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정치경제(학)의 변동




1. 정치경제의 변동 : 국제 정세의 향후 국면에서 핵심은 Corona가 아니라 Oil이다.


1.1. Russia의 진의




Saudi-Russia 갈등이라는 외피로만 알려진 증산 사태의 본질은 세계 패권 질서의 전복을 노리는 Russia의 회심을 담은 대미 경제 정밀 타격이라 할 수 있다.




1,500여 미국 Shale 업체들의 줄도산을 직접적 목표로 한 의도적 증산




Saudi는 처음엔 Russsia의 새로운 전략에 당황하며 갈등을 일으켰지만, 곧 스스로도 입장을 수정해 갈등을 과장연기하며, 이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고, 진짜 피해자는 양자 중 한 측이 아니라 새로운 경쟁자로 급부상한 미국 Shale업체들과 그들이 이끄는 신Oil산업이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금수조치나 Sanction 등의 (경제) 제재와 전쟁이라는 두 계열의 정책대안이 선택가능하지만 정세적 국면의 특수성 때문에 전쟁을 통한 경쟁 석유시설의 대대적 직접 파괴를 선호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함.






반면, 2개 전쟁의 동시 발발을 방지하기 위해 원유 갈등도에 반비례적 부수 효과로 동북아 지역에서는 잠정적인 미중 무역 및 금융통화 전쟁의 유예와 대북 유화 국면이 조성될 여지가 확대될 수 있음.

 [☞ ※ 하단부 P.S.2. 절 '(예측)평가와 수정' 참조]









2. 정치경제학의 변동




2.1. 




k차 구조위기와 k+1차 위기( k=2n-1)의 본질적 관계는 실물경제위기 대 금융위기라기 보다 순환적 축적체계( 상)의 징후적 위기 대 결정적 위기 관계라 할 수 있다. 


이것이 근래 전문가 놀음에 흠뻑 취해 잘 알지도 못하는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 행세를 하려 드는 정준희가 {Journalism Talk Show J}에서 "논문이 있다"며 '70년대의 3차 경제위기를 마치 언론이 만들어 낸 것처럼 묘사하려 드는 망상을 범하게 된 진짜 이유이며, 그 진실은 k차 위기가 일반적으로 하나의 역사적 장기 축적 체계/주기에서 이윤률 추세선이 정점을 찍고 내려오면서 쇠퇴기로 접어들어 발생하게 되는 필연적 대위기로 출현하지만, 구조적 위기의 핵심적 본질이 자본의 과잉생산, 즉 과잉축적에 의해 정의되며, 이는 다시 반주기에 도달하는 정점 경과 후 상대적 과잉축적에 의한 이윤률[9] 저하가 초래하는 징후적 위기와 완주기에서 발생하는 추세선 최저점[ 즉, 최소값] 부근에서의 절대적 과잉축적에 의한 결정적 위기로 구분되는데, 이 중 징후적 위기는 축적 체계나 주기 상의 쇠퇴기 진입구간에서 그 충격이 초래하는 위기인데다 이에 대하여는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된 여러 회피수단들이 존재하는 등의 관계로 결정적 최종위기로는 발전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지, 그의 주장처럼 위기 자체가 작거나 별 실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언론들만의 과장보도나 호들갑으로 발생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미국을 위시한 주요 정부들은 금융(화, )세계화를 필두로 신자유주의 체제[1]로의 급격한 전환은 물론이고, Vietnam전쟁과 중동전쟁개입까지 감행하며 정말 각고의 노력들을 거듭한 끝에 가까스로 위기에서 탈출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2.2. 산업경제학 모형과 금융경제학 모형 ; 위기의 실체로서의 '장기침체론' 대 '금융공황론'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Lenin시대가 금융자본 발호의 시대였으며 곧 후속한 2차 구조위기가 바로 그 금융자본주의가 주도하는 축적체계의 대붕괴였듯이, 이번 4차 연속위기도 그 직접적 trigger야 무엇이 되었든 결과적으로는 금융(자본)에 의한 급속한 반응과 극단적 증폭, 폭발적 붕괴를 전형적 pattern으로 하는 금융공황/금융포화의 Bubble 대붕괴가 핵심 기제이자 기본 성격이라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더 중요한 문제는 (촉발 (/) 계기가) '순수' 실물경제위기인가 '순수' 금융위기인가 분할해 내려는 실재적으로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큰 의미도 없는 관념적 분별심이 아니라 그 인식주체[2]가 여전히 산업경제학 모형을 사용하고 있는가 금융경제학 복합모형으로 이행을 완수했는가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고전적) Marxist consensus라 할 수 있는 '이윤률 저하에 의한 장기침체론'의 문제는 Leftcom 분파의 'Decadence 이론'[3]이 잘 보여주는 바와 같이 '70년대 위기로부터 지속적 점진적으로 단조감소하는 장기침체 이외에는 그 어떤 역동적 (정치)경제 변동도 예측은커녕 설명조차 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런 산업자본주의 편향 경제학 모형으로는 '87년 Black Monday 이후로 본격화하는 각종 금융(발) 위기들[의 의미]은 물론 4차 구조위기의 존재 자체를 관찰의 이론 적재성 때문에 모두 부정하는 관념적 오류에 빠지기 쉽게 된다.






2.3. 주기적 팽창에 의한 세계화의 '필연적' 결과로서의 Pandemic


흑사병과 천연두

1918 Spain독감과 2000년대 호흡기 감염증들



2.4. 구조(적) 위기 대 현상(학)적 위기



 

































II. 민주당파 어용 돌격대의 은폐된 극단적 정파성과 (탈)진실의 Mediology



1. 그들만의 기괴한 Referential structure

  ; "믿는 사람 소개로 연결, 연결...믿음의 X소리 Belt"


     민주당

       ㅣ

     최배근 이종우  주진형

       ㅣ    /       /

     최경영       /  

       ㅣ         / 

     정준희

       ㅣ

     강유정



체제의 모든 근본 문제들과 '집권당의 무지/환상/기망에 기인하는 정책 실패 및 개혁 배신', 그리고 그에 의한 위기들의 존재 자체를 전면 부정하며 대중에게 마취제와 수면제만 주입하려 드는 le (régime exclusif/monopolistique du) nexus savoir-pouvoir !!!

















2. 제4세대 좌파의 새로운 인지/담론/Media 전략


전통적인 1세대 (Marx의) Marx주의 좌파와 2세대 Bolki 및 Leftcom을 중핵으로 하는 소위 구좌파의 인지/담론 전략의 핵심은 '동물화된 감정적 주체들[4][5]을 선동하는 야만[6]에 맞선 진정한 혁명적 과학과 진리의 고도문명[7]'이라는 이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최근, 반복 재현되고 있는 시대적 혼란을 극복할 새로운 상황 인식과 '인지/담론/Media 전략'으로 제출된 다음과 같은 견해는, 주체의 동물화[4] 감정화[5]를 오히려 적극 추동해 온 3세대 (post)anarcho 신(사회운동)좌파와도 구별되고 양대 계보를 통합하면서 최신작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For A Left Populism]]를 저술한 Chantal MOUFFE[8]의 시대/문제 의식 및 대안적 시도와도 공명하는, 강력한 4세대 좌파의 맹아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기에 각자의 일독과 판단을 권하고자 한다.


66

   탈진실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탈진실 현상은 근대의 훈육사회가 만들어온 진실체제에 대한 거부를 함축한다. 이는 근대의 진실체제가 권력 동기에 의해 규정되어 왔다는 것에 대한 비판에 기초한다. 진실권리를 독점한 전문가·지식인이 법학으로 범죄자를 규정하면 권력은 그들을 감옥에 가둔다. 전문가·지식인이 정신병리학으로 정신병자를 규정하면 권력은 그들을 정신병원에 가둔다. 이 독점적 진실주체들은 자신들이 규정하는 진실을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한 진실이라는 의미에서의 객관적 진실로 주장하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에게나 타당한 것이 아니라 권력자들의 필요에 부합하는 진실일 뿐이라는 점은, 소위 그 객관진실이 권력으로 인해 피치자의 위치에 놓인 다수의 사람들을 고통 속에서 살게 하는 권력의 무기라는 사실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자각을 통해 비로소 드러났다. 객관진실 체제에 깊이 포섭되면 될수록 삶이 더 고통스러워진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은 각자의 특이한 진실을 말하는 비전문가·비지식인 다중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진실과 권력의 근대적 동맹체제는 지식인·전문가의 진실독점권을 거부하고 그 스스로 진실주체로 나서고자 하는 탈근대적 다중의 출현에 의해 흔들리게 되었다. 탈진실 현상의 첫 번째 동력은 이것이다.

정동적 전환(affective turn)이 탈진실 현상의 동력이다
탈진실 현상의 두 번째 동력은 다중 주체의 탈진실 경향에 대한 위로부터의 대응 과정에서 출현했다. 객관진실·보편진실로부터의 탈주라는 다중의 운동은 실험실이나 연구실에서의 냉정한 분석과는 다른 진실장치와 진실공간을 필요로 했다. ‘지성에서 정동으로!’라는 기치로 표현되는 정동적 전환은 이 필요를 충족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이것은 객관진실의 체제가 진실구축 과정에서 정동을, 배제해야 할 불순물로 간주해 왔던 것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동은 신체의 감각기관으로 유입된 외부자극 중에서 행동의 필요에 따른 취사·선택이 이루어진 후 운동으로 표현되지 않고 신체 내부에 남은 잔여로서의 고통이다. 그러므로 정동적 전환이란 신체의 고통에 주의를 기울이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여성, 흑인, 난민 등 다양한 유형의 소수자들이 이러한 전환을 주도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동(情動) 대신 선동(煽動)을 무기로 삼는 권력
‘지성에서 정동으로!’의 전환 운동이 상대적으로 근대 진실체제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지성에 대한 경계, 비판, 거부의 경향을 갖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지성에 대한 이 부정적 분위기를 역이용한 것이 바로 권력이다. 권력은 구래의 ‘진실 = 권력’ 체제 대신 거짓을 선동하여 그것을 권력 유지와 재창출의 도구로 삼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진실에 대한 부정이라는 방향에서 첫째의 탈진실 현상과 유사하지만, 이러한 탈진실은 진실과 대립하는 거짓을 진실의 자리에 놓고(반진실) 정동이 아니라 선동을 반진실의 대안진실 체제의 무기로 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속한 광범위한 가짜뉴스 상황은 첫 번째의 탈진실 운동에 대한 권력의 반동적 흡수가 가져온 부정적 결과이다. 그리고 전(前)다중적인 군중과 대중은 권력의 이 반진실적 선동의 지지대로 소환된다. 트럼프로 대표되는 탈진실의 이 두 번째 동력에 대해 새로운 유형의 파시즘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공통진실 체제가 필요한 이유
탈진실 현상의 세 번째 동력은 바로 이러한 문제 상황에 대한 의식적 대응 속에서 나온다. 그것은 객관진실에서 벗어나고자 한 첫 번째의 탈진실 동력을 두 번째의 탈진실 동력인 반진실=가짜진실=대안진실 흐름에 맞서 발전시키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다중의 공통진실 동력이라고 부른다. 한국에 소개된 탈진실 관련 문헌들은 다시 전문가·지식인의 권위를 회복시키려는 복고적 노력을 탈진실 현상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이를 위해 이 문헌들은 첫 번째의 탈진실 경향의 동력이었던 정동적 전환과 다중을 공격한다. 이러한 문헌들은 두 번째의 탈진실 경향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진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것으로는 유효하지만 탈진실 현상 속에 깃들어 있는 혁명적 힘을 거세한다는 점에서는 반동적이다. 고통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것을 새로운 행동의 동력으로 삼으려는 정동적 전환은 끊어내야 할 질환이 아니라 안고 가야 할 에너지이다. 또 다중은 전문지식인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상관없이 이미 명확한 진실 주체로 부상했다. 문제는 지금까지 진실 문제에 대한 일정한 방관을 보였던 정동적 전환을 정동-진실의 운동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감각에 따르는 다중의 특이한 정동들을 행동적 필요에 따르는 지성과 연합하여 객관진실 체제도 반진실 체제도 아닌 공통진실 체제로 발전시킴으로써 가능해질 것이다.


