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후기
보리스 그로이스 지음, 김수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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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어릴 적 가끔 들르던 동네에서 초연(하고 그래서 조금 불결도 )해 보이는 외모에 갖가지 성경 구절들을 섞어가며 세상을 향해 큰 소리로 꾸짖어 외쳐대는 한 사나이를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광야에서 외롭게 진리를 외치는 예언자 세례 요한이라는 image에 사로잡혀 그와 대화를 시도하다 곧 가까이 있던 그의 집으로 초대되기에 이르렀다.

집안은 다소 어수선했으며 입던 여자 팬티 한두 장이 나뒹굴고 있었고, 넓지 않은 방은 처음엔 몰랐지만 장롱 2개를 약간의 틈만 두고 연이어 세운 뒤 얼기설기 교묘하게 위를 막고 담요를 덮어 한 사람이 겨우 기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개구멍 같은 통로만 남겨 놓고 둘로 나뉘어 있었는데 조금 있자 그 어두운 구멍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나는 좀 놀라서 그 구멍 속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는데 안은 좁은 침실처럼 꾸며져 있었고 이불 속에 사람이 누워 있었던 것이다.
내가 놀라서 안을 들여다 보느라 잠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 했더니 그는 분명치 않은 몇 마디 뒤에 "그럼 거기 들어가서 자."라고 내뱉으며 누워버렸다. 


놀랍게도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던 것이다.


아저씨와 약간의 대화를 나눈 뒤 인사를 드리고 돌아 나오는 나에게 아내는 나중에 저녁이나 사줄테니 다시 한번 들르라고 은근한 유혹을 덧붙였다.



(원래 사람들을 잘 쳐다보고 다니는 편이 아니라) 그때서야 기억해보니 나는 전에도 지나가며 그를 얼핏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아침 등교 시간 무렵 근처 여대앞 역 주변, 사람들도 적잖이 오가는 좁지도 않은 모퉁이 길 초입부의 빌딩 앞에, 거기서 밤이라도 난 듯 박스 판지를 펴고 팔베개를 한 채 모로 누워 windbreaker 바지 속에 손을 넣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활짝 웃으며 자위를 하고 있었다.




그는 그냥 야수가 된 광인에 불과했고 그의 아내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남편과의 합방을 그렇게까지 결사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1.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책은 기묘하게도 나에게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처음엔 [전두환 회고록]의 ’사고실험Gedankenexperiment’이 떠올랐다가 전형적인 Logos중심적 남근주의라는 생각에 김수창을 거쳐 그 광인에게로 생각이 모아지자 그간 궤변론을 늘어놓을 때마다 종종 잘난 척 비판해왔던 Feminism 진영의, 대모님들께 너무나도 부끄러워져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1]



Groys의 말대로라면 언어의 왕국이 건국된 지도 어언 100년, 붕괴한 지도 3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아직까지 [우리에게(도) 언어가 필요하다]며 애초 출발선부터 자신들을 위한 자신들(만)의 언어 자체가 부재함을 절규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유교라는 ’언어’로 짠 용포와 도포자락을 Marxism, 아니 Stalinism이란 서양복식으로 갈아입은 언어의 연금술사, 언어와 문자의 지배자 씹선비로 비판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매순간 전존재를 내던져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자성하고 가장 먼저 자기자신과 사투를 벌이지 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Groys 주장의 전제들 너머까지를 다시 돌이켜보면 소위 그 ’언어의 왕국’, ’철학의 왕국’은 심지어 태초부터 있었다고 주장되며 최소한 전근대까지는 동서양 모두를 강고하게 틀어쥐고 있었던 것이 너무나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인데, 그때까지 지배계급이 의존할 수  있던 그나마 합리적인 거의 유일한 통치술이자 Technology인 말씀과 언어의 지배가 도대체 무슨 대수라고 이 호들갑이란 말인가...

이 책은 기본적으로, 붕괴해버린 세계의 문제점과 내인이든 외인이든 그 원인에 대한 사고와 언급이 전혀 없다. 자기 자신을 죽일 정도의 뼈를 깎는 처절한 반성과 성찰을 계속해 진정으로 부활하지 못 하는 한, 폭력과 패배라는 운명의 순환회로는 영원히 반복될 뿐이며, 따라서 이 책은 일말의 자기비판도 회개도 개선대안도 없이 고스란히, 아니 잘못된 원인분석을 통해 오히려 더 퇴행적으로 반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전시장일 뿐이다.




2. 언어의 지배는 더욱 거칠고 끔찍하며 주권권력과 규율권력의 억압사회일 뿐이다.

언어는 매우 거칠고 성긴 인식의 원시적 그물망일 뿐 아니라, 선불교의 불립문자 정신이래 Roman Jacobson, 그리고 Lacan과 Deleuze에 이르기까지 언어가 도구이면서 동시에 감옥이라는 (사실에 대한) 수많은 통찰들이 있어왔음에도 이 무수한 가르침들을 모두 깡그리 지워버린 채 위기에 처한 Homo sapience종의 불안과 공포를 등에 업고 기계파괴선동으로 위장하여 시도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인식론에서의 Stalinist Nomenclatura 반동 Coup d’Etat일 뿐이다.


섬세한 언어(화) 능력과 세련되고 부드러운 accent와 번역능력에 기대어 체제를 지배해왔던, 반면 동시에 언어화되지 못 한 실재와 진실들, 더구나 모든 비언어적 존재와 생명과 인식과 소통과 행위들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억압되기 때문에 언어권력의 전횡과 횡포가 만연하며 따라서 독립적 (자기) 언어화 능력이 부족한 개인과 계층, 부문은 번역당할 때까지 전적으로 소외될 수 밖에 없고 필연적으로 (비)의도적 오역과 왜곡이 수반되어 왔던 대리발화의 이 전형적인 역사는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것이란 말인가!!!




3. 시대착오

Linguistic Turn의 오래된 종말과 
Post-linguistic Turn 지배(의 붕괴)기에 이은 
(New) Materialistic/Ontological Turn의 도래

아직 (국내에서는 특히 더) 흔히 ’생물학주의의 귀환’이나 Biological Turn으로의 역주행처럼 오해되는 이 도래는 사상사의 장기파동[LT(E) Wave]이며, 현재의  speculativeness는 그 초기 도입/생성기에 발생하는 일시적 과도 현상의 하나일 뿐(으로 보임).

아무리 돌아가고 싶어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불가역적 과거.



원래 비기표적 기호, 도표적 기호계란 수학적 기호만을 지칭하는 것은 전혀 아니고 영상문화 기호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며, Groys의 본서는 이 외에도 가장 엉성하고 성기지만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게 존재를 지배하는 (Cognitive) System II 로서의 감응-정동계 전체를 통째로 삭제해버리고 억압하고자 하는 가장 질 나쁜 전형적 Logos-이성-논리중심주의의 오류를 고스란히 반복하는 등 심각한 반동을 자행하고 있지만, 이하에선 최근의 기술경제적 추세와 이를 문제화한 [대량살상수학무기] 등의 계기에 주목해 언어(학)과 수리(/)과학의 관계를 중심으로만 고찰하기로 한다.




4. 과연 언어/논리계산과 수학계산은 대립하는가?
;잘못된 대립구도와 이분법

경제를 돈으로 돈을 수학으로 치환하고, 정치를 언어(Game으)로 치환해 대립시키고 과장하는 방식의 반복을 통해 경제와 정치, 수학과 언어학, (Cognitive) System III와 IV, 자기 뇌의 한 부위와 다른 부위를 대립시키는 정신병적 ’증상’에 도달함으로써 결국, 언제까지나 자신의 동물성과 기계성을 부인한 채 언어(III)로서만 자기자신을 정의하고 싶어하는 Homo sapience 종의 낭만적, 목가적 환상에 편승해 전형적으로 다시 인간과 기계를 대립시키고 선동한다.

