던 앵무새들이 세상 다 가진 주인 행세를 하며 시커먼 의도를 숨기고 모두를 세뇌시켜 한 줄로 세워보겠다고 사람들 괴롭히며 난리 치는 것도 더이상은 좌시하고만 있을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1.2. 기러기협회, 앵무새연합, 뻐꾸기노련[2] 등 소위 언론현업단체들의 정체성에 대한 녹슨 고정관념과 착각




1.3. 자유지상주의 반동 보수 세력과의 정책적 (동일성) 착종




1.4. '국가'론에 대한 인식 편향

     : 민주적 통제의 (유일한) 일반 통로





2. 언론사[史]적 의의


2.1. 정체성의 자기 폭로


2.2. 언론/Media산업 독(과)점 (Cartel) 자본주의의 자기 증명

담합적 무한반복에 의한 사회 전체의 세뇌 능력


독과점 Cartel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절박성



같은 이유로 공영방송 및 언론 지배구조 개편에도 직접 선거제 도입 이전엔 결사 반대 입장의 결의를 천명합니다.   






S. 대안


그러므로 개정 그 자체를 반대하기보다 개정안의 보완과 독소조항 수정[3]에 집중하시기를 강력히 권고 드리며, 그간 살을 취하고 결국 뼈를 내주는 우행들을 반복해 오셨는데 이번에도 개정 시도 전체가 실패할 경우 장차 (공영)언론에 대규모 인적 청산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후폭풍이 불어닥치게 될 수 있는 상황이라는 사실에 대한 각성도 또한 촉구 드리는 바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이 점에선 진보꼰대들도 별반 면책될 사유가 없음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2] 심지어 JG 교수 등 진보계 분들조차 (방송 중에도) 이 명칭으로 호명하시는 사례가 많은 듯해 의도적으로 인용 중임.   


[3] 실제 언중법 등 법적 구제 절차 이용자 및 제소자 (계층 분석) 통계를 동원해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개정을 반대하려는 논리도 횡행하던데, 그러한 현실에 대한 올바른 대응은 고위공직자, 대기업 등은 배액 손배 청구권자에서 제외하는 등 문턱을 높이고, 입증 책임 전환을 포함해 minority 피해자들에게는 문턱을 더욱 낮출 수 있는 여러 방안들을 강화하는 개정이 되어야지 이를 핑계로 개정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무법천지가 되어버린 언론계를 자유방임하자는 주장일 뿐입니다.


또한 담합과 무한반복에 의한 세뇌와 Social Media 및 군소 매체에 대한 보복, 말살 등의 사례로 만천하에 명백히 드러난 이번 폭동도, 현재는 (제왕적) 대통령제 의회주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event인 대선을 앞두고 정권이 교체될까봐 잠시 소강상태이지만 민주당, 특히 특정 계파가 재집권에 성공하고 나면 다시 극성을 부리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는 상황이므로, 안 그래도 그 누구의 눈치도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던 게 제도적 원인이 된 이 사태가 함부로 다시 반복될 수 없도록, 담합 등 독과점 행위에 대한 규제 조항 또한 반독점 입법 체계의 일환으로서 반드시 추가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작성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Vorwarnung an und für die Hauptsekte der Demokratischen Partei !!!




A. 소위 '대깨문'의 사회적 정체성과 지배 전략


전투적 LBG

 : 흔히 '문빠'/'문파'/'대깨문'/'극문' 등등으로 호명되며 더불어민주당 주류 당권파와 강성 지지자들의 중핵을 형성해온 이 전투적 Liberal들은, 개인적 인격성을 뚜렷한 매력으로 갖고 있음에도 대통령은 하기 싫어하던 포용적 Liberal로서의 문재인 후보를 집요하게 설득/압박해 얼굴 마담처럼 내세워 포장지로 뒤집어쓴 채, '신흥 기득권층과 중산층'의 정치경제문화적 계급 이익을 배타적/이기적으로 추구하는 사회세력과 그 돌격대로서, 자신들에게 압도적 지지를 지속적으로 보내준 서민들과 청년층을 배신한 채 그들을 위한 실질적 민생개혁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들만의 장기 집권을 위한 권력 강화와 조작적 언론 장악에만 몰두하는 반면, (이를 토대로) 뒤로는 모략가를 중용, 결코 해서는 안 될 각종 모사와 담합, 약속과 원칙 위반 등등의 부정비리를 저질러 오다 결국 그 어떤 권력 강화/독점을 위한 구조 재조정 조치들의 명분과 정당성마저 모두 상실하게 되어 좌초 위기에 놓이게 된 집단이다.

