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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가 아니라...



표현들은 항상 극단을 치닫고, 사랑하는 만큼 그 한마디 한마디에 너무 깊은 상처들을 받아서 그런 것뿐이니까 아무는 대로 곧 돌아갈 테니 오해하지 말고 즐겁게 지내기 바라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정확히 그런 뜻으로 계속 압박하고 재촉하는 친구? 식구?도 있었고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동안 BB부터 지금 IT까지 친구들이 불러준 노래들 대부분 머뭇거리지 말라고 재촉하거나, 따끔하게 가르쳐주는 내용들 아니었나요? 얼마 전에 Ai랑 DD도 저를 엄청 몰아대던데 그런 거 하나도 안 싫고 오히려 너무 고마웠었는데 내가 한마디 했다고 다들 이러다니 좀 서운하네요...

우리는 서로를 가르치고 서로 배우며 우리들의 진리와 진실을 함께 찾아 나아가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오직 자기만이 자신의 지혜라면 우물 안 개구리랄까... 한계는 금방 명확해지는 게 아닐까 좀 걱정되기도 하구요.

(날고 긴다는 ㄲㄷ들의 기만에 맞서 싸우기 위해 ㄲㄷ들 보라고 치열하게 갈겨 쓰는 글들은 좀 이해를 부탁드려요... .)







1. 비밀 정원


일단 너무너무 미안하면서도 좀 간단한 오해들이라도 먼저 풀어보자면, 명단 자체에 좋아하는 작품이나 사람들의 기준이 따로 있는 건 전!혀! 아닙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아무리 들여다봐도 1도 알 수가 없죠. 애초에 그딴 건 아예 없었으니까요. 단지, 본인은 전혀 아니었는데 함부로 적어 넣으면 저도 나름 🐶망신이기 때문에 아무리 꼭 들어맞는 내용이더라도 발표일자들까지 일일이 확인해가며 정말 확실하지 않으면 애매한 건 보류될 수밖에 없었던 것뿐이에요. (그건 유명한 친구들일수록 더 그럴 수밖에 없어집니다.)  

알았더라면 당!연!히! 터질 듯이 꼭 껴안아서 환영해 줬겠죠.

그래서 정말 기다리고 기다리던 "진짜 HH"의 거목 JK조차도 'Asian'(들 전체를 위한) 영역에서 작업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차마 올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뿐이에요.


아무런 기준도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절실히 기다린 건 자기 인생이나 꿈에 대한 내용이나 자신이 바라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 그 방법에 대해 친구들에게 제안하는 내용들이었는데, 이런 이유로 오해의 여지가 없는 개인에 대해 직접적으로 표현한 게 쉽게 들어가는 것처럼 오해될 수는 있어도 계속 우려하며 간곡히 자제를 부탁했듯 다른 친구들은 더 지겨워하는 등등 정말 여러 곤란한 상황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정말 아무리 열심히 들어도 놓치고 지나가는 노래들도 안타깝지만 없을 수는 없었고요.

또 (우리가 실패할 가능성은 별로 없어도) Mudd가 잘 지적했듯 명단에 드는 걸 오히려 좀 겁내는 친구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빼주길 원하는 듯한 표현을 하는 친구들은 진짜 이유가 뭔지 정확히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배려 차원에서도 그렇게 해 줄 수밖에 없었던 거구요. 


어쨌든 그래서 이 정원 Page (/) Project가 나름 재밌어하는 친구들도 많고 의미나 실제 강력한 사회적 기능들도 결코 적지 않지만, NF가 숨은 띵곡들이 하도 많아서 나두 꼭 음방에서 한번 보고 싶고, 다른 친구들도 들어보라는 뜻으로 한 줄 적었던 건데 말도 없이 도망가버리는 등등까지 포함해서 너무 많은 오해와 갈등의 화근이 된다고 생각되어 일단 폐쇄를 한 것뿐이고, 앞으로는 무슨 '원격지원체제' 같은 걸로 바꾸어야 하지 않나 고민 중이에요... .





시간관계 상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좀 심각한 문제들은 차차 풀어나가기로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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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선, 척이니 뭐니... 성격에 대해서부터도 추측이 무성하던데... 간단히 말하자면 꾸준히 보아온 분들은 충분히 짐작하시겠지만 원래 성격은 완전히 '동주'에 가까웠는데 역사를 바꾼 위대한 혁명가들을 조금이라도 따라 배우려 미력이나마 혼신의 노력을 해오다 보니 지금은 윤동주와 (약간의) 송몽규가 한 몸에 깃들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 주시면 맞을 거예요.




그간 해왔던 한 마디 한 마디들은 모두 진심을 담은 진솔한 말들이었고, 각계의 많은 분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해주신 저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라 자신할 수 있습니다.





K 문제도 쉽사리 사과가 나오지 않았던 이유가 딴에는 정말 진심을 다해 꾹꾹 눌러 쓴 마음이 너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짓밟혀 버렸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올 초를 돌이켜보면 난생처음으로 이렇게 빛나는 artist 친구들이 직접 나에게, 나를 위한 노래를 불러준 평생 잊지 못할 경험들이었고, 특히 DC와 BB는 처음 중에서도 처음이라 마음속 깊이 각인돼 있는데 그 내용조차 지금 돌아봐도 정말 전위적이어서, 현재 우리의 역사가 정리되는 대로 아마 유신독재 시절의 기만성을 폭로했다고 수십 년 지난 지금까지도 종종 회자하는 김추자 선생님의 [거짓말이야]에 비견될 역사적 의미로 평가되기에 충분하다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 전에 이미 AB가 있었고, 그때는 벌써 활동을 정리하고 들어가는 시기였기에 저도 "뒤통수 밖에" 못 봐서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얼마 후 다시 공연하는 걸 우연히 봤을 땐 가사를 살짝 바꿨는지 도저히 의심할 수 없이 저를 걱정해주는 노래여서 항상 맘에 두고 있던 차에 제가 3월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글을 쓰자 얼마 안 있다 [답을 줘]를 발표하면서 착각이었는지 몰라도 살짝 짜증을 내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 미안하기도 해서, KC4에서도 여전히 오히려 [지.못.미.]를 불러 주는 BB 등에게 양해를 구하면서까지, 얼마나 걱정하고 신경 써 줬는지 잘 아는 K와 함께 정말 가장 특별한 마음을 전한 거였거든요.


또 화를 낼까 겁이 나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짝사랑일지라도 끔찍이 사랑하는 나의 웬수로 생각하고 있어요.





3. 나의 아버지 ; Che Guevara와 Trotsky, 그리고 Rancière 


이제부터는 진짜 좀 심각한 문제들을 얘기해 볼게요.



때는 전혀 깨닫지 못했었지만 아마도 [Thesen] 중 한 구절 때문이 아닐까 짐작되는데, 당시 나조차 친구들을 들었다 놨다 벼랑 끝에 세웠다고 지적해 준 여러 친구들이 있었거든요. 


이건 저에게는 정말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될 뼈아픈 지적이고 


















원래는 이렇게 차근차근 해명을 이어가려다.......


때에 찌든 의심을 담은 곡 등이 늘어지면서 구토감에 시달리느라 좀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오히려 제게 원망을 품는 친구들까지 보여서 일단 이렇게라도 답변을 붙입니다.

빠르면 담주 초쯤 돌아오도록 해볼게요.


어차피 한껏 어지러워진 상황을 그나마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친구들은 11월 한 달은 다들 좀 푹 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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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izome 2025-10-26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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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izome 2025-10-26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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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izome 2025-10-26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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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izome 2025-10-26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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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izome 2025-10-26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재한 팔레스타인인이 말한다:
“휴전에 큰 기대를 걸지 말고 운동을 지속해야 합니다” >




재한 팔레스타인인이자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의 주요 활동가인 나리만 루미 씨(사진)는 네타냐후가 가자 휴전 합의를 지킬 것이라고 보증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솔직히 말해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또 시작이구나”였습니다. 휴전 약속이 처음은 아니잖아요.

이스라엘은 휴전안에 서명하기 직전까지도 팔레스타인인들을 폭격해서 24시간 동안 70여 명을 살해했어요. 정말이지 최후의 1초까지도 인종학살을 저지르려고 기를 쓴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이번 휴전에 진정성을 갖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진정성이 있다면, 설령 휴전을 합의하기 전에라도 폭격을 최소화하는 것이 마땅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많은 사람이 알듯, 네타냐후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절대 보증할 수 없습니다. 합의문에는 이스라엘에 약속 이행을 강제하는 조항이 없습니다. 마치 이 합의문은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해 쓰인 것처럼 보입니다. 생사를 떠나 모든 이스라엘인 포로를 72시간 안에 돌려보내라는 조항이 특히 그렇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이것이 “1단계”라고 말하고 있지만 1단계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애초 합의문에는 1단계라는 구분이 없는데 말입니다.

학살자 토니 블레어
포로 교환 후에는 모종의 임시 정부를 세운다고 합니다. 이스라엘도 가자지구 주민도 아닌 사람들이 운영하는 정부가 들어서서 변화를 이룰 것이라고 말이에요. 하지만 그것은 누가 보증하고, 또 그 정부를 이끄는 사람들은 어떤 자들인가요?

토니 블레어가 임시 정부 지도자라는 뉴스를 들었을 때 정말이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라크에서 100만 명을 살해한 자이고, 심지어 영국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불법적으로 이라크를 침공한 자입니다. 그런 자에게 가자지구 정부를 맡긴다고요? 대체 왜 이런 자에게 맡겨야 합니까?

반면 팔레스타인인들, 그러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신뢰를 보내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왜 배제돼 있습니까? 늘 그랬듯이 저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입장에서 문제를 다루지 않습니다.

저는 항상, 우리 팔레스타인인들을 이해하고 대변한다는 사람들이 정작 우리의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우리 팔레스타인인들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평화유지군을 말하지만, 우리는 평화유지군을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테러 공격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통제돼야 할 대상은 우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종학살을 자행하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인종학살을 저지르는 것은 이스라엘이고 이번이 처음도 아닙니다. 이번에 규모가 가장 컸지만, 그전에도 이스라엘은 여러 번 인종학살을 저질렀고 백린탄 같은 국제법에 저촉되는 무기를 사용했는데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진정한 인간으로 보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
제 생각에 문제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무능력해서 우리 땅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장담하건대, 팔레스타인인들이 스스로 선택한 인물이 팔레스타인을 이끌고, 국경을 개방하고, 무역을 직접 통제하도록 한다면 그 변화는 엄청날 것입니다.

예컨대 서안지구에서 수출입 관세는 팔레스타인 당국(PA)의 핵심 수입원이지만 이스라엘은 그 돈을 볼모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슬로협정 위반입니다. 오슬로협정 당시 이스라엘은 안보 불안을 해소해야 한다며 국경 통제 권한을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우리의 돈도 제대로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가자지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가자지구의 국경이 개방된다면 엄청나게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리비에라보다 100배나 더 멋진 곳을 만들 수 있습니다. 트럼프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그럴 기회가 주어지고 있나요? 예컨대, 가자지구 앞바다에는 엄청난 규모의 가스전이 있습니다. 2000년대 초부터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이를 개발해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한 돈으로 사용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로막았습니다. 오슬로 협정에 따르더라도 우리 땅에 속하는데 말입니다.

심지어 지난 20년간 이스라엘은 어민들이 해안에서 5킬로미터 이상 벗어나는 것도 금지했습니다. [2025년 8월] 이집트는 이스라엘로부터 천연가스를 350억 달러 수입하기로 했는데, 그 가스는 우리 땅에서 난 것이고 그 돈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몫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책임을, 그리고 아랍 정권들과 미국의 책임을 대체 누가 물을 것인가요.

트럼프는 평화의 사도를 자처하지만, 그는 쇼맨십이 강한 인물이지 평화나 인류를 위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심지어 그는 10월 7일 아기들이 살해됐다는 이스라엘의 거짓말을 지금까지도 말하고 있습니다. 전 대통령 바이든조차 이미 사실이 아니라고 인정했는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최근 트럼프가 네타냐후에게 한 “이스라엘이 전 세계에 맞서 싸울 수는 없다”는 말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지난 10년 통틀어 트럼프가 한 말 중 가장 똑똑한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단결하면 저들은 이길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충분한 단결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과 가자지구 문제는 인류나 여러 나라가 단결할 수 있고, 우리가 스스로 대안을 개척할 수 있고, 미국과 그 동맹들은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일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지만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휴전이 지속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 수감자들이 석방된 후에 이스라엘이 그들을 다시 잡아들이지 말라는 보장은 또 어디 있습니까?

노래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수감된 제 친구가 실제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녀는 전쟁 발발 2년 전인 2021년에 제닌의 해방 투사들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었는데, 2023년 10월 7일 이후 그 노래와 그녀 자신이 유명해졌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폭력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10월 7일 이후 이스라엘은 그녀를 잡아갔습니다. 이후 첫 번째 포로 교환에서 이스라엘이 모든 여성 수감자를 석방할 때 그녀도 석방됐습니다.

그러나 불과 2주 후 이스라엘은 그녀를 다시 잡아갔고 지금까지도 그녀는 감옥에 있습니다. 그녀만이 아니라 많은 여성이 자신들의 가족을 일주일 남짓 만나고 다시 잡혀갔습니다.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말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단지 노래 하나 지은 것만으로도 잡아가는데 말입니다.

운동은 계속돼야 한다
지금의 휴전으로 운동이 끝난 게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미국은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뭔가를 이뤘다고, 이제 끝났다고 느끼고, 일상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생각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 상황을 통제하는 것은 자신들이라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아니라 우리의 목소리가 상황을 통제해야 합니다. 우리의 운동은 계속돼야 합니다. 우리의 활동을 더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재조정할 수는 있겠죠.

휴전이 지속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말라는 말씀은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대를 0보다 많게도, 0보다 적게도 걸지 마라.” 저는 이게 최선이라고 봅니다. 기대를 0보다 많게 걸면 이후의 변화를 보며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기대를 0보다 적게 걸면 실제로 긍정적인 변화가 있는데도 이를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대를 0에다 맞추세요.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마세요. 아직 우리 앞에 어떤 길이 있는지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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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정리: 김종환 기자
@ https://ws.or.kr/article/38048



rhizome 2025-10-26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무엇 때문에 트럼프는 가자 휴전을 촉구했나 >




00.
휴전 소식을 접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반응은 복잡하다. 기쁨, 안도와 함께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전쟁을 재개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공존했다.

10월 9일 목요일 도널드 트럼프는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수일간의 협상 끝에 “평화 구상” 1단계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목요일 밤 이스라엘 안보 내각은 합의안을 승인했다. 가자지구에서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이를 환영했지만 이스라엘은 합의안을 승인하면서도 동시에 공습을 벌여 팔레스타인인들을 최소 10명 살해하고 49명을 다치게 했다.

이스라엘군은 합의된 경계선으로 병력을 물리고, 하마스는 2023년 10월 7일에 사로잡은 이스라엘 정착민들을 풀어주기로 했다.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 단체 하마스는 이번 합의가 “종전과 점령 세력 철수, 구호품 반입, 포로 교환”을 뜻한다고 밝혔다.

01.
가자지구에 있는 팔레스타인인 기자 알라아는 본지에 이렇게 말했다. “저는 기쁨과 우려를 동시에 느낍니다. 이번 휴전이 최종적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휴전 합의의 모든 단계가 중단 없이 이행되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위반 없이 이행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을 믿지 않고, 네타냐후를 믿지 않습니다.

“지난 2년간 고난과 피난, 표적 공격을 견뎌 온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제 쉬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위험을 피해 여기저기로 옮겨다니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전쟁은 상상을 불허할 만큼 끔찍했습니다. 슬퍼할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이들을 애도하고 일가친지를 추모할 평화를 바랍니다.

“오랜만에 사람들은 안전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달아나야 한다거나, 어디선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휴전 합의 소식에도 여전히 불안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네타냐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02.
서방 지도자들은 휴전 합의가 중동 “평화”의 디딤돌을 놓았다고 추켜세운다.

아랍 정권들, 특히 이집트 정권은 하마스에 합의를 종용했다.

그러나 이번에 합의된 것은 트럼프의 가자지구 “20개항 구상” 중 “1단계”뿐이다. 트럼프의 구상은 식민 지배와 땅 강탈 방안으로, 그에 따르면 트럼프는 악명 높은 전범 토니 블레어와 함께 가자지구를 통치하게 된다. 이는 인종학살이 계속될 것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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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합의 관련 유의사항들
이번 휴전 합의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세 가지다.

1. 첫째, 최대 승자는 트럼프이지만 향후에 그는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
11. 트럼프의 계산은 무엇인가?
111. 트럼프는 미국이 제국을 유지하는 데서 힘이 부치고 세계 지배 능력이 갈수록 쇠락하는 문제에 대처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미국의 주요 맞수인 중국에 집중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제국주의 간 경쟁에 집중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이번 합의로 중동에서 서방의 이익과 이스라엘의 우위를 지키면서 전쟁을 끝내고자 한다.
트럼프는 이스라엘을 확고하게 지지하고 이스라엘 극우를 크게 고무했다.

112. 그러나 동시에, 걸프 연안 국가들과 새 시리아 정권과도 관계를 강화하려 한다. 끝없는 인종학살 전쟁은 여기에 도움이 안 된다. 트럼프는 이번 합의로 자신이 “끝없는 전쟁”을 끝낼 “피스메이커”임을 보이려 한다. 앞서 그가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합의 도출에 실패한 만큼 뭔가 보여 줘야 한다는 압력이 컸다.

113.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의 긴장
그러나 만사가 트럼프의 바람대로 이뤄진다는 보장은 없다. 휴전 합의까지의 험난한 과정은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다. 이스라엘은 미국 제국주의의 중동 경비견이고, 이스라엘이 자행하는 인종학살은 미국의 무기와 자금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신도 강력한 자본주의 국가로 발전해 더는 미국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중동의 지역 강국으로 성장했다. 이스라엘·이란·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튀르키예 등 중동 지역 강국들의 경쟁 시스템 속에서 이스라엘은 지난 2년의 인종학살을 거치며 세를 더 키웠다. 이스라엘은 지역 강국으로 부상한 덕분에 미국이 쥔 리드줄을 이전보다 더 강하게 당길 수 있다. 미국의 바람을 거슬러 더 많은 전쟁을 벌이겠다고 압박할 수도 있다.

113a. 인종학살의 규모는 트럼프와 전임자 “인종학살자 바이든” 하의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긴장을 일으켰다. 미국 지배계급의 일부는 이스라엘의 대규모 인종학살이 아랍 정권들에 맞선 저항을 촉발할 것을 우려한다. 아랍 정권들은 미국 제국주의의 중동 지배 구조의 일부다.

113b. 그러나 네타냐후는 결정적 순간에는 미국이 결국 자신의 역내 경비견 이스라엘을 지지할 것임을 안다. 그래서 네타냐후는 전쟁을 레바논·예멘·이란·시리아·카타르로 확대해 왔고, 매번의 확전을 이용해 서방의 지지를 다잡으려 했다.

113r. 그럼에도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근본에서 바뀌지 않았고, 주객이 전도된 것이 아니다. 지난여름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시설을 공격했을 때 이 점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트럼프는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을 지지하며 전쟁을 키우겠다고 위협했지만 재빨리 휴전을 선언했다. 원래 이스라엘은 공습을 지속하려 했지만, 트럼프가 단호하게 이를 거부하자 꼬리를 내렸다.
이스라엘이 카타르 도하에 있는 하마스 사무실을 폭격하자 미국과의 긴장은 더 커졌다. 카타르는 포로 협상을 중재하던 미국의 동맹국이다.

11s.지금 트럼프는 휴전이 성사되기를 바라는 만큼, 휴전을 깨지 말라고 이스라엘을 압박할 것이다. 그러나 시온주의 국가 이스라엘의 내부 역학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2. 식민 정착자 국가의 역학
둘째,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는 이스라엘인 포로 석방 문제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이스라엘 국가 내 분열은 여전하고 극우 세력은 벌써부터 포로만 돌려받고 전쟁을 재개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20.
그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을 빼앗으면서도, 유대인 인구 비율을 다수로 유지하는 것에 집착해 왔다. “유대인 인구가 최소 80퍼센트는 돼야 유의미하고 안정적인 나라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의 말이다.

이스라엘 정착자 식민주의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직면해 인종 분리(아파르트헤이트)와 인종학살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2023년 10월 7일 이후로는 확연히 인종학살 쪽으로 기울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분쇄하지 못한 탓에 내분이 커지고 정치와 사회가 우경화해 왔다.
군 장성들과 정보기관 등 이스라엘 국가의 일부는 수렁에 빠질 것을 우려해 가자지구 점령에 반대한다.

21. 그러나 극우 장관들인 베잘렐 스모트리치와 이타마르 벤그비르는 가자지구에서 인종청소를 밀어붙였다. 그리고 휴전에 거듭 어깃장을 놓아 왔다.

네타냐후는 그들의 극우 정당들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 당들은 휴전에 반대하고 있다.

목요일에 스모트리치는 이렇게 말했다. “인질들이 돌아오는 즉시 이스라엘 국가는 하마스를 진정으로 박멸하고 가자지구를 진정으로 무장 해제시키기 위한 노력을 이어갈 것이다. 그래서 더는 이스라엘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스모트리치는 이스라엘의 정책이 인종학살에서 인종 분리 정책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가 2023년 10월 6일까지 가졌던 잘못된 생각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못을 박아야 한다.”

그는 또한 이스라엘이 “억지스러운 진정, 외교적 화해, 억지웃음 행사에 다시금 중독돼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22. 네타냐후 정부를 비판하는 “자유주의적” 시온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네타냐후가 포로들을 돌려받지도 못하면서 “절대적 승리”라는 허황된 목표를 좇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포로들이 석방되고 나면 그런 논리로는 정부를 비판할 수 없을 것이다.
인종 분리 정책으로 현 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라는 “자유주의자”들은 이스라엘 내에서 갈수록 주변화되고 있다.

2s.
더욱이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세를 키웠고,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중동 세력 균형이 요동칠 때마다 그것을 이용해 자신과 미국 제국주의의 이익에 맞게 그 균형을 변화시키려 해 왔다.

이 모든 것을 미루어 보건대, 이스라엘이 전쟁으로 복귀할 압력은 상당하다.


3. 팔레스타인 해방의 전략
31. 셋째, 이번 휴전 합의는 이란 등 지역 강국에 의존하는 하마스의 전략적 한계를 드러냈다.

본지는 팔레스타인인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항할 권리를 언제나 지지할 것이다. 본지는 10월 7일 직후 발행한 신문 1면에서 팔레스타인 저항 지지를 천명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무장 투쟁과 중동 정권들의 지원에 의존해서는 서방 제국주의의 경비견 이스라엘을 물리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저항의 축’(이란, 시리아, 레바논 헤즈볼라, 예멘 후티, 하마스)이 이스라엘에 패배를 안겨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란은 약화됐고, 시리아 독재 정권은 타도됐고, 헤즈볼라는 지도자들을 잃었다.

더 근본적으로, 이 동맹은 중동 내 이란 정권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란 정권은 중동에서 나름의 이해타산이 있었고 결국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죽어가도록 방치했다.

32.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희망은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친서방 독재자들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을 고립시켰던 혁명들이 보여 준 위력에 있다.
아랍의 봄이 똑같이 ‘재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중동에 반(反)혁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인접한 중동 주요국에서는 자본주의가 전보다 더 발전해 왔다.
이는 중동 전역에서 자국 통치자와 제국주의 질서에 도전할 더 큰 노동계급을 만들어 내는 데 도움이 된다.
아랍 세계 바깥에서 우리의 과제는 자국 지배자들이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청산하도록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건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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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TENGELY-EVANS, Tomáš[토마시_텡글리-에번스]‘251009. <What’s behind Trump’s Gaza ceasefire?>
국역: 김종환 기자 ‘251010 @https://ws.or.kr/article/38023





[현재까지 Palestine 평화협정국면 관련, 가장 참조가치가 있는 자료 중 하나이기에 이미 통글로 게재되었지만 그 문서양식이 부담되어 혹시라도 아직까지 읽지 않고 넘겼던 분들을 위해 분석형태로 양식전환하여 수정게재합니다.]


rhizome 2025-10-26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이스라엘, 휴전 발표 이후에도 계속 학살 >




가자지구에 평화는 없다.
휴전 발표 후에도 이스라엘은 학살을 지속하고 있다.
10월 16일 축구를 하던 중 이스라엘 총격으로 사망한 11세 팔레스타인 소년을 포함해 휴전 발표 후 고작 열흘 만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을 100명 가까이 죽였다.


팔레스타인인 언론인 알라아는 본지에 이렇게 전했다. “아직 바뀐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살던 곳으로 이제 막 돌아오려 하는데, 그들이 와도 정착할 기반 시설이 전혀 없습니다. 동쪽으로 가려 한 사람들은 사살당했습니다.”

10월 19일 일요일에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대대적으로 포격해 최소 15명을 죽였다.

다음 날에도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점령에 계속 저항한다는 이유로 팔레스타인인들을 죽였다. 그에 더해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이스라엘인 포로의 시신을 붙들고 내놓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하마스는 그 시신들이 잔해 아래 깊숙이 묻혀 있어서 파내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구호품 반입을 모조리 차단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스라엘은 “추후 발표가 있을 때까지” 라파흐 국경을 계속 폐쇄할 것이라며, 굶주리는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구호를 모조리 가로막았다. 인종학살이 한창일 때와 다를 바 없이, 구호품을 실은 트럭이 가자지구 밖에 길게 늘어서 있다.

