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건의 정치 - 재생산을 넘어 발명으로 ㅣ 아우또노미아총서 57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지음, 이성혁 옮김 / 갈무리 / 2017년 10월
평점 :
0. 이 리뷰는 기본적으로 Lazzarato에 대한 높은 기대 때문에 작성된 것이며, 전작까지 보여준 근원적 통찰에 비해, 본서는 다소 실망스러운 저작이라 아니 할 수 없으나, 그 원인은 문헌 자체보다도 번역의 역주행에서 오는 탈맥락성의 증가 때문으로 현재와 미래의 Lazzarato에는 해당사항이 그만큼 직접적이라 보이지 않음[1].
1.
어쨌든 본서는 신자유주의의 공포스런 작동기제에 대한 탐구가 불충분한 반면, Marx만큼이나 실패하고 더구나 포섭될 대로 포섭된 Deleuze 노선에 대해선 어떠한 반성적 성찰과 재검토도 없이 더구나 (이미 Deleuze, Derrida 등 본인들이 Marxism으로의 복귀를 역설한 시점도 훨씬 지나서) 너무 뒤늦게 고스란히 답습만 하고 있음.
세계(/)사상사적 관점에선 Ranciere 및 급진민주주의 노선과 ’결정적’으로 중요한 변별성은 미미하고 (더구나 이들의 역사적 급진성을 좀 오해하고 있으며,) 모두 소수자 정치학으로 포괄될 수 있는데다, 이 거시관점에서는 그보다 급진좌파 내부의 강력한 이론적 자원들의 양대 계보를 단순한 이분법적 양자택일의 대립구도로 파악하는 전통적 관점을 극복하여!! 종합하고 넘나들며 자유자재로 전환하고 변신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기에, (전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러나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Hegel-Marx와 Heidegger-Lacan-Derrida를 중심으로 이 통합을 모색해내고 있는 Zizek의 분투가 이런 세계사적 맥락에서는 오히려 시의적절한 많은 영감을 시사하고 있다고 평가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정세임[2].
(이 통합관점에서 Marx는 물론이지만 Hegel조차도 ’사건’을, Lazzarato도 예외 없이 흔히 (속류적으로) 오해하는 것처럼 단순한 ’객체’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차이와 ’지연’을 포함한) 모순과 틈/공백의 폭발, 난입으로 정의하고 있음.
따라서 Lazzarato식 구도에서 양자의 정확한 차이는 단지 이 모순을 긍정/낙관적으로 볼 것인가 부정/비관적으로 볼 것인가에 차라리 좀더 가깝고, 그래봤자 Hegel-Marx가 이 차이와 모순을 부정/비관적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도 전혀 아니며 오히려 변화발전의 유일한 동인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Lazzarato가 결코 말하지 않고 있는, 장막 뒤에서 이를 결정해 줄 진짜 중요한 관건은 단순히 이렇게 과(도)일반화된 관점차의 문제가 아니라 Spinoz(i)an Maoism식으로 말해서 구체적이면서도 객관적으로 각 개별 (사건의 원인인) 모순이 적대적인 것인가 아닌가; 즉 타자로서의 그 손님은 궁극적으로 이웃인가 적군인가; 개인가 늑대인가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건도 객체로 바라보는 동일성의 주체철학"이란 결코 단일한 범주가 아니며 오히려 Plato-Hebraic 보수 형이상학 전통과 그 거울쌍인 '전도된 Platon주의'로서의 Sophisto-Bergsonian[3] 인간/생물학주의적 주의주의 주체철학 등등의 혼합 image일 수 있음.)
(최근의 Communnale 사태를 포함해서) 양대 계보는 본질적으로 Hydra이자 Medusa였던 저항주체가 수많은 전투경험들을 곱씹으며 자라나 도달된 한 몸뚱아리의 Siam(ese) 쌍생아인 것이므로 이들을 양자택일의 이분법적 대립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서로 자기만이 이 몸뚱아리의 유일한 주인인 진짜 본인이라 주장하며 상대방의 목을 졸라 죽여버리는 행위에 불과할 뿐이고 그 결과는 굳이 말을 할 필요조차도 없음.