 


그리고 이 양 집단의 이질적 정체성과 이들이 구성하는 지배구조가 신현수 민정수석 당시 발생했던 당청 갈등의 근본적 원인이며, 따라서 당사자들의 무마용 변명, 그리고 이를 따르는 평론가들의 일반적 분석과 달리 본 사건은 이 권력구조가 그대로 노출된 실재하는 갈등이었으며, 본질적으로는 일단의 lame duck 현상의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황당하고 명백한 피해자였던 대통령이 오히려 절친으로서 대신 화를 내 준 민정수석을 해임하고도 모자라 친히 당사를 방문해 사과하고 달래며 겨우 넘어가야 했던 상황들을 잘 회상해 보라.

이 전투적 Liberal[1]들은 기본적으로 겉으로는 문 대통령에 대한 fandom인 것처럼 가장하지만 대통령의 말을 잘 듣지 않고 간단히 무시해 버리기 일쑤인데, 기러기협회와 앵무새연합이 주도하고 뻐꾸기노련이 적극 협조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이번 언론 폭동에서도 이미 그 초기에 대통령은 예의 '포용'을 강조하였지만 이들은 아예 전혀 들은 척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대신 이들이 온 신경을 집중해 가장 경청하고 추종하는 것은 누구나 보는 바와 같이 다른 특정 계파이다.


따라서 그나마 현재까지 지지율을 떠받치고 있는 유일한 원천은 문 대통령의 개인적 인격과 포용적 Liberalism, 그리고 언론의 Gaslighting이라 할 수 있다.

    




B. 재보선 참패의 원인과 민주당 위기의 본질



재보선 참패의 원인으로서 통치성(la gouvernementalité)의 총체적 모순


민주당 정부 통치구조의 기본모형 


위기를 봉합하는 3대 통치술 : 기만과 폭력, 그리고 축출

Gaslighting이 판을 치고, 무법천지가 되어버린 언론계

통치술 1. Gaslighting

통치술 2. 공공연한 협박과 노골적 집단 폭력 : 'Pink Fantasy'의 예

통치술 3. 언론의 친위 Coup d'Etat 사태의 본질

           : 공론장에 대한 Enclosure 폭동 ― 공론장에 울타리를 쳐 국민 전체를 축출해내기




3.1. 현재의 언론 사태가 단지 '전문가주의'에 대한 찬반 논쟁으로 보인다면 당신은 지금 언론의 주작질과 낚시질에 그 미끼를 제대로 물어버린 상태이므로 섣불리 참전하기 전에 제발 다시 한번 더 찬찬히 생각을 가다듬어 보시길 권고드리는 바이다.

3.2. 소위 '전문가주의'를 통해 동시에 돌아가는 5~6개의 Track
       방역독재
       Media 비평에 대한 광란의 보복
         : "전쟁이야!!!", "기싸움이니까 절대 밀리지 말라"는 미친 생각들
 
       홍전논쟁
       밥그릇 지키기
       공론장 Enclosure
       가공의 외부권위를 훔쳐 바닥난 신뢰 짜깁기


3.3. 

3.4. 모호하고 중의적인 전문가 개념과 범주의 자의적 '정의 및 편집'권 독점을 통한 여론 조작과 주도

3.5.

(3.6. 문화사적 의미로는 인쇄술이 발명되면 Calvin과 Luther 등등이 출현하는 것은 이미 예정된 필연이며, 현재의 언론 폭동은 이 Media 혁명에 대하여 당대 권력의 핵심 중 핵심 요소로서 Latin 성경의 독점적 해석권을 끝까지 수호하려던 구교의 발작적 반동에 해당하고, 단기적으로는 그만큼 (민주당파) 위기의식의 발로였을 뿐이며, 이런 맥락에서 '혁명'이란 조직(화)된 "월권" 행위 이외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님.)