 ¶   조정환. '2020. 『증언혐오 ; 탈진실  시대에 공통진실  찾기』. 갈무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엄밀히는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 상의 신자유주의 Uklad

  : 자본주의의 변형/변종 및 하위유형들 간 관계, 특히 국가독점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관계 규명 문제 때문에 독점자본주의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관계를 설명하는 '단계론' 대 '특성론'의 이론적 논쟁이 다시 중요해질 수 밖에 없는데, 변별지표로서의 불가역성 구성/조각 요건들과 함께 특히 Uklad는 특성론 계열의 입론에 있어 중요한 개념적 근거기반을 형성하기에 엄밀한 정의가 요구되는데 국내에선 단순히 경제제도 정도로 오해된 경향이 있어, 일군의 구조화된 제도들의 유형적 총체로서 단순한 제도와 체제의 중간 층위 범주로 사용키로 한다.


(또한 국내에선 독점자본주의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관계 규명 문제에 있어 특성론이 대세였고, 필자 또한 독점자본국가주의로서의 원형적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대한 신자유주의 이념/이상으로서의 독점자본자유주의라는 대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특성론을 유지하고자 최대한의 노력을 하였으나, 이번 위기를 통해서도 거듭 명백히 드러나는 바와 같이, 평범한 근로 대중들이 일상적으로 만성 위기와 자본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돼 왔던 정상기 facade로서의 (신)자유주의 구호와는 정반대로 자본이 위기에 처하자마자 고도로 조직된 국가가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면서 즉각적으로 전면에 나서 모든 전례와 상상을 간단히 초월하는 거대규모의 개입을 통해 자본과 기업을 구출해내려 필사의 전력을 다 한다는 사실 때문에, 무정부적 독점자본(자유방임)주의와의 본질적 차이가 있고 이러한 국가 개입 없이는 더이상 자본주의의 위기관리와 연장, 지속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이로 인해 경제위기의 강력한 붕괴효과도 국가간 분쟁 등이 후속하지 않는 한, 일국적으로는 쉽사리 기대하기 어렵다는 변화'들'로부터 결정적 불가역성이 형성되었다고 판단되어 국가독점자본주의 특성론을 최종적으로 폐기하고자 합니다.)



[2] 특히 Marx주의를 표방하는 주요 분파들에서 이러한 이론적 결함의 취약한 토대 위에서, 기만과 반동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자유주의적 보수 언론들의 악랄하고 극렬한 저항에 세뇌되어 대부분 고전적 '이윤률(추세선 포함) 저하에 의한 장기침체론'으로 후퇴하는 듯한 양상들을 보여준 것은 신뢰성을 상당히 훼손할 정도의 대단히 실망스러운 모습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추세선 이론은 금융공황론과 잘 정합시켜 정교하게 전개해 나아가야 할 필수요소임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PS** 등 이에 기반한 중심조직도 최근 정세 속에서 그 의미를 전혀 구현하지 못하고 역시 전형적 고전 이론만 답습하는 한계에 머물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런 국면에서 금융공황론을 끝까지 잘 견지해 준 해방실천연대[@http://socialist.kr/request-for-the-capital-reading/]의 모범적 분투는 더욱 돋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3] Decadence 이론은 하위 계열들이 존재하는데, 주류는 Lenin-Bukharin 전통으로 특히 Henryk Grossman-Paul Mattick

 



[4] 東 浩紀. '2001.『動物化するポストモダン―オタクから見た日本社会』. 講談社(現代新書); 국역 이은미. '2007.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 문학동네;



[5] 大塚 英志. '2016.感情化する社 .太田出版; 국역  선정우. '2020. 『감정화하는 사회』. 리시올;



[6] 지배 권력의 사상견들, 특히 (2세대기) Fasci(o-Nazi)sm과 그들의 전쟁 (선동)



[7]

LUXEMBURG, Rosa. '1916. Die Krise der Sozialdemokratie. Anhang: Leitsätze über die Aufgaben der internationalen Sozialdemokratie. Unionsdruckerei, Bern;

>영역: Click!

>국역: [유니우스 팸플릿: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Click!


(KAUTSKY, Karl Johann. '1892. Das Erfurter Programm in seinem grundsätzlichen Teil erläutert; 국역 서석연 '2003. 『에르푸르트 강령 : 원리와 논의』 범우사;

출처의 문헌학적 정확성만을 위한 병기임.)



[8] 올바른 발음은 다시 한 번 더 [(셩딸) 무프]



[9] 이하는 (발화의 직접 대상들이 있는 한에서 경어를 사용키로 하며,) 일단 좀 성가시고 사소한 맞춤법 관련 문제들에 대한 논의인데, 

먼저, 이윤률 대 이윤율 :

이미 작성 초기 이윤'률'이 아니라 (평균율처럼) 이윤'율'이어야 한다는 지적이 전달된 바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종특적인 두음법칙 계열의 철저한 고수에 전혀 관심이 없고 '최소필요' 이상의 다양한 발음/음가로의 변철에 반대하며, 오히려 표기는 더욱더 1義1綴(1音) 원칙을 지향하되, 다만 발음 상에선 편의 목적의 일부 변칙을 용인하고자 하는 (장기)구도에서, 특히 평균율이나 이윤율처럼 모음이 아닌 '-ㄴ' 뒤에서는 이미 인구언어학적 분포 상 실제 발음도 [평규뉼], [이유뉼]보다 [평균뉼], [이윤뉼]로 발음하는 언중이 다수일 뿐 아니라 심지어 [평균ljul], [이윤ljul]로 발음하는 인구도 급격한 증가 추세이기 때문에 시대변화에 발맞춰 신속한 규범 개정이 요구된다는 판단에서 행하고 있는 의도적 위반이므로 무시해 온 지적임을 밝히면서 런 구시대적 과잉 규제와 아직도 이를 맹종하는 낡은 주장은 가일층 명확한 거부를 재천명합니다.



[10] '불가역' 대 '비가역' :

이 문제는 지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작성 후 출간된 도서 한 종을 계기로 본격 재검토한 논의입니다. 


'불'과 '비'는 한자 문화권에서 공히 종종 혼용이 있어 왔으나 

용언류 앞에 붙어 그 의미를 반전시키는 부정접두어로서 'not'에 상응하는 不과,

체언류 앞에 붙는 부정접두어로서 'no(n-)'에 조응하는 非로 명료히 분리정립시켜 나아가는 것이 언어의 경제성 뿐만 아니라 혼란 방지를 위해서도 필수적인 방향이라 사료되고, 

종합적으로 여기서 체언성은 '逆'이나 '可逆' 자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후속하는 필수 연어collocation들인 '변화', '반응', '과정'이나 '-性' 등에서 비로소 파생(/)전파되어 오는 것이므로 '비가역'은 '비-'의 지나친 남용사례에 해당한다고 봄이 타당하고, 같은 논리에서 '비가능(성)' 등이 이론의 여지 없이 친숙한 단일 관용표현인 '불가능(성)'에 비해 매우 어색한 원인이 해명된다 할 것이며 이것이 또한 예민하고 정통한 한자 감각을 이어 온 중, 일 등의 (과)학계 주류가 비가역 대신 불가역을 공식용어로 빈용해 온 이유일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원칙에 반한다 할 수 있는 의견으로 박근혜 정부 위안부 합의 당시 국내 과학계 일원으로부터 '불가역'은 일본식 용어이고 한국 과학술어는 '비가역'이므로 한국 외교부 공식발표문에서 '불가역'을 사용한 것은 국가적 굴욕이라는 주장이 있었던 듯한데, 과학 이외 한국 사회 전반에서 발견되는 '비가역'이라는 용어 자체가 거의 모두 이 주장 이후 문서들에서 가끔 (점증) 출현하고 있으나, 

광범한 실사에 의하면 중국은 절대적으로 '불가역'만을 유일 용어로 사용하고 있는데 대하여, 일본과 한국은 혼란 상태로 일본이 공식용어로는 '불가역'을 채택하는 추세이나 이학-공학 분과 간에도 완전한 통일이 완료되지 않아 특히 IT 분야에선 압축기술 등에 '비가역'을 사용하고 심지어 특허청 기술문서들에서조차 '비가역'과 '불가역'이 그야말로 완전한 혼돈 상태를 이루고 (이외에선 오히려 '비가역'이 선용되고) 있는 실정이며, 한국은 반대로 공식 과학술어는 '비가역'으로 통일 추세이나, 이외에선 북미 핵협상이나 한일 위안부 합의의 전 과정 등 거의 모든 장면에 오히려 '불가역'이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북한도 과학계에서는 대동소이한 실정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토대로 역어 선택 기원에 대한 다음의 두 가지 추정이 가능한데, 먼저 남북공통성에 주목하여, 선택과정에서 정치적 권력문제에 지나치게 간섭된 결과 해방 후 조선 과학계의 독립성을 과잉 강조하고자 하는 등의 시대적 특수목적으로 화학분야 특정권력에서 시작되어 열역학을 매개로 점차 물리분야까지 확장된 흔적이 남아 있다는 가설이나, 일제 강점기의 절대적 통제와 영향에 비해 해방 후부터 분단과 전쟁에 의한 완전한 단절까지의 짧은 기간에 이런 주도면밀한 의식적 운동의 남북 동시 전개/완수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결정적 문제를 안고 있어서, 오히려 '비가역'은 일본식 한자어로 강점기 과학용어를 포함한 공식, 비공식 부문 모두에서 광범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식민잔재로 현재의 남북한 과학용어로 남게 되었는데 일본에선 이후 중국처럼 '불가역'으로 자기정정되고 있는 과정이라는 좀 더 현실적인 정반대의 두 번째 추정도 성립하며, 엄밀한 확정을 위해서는 근대화 초기 및 강점기의 한, 일 과학서적들 또는 화학회 술어집 출간 회의 기록이나 증언 등에 대한 검토가 후속되어야 하겠지만 각국 실태 조사를 진행할수록 통계적으로 '불가역' 사용 빈도는 중>>한>>일, '비가역'은 중<<한<<일 순으로 현격한 차이가 드러나므로 두 번째 추정이 강력히 지지되고 있습니다.

또한 상기한 바와 같이 현실은 일본에서 '비가역'이 사용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느슨한 대중적 구어의 nuance로 매우 빈용되며, '불가역'은 엄밀한 소수적 문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공식문서에서 굳이 한국사회 소수어인 '비가역'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기대한 소기의 효과는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하겠습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이런 관념 자체의 원천이라 할 서양어 'irreversible'에 대하여, '비가역'은 'non-reversible'을 뜻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irreversible 이외에도 irregularly (ir)reversible과 unpredictable/uncertain/indeterminate/indefinite case들이 모두 포함되어 엄밀히는 오역에 해당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동(북)Asia의 공통성과 연대, 협력을 중시할 것인가 한반도의 독자성을 강조할 것인가에 따라 개인의 선택을 강요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언어학적 측면에서는 비연속, 비완전연소 등등에 대한 불연속, 불완전연소의 확고한 우위를 보장하는 언어체계와 질서를 교란하는 오역이라는 치명적 단점과 이웃나라의 비웃음은 각오해야만 할 것으로 보입니다.










※ P.S.1.
   간~혹 본고를 마치 사적 비판처럼 오독하시는 듯한 선생님이 계시던데, 정말 오해라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 글은 선거 이후 본격화될 위기탈출을 위한 대규모 구조조절*과 구조조정, 이를 위해 필수적인 노동공격과 개혁배신 등의 노골적 우경화를 강력하게 예고하는, 사전 정지작업으로서의 진보계 정당/인사 견제와 배제, (명분쌓기 용으로) 이용해먹고 따돌리기 등 위성정당 모략 공작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더이상은 조금도 미룰 수 없는 필수 비판을 수행해내기 위한, 결단을 수반하는 공적 작업임을 부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조조절[regulation레귈라시옹] : 주로 대량해고 등 인력조정에만 치중하면서 차라리 그 euphemism으로 축소전유되어버린 '구조조정'과는 다른 장주기 체제변형 개념이므로, 오해하시는 일부 group들은 '조절이론'을 참조하십시오.)