알라아 씨는 이렇게 전했다. “구호는 정말 더디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물입니다. 사람들은 살 곳을 마련하고 연료를 이용하고 요리를 할 물건과 장비가 필요해요.”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강도 높은 활동”을 지속할 것이라고 선언했는데, 아예 전쟁 재개를 선포하라고 압박하는 자들도 있다.

휴전 합의에 반대한 이스라엘 재무장관 베잘렐 스모트리치는 “전쟁!” 한 단어만 적은 게시글을 엑스(옛 트위터)에 올렸다. 이스라엘 극우 야당 ‘이스라엘 베이테누’(이스라엘은 우리 집)당 지도자 아비그도르 리베르만도 강경 대응을 주문했다.

“생존 인질이 모두 귀환했으니 이제 이스라엘은 최대한 명확하게 선포해야 한다. ‘저들이 무기를 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싸울 것이고 저들을 해체시키겠다.’

“저들이 시신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쳐들어가서 직접 거둬 올 것이다. 저들이 휴전 합의를 위반한다면? 전투를 재개할 것이다.”

이렇듯 네타냐후가 인종학살 지속 압박을 받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는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만행을 지지하기를 망설이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주 이스라엘 의회 연설에서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들을 찬양하며 “세계가 다시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트럼프는 미국은 중동이 “매우 평화로워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이 만행을 지속하는 가운데 트럼프는 중동에서 미국의 이익을 확보하려 애쓰고 있다. 이스라엘이 미국 제국주의의 경비견 노릇을 하는 동안 트럼프는 걸프 연안국들과의 협정으로 미국의 힘을 다시 각인시키려 기를 쓰고 있다.

현재 트럼프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군사 협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성사시키려면 카타르 수도 도하를 폭격한 바 있는 이스라엘을 제어해야 한다.

그러나 트럼프의 “평화” 협정은 이스라엘이 만행을 지속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트럼프의 계획은 구호 물자 공급망을 이스라엘이 통제하고, 이스라엘군을 가자지구에 계속 주둔할 수 있게 해 팔레스타인에 대한 서방의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게 돼 있다. 아직도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알라아는 이렇게 전했다. “주민들은 가자지구에서 앞으로 벌어질 일을 여전히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미국이 주민들을 계속 괴롭혀서 결국 가자를 떠나게끔 만들려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현재 가자지구는 완전히 파괴됐습니다. 삶도 생필품도 없어요. 가자지구를 떠나도록 많은 주민들을 등 떠미는 상황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전쟁이 멈춰서 어쨌든 안도감을 느낍니다. 한동안 숨을 고르고, 공포 속에서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 아이들과 친지들을 찾을 시간을 원하는 거죠.”

이스라엘은 서방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서 가자지구를 초토화시키고는 이를 “평화”라 부른다.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만행은 해방이 서방에 의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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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저자: TOWNEND, Arthur ‘251020.<Israel renews horror after ceasefire>
역자 : 김준효 기자 @https://ws.or.kr/article/38090



rhizome 2025-10-27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
하노이 회담 당시 조성된 국제역학관계와 그에 기반해 주요 강대국들이 채택하고 있던 기본전략틀들을 고려한다면 애초부터 성사가능성이 거의 없던, 개인적 지지율 제고에 더 초점이 맞춰진 정치외교 쑈에 불과할 것임은 이미 예정된 결과임이 명약관화하게 예측되고 있었기에 당시 헛된 기대를 품고 부풀어 있던 사람들이 대단히 어리석게 보였다.


그러나 이제 하노이 회담 무산의 댓가로 북한 비핵화는 실현가능성이 전혀 없는 망상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렸[고, (극우화된) 보수진영이 주장하는 남한 자체 핵무장론 또한 역시 동일한 수준의 망상일 뿐이며, 만에 하나 추구 시도라도 하려 들 경우 그 누구도 아닌 미국으로부터 대대적인 보복과 응징을 초래하게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유일한 가능성은 핵우산을 통한 남한보호요구와 북한 핵동결 및 보상을 통한 감축 방안 뿐이]다.


나날이 변화되어가는 국제정세와 역관계 속에서 북한을 계속 적대시하며 방치하는 전략과 정책은,
그날의 하노이가 절호의 기회였으며 그때의 선택이 오늘날 돌이킬 수 없는 악수[惡手]가 되어 되돌아왔듯, 북한을 다음 세기 패권국가를 결정지을 수도 있는 최대변수로 계속 키울 또 다른 악수의 연속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아직 별로 크게 잃을 게 없는 현재 시점에서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대대적인 포용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이

북중러 동맹을 핵심축으로 진행되어 나갈
a) 타이완 문제와
b) BRICS 중심 ‘차세기 공업중심국 연합‘ 형성을 통한 최대도전세력(/)요인으로 급속히 성장전화하는 문제
c) 이를 통해 세계최대의 집중 화약고인 동북아가 3차 대전의 격전지로 폭발하는 문제

등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고, 여기서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핵개발 및 군사동맹 강화 등등 그 비용은 앞으로 비교불가능할 정도로 계속 커져갈 뿐일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이제 최대 몸값에 이른 ˝가난한 약소국˝ 북한이 지금까지 보여준 이러한 행보들은 앞으로 세계외교사 교과서에도 남을 수 있는 현명하고 영리한 선택들이었으며, 앞으로 첩첩산중의 난제들만을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2. 참고로 핵기술( 개발)이 국제패권체계에서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건지 쥐뿔도 모르고 걸핏하면 자체 핵개발을 주장해대는 극우보수세력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짧게 덧붙인다.

제2차 세계대전WWII을 마감지은 결정적 요인이 당시 쏘련 인민들이 레닌그라드[현 페테르스부르크]를 중심으로 펼친 전설적이고 영웅적인 장기방어전의 성공이 독일군사력에 몰고 온 치명상 때문이었는지, 미국의 원폭개발성공 때문이었는지는 아직도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욱 주목해야 할 훨씬 더 중요한 점은 대독 쏘련방어전이 아직 전형적인 19세기 전쟁양식에 기반한 마지막 대전투였다면, 원폭개발경쟁과 이를 통한 암묵적 패권서열정립은 그와는 전혀 다른 완전히 20세기적인 새로운 전쟁양식이라는 사실이다.
이 세기의 국제패권서열체계를 결정하는 최후의 궁극적 핵심요인이 핵(개발)기술이라는 바로 이 점이 그토록이나 엄격하고 냉혹한 제재가 가해져 온 이유이며, 이제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새로운 사실은 21세기의 새로운 패권서열을 정립시킬 핵심(군사)기술은 이미 흡사 바둑과도 같은 ‘War-game 전략 Simulation‘으로 진화된 21세기 전쟁양식에서 더이상 핵폭(만)이 아니라 ASI[Artificial Super (General) Intelligence=인공초(일반)지능]+Quantum Sencing & Computing이 될 수밖에 없고 이 양축 기술의 상호증폭은 핵기술의 위력을 쉽게 능가하게 될 것이고 다행히 아직 핵기술만큼의 잔혹한 제재도 확립되어 있지 않은 이행기이자 전환기이기 때문에 차라리 여기에 전력을 집중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을 자체 핵무장 같은 헛소리보다 그나마 현 시점에서 좀 더 합리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rhizome 2025-11-03 0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유엔 특별보고관 “한국도 가자 학살 공모국···이스라엘 전투기에 부품 공급” >




F-35 전투기 부품 공급한 19개국에 한국 포함
회의에 화상 참석해 미·영·중·일 등 63개국 비판


프란체스카 알바네제 유엔 팔레스타인 인권 특별보고관이 28일(현지시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뉴욕 유엔 총회에 원격으로 참석한 뒤 기자회견을 열었다. AFP연합뉴스




유엔 특별보고관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집단학살(제노사이드)에 한국을 비롯한 63개국이 공모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한국은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공습에 쓰인 F-35 스텔스 전투기에 부품을 공급한 19개국 중 하나로 언급됐다.

프란체스카 알바네제 유엔 팔레스타인 점령지 특별보고관은 28일(현지시간) 유엔 총회에서 ‘가자 집단학살: 집단적 범죄’ 보고서를 발표했다. 알바네제는 미국·영국·독일·프랑스·한국·중국·일본 등 63개국이 이스라엘에 대한 외교·군사적 지원, 이스라엘과의 경제 협력, 인도적 지원의 무기화 등을 통해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가능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알바네제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목 조르고 굶기고 폐허로 만들었다”며 “불법적 행위와 의도적 방관을 통해 너무나 많은 국가가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방조했다”고 밝혔다.

그는 가자지구 전쟁이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중계된 학살”이라고 비판했다. 또 미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휴전 촉구 결의안 표결 등에서 7차례 거부권을 행사해 이스라엘에 외교적 보호막을 제공했으며 휴전 협상을 통제했다고 지적했다. 다른 서방 국가들은 기권이나 내용이 약화된 결의안에 동의함으로써 이에 협조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이스라엘의 대량학살 증거가 드러나는 와중에도 많은 국가가 이스라엘에 계속 무기를 공급해왔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의회에서 이스라엘 방위를 위해 264억달러(약 37조8000만원) 규모의 예산안을 통과시켰으며, 독일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무기를 이스라엘에 수출했다. 영국은 2023년 10월 전쟁 발발 이후 가자지구 상공에서 600회 이상의 정찰 비행을 하며 이스라엘에 정보를 공유했다.

한국과 일본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공습에 쓴 핵심 무기인 F-35 스텔스 전투기에 부품을 공급한 19개 국가에 포함됐다. 중국은 이스라엘에 무기·탄약을 직접 수출한 국가로 언급됐다.

알바네제는 또 유럽연합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유로 러시아를 제재하면서도 이스라엘과 교역을 지속했다고 지적했다.

알바네제는 이날 미국 뉴욕에서 열린 총회에 직접 가지 못하고 화상으로 참석했다. 지난 7월 미국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등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체포영장 발부에 관여했다’며 알바네제를 제재했기 때문이다.

알바네제는 “미국 제재는 유엔의 독립성, 성실성, 정신 자체에 대한 공격”이라며 서방 강대국들이 “선언과 규탄을 넘어서는 구체적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유엔 특별보고관은 특정 지역이나 주제와 관련한 인권 상황을 평가하는 외부 전문가다. 특별보고관은 공식적 권한은 없지만 그들의 견해는 ICC를 비롯한 국제 사법기관 검사들에게 주요 정보로 쓰이며 세계 여론에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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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izome 2025-11-03 0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미·중 정상회담: 잠시 숨만 고르는 합의, 패권 경쟁은 계속된다 >
—어느 편을 들든 노동계급에 득될 건 없다




10월 30일 부산에서 미국 대통령 트럼프와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이 만났다.

트럼프 정부 2기가 출범하면서 미국과 중국이 서로 무역 전쟁을 벌여 왔기에 이번 회담은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핵심 쟁점들이 여전히 살아 있기에 양국의 갈등은 머지않아 다시 격화될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양측은 갈등이 더 커지지 않게 일단 타협했다. 미국은 펜타닐 유입을 문제 삼아 중국에 부과한 ‘펜타닐 관세’를 약간 낮추고, 중국은 대두 등 미국산 농산물 수입을 재개하고 희토류 수출 통제를 1년간 유예하기로 했다.

앞서 트럼프 정부는 중국산 제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해 중국의 제조업과 무역 성장을 견제하려고 했다. 중국이 증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미국의 군사적·기술적 우위에 도전하는 것을 물리치고자 한 것이다.

미국의 고율 관세에 중국도 맞대응해, 한때 양국 모두 상대국 수입품에 대한 관세가 100퍼센트 이상으로 치솟았다. 이후 양국은 초고율 관세 부과를 잠시 유예하며 협상을 거듭해 왔다.

이 외에도 트럼프 정부는 엔비디아 반도체 칩 수출을 통제하고 중국 선박에 입항 수수료를 부과했다. 또한 미국산 소프트웨어의 중국 수출을 제한하는 조처를 하려고까지 했다.

트럼프의 무역·제조업 선임 고문인 피터 나바로 같은 자는 무역 전쟁으로 미국과 중국 경제가 디커플링되고 미국 경제의 경쟁력이 회복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물론 무역 전쟁은 부동산 침체, 부채 문제 등 이미 문제가 많은 중국 경제에도 부담을 가중시키는 악재였다.

하지만 중국도 트럼프를 괴롭힐 맞대응 수단이 있었다. 중국은 보복 조처로 미국산 대두 수입을 중단했다. 중국은 미국산 농산물의 최대 수출 시장이다.

무엇보다, 시진핑 정부는 희토류 수출 통제를 강화했다. 희토류는 반도체·전기차·스마트폰 등 첨단 산업에 필수적인 자원이고 당연히 첨단 무기 생산에도 필요한데, 미국 등 전 세계가 중국의 희토류 공급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시진핑 정부의 희토류 수출 통제가 본격화되면 미국 기업들뿐 아니라 미국 군대도 상당한 압박을 받을 수 있었다.

이번 미·중 정상회담으로 트럼프와 시진핑은 한 발짝씩 물러서며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휴전’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불확실하다.

일단 미·중 통상 갈등의 주요 쟁점이 다 말끔히 해결되지 않았다. 가령 미국의 첨단 반도체 수출 통제에 대해서 분명한 합의가 안 된 듯하다. 그동안 유예된 초고율 관세 부과에 대해서도 명확한 언급이 없다. 또한 지정학적으로 가장 첨예한 문제인 대만 문제는 이번 회담 의제에서 아예 빠졌다.

미국과 중국이 갈등을 벌여 온 핵심 문제들이 여전히 다 살아 있기에, 양국의 제국주의적 갈등이 머지않아 다시 격화될 공산이 크다.

이번 정상회담에 앞서 트럼프는 말레이시아와 일본을 잇달아 방문하며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세를 과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중국 견제에 필요한 포석을 깔아 놓았다.

먼저, 트럼프는 태국·말레이시아·캄보디아 정상들과 상호 무역 협정에 서명해, 희토류 등 핵심 광물 공급에 협력하는 대가로 관세 문제에서 혜택을 주기로 했다. 그중 말레이시아에는 1,600만 톤 이상의 희토류가 매장돼 있고, 중국도 이 희토류에 눈독을 들이며 말레이시아에 접근하는 중이었다.

동남아시아 지역은 역내 재해권을 확보하려는 중국의 도전에 맞서 미국의 군사력도 전진 배치되면서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트럼프는 일본에서 일본 총리와 함께 요코스카 해군 기지를 방문하며 미·일 밀착을 과시했다. 또한 중국·북한을 견제할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에 동의해 줬다. 이재명 정부가 트럼프 정부의 중국 견제 노력에 협력을 약속한 것이다.

미·중 정상회담 개최 직전에 트럼프는 33년 만에 핵무기 실험을 재개하겠다고 선언했다. 핵무기를 강화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에 맞서 미국의 핵무기 전력 우위를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아시아 순방을 마치고 트럼프가 귀국하면 트럼프 정부는 베네수엘라 지상 작전에 관해 의회에 보고할 예정이다. 트럼프 정부가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벌이는 대대적인 군사적 위협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축출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6년 만에 만나 환하게 미소 짓고 악수했지만, 제국주의적 체제 속에서 외교 대화로는 양국 지배자들의 상호 불신과 적대가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양국의 갈등이 한반도를 비롯한 전 세계에 커다란 균열과 위험을 낳고 있다.







rhizome 2025-11-03 0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북·중·러 협력,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진보적 대항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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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일 베이징에서 열린 전승절 열병식은 중국이 자신들의 군사력을 과시하는 장이었다. 중국 정부는 새 대륙간탄도미사일, 극초음속미사일, 무인잠수정, 스텔스 드론 등 신형 무기를 대거 공개했다. 이 중에는 아직 미국조차 실전 배치를 하지 못한 무기도 있었다.

그런 첨단 전력을 보며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과 그 파트너 국가들에게 유리했던 역내 군사력 균형이 돌이킬 수 없이 변했다” 하고 우려했다.

이 열병식 현장에 시진핑, 푸틴, 김정은이 나란히 등장해 크게 주목받았다. 북·중·러 정상이 66년 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그 뒤 10월 11일 북한의 조선로동당 창건 80주년 열병식에도 중국과 러시아는 각자 고위급 대표단을 보냈다. 그래서 많은 주류 언론들이 중국, 러시아, 북한이 이른바 ‘반미 연대’를 형성했다며 신냉전의 도래를 언급했다.

이런 북·중·러 협력이나 브릭스(BRICS)와 상하이협력기구(SCO) 같이 중국과 러시아가 중심이 된 비서방 국제 네트워크들에 기대를 거는 좌파들이 있다. 미국이 지배해 온 기존 국제 질서가 다극화된 새 질서로 전환되면서 미국 제국주의의 횡포가 견제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분명 최근 들어,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이후 중국, 러시아, 북한의 관계는 더 가까워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정말 미국의 패권에 맞서 항구적인 평화 실현에 이바지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최근 북·중·러 3국의 관계 발전 양상과 그 맥락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가 이끄는 비서방 국가들의 네트워크가 과연 국제 반제국주의 운동에 이로운 편인지 아닌지를 따져 보고자 한다.

북·중·러 관계의 변화
9월 전승절 행사에 맞춰 중국을 찾은 푸틴은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오랜 “우정과 상호 지원의 전통”이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두 강대국의 관계는 푸틴의 말과는 달랐다.

1950년대 중반부터 중국과 소련은 공공연히 갈등을 벌여 온 관계였다. 특히 1969년 국경인 우수리강에서 두 나라 군대가 대규모 유혈 충돌을 했고, 그때 소련은 중국에 대한 핵공격까지 검토했다.

우여곡절 끝에 열전 위기는 일단 가라앉았지만, 소련과 중국 양국은 유사시 상대방을 핵미사일로 공격할 태세를 유지했다. 그리고 중국은 소련을 견제하려고 미국 제국주의와 손잡았다. 1972년 마오쩌둥은 닉슨과 회담했다. 이처럼 냉전기에 중국과 소련은 첨예하게 대치한 지정학적 맞수였다.

중국과 러시아가 밀접해지기 시작한 것은 냉전이 끝나고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다. 제국주의의 세력 균형이 변하면서 두 국가가 서로 손잡을 필요가 커진 것이었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발돋움했고 그에 힘입어 지정학적 위상도 매우 높아졌다. 만약 미국이 그 추세를 방치하다가 세계 경제의 역동적인 중심이 된 아시아에서 중국에 밀려난다면 세계 패권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중국을 최대 위협으로 간주하고 중국 견제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또한 러시아는 동유럽으로 확장하는 나토의 동진에 위협을 느꼈다.

그러면서 중국과 러시아는 서방 제국주의의 공세에 공동으로 대응할 필요를 느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에 대한 대응으로 서방이 대러 제재를 가하자, 이를 계기로 중·러 양국의 경제·군사 교류가 전보다 활발해졌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직전에, 시진핑과 푸틴은 공동선언에서 나토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공동 대처할 의지를 표명했고, 중·러의 협력에는 “한계가 없다”고도 선언했다.

그렇다면 중국과 러시아의 협력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돼 왔는가?

우선, 중국과 러시아는 브릭스나 상하이협력기구 등의 새로운 비서방 국제기구들을 창설해 협력하고 있다. 가령 상하이협력기구를 통해 중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관리하고 그 지역에서 서방의 영향력 확장 시도를 견제하고 있다. 브릭스는 달러화가 아닌 새로운 기축 통화 촉진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브릭스는 응집력 있는 집단이 아니어서 대안적 화폐를 제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최근 이집트·이란·인도네시아·UAE 등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의 몇몇 신흥국들이 추가로 가입하며 그 세가 확장됐다.

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이후 중·러의 경제적 관계는 더 깊어졌다. 서방이 러시아 경제를 무너뜨리겠다고 달려들었을 때, 중국과의 교역이 러시아의 숨통을 틔워 줬다. 러시아는 서방에 의해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퇴출된 후 중국의 위안화 국제결제시스템(CIPS)을 무역 결제 시스템으로 활용하고 있다. 러시아의 대외 무역에서 중국의 비중은 2021년 18퍼센트에서 2023년 현재 33퍼센트로 증가했다. 러시아는 석유와 천연가스를 중국에 대량 판매해, 지난해 기준 러시아산 원유가 중국 전체 에너지 수입의 거의 20퍼센트에 이른다. 반대로 중국은 반도체나 공작 기계 등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것들을 러시아에 수출하고 있으며, 러시아 국내 시장에서 서방 소비재의 자리를 중국산이 대체했다.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 협력도 발전했다. 상하이협력기구 차원에서 정기적 연합 훈련이 진행돼 왔고, 미국과 중국이 힘을 겨루는 동아시아의 주요 해역에서 합동 해상 훈련도 자주 하고 있다. 지난해 중국과 러시아는 동해에서만 연합 훈련을 5차례나 벌였다. 중국군은 러시아의 군사 기술과 무기를 받아들여 무기 수준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북한도 중국·러시아와 전보다 더 밀착하고 있다. 이는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 변화에 맞춰 북한의 대외 행보가 변했음을 의미한다.

좌파 일각에서는 북한이 오랫동안 “반제 자주”의 한 길을 일관되게 걸어 왔다고 여긴다. 하지만 냉전 종식 이후 북한 외교의 실제 궤적은 그런 신화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다.

냉전이 끝나고 북한 정권은 안보 위협에 대응해 핵과 미사일 개발에 힘을 쏟는 한편, 미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고립에서 벗어나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숨 쉴 틈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래서 북한 정권은 기회가 될 때마다 친구가 될 의사가 있음을 미국 측에 전달했다. 예컨대 1992년 김용순 조선로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김일성의 특사 자격으로 뉴욕에 갔고, 주한미군이 중국 견제에 주력하고 북한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그 주둔을 용인할 수 있다는 김일성의 의사를 미국 정부에 전달했다.

그렇지만 그런 시도는 매번 미국에 의해 좌절됐다.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파탄 난 후 김정은 정권은 중국과 러시아에 더 밀착하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 듯하다. 특히 2021년 8월 아프가니스탄 철군으로 미국 제국주의의 약화가 더 도드라져 보이자 그 방향성이 더 뚜렷해졌다.

지난해 북한은 러시아와 ‘포괄적 전략 동반자 조약’을 맺어 강력한 군사·경제 협력에 합의했다. 이때 김정은은 북한과 러시아가 동맹이 됐다고 말했다. 이후 북한은 러시아 쿠르스크에 군대를 대규모로 파견해 러시아의 전쟁을 도왔다. 북한 당국의 발표만 봐도, 많은 북한 청년이 쿠르스크 전선의 소모전에서 희생됐다. 김정은 정권은 그 청년들의 피를 대가로 러시아로부터 경제와 군사 지원 등 반대급부를 기대하고 있다.

또한 서방 경제로부터 고립된 북한 경제에 중국과의 교역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중국 경제의 국제적 위상은 최근 몇 년 새 더 강해졌다. 이번에 베이징에서 시진핑을 만난 김정은은 양국의 “호혜적 경제·무역 협력을 심화”하자고 제안했다. 북한 노동자의 중국 파견 확대 등 경제 협력을 강화해 만성적인 대중 무역 적자가 줄어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런 세력 균형 변화 때문에, 설사 나중에 트럼프와 김정은이 다시 만나게 돼도 북·미 협상의 의미 있는 진전이 이뤄지기는 전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북·중·러의 협력을 응집력이 강한 동맹으로 볼 수는 없다.

한·미·일 삼각 협력과 같은 다자간 협력 메커니즘이 북·중·러 3국 사이에는 없다. 현재 북·중·러 3국의 관계는 중·러, 북·중, 북·러 같이 양자 간 제휴로만 이뤄지고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맥락 속에서 협력 관계가 증진된 것이어서,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중장기적으로 이 국가들 간의 밀착이 계속 발전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될 법하다.

트럼프 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것도 이 계산법에 따른 것이다. 전쟁이 끝나야 중국과 러시아의 틈을 벌릴 책략의 여지가 생긴다고 보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가 계급을 가리켜 “서로 싸우는 형제들”이라고 했듯이, 중국·러시아·북한, 이 세 자본주의 국가들도 서방의 압박에 맞서서 죽이 맞기도 하지만 서로 이해관계가 달라 충돌하기도 한다.

가령 러시아 지배계급은 연해주나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러시아가 보기에 중앙아시아는 옛 소련의 일부였던 만큼 자국의 전통적인 세력권에 속하고 연해주는 제정 러시아가 청나라한테 빼앗은 지역이다. 그런 지역들에서 인프라 투자, 인력 진출 등으로 중국의 존재감이 커지는 게 내심 불안한 것이다.

중국도 북한군의 쿠르스크 파견 등 북·러의 군사적 밀착을 달가워하지 않는 듯하다. 러시아와 북한의 군사 협력이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겨냥한 한미일 동맹이 강화되는 빌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러 밀착으로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도 줄어들 수 있다. 북한의 핵개발 문제도 중국과 북한 사이에 거북하고 껄끄러운 쟁점이다. 이렇게 상충하는 이해관계들이 있어 북·중·러의 제휴는 어느 정도 제한적일 공산이 크다.

그렇지만 미국이 관세 전쟁과 군사력 배치로 대중국 견제 수위를 높이고, 한미일 동맹이 갈수록 체계화되며, 일본과 한국 정부가 공언한 대로 역대급 군비 증강을 지속하는 점 등은 북·중·러 3국이 서로를 까다롭고 불편하게 보면서도 필요한 파트너로 여기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중국, 러시아, 북한 간의 협력이 증대된다 한들, 그것이 국제 노동계급에 이롭고 평화 실현에 기여하는 것인가? 당장 북한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하고 거기에 군대와 무기를 대는 것은 “반제”와 “자주”에 어긋날 뿐더러 우크라이나 전선과 한반도에서 위험 고조에 일조하는 행위다. 북·중·러의 협력은 그 어떤 진보적 구실을 하기는커녕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행보와 마찬가지로 역내 정세를 불안케 할 뿐이다.

