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또는 알튀세르 - 이데올로기적 반역과 반폭력의 정치를 위하여
최원 지음 / 난장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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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기다리던 책이었는데 드디어 출간되었네요.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하며 이하는 이를 기념하고 본서(의 의미와 중요성 등)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다른 채널에 이미 ’2013년 12월에 게재했던 글이지만 몇가지 중요한 착상들을 제시하면서 당시 반응도 나쁘지 않았기에 일단 그대로 옮겨 싣습니다.

당시는 Zizek 을 필두로 소위 (Slovenian) 후기 Lacan주의 좌파가 국내에 소개된 이후 Zizek 최초 방한 등 엄청난 각광을 받던 시기로 거의 찬양 일색에 현재와는 여러 국면 상 미묘한 차이가 있었고 중심 문제도 당시는 ’Lacan-Zizekian solution/paradigm에 대한 (정밀한) 좌파적 평가와 대응’에 가까웠었기에 이 국면 변화와 차이들에 대한 개정 시도는 가능하다면 추기 형식으로 첨가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0.

    본 주제는 이미 일본에서의 선례를 통해 실증된 바와 같이 향후 국내 (및 국제) 이론 정세에 있어서 Zizek(ian들)의 운명은 물론이고, 실재계 및 (과학과) ideology(의 외부) 문제에 대한 입장 등을 둘러싼 post주의-문화이론 진영, (Balibar-)Zizekian 대 (창조/비판/초월적) ((신))실재론 계열의 (귀환) 성패 여부 등등을 포함하여 주요 변수들을 결정할 매우 심대한 잠재적 폭발력을 내포하고 있는 일종의 (정치)철학 및 정신분석학 상 근본문제(, 그 현대적 version)를 형성한다고 판단되기에 약간의 주요 관련 사항들을 첨부하고자 합니다. [이하 본문 경어 생략]




1. 제1논점에 대하여

    "인셉션인가, 호명인가"라는 전체 제목 바로 그 자체에 해당하는, 전체를 장악한 부분으로서의 이 제1논점은 사실 (이하의 다른 두 논점에 비해) 그렇게 실재적 중요성을 갖고 있다거나 위협이 되는 논점으로 보기 어려우나 원천적으로 Althusser : Lacan 논쟁 당시 Althusser 측의 대응 전략에 약간의 오류가 있었고, 두 논점보다는 상대적으로 (Slavoj )Zizek=(Mladen )Dolar(=(Terry )Eagleton) 진영의 비판적 문제 제기에도 일정 정도 합리적 핵심과 더구나 약간의 난해성까지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일정 부분 Althusser의 패배나 치열한 백중전처럼 보일 수도 있는) 가장 대표적 (제1)논점으로 간주되어 온 경향이 있다.

(

당시 Althusser의 대응에 오류가 발생한 가장 큰 원인은 아무래도 (이후 Foucault의 방법적 실천에 의해 대표적으로 극복/복구되는) 당시 구조주의의 역사적 오류로서의 반역사주의적 사조/사고방식의 과잉, 특히 모든 역사((주의)적) 고찰을 목적론으로 등치시켜 비판하는 과도한 일반화-단순화의 오류와, 더불어 그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초기 구조주의적 발생론에 의해 오염된) 발생학 일반에 대한 ((무의식적)) 편견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초기 구조주의적 발생론'이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데 

첫째는 초기 Cremonini에서 특징적이며, Saussure와 Levi-Strauss의 원-구조주의에서 강조되는 모든 구조들의 동심원적 유사(발생)성, 즉 부단히 확장되는 동심원적 무한 연쇄 구조(로서)의 발생론이고, 