※ P.S.2.
상기 I.1.1. 절에 대한 평가와 수정

 : 유가 위기를 결정하는 변수 중 하나는 Russia와 이에 동조하는 전통 산유국들의, 세계경제 위기 정도에 대한 정세 인식과 전망이라 할 수 있는데 Trump의 감산요구에 대한 그들의 대응이나 (역사적 전례 상 그다지 필수적이지는 않았던) 이후 합의 이행상태 등 행동 pattern을 통해 분석해 볼 때, 감산 연장 여부를 1개월 단위로 계속 재협상해 나가야 하므로 상황에 따라 언제든 재현될 수 있는 구조이긴 하지만 (실제 실물경제위기보다 훨씬 급속한 반응으로 도과한 1단계 금융위기파동에 대해 매우 효과적이었던 전세계적 초대규모 동시 완화정책 및 재정개입 대응 등의 결과로) 일단 현재의 위기를 극단적으로까지 심각한 상태로는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돌아올 댓가와 보복을 염려하여 석유산업에서의 대미 강공책을 잠정 중지한 것이 최근 유가 회복세의 주요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유가 위기에 정확히 반비례하는 것이 미중 갈등으로 이는 제국체계의 운명을 가를 절대 피할 수 없는 사활을 건 핵심 모순이기 때문에 다른 주요 위기들이 대충이라도 수습되는 대로 곧바로 다시 돌아와 집중해야 하는 위기이자 이로 인해 다른 모순과 위기들이 또다시 촉발되고 점점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어 나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모든 모순들의 핵심축이면서 종국적으로 재편될 세계질서를 대표하는 양 진영 간 세계전쟁이라는 총모순으로 폭발하게 될 위험을 잉태하는 그런 모순인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 최근 Trump가 발표한 G7+5 구상은 매우 의미심장한 중요성을 갖는데, 초청국 후보로 내정한 Russia, India, Australia, 남한, Brazil 등은 중국을 전방위로 포위하기 위한 지정학적 중요성 뿐 아니라 동시에 오래 전부터 소위 BRICS로 언급되어 온 21세기 후발 선진국 후보군에서 중국을 배제하고 정세변화를 고려해 재조정된 group으로 역사적 선례들에 비추어 볼 때 그대로 방치해 두면 강력한 실물 제조업 생산력을 기반으로 세계질서의 재편을 요구하며 구제국질서를 붕괴시킬 치명적 위협으로서 누가 이들을 동맹군으로 선점하느냐에 따라 21세기 세계체계의 패권국가가 바뀌게 될 바로 그 세력들인 것이다.
미, 일, 영, 독, 불, Italia, Canada로 구성된 G7은 현 제국질서의 귀족정을 운영하는 원로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국제정세 변동이 최근 북한을 깊은 절망에 빠트려 새로운 전략 전환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저간의 근본 사정으로 보인다.





양국 간 교역량이 평화를 보장할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
각국 국방예산 비교라는 정세분석 방법론의 문제점


































X=깨

   (볶는)



[초고 작성 중]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hizome 2022-01-12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Krise=유니우스 팸플릿‘]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5&document_srl=275572
 
네트워크의 군주 - 브뤼노 라투르와 객체지향 철학 카이로스총서 58
그레이엄 하먼 지음, 김효진 옮김 / 갈무리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0. (이론적) 정세에 대한 고려 때문에 유보 중이었으나, 일정한 시급성도 있어 일단 간략한 비망록 형태로만 작성하기로 합니다.


0. Graham Harman은 Bruno Latour에 대해 다소 과대평가하고, 자기자신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있으며, 이는 일정 정도 Deleuze & Guattari[1]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의 계열이 하고 있는 말의 의미와 이론사적 맥락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에 기인하고 있는 듯 보임.


I.

1. Kant주의의 최대 문제는 선험적(Transcendental[2]) 주체, 또는 주체의 선험성 발견이라는 Copernicus적 전회를 달성함으로서 구시대의 대립물이었던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각각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상관주의라는 새 지평을 열어젖힌 혁명적 위업에도 불구하고, 첫째로는 Nietzsche의 관점주의Perspektivismus와 반토대주의(erkenntnistheoretischer )Antifundamentalismus/Antifoundationalismus를 경유[3]하면서 (신)자유지상주의와 fascist적 우파들의 postmodern적 각종 궤변과 가짜 news, 유사 과학들의 창궐을 몰고 온 진리와 윤리 없는 시대를 잉태한 철학적 기원이라는 것이고,


둘째로, 그나마 Kant주의 중도파 소시민 후예들조차도, '세계'라는 도저히 인식불가능하며 어울리지도 않는 party에 초대돼 앉혀진 (wet-blanket) wall-flower처럼 조금도 즐기지 못하고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끊임없이 회의하고 반성하면서 자아(/)주체라는 탐미적인 작은 알껍질 속에 갇힌 자의식 과잉과 행동마비의 상태에 빠져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2. 



3.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즉물과 대물, 즉자와 대자의 단계를 관통하여 획득된 자기자신과 세계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기반으로, 동시에 다시 물아 일체라는 몰아와 무아의 경지로 회귀하여야만 한다.

따라서 Kant주의는 그 위대성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궁극적 결론이 아니라 잠시, 그러나 반드시 들러야 하는 경유지일 뿐 아니라, 오히려는 출발지에 불과하다.



4. 이러한 모든 문제적 사태들에서 탈주할 수 있는 한 출구는 Deleuze와 Guattari에 의해서 제언되었는데, Harman이 극찬하는 Latour도 결국은 아직 이 구도안에 놓인 후계자일 뿐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Latour 철학의 핵심 개념인 '행위소'란 결국 존재(론)들의 세계 층위를 구성적으로 통일하는 Deleuze-Guattari 형이상학의 '기계' 개념의 변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그 유명한 Niklas Luhmann 사회학의 '체계' 개념 또한 포괄하는데, '체계들의 체계'로서의 세계관에 극적 역동성이 가미된 것이 '다층적 중층위에 걸쳐 응결 산포된 기계들의 연속체로(서) 통일되어 있는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의 통일성으로부터 주체와 객체의 대립이란 소위 주체의 순전한 사후적 환상임이 드러나며, Kant의 상관주의 인식론은 그 최선의 혁명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러한 구분과 대립을 전제하며, 절대화하고 있기 때문에 이 구시대의 구도에 아직도 포획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Latour를 뒤이어 Harman 등 신유물론들이 견지하는 (이론적) 반인간(중심)주의가 시사한다는 '인류세anthropocene의 총체적 위기를 돌파할 최신의 완전평등 생태주의 세계관'이란 실은 Spinoza적 범신론에서 발원하여 Guattari가 이미 선착한 바로 그 지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4]




5.



6. 




II.

7.반면 Harman(의 말)은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중요한데, 왜냐하면 Heidegger[그리고  Hegel]에겐 Kant주의와 신Kant주의를 무너트릴 수 있는 결정적 장치의 단서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며, '객체 지향(Object Orientation)' 개념[5]이 그 중 하나이고, 이것은 Latour에게선 발견되지 않는 요소이다.




8. 따라서 Kant가 발견해냈다고 알려진 '선험적 주체'/'주체의 선험적 지평'이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인식'이란 개념과 범주는 이제 (그것을 하위범주로 포괄하는) Cybernetics의 한 축인 '통신' 범주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결국 '주체(인식)의 선험적 지평'이란 통신장비의 종특적 Device Specification에 불과하고, 비록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세계와의 효과적이며 성공적인 통신과 상호작용(/상호침투), 유쾌한 적극적 참여와 합일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할 어떠한 결정적 이유도 되지는 못 하는 것이다.



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광범한 경로의 모든 자료와 사실들을 종합하건대, 다시 한 번 더 올바른 발음은 /과따리/



[2] ((transcendent와 달리)) transcendental의 '초월적'으로의 번역은 막론하고, '초월론적'이라는 번역에 대하여도 반대합니다.

이런 번역을 옹호하시는 분들은 무엇보다 구미 문화권에서 일반적인 두 어휘 간 역사적 분(리 구)별 관계에 대해 무지하거나 애써 무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에 더하여 Kant 철학에서의 독특한 어법과 맥락도 전혀 고려하지 않으려는 탈맥락적 (보편주의) 폭력 사고 성향이 있고, 전반적 상황을 주의 깊게 총체적으로 고려한, 번역에서의 창의적 장치 발명등에 대한 사유 방향이 폐쇄되어 (본의와 달리) 이해와 인식 전파에서의 혼란 반복을 방치하게 됨.

가장 창의적 번역대안으로는 '초험적'도 적극 고려될 수 있음.



[3] 그러므로 신Kant주의의 중핵은 이미 당대에 Heidegger에 의해 완파되어 사양길로 접어들었던 Ernst Cassirer 등이 아니라 신Kant 우파의 대부로 불러줘야 할 바로 그 악명 높은 Friedrich Nietzsche라 할 수 있다.

((신)Kant 우파의 (좌파/중도파에 대한) 결정적 이단점은 (오만한 또는 주체/자기 중심적) 반이성주의라 할 수 있고 이것이 먼저 전제되어야만 이후의 생철학과 실존철학 계보로의 분기가 가능함. 즉, 근대(적) 주체주의는 이성중심적 주체주의와 반이성/비합리적 욕망중심 주체주의의 두 시기/국면으로 양분되며, Nietzsche와 Freud-Lacan (그리고 Deleuze)등을 포괄하는 이 계보는 흔한 오해와 달리 탈근대사상이 아니라 전형적인 후기근대의 사조인 것이다.)


그리고 같은 관점에서, 최근 일어난 사상 운동을 포함하여 이러한 유물론을 위한 투쟁을 '단순작업의 무한반복'이라 폄훼하려 시도했던 고전적 지성들이나 아직도 생각없이 이를 인용해대는 이들은 세계사와 철학의 관계나 철학사 자체 뿐 아니라, 급변하는 '정세'(에 대한 판단과 개입이)라는 개념 자체가 부재한 자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4] 이런 맥락에서 첨언하건대, 본인의 입장을 '기계적 유물론'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Deleuze-Guattari에 대한 완전한 무지에서 비롯된 순전한 오해일 뿐이며 애써 변론할 필요도 느끼지 못 한다.



[5] ☞ OOO ; Object-Oriented Ontology객체지향존재론





※ 

    거시 철학사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변동은 이전까지의, 인식론을 필두로 최근의 정신분석까지 광의의 범-심리학주의가 주도해 온 주체지향 사조를 전복하려는 객체지향운동으로(서)의 근본적 방향전환이 본질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철학적 표현이 (대)주제 변경으로서의 '존재론적 전환'이며, 그 선도적 시대정신의 가장 견고한 중핵이 유물론적 전회인 것이다.

따라서, 그 발아 형태인 신유물론들로서 출발했던 새로운 철학사조는 소박한 유물론이나 물리주의등 미숙하고 수상한 여러 과도기적/실험적 한계들을 수반할 수 밖에 없기에, 이들이 최근 몇 가지 절단점들을 형성하며 분기/분화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예측되던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이 흐름에서 이제까지 신유물론을 주도해 온 사변적 실재론 일부의 '자연'주의, 물리주의적 물질개념에 반발해 행위소/자-Network 이론[ANT] 같은 표현적 유물론 등이 (재)부상하거나 (그 반작용의 반작용으로) 후기 HARMAN이 스스로를 '비유물론'으로 과장하는 것 역시 이러한 과도기적 시행착오들의 일환이며, 소위 그 비유물론이란 그 축자적 의미와는 달리 오히려 비판적 '사회' 실재론으로서의 Marx주의적 역사유물론에 그 어떤 신유물론들보다 근접하는 분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반의, 더군다나 주류 Marx주의자들 자신의 오해와 달리 심지어 (일반화한) 역사적 Marx주의 내부에도 오직 하나의 단일한 유물론 전통만이 있어 온 것이 아니다!!!

유물론 계보 내부의 제1 대분기점은 우선 자연주의 대 사회적 실재/유물론이라 할 수 있으며 Marx주의도 이러한 사실/사정으로부터 전혀 자유로운 것이 아니(었)다.)



HARMAN이 신유물론의 문화주의 계열에서 스스로들을 유물론으로 자칭하는 것에 석연찮아 하거나,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유물론이라 자처하(ㄹ 수 있)는 것은 그 근본 동기가 이러한 사정을 기본 배경으로 (환원주의로서의 유물론이라는) 그의 독특한 사적 재정의( 또는 차라리 '인상')가 가미되는 등 신유물론들이 공통된 '유물론' 개념 그 자체에 대해서조차 합의하지 않은 채 동시대에 대한 어떤 문제의식과 반응경향으로서 그 운동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증폭된 것이며, 이는 모두 이 사상 운동이 과도기적 발생 단계에 있기 때문에 기인하는 것이다.




















  






[작성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와 타자들 -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혐오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가
이졸데 카림 지음, 이승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너무 죄송하지만, 이 Review는 그 시급성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한 일정관계 상 핵심논지만을 거칠게 요약 제시하기로 합니다.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0.

우선, 혁명적 좌파의 철학은 명확하고 일관되며 방황하거나 동요하지 않습니다.