자본주의가 절대악인 이유는 그것이 수학의 왕국이기 때문이고, 반대로 거울쌍인 줄 알았던 Stalin주의가 절대선인 이유는 언어의 왕국이기 때문이란 말인가??!!!!
수학과 언어(학)의 대립이란 왕립과학과 유목과학의 대립보다도 허위적인 순전한 기만이며 차라리 농담이고 희극일 뿐이다. 
언어가 지배하던 악의 체제들은 벌써 다 잊어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5. 언어인가 변증법인가?

그럼에도, 본서의 거의 유일한 합리적 핵심이라 할 만한, 서로 다른 이질적 network( / )system들 간 동시 중첩/간섭과 과잉결정 현상의 정신적 반영인 변증법의 특별한 위상에 대한 재고찰은 절실하다.

Marxism 전체에 고유/특별한 ’가치Eigenvalue와 우월성Eigenstärke’이 있다면 그것은 고래의 구습인 언어의 지배가 아니라, 저항과 혁명(의 정신)을 실현하는 인식방법론으로서의 변증법과 유물론의 지배에 있는 것이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총체성의 논리’란 다름 아닌 이 ’변증법’의 한 부분이자 측면일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변증법’이란 광의로는 기존 지배 언어, 논리, 인식체계와 정신-Ideology 구조의 모순/틈/공백을 ’포착’해내고, 특히 그 체계가 의문의 여지 없는 자연적/천부적 진리로 환상하는 전제들을 재검토해 허위를 드러내어 해체하고 전복해 붕괴시키려는 끊임없는 (인지적) 저항 운동에 대해 붙여진 다른 이름[3]이며 협의로는 그 한 정식화 시도를 일컫는 이름이다. 

언어가 곧 변증법인 것이 아니라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어서 언어를 초과하고 넘어서서 결국 (기존의) 언어와 논리체계를 파괴하고 해체시키는 것이 변증법이며, 이렇게 해서 종국에는 인식 체계 자체를 붕괴시킴으로써 새로운 깨달음과 인식을 도래케 하고 처음부터 다시 구성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변증법이기에, 그러므로 단적으로 ’언어로 사회를, 그래서 타자를 지배하는 것이 결단코 불가능하다는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변증법의 요체라 말할 수 있다.

Groys의 말대로라도 언어에 그토록이나 열중했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해버리고, 상대적으로 언어에 전혀 열중하지 않았던 자본주의는 오히려 살아남아 건재하다는 현실조차 가장 강력하게 이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국적으로는 언어학이든 수학이든 모든 인간의 정신은 이 운명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6. 변증법의 전망

사실 수학을 포함한 강박적 미세분할과 국소적 인과론의 차이 논리학은 유사변증법일 뿐 본질적으로 배중률은 전혀 위반하지 않고 모순률을 철저하고 완벽하게 엄수할 뿐 아니라 극대화하고 최대화하기 때문에 형식논리학의 충신 중 충신이자 일등공신에 불과하며 아니 오히려 형식논리학 그 자체인 반면, ’양자현상’은 전형적인 변증법의 일례에 해당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차이의 형식논리학은 0과도 매우 비슷하고 1과도 거의 같지만 완전히 0은 아니고 그렇다고 1도 아닌, 0과 1(로)만 (이루어져) 있었던 그간의 인지그물망으로는 그 사이에서 우리가 걸러내 보지 못 하던 0.5를 찾아내고, 다시 이 작업을 계속 반복하며 0.54와 0.548과 0.5483들을 찾아내는데 몰두하며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 사이에서 LGBTQIAK를 찾아내는 Queer feminism은 물론이고 감각의 재분할을 역설하는 Ranciere를 포함해 모든 소수자 정치학의 주창자들도 여기에 포함되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것은 근본적으로 형식논리학을 전혀 넘어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수학은 성긴 언어의 그물로는 도저히 걸러지지 않는 무수한 미세 data들의 대량발생과 그 흐름/이동을 인식하고 처리해내는 데 유용성이 있는 기계화가 용이한 규칙적 미세분할과 무한 반복, 확장의 방법론을 추가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발생, 생성, 변화, 변이의 단순 변증법을 초월하는 완전히 0이면서 동시에 완전히 1인(, 그래서 오직 바로 그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0도 아니고 1도 아닌) 존재들의 동시성 역설 변증법이고 이것이 바로 ’양자 현상’이며 모순률과 배중률을 동시에 무너뜨리는 변증법적 논리학을 요구하는 문제의 새로운 지평이다.





국소인과론과 미세분할의 차이 논리학을 넘어서는 다중(성)/중첩 논리학을 요구하는 양자현상과 변증법

특히 비국소적 ’얽힘’을 포함한 이런 모든 자연,사회적 양자현상들은 형식논리학의 근본 규칙들을 동시에 전복하면서 (Homo sapience적) 사고방식의 근원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인식의 도구들을 요구하며, 이를 위해서라도 차이의 논리학을 넘어서는 인식론이 필요하고, (논리/인식론적으로만 본다면) 이것이야말로 현단계 변증법의 당면과제 중 하나이다.

따라서 요약하면 언어학이든 수학이든 형식논리학의 본질은 (시간을 무시/극복한[2]) 고정된 정체성을 강요하는 동일률의 (원자적) 강체론으로 정의할 수 있고, 언어학의 혁신은 물론이고 수학의 혁신까지를 요구하는 변증법은 이 단계를 넘어 형식논리학을 모든 정립/정식화된 지배의 논리학과 인식론으로 정의하고 그 헛점과 한계를 ’비판’하며 ’해체’하고 붕괴시켜 근본적으로 새롭게 ’구성’/건설해 나아가는 아래로부터의 모든 (비/반-형식적) 저항논리의 종합학이자 인식-논리의 영속혁명론으로서 새롭게 발전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7. 논리에서 다시 현실로 1
----언어의 지배로 포장 미화된 단일언어주의 

   이런 혁신된 확장 관점에서 보면 항상 많은 말들이 오가지만 진심어린 진정성 넘치는 따뜻한 대화랄 대화는 없었던, 언어의 지배로 미화되고 포장된 단일언어주의를 벗어나 갈등의 대화 정신으로서 Bakhtin의 복수(언어)주의가 차라리 변증법에 훨씬 더 가까우며, 나아가 차연의 윤리와 사건의 정치, 해체의 철학이야말로 다름 아닌 이제까지의 변증법의 최전선이었던 것이다[3].

다만 양자 모두!! 이러한 차이의 초월과 접합/종합을 통한 새로운 ’구성’과 실천적 연대협력의 공통되기에 도달하지 못 하는 한 결국 분열과 배신의 이분법을 무한반복해대는 사이비 변증법에 불과할 뿐이라는 깨달음을 골수 깊히 각인하는 것이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새롭게 접합하고 구성해내지 못하는 반복분할은 본질적으로 철저히 형식논리만을 강화할 뿐이며, 이것이 ’차이의 정치’가 자본주의에 착종교란되고 공모함으로써 오히려 지배체제를 섬세-유연화, 교묘화하면서 완성시키게 되는 철학적, 인식론적 근원이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변증법적 대화상대는 바로 유일한 대타자이자 검증의 시금석이고 누빔점인 실재 밎 현실이며, 이것이 바로 유물론의 정신이다.
유물론이 빠져버린 변증법은 파괴와 해체, 분열 자체가 목적일 뿐인, 흔해빠진 관념론적 급진주의 비판철학에 지나지 않고 그것은 또하나의 궤변에 불과한 것이다. ’총체성의 논리’도 결국 이 실재와 현실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분절되고 파편화된 부분만을 떼어내어 그 작은 알 속/이불 속에만 도피해 파묻혀 있고자 하는 postmodern의 오타쿠적 세계관을 극복하기 위한 관념과 세계의 전면적/총체적 대질을 일컫는 가장 강력한 "Fact Check" 방법이기에 중요한 것이다.