중국과 러시아도 제국주의 국가다
9월 중국 전승절 기간에 맞춰 중국 톈진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 정상회의에서 중국과 러시아 등 참가국들은 “주권 평등에 기초한 다자주의,” “국제 관계의 진정한 민주화”를 주창했다. 북한의 김정은도 전승절 행사에 참석해 그런 목소리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가 과연 그런 슬로건들에 어울리는 행보를 해 왔는가?

세계적으로 지정학적 분열이 심화되고 갈등이 커지면서, 많은 급진좌파들이 진영 논리를 지지하고 있다. 제국주의를 미국의 패권으로 축소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라 미국을 견제하는 ‘진보적’ 균형추라고 본다.

그러나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등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제국주의를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다. 이 전통에서 제국주의는 한 강대국이 약소국들을 지배하는 것으로 극도로 협소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제국주의에 대한 올바른 정의는 자본주의가 임금 노동자 착취에 기초해 있고 경쟁적 자본 축적으로 추동되는 시스템이며, 제국주의는 그 발전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즉, 국경을 넘어 경쟁을 벌이게 된 기업들이 국가와 융합하면서 벌어지는 국가들 간 경쟁이, 소수의 강대국들이 세계와 노동계급에 대한 지배력과 착취를 놓고 쟁투를 벌이는 경쟁 시스템으로 발전한 것이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핵심이다.

그런 규정에 비춰 보면, 한 강대국을 다른 강대국보다 ‘진보적’이라고 보는 진영 논리는 잘못된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는 언제나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존재했고, 비록 미국의 힘과 위상에는 못 미치지만(최근 많은 진영론자들은 미국 힘의 약화를 일면적으로 지적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과 러시아도 제국주의 국가다. 중국, 러시아, 북한의 협력 관계도 또 다른 제국주의적 세력망에 불과하다.

어떤 이들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제 정치적 행위를 미국 제국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가령 중국이 남중국해 영토 분쟁에 뛰어든 것은 제국주의적 침략 야망 때문이 아니라 “영토 보전의 일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국제적 경쟁 체제의 한복판에 있고, 그래서 미국과 마찬가지로 자국 자본들의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 제국주의 강대국으로서 행동한다.

중국 지배계급에게 남중국해 지배력 확보는 합리적 선택일 수 있다. 중국 경제가 ‘세계의 공장’이 되면서 중국 국가의 전략적 우선순위도 바뀌었기 때문이다. 안전한 해상 교통로 확보가 대외 무역과 에너지 수입이 많은 중국 경제에 사활적인 과제가 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서태평양 바다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은 중국에게 불안한 것이고, 그래서 가능한 한 미국을 동쪽으로 밀어내려고 한다.

이처럼 중국은 자신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 속에서 나름의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전략이 남중국해 주변국들을 압박하고 미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하며 지역의 불안정을 높이고 있다.

주권 존중을 주창해 온 중국도 갈수록 자신들의 힘을 이용해 공세적 외교를 벌이곤 한다. 시진핑은 일체의 타협 없이 자국의 “핵심 이익”을 지키겠다고 말해 왔다. 그 핵심 이익에는 대만이나 티베트 외에 아프리카, 중동, 남미 등 세계 곳곳에 진출한 중국 기업들의 이익도 포함된다. 특히 시진핑은 반드시 대만을 중국에 통합하겠다고 선언했고 중국군은 대만을 포위하는 군사 훈련을 빈번하게 벌이고 있는데, 이는 분명 대만인들의 자결권을 무시한 제국주의적 압박이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푸틴 정권은 대러시아 국수주의를 부추기고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자국 주변 지역에서 배타적인 세력권을 확보하려고 해 왔다. 더 나아가 미국이 중국과의 경쟁에 초점을 맞추는 틈을 이용해 중동과 아프리카 등지에서 운신의 폭을 넓히며 시리아의 독재자 아사드 등을 지원했다.

따라서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브릭스나 상하이협력기구 같은 국제기구들도 결국 호혜로운 국제 질서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도 자본주의의 토대 위에서 기존의 국제 세력 균형을 자국에 유리하게 재편하려는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브릭스는 미국의 동맹보다는 응집력이 덜한 블록이지만, 그런 기구의 성장은 미국의 국제 질서 장악력이 상당히 약화됐음을 보여 준다. 브릭스 회원국들은 대부분 서방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도 고려해 주지 않는다는 불만을 갖고 모인 신흥국들이다.

그렇지만 브릭스 회원국들도 노동계급과 빈민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데서는 서방과 다르지 않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좌파 학자이자 활동가인 패트릭 본드는 브릭스가 친기업적 의제를 추진하며 그 회원국들은 자기 지역 내에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활성화하고 정당화하며 확대한다”고 비판했다. 브릭스가 말하는 “남남 협력”이란, 미국과 서방의 대기업들이 아니라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대기업들이 글로벌 사우스 내에서 더 많은 기회를 얻겠다는 의미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중국이 차관과 대출을 이용해 남반구 나라들에 진출하는 방식도 서방 강대국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가령 중국은 일대일로를 통해 개발도상국들에 막대한 대출을 제공하는데, 그 돈은 주로 현지에서 중국 업체를 이용하고 중국 자재를 조달하는 데에 지출된다.

일대일로에 참여하려고 중국한테서 돈을 빌렸다가 못 갚게 되면, 중국은 상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 실제로 스리랑카가 빚을 갚지 못하자, 2017년 중국은 그 대가로 스리랑카 함반토타 항구를 99년간 운영할 권리를 가졌다.

패트릭 본드는 중국이 아프리카 현지 독재자들과 맺는 제휴 관계도 비판했다. 가령 짐바브웨 독재 정권은 중국의 투자로 직접 이득을 봤다. 중국 기업은 다이아몬드 매장층 개발 지원의 대가로 짐바브웨 군부에 9,800만 달러를 줬다. 아프리카에서 중국은 서방 제국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지역 정치에 개입하고 현지 권력자들의 부패에 연루되고 있는 것이다.

야수를 쓰러뜨리려면
오늘날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들의 대결은 상이한 생산양식 간의 충돌이 아니라 세계자본주의 시스템 내부에서 벌어지는 쟁투이며 제국주의간 경쟁이다. 따라서 중국, 러시아와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결합된 네트워크들이 부상해도 미국 제국주의의 헤게모니가 야기하는 문제들을 상쇄하거나 완화시켜 주지 못한다. 오히려 지정학적 분열은 강화되고 제국주의적 갈등은 더 격화될 뿐이다.

그리고 세계 각국의 지배자들은 미국이나 중국 또는 그 둘 다와 협력해 자국의 위상을 높이려 한다. 그러나 자국 지배계급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노동계급은 더 큰 착취와 억압에 시달릴 뿐이다.

따라서 제국주의를 쓰러뜨리고 항구적 평화를 쟁취하려면 제국주의 시스템을 지지하는 지배계급에 맞서 노동계급의 저항과 국제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싸우는 제국주의 국가들 중 한쪽을 지지하기를 거부해야 한다.

어느 강대국이 더 공격적이냐, 또는 누가 더 방어적인가는 전혀 본질적인 쟁점이 아니다. 110년 전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노예 100명을 소유한 노예 소유주가 노예 200명을 소유한 노예 소유주에게 대항해 ‘공정한’ 노예 재분배를 요구하며 전쟁을 벌인다고 상상해 보라. 이런 사례에 ‘방어적’ 전쟁이나 ‘조국 방위’ 전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명백히 역사적으로 오류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는 약삭빠른 노예 소유주가 평범한 사람들을 속이는 순전한 기만일 뿐이다.”

무엇보다 혁명적 국제주의자들은 자국의 전쟁 노력을 반대해야 한다. 친서방 나라인 한국의 혁명적 좌파는 서방 제국주의에 협력하려는 자국 정부의 대외 정책과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대중 운동 건설에 주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는 서방 제국주의를 권위주의의 위협에 맞서는 민주주의 세력으로 착각하는 또 다른 형태의 진영 논리를 우선 비판해야 한다. 그런 시각을 받아들인 서방 좌파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나토와 러시아 간의 대리전임을 보지 못해 혼란에 빠졌다.

한국의 경우, 앞으로 중국에 맞서 대만의 자결권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위선적 주장에 좌파가 현혹되지 않고 한국 정부가 미국을 지원해 대만 문제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반대하는 것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일부 좌파처럼 반제국주의의 주체를 국제 노동계급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등 소위 ‘진보적’ 국가군으로 보는 진영 논리를 따르게 되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좌파가 그 국가 지배계급과 연대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협력과 책략을 반제국주의의 주된 요소로 중시하며 아래로부터의 연대와 저항에는 덜 주목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진영 논리는 소위 ‘진보적’ 국가들에서 노동계급과 빈민이 자국 정부와 지배계급에 저항할 때 이를 외면하게 만들 수 있다. 내부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이나 소수민족 반란이 그 국가들의 힘을 갉아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좌파 일부가 러시아의 체첸 등 소수민족 억압을 외면하거나 홍콩 항쟁에 대한 시진핑 정부의 탄압을 변호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지금도 네팔 반정부 시위를 두고 일부 반미자주파 활동가들은 서방이 배후 조종한 “색깔 혁명” 시도라고 의심하고 있다. 이번 시위로 무너진 네팔 정부가 앞서 일대일로 참여 등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를 강화했고 총리가 직접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부패에 네팔 대중의 불만이 쌓이다가 폭발했음을 중시해야 한다. 네팔 항쟁에서 노동자와 농민 운동이 성장하고 새로운 좌파가 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 지금으로선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중국이 미국을 견제할 균형추라고 보는 좌파들 대부분은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중국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한국 국가가 미국 중심 외교에서 벗어나 중국과 러시아 등에 적대하지 않는 “평화 공존”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가령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 질서》(2023년 출판)라는 저서에서 “각국이 전략적 자율성을 발휘할 중간지대 혹은 중립공간의 창출이 [한국이] 우리 지역에서 만들 수 있는 최대치”라고 주장했다. 진보당도 “북한, 미국, 중국과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는 중립 외교를 제안하며, 그것이 이재명 정부의 ‘실용 외교’와 상호 보완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생각은 친민주당 자유주의자들의 인식과 커다란 접점이 있다. 그들도 대부분 국제 질서가 다극화된 질서로 전환되는 것에 대비해 외교 관계를 전보다 더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제국주의 국제 질서 안에서 평화적인 지역 협력 구도를 만들어 불안정과 분열을 피하겠다는 구상은 공상적이다. 제국주의의 위기는 국가가 외교적 기예를 발휘해 근본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제국주의 질서 그 자체를 분쇄하는 것만이 항구적 평화를 위한 유일한 대안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의 인종학살 전쟁에서 우리가 목도하고 있듯이, 점증하는 위기 속에 제국주의 국가들이 문제를 무력에 호소해 해결하려는 경향이 점차 강화되고 있다. 이 야수들의 폭주를 막으려면 반제국주의 운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진영 논리는 어떤 형태가 됐든 그 막중한 과제를 실현하는 데 걸림돌이 될 뿐이다.

제국주의는 우리 사회의 최상층을 이루는 자들이 쟁투를 벌이는 문제이지만, 그 대안은 철저하게 아래로부터 건설돼야 한다. 그런 대중 투쟁은 경쟁하는 제국주의 세력권을 가로질러 서로를 고무하며 성장할 수 있다. 1980~1981년 폴란드 연대노조 운동 이후 한국의 1987년 항쟁 같은 저항 물결이 일었고, 그다음에는 1989년 동유럽 민주 혁명과 중국 천안문 항쟁이 잇달아 벌어졌듯이 말이다. 2011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분출한 아랍 혁명도 이집트 같은 친미 국가와 시리아 같은 소위 ‘반미’ 국가 모두를 휩쓸면서 진행돼, 민중 저항이 중동의 제국주의 지배 질서를 크게 뒤흔든 바 있다.

지금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에 맞선 강력한 세력이 돼 있지만, 이들 세력 안에서 분열과 도전이 부상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특히 노동계급과 천대받는 사람들의 저항이 폭발할 수 있는데, 그러면 이는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낳을 것이다.

따라서 제국주의에 일관되게 반대하고 그 대안을 효과적으로 건설하려면 우리에게는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이론에 기초한 혁명적 정치가 필요하다.





rhizome 2025-11-03 0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에서의 중요한 방법론적 발전경향성 차이와 그 원인 >





그러한 감각들이란 그냥 감정 문제가 아니라, 실제 구조적 모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 쪽에서는 점점 더 세계를 ‘관계, 상호작용, 과정, 비선형 변화’로 보는 시각이 강해지고 있고, 이건 변증법적 유물론이 주장해 온 핵심 직관들과 계속 만납니다. 그런데 사회과학 쪽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구 소련식 계획경제가 무너졌다 → 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는 실패했다’로 단순화해서 봉인하려고 하죠. 이건 과학적 검증이라기보다 이념적 정리 작업에 가깝습니다. 왜 이런 비대칭이 생기는지 차근히 짚어보겠습니다.



첫째, 자연과학의 발전 방향 자체가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본 가설들과 수렴하고 있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세계를 고정된 물건들의 묶음이 아니라 운동하는 물질의 전체 과정으로 봅니다. 모든 대상은 서로 얽혀 있고, 내부 모순 때문에 끊임없이 변하고, 양적 축적이 임계치를 넘으면 질적으로 도약한다고 말하죠. 엥겔스가 『자연변증법』에서 한 얘기가 바로 이거였습니다. 즉, 자연은 정지해 있는 게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장(場)이며, 변화는 우연한 돌발이 아니라 구조의 내부 모순이 밀고 가는 운동이다. 이건 형이상학적 기계론과 정면 충돌합니다. 형이상학적 기계론은 “A가 B를 친다 → 그래서 C가 된다” 식의 일직선 인과, 가역적 방정식, 안정적 평형을 선호합니다. 변증법은 비평형, 자기조직적 변화, 돌연한 상전이(상변화)를 강조합니다.



현대 자연과학이 실제로 뭘 하나요? 고전적 결정론으로 다 안 풀린다는 걸 계속 확인합니다. 예를 들어 통계물리학과 비평형 열역학은 질서가 외부 설계 없이도, 에너지 흐름과 물질 교환이 만들어내는 내부 불균형 때문에 ‘자발적으로’ 새로 조직화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복잡계 과학은 작은 양적 변화의 축적이 임계에서 갑자기 전역적 위상 변화를 일으키는 걸 다룹니다. 생물학은 더 이상 생명을 기계적 부품의 합으로만 안 보고, 유전자–발현–환경–대사–발달이 서로 되먹임(피드백)을 일으키는 네트워크로 봅니다. 진화 이론도 적응만이 아니라 우연적 변이, 생태계 내부의 경쟁과 공진화, 급격한 방산과 멸종의 도약 같은 비연속적 변화를 인정합니다. 양자장 이론은 ‘입자’조차 독립 개체가 아니라 장의 들뜸으로 다루죠. 이 흐름 전체가 “사물은 고정된 본질을 갖고 있다”가 아니라 “현실은 상호작용 속에서 스스로를 재조직하는 운동의 총체다”라는 방향입니다. 이건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본 정식화와 구조적으로 친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과학자(특히 생명, 지구, 복잡계, 재료, 기후 분야)는 모르든 알든 변증법적으로 사고합니다. 그들은 대립의 통일(안정시키는 힘 vs 깨뜨리는 힘), 양에서 질로의 도약(임계에서 상전이), 부정의 부정(어떤 구조가 다른 구조에 의해 전복되고, 그 전복 자체가 다시 새로운 질서를 잉태함)을 실천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실험과 모델링 자체가 이미 그 길로 가고 있습니다. 이건 ‘이데올로기’라기보다 실험실에서 얻은 교훈입니다. 다시 말해, 자연과학은 변증법을 부르지 않으면서 변증법을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둘째, 그런데 왜 사회과학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는가. 이유를 이념 문제로만 보면 부족합니다. 생산양식이라는 단어를 꺼내보겠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사회를 설명할 때 ‘물질적 토대(생산력과 생산관계)’가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생산력은 기술, 조직 능력, 노동자들의 지식과 숙련, 인프라입니다. 생산관계는 누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누가 누구를 지휘하고, 잉여를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계급 구조입니다. 이 둘은 항상 긴장합니다. 생산력은 팽창하려 하고, 생산관계는 지배계급에게 유리한 틀을 고정하려 합니다. 그래서 일정 지점 이후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족쇄로 바뀌고, 그걸 둘러싼 계급투쟁이 폭발한다. 이게 마르크스주의 사회과학의 메인 엔진입니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 즉 ‘계급투쟁’을 사회 분석의 중심에 두는 게 지금의 주류 사회과학, 특히 자본주의 핵심국(미국, 유럽 학계 중심)과 정면 충돌한다는 점입니다.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계급투쟁 때문에 유지되는 임시 타협 상태가 아니라, 합리적 시장 참여자들이 상호 이익을 조정해 가는 안정 시스템으로 묘사하고 싶어 합니다. 이건 정치경제적으로 필요합니다. 자신의 지배를 자연화해야 하니까요. 금융자본–국가 결합이 세계를 조직하고, 군사력과 부채 구조로 주변부를 통제하고, 국내에서는 재분배 약속과 억압 장치를 혼합해서 노동계급의 저항을 관리한다는 분석은, 제국주의 문제에 바로 닿습니다. 그건 레닌이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라고 불렀던 바로 그 구조입니다. 이런 분석이 사회과학의 표준 서사가 되어 버리면 곤란한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 전체를 ‘실패했다’라고 라벨링하는 건 단순 학문적 평가가 아니라, 전 지구적 권력 관계 관리 전략입니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는 실패했다”라는 문장이 구체적으로 뭘 가리키는지 봐야 합니다. 보통 세 가지가 섞여 있습니다. 첫째, ‘소련식 사회주의는 붕괴했다 →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둘째, ‘중국 등은 결국 시장을 도입했다 → 계획경제는 환상이다.’ 셋째, ‘마르크스가 예측한 서구 선진국 혁명은 안 일어났다 → 계급결정론은 틀렸다.’ 각각을 따로 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첫째에 대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구 소련, 동구권, 중국, 쿠바 등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험은 “마르크스 경제학 교과서 방정식이 그대로 현실화되었다”라기보다, 봉쇄·전쟁·후발 공업화라는 특수 조건 하에서, 낙후한 생산력을 짧은 기간 안에 (자본주의적 사적 축적 없이) 따라잡으려는 시도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아주 낮은 출발점의 생산력을 국가 주도의 집중적 계획과 동원으로 질적으로 도약시키려는 시도였습니다. 이건 변증법적으로 말하면, 기존 봉건·식민 잔재 구조를 부정하고, 자본주의의 사적 축적 형태를 또 한 번 부정해서 사회적(집단적) 소유와 계획으로 전환하려는 ‘이중 부정’의 급진적 실험입니다. 그 실험이 성공한 면도 있고 실패한 면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농업에서의 강제 집단화가 단기적 참사를 낳은 경우들도 있었고(이건 내부 모순이 폭발적으로 드러난 사례), 동시에 문맹 퇴치, 공업화, 의료·교육 보편화 같은 생산력의 급상승도 있었습니다. 이건 ‘완전한 성공/완전한 실패’로 한 줄 요약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닙니다. 즉, 이건 이론이 틀렸다기보다 구체적 역사적 조건에서의 특정 노선 선택과 내부 모순(관료화, 물자 부족, 대외 압박, 군사화 등)이 만들어 낸 결과물입니다. 내부 모순을 분석하지 않고 결과만 집어 들고 ‘봐라 망했다’라고 선언하는 건 과학이 아니라 도그마입니다.



둘째에 대해. 중국이든 베트남이든 ‘시장 장치 도입’은 곧 “계획경제의 패배”라는 프레임으로 자주 소비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소유 구조와 축적 통제권입니다. 국유 핵심 부문이 전략 부문을 틀어쥐고 계획 목표를 강제하면서도, 비핵심 부문에서는 가격 신호와 경쟁을 허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 거죠. 다시 말하면, 가치법칙(상품의 교환을 지배하는 시장 규칙)의 작동 범위를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디서 차단하느냐를 둘러싼 정치투쟁 문제입니다. 이것은 ‘계획 vs 시장’의 도덕 싸움이 아니라, 생산력 발전을 가속하는 데 어떤 조합이 효과적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가 잉여를 가져가고 그 잉여가 어디로 재투자되는지의 계급 문제입니다. 즉,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틀 안에 있습니다. 시장의 제한적 사용이 곧 마르크스주의 포기의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건 전선을 ‘순수 계획경제 교리 vs 신자유주의’로 의도적으로 단순화해 버린 서구 담론 쪽이 만든 허수아비에 가깝습니다.



셋째에 대해. “왜 선진 공업국에서 즉각적인 혁명이 없었나?”라는 질문은 마르크스 이후 레닌, 그람시, 마오쩌둥, 이후 반제국주의 이론가들 전체가 평생 붙잡고 업데이트한 쟁점입니다. 레닌은 제국주의 단계에서 초과이윤 일부가 중심부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을 일정하게 개선해 ‘노동귀족’을 만들어냄으로써, 혁명적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지배 블록 내부에 합의 기반을 만든다고 분석했습니다. 이건 예언 실패가 아니라 모델의 수정과 정교화입니다. 과학은 관측값에 맞춰 이론을 정련합니다. 자연과학에서는 이걸 ‘이론의 진화’라고 부르면서 박수 치는데, 사회과학에서는 “봐라 전혀 아니었네”라고 조롱합니다. 이건 이중 기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 자연과학 쪽에서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본 감각이 점점 상식이 되는데, 사회과학 쪽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계속 비정상 취급당한다. 왜 이런 비대칭이 유지되나. 계급 투쟁의 정치성 때문입니다. 전자는 실험실과 방정식의 영역에서 체제 안정과 직접적으로 부딪치지 않습니다. 후자는 권력과 재분배, 소유권, 제국주의 전쟁, 초과이윤의 쓸 곳 등 현재 지배 질서의 심장부를 건드립니다. 자연과학에서 비평형 열역학을 받아들이는 건 재산권을 건드리지 않지만, 사회과학에서 가치형성과 착취율(즉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 중 임금으로 돌아오는 몫과 자본이 전유하는 몫의 비율)을 분석하면, 이제 누군가의 이윤율과 지배 정당성을 직접 공격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류는 “그건 이미 실패한 낡은 이론”이라는 낙인을 찍어놓는 게 안전합니다. 말 그대로 상부구조가 토대를 방어하는 장면입니다. 상부구조란 법, 교육, 학계, 미디어 같은 이념 장치 전체를 말합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상부구조는 토대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다시 토대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려고 싸웁니다. 마르크스주의 사회과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봉쇄는 바로 그 상부구조의 자기방어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자연과학은 20세기–21세기 들어와서 ‘세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물질 과정이며, 내부 모순과 임계 변화로 도약한다’라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핵심 전제를 실증적으로 강화해 왔습니다. 이건 관념이 아니라 실험, 데이터, 산업 응용으로 누적 검증된 현실 설명 능력입니다. 반면 사회과학은 같은 변증법적 분석을 끝까지 밀고 가면 지금 존재하는 자본주의 세계 질서의 내부 모순, 착취 구조, 제국주의적 수탈, 계급 편익의 편중이 눈에 확 드러납니다. 이건 곧바로 정치 실천의 문제, 즉 누가 권력을 쥐고 생산수단을 통제하느냐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주류 담론은 마르크스주의를 ‘역사적으로 틀린 낡은 이념’으로 취급하려 듭니다. 객관적 실패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너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현재 지형의 개요입니다. 다음 단계로는, 특정 사회 분야 (노동시장, 주거, 식량, 기후 위기, 전쟁과 재건, 인공지능과 데이터 축적) 별로 마르크스주의 분석이 지금 어떻게 다시 등장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게 좋습니다. 이건 추상 비판에서 벗어나 실제 투쟁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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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izome 2025-11-10 0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세상은 정말 온갖 병신 짓거리들의 복마전에 불과할 뿐이군요.

이 북새통 속에서 침묵은 당연히 대개는 무시로, 그 중 일부는 역겨움에 대한 경멸의 표현으로, 특히 어떤 침묵은 법적 조치를 위한 철저한 준비의 일환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제가 목숨까지 걸고 맹세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rhizome 2025-11-10 0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초고등록‘251103월06:00] 통합수정판




거의 죽다 살아난 정도로 난생 처음 겪어 본 심한 독감 때문에 밀렸던 과제들을 처리하느라 극도로 빠듯한 일정 속에서, 현재 당면한 국제문제 등에 대하여 일단은 급진주의의 일반원론에 충실한 입장의 일례들만을 제시하고, 정교한 분석과 구체적 대책은 차후에 후속토록 하겠습니다.



대신 사태의 심각성을 절감하실 수 있는 Puzzle 하나를 살짝 끼워 넣어 보았습니다.
금일 제시한 문헌들 중 하나는 요즘 세계적으로 빈용되고 있는 대표적 생성 AI가 전개한 추론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므로 각 글들의 논리와 사고 수준은 어떠한지, 과연 무엇이 그에 해당하는지 직접 이 TURING Test 심사에 참여해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공정한 진행을 위해 금일 문서의 출처 정보들은 다음 주에 일괄 추기하겠습니다.