(특히, 이 상황에서 17년 혁명 이후 100 년, 68 혁명 이후 이미 50 년 간의 노력이 충분히 보여 준 교훈은 더이상 단지 어느 한 노선의 고집만으로는 상황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악화되기만 할 뿐이라는 사실이며, 더구나 이 관점으로는 최근 일어나는 일련의 세계사적 및 사상사적 격변[4]조차도 전혀 설명할 수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에 속류화에 기반/동반하는 불필요한 대립의식은 지양돼 나아가야 함.)
2.
문제는 뿐만 아니라,
소수자-되기와 소수자(/)정체성 인정투쟁의 일환으로서의 Queering과 비체되기Abjectivation as Self-abjection[Le]/Auto-abjection[Lfr.오또-아브젝시옹],
그리고 그 상위범주인 발명으로서의 Hacking/Cracking
등등은 그 자체로서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새로운 저항전술임을 부인할 수 없으나(----이 관점에서 Queering은 단지 본인도 어쩔 수 없이 타고난 정체성일 뿐이라는 기존의 소극적 피해자 호소 관점을 넘어서 정체성 체계 Hacking/Cracking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 발명 작업으로 더욱 적극적, 진취적으로 전진/전환해 나아가야 할 강력한 필요성은 있음----),
그럼에도 여기서 더 큰 문제이자 진정한 문제는 오히려 이에 대한 지배 bloc의 대응전략이 이미 너무나 오래 전에 완성되었고 완비되었으며 완숙되었다는 것으로, 이것이 전술한 1990년대 Deleuze, Derrida 등의 Marxist Manifesto/Confession의 (당시에도 아직 충분히 자각되지는 못했을 수도 있는) 진정한 역사적 의의라 할 수 있음.
따라서 이러한 선회가 Foucault에겐 훨씬 더 일찌감치 더 극적으로 나타나지만, 이들의 전-중기 노선으로서의 hacking/cracking을 넘어 최소한 이런 산발적 hacking/cracking들을 체계적으로 집적 설계 인도하여 상호협응하는--COMMUNicative-- 지속적 흐름과 운동의 일관된 거대 회로로 만들어 내는 ((total)) re(verse)-engineering[5]으로까지는 나아가지 않으면 결코 바위를 뚫을 수 없다는 반성적 문제의식이 절실히 요구되는 국면이나 단순한 개별적 소수자-되기만으로는 결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1].
아무리 각고의 노력을 통해 희한하고 기묘, 기발한 정체성 전환으로서의 소수자-되기를 계속해봤자, 체제는 단지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내버려 두고’ 혼자 애쓰다 맞고 지쳐 쓰러지고 천천히 죽어가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며, 아니면 그 중 살아남은 효용가치가 있는 것들만 일부 포획해 자원을 공급해 주고 좀 성가신 것들은 모두 신용평가 등등의 방법으로 조용히 배후에서 밥줄/돈줄을 지그시 밟아 죽음을 재촉할 수 있으며, 저항이 약할 때마다 종국적으로는 아예 노골적으로, 그들만의 성벽 밖으로 내던져버려 죽어가도록 내팽개쳐 둬도 된다. 이때 이들의 ’특이성’은 체제에 전혀!!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 하고, 오히려 때마침 이러한 노골적 차별과 배제를 아주 효과적으로 정당화해주는 기막히게 좋은 빌미가 될 뿐 아니라, ’자발적 가난’이란 자발적 낙오, ’탈주’란 (성벽 밖 황무지, 불임/불모지로의) 자발적 추방과 배제로 적극 이용될 뿐이며, 신자유주의는 그 모든 '차이'들을 교묘하게 곧 차별과 배제로 전화시키는 강력한 장치들을 탑재하고 있는 평등 분쇄 체제이기에 다시 분배를 위시한 평등과 보편주의가 절박해지는 것이고, Ranciere는 이 절규에 성실히 응답하고 있을 뿐이다.