8. 논리에서 다시 현실로 2
----인식의 도구와 인식의 주체; 인식과 권력

그러나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진정으로 위험한 문제는 이런 논리적, 인식론적 논의가 전혀 아니다.


Groys가 경제를 돈으로 돈을 수학으로 치환하고, 정치를 언어(Game으)로 치환하는 방식의 반복을 통해 수학과 언어학, (Cognitive) System III와 IV, 자기 뇌의 한 부위와 다른 부위를 대립시키는 잘못된 이분법과 대립구도로 진짜 노리는 것은 인식 주체와 권력의 문제를 지워버리고 인식 도구와 방법론의 문제로 바꿔버리는 치환술이다.
이러한 치환술에 속아넘어가 권력과/의 주체 문제는 전혀 꿰뚫어 보지 못하고 역사적으로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린 기계와 수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도구의 소유자와 용법이 문제라는 교훈도 완전히 망각한 채, 다시 관념들 간의 대립으로 치환하여 거칠고 성긴 원시적 인지 그물망인 언어에 비해 인류사 최근년의 좀 더 촘촘해진 그물망에 불과한 애꿎은 수학과 계산을 비난하면서 무능한 향수와 싸구려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은 전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postmodernism의 상투어 중 하나였던 ’계산 불가능성’이란 언어에만 하사되는 예외적 특권을 강조하기 위한 게 아니라 ’진리의 일반적 인식 불가능성’을 목표로 의도하는 개념이었다.)

따라서 (Cognitive) System I, II, III, IV의 허구적 대립 선동과 그를 통한 Hegemony 시도가 아니라 인지자원과 도구, 방법론들의 총체적 동원과 그 협응이 중요하며, 언어든 수학이든 계의 외부에서는 물론 ’내부’에서도 (단일) 지배가 아니라 그 발화의 복수-민주주의적 평등과 만개, 즉 백화제방과 백가쟁명이 바로 그 생명인 것이다.




S.

결론적으로 이 책은 스스로 거부되고 붕괴해버렸으며 그 내부인들에게는 기념하고 싶은 그리움도 되지 못 하고 있는 어떤 세계에 대해, 문제의식 자체가 전혀 없고, 내인이든 외인이든 그 원인에 대해서는 사유와 언급이 더 없다.

결정적으로 문제 자체의 존재를 부정해버리는 구좌파의 이런 비겁한 변명들과 자위 공연은 새로운 저항주체들을 Marxism화/(으)로 인도하는데에도 별 도움이 되지 못 한다. Marxism과의 협력을 촉구하기 위해선 Marxism 내의 선과 악을 모두 솔직하고 투명하게 드러내고 자기 내부의 오류와 한계를 극복하고 제거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선행되어야만 신뢰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기타 정파(들)의 세부이론들에 쏟아지는 그 많은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소위 ’정통Marx-Leninism[4]보다 차라리 그나마 그들의 ’정신’을 기꺼이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이 Sovjet Ideology에는 아예 이런 작업들을 철저하고 근원적으로 치열하게 수행해 나가기 위한 언어와 의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Stalin과 그 체제의 공과에 대해서는 엄정하고 공정한 평가도 필요하나 결벽적 신중성으로 Stalin(주의) 자체와 특히 그 내/외인에 대해 완전히 판단을 중지하고 변론술로서만 평가해도 아직 Lenin조차 혐의를 거의 벗지 못 한 상황에서 Stalin을 변호하고 나서는 건 박근혜 변호인단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변론 자체만 검토해도 기만성이 너무 강해 ’실질적’ 설득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Notes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
처음엔 이 책의 지적 도발과 도전에 대해 (세계와 특히 Feminism을 향해) 내보일 한국((그래서) 남성)지성계의 ’실체적’ 반응이 너무너무 궁금해 일찍 작성을 대충 마쳐 놓고도 일부러 침묵을 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아무리 기다려봤자 아마 누구도 이렇다할 응답을 내놓지는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이고, 그래서 기다림으로 한국사회가 얻을 공익보다 잃을 손실과 혼돈이 훨씬 커 보이기에 그냥 몇 자 적기로 한다.

더구나 이 책은 최근의 연작 [대량살상수학무기], [기호와 기계], [사건의 정치], [차이의 정치와 정의] 등과 기막히게 시의적절히 쟁점을 공유하면서 반대편향의 전형을 잘 형상화하고 있기에 막연히 기다리는 것보다는 국면이 조성됐을 때 집중적 논의를 촉발시키고 활발히 전개하는 것또한 최선의 실천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1] (과도한 노파심에 혹시 연관의 줄기를 이해할 수 없는 분들을 위해 부연요약하면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공론장 등을 포함한 공공장소에서의 자위행위이고, 광인의 아내는 그들이 배신한 Feminism과 하층계급들을 상징하기도 하다.))


[2] 여담으로 덧붙이면, 이를 부정적으로 볼 땐 시간을 전혀 이해/고려하지 못 하고 무시하는 것이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시간을 초월해 그 모든 변화와 변이의 간계를 극복하고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적 능력이라고 할 수도 있기는 있다. 이는 마치 산을 넘기 전과 넘은 후 지금은 모두 산 아래에 있는 두 사람과도 유사한 것이다. 


[3] 다중성 양자현상을 해결할 수 있을 지도 모를 하나의 맹아가 오히려 반-변증법 진영으로 매도돼 온 Deleuze의 적극 주목-발굴에 의해 유명해진 ’다양체Mannigfaltigkeit; man’I’fold; multiplicite’ 개념일 수 있다는 점도 이런 사실을 강력하게 증명해준다. 
(즉, n차원 국소 Euklid(ean) 공간에서 입자와 파동 같은 다중성은 n+k차원 위상 공간에서 통(합된 단)일 다양체의 n차원으로의 서로 다른 사영들일 뿐일 수 있다는 idea이다.)


[4] 문외한들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이면, 이는 문자 그대로의 Leninism과 Bolshevism 일반을 지칭하기보다는 구소련의 공식 Ideology였던 Stalinism을 일컫는 용어로 통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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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izome 2018-03-05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출간 당시 1주 간 게재 후 삭제하였으나, 최근의 몇 민감한 내외부 정세 때문에 복구되었으며, 현재로선 향후 유지 여부는 미정임.
 
사건의 정치 - 재생산을 넘어 발명으로 아우또노미아총서 57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지음, 이성혁 옮김 / 갈무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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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 리뷰는 기본적으로 Lazzarato에 대한 높은 기대 때문에 작성된 것이며, 전작까지 보여준 근원적 통찰에 비해, 본서는 다소 실망스러운 저작이라 아니 할 수 없으나, 그 원인은 문헌 자체보다도 번역의 역주행에서 오는 탈맥락성의 증가 때문으로 현재와 미래의 Lazzarato에는 해당사항이 그만큼 직접적이라 보이지 않음[1].


1.
어쨌든 본서는 신자유주의의 공포스런 작동기제에 대한 탐구가 불충분한 반면, Marx만큼이나 실패하고 더구나 포섭될 대로 포섭된 Deleuze 노선에 대해선 어떠한 반성적 성찰과 재검토도 없이 더구나 (이미 Deleuze, Derrida 등 본인들이 Marxism으로의 복귀를 역설한 시점도 훨씬 지나서) 너무 뒤늦게 고스란히 답습만 하고 있음.

세계(/)사상사적 관점에선 Ranciere 및 급진민주주의 노선과 ’결정적’으로 중요한 변별성은 미미하고 (더구나 이들의 역사적 급진성을 좀 오해하고 있으며,) 모두 소수자 정치학으로 포괄될 수 있는데다, 이 거시관점에서는 그보다 급진좌파 내부의 강력한 이론적 자원들의 양대 계보를 단순한 이분법적 양자택일의 대립구도로 파악하는 전통적 관점을 극복하여!! 종합하고 넘나들며 자유자재로 전환하고 변신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기에, (전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러나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Hegel-Marx와 Heidegger-Lacan-Derrida를 중심으로 이 통합을 모색해내고 있는 Zizek의 분투가 이런 세계사적 맥락에서는 오히려 시의적절한 많은 영감을 시사하고 있다고 평가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정세임[2].