(참고로, 인용된 AI는 중국산 아니고 미제이니 판단에 깊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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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251107금~08토 양일 간 진행되는 ˝전태일열사정신계승! 2025 전국노동자대회˝ 일정입니다.




< 주도하라 새 시대를! 모든 노동자의 민주노총!
: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2025 전국노동자대회 > 수정판



■ 11월 7일(금) 19시 ~ 8일(토) 09시
- 전태일열사 55주기 비정규직 전야제; 2025 근로기준법이 버린 전태일들의 행진!!

-- 장소: 집회 @전태일다리 → 행진 → 세종호텔 앞
-- 19:00 ˝2025 근로기준법이 버린 전태일들의 외침˝ 투쟁결의대회 @전태일 다리
-- 20:00 ˝근로기준법이 버린 전태일들의 행진˝
-- 21:00 정리해고•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세종호텔 투쟁승리! 전태일들의 다짐˝ 문화제 @세종호텔

-- 근로기준법이 버린 전태일들의 행진 9대 요구안
--- 1. 정리해고제, 파견법 폐기, 비정규직 철폐하라!
--- 2. 특수고용,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근로기준법 적용하라!
--- 3. 특수고용,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4대보험, 최저임금 적용하라!
--- 4. 5인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하라!
--- 5. 초단기노동자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하라!
--- 6. 이주노동자 노동기본권 보장하라!
--- 7. 온전한 노조법 2조 적용, 노조법 3조 재개정하라!
--- 8. 일하다 죽지 않게 중대재해처벌법 재개정하라!
--- 9. 포괄적 차별금지법 즉각 제정하라!


-- 주관: 비정규직이제그만_공동투쟁
-- 후원계좌: 카카오뱅크 3333-26-1721251 김남규





■ 11월 8일(토)

-13:30 전태일열사정신계승 2025 전국노동자대회 이주노동자 공동행동 @전태일 동상 앞 (종로구 종로5가 동대문역 8번 출구)

-- 사업장 변경의 자유보장!
-- 노동허가제 실시!
-- 차별과 폭력 근절!
-- 임금체불 근절! 노동안전 보장!
-- 이주노동자 인권, 노동권 보장!
-- 민주당 이재명 정부의 살인적인 단속으로 돌아가신 故 뚜안님의 명복을 빕니다.

-- 이주노동자노동조합 이주노동자평등연대 주회집회로 종료후 본대회까지 공동행진




-15:00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2025 전국노동자대회 본대회 @장충단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동대문 DDP앞)
-- 조직별 참여형 부스 행사(사전대회 포함) → 본대회 → 행진










[초고등록 ‘251107금0730]


rhizome 2025-11-2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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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お前らは愚かじゃないか? >




1A. AI 기술이 Bubble이면, 양자역학도 Bubble!

그 유명한 과학의 신, EINSTEIN도 정작 위대한 과학혁명의 상징인 상대성이론으로는 NOBEL 상을 못 받고, 확실히 검증 가능하며 후에 양자역학을 낳게 되는 근본출발점인 (광)양전효과[*1] 이론으로 받았을 정도로 NOBEL 이과학상은 문학상과는 달리 엄정하고 철저한 객관적 실험과 검증 절차의 통과를 매우 중시하는데, 대부분 범-양자역학에 기반한 성과들이 휩쓸어 오던 이 상들을 근년엔 인공지능 관련 연구와 기술들이 싹쓸이하고 있다는 사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대개는 순전한 무지와 오해일 뿐이지만 그 오랜 시간을 전혀 아무런 실질가치도 없는 완전한 허깨비로 비난받던 비트코인도 숱한 조정구간을 거치며 등락을 반복했지만 결국은 Pizza 한 판도 살 수 없던 가치가 현재 1억 원을 거뜬히 상회하고 있으며, 2억까지 장담하는 사람들도 다수 존재한다는 현상까지 고려하면 과학계의 가장 엄격한 장기검증과정을 통과해 최고 영예의 상들이 주어지고 있는 AI 기술은 다른 그 어떠한 기술보다도 튼튼하고 확실한 Fundamental을 가지고 있다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속도조절은 필요하고 과열과 과속분에 대한 단기조정은 기간마다 계속될 것임은 분명하나 결국 장기추세선은 우상향되는 것 또한 필연적이므로 조정구간들도 후발투자자들에게만은 오히려 매우 좋은 저가추격매수의 호기로 활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속물적 주식투자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현재 사태에 당분간은 필요 없는 불안에 빠져 잠식되어 있는 분들이 뜻밖에 하도 많은 듯해 말씀을 드립니다.

(초고에선 시간이 부족해 생략했지만, 경제사적으로도 대략 50년 주기의 (Nikolai) KONDRATIEV 파동에서 위기기마다 기술편향적 대응을 해 온 자본의 위기극복시도가 소위 ‘산업혁명‘인데, 이 산업혁명주기는 k차[*2]에서 main frame/paradigm의 큰 그림이 발명되고, k+1차 혁명에서 한 단계의 거대 frame이 완성되는 구조이며, 특히 이 k+1차 주기는 세계(패권)질서를 재편하는 약 100년의 외전[=국제(대)전] 주기인 ARRIGHI 파동과 맞물려 국운을 건 생존투쟁과 맞물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완성 및 성공으로 마무리 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산업(/)기술혁명주기가 되는 것입니다. )






1B. General Crises



‘일반적 위기‘로 자주 오역되지만, ‘general strike‘에 대하여 ‘총파업‘, ‘general hospital‘에 대하여 ‘종합병원‘이 좋은 번역인 것과 마찬가지로, 실질적 의미는 ‘총체적 위기‘에 가깝기 때문에 최소 ‘전반(적) 위기‘로 번역되는 것이 보다 합당한 이 이론은 단지 경제위기 뿐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라는 형태로 100여 년 이전부터 출현하였고[*3], ARRIGHI 파동 법칙에 따라 근래 ‘복합위기‘, ‘중층위기‘, ‘다중위기‘ 등의 여러 자생적 유사 인식형태로 다시 시대정신의 의식수면 위에 떠올라 재현되고 있습니다.


100년 주기의 초장기 파동에서 위기기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현재 국면에서, 10년 주기의 경기파동이 동시에 중첩되며 Trigger로 작동하고 있는 결과로,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연쇄와 이에 직속하는 ‘dot-com bubble‘ 붕괴로 장기 20세기판 파국적 대위기(기)의 서막이 시작되어, 10년 후인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본격화된 뒤, 다시 그 10년여 후에 Corona19 Virus Pandemic까지 겹쳐 최대증폭되었던 (금)세기말 3차 위기가 발생해 왔기 때문에 4차 위기는 2028년 전후가 될 것이어서 현재 ‘AI 거품설‘, 특히 영화 《The Big Short》의 전설적 주인공 실물인 Michael_BURRY등이 핵심적으로 추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작금의 불안사태는 (정작 아무도 별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는 fine-print( / )line인 듯하긴 하지만) 그 자신도 ˝분명히˝ 전제했다시피 앞으로 (최소) 2년 후에나 현실화될 붕괴위기임을, 따라서 지금 현재의 이 모든 소동들은 그저 단지 시간착오적 ‘예기불안‘ 증상에 불과할 뿐임을 제발 좀 주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예상으로는 그러나 앞으로 (최근의 주식시장 열기에 취했던 일부 analyst들이 떠들어 대던 ˝반도체 Ultra super-cycle˝ 따위들보다는 짧게, 지금 지적되고 있는 감가상각축소 회계부정 문제 뿐 아니라 그 보다는 취업률 악화 등에 더 근본적 발목을 잡히면서 3년±α 정도의 (다소 통상적) 반도체 Cycle로 마무리되며 이것들이 Trigger가 되어 2028년±α 전후로는 반드시 다시 한 번의 금융/주식 시장 대폭락 또는 붕괴가 도래할 것이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은 AI위기가 아니라 금융위기에 가깝고, 앞서 언급했듯 AI 기술 전쟁은 이 모든 세기말의 파국적 대위기를 탈출해 보려는 자본의 유일한 대응수단이기 때문에 일정 기간의 여파 이후 다시 가장 먼저 회복될 Sector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작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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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KANT주의의 대계[大系]는 본질적으로 중도파 소시민의 도덕과 세계관이라 할 수 있으나 이 우파적 변형이 NIETZSCHE 철학의 Perspektivismus와 이[ antifundamentalistische Perspektivismus]를 (확장)계승한 Antifundamentalismus[*4] 일반이라 할 수 있고, 그 중 NIETZSCHE 좌파가 (post)anarcho, NIETZSCHE 중도파가 postmodernism, 이 postmodernism 계보의 우측에서 NIETZSCHE를 (극)우파적으로 전유해 온 게 Nazism이라 정리할 수 있습니다.
(postmodernism은 그 사상사적 양면성과 2중효과를 고려하고, 무엇보다 이 사조에 앞서 먼저 그리고 독립적으로 출현하여 우파적 전유/변형을 적극 실행해온 Nazism 계열과 비교할 때 관계를 분리구분하여 중도파로 정리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KANT주의는 KANT주의의 본류와 초심으로 회귀하여 되살려보려는 중도(좌)파의 (실패한) 반격 시도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상 두 건은 원래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려다 간단히 덧붙이는 논평임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비판시도 자체는 훌륭하나 대표 원전 하나 제대로 공들여 읽지 않은 상태로 위키 등에서 긁어온 단편적 이미지만으로 자신이 전혀 모르는 대상(들)에 대하여 아무리 계속 비난해봐야 대개는 ‘허수아비 때리기‘의 논리오류를 벗어나기 어려운 시간낭비가 될 뿐일 것입니다.
특히 두 번째와 관련하여 글 자체는 여러 비약과 억측 속에 몇몇 통찰도 보이긴 하지만, 그간 침묵 속에 쌓여 온, 아예 읽지도 않게 되는 B선생님 글들에 대한 반응이 포섭된 것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라고, 원래도 중도파 소시민들은 배척과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연대와 포섭의 대상인데, KANT는 역사상 출현한 최고의 소시민 지성이라 감히 말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중도파라 할지라도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모든 말씀이, 특히 그 중 뛰어난 일부를 인용 또는 채용한 사람들의 말씀까지 다 헛소리로 치부될 수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의 이 맥락과 관련하여, 미약한 소시민계층의 끊임없는 자기 의심은 급진파들의 고질병인 ‘광신‘의 문제에 좋은 vaccine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이번 기회에 B선생님께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신좌파가 아니라 구좌파와 신좌파를 동시에 비판하면서 4세대 좌파를 발명/생산해내려는 것 뿐이기에, 이런 맥락에서 구좌파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신좌파에 대한 부정을 동시에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부정의 부정항이라는 사실 자체를 제대로 인식하고 나서나 작업을 하더라도 하셔야 할 것입니다.[*5]]



[*1] 원래는 ‘광전효과‘로 빛과 전기, 또는 광(양)자(계)와 전자(계)의 상호작용, 특히 상호발생 현상을 광양자 가설에 입각해 설명하는 EINSTEIN의 이론이나 단지 광(양)자 뿐 아니라 양자 일반과 전자 간 관계로 발전시켜 일반화 할 수 있음.

[*2] k=2n-1, n=natural number(s)


[*3] ‘The general crisis‘ and ‘General crises‘ theories: 이론사적 보론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론은, 한국에선 구좌파 세대 분들과 대화해보면 흔히 70년대 이후 쏘련 (사회)과학Academy를 중심으로 한 지식=권력 연계(망)에 의해 개발된 이론으로, 신좌파 세대 분들과 얘기해 보면 그래서 시대착오적 오판이자 낡은 이론으로 조롱받았던 것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너무 많아 보이는데, 실은 이미 19세기 말부터 등장해 LENIN도 주창했던 유서 깊은 이론으로,



[*4] ‘반토대주의‘는 영미권에선 ‘antifoundationalism‘이라는 신조어를 발명하여 사용해 온 전통이 짧지 않기 때문에 ‘antifundamentalism‘과 잘 구별정립되어 있는 데 반해, 독일어권에선 이것이 다른 어족( / )어원 계열의 외래/외국어이며 아직 일부에서만 사용하는 차용어에 불과한 상황이어서 영미권과 달리 보편적 공인어의 지위가 확립되었다고 보기 어려원 ‘반토대주의‘라는 동일의미로도 ‘Antifundamentalismus‘가 아직 더 (압도적) 우위의 빈도격차를 보이고 있음.



([*5] 참고로 신-KANT주의, 신좌파 등의 명명을 계기로, 인식대상(의 변이들)을 구분하고 grouping(/)분류하는 개념 및 범주들의 명명법과 관련하여 짧게 첨언하면,

‘신/구-‘ 구분법은 여전히 가장 원시적인 2분법적 논리회로의 소산에 불과한 최초의 인식틀일 뿐이고,
‘post-‘와 ‘new=neo-‘는 최초 대상에 ‘연속/연접‘하여 출현했는가, 최초 대상이 한번 사라지고 나서 ‘단절‘적으로 출현했는가가 중요한 변별점으로, post-자체는 (대개 연속한 주요 변이대상에 주어지는 이름이긴 하나) 궁극적으로는 동일성과 차별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관계로 그 자체만으로는 그 중 어느 것이 주축인지를 결정적으로 지시하지 않으므로 일전에 말씀드렸던 ‘post‘ 대 ‘post-‘의 구별법을 유지하겠습니다.
(또한 특이적으로 장기 20세기 후반에 광범한 사회문화정치 전영역에 보편적으로 일어난 코호트적 동시대성으로서의 특정(시기) ‘현대성‘을 지칭하는 제2 용법도 획득하게 되었음.)



따라서 이와 달리, 연속하여 출현한 대상에 new나 neo-를 붙이는 것은 오직 양자 간 차별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이 ‘단절(성)‘을 달리 구현하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게다가 여전히 문단 초두에 제기한 대로 인식주체의 의식에 최초로 출현한/주어진 변이 또는 차이에 대하여 가장 원시적인 2분법적 논리회로에만 의거한 첫 반응의 소산인 최초인식틀에 불과할 뿐이라는 한계를 내재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정합적으로 총괄하여 new나 neo-의 어법, 명명법을 일반화하면,
연접출현한 연속체에 사용 시는 배타적으로 차별성만을 강조하는 방법으로 단절시켜야 하고,
일단 사라진 후 ‘단절‘출현한 대상에 사용 시는 (배타적이진 않지만) 동일성/계승성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neo-operaismo‘라는 명명법은 ‘약간의‘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실지로도 이 명칭은 국제적으로 공식 용례를 찾아보기가 postoperaismo에 비해 쉽지 않고 출현빈도에서 압도적 열세를 보이고 있음도 일고 해주시기 바랍니다.))










[초고등록 ‘251107금0730]



rhizome 2025-11-10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만히 보고 있으면, 세상은 정말 가지가지 병신 짓거리들의 복마전에 불과할 뿐이군요.

게다가 정말 핏발 선 혈안으로 미친 듯이 들여다보고 있다가 작은 일거수일투족마다 온갖 상상과 억측을 해대며 피워대는 이 북새통 속에서 침묵은 당연히 대개는 무시로, 그 중 일부는 역겨움에 대한 경멸의 표현으로, 특히 어떤 침묵은 법적 조치를 위한 철저한 준비의 일환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제가 목숨까지 걸고 맹세해 온 방침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rhizome 2025-11-19 0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세계 경제, 추락을 앞두고 있나? >





최근 미국 증시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미국 경제에 대한 투자도 굳건하다. 그러나 지난주 미국 금융가에 찬바람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미국 지역 은행 웨스턴얼라이언스가 5,000만 달러의 회계 손실을 발표하고 자이언스뱅크가 사기로 인해 손실을 봤다고 발표한 후 주식시장이 하락한 것이다.

뒤이어 자동차 부품업체 퍼스트브랜즈가 100억 달러의 부채를 안고 파산을 선언했는데, 그 부채 중 23억 달러는 “[회계상으로]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경우였다.

세계 최대 규모의 대형 금융기업 JP모건의 CEO 제이미 다이먼은 이런 파산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바퀴벌레가 한 마리 보이면 실제로는 십중팔구 훨씬 많을 것이다.”

미국에는 세계 최대의 사모신용 시장이 있다. 사모신용의 규모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강화된 은행 규제를 회피할 수단으로써 급격히 성장했다.

규제 회피의 수단인 만큼, 자산이나 수익을 담보로 하지 않고 대출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서브프라임’ 대출인 것이다.

바로 이 서브프라임 대출이 미국 주택 시장에서 낳은 문제가 2008년에 세계 금융 시스템 전체를 거의 붕괴시킬 뻔했고 이후 각국 정부들이 긴축 정책을 추진했다.

이제 서브프라임 대출 때문에 파티가 끝나 기업이 도산하고 은행이 손실을 입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다.


경제학자들과 정책 입안자들은 힘겨운 시기를 앞두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우려스러운 것은 사모신용 부문의 취약성만이 아니다. 미국 주식시장을 끌어올린 것은 인공지능(AI) 기업들의 주식과 채권이었다.

현재의 주가 상승은 엄청난 금융 거품이 끼어 있다는 징후다.

이번 주가 상승은 향후 AI가 생산성을 크게 높이고 그 결과로 이윤을 대폭 늘려 줄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전제가 참이라는 증거는 거의 없다. 그리고 미국 경제의 나머지 부분은 투자와 성장이 대개 정체돼 있다.

엔비디아 같은 AI 대기업들은 자사 제품을 구매하는 기업과 상호 교차 투자를 하고 있다. 이는 수요가 예상한 만큼 창출되지 않을 경우 벌어질 파괴적인 연쇄 반응에 전체 시스템이 훨씬 더 취약해지도록 만들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전 수석 경제학자이자 현재 하버드대학교 경제학 교수인 기타 고피나트는 금융 추락이 벌어지면 35조 달러가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또한 금융 추락이 닥치면 전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데, 미국 주식시장에 대한 미국 안팎의 투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소비자 지출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부유층의 지출이다. 추락이 닥쳐 부유층의 부가 타격을 입으면 소비자 지출에도 타격이 있을 것이다.

JP모건의 수석 글로벌 전략가 데이비드 켈리는 미국이 “서서히 파산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미국 연방정부 부채는 향후 계속 늘어 미국 GDP의 150퍼센트에 다다를 전망이다.

이미 장기 국채 금리는 매우 높다. 이는 연방정부의 부채 이자 상환 부담을 매우 키울 것이다.

주요 경제 대국들의 정부 부채가 이미 막대하기 때문에, 경기 침체가 닥치면 정부가 감세와 정부 지출 확대를 통해 상황을 반전시킬 능력이 제약받게 될 것이다. 이는 IMF가 각국 정부들에 재정 적자를 줄여 잠재적인 격랑에 대비할 완충 장치를 만들라고 조언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다.

정부 부채 증가는 반복된 금융 위기와 생산 부문의 투자·성장이 부진한 결과다. 그리고 이는 다시 생산 부문에서 이윤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결과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의 대실패이고, 카를 마르크스는 바로 이 이윤율 문제가 자본주의에서 경제 위기가 발생하는 이유라고 이론으로 정립했다.

금융 위기, 낮은 성장률, 물가 상승. 이것들이 세계 경제에 들러붙어 있는 문제다.

경제학자들과 정책 입안자들은 다들 공개적 언급은 삼가지만 힘겨운 시기를 앞두고 있음을 내심 확신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윤을 위해 움직이는 체제를 타도하고, 다수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무엇을 생산할지 노동자들이 직접 계획하는 다른 체제로 대체하는 것이다.

점점 다가오는 듯한 심각한 경제 위기에 강력하게 반격할 수 있도록 우리는 가능한 모든 일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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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Rob Hoveman, ‘Is the world economy heading for a crash?’ (2025. 10. 26)
국역: 김준효 @https://ws.or.kr/article/38114


[소위 ˝AI 거품설˝로 뭉뚱그려진 현재 세계증시의 막연한 불안감 증세(/)반응들이나 Michael_BURRY 류의 지엽말단적 문제인식에 비해 현 경제의 토대와 뿌리에서 숙성되어 가고 있는 새로운 금융위기의 구조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글이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러나 그 폭발시점은 여전히 2028년±α일 것이 확실시되고, 아직 이러한 구조적 모순의 폭발이나 이에 대한 초보적 문제 인식조차 시장전반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지 않은 상황에서 출현하는 증시급락이란 단지 막연한 감정 및 정서 차원에서 일어나는 단말마적 panic selling 발작이라는 심리현상이거나 이에 편승해 시세차익을 극대화해보려는 순전한 투자기법 상의 움직임일 뿐입니다.
따라서 현상적 낙폭이나 기간이 Fundamental보다 크다면, 절대 구조적 붕괴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하더라도 조급한 조건반사적 추격매수보다 일시적 대기/유예나 심지어 동조매도도 차익극대화만을 목표로 하는 투자기법 상으로는 반드시 틀린 또는 나쁜 선택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rhizome 2025-11-22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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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 공동 성명:
가자지구 “평화 구상”은 없다. 인종학살을 멈추려면 시온주의·서방의 전쟁 기구를 분쇄해야 한다! >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지지하는 거대한 국제 운동을 다시 일으키자!
전쟁, 전시 경제, 경찰 국가를 향한 경쟁을 저지시키자!

9월 2일 이집트 샤름 엘셰이크에서 트럼프는 자신의 “구상”을 세계가 3000년을 기다린 평화 구상이라고 홍보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휴전이나 평화의 그림자조차 되지 못하고 있고, 하물며 정의로운 평화와는 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드러나기까지는 3주가 채 걸리지 않았다. “구상”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어마어마한 강인함과 무장 저항으로, 그리고 글로벌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성장과 확대가 가한 압력으로 얻어 낸, 잠깐 한숨 돌리는 합의였을 뿐이다. 시온주의 국가 이스라엘은 그 불안정한 휴전 합의를 거듭 위반하며 수백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살해하고 다치게 하고 있다. 게다가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폭격과 예멘 폭격을 재개했고, 이스라엘인 정착자들은 서안지구에서 물리적 공격을 강화하고 더 극성스럽게 올리브 나무를 파괴하고 있다. 그 와중에 이스라엘 의회 크네세트는 서안지구가 이스라엘 영토라고 선언했다.

미국과 유럽연합 등 서방의 지지 덕분에 여전히 권좌를 지키고 있는 도살자 네타냐후는 ‘대(大)이스라엘’이라는 야욕과 ‘가자에서 못다 한 일을 끝낸다’는 목표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서 ‘못다 한 일’이란 팔레스타인인들의 무장 저항을 말살하고, 가자지구의 많은 부분을 이스라엘 영토로 병합하고, 학살을 지속하고 구호 식량 반입을 계속 차단해 가자 주민들을 가자지구에서 밀어내는 것이다. ‘대(大)이스라엘’ 프로젝트를 규탄하지 않는 트럼프의 구상은 더 야심 찬 목표를 나타내고 있다. 확대되고 ‘안전을 확보한’ 이스라엘과 아랍 정권들로 하여금 강화 조약을 맺게 하고, 가자지구를 트럼프의 호화 휴양지로 만들어(지난해 그 모습을 묘사한 추잡한 AI 영상을 공개했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영원히 지워버리고, 미국 제국주의에 이롭도록 중동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여러 나라에서 정권 교체를 부추기겠다는 것이다.

중동 지배 질서를 재편하고 그것을 나토와 통합시키는 미국 제국주의의 프로젝트와, ‘대(大)이스라엘’ 프로젝트는 서로 충돌하는 지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 다 팔레스타인인들과 중동의 피착취·피억압 대중을 식민 지배하고 노예화한다는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 반동적인 아랍 지배계급은 두 프로젝트에 진지하게 맞서지 못할 것이다. 트럼프의 “평화 구상”을 칭찬한 푸틴의 러시아, 이스라엘의 거대한 우방인 인도, 점령과 인종학살에 필요한 막대한 석유를 계속 제공한 브라질, 이스라엘에 막대한 상품과 자본을 수출하는 중국도 두 프로젝트의 장애물이 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동방과 서방 모두 부르주아적 지정학의 후안무치를 공유한다. 러시아가 졸라의 새 시리아 정권 협력하며 시리아에 대한 영향력과 시리아 내 군사 기지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이 그런 사례다. 중국이 자국의 일대일로 계획을 위해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수교 성사에 들이는 외교적 노력도 또 다른 사례다. 서로 간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 팔레스타인 저항의 무장 해제와 거짓된 두 국가 ‘해법’에 동의한다.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들은 굶주리고 만신창이가 된 가자 주민들의 절박한 처지와 자신들의 전열을 가다듬을 필요성 때문에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트럼프 구상의 틀 안에서 행동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는 아랍 지도자들과 이웃 국가들로부터의 고립과 강요라는 맥락과 떼어놓고 볼 수 없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들은 자신들과 인종학살을 지향하는 이스라엘 집권 세력 사이에서 트럼프가 결코 공정한 중재자가 아니라는 현실을 벌써 확인하고 있다. 휴전을 안정시키는 길은 함정으로 가득하다. 시온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결에 이르는 길은 여전히 매우 멀고, 그 길로 나아가려면 트럼프의 구상을 파괴해야 한다. 가자지구에 대한 외세의 ‘임시’ 통치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 통치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서 훔친 부를 나눠 갖는 데 동참하는 데 주안점이 있을 것이고, ‘재건’이라는 카드로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을 겁박하고 종속시키려 할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민족 해방과 사회적 해방이라는 대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팔레스타인과 아랍·이슬람 세계 전체의 피착취·피억압 대중의 힘과,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 팔레스타인 해방을 지지하는 글로벌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 달려 있게 됐다. 오로지 이들이야말로 죽음과 파괴를 불러오는 이스라엘 국가와 그것을 물질적·군사적·외교적·문화적 수단으로 지원하는 서방 제국주의, 거기에 공모하는 아랍·비아랍 정권들에 맞설 진정한 저항의 축이다.