3. 주체 변이와 다양화의 속도를 압도하는 통치 technology 발전의 '특이점과 Eigenvector'
최근간『대량살상수학무기』가 잘 보여주는 바와 같이 통치 technology는 중세, 근대까지의 고정되고 반복하는 (정체성(들의)) 체계로서 언어논리와 고전역학 및 사회원자론의 단계도 넘어선 지 오래고 이미 쉴 새 없이 유동하고 변이하는 체계로서의 열역학적 고도 수리통계 단계를 거쳐 서로 다른 장과 차원들 속에 산포한 상황과 맥락별 network체/파동들이 중첩되고 간섭하는 총체적 시공간 속에서 하나의 network으로서의 개인조차 철저하게 분할하고 해체하며 예측하는 social subatomic quantum engineering과 Big Data 복잡계 network 공학으로 이행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무리 다양체로의 변이를 거듭해 봤자 상기한 쓸모없는 '탈주'도 애초의 기대 효과조차 급감해 나갈 수 밖에 없음.
그 개인 주체 자신보다 그를 더 빨리 더 정확하게 이해하며 예측하고 미리 기다리는 체제와 'AI'!
그조차도 포기할 순 없는 상황이겠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본질적 문제를 거의 해결할 수 없음.
이런 점에서 (자연과학에 대한) 왕립과학 대 유목과학이라는 Deleuze적 도식은 완전한 허구적 대립구도에 불과하며, 이를 연장한 'Newtonian 고전물리학=절대왕정과 Fascism의 과학' vs '상대론과 양자역학 등 현대물리학=자유인의 유목과학'이라는 도식은 더욱더 순전한 허구에 불과할 뿐이다. 바로 이 잘못된 대립 도식 관념이 Deleuzianism이 결국 포획당할 수 밖에 없었던 근본적 원인의 하나이고 그와 Foucault의 결정적 차이의 본질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도식을 반복하고 있는 자는 그가 누구이든 현대성과 자유!!--차라리 신자유--, 그리고 해방의 근원적 차이와 이(에 대한) FOUCAULTIAN TURN[6]의 의미를 아직도 '전혀' 이해하지 못 한 채, 현대성의 황홀경에 압도당해 탈근대만을 갈망하고 있는 근대 원시인에 불과할 뿐이다. '차이의 정치'에 대한 일방적 찬양이라는 오류에도 동시에 빠져 있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탈근대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고 그 유연/유동성과 액체성을 찬미하기에만 여념이 없지만 현실의 변화는 이미 이들을 구시대의 유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해 Lazzarato의 국역 전작『기호와 기계』는 마치 생각을 통째로 도둑 맞은 것과도 같은 충격을 좀 받았었는데, 주제가 언급된 김에 간략하나마 특히 연관성 높은 2~3 가지 이견 정도만 약술하면, 무엇보다 전작에서의 결론적 대안도 결국 범주적으로는 여전히 hacking/cracking에 머물고 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둘째 기표적 기호와 비기표적 기호--Guattari[7]식 용어로는 특히 도표적 기호--의 차이는 사실 예전 Judith BUTLER(『젠더 허물기』)와 언어논리계 ’내!!’에서의 탈주 시도만을 강박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Queer 정치학에 대한 논평에서도 언급했던 바와 같이 사실 (Cognitive) System III와 System IV의 차이에 불과할 뿐이고,
셋째, 양자 간의 차이가 기호와 기호적 기계, 그리고 기계 그 자체 간의 차이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며, 특히 기호적 기계와 기계 그 자체(의 차이)를 혼동하면 궁극적으로 Qbits와 Quantums 그 자체를 혼동하며 신흥 Digital교의 수렁으로 빠져들어버리고 마는 (특히 Hologram 우주론 등등 일부) 양자물리학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없게 된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을 너무나 우습게 보고 맘대로 주무르고 주물하며 이렇게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지배(계급)의 과학들을 고려하면, 그에 비해 이에 맞서려는 저항의 과학에 대해서는 (아직 언어논리의 세계 속에 갇힌 채 더구나 구좌파적 패배주의 Trauma에까지 파묻혀) "가소로운 짓"이라며 그 (성립)가능성 자체를 회의하고 극구 (사라지는) '번역'자로만 머물려 하며 독자적 조직화마저 주저하고 망설이는 Balibar 관점과 태도의 소극은 성직자처럼 겸허해 보이게 만들어 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별로 사실적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싸움이라고는 시작도 해보기 전에 이미 졌다고 할 수 있고[8], 특히 국내 한 유력 Deleuzian 본좌 중 또 한 분 등이 근년에 바듀Badiou 등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도 '사건'의 철학이 유행하기 시작할 때 사건을 도저히 예측불가능한 (순간에 갑자기 도래하는) 어떤 것으로만 강조하며 객관적으로 "관조"하기 위해 한사코 사건( / )현장 밖에 멀리 머무르는 사건 감별사 되기를 흉내내고자 했던 움직임 등과 비교할때, 감히 기꺼이 사건을 발명해내려는 자율주의자들의 이 빛나는 투혼과 혁명 정신이야말로 ('사건론' 자체(만으)로는) 가장 적확한 대응이자 가히 최고의 사건론으로 평가할 수 있음.