C. 참패 원인 분석을 핵심으로 한 민심 독해력에 호응하는 지지율

이에 대하여 김종인-오세훈-이준석 등등은 각 시기마다 나름 정확한 정세분석능력을 보여주면서 이를 이용해 광범한 신뢰와 지지를 획득해 나아가고 있으며, 언론은 자기가 핵심적 문제의 일부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사력을 다해 쑈를 하고 민주당( 핵심계파)은 알면서도 여러 계산과 공모, 담합을 거쳐 속아주고 있는데 반해, 진보정당은 정말로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이것은 그들 각각에 대한 지지율 변화 추이로 정확히 반영되고 있다.
'부동산정책 원인론'의 문제는 여지껏 민주당이 다 잘해왔으니까 쪼끔 더 노력해서 이거 하나만 좀 잘 해결하면 완벽히 성공한 정부로 안정적 재집권을 할 수 있다는 message를 숨기고 있다는 것인데, 진보정당( 여러 인사들)은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른 채 계속 여기저기 이런 주장을 대신 해주고 다니다 보수당은 물론이고 심지어 민주당 인사들로부터도 핀잔을 듣는 처지에 몰리고 있는데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조차 파악을 못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와중에 원래는 민주당 들어가고 싶었는데 안 받아줘서 할 수 없이 진보정당 들어 온 정준*라도 되는 것처럼 죽이 맞아서 민주당이 지금 이 순간 진보계로부터 제발 들었으면 하는 말들만 진보정당 이름표를 단 채 동아줄을 내려주고는 낄낄거리면서 국민들 무시하고 그나마 바닥난 지지율마저 갉아먹고 돌아다니는 분까지 계시던데 도대체 어떻게 만들고 지켜들 오신 진보정당인데 그 이름을 달고 그러고 다니시는 건지 스스로 자성 못 하실 분이면 당 차원의 조치가 시급해 보임.


(참고로 이전 노 대통령의 죽음과 폐족화의 원인도 Liberal들은 검찰과 언론 때문으로 보고 있어서 그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2]의 결과(/)증상으로 현 정권의 실정이 반복되고 있다고 분석되는데, 그들의 착각과 달리 그건 단지 사후적 현상에 불과하고, 학계의 확립된 정설에 따르면 ([3]) 이미 그 훨씬 전에 세계최고 경제전문가집단인 국제통화기금The International Monetary Fund와 한국최고 경제전문가집단인 삼*경제연구소에 일말의 의심 없이 노예처럼 매달려 스스로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자청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체제 도입의 기수로 전락해버렸을 때부터 장차 대대적 민심이반이 몰고 올 그 모든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민주당 정부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당시 이 연구소의 오만은 극에 달해 "보수 정권이든 아니든 그 어떤 정부가 들어오더라도 그들을 조종해 뜻대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다"고 공언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주지의 사실이다.)






[비망을 위한 초고 memo]





[주석]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엄밀한 의미에서 포용적 Liberal은 실질적으로도 Liberal(ism)이 맞지만, 전투적 Liberal들의 사상과 행태는 그들의 아득한 운동권 시절 기억 등등으로 왜곡되어 정확히는 Liberal(ism)은 아니고 전투적 L+PBG라 명명해야 하지만, 극명한 대조와 편의를 위해 여기서는 그냥 전투적 Liberal로 호명키로 함.


[2] PTD는 원래 너무나 익히 알려진 PTSD와 함께 통용되던 공인 의학용어이며, 
여기서는 특별히 먼저 Trauma라는 하나의 동일한 '(철학적 )사건'에 대하여 주체의 변용(작용)에 따라 PTG[=Post-Traumatic Growth]로도 또는 PTD[=Post-Traumatic Disorder]로도 귀결할 수 있다는 대조(적 결과)를 강조하기 위한 제1 구도에서, 또한 다음 단계에서도 (특히나 민주당 같은 사회정치적 맥락/장에서는) 이렇게 PTG와, 이에 대립하는 PTD 각각도 '일군의 (광범한) 반응 계열( 종합으)'로 파악하는 제2 구도에서, Cause인 Trauma 자체와 그 Effect인 Disorder(s) 사이에는, 강렬한 경험에 압도된 자연적 결과로서 각인된 경험주의적 인지왜곡과 인식편향, 이에 기반한 특이 행동 Pattern 및 반응 회로 등등, 단지 'Stress'만으로는 명명/설명될 수 없는, 이외의 훨씬 광범위한 다양성을 나타내는 증상 발생 경로와 기작들이 존재한다고 보는 입론을 위해 매우 의도적으로 사용된 것이었으나, 다만 외국문헌들에서 PTD는 너무 짧은 3자 acronym으로 경쟁하는 동일철자들이 너무나 많은 등등의 이유로 채용빈도에서 PTSD에 열세인 상황을 반영해 괄호처리로 절충하여 이를 반영키로 함.


([3]) = (또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 등에도 잘 묘사되어 있는 바와 같이)










[Ref.]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하는 본문 작성 후 'enclosure' 개념의 비물질적 확장이라는 유사한 통찰을 시도하는 흥미로운 도서들이 발견되어 관심 있으신 분들의 참고를 안내하기 위해 추기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주로 여름에 열려 온 {맑시즘Marxism} Forum과 함께 국내 양대 Marxist 축제로 꼽히며 격년 봄에 개최되는 가장 초정파적이며 자유롭고 개방적인 {Marxcommunnale}가 아래와 같이 열리오니 
초심자를 비롯한 여러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아래의 각 Poster들을 click하면 확대되고, 확대 image를 다시 click하면 원복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