(이 통합관점에서 Marx는 물론이지만 Hegel조차도 ’사건’을, Lazzarato도 예외 없이 흔히 (속류적으로) 오해하는 것처럼 단순한 ’객체’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차이와 ’지연’을 포함한) 모순과 틈/공백의 폭발, 난입으로 정의하고 있음.
따라서 Lazzarato식 구도에서 양자의 정확한 차이는 단지 이 모순을 긍정/낙관적으로 볼 것인가 부정/비관적으로 볼 것인가에 차라리 좀더 가깝고, 그래봤자 Hegel-Marx가 이 차이와 모순을 부정/비관적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도 전혀 아니며 오히려 변화발전의 유일한 동인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Lazzarato가 결코 말하지 않고 있는, 장막 뒤에서 이를 결정해 줄 진짜 중요한 관건은 단순히 이렇게 과(도)일반화된 관점차의 문제가 아니라 Spinoz(i)an Maoism식으로 말해서 구체적이면서도 객관적으로 각 개별 (사건의 원인인) 모순이 적대적인 것인가 아닌가; 즉 타자로서의 그 손님은 궁극적으로 이웃인가 적군인가; 개인가 늑대인가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건도 객체로 바라보는 동일성의 주체철학"이란 결코 단일한 범주가 아니며 오히려 Plato-Hebraic 보수 형이상학 전통과 그 거울쌍인 '전도된 Platon주의'로서의 Sophisto-Bergsonian[3] 인간/생물학주의적 주의주의 주체철학 등등의 혼합 image일 수 있음.)


(최근의 Communnale 사태를 포함해서) 양대 계보는 본질적으로 Hydra이자 Medusa였던 저항주체가 수많은 전투경험들을 곱씹으며 자라나 도달된 한 몸뚱아리의 Siam(ese) 쌍생아인 것이므로 이들을 양자택일의 이분법적 대립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서로 자기만이 이 몸뚱아리의 유일한 주인인 진짜 본인이라 주장하며 상대방의 목을 졸라 죽여버리는 행위에 불과할 뿐이고 그 결과는 굳이 말을 할 필요조차도 없음.
(특히, 이 상황에서 17년 혁명 이후 100 년, 68 혁명 이후 이미 50 년 간의 노력이 충분히 보여 준 교훈은 더이상 단지 어느 한 노선의 고집만으로는 상황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악화되기만 할 뿐이라는 사실이며, 더구나 이 관점으로는 최근 일어나는 일련의 세계사적 및 사상사적 격변[4]조차도 전혀 설명할 수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에 속류화에 기반/동반하는 불필요한 대립의식은 지양돼 나아가야 함.)


2.
문제는 뿐만 아니라,

소수자-되기와 소수자(/)정체성 인정투쟁의 일환으로서의 Queering과 비체되기Abjectivation as Self-abjection[Le]/Auto-abjection[Lfr.오또-아브젝시옹],
그리고 그 상위범주인 발명으로서의 Hacking/Cracking

등등은 그 자체로서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새로운 저항전술임을 부인할 수 없으나(----이 관점에서 Queering은 단지 본인도 어쩔 수 없이 타고난 정체성일 뿐이라는 기존의 소극적 피해자 호소 관점을 넘어서 정체성 체계 Hacking/Cracking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 발명 작업으로 더욱 적극적, 진취적으로 전진/전환해 나아가야 할 강력한 필요성은 있음----),

그럼에도 여기서 더 큰 문제이자 진정한 문제는 오히려 이에 대한 지배 bloc의 대응전략이 이미 너무나 오래 전에 완성되었고 완비되었으며 완숙되었다는 것으로, 이것이 전술한 1990년대 Deleuze, Derrida 등의 Marxist Manifesto/Confession의 (당시에도 아직 충분히 자각되지는 못했을 수도 있는) 진정한 역사적 의의라 할 수 있음.

따라서 이러한 선회가 Foucault에겐 훨씬 더 일찌감치 더 극적으로 나타나지만, 이들의 전-중기 노선으로서의 hacking/cracking을 넘어 최소한 이런 산발적 hacking/cracking들을 체계적으로 집적 설계 인도하여 상호협응하는--COMMUNicative-- 지속적 흐름과 운동의 일관된 거대 회로로 만들어 내는 ((total)) re(verse)-engineering[5]으로까지는 나아가지 않으면 결코 바위를 뚫을 수 없다는 반성적 문제의식이 절실히 요구되는 국면이나 단순한 개별적 소수자-되기만으로는 결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1].

아무리 각고의 노력을 통해 희한하고 기묘, 기발한 정체성 전환으로서의 소수자-되기를 계속해봤자, 체제는 단지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내버려 두고’ 혼자 애쓰다 맞고 지쳐 쓰러지고 천천히 죽어가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며, 아니면 그 중 살아남은 효용가치가 있는 것들만 일부 포획해 자원을 공급해 주고 좀 성가신 것들은 모두 신용평가 등등의 방법으로 조용히 배후에서 밥줄/돈줄을 지그시 밟아 죽음을 재촉할 수 있으며, 저항이 약할 때마다 종국적으로는 아예 노골적으로, 그들만의 성벽 밖으로 내던져버려 죽어가도록 내팽개쳐 둬도 된다. 이때 이들의 ’특이성’은 체제에 전혀!!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 하고, 오히려 때마침 이러한 노골적 차별과 배제를 아주 효과적으로 정당화해주는 기막히게 좋은 빌미가 될 뿐 아니라, ’자발적 가난’이란 자발적 낙오, ’탈주’란 (성벽 밖 황무지, 불임/불모지로의) 자발적 추방과 배제로 적극 이용될 뿐이며, 신자유주의는 그 모든 '차이'들을 교묘하게 곧 차별과 배제로 전화시키는 강력한 장치들을 탑재하고 있는 평등 분쇄 체제이기에 다시 분배를 위시한 평등과 보편주의가 절박해지는 것이고, Ranciere는 이 절규에 성실히 응답하고 있을 뿐이다.



3. 주체 변이와 다양화의 속도를 압도하는 통치 technology 발전의 '특이점과 Eigenvector'