둘째는 Lacan의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에 특징적인 주체 형성의 내적 거울/원환 구조, 주체와 대상 간에 형성되는 욕망의 원환 구조, 즉 "라캉이 욕망하는 주체의 형성을 설명하면서 분석하는...환상공식( ⃟ a)에서 빗금 쳐진 주체와 대상 a 사이에 삽입하는 돌아가고 있는 사각형의 구조"[from 최원](로서)의 발생론이다. 이 때문에 Althusser는 발생학 일반에 대해 원환의 반복(성)이라는 편견을 갖게 됐고, 이러한 반복성에 대한 제1논점에서 즉각적으로 발생론이라고 반비판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하지만 이 논점에서 제기된 비판 자체에 대한 본질적 답변은 오히려 주체의 형성과 변화/변형( 기제;mechanism)에 관한 사유인 발생학적 접근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결정적으로 Althusser 자신 대신 그 제자들, 즉 (기관-신체론과 '-되기'의 주체-변형론을 포함하는) Deleuze에 의한 주체의 (내적) 개체 발생학과 Foucault에 의한 주체의 (외적) 계통 발생학에 해당하는 ((각종 규율 및 훈육 장치 등) 주체 (생산 장치들)의) 고고학과 계보학 그리고 주체의 해석학 및 주체 생산의 technology론 등을 통해 이미 거의 완전한 형태로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특히 신자유주의 (위기) 국면 이후) 이 논점과 관련하여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더욱 중대한 치명적 문제, 혹은 남겨진 과제는 (거시적) 대안/대항 주체의 대량생산 공법, 공정과 technology 개발/발명 과제라는 점이  반드시 특기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하 제2논점과 제3논점은 사실 매우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로 궁극적으로 하나의 단일한 근본문제로 이어진다. 

2. 제2논점에 대하여 : Balibar의 후퇴와 Zizek화, 그리고 정치의 신학화를 초래한 미묘한 이단점 또는 접점으로서의 ideology=정신(분석)의 외부 문제


3. 제3논점에 대하여: (그에 대한 모든 비판을 유효하게 하는) Zizek의 급소

Zizek(=Badiou)의 공허한 관념론( 경향)의 뿌리, 기표(/)구조 중심의 공백, (그(들)의 '공산주의'라는) 빈 기표, (그) 장막 뒤의 (궁극적) 부(존)재

자신의 아버지를 유물/실재론이라 착각하고 있는 관념론 계보의 장자(들)


    일본에서의 실례




    그리고 최근 국내 비판들의 경향례


      국내 사민주의자들의 비판 ; 홍준기의 예

          홍준기, "지젝의 ‘공산주의’가 공허한 이유"

              , LE  MONDE  diplomatique 한국어판 63호, '2013/12/11

             @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479 .


     전통 (구)좌파적 비판들

         박가분, "교양주의 좌파들의 답"


S. 결론 : 정세 전망과 Zizek(ian 진영)에 대한 전략적 입장의 결정.

S.1. (사상전의) 정세 전망

    한국에서 다소 특이하게 폭발적인 Zizek의 인기는 우리가 따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아도 그리 오래지 않아 사그러들 가능성이 농후하다.

    a. 고질적인 대중의 자생적 권태와 피로감: 

대중의 인기 감정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더구나 현재 대규모 청중의 대부분은 여러 경로로 확인되듯이 그저 단순한 호기심에 몰려 들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고 그들의 얄팍한 호기심은 곧 자기-기만적으로 매우 쉽게 충족되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

    b. 이와 반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비판자들의 Zizek 연구는 어쨌든 나름대로 점차 심화되어 실체(적 진실)와 (치명적) 급소들에 가까이 근접해 가면서 국제적 평균 경향(성)에 도달하게 되고, 그 평균도 '핵심적 비판들의 확산'에로 점근선을 그려가게 될 것이다.