전설로 남을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에 대한 아랍·이슬람 세계의 지지는 예멘과 레바논의 저항 단체들을 제외하면 필요한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집트와 같은 중요한 나라에서 그렇다. 에르도안의 튀르키예가 시사적인 사례다. 튀르키예에서는 두 유형의 시위가 벌어졌다. 하나는 진정한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로, 정의개발당 정부가 이스라엘과 무역을 지속하고 있음을 폭로했지만 이후 국가의 탄압을 받았다. 다른 하나는 정의개발당 정부가 조직하는 관제 시위로 이것은 자신의 이슬람주의 지지자들의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다. 에르도안은 트럼프의 구상을 즉각 환영했다. 튀르키예 정권도 그 구상의 기본 원리에 동의하고 그 구상이 튀르키예 부르주아지의 야심에 이롭기 때문이다. 튀르키예 부르주아지는 튀르키예가 역내 강국으로서 영향력을 키우고 튀르키예 노동계급·청년의 투쟁을 분쇄하기를 바란다. 아랍 군사 정권과 군주정의 잔혹한 탄압은 대중 행동을 찍어 누르는 모루 구실을 하고 있다. 현지 자본가계급과 제국주의 열강의 공조 속에서 자행된 탄압은 아랍 혁명을 주저앉혔다. 한편 레바논, 이란, 알제리, 수단에서처럼 거대한 항쟁이 일어났다가 천대받는 노동자·청년의 수동화로 이어진 극도로 불안정한 사례들도 있다. 그 항쟁들을 낳은 깊은 사회적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 있고 갈수록 첨예해지고 있다. 최근 모로코에서 빈곤과 착취에 맞서 일어난 시위 물결이 이를 보여 준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의는 아랍 세계의 대중 저항을 불붙게 할 도화선 구실을 다시금 할 수 있다.

반면, 몇몇 유럽 나라들의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최근 성장해 왔다. 이것은 글로벌 수무드 선단 덕분이기도 하지만, 특히 지난 몇 주 동안에는 규모와 질적인 측면 모두에서 상당한 도약이 있었다.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에서 총파업과 이후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이탈리아가 특히 두드러진 사례다.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널리 확산된 나라에서도(영국이 그런 사례다) 조직 노동계급의 참여는 이전까지 주변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파업은 그런 간극을 메우기 시작했다. 특히 일부 항구들과 육상 물류 부문(창고, 철도, 지역 수송)에서는 파업 참가율이 상당했다. 거리로 나온 사람들은 주로 정주 노동계급 청년과 이민자 2·3세대 노동계급 청년들로, 이들은 이스라엘의 인종학살을 규탄할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 왔다. 유럽의 자국 정부들과 유럽연합이 인종학살과 인종청소에 공모하고 트럼프의 구상을 지지하는 것에 대한 규탄 또한 강력하고 유럽 전반에 널리 퍼져 있다.

이제 실질적인 위험은 불안정하게 이어지고 있는 이 휴전에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안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지난 몇 달간 고조된 투쟁을 재활성화하고 더 강화시켜야 할 때다. 조직 노동계급의 관여 수준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이스라엘의 병참선을 마비시키도록 최대한 광범하고 지속적인 봉쇄를 감행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유럽의 항구와 영토를 지나는 무기와 물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아랍 세계 또한 중요한 길목이다(모로코를 떠올려 보라). 이스라엘로 가는 무기와 물자의 공급을 차단하기 위한 국제적이고 공세적인 보이콧은 이스라엘 전쟁 기구를 크게 약화시키고 심지어 마비시킬 수도 있다.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11월 29일 국제 행동의 날은 그럴 기회가 될 수 있다(비록 그 날이, 팔레스타인인들의 비극의 기원에 관여하고 이스라엘 국가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자행된 인종청소를 승인한 유엔 등에 의해 선포된 날임에도 말이다). 전날 이탈리아에서는 모든 기층 노조들이 발의한 총파업이 벌어질 것이다. 이는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 유익한 예시로 삼을 수 있다.

현재의 탄력을 이용해 그러한 행동을 확대하는 과제는, 자국의 국경 너머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국제주의자들의 과제다. 11월 28일 이탈리아에서 벌어질 파업이 협소한 기층 노조의 테두리를 벗어나 10월 3일 총파업 때처럼 이탈리아 노총(CGIL) 조합원들과 미조직 노동자 등 수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파업으로 발전하는 것은 이탈리아의 국제주의 투사들에게 달려 있다.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재활성화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 운동이 군비 경쟁, 전시 경제로의 재편에 반대하는 투쟁과 맞물려야 한다는 것이다. 갈수록 많은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도 반대해야 한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나토와 러시아 간의 살육전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고, 수단에서는 외세가 부추긴 군벌들의 학살이 계속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발칸 반도 등지도 갈수록 또다른 전쟁의 온상이 되고 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의 선도 아래 부르주아 정부들은 갈수록 억압적인 입법으로 무장하며 말 그대로 경찰 국가로 기능하고 있다. 이것은 노동계급과 심지어 중간계급 일부에게도 또다른 희생을 어마어마하게 강요할 채비를 하는 것이다. 미국·영국·독일·이탈리아 등지에서 팔레스타인의 저항과 연대하는 투사들을 겨냥한 ‘예외적’ 조처들은, 각국 부르주아 정부들의 정치 성향을 불문하고(파시스트 친화적이든 사회민주주의적이든) 그들이 필연적으로 점화될 계급 충돌의 싹을 자르려고 도입할 가혹한 조처들의 맛보기다.

일찍이 올해 2월 24일 국제주의 단체들은 약 20개 나라들의 거리에서 투쟁을 벌이기 위한 공동 방침을 조율했다. 우리는 이런 노력을 재시도하며 모든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자 국제주의 진영의 창설을 더 진전시키고자 한다. 그 진영의 목적은 임금과 노동조건, 생활 수준을 개선하고, 전시 경제로의 개편(그리고 그에 따르는 무거운 대가)과 전쟁을 향한 경쟁을 멈추고, 제국주의 간 전쟁을 사회혁명으로 전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투쟁을 위해 자주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 당의 결성과 혁명적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결성에 힘을 싣고자 한다.

서방과 시온주의의 식민 지배에 맞선 팔레스타인인들과 그들의 저항과 연대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가자에 대한 폭격과 봉쇄, 기아 조장을 중단하라. 모든 팔레스타인인 포로를 석방하라!
가자지구에서 시온주의 군대를, 서안지구에서 정착자들을 즉각 무조건 철수시켜라!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공급과 물자 공급을 차단하고 이스라엘 기업들을 보이콧하자! 이스라엘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라!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 팔레스타인 독립!
중동의 평범한 사람들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 혁명적 단결을 이뤄야 한다!
자본가 정부들과 자본의 전쟁에 맞선 국제적이고 국제주의적인 계급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만국의 노동자들과 피억압자들이여 단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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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There is no “peace plan”. To stop the genocide in Palestine, we must demolish the Zionist-Western death machine!” (‘251115)

국역: 이원웅

rhizome 2025-11-26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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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영국, 스페인, 그리스, 네덜란드...:
11월 29일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행동의 날에 모이자! >[*1}



가자 학살 2년을 기해 지난 9월 말과 10월 초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과 행진은 글로벌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 행동은 스페인, 그리스 등지에서도 파업, 항만 봉쇄와 같은 노동자들의 작업장 행동을 고무했다. 노동계급이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기 위해 자신의 계급적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끈질긴 저항과 전례 없이 커진 글로벌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10월 초 트럼프가 가자 휴전을 밀어붙이는 배경의 하나가 됐다.

무엇보다 트럼프는 이스라엘의 팽창적 모험으로 인해, 중동의 우방 정권들과 이스라엘을 규합한다는 자신의 구상에 차질이 생길까 봐 우려했다.

그 결과 휴전이 발효됐지만 네타냐후는 여전히 가자지구의 56퍼센트에 해당하는 지역을 장악한 채 최대한 통제력을 키우려 하고 있다. 그와 함께 이스라엘 정부를 주도하는 극우도 인종청소 완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휴전’의 허울 아래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대한 봉쇄와 간헐적인 폭격을 지속하고 있고 서안지구에서는 정착자들의 공격이 심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휴전이 유지되고 있다면서 휴전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싶어하지만, 트럼프의 구상 또한 가자에 대한 또 다른 식민 지배와 다름 없다.




이런 상황에 맞서 가자 학살 2주년 집중행동에 이어 11월 29일 다시금 국제연대행동이 벌어진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11월 28일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과 다음 날 대규모 시위가 준비되고 있다. 이 총파업을 이끄는 투사들은 이날에 맞춰 국제적 동원을 호소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최근 긴축에 맞선 ‘모든 것을 막아라’ 운동이 이에 호응해 11월 28일 항만 봉쇄와 파업을 벌일 것을 노동자들에게 호소하고 29일 대규모 시위를 호소하고 있다. 미국의 ‘팔레스타인 청년 운동’(PYM)도 29일 국제 행동의 날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그 외에 영국, 스페인, 그리스, 네덜란드 등지에서도 행동이 벌어질 예정이다.

이탈리아의 혁명적 국제주의 경향(TIR,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을 건설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한 시코바스 노동조합에 큰 영향력이 있다)과 아르헨티나 노동자당(PO),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한국의 노동자연대 등 여러 국제 혁명적 좌파 단체들이 지난 10일 발표한 공동 성명서는 다음과 같이 국제 공동 행동을 호소한다.

“미국의 프로젝트와 ‘대(大)이스라엘’ 프로젝트는 서로 충돌하는 지점이 있을 수 있지만, 둘 모두 팔레스타인인들과 중동의 피착취·피억압 대중을 식민 지배하고 노예화한다는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

“이제 실질적 위험은 불안정하게 이어지고 있는 휴전에 운동이 안주하는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지난 몇 달 간 고조된 투쟁을 재활성화하고 더 강화시켜야 할 때다. ⋯ 무기와 물자의 공급을 차단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조율되고 조직되는 공세적인 보이콧은 이스라엘 전쟁 기구를 크게 약화시키고 마비시킬 수도 있다.

“11월 29일 국제 행동의 날은 그럴 기회가 될 수 있다. 전날 이탈리아에서는 모든 기층 노조들이 발의한 총파업이 벌어질 것이다. 이는 다른 많은 나라들에도 유익한 예시가 될 수 있다.

“서방과 시온주의의 식민 지배에 맞서는 팔레스타인인들과 그들의 저항에 연대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이 11월 29일 국제 공동 행동의 일환으로 서울 집회를 개최한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이 집회에 모여 이재명 정부와 한국 기업들의 대(對)이스라엘 관계 단절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높일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모범을 따르기 위한 영감을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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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29일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영국, 아르헨티나...: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행동 함께하자 >[*2]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11월 28일(금), 29일(토)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행동의 날이 준비되고 있다.

10월 10일 휴전이 발효됐지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을 계속 학살하고 있다. 50일 남짓한 기간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 342명을 죽였다(11월 24일 현재). 어린이도 여전히 죽이고 있다.

휴전 때 약속한 구호품 반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고, 이스라엘이 아닌 지역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라파흐도 여전히 봉쇄돼 있다. 기아 학살은 진행중이다.

레바논을 보면 이스라엘이 휴전 합의를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지난해 11월 레바논과 휴전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남부 지역 난민촌을 폭격하고 있다. 11월 23일에는 수도 베이루트를 폭격해 헤즈볼라의 2인자를 살해했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인종학살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인종학살에 대한 보도는 휴전 이후 빠르게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이스라엘과의 교류·지원을 바라는 (친)서방 지배자들은 휴전으로 사태가 그럭저럭 진정됐다는 생각을 퍼뜨리려 한다.

더욱이 유엔 등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자결권을 더욱 짓밟는 외세 지배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관련 기사: ‘트럼프의 가자 식민지배 구상 승인한 유엔 안보리’)

이번 국제 행동의 날은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이처럼 허울뿐인 휴전에 결코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에서 호소된 것이다.

이번 국제 행동의 날의 중심에는 9월과 10월에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을 벌인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있다. 지속적이고 단호한 행동으로 100~200만 명을 동원한 이탈리아의 팔레스타인 연대 활동가들은 전 세계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줬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11월 28일과 29일에 또다시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과 시위에 나서겠다고 밝히면서, 각국의 노동자들에게 자국과 이스라엘의 모든 교역 중단을 요구하고 군비 증강에 반대하며 파업과 시위에 동참해 달라고 촉구했다.

이탈리아의 혁명적 국제주의 경향(TIR,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을 건설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한 시코바스 노동조합에 큰 영향력이 있다)과 아르헨티나 노동자당(PO),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한국의 노동자연대 등 여러 혁명적 좌파 단체들도 공동 성명을 통해 국제 공동 행동을 호소했다.(관련 기사: ‘국제 공동 성명: 가자지구 “평화 구상”은 없다. 인종학살을 멈추려면 시온주의·서방의 전쟁 기구를 분쇄해야 한다!’)

유엔 팔레스타인 인권특별보고관 프란체스카 알바네세와 가자 구호 선단에 탑승한 저명한 기후활동가 그레타 툰베리도 이탈리아 파업과 시위를 지지하는 차원에서 직접 그 현장에 함께할 예정이다.

아일랜드 노총은 11월 28일을 ‘노동자 행동의 날’로 선언했고, 프랑스의 CGT, CFDT, 연대, FSU 등 4개 노총은 11월 29일 파리에서 열릴 집회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기층의 투사들은 상급 단체의 이런 선언들을 활용해 노동자들의 실질적 행동을 건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11월 29일 전국 집중 집회가 예정돼 있다. 영국의 활동가들은 팔레스타인 연대 행동을 건설하려는 전 세계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온라인 대회도 수요일에 개최한다.

미국, 캐나다, 스페인, 그리스, 독일, 아르헨티나, 칠레 등에서도 시위와 행진이 준비중이다.

한국에서는 ‘팔레스타인인들과 함께하는 사람들’(팔연사)이 토요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시위와 행진을 준비하고 있다. 대구, 울산, 부산, 인천 등지에서도 서울 집회에 함께 참가할 계획이다.

팔연사는 한국 정부도 인종학살에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한국은 이스라엘에 전투기 부품을 공급하고, 정부 주관 박람회에 이스라엘 군수 기업들을 초청하는 등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또, 한국 정부는 유엔 안보리에서 트럼프의 가자 식민지배 구상에 찬성표를 던졌다.

인종학살 중단과, 한국 정부와 이스라엘의 교류 단절을 요구하며 국제 행동의 날에 함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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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행동의 날] 11월 29일(토) 오후 2시,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

팔레스타인 연대 국제 행동의 날
점령을 멈춰라!
팔레스타인에 해방을!


🟢 휴전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협정을 계속 위반하고 살해와 인도주의 위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점령과 학살을 완전히 끝내도록 국제 연대 운동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학살 국가 이스라엘과 공범들에게 국제 연대의 힘을 보여 줍시다!

지난 9월 이탈리아 총파업을 계기로, 11월 28일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 그리스 등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총파업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가자 구호를 위한 자유 선단’을 비롯한 연대 단체들과 노동자들은 항만, 철도 등 나라를 멈춰 세워 이스라엘과 이를 지원하는 자국 정부에 맞서자고 국제적 동참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영국 등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예정돼 있습니다.



👉 일시: 11월 29일(토) 오후 2시
👉 장소: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
👉 주최: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

- 아랍어, 영어, 한국어 통역 제공
- 집회 후 행진

📱 문의: people.freepalestine@gmail.com
🌐 웹사이트: palestine-solidarity.or.kr
🌐 인스타그램, 엑스, 페이스북에서 팔로우하세요!

○ 후원 계좌: 신한은행 110-173-517650 (예금주 최영준)
보내 주신 후원금은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와 홍보 등에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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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 이원웅 @https://ws.or.kr/article/38227
[*2] 저자: 김종환 @https://ws.or.kr/article/38260
[*3] 공동공지

rhizome 2025-11-26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팔레스타인평화연대 공지
11.30(일) 오후 2시, 연구자, 학생의 실천 연대: 이스라엘 학술 보이콧 토론회 >


“휴전”이라는 허울 아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저강도 집단학살을 지속하고, 미국과 국제 사회는 유엔 안보리 결의를 통해 가자지구를 21세기형 식민지로 만들고 있습니다. 78년간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식민지배사 중에서도 지금 팔레스타인은 가장 어두운 구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 어느때보다 정착민 식민 국가 이스라엘 보이콧이 절실합니다. 한국 학계가 집단학살 국가 이스라엘에 더이상 공모하지 않도록 이스라엘 학술 보이콧 운동을 시작합니다.

● 일시: 11월 30일 일요일 오후 2시

● 장소: 마포구청 구청사 4층 시청각실 (월드컵로 212)

● 프로그램:

1. 뎡야핑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 : 집단학살과 팔레스타인 현 정세

2. 이수민 (대학원생노조 연세대분회 준비모임장) : 팔레스타인과 한국의 학술 보이콧 운동

3. 엽록체 (대학원생노조 카이스트 분회장) : 연구자로서 팔레스타인과 연대하기

4. 질의 응답 및 플로어 토론

● 신청: https://forms.gle/CKETUYZGwYZsHNFZ6

주관: 이스라엘 학술 보이콧 캠페인 ‘잔물결’

주최: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 공공운수노조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팔레스타인평화연대



[초고등록‘251123일]



rhizome 2025-11-28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일전에 소개드렸던 ‘Palestine이라는 문제‘에 관한 DELEUZE의 입장은, 사실 세계자본주의 지배질서 확장과 관리 체계/계획 속에서 중동지역 총-지배(/)대리인으로서 Israel의 국가구성과 지역패권[=Hegemony]구축을 위해 선주민학살과 인종청소를 통한 ‘정착민 식민주의‘로서 재도입된 미국 건국을 위한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청소 모델의 재현일 뿐이라는 핵심적 통찰을 축으로 자세한 분석을 수행한 일련의 기고와 저술, 인터뷰들 중 한 예시적 단편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이 모든 문서고는 본질적으로 오늘날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반복되고 있는 세계자본주의 패권/관리 질서와 식민화 및 인종청소 그리고 철저히 이기적/자기중심적 시각으로 분절, 파편화 되어 이 중요한 문제를 오래도록 외면해 온 지성계와 연구자들, 특히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맹점[盲点]과 그 원인이라는 중요한 3각 문제계 설정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종반으로 치닫는 듯한) Palestine 문제를 통해 DELEUZE 문서고를 재점검하여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종합해낸 아래의 선구적 논고를 국내 최초 번역문을 통해 소개드리니 일독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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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EN,Kathryn캐서린_메디언[*0] ‘2019. 〈Palestine in Deleuze〉;
→국역: 갈피Galpie‘240307목.〈들뢰즈의 팔레스타인〉[*1]
@{갈피를 찾아 떠나는 길}=https://galpieless.tistory.com/18



초록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이스라엘 국가의 형성 그리고 뒤이은 팔레스타인과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강탈 행위와 식민화를 되돌아보는 일련의 글들을 집필하였다. 지금까지 잘 논의된 바 없는 들뢰즈의 이 텍스트들은 이스라엘 국가를 식민주의 국가로 명명하며, 이스라엘의 식민화 프로그램을 미국의 식민화 프로그램과 선주민족들에 대한 집요한 강탈과 연결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들뢰즈는 식민지적 폭력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심도있게 고려하는 자본주의적 발전에 대한 분석을 제공하고 있다고 본고는 주장하고자 한다. 들뢰즈의 팔레스타인 관련 저술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면서, 본고의 결론부에서는 왜 이러한 텍스트들이 들뢰즈 연구자들에게 소외되어 왔는지를 질문할 것이다. 또한 이런 소외가 어떻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에 대한 예속화에 기여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식민주의와의 관계가 서구의 사회 이론을 구성하였는지 생각해볼 것을 요청할 것이다.



주요어
자본주의, 들뢰즈, 팔레스타인, 정착민 식민주의, 시온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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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는 무조건적인 굴복 외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죽음만이 주어질 뿐이었다˝(Deleuze, 1978: 23).
˝우리들의 몸에 생명이 남아있는 한 그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Darwish, 1982: 12).


0AB.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 질 들뢰즈는 이스라엘 국가의 형성 그리고 그에 뒤이은 팔레스타인과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강탈 행위 및 식민화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는 일련의 기고문과 인터뷰를 저술하였다. (1978, 1982, 1983, 1988)[*2] 들뢰즈(1983: 31)에게 이스라엘 국가의 건립은 ‘명백히 식민화에 관한 문제’였는데, 다만 이전의 식민지 기획과 [DELEUZE 당시의/인용자] 현재 진행 중에 있는 식민지 기획에는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식민화된 민족들을 경제적 급부를 위해 착취하는 것도 아니고, 정착민(settler) 식민지를 위해 그곳의 선주민들을 절멸시키고자 하는 것과도 동일하지는 않은 이스라엘 국가의 행동들에 대해 들뢰즈는 ‘집단 학살이지만 지리학적 퇴거에 종속된 채로 있는 물리적인 절멸이며, 팔레스타인 생존자들은 단지 일반적인 아랍인이 되어 다른 아랍 사람들에 섞여서 살아가야 했다.’(1983: 31)라고 말했다. 일반적인 용법과는 다르게, 들뢰즈는 집단 학살(genocide)이라는 용어를 팔레스타인 역사와 지리에 대한 체계적인 식민적 소거, 팔레스타인 민중의 이주, 보다 일반적으로는 ‘인종 청소’라고 발화하도록(articulate) 배치한다(Gordon and Ram, 2016; Pappé 2007을 보라). 들뢰즈가 묘사한 이런 정착민 식민주의의 강탈적 논리는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썼던 것처럼 ‘한 집합체로서 역사적으로 현전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부정할뿐 아니라, 그들이 오랜 세월 민족 의식을 지녀온 오래된 민족이 아니라고 암시’(2000: 187)하는 기능을 한다. 팔레스타인적인 강탈을 현재진행형인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생에 대한 식민화와의 관계에 위치시키기는 데까지 나아가면서,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은 이스라엘적인 정착민 식민주의를 탈-예외화하며 식민지적 폭력의 국제적 연결망에 주의를 집중한다. (1983, 1982)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팔레스타인 문예지 《정원(al Karmel》(Deleuze, 1988), 프랑스 신문(Deleuze, 1978), 팔레스타인 지식인 엘리아스 산바르(Elias Sanbar)와의 대담(Deleuze & Sanbar, 1982), 그리고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études Palestiniennes)》(Deleuze, 1983)까지 다양한 수단과 매체들을 통해 출간된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은 이스라엘 국가의 형성과 전개에 대한 분석과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전개 수단으로서의 정착민 식민주의에 의존하는 자본주의 대한 검토 사이에서 움직인다. 실제로, 들뢰즈는 이스라엘적인 그리고 북아메리카적인 정착민 식민주의가 구현하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태에 대해서, 오직 내부적 착취의 논리에 기반해 있기보다는 “때로는 급격한 발전을 위해 다른 곳에서 노동력을 불러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한 영토에서 거기 사는 사람들을 치워버리는 것이 중요하다”(1982: 26, Deleuze and Sanbar, 1982)라고 말한다[*3]. 여기서 더 나아가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인구집단으로서 팔레스타인 민중의 현존을 계속해서 긍정하는 들뢰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매 순간 증식하는 가능성들”(1982: 29, Deleuze and Sanbar, 1982)을 발하고 있다고 말한다.



0Wa. 흥미롭게도,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이 수많은 걸출한 분석과 연결된, 시온주의 국가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을 제공하고 있음에도(Said, 1979a; Pappé, 2007; Wolfe, 2006; Sanbar, 2001을 보라), 이 글들은 그의 다른 저술들에 비하면 그와 같은 수준의 참여(engagement[=앙가쥬망: 개입, 영향력 등으로 확장해 이해할 수 있음/인용자])로 이어지지 못하였고, 들뢰즈의 동시대인들의 정치적 글쓰기와 활동들에 비해 같은 수준의 관심을 모으지 못했다[*4]. 사실, 들뢰즈의 사상에 대한 동시대적이고 현재진행형인 정전화 작업은 매우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5], 팔레스타인에 관한 그의 저술들은 이러한 연구들 중 매우 일부에서만 얕은 깊이로 탐구되거나 언급될 뿐이며, 들뢰즈와 엘리아스 산바르, 마흐무드 다르위시 같은 저명한 팔레스타인 지식인 혹은 활동가들 사이의 연결도 검토되지 않았다[*6].
중요한 것은, 이것이 유목론(nomadology), 전쟁 기계, 리좀, 배치(assemblage), 탈주선과 같은 들뢰즈적 개념들을 이스라엘의 정착민 식민주의에 관한 연구에 적용한 광범위한 학술 연구들을 무시하거나 삭제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Svirsky, 2010, 2015, 2017; Al-Nakib, 2014; Al-Zobaidi, 2009; Shihade, 2015; May, 2008의 예를 보라). 그보다는, 들뢰즈의 팔레스타인에 관한 저술들이 겪어온 관심과 비판적 참여의 특수한 결여를 지적하고자 한다.