정치와 경제는 분리될 수 없으며, 이를 분리하고자 하는 모든 경제주의, 정치주의 조류들은 좌충우돌하며 불안하게 흔들려 온 근대 Bougeoisie의 분업적 세계관과 이에 오염된 다양한 편향의 변종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는 Nancy Fraser에 대한 결정적 최대비판으로서 Judith Butler도 원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Marx주의 사회재생산론의 핵심과도 완전히 일치하며 속류화된 경제결정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Freud주의 계보에 대한 Marxism의 비판 또한 마찬가지로 세계의 실재로부터 유리된 정신 영역만의 고립적 분석과 대안은 공허하고 근거없는 관념적 유희와 궤변에 불과한 정신분석'질'일 뿐이라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합니다.



0'.

그런 점에서 Isolde Charim의 본서는 그 참신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혁명적 좌파 전통의 핵심 정신을 결여한 채 순수 Freudo-Lacan주의의 방법론적 오류를 고스란히 반복답습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한계로 지적될 수 있습니다.



정치경제적 실재와 문화심리적 현상은 긴밀히 상호 접합되어 있으며, 분리고립적으로는 결코 그 전면적 진실과 근원이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분석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는 본서는 그 인상적 참신성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러운 현재 국면의 국제정치와 세계사를 돌파해낼 수 있는 이론적 인지 지도로서는 매우 불충분한 또하나의 실패로 귀결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은, 아직 국내에서 그 숨은 가치만큼 완전히 평가되지 못하고 있으나 과학적 Marxist Analytics의 계보를 잇는 Giovanni Arrighi를 경유하는 model이 제언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하는 Arrighi의 결론을 Kondratiev 파동론 등 여타 경제사론과 통합하여 독자적 통찰로 확장한 하나의 작업모형으로 제국주의론, 세계체계론과 최근의 제국론 등 모든 좌파적 국제관계이론들을 통합하는 paradigm도 함께 제시할 것이다. 경어는 생략]



Nik(h)olai Kondratiev(-Schumpeter) 장기파동론 계열은 10년 주기의 예외없이 반복되어 온 기계적 경기순환을 반영하는 Juglar 파동( 및 Kitchin 파동) 등과 달리 총체적 생산력 및 생산관계의 사회경제적 내부모순과 특히 계급투쟁의 결과로 실현되는 구조위기를 반영한다. 이 모든 파동론들은 각각 실물경제 또는 금융-부채 부문들에서의 순환과 변동을 부분적으로 modelling하여 도출된 것들인데, 이들을 모두 종합하면 기본적으로 Kondratiev 파동에 동조되면서 종합도에 따라 미세조정되고 정교화되는 Ray Dalio의 Economic Machine Theory와 같은 Pattern을 얻게 되는데, 이를 다시 엄밀한 Marx주의 이론에 따라 해석하면 그 어떠한 경로를 채택하든 결국 Arrighi와 유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결론에 의하면, Arrighi가 잘 보여주듯이, 영국에서 촉발된 산업혁명 이후 뿐 아니라, 그 이전의 Netherlands( Holland), Portugal/Espagna, Venezia/Genova 등 12~13세기 이후 세계경제 뿐 아니라 심지어 10세기 남송/북송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변동/순환과 지구적 중심이동 현상을 모두 설명해내는 장기근대론이 입론될 수가 있다. 






(참고로 좌파 내부의 첨예한 일쟁점과 관련하여 첨언하면, Michael Roberts 등 전통적 구좌파들의 경제(위기)사론이 가진 결정적 문제점이자 Arrighi 세계체계론 등 최신 이론 계열들과의 핵심적 차이는 구좌파 이론들이 금융자본(주의) 영역을 충분히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오직 이윤율 변동만을 고려하는 등 전반적으로 기본 성격이 산업자본주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Arrighi, Dalio 등으로 대표되는 최신 경제사 model들은 산업자본 중심의 이윤율 추세 뿐 아니라 금융자본 영역의 변동과 순환에도 촛점을 맞춰 통합적 설명을 완성한다. 덧붙여, 거의 국내 최초의 정통 위기론/공황론 전공자라 할 수 있는 김수행 선생님께서도 이러한 사태를 특별히 염려하시며 돌아가시기 직전 행하신 강의들에서 유언 격으로 강조하신 내용 중 하나가 '이윤율 저하'는 추세적 경험칙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음. 그러나 궁극적 이윤율 저하는 (초)장기적으로는 결국 실현되는데 이것이 구조적 축적 위기를 초래하는 근원적 압박이긴 하나, 이를 상쇄하기 위해 자본은 모든 노력을 경주하며, 다양한 변칙들을 시도하는데 금융적 전환, 기술혁신과 구조 '조절regulation[레귈라시옹]', 새로운 지리 및 산업=노동 부문으로의 끊임없는 식민지 개척과 확장, 그리고 전쟁 등등의 순으로 가능한 모든 시도들을 감행하고, 이 때문에 이윤율 저하는 단조감소곡선을 따라 단순하게 예외없는 '구조적 인과법칙'으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며, 지금껏 이러한 시도들이 그럭저럭 성공해 왔기 때문에 심지어 붕괴를 극복하고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변신하며 유지생존해 올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자본가의 이윤 동기는 생산력의 모순적 발전으로서 노동절약적이고 자본소비적인 편향적 기술진보를 추동하고 이는 결국 자본생산성의 저하(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이윤율 저하를 초래한다. 자본축적의 한계를 의미하는 이윤율 하락은 자본축적의 일반적 법칙의 두 가지 결과로서 자본의 과잉(금융화)과 노동의 과잉(궁핍화와 그 결과로서 과소소비), 즉 ‘착취와 억압의 증대’를 야기한다. 이러한 기제로 이윤율 저하는 Rosa Luxemburg-LeftCom계열의 과소소비론 등과 대립하는 배타적 유일 원인이라 볼 수 없으며, 위기의 요소들은 이와 같이 복합적이고 동시적으로 진행된다.)





2. Arrighi 세계체계론의 내용


Arrighi는 '1960년 당시 신고전파 경제학의 강자였던 Milano Bocconi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Zimbabwe의 Rhodesia와 Tanzania 등지에서의 교육 및 민족해방 관련 연구활동을 하면서 Immanuel Wallerstein을 만났고, '69년 귀국 후에는 좌파 노동운동과 연계된 ‘그람시 그룹( il gruppo Gramsci)’에서 활동하다, 다시 Wallerstein과 합류하기 위해 '79년부터 미국 Public Ivy 중 하나인 뉴욕주립대(SUNY Binghamton) 페르낭브로델센터에서 전세계로부터 몰려든 다양한 제3세계 지식인들과 자유롭게 교류하는 가운데 Wallerstein, Andre Gunder Frank, Samir Amin과 더불어 세계체계론 4인방으로 불리며 '98년 Johns Hopkins 대학교로 옮기기 전까지 센터(The Fernand Braudel Center for the Study of Economies, Historical Systems and Civilizations)를 세계체계론의 총사령부로 만든 인물로, 놀랍게도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정확히 예언했던 그의 주저는 이미 그 14년 전인 '1994년에 초판이 발간된 바 있다.




체계적 축적 순환에 대한 Arrighi의 분석에서 주목되는 것은, 모든 세계적 축적체계가 최종적 붕괴를 맞기 전 금융부문이 일시적으로 팽창하면서 ‘반짝 호황’을 누린다는 점이다. 축적체제가 활력을 잃게 되면 자본이 과잉축적되면서 생산·유통 부문의 이윤율이 금융수익률보다 하락하고, 유동자본을 얻으려는 국가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는데, 그 결과 실물부문의 자본이 금융으로 전환/이탈하면서 두 부문 모두에서 이윤율이 일시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영국의 ‘belle epoque’, 1990년대 미국의 신경제 호황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러나 이런 호황은 금융부문의 투기적 활황과 생산부문의 부분적 경쟁 완화를 통해 달성된 것이기에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이런 분석은 정보기술(IT) 거품[ 소위 'dot com bubble' 등]과 과열된 주택경기 덕에 지탱되던 미국 금융호황이 결국 파국을 맞은 것에서도 입증된다.




Arrighi는 미국 세계hegemony의 최종적 위기가 1970년대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진단한다. 이와 같은 진단은 1970년대부터 미국의 금융적 팽창이 본격화되었다고 보기 때문인데, 자본주의가 등장한 이후 존재했던 체계적 축적 순환들( 특히 Genova, Netherlands, 영국, 미국)을 분석함으로써 그 실증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각각의 체계적 축적 순환은 노동과 기계 같은 실물 부문의 투자가 증가하는 실물적 팽창 국면과 이윤율 한계와 저하에 따라 실물 부문의 신규 투자를 점차 중단하고 금융 부문이 주요 산업으로 부상하는 금융적 팽창 국면으로 구성되는데, 금융적 팽창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 축적 순환의 쇠퇴와 다음 축적 순환으로의 이행이 진행되는 양상을 반복해서 보인다. 1970년대에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경제체계를 재편했던 Bretton Woods system이 붕괴되면서 고정환율제가 변동환율제로 전환되었고, 이동자본에 대한 규제가 제거되었으며, 공공채무의 증권화가 진행되는 등,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시작되었다. 이런 일련의 변화는 미국이 자본의 수익률이 하락하고 20세기 초반의 실물적 팽창이 끝나면서, 이를 금융적으로 해결하려 한 증거로 볼 수 있다.



앞선 세계hegemony의 쇠퇴 국면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경우에도 자본의 핵심 사업은 점차 금융으로 전환되었다. 이런 금융으로의 전환은 한편에서 세계적으로 금융위기를 전파하는 동시에, 하락하던 자본의 수익성을 반전시키는 효과를 동반하였다. 하지만 수익성의 상승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앞선 체계적 축적 순환에서도 등장했는데, 언급했듯 Arrighi는 이를 19세기 후반 유럽에 등장했던 belle epoque가 20세기 후반의 미국에 재현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축적체계의 근본적 전환이 아닌 단순한 자본수익성 하락에 대한 반작용일 뿐이기 때문에 hegemony의 전성기에 비해 그 지속 기간이 매우 짧고, 세계체계를 거대한 불안정으로 이끌면서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종료된다. 






하지만 쇠퇴 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미국의 금융적 팽창은 이전 순환과는 다른 특징들을 또한 보여 주고 있다. 금융화한 세계의 이동자본이 새로운 축적의 중심지로 집중되기보다 기존의 쇠퇴하는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으로 집중되고 있고, 미국의 헤게모니가 약화되고 있을지라도 미국의 군사력에 대해서 도전할 수 있는 나라가 없을 만큼 미국의 군사적 우위는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또한 동아시아가 새로운 축적의 중심지로 등장하고 있지만 아직 새로운 체계적 축적 순환을 구성한다고 볼 수 있을 만큼의 전면적 변신을 보여 주고 있지 못하며, 국가간-체계의 위기가 수시로 출현해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개입이 더 늘어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례적 상황은 미국이 쇠퇴하는 헤게모니를 반전시키기 위해 앞선 헤게모니 국가들보다 훨씬 많은 자원과 노력을 쏟아붓게 되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이런 미국의 노력이 체계유지비용을 급격하게 증가시키면서, 체계의 구조적 위기를 감소시키기보다 오히려 그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이 이라크전쟁의 실패와 미국발 금융위기를 통해 현재 확인되고 있다.




3.

Charim의 본서와 관련하여 Arrighi 세계체계론이 주는 핵심적 시사점은 


첫째, 역사 속에서 (Kondratiev 파동으로 modelling된) 이 연속적 구조위기들이 k차 실물경제 위기 이후 k+1차 금융 위기로 쌍을 지어 하나의 체계순환 주기를 완성하면서 이에 따라 유사한 사회현상들이 '반복' 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대략 100년 주기의) 초장기 '체계(적 축적) 순환 주기'를 우리는 (특히 수리정치경제학적 접근을 위해) 'Arrighi 파동'으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며 소위 '장기 20세기'는 그 연속 파동에서 최근의 cycle에 해당한다고 규정해야 할 것이다.)





66

   1세대 feminism은 자유경쟁 증기기관 산업자본주의기 섬유업 등의 경공업 분야에 노동자로 대거 진출하며, 이를 위한 대중교육으로 의식이 성장하고 역량이 축적된 여성계층이 1865~1900년 연간에 걸쳐 진행된 제2차 산업혁명과 ’함께’ 발생해 특히 1873~1896년 상간에 정점에 오른 제1차 구조위기 대불황을 전후로 공격받으며 그에 대한 저항으로 ’참정권--suffrage--’ 이쓔를 중심으로 소수 명망가 중심 Suffragette들의 우파적 LF와 노동대중 중심의 좌파적 MF가 동시 부상했던 것이며, 이후 자본주의는 독점자본주의로 이행하고 3차 구조위기기까지는 기본적으로 2차 산업혁명에 의한 석유-전기동력 기반의 대규모 중화학공업 중심체계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된다.