    c. 철학적 사유( 방법)의 깊이와 pattern의 내적 한계: Zizek은 이미 세계적 석학이자 동시대 생존 지성들 중 가장 주목받고 있는 왕성한 활동 철학자이지만 Deleuze등의 철학사적 독창성과 심오함에 비견하여서(만) 드러나는 제한적 면모이겠는데, 그의 (사유 (및) )방법적 특질 내지 본질은 정밀한 독해와 예리한 비평, 적확한 적재적 인용으로 대표되는 사상-정보, 사람들( 간)의 광범한 망라적 연결, 즉 (hyper-)link라 할 수 있고 이런 면에서 그는 후술하겠지만 (방법론적으로) Derrida의 계보에 속하며 좀 더 정확히는 Linkage 시대의 Derrida, 또는 'linked Derrida'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상기 홍준기는 다소 경박해 보이나 일면 유사한 언급을 하고 있는데, 이런 류의 관측에 방증을 덧붙이면, 예를 들어 그의 경제(분석)론은 대개 Maurizio Lazzarato, Franco Verardi, Carlo Vercelone 등등 (Italian) 자율주의자들의 생명자본주의-인지자본주의론( 인용)에 크게 (사실은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communism론은 홍준기의 생각처럼 완전히 공허한 관념이나 공백의 빈 기표만은 아니어서 최근의 논고들을 잘 읽어 보면 나름대로 약간의 구체적 진전을 보이고 있기도 한데, 그러나 그 진전의 핵심 대부분도 실은 Negrian( 자율주의자)들의 '공통적인 것', '공통재', '공유재', '(network )공유지' 등을 중심으로 한 '공통되기'로서의 (새로운) communism론으로 부터 온 인용( 또는 도용)에 불과할 뿐이다. (이 경제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정의는 작은 첫 걸음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심대한 첫 걸음이다. 계열 내에서는 operaismo 시기와 post-operaismo 시기를 나누면서 사상(사)적으로는 (자유, 자립 등을 기치로 하는) 모든 pan-anarchism과 communism 계열을 나누는 근본적이고 '위대한 전환'이기 때문이다.) Zizek 본인은 Negri에 대하여는 제국론과 그에 기반한 Europe 통합 (헌법) 찬성 등등의 오류 때문에 강한 거부감을 표하고 있지만 그 (동료) 후학들과 제자들의 (이론적) 성과에 대하여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주요 참조(점으)로서 폭넓게 인용/수용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다시 말해, 그의 communism론은 Badiou와 Negrian/자율주의의 연결적 인용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홍준기가 무시했고 우리도 간과하기 쉬운 중요한 사실 한가지는 그 인용과 비평(적 comment)의 놀라운 열정적 광범성과 적확성이다. 그(의 방법)는 일개 독서와 인용, 비평(을 하고 있는 것) 뿐이지만, (그것을 광적으로 수행하는) 광적인 열독가이며 연결자이기 때문에 어떤 반열에 오를 수 있었거나 있는 것이다.


    x. 반경향의 변수들 첫번째는 (위 c항 후반 요소에서 기인하는) Zizek의 가소성과 유동/유연성이다.

Zizek의 체계는 변화의 속도와 폭이 꽤나 큰 편이고 더구나 항상/여전히 모색 중이며 무엇보다 대단한 열독가, 교신자에 엄청난 다(산)작가이자 배우, 감독이고 결코 만만찮은 논쟁가로서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하는 경이적인 활력/역능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제기되는 비판들에 어떠한 입장(변화)과 반론(/)반응들을 취해 나갈지는 상수항이 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많지 않아 보인다.

심지어 사유의 깊이, 체계 및 논리의 완전성(이 반열에 오르건 안 오르건), 한마디로 실력과 전혀 상관없이 대중문화의 좌파 icon (/) 연예인으로 지속적 인기를 구가할 수도 있다.

    y. 정치경제적 정세 변동



S.2. 전략적 입장

S.2.1. 전략적 과제와 전선의 배치

    a. 절대적으로 더욱 중요한 대적 전선은 언제나 신자유주의와 그에 완전히 포섭/포획된 (정책적) 대리 수행자로서의 자유-사민주의[also by 박노자, 북구 실정들에 대한 비판적 보고]

    b. (자유±사민주의의 완전 포획과) 좌파들의 지리멸렬 : 구조적 위기에서 몰락과 죽음까지

    c. 반자본/반신자유주를 위한 급진 좌파들의 대대적 단결과 협력의 절체적 필요성


S.2.2. 동원 가능한 자원들 \ 그나마 남은 극소 우수 자원으로서의 Zizek

    상기의 모든 한계와 오류들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우리의 돌격대장 Zizek의 장점들은