최근간『대량살상수학무기』가 잘 보여주는 바와 같이 통치 technology는 중세, 근대까지의 고정되고 반복하는 (정체성(들의)) 체계로서 언어논리와 고전역학 및 사회원자론의 단계도 넘어선 지 오래고 이미 쉴 새 없이 유동하고 변이하는 체계로서의 열역학적 고도 수리통계 단계를 거쳐 서로 다른 장과 차원들 속에 산포한 상황과 맥락별 network체/파동들이 중첩되고 간섭하는 총체적 시공간 속에서 하나의 network으로서의 개인조차 철저하게 분할하고 해체하며 예측하는 social subatomic quantum engineering과 Big Data 복잡계 network 공학으로 이행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무리 다양체로의 변이를 거듭해 봤자 상기한 쓸모없는 '탈주'도 애초의 기대 효과조차 급감해 나갈 수 밖에 없음.
그 개인 주체 자신보다 그를 더 빨리 더 정확하게 이해하며 예측하고 미리 기다리는 체제와 'AI'!
그조차도 포기할 순 없는 상황이겠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본질적 문제를 거의 해결할 수 없음.
이런 점에서 (자연과학에 대한) 왕립과학 대 유목과학이라는 Deleuze적 도식은 완전한 허구적 대립구도에 불과하며, 이를 연장한 'Newtonian 고전물리학=절대왕정과 Fascism의 과학' vs '상대론과 양자역학 등 현대물리학=자유인의 유목과학'이라는 도식은 더욱더 순전한 허구에 불과할 뿐이다. 바로 이 잘못된 대립 도식 관념이 Deleuzianism이 결국 포획당할 수 밖에 없었던 근본적 원인의 하나이고 그와 Foucault의 결정적 차이의 본질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도식을 반복하고 있는 자는 그가 누구이든 현대성과 자유!!--차라리 신자유--, 그리고 해방의 근원적 차이와 이(에 대한) FOUCAULTIAN TURN[6]의 의미를 아직도 '전혀' 이해하지 못 한 채, 현대성의 황홀경에 압도당해 탈근대만을 갈망하고 있는 근대 원시인에 불과할 뿐이다. '차이의 정치'에 대한 일방적 찬양이라는 오류에도 동시에 빠져 있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탈근대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고 그 유연/유동성과 액체성을 찬미하기에만 여념이 없지만 현실의 변화는 이미 이들을 구시대의 유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해 Lazzarato의 국역 전작『기호와 기계』는 마치 생각을 통째로 도둑 맞은 것과도 같은 충격을 좀 받았었는데, 주제가 언급된 김에 간략하나마 특히 연관성 높은 2~3 가지 이견 정도만 약술하면, 무엇보다 전작에서의 결론적 대안도 결국 범주적으로는 여전히 hacking/cracking에 머물고 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둘째 기표적 기호와 비기표적 기호--Guattari[7]식 용어로는 특히 도표적 기호--의 차이는 사실 예전 Judith BUTLER(『젠더 허물기』)와 언어논리계 ’내!!’에서의 탈주 시도만을 강박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Queer 정치학에 대한 논평에서도 언급했던 바와 같이 사실 (Cognitive) System III와 System IV의 차이에 불과할 뿐이고,
셋째, 양자 간의 차이가 기호와 기호적 기계, 그리고 기계 그 자체 간의 차이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며, 특히 기호적 기계와 기계 그 자체(의 차이)를 혼동하면 궁극적으로 Qbits와 Quantums 그 자체를 혼동하며 신흥 Digital교의 수렁으로 빠져들어버리고 마는 (특히 Hologram 우주론 등등 일부) 양자물리학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없게 된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을 너무나 우습게 보고 맘대로 주무르고 주물하며 이렇게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지배(계급)의 과학들을 고려하면, 그에 비해 이에 맞서려는 저항의 과학에 대해서는 (아직 언어논리의 세계 속에 갇힌 채 더구나 구좌파적 패배주의 Trauma에까지 파묻혀) "가소로운 짓"이라며 그 (성립)가능성 자체를 회의하고 극구 (사라지는) '번역'자로만 머물려 하며 독자적 조직화마저 주저하고 망설이는 Balibar 관점과 태도의 소극은 성직자처럼 겸허해 보이게 만들어 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별로 사실적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싸움이라고는 시작도 해보기 전에 이미 졌다고 할 수 있고[8], 특히 국내 한 유력 Deleuzian 본좌 중 또 한 분 등이 근년에 바듀Badiou 등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도 '사건'의 철학이 유행하기 시작할 때 사건을 도저히 예측불가능한 (순간에 갑자기 도래하는) 어떤 것으로만 강조하며 객관적으로 "관조"하기 위해 한사코 사건( / )현장 밖에 멀리 머무르는 사건 감별사 되기를 흉내내고자 했던 움직임 등과 비교할때, 감히 기꺼이 사건을 발명해내려는 자율주의자들의 이 빛나는 투혼과 혁명 정신이야말로 ('사건론' 자체(만으)로는) 가장 적확한 대응이자 가히 최고의 사건론으로 평가할 수 있음.

『대중들의 공포』가 아니라 '대중들에 대한 공포'와 신격화가 문제적인 것이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주체의 번역과 사건의 감별이 아니라 그들의 발명과 생산이다!!![8][9]
(일찌기 Marx의 일갈에 따르면 심지어 철학의 임무조차 그러할 진대 하물며 예술과 정치와 교육과 정치신문을 포함한 매체(비평)활동가들 등등에 대해서라면 이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는 무능한 순교자나 비굴하고 굴종적인 내시가 아니라 차라리 Machiavelli적 King-maker이자 기사단과 호위무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죽은 신을 대신해 이번엔 선험적 대중으로 정신의 빈 중심을 메우고 있는 이들을 보면 미군과 비행기를 신으로 숭배하고 있는 태평양 군도의 작은 섬 원주민들이 생각난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 자신의 숭배 대상이 원래 그렇게 이미 주어진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존재로서 출현하기 이전에 어디서 어떻게 어떤 기제로 발생/생산되어 오고 있는 것인지는 결코 생각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주체와 대중은 형이상학적으로 완벽하게 고정된 채 이미 주어진 신성한 Text여서 오로지 정확한 번역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대상이라 생각되어 이런 주체생산공정과 technology의 발명 같은 건 엄두도 낼 줄 모를 정도로 아무리 위축되고 소심해진 겁먹은 좌파라 하더라도 최소한 주체의 변이와 새로운 주체(형)의 발생을 '가속시키거나 지연시키는' 정도의 개입과 실천은 시도해보려는 발상을 감행해야만 할 것이다.
원래 인간 자체가 그렇지만 너무나 강고하게 이미 모든 것이 완성된 채 주어져 있다고 여겨지는 대중도 의외로 ’빈 서판’[10]에 불과할 수 있으며, 현실과 '미래' 또한 예측하거나 감별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하고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성 Text, 즉 성전의 번역이 아닌 '빈 서판'[10]에 Code를 기입해 새겨 넣는 Programming과 창조/창작의 글쓰기 시도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다.



5.
















※Notes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Lazzarato에게 ’1996년--영미권에선 ’2010년--의 공동 저작『Le Bassin de Travail Immatériel』(일명 BTI)로 대표되는 post-Fordism과 비물질 노동 연구를 넘어, "(신)자유주의(와의 착종교란) 현상에 대한 ’각성과 깨달음’"으로 요약할 수 있는후기 Foulcault적 대선회가 일어나는 것은『Le Gouvernement des inégalités. Critique de l'insécurité néolibérale』(Éditions Amsterdam.’2008)나, 이를 확대 개정했던, 영미권에서 내년 1월에『Experimental Politics: Work, Welfare, and Creativity in the Neoliberal Age (Technologies of Lived Abstraction)』이란 제목으로 출간 예정인 그의 ’2009년 저작 『Expérimentations politiques』(Éditions Amsterdam. ’2009)부터라고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이 저서를 구상하면서 그는 2004~5년에 France에서 그가 당시 불안정(/)유연 노동자라 개념화했던 연예산업 비정규직 종사자들의 실업보험 급여를 둘러싼 신자유주의 개혁 반대투쟁을 model로, 모든 노동자들의 행동양식과 이동성 등 자유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결정적 노동통제 수단으로 부상하는 실업보험 등 사회보험에 촛점을 맞추며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양극화, 빈곤화와 더불어 부채 문제 등 새로운 신자유주의적 인구 통제와 예속 기제 연구로 전환하게 된다.
(영미권에선 immaterial labor 개념과 precarious labor 개념의 선후관계를 좀 오해하고 있음.)