『대중들의 공포』가 아니라 '대중들에 대한 공포'와 신격화가 문제적인 것이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주체의 번역과 사건의 감별이 아니라 그들의 발명과 생산이다!!![8][9]
(일찌기 Marx의 일갈에 따르면 심지어 철학의 임무조차 그러할 진대 하물며 예술과 정치와 교육과 정치신문을 포함한 매체(비평)활동가들 등등에 대해서라면 이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는 무능한 순교자나 비굴하고 굴종적인 내시가 아니라 차라리 Machiavelli적 King-maker이자 기사단과 호위무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죽은 신을 대신해 이번엔 선험적 대중으로 정신의 빈 중심을 메우고 있는 이들을 보면 미군과 비행기를 신으로 숭배하고 있는 태평양 군도의 작은 섬 원주민들이 생각난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 자신의 숭배 대상이 원래 그렇게 이미 주어진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존재로서 출현하기 이전에 어디서 어떻게 어떤 기제로 발생/생산되어 오고 있는 것인지는 결코 생각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주체와 대중은 형이상학적으로 완벽하게 고정된 채 이미 주어진 신성한 Text여서 오로지 정확한 번역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대상이라 생각되어 이런 주체생산공정과 technology의 발명 같은 건 엄두도 낼 줄 모를 정도로 아무리 위축되고 소심해진 겁먹은 좌파라 하더라도 최소한 주체의 변이와 새로운 주체(형)의 발생을 '가속시키거나 지연시키는' 정도의 개입과 실천은 시도해보려는 발상을 감행해야만 할 것이다.
원래 인간 자체가 그렇지만 너무나 강고하게 이미 모든 것이 완성된 채 주어져 있다고 여겨지는 대중도 의외로 ’빈 서판’[10]에 불과할 수 있으며, 현실과 '미래' 또한 예측하거나 감별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하고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성 Text, 즉 성전의 번역이 아닌 '빈 서판'[10]에 Code를 기입해 새겨 넣는 Programming과 창조/창작의 글쓰기 시도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다.
5.
※Notes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Lazzarato에게 ’1996년--영미권에선 ’2010년--의 공동 저작『Le Bassin de Travail Immatériel』(일명 BTI)로 대표되는 post-Fordism과 비물질 노동 연구를 넘어, "(신)자유주의(와의 착종교란) 현상에 대한 ’각성과 깨달음’"으로 요약할 수 있는후기 Foulcault적 대선회가 일어나는 것은『Le Gouvernement des inégalités. Critique de l'insécurité néolibérale』(Éditions Amsterdam.’2008)나, 이를 확대 개정했던, 영미권에서 내년 1월에『Experimental Politics: Work, Welfare, and Creativity in the Neoliberal Age (Technologies of Lived Abstraction)』이란 제목으로 출간 예정인 그의 ’2009년 저작 『Expérimentations politiques』(Éditions Amsterdam. ’2009)부터라고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이 저서를 구상하면서 그는 2004~5년에 France에서 그가 당시 불안정(/)유연 노동자라 개념화했던 연예산업 비정규직 종사자들의 실업보험 급여를 둘러싼 신자유주의 개혁 반대투쟁을 model로, 모든 노동자들의 행동양식과 이동성 등 자유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결정적 노동통제 수단으로 부상하는 실업보험 등 사회보험에 촛점을 맞추며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양극화, 빈곤화와 더불어 부채 문제 등 새로운 신자유주의적 인구 통제와 예속 기제 연구로 전환하게 된다.