  a. 현재 전 세계 대중들이 가장 관심을 집중해 귀 기울이고 있는 (거의 유일한) 급진 좌파

  b. 뛰어난 전투성들; 탁월한 논쟁력과 연구+저술력, 전투적 문제의식, (그나마) 현실 정치 참여를 감행하는 실천적 (국제) 행동주의 철학자

  c. Lacan주의의 본질을 의심케 할 정도로 원래부터 실망스러웠지만 최근 보수주의적 전향을 노골화함으로써 더욱 큰 실망을 선사하는 Lacan의 수재적 수제자, 정통 적자이자 사위 Jacques-Alain Miller와 달리, Zizek은 이상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Lacan주의 좌파로서 정신분석의 비판/전복/좌파적 재해석과 적극 활용을 주도.

  d.


S.2.S. 전략적 입장 \ 대응 방침

현 국면에서 어렵게 일어난 급진 좌파 및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communism에 대한 관심과 인기의 불씨를 섣부르게 비판이란 미명으로 짓밟아 꺼(뜨려) 버린다고 해서 대의를 위해 과연 어떤 유익이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주의와 (자기) 반성(적 회개/회심)을 전제적 기반으로 (하는),

Zizek(ian들)에 대한 1차원적 반작용으로서의 대립/대결 의식 극복과      적극적 공동 방어→상호 혁신하는 협력적 보완 또는 비판적 지지

 




Z. 남겨진 문제


    그러나 이러한 전략적 결정 뒤에도 여전히 남는 미해결의 (이론적) 과제는 '과연 우리에겐 (정치신학적) 광신도가 되는 길[by Alberto Toscano]밖에는 없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특히 Foucault와 Feyerabend 등 anarchism적 인식론에 의한) '현대 (주류) 인식론의 붕괴'가 해결되지 않는 한 본질적으로 답변될 수 없는 그야말로 지난한 난제와의 전투가 될 것이다. 게다가 바로 이러한 맥락이 (근본주의자로서 급진좌파의 실질적 근본 대안의 (발명) 부재 문제와 함께) 현 시대적 국면에서 'Marx주의의 위기', 그 변형(/)확장형인 '좌파의 구조적 위기'의 (철학적) 근본 원인을 형성하고 있기에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우리의 (정치-철학적) 입장, 또는 Marx주의의 특권적 지위는 과연 어떻게, 무엇으로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인가?'









A. 보론

A.1. Cremonini와 구조주의

    그런데 본 주제와 관련하여 얻은 또 하나의 재미있는 착상이자 의미심장한 발견은 Cremonini의 개인 작품사가 전체 구조주의의 역사라는 계통 발생을 압축하는 개체 발생 과정이었다는 사실이다.

초기 Cremonini의 작품들은 정확히 Saussure와 Levi-Strauss적 초기 (동심원/동일성) 구조주의와 (중기는) Lacan의 거울(/원환)-구조주의를 형상화하고, 후기 작품들은 Althusser적 후기 (유물론) 구조주의를 제시한다.



A.2. 구조주의의 계보학 (가설)

A.2.1. 핵심 가설

    가설의 핵심은 구조주의 계보(학)에 2개의 기축 판별선이 있는데, 

그 제1축이 구조 동일성 강조 대 구조 간 차이 강조의 대립, 그 대립의 변형/구체형인 동일 구조로서의 동심원(적) (구조) 중심의 존재 인정 여부이며, 이에 의해 (초기)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가 근원-핵심적으로 분기하고,

 

제2축이 바로 상기 (본문) 논쟁의 제3논점에 의해 분기되는 실재론=유물론 대 관념론의 대립으로 (후기 구조주의를 포함하여) 구조주의 내부에선 구조 중심을 빈 공백으로 보거나 언어(/언설/담론) 등(으로 보거나) 평평한/(거울-)대칭/등가적인 다른 기표(/)구조=체계로 보는 등에 의해 결국 (현실/실재적) 참조점=누빔점을 소실/제거하는가(: 관념론), 본질적으로 비대칭/비등가적인 즉 더 무거운 다른 구조=체계나 실재(계), 물질 등으로 보는가(: 유물론)에 따라 분기하며,