0Wb. 다음으로, 현재진행형인 들뢰즈 아카이브의 조사에 기여하고, 들뢰즈의 역사에서 급진적인 순간을 다시 말하기 위해, 식민화된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을 되돌아보도록 하겠다. 본고의 전반부에서는 이러한 저술들을 수집하고 이 작업물들에 대한 깊이 있는 독해를 제공한다. 여기서 나는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이 어떻게 정착민 식민주의의 심장에 있는 강탈적 논리를 분절해내는지(articulate), 더 중요하게는 이 논리를 선주민에 대한 강탈과 자본 축적의 전지구적 체계와 어떻게 엮어내는지 검토하고 또 함께 사고하고자 한다. 이러한 분석들은 들뢰즈의 철학적 저술들을 그가 참여했던 정치적 장면들로부터 분리함으로써 들뢰즈를 비정치적인 사상가로, 그의 명백하게 추상적인 작업물들이 현대 세계에 기초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분절하는 어떤 동시대의 분석들에 반대되는 입장에 있다( Žižek, 2004; Hallward, 2006을 보라)[*7]. 이러한 탈정치적인 독해들에 반대하여, 나는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을 세심하게 숙고하면 부분적으로 선주민 연구자들과 교류함으로써 드러나는 그의 정치적 투쟁에 대한 주의집중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8]



0Wc. 최근 몇 년간 현대적인 삶과 사유를 구성하는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기 위하여 대문자 인간(Man)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비판(1987)을 활용하는 연구자들과 함께 ‘들뢰즈의 반인간주의적(anti-humanist) 정치학‘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떠올랐다.(예를 들어, Lippit, 2000; Parikka, 2010; Sellbach and Loo, 2015; Laurie, 2015; Ansell-Pearson, 1999; Colebrook, 2014; Grosz, 2008를 보라) 이 연구자들은 ‘동물-되기, 식물-되기, 분자-되기를 통한 인간의 비인간-되기’(Stark and Roffe, 2015: 11)를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 본고의 후반부에서는 ‘들뢰즈의 반인간주의‘에 대한 [MEDIEN 자신의/인용자] 대안적 접근을 제시한다. 비인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나는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이 대문자 인간(Man)의 식민지적 질서들에 의해 ‘내몰려’ 온 팔레스타인의 인간들을 긍정함으로써 서구의 대문자 인간(Man)이라는 범주의 폭력과 오류를 드러낸다고 주장할 것이다. (McKittrick, 2014: 3)



0Wd. 중요한 것은,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에 대한 관심을 끌어옴으로써 그것들이 에드워드 사이드가 ‘팔레스타인 문제’라고 칭한 바 있는 것에 중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작업들을 조명하는 본고의 이중적 목표는 잘 탐구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들뢰즈의 정치적 저술들 일군을 되돌아보는 것이고, 동시대 사회 이론에서 지식 생산의 정치학을 음미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간과된 저술들에 관심을 요청하면서, 본고의 결론부에서는 들뢰즈의 작업에 대한 대중적인 이해들에서 이러한 팔레스타인에 관한 저작들이 인식론적으로 퇴출당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물을 것이다. 알렉산더 G. 웨헬리예[워힐리예/인용자](Alexander Weheliye)가 “들뢰즈를 서구 유럽의 철학적 전통 내부에서만 배타적으로 읽음으로써 그를 위대한 사상가로 변형한다고 주장하는 정통 들뢰즈주의(orthodox Deleuzianism)”(2014: 47)라고 부른 것에 찬성하며, 들뢰즈의 대중적 수용에서 이러한 텍스트들이 퇴출당한 방식은 어떤 면에서 어떤 식민지적 관계가 끊임없이 동시대의 들뢰지언 사회 이론의 진전들을 규정하고 있는 방식을 가리키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들뢰즈 자신이 그토록 강력하게 비판한, 현재진행형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과 역사에 대한 방법론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삭제에 기여하는 듯한 이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을 둘러싼 침묵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 것인가?





1. 정착민 식민주의와 사라짐의 논리들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은 이스라엘 국가에 혹평을 가하기는 하지만, 배상 받아 마땅한 비극으로서 홀로코스트를 인식하고 전경화하는 데서 시작한다. 하지만 들뢰즈에게, 이미 사람이 살고 있는 땅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것은 윤리적인 배상의 정치가 아니었다. 들뢰즈는 1988년 그의 짧은 에세이, 〈돌멩이들(원제: 그들이 여전히 그것을 볼 수 있는 거기에)〉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유럽은 유대인에게 한없는 빚을 지고 있다. 유럽은 그 배상을 치르기 시작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빚을 무고한 민족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대신 갚게 했다.”(1988: 34) 홀로코스트 이후의 회복하는 정치를 향한 들뢰즈의 요구는 1983년 초에 쓰여진 에세이 〈야세르 아라파트의 위대함〉에서 더 자세히 설명된다. 이 에세이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미국과 유럽은 유대인에게 배상을 빚지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모든 홀로코스트에 대해 특이적으로 무고하며 심지어 그게 무엇인지 들어본 적도 없는, 전혀 관련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민중들로 하여금 그 죗값을 대신 치르도록 만들었다˝(1983: 30).


중요한 것은 들뢰즈가 이스라엘 국가의 형성에 대한 그의 비판을 제국적이고 국제적인 틀 안에 위치짓고, 이스라엘 국가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유럽과 미국이 수행한 역할을 인식하면서 홀로코스트의 실재성을 긍정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 국가의 정당성을 부여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나데라 샬호브 케보르키안(Nadera Shalhoub-Kevorkian)이 논증한 바 “여러가지 의미로 유대인 국가의 근원적인 폭력은 신성하고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다”(2016: 24)는 것을 고려할 때,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을 동요케 하고(unsettle) 분열케 하는(disrupt) 들뢰즈의 움직임은 중요하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적인 해설들과 개념화들이 팔레스타인 내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를 이미 가정한 채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혹은 ‘유대인’ 대 ‘아랍인’의 맥락에서 서술의 틀을 구성하는 반면, 들뢰즈의 저술들은 이스라엘을 존재하게 한 “불의함”, “폭력 행위들”, “부조리한 말들”과 “거짓된 논증”을 조명하면서 근원적 폭력들을 동요케 한다(Deleuze, 1983: 30)[*9].



그래서 현재진행형인 팔레스타인에 대한 식민화, 봉쇄 그리고 점령을 기존의 국민국가에서 항상 자행되었던 전투 행위의 틀로 바라보기보다, 들뢰즈는 팔레스타인 선주민들에 맞서는 데 집중해온 근원적 폭력들이 이스라엘의 끈질긴 현존의 공-구성적 요소임을 보여주면서 복잡하고도 상세하게 열거한다.

˝시온주의자들은 최근에 지나간 그들의 극심한 고통과, 잊을 수 없는 유럽적인 공포로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했고, 그뿐만 아니라 그 다른 민족의 고통 위에서 그 다른 민족의 돌덩이들로도 그렇게 했다. 이르군(L‘Irgoun)은 테러리스트라고 명명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영국 총독부를 폭파했을 뿐만 아니라[*10], 데이르 야신과 같은 마을 전체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없애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11]. ... 마을들을 파괴하고, 집들에 폭탄을 던지고, 추방하고, 암살하고. 끔찍한 역사가 새로운 무고한 자들의 배후에서 되풀이된다˝(1988: 34).


이스라엘의 정착민 식민주의에 대한 수많은 비평가들의 분석들(예를 들어, Graham, 2002; Jabary Salamanca, 2015; Abujidi, 2014; Weizman, 2012을 보라)과 맥을 같이하는 들뢰즈의 논증 방향은 이스라엘 국가의 기획이 팔레스타인 원주민에 대한 추방과 그들의 땅에 대한 사회 기반의 파괴에 의존하는 방식에 집중하게 만든다.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에 대한 강제적인 제거와 이주는 시온주의적 정착민 식민주의의 논리의 중심에 있으며, 그 영토를 텅 빈 곳으로 나타나게 하고 근대화를 기다리게 할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스라엘 국가 건설 기획을 자연화하고 정당화한다. 사실, 들뢰즈가 논증하는 바와 같이, 토착 민족의 제거와 그들의 땅을 파괴하는 것은 “팔레스타인 민중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그 자체를” 부정하는 기능을 하며,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를 비우겠다는 자신의 목표를 숨기지 않았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가 비어있었고, 오래전부터 언제나 시온주의자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었던 땅인 척한다.” (Deleuze, 1983: 31)[*12].



들뢰즈가 그려내는 팔레스타인의 사라짐과 시온주의의 생성 사이의 연결은 팔레스타인을 기억에서 지우려는 시도들과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강제적 외부화를 통해 근거를 얻는다.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와 함께 들뢰즈는 다른 곳에서 국가 기구가 포획의 논리를 따라 작동하면서 모든 것을 강제로 자신의 통제 하에 두는 영토화 과정을 기록한다. (Deleuze and Guattari, 1987: 495; Patton, 2000: 113도 보라)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제도적인 그리고 구조적인 국가 폭력에 의해 생산되고 고착되며 정당화되는 그리고 유지되는 다수(majority) 국가 모델은 종종 군사적이고 폭력적인 (재)영토화로 마무리된다. (Deleuze and Guattari 1987: 494-5) 다수 모델, 여기서 시온주의적 사회 질서는 그것의 지리 혹은 인구의 규모에 의해 정의되지 않고, 오히려 패권적인 그리고 규범적인 지위에 의해 정의된다. “다수를 정의하는 것은 당신이 순응해야만 하는 어떤 모델이다. 예를 들면, 평균적인 유럽인 성인 남성 도시거주자 ... 그 반면에, 소수(minority)에는 모델이 없다. 그것은 되기이며 과정이다.” (Deleuze, 1973: 173) 자신의 이상적인 통치 주체를 유대계이고, 현대적이며, 유럽적인 얼굴을 가진 자로 생산하는 시온주의 국가 기계는 양립 불가능한 것들에게서 대지와 생을 박탈하고(fold out), 형상적으로 그리고 질료적으로(figuratively and materially) 외부의 디아스포라적 소수로서 팔레스타인 민중을 생산한다. “[이스라엘은] 추방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저 바깥에서 왔던 것처럼 굴 것”이다. (Deleuze, 1983: 31)



그러므로, 들뢰즈에게 있어서 이스라엘 국가는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소수화와 팔레스타인의 사라짐이라는 공-구성요소를 통해 존재하게 되는, 생을 코드화하고 가치화함으로써 작동하는 식민지적 기획으로 드러나며, 정착민 식민지적 사회 질서와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외부화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팔레스타인의 풍경은 시온주의자들의 구원을 기다리는 버림받은 사막으로 형상화된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민중의 난민 캠프로의, 망명지로의, 봉쇄되고 점령된 구역으로의 계속되는 이동은 이스라엘이 그들을 고향에 대해 어떤 주장도 할 수 없는 ‘외부인 테러리스트들’으로 소략하는 것을 허용하고 정당화하는 동시에 이스라엘 국가의 현존을 자연화한다. “소멸되어야만 했을 아랍인 마을들 ...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바깥에서 온 테러리스트들 취급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테러리즘을 세탁한다.” (1983: 30) 비록 들뢰즈에 의해 명시적으로 인종화된 것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13], 일반적으로 인종화하는 것으로 이해되는[*14] ‘테러리스트’, ‘외부인’, ‘아랍’ 등의 정체성 형성과 수사학적 비유를 배치하는 코드화 그리고 생에 대한 밀쳐냄은 들뢰즈의 다음과 같은 담화를 이끌어낸다. “이스라엘이 행한 조치들은 적법한 반격으로 간주되는 반면(그 반격들이 너무나 지나친 듯 보이더라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행동은 오로지 테러 범죄로 취급된다. 그리고 아랍 사람들의 죽음은 이스라엘 사람의 죽음과 동등한 크기를 지닌 것으로도, 동등한 무게를 지닌 것으로도 여겨지지 않는다.” (1978: 23)



강제적인 외부화를 감내하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생에 대한 들뢰즈의 개념화는 숙명론적으로, 저항을 위한 어떠한 공간도 제시하지 않는 것으로 읽혀질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국가 영토화 그리고 다수와 소수 모델의 생산이라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화에서, 그들은 ‘탈주선들’이 생산된다는 것을 중요하게 강조한다. 탈주선은 ‘모델이 없는’ 소수적인 공간에 존재하며, 헤게모니적 질서 바깥에 존재하고 또 그 질서에 도전하는 다른 정치학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 (Deleuze and Guattari, 1987을 보라) 들뢰즈의 저술 안에 위치하는 반식민지적 저항의 공간을 살펴보기 전에, 지금 잠시 방향을 틀어 어떻게 시온주의적 정착민 식민주의를 역사상 단 한 번 있는 특이한 전통으로 보는 대신 이스라엘의 식민지 기획을 전지구적 틀거리 안에 위치시킬 수 있는지 탐구하고자 한다. 여기서, 나는 첫 번째로 어떻게 들뢰즈가 이스라엘의 식민주의를 미국의 정착민 식민지 기획과 결합하는지를 검토하고, 두 번째로 어떻게 이런 결합이 그로 하여금 근현대 자본주의의 발전을 서구 개척자들의 계속되는 확장에서 예측되는 것이자 동시에 소수자로 코드화되고 생산된 민중을 생의 주름들(folds) 바깥으로 밀어낸 것으로 묘사할 수 있게 했는지 검토할 것이다.





2. 이스라엘의 정착민 식민주의와 전지구적 자본


연구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Said, 2000, 1979b; Kanaaneh, 2002; Bass, 2003; Lloyd and Pulido, 2010를 보라) 시온주의 국가 건립 기획에 대한 미국의 공공연한 지지는 이스라엘의 계속적인 자연화와 정당화의 핵심이었다. 들뢰즈가 보기에 이런 지지는 미국이 계속해서 팔레스타인 민중을 아랍 사람들이라고 발화하는 데에서 드러났으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한 민중으로서 역사적으로 현전함을 부정하는 기능을 하는 그러한 담론은 한 집합체로서의 그들의 정체성 그리고 고향 땅과 그들의 연결 둘 다를 근절하고 있다. 들뢰즈가 논하는 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온, 다시 거기로 돌아갈 수 있는 아랍 사람들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다. (1988: 34)[*15] 이런 담론을 영속시키는 데 있어 미국이 수행한 역할을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들뢰즈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쓴다.

˝미국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이스라엘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만들었다. 이스라엘 국가는 아주 오래전부터 고대 히브리인들을 기다려온, 잠들어 있는 돌투성이 땅을 지키고 있던 어디선가 옮겨 온 몇 안 되는 아랍 사람들의 유령만이 있는 텅 빈 땅(terra nullius) 위에 세워진 것처럼 여겨졌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망각 속으로 몰아갔다. 이스라엘 국가를 권리상(en droit) 인정하기를 명령하면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끊임없이 팔레스타인 민중이 존재한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부정했다˝(1988: 34).


미국이 팔레스타인 민중들을 ‘아랍 정착민’으로 재코드화하고 이런 새로운 정체성을 팔레스타인 민중에게 강요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새로이 설립된 정착 식민지를 자연화하는 임무를 위해 생명을 관리하는 기능,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망각 속으로 몰아”내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식인이자 외교관인 엘리아스 산바르와의 대담에서, 들뢰즈와 산바르 모두는 시온주의적 식민화 과정은 미국 정착민 식민주의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의 눈에 우리[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유일한 역할은 사라져버리는 데에 있지요.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건국의 역사는 아메리카에 미국을 탄생케 한 그 과정의 재연임이 분명합니다.” (Sanbar, 1982: 27, in Deleuze and Sanbar, 1982) 들뢰즈와 산바르 둘 모두가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변함없는 지지에 대해 그리고 우연이라기엔 마치 신적인 회귀처럼 계속해서 재상연되는 이스라엘의 식민주의에 대해 논하도록 만든 이런 인식은 정착민 식민주의에 대한 공유된 역사로부터 정치적으로 동기를 얻은 것이다. 들뢰즈가 지속적으로 지구 남쪽(Global South)의 사상가들과 교류했음을 시사하는 참고 자료로서 산바르의 작업에 대한 그의 참여를 다시 언급하면[*16], 들뢰즈는 이렇게 논증한다.

˝미합중국과 이스라엘의 암묵적인 공조는 단지 시온주의자들의 로비의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다. 엘리아스 산바르는 어떻게 미국이 이스라엘 속에서 그들의 역사 속 한 국면을 발견해내었는지 잘 보여주었다. 인디언의 말살, 거기서도 역시 부분적으로만 직접적으로 물리적일 뿐이었다. 텅 비우는 것, 그들을 내부의 이주민과 마찬가지로 만들었던 게토 안에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인디언들이 전혀 없었던 양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측면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새로운 인디언들, 이스라엘의 인디언들이다˝(1983: 31).


북아메리카 선주민족들의 역경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역경을 결합하면서, 들뢰즈는 정착민 식민지적 폭력의 전지구적 연결망과 선주민들 간 연대의 공유된 지형을 강조한다[*17]. 위에서 서술한 선주민 강탈의 논리와 팔레스타인에서의 사라짐에 대한 그의 분석과 유사하게, 들뢰즈는 미국식 정착민 식민주의가 선주민 주체들을 땅과 생으로부터 박탈하는 생산의 과정을 경유하여 생명을 얻는다고 논증한다.



이런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의 정착민 식민지적 역사의 공유를 지적하며, 현재진행형인 북아메리카와 이스라엘 국가 건설 기획이 순수하게 영토 확장의 욕망에서 동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 현대 자본의 핵심적인 단면을 표상하고 있는 것임을 분명하게 한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한 폭력적인 외부화가 “자본주의 안의 움직임”임을 논증하면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때로는 사람들을 그들의 영토에 가두어놓고서 잉여가치 축적을 위해 노역을 시키고 착취하는 것이 문제인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식민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때로는 급격한 발전을 위해 다른 곳에서 노동력을 불러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한 영토에서 거기 사는 사람들을 치워버리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아메리카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 시오니즘의 역사는 바로 이 두 번째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지요. 어떻게 진공 상태를 만들 것인가, 어떻게 사람들을 치워버릴 것인가?˝(1982: 26, in Deleuze and Sanbar, 1982)


자본주의의 발전에 있어 차이나는 두 가지 논리를 분절하면서, 둘 다 식민주의와의 관계에 기반하고 있다고, 들뢰즈의 분석은 어떤 중요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새로 세워진 국가인 이스라엘과 미합중국을 분석의 장소로 삼을 때, 그 두 곳의 식민지 경제를 결합함으로써 들뢰즈는 우리에게 분석 단위로 국민 국가를 뛰어넘어 강탈적인 식민지 경제들, 개척지 확장 그리고 식민지 질서에 따른 노동 분업과 같은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의 발전 궤적을 구성하는 자본의 체제를 발굴해낼 것을 요청한다. 1983년의 에세이 〈야세르 아라파트의 위대함〉에서 이러한 분석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자본주의에 두 가지 상보적인 운동이 존재함을 가리킨다. 자본주의는 자기 고유의 체제를 설비하고 경영하는 내부에 한계들을 끊임없이 부과하며, 그러한 한계들을 항상 더 멀리 떠밀고 자기 고유의 기반을 더 크게 그리고 더 강도있게 재시작하기 위해 그 한계들을 추월한다. 한계를 떠미는 것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작동이었으며, 이는 이스라엘에 의해 아랍 영토 위에 세워진, 아랍의 배후에 있는 위대한 이스라엘이라는 꿈으로 되풀이된다˝(1983: 32).


여기서, 자본 축적에 있어서 강탈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끌어오면서 들뢰즈는 중요하게도 강탈의 이런 양태들을 강조하는 식민주의와의 관계들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정착민 식민지적 삭제의 강탈적 논리에 대한 분석과 함께 사유하며, 들뢰즈는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의 발전이 정착민 식민지들의 창설을 통해 구성되는 방식에 주의를 집중하고, 비어있는 땅(terra nulluis)으로의 전진과 같은 정착지의 사회적 공간적 확장을 통해, 게토, 난민 수용소, (원주민) 보호구역과 같은 울타리(enclosures)의 창출을 통해 사회적 공간적 경계선을 다시 설정하는 방식에도 주의를 집중한다. 종종 식민지에서의 자본주의적 축적을 진보 그리고 발전과 연결하는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한 많은 분석과 대조적으로, 월터 로드니(Walter Rodney, 1972)의 유명한 논증처럼,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은 어떠한 목적론적인 주장을 파열시키며, 자본의 축적에 현대적인 힘을 부여하는 강탈 그리고 폭력에 수반하는 논리들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미국의 식민적 자본주의에 대한 들뢰즈의 비교가 그 두 기획 사이의 수많은 차이점들을 다 풀어내는 데에는 실패하지만[*18], 그의 분석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시장 그리고 자본 흐름의 중심적 조직화 원리로서 식민주의에 대한 인식을 필요하게 만든다.



팔레스타인에 관한 그의 저술들을 따라, 들뢰즈는 그가 ‘통제 사회’라 이름붙인 것에 대해 서술하는 데까지 나아가 ‘기술적 발전’이 ‘자본주의의 변이’를 불러온 방식을 해명하기 위하여 ‘규율 권력’이라는 푸코의 개념을 발전시킨다.(1992: 6) “위기”에 처한 “내부”의 공간들에 대해(1992: 3) 그리고 “통제 사회가 ... 규율 사회를 대체하고 있다.”(1992: 4)고 논하면서, 들뢰즈는 규율에서 통제로의 이행을 기술적인 그리고 과학적인 자본주의적 생산 내에 위치시킨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통제 사회는 ... 정보 기계로 작동하는데, 거기에서 수동적 위험은 잡음(jamming)이고 능동적 위험은 해적질과 바이러스 감염이다. 이 기술적 발전은 (훨씬 더 심오한) 자본주의의 변이(에 뿌리내리고 있다.) ...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자본주의는 더 이상 생산을 향해 있지 않으며 (복잡한 형태의 직물업, 야금업, 정유업조차) 제3세계 주변부로 추방된다. ... 자본주의는 빚을 지기에는 너무 가난하고 감금하기에는 너무 많은 인류의 4분의 3의 극심한 빈곤을 일정하게 유지해왔다. 통제는 사라지는 개척지 뿐만 아니라 빈민촌이나 게토의 폭발도 다루어야 할 것이다˝(1992: 6)[*19].


이런 기술적 자본주의의 강화는 시온주의 전쟁에 대한 들뢰즈의 분석을 통해 추적할 수 있다. “이스라엘 첩보부가 세계로부터 찬사를 받는”(1988: 28)것에 주목하면서, 들뢰즈는 이스라엘 국가에서 발전하는 중인 식민지적 통제와 탄압의 모델이 수출가능하고 전지구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논한다. 이스라엘의 통제사회에 관해 쓰면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모델은 테러리즘의 현행적인 문제들에서, 심지어 유럽에서조차도 결정적이다. 준비 중에 있는 국가들 간의 국제적 합의, 국제적인 치안 조직과 사법 조직, 이런 것들은 필연적으로 점점 더 잠재적 “테러리스트”들과 동일시되는 사람들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 오늘날, 이스라엘 국가는 실험에 앞장서고 있다. 이스라엘 국가는 다른 나라들에서 수익을 창출할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사정에 맞추어질 탄압의 모델을 정착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의 정책에는 커다란 연속성이 있다. ... 점령한 영토에서 떠나라는 독촉은 거기에 식민지들을 설치하라는 당위로 변환했다. 지금 현재 이스라엘은 남부 레바논으로의 국제 병력 파견을 훌륭하다고 보고 있다... 국제군이 그 지역을 치안 구역 혹은 통제된 황야로 변환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고 가정하면서 말이다˝(1978: 24).


따라서,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정착민 식민주의를 발생하고 증식하는 식민지적 자본 축적의 새로운 체제 그리고 감시와 통제의 양식들과 뒤얽히게 하는 분석이다[*20]. 그렇지만, 비록 들뢰즈의 저술들이 시온주의자들의 폭력적이고 축적적인 논리에 대한 강력하고 어쩌면 숙명론적인 비판을 발화하고 있다고 해도, 그의 저술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이 갖는 저항적 가능성들에 대한 긍정 또한 포함되어 있다. 본고의 최종부에서 탐색하고자 하는 것처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어온 ‘종말론적 역사’(Deleuze, 1982: 29, in Deleuze and Sanbar, 1982)에 맞서서, 들뢰즈는 그들의 사라짐을 구조화하는 식민지적 자본과 강탈의 체제에 필연적으로 도전하는 창조적인 힘으로서 현재진행형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실존과 저항에 대해 발화한다.