(영미권에선 immaterial labor 개념과 precarious labor 개념의 선후관계를 좀 오해하고 있음.)
[2] 이러한 통합을 위한 영미권의 노력으로는 최근 『차이의 정치와 정의』로 국내 번역된 ’1990년 저작『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정의, 그리고 차이의 정치)』의 Iris Marion Young(US)과 이를 (교묘하게) 뒤집어 반복하며 정정하는 Nancy Fraser(US)***, Bob Jessop(UK)** 등이 각광을 받고 있음.
(*이 정정은 Iris Marion Young이 기본적 논조와 시대적 한계를 본서와 고스란히 공유하고 있기 때문인데 신자유주의의 본질에 대한 후기 Foucault적 자각이 전혀 없어 엉뚱한 나무에 대고 짖어대다 결국 신자유주의에 착종교란됨으로써 포획되어버리고 마는 진보 강아지의 운명( 안에 갇혀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특히 기만적이고 형식적인 보편주의에 불과했던 복지국가와 자유주의적 평등조차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적 공격에 동원되고 원용당하기를 시작으로... .
소위 이 '차이의 정치'란 기본적으로 소품종 대량생산과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던 Fordism과 특히 국가독점자본주의적 3차 구조에 조응하는 억압/규율적 획일주의 대중사회( 등)의 적극적 관리체제에 대한 저항전략으로서 (가장) 유효했을 뿐이다. 상기한 신자유주의 방치전략 때문만 아니라 대중, 군중과 공동체 자체가 사라지고 서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소통[통약!]불가능의 고독한 모래( / )원자로 스스로를 환상하는 Narkissist 개인들만이 넘쳐나는 현대 사회라면 어떤 새로운 전략이 모색되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미 사회의 기본적 Platformat(ion) 자체가 전환되었다는 이 사실이 (정체성) 다양화 전략이 비록 잠시나마 약간의 긴장은 초래할 지언정 더 이상 어떤 본질적 위협과 변화도 가져다 줄 수 없는 근본적 이유인 것이다. 이미 체제는 이 다양화를 수용해낼 준비가 다 갖추어져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이를 새로운 이윤과 경쟁력의 원천이자 동력으로 전유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공통적으로 양대 계보를 대립적 이분법의 택일 관계로 사고하는 수준은 다 벗어나 있는데 이러한 세계(사)적 노력들과 비교하면, ’2004년에도 아직 여전히 ’차이의 정치’에 대해서만 일방적 찬미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본서의 한계가 더욱 극명해지고, 그 한참 뒤늦은 번역소개의 의미도 좀더 드러날 것이다.
**『Towards A Cultural Political Economy. Putting Culture in its Place in Political Economy』. Cheltenham: Edward Elgar'2014.
: 이 책은 그의 평생에 걸친 역작인 Putting it in its place 3부작이랄 수 있는 자본주의 정치-국가 이론, 경제이론, 문화이론서의 마지막 권에 해당하며 그 모두를 통합결산하는 각별한 의미도 있음.
*** 이에 대해 Fraser와의 논쟁으로도 유명한 Judith Butler의 입장은 너무나도 실망스럽기 그지 없는데, 물론 SF분파로서 Fraser의 통합 Solution이 가질 수 밖에 없는 (거의 유일한, 그러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구조의 융접합/단일화 차원까지는 꿰뚫어 보지 못 하는, 이 경우 문화(적 인정), 정치(적 대표), 경제(적 분배)라는 3원/3중 교차론적 단순 병합/병치 사고방식인 건 부분적으로 사실이지만, 이에 대하여 Butler는 단지 자기 정당화와 분파 보전을 위한 변명에만 급급해 그간 자신의 (정치)경제적 무관심, (그로 인해 촉진된) 신자유주의와의 공모 등에 대해선 어떠한 반성도 없이 구조적 얽힘과 '인지적 분별', 실천적 통합( 즉 연대와 협력)이라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차원들을 전혀 구분하지 않고 뒤죽박죽 마구 뒤섞은 채 갑자기 SF적 분리/병치 교차론에 대한 최대 비판, (그러나 마치 자신의 정반대 분파인 듯 취급해 왔던) 사회재생산론자 코스프레로 도피할 뿐, 분파 간 실질적 연대와 협력을 위해서는 그 어떤 다른 대안도 내놓지 못 한다.