1929~1945년 상간의 제2차 구조위기 대공황기엔 독자적 feminism 물결로 가시화하진 못했으나 연속되는 세계대전의 포화와 지구적 계급투쟁의 열기 속에 (대부분 극우 fascist세력에) 흡수된 애국 feminism[1]의 형태로 동시 출현했었다고 보아야하고, 독점자본주의는 fascism과 Keynesian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전화한다.


1970/74~1982/85년 연간의 제3차 구조위기 불황기를 전후로 68혁명에 뒤이어 2세대 feminism이 부상했으며, 그 원인은 이 직전 3차 호황기이자 자본주의 최대번영기에 건설중화학공업중심의 자본주의적 가부장제가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을 핵심으로 하는 가족임금제를 본격화, 전사회화하며 오히려 그 정점에 달함으로써 여성계층의 체제불만 또한 역사상 최대화 되었기 때문인데 이는 최근역 『집안의 노동자』에서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도 지적했듯 복지국가의 주도적 기획이기도 했지만, 그동안 다른 글들에서도 계속 설명해 온 바와 같이 자본주의 경제의 발달단계 상 필연적인 것이기도 했다. 이 가부장제가 복지제도와 함께 위기에 처하고 점차 축소-붕괴해가면서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체제로 전화되어 나아감으로써 이 붕괴기에 폭발한 제2세대 페미니즘은 일반적으로 역사상 가장 급진적이고 격렬한 형태를 띌 수 밖에 없었다.




이 위기를 계기로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 세계체계로 다시 한번 전화하게 되고, 3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다가 이번 2007~2008년 세계금융위기에 의한 장기침체라는 제4차 신자유주의 구조위기로 세 번째 feminism 물결이 몰려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기존의 3세대 feminism의 정체가 사실은 2세대 post-feminism에 불과했고 이번이 진짜 3세대 feminism이 될지, 아니면 그냥 4세대 feminism이 될지는 이번 물결의 크기와 구체적 성격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3세대 페미니즘을 post-feminism으로 규정하려는 반동적 ’여성주의’--이건 멸칭이다. 이런 자각없이 과용, 남용되는 경향이 강한데 이유는 후술한다--적 시도가 종종 있어왔으나 이것이 Queer들에게는 그렇게나 고대하던 감격적인 ’물결’이기 때문에 이런 시도는 명백한 ’여성’중심주의, ’여성’이기주의적 퇴행이고 반동이므로 개인적으로는 이번 구조위기를 통해 드디어 페미니즘에서 ’물결’과 ’세대’ 개념이 분리정립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즉 이번 물결은 4세대 페미니즘을 발명해낼 제3물결이다.)








이런 패턴이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이유는 경제위기에 따른 중간계층 몰락과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위기!!"에 의한 피부양 약소계층 혐오, 위기 시 제1 취약대상으로서의 여성계층에 대한 자본과 사회의 수탈, 착취, 공격 집중 같은 두 번째 계열 3원 메커니즘이 반복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적 페미니즘 고양은 극우파시즘의 부상에 의해 촉발되고 촉매되는 ’반응’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이들 지역, 국가와 겹치는 경향이 있고 또 그만큼 보편적 현상이다.


극우파시즘과 페미니즘 부상의 공통 원인은 사회양극화와 복지제도 축소, 가부장 경제(생계부양자-가족임금제) 위기라 할 수 있다.



(경제문제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분들만을 위해 첨예한 쟁점 하나만 짧게 부연하면 신자유주의는 내부식민화와 노골적 차별 및 배제를 통해 얻어지는 (내부)식민지 초과이윤을 포함한 각종 초과이윤 부스러기들을 통해 이윤율하락과 축적의 위기를 타개하면서 독점을 극적으로 강화하려는 plan을 그 메커니즘의 한 핵심축으로 탑재하고 있고 이것은 일정한 효과를 ’발휘했다’.)'


99






이와 같이 요약될 수 있는 장기 20세기 경제사에서 1차와 3차 위기는 실물경제위기, 2차와 4차 위기는 금융(자본)위기로서 1차 위기 후 belle epoque를 거쳐 2차 위기로 하나의 체계순환이 완료되었던 것과 같이, 각종 사회적 저항과 계급투쟁에 의해 '60년대 후반 부터 본격화되어 '70년대 정점에 오른 3차 위기로 대대적 금융화에 의해 금융자본이 주도해 온 belle epoque가 바로 신자유주의이며, 2007~8년부터 본격적인 4차 위기가 시작되어 체계붕괴기로 접어들면서 대순환 주기가 완료되어가고 있는 것이 바로 최근 100년 전 상황이 계속 반복 출현하고 있는 듯한 deja vu를 겪게 된 근본 원인이다.






............................










[작성 중]













































































































































============================================


[초고 작성중으로, 특히 이하는 개인적 memo들에 불과하므로 아직 읽지 말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정세 분석의 방법론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상과 같이 상황과 시기/국면의 역사적 기본 성격을 규정한 다음 객관적 요소들의 구체적 기제와 양상들을 분석하고, 이어 주체들의 대응 방식




체계의 한계와 붕괴



주체들의 (심리적) 대응 양상




4. 체계와 체계 ideology 붕괴기 각종 방어기제로서의 반동 현상들




4.1. 대안 정립 전에 기존의 공동체구성 ideology를 포함하는 지배적 체계 ideology가 붕괴하는 혼란기에 자기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로서 가장 먼저 등장해 온 개인주의; 각자도생의 ideology


퇴행/소극/감소적 개인주의가 득세하고 다시 정체성( 정치학)이 사회적 논란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다는 것은 기존의 신념과 ideology 체계를 지탱해 온 hegemony가 붕괴되는 혼란의 과도기(/잠재적 이행기)라는 징후임을 가장 먼저 지적하지 않는 모든 논의는 이미 궤변의 입구로 걸어 들어가는 첫 발을 뗀 것이다.


그리고 한없이 자기 내면세계에 집중하며 침잠해 들어가는 Hermann Hesse가 매우 잘 대표하는 수많은 전후 문학들에서도 곧잘 목격되듯, 이렇게 구조붕괴기 또는 최소한 구조전환기마다 제일 먼저 작동하는 원초적 필수방어기제로서 반복 출현해 온 개인주의가 Charim에게 '2세대'라며 특히 '60~70년대 유형만이 유독 인상 깊게 각인된 이유는 그것이 획일적 대중(소비)사회를 핵심적 특성으로 하는 Fascism등 전체주의와 Keynesian 복지국가, 현실사회주의를 모두 포괄하는 소품종 대량생산 Fordism기반의 국가(독점)자본주의 붕괴기 전후에 그 반립으로 출현한 진보적/공세적/대안적 개인주의였기 때문에 당시의 역사적 기능과 역할이 매우 적확하고 절실했었기 때문이다.




4.2. 기존의 고도한 가상/상상/추상/구성적 세계관과 자아(정체성) 이념들의 허구성이 폭로되며 붕괴할 때, 다음으로 등장하는 방어기제는 단순명쾌한 근본주의들, 특히 외모 (피부색, 성sex, 연령) 같은 확실하고 직관적인 생물학적/신체적 근본주의이다.

  

Charim의 주장을 한국처럼 인종적 외모 다양도가 낮은 사회들에 적용하려 할 때 드러나는, 아예 전혀 적용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가장 큰 모순점이기도 한데, 왜 한국 등에선 인종-민족이 아니고 대신 성별과 세대가 계층갈등의 주 전선으로 현상하는가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선


직관적 표지(/)식별자




4.3. (금융자본(가 계급)의) 세계화/다문화/다원화 ideology 및 hegemony 붕괴와 그 반동으로서( 산업자본주의(부문) (기본=노자) 계급들)의 보호무역주의, 국수주의

     : Brexit와 Trump를 지지하는 Rust (Belt) 노동계급들[2]


국제적 규모에서는 실물경제 팽창기부터 점차 자유무역의 촉진을 위해 국제주의, 세계화 ideology가 서서히 각광받기 시작하다가 실물경제가 축적위기를 맞게 되면 이를 상쇄하기 위해 급격한 금융화가 이루어지면서 금융자본의 자유롭고 신속한 국제이동성을 위해 이전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세계화 ideology와 정책들이 대대적으로 본격화된다.



바로 이 금융자본(가 계급)이 주도해 온 금융팽창의 체계(/) ideology가 Fredric Jameson의 후기 자본주의, Postmodernism, 탈산업/탈공업 사회 같은 한 축의 관념들의 실체로서의 신자유주의 체계이고, Charim 수준에서 사회 변화의 근본 원인으로 주장된 다원화의 실제적 주요 동인으로서의 세계화 '정책'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문화사적으로는 avant-garde 운동에서 발아하여 전기 la belle epoque 때를 '정점으로' 꽃피워 이후 Fascism에 융획되고 마는 사조가 futurism, surrealism을 포함하는 modernism이고, '68혁명을 motif로 발화하였으나 후기 bellle epoque에서 지배계급의 역습이자 포섭전략으로서 신자유주의에 혼종교착되고 착종교란되며 결국은 포획당한 채로 결탁과 협작공모를 통해 시대를 풍미한 것이 postmodernism이라 할 수 있는데, '68혁명과 신자유주의는 양자 모두 국가(독점)자본주의/독점자본국가주의 체계에 대한 (좌우) 대안 운동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국수주의적 보호무역주의는 국내적 복지축소 및 긴축정책과 함께 만연한 대중적 혐오감정을 연료로 추진되면서, 상호결합해 synergetic한 폭발적 상승효과를 발휘하며 결국 세계경제의 침체와 수축을 급격하게 가속시켜 한 체계의 구조적 순환주기를 파국적으로 완결하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4.4. 






5. 기술혁신이 몰고 오는 대량실업과 경제공황





6.




7




8. 




9.1. 항상 독점자본 승자독식과 그에 의한 극단적 양극화 및 경제공황, 시장의 실패로 귀결하는 ((신))'자유주의'의 (총체적) 위기와 붕괴, 그리고 그 종말




9.2. 다시 돌아온 "자유로부터의 도피" : (새로운) Charisma 갈망과 Fandom화



9.3. 독점자본 (신)자유주의기 혐오의 응축과 그 최종적 폭발로서 후속하는 Fascism



9.4. 연성 Fascism이자 맹아로서의 우익 Populism






10.

Fascism화의 속도와 강도는 전적으로 경제위기의 크기에 비례할 것이며, 지금까지는 사상 유례없는 전무후무 전대미문의 대규모 양적 완화에 의해 간신히 지탱해 오는 와중에 때맞춰 발생한 (소위 (축약된) 반도체 supercycle로 마무리 되는) Juglar 파동 하나의 융기로 여지껏 버텨올 수 있었으나 이제부터 3중 위기, Thucydides 함정까지 고려하면 4중 위기가 동시에 중첩된 골짜기를 곧 지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흔한 예측처럼 미중 단독 경쟁으로 상정되는 Thucydides 함정은 시기상조로 보이고, 요동치는 국제정세와 경제위기 정도에 따라 북중러 동맹을 기본으로 Iran, Syria 등 중근동 및 Venezuela, Cuba 등 중남미 국가들[3]이 참여하는 신 추축국 bloc에 의한 함정은 여전히 불씨가 남아 있다. 




11.




12. 기존 체계의 기만적 elite 운영/지배계급에 대한 분노로서의 반elite주의, 반권위주의, 반지성주의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국면에서 주체 대응 양식의 기본 요소는 대중들의 분노와 (파괴적) 행동 energy이며, 이것이 자신을 장악하고 그 흐름을 인도할 paradigm power의 홈을 따라 긍정적 진보로도, 부정적 반동으로도 흐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3.




14.




15. 



16. 대안 문제


66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중립성‘뿐이다. 중립성은 구역, 공간, 공적 공간으로 구체화된다. 다양한 문화, 종교, 정체성이 한 사회를 ‘공유‘해야 하는 상황에서 서로 만나면 중립적인 공공 영역이 시급하게 필요하다. 사람들이 다양하고 다원화된 상태로 동등할 수 있는 영역, 중립적인 만남의 장소로서 공공 영역과 공적공간이 필요하다. 이 만남구역bebegnungszone은 다름이 동등할 수 있는 다름의 공간이다..추상적인 영역에서만 실현된 다름이 동등하게 만날 수 있는, 추상적이지 않은 만남의 장이 필요하다.