탈구조주의에선 (동일(한 단일) 구조 중심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구조 중심이 아니라 구조들 간 관계가 평평하고 대칭/등가적인 것으로 보는가, 비대칭/비등가적이어서 (중층의) 심급을 구성한다고 보는가에 따라 분기한다. 즉, 요약하면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를 통틀어 이론 체계가 아무리 화려하고 복잡하더라도 구조 중심(에 참조점=누빔점)이 없거나 모든 구조들의 관계가 평평하다고 상정하여 중심이나 심급 자체가 없으면 post-modernism 등 관념론의 계보가 된다.



이것이 본문 주제와 관련하여 가지는 함의는, 결국 구조주의 내부에(서)도 유물론 전통과 관념론 전통이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제3논점의 실질적 의미이고 이런 점에서(는) Althusser는 유물론적 구조주의 계보, Lacan은 관념론적 구조주의 계보를 각각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Saussure(~Lacan)의 영향으로 언어/언설/담론 중심(주의)적이었던 구조주의는 관념론적 (초기) 구조주의,

이후 이에 대한 Althusser 주도의 본격 반성과 비판으로 개시된 변형기의 1단계가 유물론적 후기 구조주의, 2단계가 구조=체계=장치들 간 차이의 강조( : (이행기 또는) 전기-탈구조주의)와 아예 그를 넘어 관계 자체를 무시하고 구조주의 전체를 폐기하며 완전히 절연하는 (3단계) (후기-)탈구조주의기(/postmodernism)~비구조주의기)로 (구분해) 계보화해 볼 수 있다.


구조주의 계보에서 Althusser가 가지는 비판/이탈의 의미는 '이질적 구조(들)의 발견'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질적 구조'란 바로 Cremonini의 후기 작품들이 극명하게 가시화한 image들에서처럼 단일한 유사~동일성의 동심원 구조 속에 포섭되지 않고 (항상) 그 중심 또는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구조/장치/세계를 말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다시) 두 가지 의미를 가지(며 계보의 발전사에도 추보적으로 반영되)는데, 

첫째는, 그리고 처음에는 대타자로서의 (객관적) 실재계이고/였다가

나중에는(/)둘째로 구조 외부의 이질적 구조'들'로서의 타자 일반(들 간의 차이(와) 관계)의 발견으로 확장된다. 계보사에서는 첫째가 후기 구조주의 또는 (비언어적) 구조주의 유물론이고 둘째가 (전기) 탈구조주의가 된다.


이런 점에서 Althusser는 구조주의의 (실질적) 마지막 사상가이자, 탈구조주의의 아버지, 그 입구였다는 점에서 후기 구조주의자로 명명하는 것도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는 더 엄밀히 말하면 Cremonini적 후기 구조주의, 즉 유물론적 구조주의에서 이후 구조/체계들 간의 동심원적 유사~동일성 보다는 차이와 그 마주침으로서의 중층 심급을 강조하는 (전기) 탈구조주의로 이행해 나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탈구조주의는 구조와 체계들 간의 무차별적 평등/등가성 주장을 통해 n개의 과학론 등으로 나아가는 (언뜻 평화로워 보이지만 결국 어느샌가 신자유주의 같은 죽음의 덫에 빠지게 되는) 몽롱한 다원주의, 상대주의, 주관주의적 관념론들과는 달리 비록 (중층적) 복잡계를 구성(하지만 그러)할지라도 이들간의 ((비유적 의미를 포함하여) 특히 질량/중량-)비대칭/비등성가성으로부터 야기되는 엄밀, 엄정한 (말 그대로) "심급" "관계"에 대한 추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충실한 유물론(적 탈구조주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과도하게 단순화된 상상적 동일성 사고로서의 형이상학으로 부터 이탈과 탈주를 가능케 해줬던 결정적 요인은 (Alrhusser의 ((Marx주의적) 유물론에 깊이 새겨진)) 현실주의/실재론 (정신)이라 말할 수 있다.