그에 비한다면 최소한 Fraser는 실천적 진정성에 기반해 언제나 사회와 운동 전체를 조망하며 무엇보다 연대와 협력의 방안을 고민하고 있을 뿐 아나라, 줄곧 자신의 오류를 솔직히 인정하고 수정을 계속하려는 태도를 보여 왔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Butler가 이 주장을 진심을 다해 실천했더라면 양대 계보 통합의 또 한 경로가 확보될 수 있는데, 자율주의의 Lazzarato 계열, 특히 본서의 결론부에서도 개진되었어야만 마땅할 (신)QMF; 즉, Queer Marxist Feminism이 그것으로 이 노선에서는 적극적 Queering과 비혼, 비출산 등의 재생산 파업을 통해 무급 분업 재생산양식을 위험에 빠트리고 실질적으로 파괴해 나간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체제는 초기엔 이성애 출산 가정에만, 위기가 심화되면 비혼/동성혼 불문 출산(/입양) 가정 모두에 선별적 장려/지원금 공급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려 할 것이나 어쨌든 결과적으로 재생산노동 유급화 및 '사회화'는 일정 정도 달성되는 국면으로 전개되어 나아갈 것이나 여기서도 결정적 장애는 세계화와 기업 해외 이전, 결혼이민과 이주노동자 유인, ’기계화’, 그리고 여차하면 전면적인 ’일코노미’ 체제로의 전환 카드 등이고 따라서 재생산 영역도 (특히 모든 gender의) 단결된 총파업이 아니라면 큰 효과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3] 베륵손
[4] (Hungary와 Czech Prague의 봄에 이은) 68 이후, Keynesian 복지국가체제 및 동구권 Stalin주의 체제의 붕괴 등을 모두 포괄하는 50년 간의 이 세계사 국면은 (신)자유주의 initiative epoch로 정의될 수 있고, 자본주의 4차 구조(기)에 의해 규정/조응되며, 이 종말 국면의 격변에는 정치-사상적으로는 전 세계적인 반자유주의, 반의회주의 물결이 모두 포괄되며 소위 populism의 부상과 Carl Schmitt 연구 Boom, ’시진핑 사상’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체제 전환 (시도), 각주 [1]에서 다룬 현상 등등까지가 모두 포함된다.
[5] 여기서 저항의 (주체) technonolgy, 반체제 공학으로서의 hacking/cracking과 re-engineering은 본질적으로 소발명과 대발명의 관계이며, 실천적으로는 (예술작품으로서의) 개인적 ’되기’와 예술작품으로서의 사회 발명의 관계를 포함한다.
통속적 Foucaultian[6]들이 흔히 빠져버리는 가장 큰 고질적 문제 중 하나는 개인단위의 사고수준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며 작품으로서의 개인만큼, 또는 보다 더, 다른 모든 작품, 즉 타자들을 아우르고 보살피며 훼손을 막아주는, 총작품이자 박물관으로서의 사회도 중요하다는 자각의 부재이다.
[6] 발음 문제로 ’Foucauldian’도 빈용되나 Narkissism과 마찬가지로 어원을 밝혀 적는 원칙에 따름.
[7] Guattari의 정확한 발음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유독 오해가 심한데 모든 경로로 근거들을 종합할 때, France 토착민 출신이었다면 '가따리'여야 했겠지만, Italia계(; 즉 본질적으로는 외국인)이므로 '과따리’.