99


그런데 이렇게 Charim이 제시하는 대안이란, (재미있게도 거의 유사한 주제에 대하여 內田 樹 선생이 최근간 [[소통하는 신체]]에서 아직 지극히 동양적인 동네 훈장이나 도장 사범 같은 시야에만 갇힌 채 사태의 세계사적 심각성을 철저히 통감하지 못하고 얇은 이해와 섣부른 비판을 시도하고 있는, 그러나 실은 이미 l'epoque postmoderne의 끝자락에 서서 처절한 문제의식 속에 제기된) commonwealth나 commons 이론의 매우 초보적 맹아 형상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Charim의 bebegnungszone[만남구역; 중립적 공공영역]도, 內田 樹와 보다 진일보한 '부대끼는' 신체들의 공통장도 모두 서로 대립하는 불상용적 대안들이 아니라 이 초장기 탈근대 대안체계로서의 commonwealth-commons(론)의 시원적 일형들prototypes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X.1. 좌파적 국제관계이론들의 통합 모형


협의의 세계체제


Arrighi의 독자적 세계체계론은 근대세계체계, 특히 실물부문은 기본적으로 세계경제와 국가간체계의 결합이라고 보는 Wallerstein의 These를 체계적 축적 순환과 국가간체계의 모순적 결합으로 발전시킨다. 세계경제를 독창적인 개념인 체계적 축적 순환으로 구체화하는 주목적은 중세 말부터 현재의 전지구적 차원까지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그것을 통해 팽창해 온, 연이은 체제들의 형성, 공고화, 그리고 해체를 묘사하고 밝혀내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원리상 국가를 초월해 팽창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나, 현실의 자본주의 역사에서 대자본들의 경쟁은 이런 경쟁을 지원하는 민족국가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에서 독특한 역사적 특성이 발생하게 되지만 이러한 특성은 지금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체계적 축적 순환은 국가간체계와 결합됨으로써 본격적으로 근대자본주의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근대자본주의의 역사에서 특정 시기 강력한 국가를 배경으로 한 자본은 세계시장에서 우위를 점하는 축적체제를 수립한다. 동시에, 강력한 군사-정치-이데올로기적 우위를 바탕으로 국가간체계에 자국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고이윤 부문을 독점할 수 있는 hegemony 국가를 등장시키게 된다. 이때 헤게모니 국가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세계적 축적체제를 주도하여 이윤율 동학의 궤적을 주도할 수 있는 ‘경제적’ 역량과, 체계의 chaos에 빠져 있는 세계질서를 hegemony 국가의 축적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보편성’에 기반을 둔 국가간체계를 수립해 내는 역량이다....................




세계체계의 질서와 무질서











X.2.

Hannah Arendt의 평악(/악의 평범성)론과 Stanley Milgram의 복종실험, Philip Zimbardo의 SPE[4] 이래 여러 모의 교도소 실험 등에 의해 반증된 사실을 정면위배하는 전문가주의의 거대한 삽질연구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이 시기는 여성/Gender 및 Feminist History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나 의외로 그 중요성에 비해서는 수행된 연구가 많지 않은 편인데*그간의 연구가 밝혀 낸 핵심적 결론 중 하나는 여성들이 어떤 의미에서도 결코 이 국면의 역사적 책임에서 자유롭거나 결백한 무죄의 피해자들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당시 남성 만큼이나 많은 여성들이 fascism에 투표하고 적극적으로 동의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fascism 치하의 여성 관료조직들을 지원하고 참여했다.


이를 중심 주제로 한 Feminism 내 대표 연구로는 (특히 그 심리 분석과 관련하여) 전통적으로 다음이 참조된다.



Italia 사례로는 다소 기만적인 Victoria De GRAZIA (1993) 보다 

MACCIOCCHI[마치옥희], Maria-Antonetta (1979). 'Female sexuality in fascist ideology'. Feminist Review no.1. : Italian 원본은 '1975년 Milano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처음 발표.

MACCIOCCHI, Maria-Antonetta (1976). La donna "nera"-"Consenso" femminile e fascismo. Milano: Feltrinelli.

Maria-Antonetta MACCIOCCHI는 저명한 feminist이자 지도적 좌파 이론가로 Letters from inside the Italian Communist Party to Louis Althusser (NLB. '1973)의 저자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이런 전간기 Gender사 연구에서 Fascism과 여성, 그리고 여성의 sexuality가 맺었던 관계가 오랫동안 침묵과 은폐의 대상이 되어온 점을 가차없이 질타하는 관점을 제시한 문헌 상 거의 최초의 연구자로 보인다.


독일 사례로 유명한

KOONZ[콘:츠], Claudia (1987). Mothers in the Fatherland: Women, the Family and Nazi Politics. London: Methuen.


영국 사례는

GOTTLIEB, Julie V. (2000). Feminine Fascism: Women in Britain’s Fascist Movement 1923–1945. London: I.B. Tauris.


특히 영국에서는 Suffragette들의 이후 Fascist화가 각별히 주목해야 할 핵심 사례를 이루며 최근에도 이를 압축적으로 제시한 문헌(용)으로 다음도 참조할 것.

CALDICOTT, Rosemary (2017). Lady Blackshirts: The Perils of Perception - suffragettes who became fascists. Bristol Radical History Group.




근년의 주목받은 종합 연구로는

DURHAM, Martin (1998). Women and Fascism. (Oxfordshire &) London & N.Y.: Routledge.


PASSMORE, Kevin (2003). Women, Gender and Fascism in Europe, 1919-45. New Brunswick, N.J.: Manchester UP.


LIM Jie-Hyun & PETRONE, Karen et al (2010). Gender Politics and Mass Dictatorship: Global Perspectives. London: Palgrave Macmillan.

(: 이 출판사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MASSD로 약칭되는 5권 짜리 Mass Dictatorship In The Twentieth Century Series로 간행된 야심찬 기획의 일부로 이전 edition은 편제도 전혀 다르고 Series 자체(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과 이론 구도)는 그 야심 때문인지 과도 일반화와 무차별 동질화/평행/대칭화 등 다듬어지지 않은 주장이 섞여 국내에선 크고 작은 논란도 빚었으나, 편저자들이 제기한 문제의식의 합리적 핵심을 CPR하는 발전적 논의 구도는 분류학적 논쟁이 아니라 그 작동원리와 구현기제, 장치들에 대한 정교한 (Gramsi-Althusser-Foucault적) 미시분석으로의 확장계승에 있다고 봄. 

왜냐하면, 모든 dictatorship은 기본적으로 가능(만)하다면 mass dictatorship을 이상으로 추구하지만 체계 전체의 가장 우선적인 절대 목적과 운동 동기가 언제나 자본 축적과 이윤 보호이기에 자발적 복종과 동의, 참여 여부는 항상 이 조건에 제약받는 부차요소로서 이에 의한 이상 도달 정도에 따라 명쾌한 분할이 불가능한 연속적 spectrum으로 분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기준으로 한 분류학이란 애초에 별 의미가 없고 (fascism 등 dictatorship이라는) 문제의 본질도 아님.)




[*] 이 시기의 연구량에 관한 사실 자체까지 부정하려는 듯한 일부 시도자와 그 주변은 

우선 이 분야의 국제적 연구자 중 한 명인 상기한 영국 Cardiff 대학교 역사학과(modern European history) Kevin PASSMORE 교수의 2011년 논문 'Theories of Fascism: A Critique from the Perspective of Women's and Gender History' in PINTO, Antonio Costa ed. Rethinking the Nature of Fascism: Comparative Perspectives. (Basingstoke &) London: Palgrave Macmillan, pp. 119-140을 참조할 것. [2010년 원본 논문 'Theories of Fascism: A View from the Perspective of Women's and Gender History'의 단행본용 수정논문]


논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66

Nearly 40 years after second-wave feminism first challenged academe,

theorists of fascism have yet to engage seriously with women's or gender

history. This neglect is not entirely their fault: neither women's nor

gender historians have systematized the implications of their work for

understanding fascism as a category of analysis, perhaps seeing fascism

studies as a domain of positivist model building, dependent upon the

universalization of the male subject. (From the other side, fascism theorists'

neglect of women's and gender history stems, in a few cases, from

a wider unfamiliarity with historical research on fascism.

It is not difficult to find abstract models based entirely on dialogue

with other equally abstract models, with hardly a glance at research into

the movements and regimes they discuss, let alone at the writings of fascists

themselves; some cite Adorno on the nature of Nazism more readily

than they do Hitler. Of course, most theorists do read historical works,

yet too often they see in them only 'historical detail'-to be reworked

into a theoretical interpretation. Perhaps they are influenced by the old

adage that 'historians collect the facts while sociologists and political

scientists provide the theory'. They appear unaware of the theoretical

assumptions intrinsic to historical research, and still less of the contribution

of women's and gender historians towards developing those

methods.

In my view, theorists of fascism could learn something from women's

and gender history. Although not my concern in this chapter, the

reverse is also true; for those who write about women and gender in fascism

ought to think carefully about the nature of fascism. Returning to

my own purpose, I do not mean merely that theories of fascism would be more 'complete' if they included an understanding of gender relations

(although it would be pleasing if they did); rather, the critical method

honed by gender historians and others allows us to understand the historical

nature of fascism. This in turn exposes inherent weaknesses in

those theories-not just in terms of their exclusion of women, but of

their very assumptions about the nature of society and of the methods

of the human sciences.

:  제2물결 feminism이 (기성)학계에 도전한 지 40년이 지나도록 fascism 이론연구자들은 여성사나 gender사 연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무관심은 fascism 이론연구자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여성사가나 gender사들 역시 대개는 fascism 연구를 단지 남성 주체의 보편화에 종속되는 실증주의 model 구축의 영역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작업이 분석 범주로서 fascism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갖는 함의를 체계화시키지 못했다. (다른 한편 fascism 이론연구에 있어 여성사와 gender사 무시는 어떤 경우엔 역사 연구 일반에 익숙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기도 했다. 사료의 검토는 차치하더라도 fascism 운동이나 정권에 대한 기존 연구도 훑어보지 않고, 추상 수준이 같은 다른 model과의 대화만을 통해 추상화 model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fascism 이론 연구자들은 여성사와 gender사의 성과에 무지할 뿐만 아니라 역사 연구에 내재된 이론적 가설조차 모르는 듯하다.)

   필자[Kevin PASSMORE]가 보기에 fascism 이론은 여성사나 gender사로부터 배워야 할 뭔가가 있다. 이 논문에서의 관심사는 아니지만 반대로 여성사나 gender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fascism하의 여성이나 gender에 관해 글을 쓰는 자는 fascism의 본성에 대해 주의 깊게 성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99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를 거쳐 이대 지구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인 김용우 선생님이 '이탈리아 파시즘과 파시스트 신여성'이라는 논문에서 파시즘과 여성: 페미니스트 역사 서술의 성과와 한계라는 제하의 도입부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서술도 참조할 것.

66

   파시즘이 남성의 독재 체제라는 시각은 오랫동안 페미니스트 역사 서술을 지배했다. 사실상 여성의 긍정적 정체성을 확립하려 했던 대부분의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에게 수많은 여성과 남성의 자유를 압살하고 생명을 빼앗은 파시즘은 그다지 매력적인 주제는 아니었다. 따라서 파시즘 자체, 나아가 파시즘 시대를 살았던 여성들의 삶이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간혹 파시즘이 논의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남성의 독재 체제로 쉽게 등치되고, 여성은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면 가혹한 남성의 지배 체제 아래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꾸려갔던 수동적인 희생자로 그려졌다.

.....그러나 파시즘이라는 가장 극단적 유형의 가부장제의 대대적인 탄압 아래에서 온갖 권리와 힘을 박탈당한 수동적 희생자로서 여성을 규정짓는 입장은 다른 한편으로 행위자로서의 여성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적극적 행위 주체(agent)로서 역사의 격랑을 헤치며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여성의 상을 모색했던 페미니스트들에게 파시즘과 여성이라는 주제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를 입증하는 사례였던 셈이다.