[2] 이러한 통합을 위한 영미권의 노력으로는 최근 『차이의 정치와 정의』로 국내 번역된 ’1990년 저작『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정의, 그리고 차이의 정치)』의 Iris Marion Young(US)과 이를 (교묘하게) 뒤집어 반복하며 정정하는 Nancy Fraser(US)***, Bob Jessop(UK)** 등이 각광을 받고 있음.
(*이 정정은 Iris Marion Young이 기본적 논조와 시대적 한계를 본서와 고스란히 공유하고 있기 때문인데 신자유주의의 본질에 대한 후기 Foucault적 자각이 전혀 없어 엉뚱한 나무에 대고 짖어대다 결국 신자유주의에 착종교란됨으로써 포획되어버리고 마는 진보 강아지의 운명( 안에 갇혀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특히 기만적이고 형식적인 보편주의에 불과했던 복지국가와 자유주의적 평등조차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적 공격에 동원되고 원용당하기를 시작으로... .
소위 이 '차이의 정치'란 기본적으로 소품종 대량생산과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던 Fordism과 특히 국가독점자본주의적 3차 구조에 조응하는 억압/규율적 획일주의 대중사회( 등)의 적극적 관리체제에 대한 저항전략으로서 (가장) 유효했을 뿐이다. 상기한 신자유주의 방치전략 때문만 아니라 대중, 군중과 공동체 자체가 사라지고 서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소통[통약!]불가능의 고독한 모래( / )원자로 스스로를 환상하는 Narkissist 개인들만이 넘쳐나는 현대 사회라면 어떤 새로운 전략이 모색되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미 사회의 기본적 Platformat(ion) 자체가 전환되었다는 이 사실이 (정체성) 다양화 전략이 비록 잠시나마 약간의 긴장은 초래할 지언정 더 이상 어떤 본질적 위협과 변화도 가져다 줄 수 없는 근본적 이유인 것이다. 이미 체제는 이 다양화를 수용해낼 준비가 다 갖추어져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이를 새로운 이윤과 경쟁력의 원천이자 동력으로 전유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공통적으로 양대 계보를 대립적 이분법의 택일 관계로 사고하는 수준은 다 벗어나 있는데 이러한 세계(사)적 노력들과 비교하면, ’2004년에도 아직 여전히 ’차이의 정치’에 대해서만 일방적 찬미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본서의 한계가 더욱 극명해지고, 그 한참 뒤늦은 번역소개의 의미도 좀더 드러날 것이다.

**『Towards A Cultural Political Economy. Putting Culture in its Place in Political Economy』. Cheltenham: Edward Elgar'2014.
: 이 책은 그의 평생에 걸친 역작인 Putting it in its place 3부작이랄 수 있는 자본주의 정치-국가 이론, 경제이론, 문화이론서의 마지막 권에 해당하며 그 모두를 통합결산하는 각별한 의미도 있음.

*** 이에 대해 Fraser와의 논쟁으로도 유명한 Judith Butler의 입장은 너무나도 실망스럽기 그지 없는데, 물론 SF분파로서 Fraser의 통합 Solution이 가질 수 밖에 없는 (거의 유일한, 그러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구조의 융접합/단일화 차원까지는 꿰뚫어 보지 못 하는, 이 경우 문화(적 인정), 정치(적 대표), 경제(적 분배)라는 3원/3중 교차론적 단순 병합/병치 사고방식인 건 부분적으로 사실이지만, 이에 대하여 Butler는 단지 자기 정당화와 분파 보전을 위한 변명에만 급급해 그간 자신의 (정치)경제적 무관심, (그로 인해 촉진된) 신자유주의와의 공모 등에 대해선 어떠한 반성도 없이 구조적 얽힘과 '인지적 분별', 실천적 통합( 즉 연대와 협력)이라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차원들을 전혀 구분하지 않고 뒤죽박죽 마구 뒤섞은 채 갑자기 SF적 분리/병치 교차론에 대한 최대 비판, (그러나 마치 자신의 정반대 분파인 듯 취급해 왔던) 사회재생산론자 코스프레로 도피할 뿐, 분파 간 실질적 연대와 협력을 위해서는 그 어떤 다른 대안도 내놓지 못 한다.
그에 비한다면 최소한 Fraser는 실천적 진정성에 기반해 언제나 사회와 운동 전체를 조망하며 무엇보다 연대와 협력의 방안을 고민하고 있을 뿐 아나라, 줄곧 자신의 오류를 솔직히 인정하고 수정을 계속하려는 태도를 보여 왔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Butler가 이 주장을 진심을 다해 실천했더라면 양대 계보 통합의 또 한 경로가 확보될 수 있는데, 자율주의의 Lazzarato 계열, 특히 본서의 결론부에서도 개진되었어야만 마땅할 (신)QMF; 즉, Queer Marxist Feminism이 그것으로 이 노선에서는 적극적 Queering과 비혼, 비출산 등의 재생산 파업을 통해 무급 분업 재생산양식을 위험에 빠트리고 실질적으로 파괴해 나간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체제는 초기엔 이성애 출산 가정에만, 위기가 심화되면 비혼/동성혼 불문 출산(/입양) 가정 모두에 선별적 장려/지원금 공급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려 할 것이나 어쨌든 결과적으로 재생산노동 유급화 및 '사회화'는 일정 정도 달성되는 국면으로 전개되어 나아갈 것이나 여기서도 결정적 장애는 세계화와 기업 해외 이전, 결혼이민과 이주노동자 유인, ’기계화’, 그리고 여차하면 전면적인 ’일코노미’ 체제로의 전환 카드 등이고 따라서 재생산 영역도 (특히 모든 gender의) 단결된 총파업이 아니라면 큰 효과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3] 베륵손


[4] (Hungary와 Czech Prague의 봄에 이은) 68 이후, Keynesian 복지국가체제 및 동구권 Stalin주의 체제의 붕괴 등을 모두 포괄하는 50년 간의 이 세계사 국면은 (신)자유주의 initiative epoch로 정의될 수 있고, 자본주의 4차 구조(기)에 의해 규정/조응되며, 이 종말 국면의 격변에는 정치-사상적으로는 전 세계적인 반자유주의, 반의회주의 물결이 모두 포괄되며 소위 populism의 부상과 Carl Schmitt 연구 Boom, ’시진핑 사상’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체제 전환 (시도), 각주 [1]에서 다룬 현상 등등까지가 모두 포함된다.


[5] 여기서 저항의 (주체) technonolgy, 반체제 공학으로서의 hacking/cracking과 re-engineering은 본질적으로 소발명과 대발명의 관계이며, 실천적으로는 (예술작품으로서의) 개인적 ’되기’와 예술작품으로서의 사회 발명의 관계를 포함한다.
통속적 Foucaultian[6]들이 흔히 빠져버리는 가장 큰 고질적 문제 중 하나는 개인단위의 사고수준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며 작품으로서의 개인만큼, 또는 보다 더, 다른 모든 작품, 즉 타자들을 아우르고 보살피며 훼손을 막아주는, 총작품이자 박물관으로서의 사회도 중요하다는 자각의 부재이다.


[6] 발음 문제로 ’Foucauldian’도 빈용되나 Narkissism과 마찬가지로 어원을 밝혀 적는 원칙에 따름.


[7] Guattari의 정확한 발음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유독 오해가 심한데 모든 경로로 근거들을 종합할 때, France 토착민 출신이었다면 '가따리'여야 했겠지만, Italia계(; 즉 본질적으로는 외국인)이므로 '과따리’.