[8] Althusser의 가장 충직한 제자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Balibar의 근년 저작들에 대하여 국내에서 현재 집중적인 번역과 소개 작업이 준비/진행 중인 것은 우리 사회와 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도 정말 너무나 감사하고 의미있는 일이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라도 앞으로의 면밀한 연구 검토와 실천을 약속드리는 바이며, 본고에서의 짧은 논평은 이 작업 전체에 대한 총평이나 최종평가는 전혀 아니고 단지 현 정세에 긴밀히 연관된 최대 논점 한 가지만을 급한 대로 잠깐 언급하고, 또한 이를 통해 먼저 이 작업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촉발하고 본격적 논의와 공론화를 시도한 것에 불과하므로 오해 없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다만, 이 작업 훨씬 이전부터 Althusser로부터의 (일정한) 후퇴라는 Balibar의 어떤 측면들에 대하여는 약간의 우려를 가지고 있었던 편이라, 마침 이런 저의 소회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윤소영선생님의 최근 Balibar 평가가 직후에 발견되어 이를 간략히 덧붙임으로써 진행 중인 향후 작업에서의 사전 고려에 미력이나마 작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발리바르가 최근에는 이상한 발언을 많이 한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정도가 지나쳤습니다. 2007~08년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젊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유물론연구집단(GRM)을 결성했는데,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알튀세르주의와 오페라이스모라고 할 수 있지요. 특히 주요 성원 중 한 사람인 카바치니(Andrea Cavazzini)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둘러싸고 전개된 알튀세르의 '최후의 투쟁'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쇄신을 모색하고 있고요.
그런데 이 유물론연구집단이 2012년에 창간한 반년간지 Cahiers du GRM (http://grm.revues.org)의 7호['2015]에서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 출판 5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을 기획하면서 알튀세르의 가장 대표적인 제자라고 할 수 있는 발리바르와 뒤루*를 초청하여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 초반에 발리바르가 [['자본'을 읽자]]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즉 '스탈린주의'의 핵심은 역사과학이라는 '당황스럽고'(effarant) 또 '터무니없는'(absurde) 야망이었다고 선언하면서 뒤루*와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지요.
넓은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제자인 뒤메닐도 지난 ['2015년] 6월에 파리고등사범학교가 주최한 50주년 기념학술회의( http://www.ens.fr/actualites/agenda/article/althusser-1965-la-decouverte-du)에서 발표한 논문( http://www.jourdan.ens.fr/levy/)에서 [['자본'을 읽자]]가 실패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본]]은 경제이론이지 역사이론은 아닌데, [['자본'을 읽자]]는 양자의 '긴장'(tension)을 해소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에요. 따라서 경제학과 달리 역사유물론은 이론이 아니라 테제일 따름이라는 것이고요. 달리 말해서 역사과학은 불가능하고 그 '희미한 그림자'(fre^le ombre, [[독일 이데올로기]])인 역사철학만 존재할 따름이라는 것이에요.
발리바르의 지론은 알튀세르학파가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인데, 일리가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진정한 스승은 진리일 따름이거든요.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스승을 떠날 수도 있고요. 그러나 이 경우에 '진리 속에 존재하는'(e^tre dans le vrai) 사람은 발리바르가 아니라 오히려 알튀세르라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
윤소영('201510). [[한국자본주의의 역사: 한국사회성격 논쟁 30주년]] 공감. p96~97.
* '1965년 당시 양 seminar의 전체적 관리자로서 Althusser나 Balibar는 자신들보다 훨씬 뛰어난 이론가적 능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하곤 했다고 함--인용자.
본서를 포함해 윤소영선생님 주도의 과천연구실세미나 공감시리즈는 거의 운동의 총노선이라 할 기념비적 노고이고 운동의 전반적 침체기를 견뎌내며 나름대로 돌파해온 또하나의 경로로서 치하되어야 마땅하고 그만큼 다양한 타 정파들에 대한 견해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그 견해들 모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나 국내 최초 Balibar 전공자이자 소개자이며 또 최장기 연구자로서의 Balibar에 대한 언급은 중요하게 참고할만한 충분한 권위를 가진다 아니할 수 없음.
[9] 이런 점에서도 다시 한번 더!! 자율주의자들과 bio-capitalism론이야말로 진정한 Foucault 좌파로서 그 모든 Foucault의 적자들 중 적자이자 가장 탁윌한 장자이며 아마도 Foucault로부터는 도출될 수 있었던 최선의 형태이며, 이들에게 한계가 있다면 그것은 Foucault 본인의 본원적 한계에서 유래하는 것일 것이다.
[10] Tabula rasa not the blank slate
[초고용 memo
(→긴급과제가 발생해 이쯤에서 대충 일단락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