   따라서 여성과 파시즘이라는 주제가 역사가들 사이에서 새롭게 부각되었을 때,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의 관심이 주로 반파시스트 저항운동에 가담했던 여성 전사들에 집중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파시즘에 맞서 헌신적인 투쟁을 전개했던 여성 전사들은 많은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에게 적극적인 행위자로서의 여성의 본보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연구가 이들 여성 전사들의 영웅적 저항운동에[만] 바쳐지고, 그들을 '성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남성의 독재 체제에 굴복한 무력한 희생자에서 오히려 폭압적 체제에 헌신적으로 저항하는 역동적인 행위 주체로서 여성을 복원하기 위한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의 노력이 거둔 결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반파시스트 저항운동에 가담했던 여성들이 여성 해방의 전사로, 반파시즘 문화의 수호자로, 그리고 전후 사회 재건을 위해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창조하고 북돋우며 보존할 모범으로 간주될수록 오히려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이 직면한 딜레마는 더욱 부각되었다. 적극적 행위자로서의 여성은 오로지 반파시스트 저항운동에서만 존재하는가? 파시즘 시대를 살았던 여성들 역시 때로 파시즘이 제공하는 다양한 기회와 환경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전유하지는 않았던가? 여성은 적극적 행위자로서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고, 파시스트 운동에 가담할 뿐만 아니라 파시즘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것을 지지하고 후원한 것은 아닌가? 가부장제의 감옥에 갇힌 무력하고 수동적인 여성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적극적 행위자로서의 여성이라는 인식이 저항운동에서는 귀중한 장점이지만, 파시즘을 지지한 여성들과 결부되었을 때는 치명적 약점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Koonz의 저서와 그를 둘러싼 논쟁, 그리고 뒤이은 연구들은 나치 시대의 여성들이 더이상 무력한 희생자 또는 수동적 공모자가 아니라 나치의 학살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고 체제 유지에 기여한 적극적 행위자였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최근의 한 저서[JOSHI, Vandana (2003)]는 나치 시대 여성사, 젠더사 연구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뒤셀도르프 지역 여성들의 밀고를 다룬 이 연구는 비밀경찰인 게슈타포(Gestapo)가 대중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효과적으로 행사함으로써 사회 통제에 성공했다는 기존의 성과를 훨씬 뛰어넘어서 있다.현재 혹은 전 남편의 폭력성에 맞서 그들을 좌파, 공산주의자, 인종적으로 의심스러운 자[ 즉, 비-Aryan]로 비밀경찰에 밀고했던 현재 혹은 전 아내들, 심지어 다른 남성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남편을 은밀하게 고발하는 아내들은 사실상 밀고라는 수단을 이용해 비밀경찰로 매개되는 나치 국가 권력을 오히려 여성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활용]했던 것이다.99







이상의 역사적 실재들은 현재 한국에서도 태극기 집회를 열렬히 좇아 다니며 '햇님 복권'을 끊임없이 외쳐대고, 최근 Trump Tower가 있는 New York Midtowon Manhattan의 Times Square 근처[ 54번가]에 박근혜 석방 요구 광고까지 게재하면서, 반대로 난민 문제에는 목숨 걸고 반대하고 전태일 열사를 한남 통구이라 조롱하는 자신들은 절대 페미니즘 단체가 아니라 강변하며 오히려 기회 있을 때 마다 페미들을 공격하는데 여념이 없는 Womad 같은 단체들과 관련하여서도 그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데, 흔히 운동 내 많은 분들이 막연히 기대하고 계시는 바와 달리 구조 위기기에 여성 계층을 포함한 피지배 대중은 정치적으로 활성화되고 고양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Ranciere도 강조하듯 많은 경우 이처럼 그 활성화 결과가 자동적/자연발생적으로 반드시 진보로 귀결된다는 보장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Womad의 경우는 특히 우파 정보조직들에서 운동(권)에 대한 각종 황당한 가짜뉴스 생산유포 등 집요하고 주도적으로 여남분열과 극우화 공작을 펼치고 있는 여러 정황이 포착되고 있기에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아무리 그 미정형의 잠재성을 긍정적으로 봐주고 있는 정파나 분자라 해도) 최소한 적극적 견인경쟁이라도) 노력을 경주해야 할 이유로도 좋은 참조를 제공해 줌.

((하지만, 그 경쟁도 철저히 노골적인 동물 감정과 욕망, 이익으로 선동되는 극우적 특성에 고도의 이상과 윤리, 정치적 올바름으로만 대항해야 하는 좌파의 전망은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음.)) 



다음 사항도 일별할 것.

66

친미시위도 하면 좋겠노. […] 다른 외국인들이 알게 이태원, 미군캠프에서도 하는거노.이태원 시위는 좀 더 가벼운 분위기로 많은 사람들도 많이 참여할 수 있게 하자노. 그리고 미대사관 앞에서는 적극적이게 친미를 어필하는거노. […] 성조기 두르고 미대사관 앞에서 이니으니사진 인공기 오성홍기 다 불태우고 찢는 퍼포먼스 하는거노. […] 그리고 전에 웜에서 나왔던 얘기인데 박 터트리기에 재앙이 얼굴을 넣어서 그걸 깨는 퍼포먼스를 하는거노. 좆불시위때 햇님 얼굴로도 했었노.

99

¶ slownews.kr/72259에서 재인용.

이런 극우성향이 일부 구성원만의 특수편향이라느니, 심지어 '흔한 인터넷 놀이 문화' 정도로  무책임한 오해를 하고 있거나 그들의 반문재인 구호 핵심 사유가 박근혜 탄핵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 분들은 기사 전체를 숙독할 것.






[2] 이들 특정계층의 독특한 행동양식을 설명하고 반복지칭하기 위한 계층분류개념으로 우리는 Rustariat나 Corrodentariat 같은 술어를 제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3] Brazil은 현재는 중도우익으로 분류되는 사회자유주의를 표방해 온 사회자유당(Partido Social Liberal) 출신 자이르 메씨아스 보우소나루Jair Messias Bolsonaro가 선거운동 과정에서 정치경제 정책은 좌우 간에 우왕좌왕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반면 기록적 범죄율 속에서 치안을 회복하고 만연한 정치적 부패를 척결하겠다는 약속과 전통적 가족 가치관 수호 등 강경한 입장으로 급격히 대중의 지지세를 넓혀 가며, Trump와 유비되는 극우 populist라는 구미 언론의 성급한 평가 속에 ('2018년 10월 7일 실시된 대선 1차 투표에서 46.03% 49,277,010표 득표로 당선을 위해 필요한 유효 투표의 과반을 얻지 못한 관계로) 결선 투표에서 PT(노동자당)의 페르난두 아다지Fernando Haddad와 맞붙어 55.13% 57,797,847표 득표로 신승하며 제38대 대통령으로 '2019년 1월 1일 취임한 상태이나, 소속 정당의 전반적 지지율은 의석수 등에서 5~10%를 넘지 못하고, 특히 전국 시의회 의석수는 겨우 1.5%에 불과한 군소정당에 가깝고, 상하원 등 모두에서 나머지 대부분은 진보좌파 계열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




[4] 최근 한 유명 media에서 SPE에 대한 review가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는 이미 초고 memo 작성 이전부터 충분히 비판적인 심층 검토 하에, 평악론과 일상/미시 fascism론, 구조주의 환경론, Tabula rasa론과 告子의 性無善無不善論 등 정연하고 정합적인 Core 이론 집합들과 이를 강력하게 지지해주는 엄격하게 검증된 다른 많은 실험들, 그리고 특히 이런 비정상적 동조현상의 발생은 무엇보다 생활반경, 시야각, 준거계 등 장(場) 범위와 폐쇄성, 장내 권력/위계의 장악강도와 크기, 피실험자의 그에 대한 장-의존도[: 이 제3 인자를 집중 천착해 항상 독립적으로 사유하는 비판적 자율이성/의식의 훈련을 강조한 것이 바로 Arendt(적 경로)]라는 요소들에 의해 지배 규정된다는 확립된 정설에 의거해 종합적으로 판단컨대, SPE 수행 과정에서 비록 다소의 과장이 있었더라도 그 결론 자체까지 완전한 날조로 평가되지는 않았기에 인용했던 것이므로 혹여라도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저의 졸고들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따듯한 연관언급들에 대하여는 감사하고 있으며, 그에 보답드리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정진해 나가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믹솔로지에 대하여 -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사유와 미학
데이비드 건켈 지음, 문순표.박동수.최봉실 옮김 / 포스트카드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초고 memo 작성 중]





I. Baudrillard는 어떻게 완전히 포획당한 Impotence로 전락해버렸는가?


1. 편견

이런 류의 논변들이 가진 가장 핵심적인 모순은 첫째 그것이 도대체 실재계란 무엇인지조차 도무지 이해하지 못 한 채 완전히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적 탁상공론에만 빠져서 신나 있다는 것이고,
둘째 그나마도 아직 고스란히 전적의 세계 안 Platon(주의)적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채로 그것을 중심문제로 설정하고 싸우려듦으로써 그 공리계 안에 적과 함께 갇혀버린다는 점이다.
그러나 만약 복제(자)가 열위의 epigonen이라는 부당한 편견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매우 불쌍한 존재들이 더이상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이미 그 복제(자)와 Remix가 완전히 새로운 인지자본주의 시대에 착취의 기본 골격과 구조(를 형성하는 지배자)들이 되어버린 지 오래라면 그 모든 한심한 예찬론들은 도대체 어찌 되는 것인가?


2. 인지 착취

인지자본주의 시대 Platform 경제를 구축하는 (새로운) 노동 착취의 구조 및 mechanism과 생각없이 그것들을 정당화해주는 피상적 논리들

2.1. 문제는 생산과 노동이 아니고 유통판매와 Marketing이다??
: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받는" 모든 문제적 유형들


표절

대학원생들을 혹사시키고 착취하는 교수들
조영남 유형

가난한 예술가/창작자들에 기생, 착취하는 중개상들과 그 Platform화(, 특히 음원site들)

Remix의 본격/본령으로서의 언론 방송

Remix의 궁극으로서의 Coordination과 Curation
그리고 그 Portal(,) Platform화

Remix의 Remix로서의 인수합병M&A와 구조조정


Media Portal이 Remix해내는 Spectacle (/) Phantasma(goria)로서의 세계와 Reality, Ideology
: Remix된 Mosaic Stained-glass 세계상

새로운 조절양식과 통치술; 행정(/)치안의 technology로서의 Remix



2.2. 인지 착취의 주요 양식과 기본 구조들

2.2.0. Media노동과 Platform (인지) 노동 (/) 생산 양식
: 벌집에 꿀을 채워주는 일벌들의 무급/부불노동( 비가시화=감추기와 자연)화

생산과정에 참여한 모든 기여노동을 무시하고 오직 유통망에 성공적으로 올라탐으로써 거래/매매 가능하게 된 최종 가공/유통상품(; 주로는 상장상품으로서의 유통망과 Platform 그 자체)에만 모든 과실이 독점적으로 전유되는 Platform경제의 전형적 문제를 정당화해 줌으로써 최대폭으로 악화시키는 논리


2.2.1. 모든 인지 노동과 생산물들의 분절과 파편화, 분업적 배치의 지구체계(화) 및 초미세화

2.2.2. Remix : 채굴mining과 조립가공, 재배치, 유통logistics

2.2.3. 그 모든 공정의 초미세분절 및 초거대규모화와 자동화, 인공지능 Program화

2.2.S. 전형적 (인지) 노동 소외의 반복으로서의 Remix
: (인지 생산물 및 생산자/주체로서의) text 내적 주체 논리와 PLAN, 의지의 무시, 왜곡/곡해, 해체와 파괴 및 수탈, 탈취로서의 Remix의 소외성 측면들




II. 발로 뛰며 현장을 누비던 ’빚나는 기자정신’을 잃어버린 그들은 어떻게 기레기로 전락해버렸는가?

갖다쓰기/복제(행위)들의 복잡다양성을 무차별화하는 단순논리들
; 모든 복제와 재배치 행위들은 등가적인가?


1. 갖다쓰기들의 다층다양성1
---원본자원의 인지등록
1.1. 누구나 알고있는 공유지에서 공유자원 나눠쓰기와 상대가 모르는 비밀정원에서 나만 훔쳐쓰기
; Sampling과 표절의 본질적 차이로서의 인지/정보 비대칭

1.2. 생산력의 공유를 위한 철저한 자원공개와 자원등록의 의무윤리



2. 갖다쓰기들의 다층다양성2
---그 모든 복제들, 특히 그 효과와 보상에서의 평등과 대칭성 검증
2.1. 효과
복제-편집의 다층성과 독창성 및 예술성 가치/평가 상의 격차들
; 게으르고 값싼 표절과 인지균열로서의 충격을 자아내는 ’예술적’!! 재배치를 구별 못 해내는 무능한 복제론

2.2.보상 ; 화폐 또는 상징자본의 분배체계
인지상품의 복제와 유통망을 관통하는, 건재하거나 오히려 격화되는 비대칭 구조들
유통 수단들에의 접근성 및 사용-소유권 격차와 이를 추동하는 주목 경제

(인지)노동의 집단화-복잡화 경향에 역행하는 양극화 논리로서의 인지적 노예근성과 식민성, 사대주의,권위주의, (개인적) 영웅주의, 대의대표주의




단순한 기술복제시대를 넘어 극단화된 자동화, 인공지능화, 초연결시대가 요구하는 복제행위의 새로운 (노동)’윤리’에 대한 고찰이 원천적으로 박약한 데다 번역진들의 특정 연고와 의도에 의해 이러한 경향은 아예 제목에서부터 ’윤리’가 ’사유’로 대체되는 등의 작심한 오역과 해설 등을 거치며 극대화된다. 이 정도 수준의 작정이라면 원본이 그대로 보전된 완역인지 (특히 ’윤리’ 관련부가 집중) 훼손된 Remix인지 의심하지 않을 길이 없게 되어버리며 이 과정에서 진정으로 훼손되는 것은 원본이 아니라 신뢰와 우애(의 가능성)이다.