(   그리고 바로 이 점에 Marx(주의)적 현실주의 실재론(으로서의 유물론)에 의해 철저히 재해석, 재전도되지 못한 Hegel주의( 변증법)의 핵심 문제도 같이 놓이게 된다. 왜냐하면 헤겔의 모순은 외관상으로는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어서 서로 구별되는 것같지만, 각 모순은 절대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소외의 계기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지위를 부여받으며, 결국 모두 절대이념에 환원된다. 헤겔 변증법에 자리잡고 있는 이러한 단선/평면적 모순개념과 '표현적 총체성'은 결국 각 심급들을 하나의 원리나 심급에 환원하는 환원주의를 야기할 뿐이다. 헤겔 자신은 한 사회의 구체적 영역들의 수준에서 어떤 지배적 모순도 인식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모든 수준이 그 총체성의 통일적 원리에 비추어 동등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주어진 상황의 복합/복잡성을 비대칭/비등가적 구조들의 심급들로 파악하지 못하는 Hegel주의 변증법 자체는 본질적으로 관념론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소위 '차이의 철학들'은 역사의 특정 국면에서 분명 진보적 긍정성을 갖는다. 다만 언제나 차이=진리 ↔ 동일/보편=폭력적 포섭의 형이상학이라는 절대화된 단순 도식이야말로 진정한 형이상학적 이분법의 적자라 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A.2.2. 보조/연장 가설

(이런 점에서 post-modernism(의 본질)을 자유주의 좌파의 관념론적 탈구조주의로 파악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무방할 수 있다 하겠다.)


((문제는 Lacan의 구조주의인데, 그는 ((제1논점과도 연관하여)) 원환의 구조 동일성을 강조하는 초기 구조주의와 (제(2+)3논점으로부터) 구조 중심(에 참조점=누빔점)이 없거나 모든 구조들의 관계가 평평하다고 상정하여 중심이나 심급 자체가 없는 post-modernism을 계통적으로 연결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Lacan))                 : 약한 가설

(post-modernism):중간 가설




  참고로 Zizek은 최근 저서 『Less than nothing』 ( 국역 : 『헤겔 레스토랑』, 『라캉 카페』)에서 Heidegger→Derrida→Lacan→(신)신-Hegel주의에 이르는 독특한 계보 가설을 제안했는데, 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Lacan주의와 Hegel주의를 연결/접합시키려는 그의 노력에 (Lacan주의의) (탈)구조주의적 계보(/)요소를 '차이의 존재론'으로 본격 추가 도입해 Hegel주의의 약점을 극복하려는 시도로 이는 본 토론회 주제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현상학→(그에 대한 비판 그러나 결국 관념론적 계승으로서의) 기호학→언어학적 구조주의 (정신분석)→다시 Hegel주의로 이어지는 철저한 관념론의 계보로는 결코 Hegel주의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고 성공적으로 구원해 내기가 그리 쉽진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 근거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a. 무엇보다 Zizek은 여전히 Lacan : Althisser 논쟁을 핵심으로 하는 (구조주의의) 계보에 대한 (역전된) 오해를 기반으로 그의 철학적 계보학을 전개하고 있고,

b. 이러한 (탈)구조주의 계보(의 도입)를 통한 Hegel주의의 비판과 개조/극복은 Althusser가 이미 그의 지적 생애 전반에 걸쳐 당시 (좌파) 지배담론이었던  Hegel주의(적 Marx주의)와의 투쟁이라는 과업으로 설정, 전개했던 내용의 반복일 뿐이며,

c. 결정적으로 그 반복에서 '차이 철학'의 전투적 계보이자 적통이랄 수 있는 Althusser-Deleuze로 이어져 온 유물론 전통, 즉 전투적 실재론 계보를 그 영향력에 대한 견제를 위해 의식/무의식적으로 배제해 버린 개악된 반복이라는 이유 등등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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