[8] Althusser의 가장 충직한 제자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Balibar의 근년 저작들에 대하여 국내에서 현재 집중적인 번역과 소개 작업이 준비/진행 중인 것은 우리 사회와 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도 정말 너무나 감사하고 의미있는 일이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라도 앞으로의 면밀한 연구 검토와 실천을 약속드리는 바이며, 본고에서의 짧은 논평은 이 작업 전체에 대한 총평이나 최종평가는 전혀 아니고 단지 현 정세에 긴밀히 연관된 최대 논점 한 가지만을 급한 대로 잠깐 언급하고, 또한 이를 통해 먼저 이 작업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촉발하고 본격적 논의와 공론화를 시도한 것에 불과하므로 오해 없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다만, 이 작업 훨씬 이전부터 Althusser로부터의 (일정한) 후퇴라는 Balibar의 어떤 측면들에 대하여는 약간의 우려를 가지고 있었던 편이라, 마침 이런 저의 소회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윤소영선생님의 최근 Balibar 평가가 직후에 발견되어 이를 간략히 덧붙임으로써 진행 중인 향후 작업에서의 사전 고려에 미력이나마 작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발리바르가 최근에는 이상한 발언을 많이 한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정도가 지나쳤습니다. 2007~08년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젊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유물론연구집단(GRM)을 결성했는데,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알튀세르주의와 오페라이스모라고 할 수 있지요. 특히 주요 성원 중 한 사람인 카바치니(Andrea Cavazzini)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둘러싸고 전개된 알튀세르의 '최후의 투쟁'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쇄신을 모색하고 있고요.
그런데 이 유물론연구집단이 2012년에 창간한 반년간지 Cahiers du GRM (http://grm.revues.org)의 7호['2015]에서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 출판 5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을 기획하면서 알튀세르의 가장 대표적인 제자라고 할 수 있는 발리바르와 뒤루*를 초청하여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 초반에 발리바르가 [['자본'을 읽자]]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즉 '스탈린주의'의 핵심은 역사과학이라는 '당황스럽고'(effarant) 또 '터무니없는'(absurde) 야망이었다고 선언하면서 뒤루*와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지요.
넓은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제자인 뒤메닐도 지난 ['2015년] 6월에 파리고등사범학교가 주최한 50주년 기념학술회의( http://www.ens.fr/actualites/agenda/article/althusser-1965-la-decouverte-du)에서 발표한 논문( http://www.jourdan.ens.fr/levy/)에서 [['자본'을 읽자]]가 실패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본]]은 경제이론이지 역사이론은 아닌데, [['자본'을 읽자]]는 양자의 '긴장'(tension)을 해소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에요. 따라서 경제학과 달리 역사유물론은 이론이 아니라 테제일 따름이라는 것이고요. 달리 말해서 역사과학은 불가능하고 그 '희미한 그림자'(fre^le ombre, [[독일 이데올로기]])인 역사철학만 존재할 따름이라는 것이에요.
발리바르의 지론은 알튀세르학파가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인데, 일리가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진정한 스승은 진리일 따름이거든요.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스승을 떠날 수도 있고요. 그러나 이 경우에 '진리 속에 존재하는'(e^tre dans le vrai) 사람은 발리바르가 아니라 오히려 알튀세르라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

윤소영('201510). [[한국자본주의의 역사: 한국사회성격 논쟁 30주년]] 공감. p96~97.


* '1965년 당시 양 seminar의 전체적 관리자로서 Althusser나 Balibar는 자신들보다 훨씬 뛰어난 이론가적 능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하곤 했다고 함--인용자.

본서를 포함해 윤소영선생님 주도의 과천연구실세미나 공감시리즈는 거의 운동의 총노선이라 할 기념비적 노고이고 운동의 전반적 침체기를 견뎌내며 나름대로 돌파해온 또하나의 경로로서 치하되어야 마땅하고 그만큼 다양한 타 정파들에 대한 견해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그 견해들 모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나 국내 최초 Balibar 전공자이자 소개자이며 또 최장기 연구자로서의 Balibar에 대한 언급은 중요하게 참고할만한 충분한 권위를 가진다 아니할 수 없음.


[9] 이런 점에서도 다시 한번 더!! 자율주의자들과 bio-capitalism론이야말로 진정한 Foucault 좌파로서 그 모든 Foucault의 적자들 중 적자이자 가장 탁윌한 장자이며 아마도 Foucault로부터는 도출될 수 있었던 최선의 형태이며, 이들에게 한계가 있다면 그것은 Foucault 본인의 본원적 한계에서 유래하는 것일 것이다.


[10] Tabula rasa not the blank slate









[초고용 memo
(→긴급과제가 발생해 이쯤에서 대충 일단락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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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주디스 오어 지음, 이장원 옮김 / 책갈피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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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저 자체는 (한심하게 만연된 무지의 red complex 때문에 과도하게 저평가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 가장 정통한 분석에 입각해 최근의 국제 상황들까지 페미니즘 역사와 최신 이론 정세들을 거의 모두 꿰뚫고 있는 현재까지 나온 가히 최고의 입문서 중 하나라 해도 흠잡을 데가 없는 저작이다.
번역도 매끄럽고 가독성도 좋으나 다만 한 가지, Radical feminism을 굳이 ’급진주의’ 페미니즘으로 오역하고 있어 그 의도와 태도에 의구심을 갖게 하고 다른 부분들까지 절대적 신뢰도를 의심받게 만드는 아쉬움이 있다.
원래 학술적으로는 거의 예외없이 ’~적’과 ’~주의적’이라는 용어 사이에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고 심지어 종종 대립되기까지 한다.
대표적으로 이 분들이 신성시해 마지않는 ’Marx적’과 ’Marx주의적’이란 용어의 관계사가 그 비근한 일례를 구성하는데, 특히 ’Marx주의(적)’이란 말이 공식화된 교조로서의 Stalin주의 Soviet Ideology만을 유일하게 지시할 때 이에 ’대립’하며 이를 내재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다시 그 뿌리로 돌아가고자 했던 다양한 ’비정통적’ 사유와 방법론을 시도하는 사상체계들이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했던 것이 바로 ’Marx적’이란 용어였듯이 이 경우도 ’Radical’과 ’Radicalism/Radicalist(ic)’은 큰 차이가 있고 엄밀하게 구분하여 사용되지 않으면 안된다.
당대에 ’Radical’은 차라리 ’과격한’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되었던 어법인 반면 ’급진주의’나 ’Radicalism’은 사용하고 싶다면 동일한 text 안에 반드시 엄밀한 학술적 정의를 적시하여 대동하지 않으면 안되고 이 기초과정을 빼먹으면 최근의 제1어법으로 (후기) Judith Butler의 3세대 feminism을 포함하는 급진민주주의 소수자정치학, 좀더 전통적인 제2어법으로 사회자유주의/사회민주주의 내 좌파(나 때로 반자본주의 급진좌파), 미국색 짙은 제3어법으로는 Saul David Alinsky로 대표되는 Progressiv(e Liberal)ism 내 좌파를 지시하게 되어 완전히 다른 뜻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Marx주의 내에서는 전통적으로 급진주의라고 하면 거의 제2어법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바로 그 Marx주의 저작에서 원문의 훨씬 넓은 외연과 단순어법을 가진 ’radical’을 민감하고 risky한 학술 용어인 ’급진주의’로 번역한 것은 가장 아쉬운 오역적 개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태도가 운동의 다른 단위들로부터 이 정파에 필요 이상의 반감과 비난을 불러오고 있는 일원인과 결코 무관하지 않기에 안타까운 마음에 몇 자 적어본다.





[이 후기는 사랑하는 동지들의 노고를 존중하여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질 때까지 상당 시간을 기다려 작성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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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17: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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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이행 (양장) - 러시아혁명의 현재성과 21세기 이행기의 새로운 혁명 전략
제8회 맑스코뮤날레 엮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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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적 임계시점이기에 모든 Marxist 단체,개인들은 먼저 ’범Marx주의자 총회이자 (이론/실천) 정책협의회’로 발전시켜 나아가기 위한 출발판으로서 (다소 불만이 있다면 분파를 형성하더라도) 일단은 가장 자유로운 논의체인 Communnale에 결집하고 그 구성단체들에 가입해주실 것을 호소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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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하는 페미니즘 - 여성주의 상상력, 반란과 반전의 역사
낸시 프레이저 지음, 임옥희 옮김 / 돌베개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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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고 memo 작성 중]



00. 

중요한 책이 그 가치에 비해 너무 조용히 출간된 듯해 다소 아쉽네요.