III. 인지노동의 집단화 시대를 촉진하는 분배체계

Platform 경제의 착취양식을 돌파하는 최초의 일경로인 Block-chain technology의 본질

Block-chain technology의 고전적 형태인 복제(거래)장부로서의 각주와 참고문헌목록, ending credit



Remix와 가치법칙 ; Copyright와 Copyleft

그리고 Copyfarleft와 communism으로의 섬세하고 성공적인 이행을 위한 물적 (선행)조건들

: 결론적으로 현재의 지적재산권 법체계가 철저하게 최종상품의 저작권 보호에만 촛점이 맞춰져 있는 상황에서 Remixology류가 주류 담론과 ideology로 확산되면 모든 (과정 및 요소적) 인지노동은 철저한 착취와 혹사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밖에 없게 된다는 점에 대한 각별한 주의와 경각심이 필요하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악령의 목소리를 듣는다 - 소크라테스, 철학적 욕망의 기원에 관하여
백상현 지음 / 에디투스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갈수록 너무나 이 두 소회로 집약되어 간다는 고백을 이제는 도저히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Lacan의 구멍(들)을 거론하자 갑자기 공집합은 언제나 유일무이한 일자일 뿐이라며 얼버무려버리다니..... 

 
당연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의미의 공집합을 '실재(계)'라 부르지 그 공집합을 가리기 위한 환상의 장막에 불과한 ideology들과 지식들에 뚫린, 미처 가리지 못 한 틈들과 균열들까지 공집합 자체와 혼동하며 갯수조차 헷갈리진 않으니까.......

 
 
더구나 원래 Lacan의 Seminar VII과 XI 등을 중심으로 전기 Lacan만 집중검토해 매우 우울증자적으로 해석된 in/ad  nihilo Lacan주의만을 가지고 그 허무와 우울, 고독감을 견디기 위해 (여전히) 예술에만 천착해 오다가 근년에야 Badiou와 여러 국내적 계기들을 경유하며 급격하게 Post-structuralism적, 그러나 실은 Post-modernism적(으로 해석된) 후기 ex nihilo Lacan주의로 급선회해서 급진화, 정치화까지 동반하고 있는 그가 마치 (이제 막 처음) 새롭게 발견해내기라도 한 듯이 열정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그 주장들이 실은 신물나도록 범람하며 한 시대를 풍미할 대로 풍미하다 동시에 많은 문제들도 양산한 채 이제는 위기까지 맞고 내리막길로 접어든 지도 꽤나 되어간다는 사실을 아직 절감하지 못 한 채 그에 대해서는 어떠한 문제의식도 반성/비판의식도 못 갖고 있는 사태와 깊은 관련이 있었으나 매우!! 넌지시 표현되었던 첫번 째 항목에서 그 구멍의 내용들과는 하등 상관도 없는 갯수 문제는 전혀 핵심이 아니었는데도 말꼬리나 잡으며 넘어가는 것도 모자라, 그나마 여건 상 가리고 가려 뽑은 훨씬 중요한 둘째 항목에 대해선 아예 이해조차 못 했다니.....

 
 
(여담으로 덧붙이면, 사실은 이 하등의 관계 없는 갯수 문제도 만일 실재(계)가 동시간대의 모든 공간과 차원들을 무한히 채우고 있는 시공간적으로 분절/분기된 복수의 평행우주(군이)라면 그가 기대하듯이 그렇게나 자명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기대/가정된 자명성'( 특히 무정의 용어와 공리 등)은 그 자신은 물론이고 수학 전체의 치명적 결함이기도 한데, 우리는 새로운 속성들의 parameter들을 도입하거나 집합들 자체를 원소로 갖는 집합군, 또는 집합 차원 등을 정의함으로써 부분집합을 갖는 공집합을 얼마든지 새롭게 창안할 수 있고, 이에 기반한 새로운 집합론을 구성할 수도 있으며,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수학 또한 전혀 조금도 예외적인 '지식'이 아니기에 수학(화) 그 자체만으로는 어떠한 진리성도 보증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전형적인 형식성으로 인해 Lacan적으로 분석된 정신구조의 반토대주의 frame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식분과라 할 수 있다.

ex. 집합들 자체를 원소로 갖는 집합에 의한 model 구현은 현재의 수학으로도 일정 정도 가능한데 이렇게 전개된 근사 model의 일례는 (비록 현 수학 구조 상 (단일차원 공간에서는) 단 하나의 한계를 내포할 수 있긴 하나) 이를 테면 아래와 같다.

Φ,  {Φ},  {Φ,{Φ}},  {Φ,{Φ},{Φ,{Φ}}},  
{Φ,{Φ},{Φ,{Φ}},{Φ,{Φ},{Φ,{Φ}}}},
{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
{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

......................



(이 하나의 한계에 대해 그가 알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별 의미없는 (한계의) 본질적 의미에 대해까지 알 수 있을지는 솔직히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 전개를 이용하여 이하처럼 정합적 정의로의 확장도 가능하며, 이 정의를 이용해 '집합차원'이나 '차원집합' 같은 새로운 수학적 개념의 창안이 가능함.


     Φ(^0)=Φ={}

     Φ^1  ={Φ}={{}}

     Φ^2  ={Φ, {Φ}}={{}, {{}}}

     Φ^3  ={Φ, {Φ}, {Φ,{Φ}}}={{}, {{}}, {{}, {{}}}}

     Φ^4  ={Φ, {Φ}, {Φ,{Φ}}, {Φ,{Φ},{Φ,{Φ}}}}

     Φ^5  ={Φ, {Φ}, {Φ,{Φ}}, {Φ,{Φ},{Φ,{Φ}}}, {Φ, {Φ},{Φ,{Φ}},{Φ,{Φ},{Φ,{Φ}}}}}

     Φ^6  ={Φ, {Φ}, {Φ,{Φ}}, {Φ,{Φ},{Φ,{Φ}}}, {Φ,{Φ},{Φ,{Φ}},{Φ,{Φ},{Φ,{Φ}}}}, {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

     Φ^k  ={Φ, {Φ}, {Φ,{Φ}}, {Φ,{Φ},{Φ,{Φ}}}, {Φ,{Φ},{Φ,{Φ}},{Φ,{Φ},{Φ,{Φ}}}}, {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Φ}}}}}, .............}


((이 집합군 연산에서 (공집합의 특성 상 특히 더) k→k+1로 대체 치환된 정의도 역시 정합적일 수 있음.))





또한 보다 simple하고 아름다운 solution으로 n차원( 수리공간에서의) 공집합은 n개의 각차원 공집합들을 (하위구성) 원소로 갖는 ’공집합들의 집합’으로 정의함으로써 현재의 수학과 무모순적이며 결함없는 전개를 할 수도 있다.

    Φn={Φi, Φj, Φk, .....}  (단, n=i+j+k+.....)


또는 차원 대신 집합Vector 개념으로 발전시킬 수도 있는데, 이 계열 solution들의 핵심 idea는 '공집합' 자체를 존재론적 다층성, 중층성을 갖는, 하위 요소들의 복합구성체로서 재구성함으로써 분절/분할 가능한 개념으로 변형/확장시켜서, 하위 공집합 요소와 그것을 원소로 갖는 상위 공집합이 동시에 원래의 공집합 정의를 모두 만족하는 구성체( 관계)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






 
게다가 이렇게 Post-modernism적 Lacan주의가 Socrates 해석으로 연역될 때 필연적으로 봉착하게 되는 좀더 중요한 aporia 중 하나는 차라리 다음과 같은데, 


그 Socrates가 Post-modernism의 진정한 기원으로서의 Sophist들과 전혀 분별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가장 증상이 심하거나 또는 (/) 바로 그 점 때문에 동시에 가장 충실한 Sophist로 등극하게 되는 반면, (국가 이성의 기원으로 지목되어 온) 수제자 Platon과는 도저히 화해 및 양립 불가능한 불구대천의 대척점에 서게 되며, 따라서 왜 그가 Sophist들과 대립했으며, 생전부터 그의 주요 제자들이 대부분 반민주주의자들이었는지 등등을 전혀!!! 설명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진짜 문제는 이런 태도와 행위들의지속적 반복을 통해 그가 자신이 행한 모든 급진적 주장들을, 심지어 방금 전 그렇게나 힘주어 역설한 (이를테면 가장 직접적으로는 ""Freud로 돌아가자"는 Lacan의 구호가 Freud의 구멍을 찾아내야 한다는 뜻이었다면 Lacan을 공부한다는 것은 Lacan 자신의 구멍을 찾아내는 작업이어야 한다" 같은) 바로 그 주장들까지도 스스로 철저하게 배반함으로써 그것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던 상대를 심하게 모욕한다는 사실이다. 

일렁이던 황당감은 여기서 그 절정에 달하게 된다.

 
 

 
P.S.1

그리고 이주향 같은 사람이 그것도 제1 전국방송에서 "'발명'이요??? '발명'이라고 하는 '선생님의' 생각이 너무나 놀랍고 새로워요!!"라고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경이로워하고 있을 때, 그래서 상대가 당연히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전제할 수 없을 때는, 아무리 Copyleft 입장에서 관용한다 할 지라도 최소한 그 오래된 발명철학의 원작자가 Negri와 자율주의 계열 그룹이라는 사실 정도는 반드시 밝혀줘야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그 땐 그건 미처 몰랐고 blog에서 읽은 거라 그런 식으로 여기저기 막 갖다 써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기라도 했던 것이란 말인가.

 


 
P.S.2
이하는 "의미의 공집합 '실재(계)’ = 환상의 장막에 불과한 ideology들과 지식들에 뚫린, 미처 가리지 못 한 틈과 균열들"이라고 주장하는 분의 댓글에 달아드렸던 명료한 상세 답글인데, 이 분이 댓글 전체를 삭제해버려서 동일한 혼동을 겪고 계실 의외로 많은 분들을 위해 간략히 복기하여 추가키로 한다. 




가상계라는 Stained glass 창문에 나있는 구멍과 그 창문 너머에 있는 실재(계) 


가상계의 장막

[가상계의 광의와 Deleuze-Massumi적 협의

(THE)
    ideal         상징                                             광
                    상상                                             의
    virtual    =    가상 (협의)                                             의

    possible                                                                가                   
                                                                             상
    potential                                                                계

    reality    = 見実[뵐현,볼견]/感実(/顯実)

               : 감각/경험된 현상적 겉보기 실재


    real      = 실재

    actual   = 現実 : 현행(화된)/실현(된) 실재
                  =確実(在) : 확정된 실재

    material
]





분절과 가산성, 그리고 그 역전!!




백상현이 (압축??)반복하는 Lacan주의의 발달 Pattern과 전망


그는 실지로 공집합을 언급할 때 "의미의"라는 필수불가결한 한정사를 완전히 빠트렸는데, 본인은 실수 등으로 주장할 지 모르나 이것이 바로 Post-modernism적 무의식의 전형적 증상 중 하나이다. (의미,가치, 목적은 모두 Homo sapiens종의 대뇌가 꾸며낸(, 또는 긍정적으로는 창조해낸) 환상 관념에 불과하며, 따라서 ’의미’ 자체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의미 없음’도 전혀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절대적) ’없음/無/空’ 자체도 너무나 인간적인 관념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지만 실재(계)는 공집합이 전혀 아니고  오히려 시공(과 (암흑)Energy)의 존재 그 자체로 충만하게 꽉 채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Stained glass 창 너머에 가만히 누워 있는 절대 정적과 침묵의 바다, 거대한 암흑의 벽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 그 창문을 박살내고 난입해 들어오려는 타자들의 세계라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hizome 2018-02-28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히 ’실재계의 난입’을 강조하는) 후기) Lacan주의 노선 자체와는 충분히 협력도 가능했겠지만, 본문과 같이 여러 가지를 이런 식으로 열심히 베껴먹으면서도 진지하고 성실한 대화는 회피하는 완전히 이중적 태도의 반복 때문에 애석하게도 더이상의 개인적 협력은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