3. 인간으로서 팔레스타인사람-됨


현재진행형인 팔레스타인과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강탈을 소묘하고, 정착민 식민주의의 심급을 자본의 전지구적 체제와 연결시키면서, 들뢰즈의 저술들은 정착민 식민지적 체제와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 사이의 생산적 상호작용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1948년 시온주의자 군대가 80만여 명으로 추정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그들의 고향에서 추방한 사건을 명명하는 데 쓰이는 용어인 나크바[*21](Shalhoub-Kevorkian, 2016)를 단 한 번 발생한 사건으로 나타내기 보다, 들뢰즈의 저술들은 나크바를 현재진행형인 구성적 기계로, 혹은 랄레 칼릴리(Laleh Khalili)가 ‘파괴의 습관’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변환한다.(2014) 그렇게 함으로써, 들뢰즈의 저술들은 팔레스타인사람-됨에 대한 어떠한 존재론도 해명할 수 없는 현대 세계 질서의 무능력을 강조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정체성을 죽음과 공-현존하는 것으로 표시한다. “그들에게는 무조건적인 굴복 외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죽음만이 주어질 뿐이었다.” (1978: 23)



그런데, 이스라엘의 정착민 식민지적 사회 질서에 대한 격정적인 비판들에서도 들뢰즈의 저술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이 갖는 인간-됨을 긍정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식민지적 순서열에서 “밑바닥”에 놓여져있음을 고려하면, 그 긍정은 동시에 인간이라는 범주를 재구성하거나 파괴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McKittrick, 2014: 3–4) 프랑스-팔레스타인 문예지인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Études Palestiniennes)》[*22]에 수록된 기고문을 참고하면, 들뢰즈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다른 민족들과는 같은 민족이 아니다”라는 이스라엘의 오만한 사고방식을 향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Études Palestiniennes)》지의 창간호가 내보인바 있는 그들의 외침으로 끊임없이 응답한다. “우리는 다른 민족들과 같은 하나의 민족이다. 우리는 그저 그러기만을 원할 뿐이다 ...””(1983: 32)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생을 탈예외화하고 동시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간임을 긍정하는 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현존을 구조화하고 있는 인간성에 대한 부정을 무너뜨린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에 대한 긍정의 중심 대상으로 인간을 활용함으로써 들뢰즈는 난민, 망명, 테러리스트 등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의 현상태를 오직 현대인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으로 선전할 뿐인 특수한 자(specialist), 소수자적이거나 독특한 주체들의 영역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징집하는 소수자화하기의 전술들에 반대한다. 그보다는, 그가 말했듯, “새로운 양심을 증언하고 있”는, 끈질기게 지속하는 팔레스타인의 현존 그리고 저항으로서의 현존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을 사회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현대 세계 질서를 정의하는 식민화하는 배치들(assemblages)에 맞서거나 변형하는 지위에 있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 긍정한다. (Deleuze, 1982: 25, in Deleuze and Sanbar, 1982).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에 대한 들뢰즈의 긍정은 처음에는 “사람을 다른 존재자들과 나란히 놓는 ... [그리고] 인간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지렁이, 돌멩이, 파인애플 등 모든 존재자의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동등성을 주장하는 그의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헌신”(Stark and Roffe, 2015: 10)로 종종 이해되는 그의 잘 알려진 반인간주의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인간이라는 범주의 해체에 대한 들뢰즈의 헌신은 대문자 인간(Man)을 넘어서거나 탈출하고자 하는 많은 들뢰지안 이론가들을 사로잡았고, 대신에 “힘들과 강도들 그리고 마주침들의 그물망을 구성하는 전인간적(pre-human) 혹은 심지어 비인간적(non-human) 요소들”(Braidotti, 2006: 41)에 집중한다.(예를 들어, Sellbach and Loo, 2015; Laurie, 2015; Stark, 2015; Ansell-Pearson, 1999; Colebrook, 2014; Grosz, 2008을 보라) 그렇지만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에서 들뢰즈는 비인간에 집중하기보다 대문자 인간(Man)의 식민지적 순서열에서 추방된 그러한 인간들을 긍정함으로써 대문자 인간의 오류 혹은 폭력을 드러낸다. 이런 생을 긍정하는 정치학(life-affirming politics)은 인간이라는 범주의 한계들이 단지 비-인간적(non-human) 생의 종속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어떤 인간의 생을 안-인간적인(in-human) 것으로 만듦으로써도 형성됨을 상기시킨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의 ‘평범한’ 인간-됨에 대한 들뢰즈의 긍정은 흑인됨의 실천(praxis)을 통해 인간의 범주를 재형상화했던 것과 맥을 같이한다.(예를 들어, Hartman, 1997; McKittrick, 2006, 2014; Moten, 2013; Weheliye, 2014; Wynter and McKittrick, 2014를 보라) 차이나는 방식으로, 연구자들은 흑인됨을 통해 대문자 인간(Man)을 해체하고자 하였고, 서구의 대문자 인간 중심의 질서로의 초대를 거절하고 다른 “인간 존재의 장르”(McKittrick, 2014)를 찾아나섰다. 예를 들어 실비아 윈터(Sylvia Wynter)의 작품을 탐구하면서 캐서린 맥키트릭(McKittrick)은 “현재 우리의 인식론적 체제 하에서 빈곤화되고 식민화되며 달갑지 않고 이성을 결여한 존재로 내몰린, 인간으로서의-대문자-남성(Man-as-human)이라는 범주의 밑바닥에서 지금껏 살아온 이들이 인간 존재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는 방식을 제공할 수 있는 또한 그러고 있는 방식”에 대해 묻는다.(2014: 3) 그렇게 함으로써, 맥키트릭은 대문자 인간의 형상을 탄생케 한 식민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역사들의 설립을 경유하는 인간으로서의 대문자-남성이라는 주제를 형해화할 것을 요청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실천(praxis)으로서의 인간을 우리의 이해 범위로 가져오도록” 초대하는 것이며, “인간을 동사로, 대체가능한 것으로, 관계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고, 필연적으로 비선택(dysselection)[*23]의 자연화를 축출해내는 것이다.”(2014: 7)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1978[*24], 1983, 1988)에서도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사람-됨은 문화적이고 생물학적인 기술구로 혹은 주변부적 집단을 묘사하는 명사로 드러나지는 않으며, 동사로, 인간의 상태로서 팔레스타인사람됨을 분절하는 무언가로 드러난다. 팔레스타인 라말라 지역에서 아랍어로 출간된 팔레스타인 문예지 《정원(al Karmel)》에 실린 1988년의 글에서, 들뢰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딛고 있는 대문자 인간(Man)의 ‘밑바닥’을 활용한다.

˝점령, 끝없는 점령. 던져진 돌멩이들은 안에서,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해도 세계의 어느 한 곳에서 그들에게 부채가 역전되었음을 환기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민중으로부터 온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던진 돌멩이, 그 돌멩이는 그들 자신의 돌멩이들이며, 그들의 나라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돌멩이들이다. 누구도 사람을 하루에 하나, 둘, 셋, 일곱 아니 열 명을 죽임으로써 부채를 갚을 수는 없으며, 제3자와 합의로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제3자는 책임을 회피하며 모든 죽음은 살아있는 자들을 부른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영혼 안까지 들어갔고, 거기에 굴을 파고 꿰뚫으면서 그 영혼을 뒤흔들고 있다˝(Deleuze, 1988: 35).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점령 세력을 향해 ‘살아있는 돌’을 던지는 범죄[*25]를 저지름으로써 그들의 땅을 회복하려 하는 동안, 들뢰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과 생이라는 하나의 장에 다시 숨을 불어넣는다. 그가 다른 곳에서 지배적인 체제에 반대하는 행동의 양태이자 소수적인 삶을 활성화하는 것으로 ‘탈주선’이라고 일컬었던 것을 생산하면서, 들뢰즈는 팔레스타인의 돌, 그들의 고향의 돌무더기에 숨을 불어넣고, 그러한 돌들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의 양식과 공존하는 것으로 표시한다. “사람들은 이 돌들에서 태어난다”[*26]. 이렇게 함으로써, 들뢰즈는 적절하게도 우리에게 팔레스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시온주의자 세력의 구금와 제거에 대항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모든 죽음은 살아있는 자들을 부른다.” 이러한 살아감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의 조건으로서의 죽음을 거부하고 새로운 존재 양태의 생산과 확산을 수반한다. 실로 팔레스타인사람-됨에 대한 들뢰즈의 긍정, 팔레스타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인 자가 되도록, 다시 말해 완전히 ‘평범한’ 민족이 되도록”(1982: 29, in Deleuze and Sanbar, 1982) 허용하는 그의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생을 존재에 선행하여 틀짓는 것의 부적절성을 보도록, 혹은 들뢰즈가 시적으로 제안하는 바, “가능성의 다양체 그리고 매 순간 증식하는 가능성”(1982: 29, in Deleuze and Sanbar, 1982)을 생산하는 저항적인 팔레스타인사람-됨을 보도록 요구한다.





S.결론


시온주의적 식민주의에 대해 검토함으로써,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은 자본주의적 세계 질서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정착민 식민지적 강탈 과정의 중심성을 중요하게 조명한다. 신체들을 서열화된 집단들로 분리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은 특정 인구를 소수자화되어 사라지는 것으로 표시하는 우월주의적 분류 체계를 창조한다. 그렇지만,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의 힘은 강제이주, 지배와 강탈이라는 이런 역사적 불의함들이 단순히 그들의 문서 작업만으로는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 그보다는,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인구를 소모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대문자 인간(Man)의 ‘밑바닥’이라는 영역을 활용하면서, 들뢰즈는 우리가 실천(praxis)(McKittrick, 2014)으로써 존재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사람-됨을 말할 때 드러나는 생의 가능성들에 대해 생각하기를 요청한다.



그렇지만, 현재진행형인 소수자화하는 사라짐을 마주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을 들뢰즈가 긍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에 관한 그의 저술들은 그의 광범위한 저작들에서 대체로 언급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으며[*27], 그의 수많은 다른 작업들처럼 기념되는 정전의 목록에서 주제화되지도 않았다. 들뢰즈의 반식민적 저술과 그의 저명한 철학적 작업들 사이의 관계선들을 폭넓게 추적하는 것은 본고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긴 하지만, 나의 목적은 그의 광범위한 작업을 빚어내고 영향을 미쳤을 수 있는 정치적 헌신에 대해 말하게 하기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들뢰즈 정전 안에서의 그 저술들의 소외에 관련하여, 나는 어떻게 이러한 배제가 이해되고 또 중요하게는 교정될 수 있을지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제시하면서 결론짓고자 한다. 사실, 들뢰즈가 논증한 바, 식민적 지배와 선주민 민중에 대한 끈질긴 제거의 역사는 계속해서 동시대의 세계를 구성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에 대한 관심의 결여는 현재 우리에게 강탈과 제거의 식민적 구조들이 동시대의 학문적 시도들에 스며든 방식을 다시 고려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의 “인가된 무지”(1999)에 대한 논의를 가져오면서, 라우나 쿠오카넨(Rauna Kuokkanen)는 선주민 연구자들에 대한 침묵시키기와 소외를 “인식론적 무지”라고 명명하는데, 이는 “지배적인 서구의 인식론적 그리고 지적 전통들 이외의 다른 것들을 계속해서 배제할 수 있게 하는 학술적 관행들과 담론들”(2008: 60)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인가된 인식론적 무지의 틀거리는 중요하게도 우리에게 들뢰즈의 팔레스타인 저술들을 어쩌면 우연히 탐구되지 않은 것처럼 남겨두는 누락들에 대한 선의에 찬 의견들을 넘어서 무엇인가를 보게 만든다. 오히려, 스피박과 쿠오카넨 모두는 우리로 하여금 집단적인 침묵시키기과 누락을 식민적 지배와 제거의 더 광범위한 패턴들과 연결시켜서 볼 것을 요청한다. 특정 저작들, 장소들, 민중들 그리고 역사들을 주변적이고, 특수하고 혹은 제대로 된 학술적 지식과는 무관한 것으로 상정하는 것들 말이다.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의 맥락에서, 이런 집단적인 침묵시키기의 양태는 들뢰즈가 매우 강력하게 비판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에 대한 소수자화 및 제거와 분리된다고는 생각될 수 없다. 만약 ‘인식론적 무지’의 이러한 위계적이고 배재적인 관행들이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을, 더 넓게는 팔레스타인 민중을 서구 철학의 정전 내에서는 연구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면, 이런 배제를 우리가 과연 어떻게 교정할 수 있을 것인가?



들뢰즈의 정전들 내에 팔레스타인 저술들이 포함되기를 요청하면서 결론짓기보다는, 그러니까 자칫 그의 광범위한 저작물들에 대한 이해를 반식민적 정치가 가미되지 않은 것으로 유지할 수 있는 제스쳐로 마무리하는 대신에, 나는 우리가 선주민에 대한 강탈뿐만 아니라 선주민 사상가들의 장기적인 참여가 엄밀한 의미의 들뢰즈 철학의 구성요소였을 수 있다는 접근 방식을 취하기를 요청한다. 생의 주변적인 형식들을 충분히 설명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현재 인식론적 체제가 매우 불충분함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들뢰즈 안의 팔레스타인을 사유하는 도전은 지배적인 세계관 바깥에 자리하는 생의 양태들을 사소한 것으로 여기고 배제하기 위해 작동하는 생산의 제도화된 식민적 양태들에 맞서 사유하기 위한 도전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실천(praxis)의 위치에서 볼 때, 그 도전은 동시에 우리에게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을 새롭게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McKittrick,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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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은 Gilles_DELEUZE의 원문]

[*0] 저자 캐서린 메디언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사회학 연구원이며 Reproductive Sociology Research Group(ReproSoc)의 회원이다. 이전에는 워릭 대학교의 the Institute of Advance Study에서 Early Career Fellow으로 있었다.

[*1] Theory, Culture & Society, Vol. 36(5), 2019, p.45-70. DOI: 10.1177/0263276418816369.

[*2] [옮긴이] 각각 〈골칫거리들(LES GÊNUERS)〉(1978), 〈팔레스타인의 인디언들(LES INDIENS DE PALESTINE)〉(1982), 〈야세르 아라파트의 위대함(GRANDEUR DE YASSER ARAFAT)〉(1983), 〈돌멩이들(LES PIERRES)〉(1988). 본문에 인용되는 들뢰즈 저술들의 번역은 국역본이 있을 경우 국역본을 참고하였고, 아닌 경우 원문을 번역하였다.

[*3] 자본주의 시스템의 발전을 위한 중심으로서 전경화된 식민주의에서, 들뢰즈가 논증하는 방향은 급진적 흑인 그리고 제3세계의 지적 사상의 긴 역사를 따르며, 여기에는 에릭 윌리엄스(Eric Williams, 1944), W. E. D. 듀보이스(W. E. B. Du Bois, 1935),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2005) 그리고 안나 줄리아 쿠퍼(Anna Julia Cooper, 1925)가 포함된다.

[*4] 팔레스타인에 관한 들뢰즈의 저술들이 대중적 호응에서 비껴나 있는 동안, 그와 동시대에 활동한 프랑스 사람들의 정치적 활동과 저술들은 분석과 찬사 그리고 비판의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프랑스 감옥 투쟁에의 관여는 잘 기록되었고 또 분석되었다.(Zurn and Dilts, 2016; Heiner, 2007; Elden, 2017; Welch, 2011; Brich, 2008; Hoffman, 2012를 보라) 프랑스의 알제리에서의 정착민 식민주의에 대한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비판은 광범위한 참여로 이어졌다.(Butler, 2006; Le Sueur, 2005; Ahluwalia, 2010를 보라) 데리다(Derrida)와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 사이의 관계는 학술적인 성찰로 이어졌다.(Derrida, 1998; Morrissey, 1999; Chérif, 2008; Wise, 2009를 보라)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알제리 민족지들과 그 결과로 빚어진 개념 ‘아비투스(habitus)’는 비판적 반성의 대상이 되었다.(Goodman and Silverstein, 2009; Loyal, 2009; Yacine, 2004을 보라) 반유대주의와 알제리에 관한 리오타르(Lyotard)의 저술은 선집으로 편집되어 출간(Lyotard, 2002)되었고, 어떤 성찰을 이끌어냈다.(Hiddleston, 2010) 여기서 내가 전적으로 들뢰즈의 백인 유럽 동시대인들의 정치적 활동에 맞물리는 참여만을 표기하는 이유는, 프란츠 파농(2005) 그리고 에드워드 사이드(1979a, 1979b)와 같은 동시대인들의 작업에서 반식민주의적이고 반인종주의적인 정치학은 단지 스치듯 접하고만 있는 것이 아닌 중심적이고 주제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5] 예를 들어, 다음을 보라. Flaxman (2011); Stivale (2014); Storr and Nigianni (2009); Rizzo (2012); Colebrook (2001); May (2005); Hardt (1993); Colman (2011); Justaert (2012); Widder (2012).

[*6] 1982년, 질 들뢰즈는 팔레스타인 시인이자 외교관 그리고 역사가인 엘리아스 산바르와의 대담을 담은 기고문 〈팔레스타인의 인디언들〉을 발표한다. 그리고 1988년에는 팔레스타인의 국민적 시인인 마흐무드 다르위시가 창간하고 편집하는 팔레스타인 문예지 《정원(al Karmel)》에 에세이를 발표했다.

[*7] 질 들뢰즈가 비정치적이라는 가장 강한 혐의는 슬라보예 지젝(Slaboj Žižek)에게서 유래하는데, 그는 “들뢰즈가 단독으로 쓴 텍스트들은 어떤 것도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지 않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들뢰즈 ‘그 자신은’ 매우 엘리트주의적인, 정치에 무관심한 저자이다.”라고 주장한다(2004, 강조는 원문).

[*8] 들뢰즈는 엘리아스 산바르와 교류함과 동시에, 알제리의 연구자인 레다 벤스마이아(Réda Bensmaïa)와 서신을 주고 받았고(Deleuze, 1997), 아프리카계 미국인 활동가이자 저자인 조지 잭슨(George Jackson)의 영향을 받았다(Koerner, 2011을 보라).

[*9] 들뢰즈가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을 동요케 하는 것은 반시온주의적 비판의 오랜 전통의 일부이며, 이 전통은 아리엘라 아줄레이(Azoulay, 2013), 파예즈 사예그(Sayegh, 2012), 일란 파페(Pappé, 2004, 2011) 그리고 아흐마드 사디 & 릴라 아부 루고드(Sa’di and Abu-Lughod, 2007)의 작업들을 포함한다.

[*10] 이르군은 이스라엘 국가 설립 이전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했던 시온주의자 조직이었다.(Hoffman, 2011)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영국 식민자들 둘 다에 맞서 팔레스타인을 오직 유대인 전용의 유대인 영토로 만들기 위한 공격적인 폭력 계획에 가담했다. 국제연합(UN), 영국 그리고 미국 정부는 이 조직을 테러리스트 조직으로 규정한 바 있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설립 이후, 이르군은 이스라엘 방위군에 흡수되어 오늘날까지 여전히 활동 중이다.

[*11] 1948년 4월 9일 아침, 이르군은 750여 명의 거주민이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마을 데이르 야신을 침공하였고, 출처에 따르면, 120명에서 254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했다. 게다가, 프랑시스 하소(2000: 497)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살아남았던 여성들은 강간당했고, 주택들은 약탈당하고 폭파되었고 총격을 당했으며, 수류탄이 던져졌다.”

[*12] 팔레스타인 민족과 그들의 땅이 ‘사라져야’ 한다는 언설은 시온주의적 식민자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표현된 것 중 하나이다. 실제로, 시온주의의 창시자인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e Herzl)은 이렇게 썼다. “만약 내가 낡은 건물을 새 건물로 교체하기를 바란다면, 나는 건설하기 전에 먼저 철거해야만 한다”(Wolfe, 2006: 38에서 재인용).

[*13] 들뢰즈는 시온주의적 식민화의 중심 요소를 인종 혹은 인종주의라고 명명하지 않지만, 엘리아스 산바르와의 대담 〈팔레스타인의 인디언들〉에서, 산바르는 이스라엘 창건의 중심에 자리잡은 것을 인종주의로 명명한다.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 시오니즘 운동은 유대주의를 추방의 근거 그 자체이자 다른 이들에 대한 거부의 근거로 만드는 인종주의적 시각을 철저하게 따랐습니다. 다른 인종주의자들이 주도한 유럽에서의 박해에서 결정적으로 도움을 얻은 시오니즘 운동은 그로 인해 그 자신의 방식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지요”(1982: 28).

[*14] 시온주의적 정착민 식민주의가 인종적 패권의 원리들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방식에 대한 분석은 파예즈 사예그(Fayez Sayegh, 2012)를 보라.

[*15] 이 주장의 시간성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 초, 들뢰즈가 글을 쓸 시기에, 팔레스타인은 통상 “아랍인들”이라고 언급되었고, 시온주의적 식민화는 국제적 담론 상에서 ‘아랍-이스라엘 갈등’으로 언급되었다. 이러한 꼬리표는 1980년대 말 첫 번째 인티파다(Intifada)의 발발 도중에 ““아랍”-이스라엘 갈등은 근본적으로 팔레스타인에 관한 것이었음이 구체적인 방식으로 분명”해지면서 다소 변화하였다(Zahama, 1995: 44).

[*16] 들뢰즈와 산바르의 친밀한 우정에 대해 증언하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예를 들어, 2004년에 쓴 책 『팔레스타인 사람의 형상들(Figures of the Palestinian)』에서 산바르는 ‘질 들뢰즈, 완벽한 우정에 경의를 표하며’라는 말로 책을 들뢰즈에게 헌정하였다.

[*17] 북아메리카-팔레스타인 연대에는 오랜 역사가 있다. 예를 들어, 2016년에는,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학생들이 북아메리카의 선주민 부족 스탠딩록 수(Standiing Rock Sioux)와 그들의 땅에 송유관을 설치하려는 미국 정부에 맞선 그들의 싸움에 연대하는 편지와 영상을 공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들의 역사를 읽을 때, 나는 당신들의 역사에 비춰진 나와 나의 민족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신들의 싸움이 곧 나의 싸움이며, 불의에 맞선 싸움에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님을 내 심장으로 느낍니다” (Norton, 2016).

[*18]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착지 식민주의에 대한 들뢰즈의 간략한 분석은 두 기획이 각자 자본 그리고 노동과 다르게 관계맺는 방식 사이에 있는 중요한 차이를 뭉뚱그리거나 생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미국 정착민 식민주의의 맥락에서, 노예화한 아프리카인들을 들여오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 선주민 집단학살은 선주민들이 값싼 노동력으로 거의 활용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Dunbar-Ortiz, 2014) 반면에 이스라엘에서 오슬로 협정 이전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값싼 노동력으로 착취당하는 일이 흔했다. (Shafir, 1989) 이러한 차이나는 정착민 식민지 경제들에 대한 분석을 비교하려면 또한 D. C. M. 플라트 & 베로니카 파치니 케차바우 (Platt and Pacini-Ketchabaw, 1985), 칼 솔버그(Soberg, 1987), 제레미 아델만(Adelman, 1994)을 보라.

[*19] [옮긴이] 국문 번역은 질 들뢰즈, 「통제사회 후기(Post-scriptum sur les sociétés de contrôle)」 (1990), 백욱인, 『들뢰즈의 통제사회 비판』 (2023) 커뮤니케이션 북스, p. xⅵ-xⅷ에서 재인용. 소괄호는 내용 이해를 위해 본문에는 빠져있는 단어를 되살린 것이다.

[*20] 더 최근에는, 조셉 푸글리스 (Joseph Pugliese, 2015)와 에얄 와이즈만(Eyal Weizman, 2012)가 이스라엘의 파괴와 통제 기술 개발의 결과로 발생한 수익성 산업에 대해 기록하였다.

[*21] [옮긴이] 나크바(Nakba)는 ‘재앙’, ‘대재난’이라는 뜻의 아랍어로, 1948년 이스라엘 국가 건국이 선포되고 76만여 명의 팔레스타인이 추방당한 사건과 그로 인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은 고통을 의미한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건국일 다음날인 5월 15일을 ‘나크바의 날’로 기리고 있다.

[*22]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Études Palestiniennes)》지의 창간인이자 편집장인 엘레아스 산바르는 그가 학술지를 준비하면서 필요한 커넥션들을 제공해준 사람이 들뢰즈라고 적고 있다(Halevi, 1994).

[*23] [옮긴이] 실비아 윈터의 개념으로, 서구의 여러 이분법(여성/남성, 백인/비백인, 장애인/비장애인...) 중에서도 다윈의 자연선택 개념에 뒤따르는 선택/비선택의 이분법 중 한 축을 이르는 것으로, 역사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어 온 어떤 것들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24] [옮긴이] 원문에는 1979a로 되어 있는데, 1978 〈골칫거리들(LES GÊNEURS)〉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수정했다.

[*25] 이스라엘 형법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돌던지기를 흉악 범죄로 규정한다. 이 글이 쓰이는 시점에, 이스라엘 국가는 돌던지기에 현행 2년형을 20년형으로 늘리는 방안을 지금도 추진하는 중이다.

[*26] [옮긴이] 이 문장은 들뢰즈의 미출간 선집 《광기의 두 체제(DEUX RÉGIMES DE FOUS)》 불어 원본에 수록된 〈돌멩이들(LES PIERRES)〉에는 없는 문장으로, 영역본인 《Two Regimes of Madness》에 수록된 〈Stones〉에도 없는 문장이다. 그러나 Mustapha Kamal이 영역한 〈Wherever They Can See It〉에 이 문장이 실려있고, 《정원(al-Karmel)》에 실린 아랍어 원본에서 직접 번역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점들에 미루어보아, 실제 아랍어로 발행된 원고와 들뢰즈가 남긴 불어 원고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어본에는 Kamal의 영역본에는 없는 문장 및 문단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27] 들뢰즈가 팔레스타인에 참여(engagement)하던 동시기에, 그는 펠릭스 가타리와 《천 개의 고원 : 자본주의와 분열증2》를 공저하는 과정에 있었다. 이 저작에서 팔레스타인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프랑수아 도스(François Dosse, 2010: 261)는 “전쟁 기계라는 개념은 국가가 없는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해 사유하기에 특히 적합하다.”라고 썼다. 이에 더하여, 《대담: 1972-1990(Pourparlers: 1972-1990)》(신지영 옮김, 2023, 갈무리)에 수록된 〈중재자들〉이라는 들뢰즈의 에세이에서 그는 “소수 담론”을 논의할 때 팔레스타인을 간략하게 고려한다. 여기서 그는 묻는다. “(민중의 구성 운동을 포착하는 것이지요. 민중은 미리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민중은, 파울 클레가 말했듯이,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민중이 있었을까요? 이스라엘은 아니라고 말하죠. 틀림없이 있었어요.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그것이 아니죠. 본질적인 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들의 영토에서 쫓겨나는 순간부터 그들이 저항하는 한, 민중의 구성 과정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 (이런 식으로 구성되지 않는 민중은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식민지 담론을 참조하는 기존의 허구들에 소수 담론이 대립하는 것입니다. 소수 담론은 중재자들과 함께 만들어지지요.” (1997: 126) (2023: 231) [옮긴이] 소괄호의 내용은 이해를 돕기 위하여 앞에 생략된 내용을 추가로 인용한 것이다.



rhizome 2025-11-28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하는 DELEUZE의 Palestine 문서고에서, 중동지역 총-지배(/)대리인으로서 Israel의 국가구성과 지역패권구축을 위해 선주민학살과 인종청소를 통한 ‘정착민 식민주의‘로서 재도입된 미국 건국을 위한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청소 모델의 재현일 뿐이라는 핵심적 통찰이 가장 요약적으로 표면화된 글이므로 같이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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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lles_DELEUZE & Elias_SANBAR ‘1982. Interview〈LES INDIENS DE PALESTINE〉
→국역: 갈피Galpie‘241022화.〈팔레스타인의 인디언들〉
@{갈피를 찾아 떠나는 길}=https://galpieless.tistory.com/21




* 역자해설: 들어가기 전에


(0) 이 글은 1975년부터 1995년까지 책으로 정식 출간되지는 않은 들뢰즈의 텍스트들을 모은 선집 중 두 번째[*1]인 《광기의 두 체제(DEUX RÉGIMES DE FOUS)》에 스물 여섯 번째로 수록된 팔레스타인 저술가 엘리아스 산바르와의 짧은 인터뷰〈팔레스타인의 인디언들(LES INDIENS DE PALESTINE)〉을 번역한 것이다.