이하는 향후 논의의 발전을 위해 좀 더 보완되어야 할 여지가 있는 점들을 위주로 연구자 및 활동가분들께 드리는 간략한 memo 형식으로 작성되므로 본서와 관련해 여기에 적시되지 않는 내용들은 거의 (적극적) 동의이고 상찬이라 간주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특히 SF 계열의 노고어린 전투들과 최신 성과를 대표하고 있고, 적어도 feminism들의 (내부)통합과 단결 등을 위해서는 현재 가장 강력한 전략도구를 제공합니다.

(이하 경어 생략)





I. 사회학적 검토




-. Macro/다중 (구성)체계론으로서의 SF(의 한계)

-.1. 역사변동의 경향

      ; 여타 (비자본주의) 체계/영역의 (내부)식민화로서의 자본주의(적 통합)

        →전일적 자본주의 체계의 압도적 전면화와 여타 체계의 (완전) 통합/변성( 경향) 

        →말기 자본주의 (신)MF의 필요성



전일적 자본주의 지배체계가 전면화된 인지자본주의=생명자본주의 시대인 말기자본주의에서 이미 정치는 권력자본 간 투쟁영역으로, 상징계 질서체계 내 서열경쟁인 (정체성의) 인정투쟁은 그 가용투쟁자원들이 상징자본, 문화자본으로 장(場) 통합된 지 오래라는 현실 변화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 필요.



(이런 점에서 SF 다중체계론 진영의 일원으로서의 Fraser보다는 본서 7장에 언급된 Judith Butler의 고찰이 좀 더 이러한 현실 변화를 잘 포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문제는 주관적 경험에 편중돼 성(별)/gender 체계 중심주의에 빠져 이러한 융합 현상을 해석하려 함으로써 결국 애초 의도와 달리 RF로 재귀/재포획되고 있음.)



 




+.1. 

그러나 희망적인 측면은 Nancy Fraser (접합) model이 적록보라나 심지어 급진민주주의와도 대체관계가 아닌 보완관계일 수 있다는 점으로 이는 Fraser가 제시한 통합 model에서 (그 자신의 의도와 달리) 경제/분배투쟁-인정투쟁-정치적 대표 범주가 각각 진영들과 연계된다기보다 단지 한 주체/모든 주체가 해방을 위해 평생을 벌여나가야 할 전인적/전방위적 투쟁의 분야들을 지시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차라리 Bob Jessop과 강내희선생님의 ’문화정치경제학’(적) 통합 model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Marx주의 등 좌파 운동(과 계급투쟁)을 경제, 특히 분배투쟁으로만 해석하는 Fraser의 이해에는 다소 문제가 있어보이며, 각 진영/체계들이 나름대로의 일반화 과제를 달성하고 나면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될 전면화된 (/) 전방위 해방(/)투쟁(론)의 모습일 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S. 남은 과제들

그런데 동시에 이렇게 성(별)/gender체계 내적 (하위)주체 분파 및 세대/물결 (간) 통합 model로는 일정 효용이 기대되는 Fraser solution이 Gender체계와 Feminism을 넘어선( / )외부의 기타 억압체계나 저항이론(/)진영들 간 통합/접합이라는 문제에 대한 본질적/핵심적 대안을 제공하진 못 하고 있으며 아직 단순 병치 model의 수준에 머물고 있어 이 체계-진영 접합문제는 각 진영의 일반화나 Fraser solution 이후에도 계속 남을 것이며 오히려 갈수록 더욱 중요하고 심각해질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각 체계들 간의 교차와 중첩 원리와 작동방식으로서의 mechanism에 대한 별도의 집중 연구를 우회할 수 없다.


여기서 Post-mEgalian feminism(들)의 (내부통합) 이후 단계 과제로서의 일반화란 다음의 맥락을 의미한다.


S. ’일반화와 접합’ 과제

S.1. Marx주의를 포함한 각 체계-저항이론들의 일반화(와 (meta-)접합) 과제

S.1.1. Marx주의의 재구성으로서의 일반화, 역사적 Marx주의

S.1.2. Feminism의 일반화와 모두를 위한 (feminism(으로서의)) 여성없는 feminism


S.2. 비접합적 병치 대 접합

        (특히 계급체계 - 종(별)체계 - 성(별)체계 간 접합 및 각 체계 하위주체들의 교차와 연합)


S.2.1. 상호 경청과 공감을 넘어선 접합

S.2.2. 환원주의를 넘어선 관계들의 섬세한 해명으로서의 접합









II. 철학적 검토




Lacan주의는 결정론적 원형-구조주의의 (언어문화적 구성주의) 관념론 계열로, 전형적인 대륙합리론의 (관계주의적) 현대철학판이랄 수 있다.


따라서 화용론에서 그 극복을 위한 비판적 대안을 찾으려 했던 (시절의) Fraser의 노력은 탈구조주의의 관념론 계파인 Postmodernism의 전형에 불과하다. (아무리 Deleuze의 주장을 수용해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의 실천적 결말이란 미시정치의 추상/관념적 지층, 즉 관념론적 미시정치를 넘어서기 힘든 것이다. (더구나 Butler적 대안과도 대단한 차이가 없고 아주 쉽게 말해서 이런 식의 구도라면 언어체계 자체를 고문하고 내파시킴으로서 입을 다물게 만드는 Wittgenstein 류의 언어철학들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혁명적인 실천이 되는 것이다.)


조금 더 적절한 대안은 차라리 구조주의에 대한 ’Deleuze의 초월(론)적 경험론과 영미 Deleuzian들이 주도하는 최근의 정동이론 등 영미경험론의 반격’을 포함하는 (탈)구조주의의 유물론적 계보들에 더욱 주목할 때 찾아질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여성혐오가 어쨌다구』review에서 예시한 바와 같은 Althusser적 과잉결정 접합/절합(articulation) model에 기반한 역사유물론만이 이 모든 유사논쟁들의 최종답안이 될 것이다. 모든 사회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고, 물론 Fraser 자신의 3각 model도 그래야만 철학적 입장과 모순없이 정합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정동이론 논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Lacan으로 대표되는 Linguistic turn과 Bergson으로 대표되는 Biological turn을 대립시키면서 전자의 우위를 승인하는 접근방식은 이상의 구도에서 언어문화적 구성주의의 관념론으로 경사 전락하게 되는 치명적 약점이 있고, 원래 의도와 달리 충실하게 Althusser적인 것도 아니다. (Lacan적) 언어체계와 (Bergson적) 생물학체계는 Althussr적으로 과잉결정되는 articulation 관계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Lacan은 Zizek(ian들)이 역설하듯 현대화된 Hegel인데 반해, 그러나 이를 혐오하는 탈구조주의 유물론자들과 정동이론 등은 너무나 Feuerbach적( 인간학)이기 때문에 ((초)현대적으로 재구성된) 사회역사유물론은 예정된 미래의 대안이 아닐래야 아닐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동이론에 대한 Lacan주의적 비판은 Feuerbach에 대한 Hegel의 반비판에 불과하고 아직 충분히 전도되지 않았다는 결정적 문제가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중요한 국면에서 Fraser는 엉뚱하게도 Hegel이 아니라 Feuerbach를 전도시킨다!! 


(그렇다고 해도 Hegel의 대각면에 서 있던 Feuerbach는 거꾸로 뒤집혀도 여전히 Anti-Hegel인데 그래서 (후기) 비판이론과 Postmodernism의 착종교란과 공모가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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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izome 2018-03-18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otes]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이 잘 계산된 술어에 대해 오히려 ’대척점’이란 용어가 유행하고 있어 잠깐 부연하면, 기축에 매달린 채 IV사분면을 향해 거꾸로 서있는 언어문화중심 관념론적 (사회)구성주의로서의 Hegel주의, Lacan주의에 대하여 이를 전도시킨 Marx주의 계열 역사유물론적 사회구성주의를 I사분면,
(후기) 비판이론과 Post-modernism(의 공모관계)를 III사분면에, 그리고 Post-structuralism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