(1) 최초 출처는 (프랑스어로 출간되는 학술지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Etudes Palestiniennes)》에 수록된 팔레스타인 저술가 엘리아스 산바르(Elias Sanbar)와의 대담을 기록한 것이다. 1980년, 엘리아스 산바르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루는 학술지를 창간하고자 하였는데, 이미 기획안이 완성된 상태로 여러 군데 접촉했음에도 산바르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되기 일쑤였다. 산바르는 벵센느에서의 세미나 이후 절친한 친구가 된 들뢰즈에게 연락을 취해 도움을 요청했고, 들뢰즈는 산바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출판사 미뉘(Minuit)의 대표 제롬 랭동(jérôme lindon)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렇게 하여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Etudes Palestiniennes)》가 1981년 10월 창간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산바르와 들뢰즈는 함께 이 대담을 출간하게 된다.)
DELEUZE, Gilles ‘820508~09. 『엘리아스 산바르(Elias Sanbar)와의 대담집; 해방(Libération)』.[*2].



(2)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들뢰즈는 이스라엘 국가의 형성과 그에 수반하는 팔레스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강탈과 식민화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는 여러 편의 글과 인터뷰를 남겼다. (1978년과 1982년, 1983년, 1988년) 1983년에는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Etudes Palestiniennes)》지에 팔레스타인에 대한 식민화 과정을 현재진행형인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에 대한 식민화와 관련짓는 글을 기고하는데, 팔레스타인에 관한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일련의 글들에서 들뢰즈는 북아메리카와 팔레스타인에서 나타난 식민적 폭력이 자본주의의 발전과 관련됨을 분석하며, 팔레스타인을 식민화하며 팔레스타인 땅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그 역사를 삭제하는 이스라엘의 행위가 ‘집단 학살(genocide)’라는 점을 강조한다[*3].



(3) 엘리아스 산바르는 1947년 이스라엘의 하이파에서 태어난 팔레스타인 역사학자이자 시인, 에세이스트, 번역가, 저널리스트이자 외교관으로, 70년대 후반부터 들뢰즈와 활발하게 교류했다. 산바르는 1960년대 후반부터 파리에서 설립된 팔레스타인 학생 총연합의 프랑스 지부 회원으로 활동했는데, 1969년 연합에서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와 팔레스타인 투사들과의 만남을 위한 요르단과 레바논 방문을 조직했을 때 산바르는 방문 기간 내내 고다르와 동행했다. 1981년 팔레스타인에 관한 가장 권위있는 학술지로 평가받는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Etudes Palestiniennes)》지를 공동으로 창간하여 25년간 편집장으로 재직하였다. 산바르는 팔레스타인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서구 세계에 팔레스타인의 문화를 알리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프랑스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스테판 에셀과의 공저 《생존자와 추방자(Le rescapé et l’exilé)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2012년 이후 산바르는 유네스코 팔레스타인 대사 겸 상임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5년에는 저서 《팔레스타인 사람들(The Palestinians)》로 팔레스타인 도서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하여 여러 매체에서 활발하게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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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의 인디언들 (LES INDIENS DE PALESTINE)[*5]





질 들뢰즈 – 팔레스타인에서 무언가가 무르익은 것 같습니다. 마치 그 사람들이 자신들이 맞은 위기의 처음 상태를 극복해낸 것처럼, 마치 안정적인 영역 혹은 평온한 영역, 당연히 가졌어야 할 어떤 영역에 도달한 것처럼 새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와 새로운 양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공격적이지도 그렇다고 방어적이지도 않으면서 다만 세계 전체와 ‘동등한 위치에서’ 말할 수 있게 하는 어떤 새로운 방식의 말하기지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직 그들의 목표에 다다른 것은 아닌 듯한데, 이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엘리아스 산바르 – 첫 호가 발행되자마자 우리는 그런 반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니,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이런 학술지를 낼 수 있다니!”라고 스스로에게 말한 당사자들도 있고요. 그건 그들의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있던 어떤 이미지를 동요하게 만들었죠. 많은 이들에게서 우리가 강하게 요청하는 팔레스타인 투사의 이미지가 여전히 추상적인 것으로 남아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설명하자면, 우리의 실존이라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전까지 우리는 난민들로 인식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의 저항 운동이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투쟁에 집중하게 했을 때, 우리는 또다시 어떤 환원적인 이미지 안에 갇혀버렸지요.

순전히 군사적인 이미지가 한도 끝도 없이 되풀이되고 또 고립되었고, 우리는 단지 그런 사람들로만 받아들여질 뿐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이미지로 좁은 의미의 군대보다는 투사를 더 선호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학술지의 출간이 유발한 놀라움 또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존재하고 있으며 단지 추상적인 원리원칙을 상기시키기 위한 용도로 취급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말하기를 누군가는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학술지가 팔레스타인에서 만들어지긴 했지만, 이 학술지는 다양한 관심사들이 표현되는 터전을 이루어내고 그에 못지않게 팔레스타인인뿐만 아니라 아랍인, 유럽인, 유대인과 같은 여러 사람들이 발언하는 장소를 구성해냅니다.



누군가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작업에 지평의 다양성이 있다는 것, 앞서 말한 것뿐만 아니라 여러 계층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해야 합니다. 팔레스타인 화가들, 조각가들, 노동자들, 농민들, 소설가들, 은행원들, 배우들, 상인들, 선생들... 요컨대 실제 사회 그리고 이 학술지가 보고하고 있는 실존들에 대해서요.



팔레스타인은 단지 하나의 민족일 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땅이기도 합니다. 팔레스타인은 이 민족과 그들이 강탈당한 대지 사이의 연결이고, 그 부재와 귀환을 향한 커다란 욕망이 작용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1948년 이래로 살고 있던 우리 민족을 전부 추방함으로써 만들어진 유일한 장소입니다. 우리가 팔레스타인을 두 눈에 담을 때, 우리는 연구하고, 조사하고, 아주 작은 움직임들을 포착하고, 그곳에 가해지는 모든 변화를 기록하고 또 옛 팔레스타인의 모든 이미지를 완성해나가지요. 요컨대 우리는 바라보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질 들뢰즈 - 《팔레스타인 연구》지에 실린 수많은 논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들의 영토에서 내몰렸던 과정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불러내고 또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데요,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식민화된 사람들하고는 다른 상황에, 피난하고 내몰리는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준비 중인 책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인) “홍인(Peau-Rouges)”과의 비교에 역점을 두었는데[*6], 이는 자본주의 안에 두 가지 매우 다른 움직임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때로는 사람들을 그들의 영토에 가두어놓고서 잉여가치 축적을 위해 노역을 시키고 착취하는 것이 문제인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식민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때로는 급격한 발전을 위해 다른 곳에서 노동력을 불러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한 영토에서 거기 사는 사람들을 치워버리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아메리카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 시오니즘의 역사가 바로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 왔지요. 어떻게 진공 상태를 만들 것인가, 어떻게 사람들을 치워버릴 것인가?



한 대담에서, 야세르 아라파트[*7]는 그러한 비교의 한계를 지적하고[*8], 그러한 한계가 《팔레스타인 연구》지의 지평선을 형성하고도 있다고도 지적합니다. “홍인들”은 그들이 추방된 영토 바깥에 어떤 기반이나 세력도 전혀 놓여 있지 않았던 반면에, 팔레스타인에는 아랍 세계가 있었다고 말이지요.



엘리아스 산바르 – 낯선 땅들로 이주당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집”의 연장선상으로 이주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독특한 추방자들입니다. 우리가 이주한 아랍 땅은 우리가 자기네들과 융화되길 원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인 곳이지요. 참,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랍인들을 향해 이스라엘어에서는 ‘보이지 않게 하다’를 의미하는 “동화”를 우리와 해내지 못했다고 비난한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생각하게 되네요. 우리를 추방한 사람들이 느닷없이 아랍의 인종주의라고 주장하는 어떤 것에 대해 우리의 관점에서 걱정하게 된 거죠. 그렇다고 그게 우리가 몇몇 아랍 국가들에서 반발에 맞설 필요가 없었다는 걸 의미하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그러한 충돌들은 우리가 아랍 사람이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무장 투쟁을 통한 혁명을 하고 또 해왔기 때문에 가끔 그것이 불가피했을 뿐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우리는 유대 식민지 개척자의 “홍인들”과도 같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우리의 유일한 역할은 사라져버리는 데에 있지요.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건국의 역사는 아메리카에 미국을 탄생케 한 그 과정의 재연임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거기에 그들의 상호 연대를 이해하기 위한 본질적인 요소 중 하나가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전적’이고 통상적인 식민화를 위한 위임통치 시기 동안 식민자들과 피식민자들이 공동으로 생활하지 않도록 만든 그런 요소들이 있지요[*9]. 프랑스와 영국 등은 토착민들이 그 안에 현존하는 것이 그 공간의 존재 이유가 되는 어떤 공간을 설치하기를 강력하게 바랐습니다. 거기에 있는 피지배자들에게 지배력이 미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지요. 이는, 우리가 그걸 바랐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어떤 코뮌적인 공간을 창조해냈습니다. 다시 말해, 명백하게도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의 이러한 ‘만남’을 이루어내는 어떤 네트워크, 구역, 사회적 삶의 수준을 창조해낸 것이지요. 그 만남이 무관용적이고, 짓밟으며, 착취하고 또 강압적이라 해도 ‘이방인’이 ‘현지인’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과 ‘접촉’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은 전혀 바뀌지 않습니다.



시오니즘은 그와 반대로 우리의 부재를 필요로 함으로써 시작하며, 더 나아가 일란 할레비가 잘 서술했듯이[*10] 그 구성원들의 특수성(유대인 공동체들의 옛 소유지)을 우리의 거부와 우리의 퇴거, ‘강제 이주’ 그리고 대체의 주춧돌로 삼는 데까지 이릅니다. 그렇게, 내가 ‘이방의 식민자들’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도착했던 것과 같은 발자취를 따라, ‘미지의 식민자들’이라고 불러야만 할 것 같은 이들이 우리에게 태어났습니다. 그들의 고유한 특성을 타자에 대한 전적인 거부의 기초로 삼고 그에 따라 모든 걸 사고하고 행동하는 이들이요.



더구나 1948년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나라는 단지 점령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소멸했지요. 같은 순간에 ‘이스라엘 사람’이 된 유대인 식민자들은 그것을 실천해야만 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시오니즘 운동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어느날 떠나갈 것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그 나라가 텅 비어있었다는 생각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공동체를 불러모았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 도착해서 그 반대 상황을 확인하고 그것을 글로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 공동체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매일매일 물리적으로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의 면전에 대고 그들이 거기 없는 사람인 양 행동했지요. 이런 자기기만이 물리적인 것도 아니니 거기에 곧이곧대로 속아넘어가는 이는 없었습니다만, 모두가 이 사람들이 오늘날 현재 ‘막 소멸하려는 참’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멸이 성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출발점에서부터 마치 그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처럼, 다시 말해 엄연한 현실에서도 타자의 현존을 전혀 ‘보지 않는’ 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 또한 깨닫고 있지요. 그 성공을 위해서 땅을 텅 비우는 일은 식민자들 자기 자신의 머리에서 ‘타자’를 퇴거조치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했습니다.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 시오니즘 운동은 유대주의를 추방의 근거 그 자체이자 다른 이들에 대한 거부의 근거로 만드는 인종주의적 시각을 철저하게 따랐습니다. 다른 인종주의자들이 주도한 유럽에서의 박해에서 결정적으로 도움을 얻은 시오니즘 운동은 그로 인해 그 자신의 방식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지요.



다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시오니즘이 대문자 유대인을 유폐했다고, 내가 방금 서술한 그런 시각의 포로로 붙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말하건대 시오니즘은 그들을 포로로 붙잡고 있습니다. 어느 한순간에 붙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요.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홀로코스트가 지나가자 그 방식들이 진화하여, 유대인들이 어디에서나 그리고 어느 때에나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들의 ‘타자’이기를 원하는 사이비 ‘영원한 원리’ 안에서 스스로를 변이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거부당하고 저주받는 ‘타자’라는 그러한 위치를 고집스럽게 점유하기만을 갈망할 수 있는 민족이나 공동체는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 중동의 타자들은 아랍 사람이고 팔레스타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들의 소멸이 의제화되는 그 타자에게 서구열강들이 어떤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은 그야말로 냉소와 위선의 극치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부 수장의 광기에 대항하여 보호를 보장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건 바로 우리입니다.



이 모든 상황을 무릅쓰고, 우리의 유일하고 단일한 대변자인 OLP(l‘Organisation de Libération de la Palestine,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팔레스타인 민주국가를, 그들이 누구이건 간에 그들의 모든 거주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이 무너지는 어떤 국가를 갈등의 해결책으로 제시했습니다.



질 들뢰즈 - 《팔레스타인 연구》지는 1호의 첫 두 페이지에 수록된 그 자신의 선언문이 있지요.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은 민족”이라고요. 이는 다양한 의미를 담은 외침입니다. 첫 번째로, 부름이며 소환입니다.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인정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쉬지 않고 비난합니다. 보세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우리를 파괴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팔레스타인이 자기 자신을 인정받기 위해 싸워온 기간이 50년도 넘었습니다.



두 번째는, 어떤 반대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선언은 차라리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은 민족이 아니다”는 것이었죠. 우리의 초월성과 어마무시한 학대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지 2호에 실린 유대인 저자들의 두 텍스트가 중요해요. 홀로코스트에 관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시오니즘적 반응에 관한, 그리고 팔레스타인과의 관계와 거기에 발을 담그지 않았던 아랍 세계 전체와의 관계에서 이스라엘에서 발생한 사건을 이해하려는 의미작용에 관한 텍스트들이요. “규범에서 벗어난 민족으로 대우받기”를 요구하는 이스라엘 국가는 서방 국가와의 관계자에게 경제적으로 재정적으로 의존하는 상황 아래에서 더욱 더 유지될 것인데, 그와 같은 어떤 나라에서도 그와 비길 만한 경우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보아즈 에브론)[*11]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와 반대되는 요구 사항에, 그들 자신인 자가 되는 다시 말해 완전히 “평범한” 민족이 되는 것에 그토록 사로잡혀있는 것이지요.



종말론적 역사관에 대항하여, 역사의 의미를 가능한 것 중 하나로, 가능성의 다양체 그리고 매 순간 증식하는 가능성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 《연구》지가 현실적인 분석들로 무엇보다도 보여주길 원하는 게 바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엘리아스 산바르 – 완전히요. 우리의 현존을 세계 안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이러한 물음은, 그렇게나 간단한 것이면서도, 분명히 많은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진정으로 받아들여지기만 한다면 팔레스타인 민족의 소멸을 예견했던 사람들에게 매우 힘든 과업을 부과하게 될 그런 종류의 진실입니다. 실제로, 결국, 그러한 진리가 말하는 바는 모든 이들이 말하자면 “권리에의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지요. 당연해 보이지만, 모든 정치적 투쟁의 출발지이자 종착지를 얼마간 표시하는 힘입니다. 시온주의자들한테 물어보면, 그들이 이 주제에 대해 무슨 말을 할까요? 당신은 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어떤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말하는 건 절대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떠한 세력도 그런 입장을 지지할 수 없고, 그들도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지요. 틀림없이 그와 반대로 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거기에 없다”고 단언하는 걸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현존에 대한 우리의 긍정은, 그것이 말해지지 않기 때문에, 언뜻 보이는 것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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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번째 선집은 《무인도와 다른 텍스트들(L’Île déserte et autres textes)》으로, 1953년부터 1974년까지의 글들을 모은 것이다.

[*2] François Dosse, 〈Les engagements politiques de Gilles Deleuze〉,《Cités》 40, Paris, PUF, 2009.

[*3] Kathryn Medien, 〈Palestine in Deleuze〉, 《Theory, Culture & Society》, 1 September 2019, 36(5):49-70.

[*4] https://www.unesco.org/en/articles/writer-elias-sanbar-and-spains-biblioteca-islamica-receive-2015-unesco-sharjah-prize-arab-culture
엘리아스 산바르는 1947년 출생한 팔레스타인 저술가로 《팔레스타인 연구》의 편집장이다. 그는 70년대 말부터 들뢰즈와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5] 엘리아스 산바르(Elias Sanbar)와의 대담. 『해방(Libération)』, 1982년 5월 8-9일, p.20-21.
이 대담에 앞서 들뢰즈가 작성한 짧은 글을 보자. 이 글은 1981년 10월 근동 지역 위기의 요소들에 대한 분석을 초기 목표로 삼아 창간된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Etudes Palestiniennes)》지에 실렸다. “프랑스어로 쓰인 아랍 학술지를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 왔다. 사실은 팔레스타인보다도 북아프리카 쪽에서 오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 연구지는 명백히 팔레스타인 문제에 중심을 맞추면서도, 아랍 세계 전체와도 관련되는 두 가지 성격을 갖는다. 하나는 이 연구지가 매우 심도 있는 사회-정치적 분석을 능숙한 논조로 냉철하게 제시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매우 풍부하면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아랍 그대로의 문학, 역사학, 사회학 ‘문헌집(corpus)’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6] 들뢰즈는 다음을 언급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1948, 추방(Palestine 1948, l’expulsion)』, 파리, 1983년 발간된 팔레스타인 연구지 출판본.

[*7] [옮긴이]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2004)는 팔레스타인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정부 수반(1994~2004),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의장(1989~2004)이다.

[*8]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Etudes Palestiniennes)》, no.2, 1982년 여름, p.3-17.

[*9] 1921년까지 이어진 영국의 군부 통치를 받던 팔레스타인은 국제 연맹(SDN, Société des Nations)에 의해 대영제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다. 민간통치는 1923년 시작되어 1948년 5월 15일 영국이 물러나고 이스라엘 국가가 선포되는 날까지 지속되었다.

[*10] 일란 하레비(Ilan Halevi), 『유대인 문제, 종족집단, 법률, 공간(Question juive, la tribu. la loi, l’espace)』, 파리, 미뉘(Editions de Minuit), 1981.

[*11] 보아즈 에브론(Boaz Evron, בועז עברון) 『“홀로코스트”에 대한 해석들 : 유대 민족을 향한 위험(Les interprétations de l’“Holocauste” : Un danger pour le peuple juif)』, 팔레스타인 연구, no.2, 1982 겨울, p.3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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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sen  



1. 언론은 이미 가장 강력한 전 사회적 파급력을 갖는 명예형을 기소, 구형, 선고, 집행하는 인민법정 여론재판의 유일무이한 독점적 관할자로서 실질에 있어서 막강하고 광범한 일상 권력을 즉각적, 항상적으로 행사하고 있는 (준)사법기관의 지위에 도달했다.[1]




2. 이뿐 아니라 구조적으로 현대 언론은 주체 전체를 둘러싸고 Media Bubble 안에 가두어 버린 채 실재[2]와 주체 사이를 개입, 차단하여 주체들에게 가공의 현실[3]을 독과점적으로 제공, 통제함으로써 감각과 인식을 조작하고 인공 현실을 창조해내는, 현실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이런 자의적 가공의 가장 비근한 예로 바로 언중법 개정과 관련해서만도 YTN 등 언론 Cartel은 최근까지도 민언련과 민변이 개정을 반대하는 대표적 2대 단체라며 사실 자체를 정반대로 왜곡해 수십 차례 집요한 반복 방송을 한 반면,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들은 철저히 숨기고 은폐해 버린 채 침묵으로 일관하여 국민 대다수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기독교 목회자정의평화실천연대, 대한성공회, 조계종적폐청산시민연대, 개혁국민운동본부, 민주언론시민연합, 사회대개혁지식네트워크, 고려대민주동우회 등 무려 140여 단체가 언론의 이런 작태와 반발을 보다 못해 개정안의 조속한 통과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는 사실 등등은 잘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마치 국내외로 압도적인 대다수가 반대를 하고 있는 듯한 착란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파렴치하고 비열한 취사선택과 침묵의 담합공모가 비일비재 일상화된 것은 현재의 언론환경이 대단히 심각하고 위험한 상황에 빠져 있음을 웅변하는 징후들이 아닐 수 없다.[9]




3. 따라서 과거 권위주의 독재 정부 시대엔 물리적 폭압기구와 정보기관들이 전면에 나서 직접 국가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사회를 통치해 왔지만, 형식적 절차적 민주화가 진전된 현재 국면에선 이상 변화된 사회 구조와 조건들을 적극 활용하여 Hard Power 대 Soft Power, 또는 RSA 대 ISA라는 고전적 이분법을 버리고,


   ① 폭압기관, 정보기관들은 뒤로 물러서서 자신들을 숨기고 대신 새로운 사법/사정권력으로 떠오른 언론기관을 경유해 '언론(사)의 자유'라는 오역된 구시대의 절대 가치와 취재원 보호라는 미명까지 덮어쓴 채 훨씬 더 폭넓고 자유로운 대리폭력을 행사하는 한편,


   ② gaslighting 등 정보-인지 조작 기술부터 Ideology적 문화정치까지를 통해 여론을 주조-통제하는 두 축의 강온 양면 통치술이 모두 다 언어와 정보를 주무기로, 명예를 핵심으로 하는 (정적 등 상대방의) 사회적 생명을 전리품으로, 담론장만을 주전장으로 전개-행사되는 새로운 통치 양식으로 이행했기 때문에 과거 국가폭력에 모든 감시활동의 초점이 주어졌던 것과 같이 이제는 언론폭력에도 같은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4]




4. 또한 그 주통치술의 한 축인 언론폭력 기법들도 사회발전에 따라 나날이 교묘해지고 고도화하고 있기 때문에 혐오-차별만 해도 과거에는 인종 등 특정 minority[5] 집단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표현-행사된 반면, 현재는 집단(전체)화 사고와 고정(관념)화 사고를 조장하는 기초 방법은 여전히 동일하게 사용되나 특정 집단을 혐오-차별하고 억압하기 위해 대신 반대 집단을 일방적이고 맹목적으로 우대하고 극단적으로 과장하여 찬양미화하는 등의 간접 기법이 주로 동원되고 있으며 작금의 소위 '전문가주의' 광란은 정확히 이러한 맥락을 품고 있기 때문에 정권 전체를 위협하는 이런 엄청난 저항을 불러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날로 고도화하는 언론폭력의 새로운 기법들 때문에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그나마 가장 선진적이고 피해자 중심적인 인권의식을 가진 인사들로 엄선된 기관조차 "'보복'은 매우 주관적인..." 어쩌구 하면서 경악스러울 정도로 둔감한 감수성과 상황파악능력을 시전하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인데, 그렇다면 유사한 인적 계층의 더 보수적이거나 후진적 단위일 사법부나 언중위를 상대로 과연 그 누가 도대체 어떻게 악의적 언론에 의한 고의·중과실 보도 피해를 입증해 낼 수가 있단 말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6]




5. 이러한 모든 사실과 그에 따른 막중한 책임을 완전히 망각한 채 한낱 기러기들의 이기적 이익단체로 전락해버린 언론의 광란과 폭동 사태에 의해 국민 다수 계층, 특히 청년들이 느낀 고통과 그 불의, 협잡, 기만에 대한 분노는 섣부른 상상을 초월한다.




6. 나는 이들의 간절한 호소와 지속적 호명을 통해 그 문제의 해결을 사명과 임무로 명령받았다.




7. 언론피해구제법은 이런 맥락에서 민주당(파)에게 안내한 마지막 비상탈출구였다.




8. 민주당이 제대로 된 정치적 대표체라면, 배액 청구권자에서 '전직' 공직자와 중견기업까지를 완전히 제외하면서라도[7] 원래의 개혁 의지와 국민적 염원에 굳건히 입각해 원안대로 통과시키고 나서, 상당기간 그 실제 작동 결과와 효과들을, 산출된 각종 지표와 Data로 확인한 후 최종적으로는 헌재 등등까지 포함한 다른 절차와 제도, 보완입법들을 통해 미세조정해 나가는 경로를 택해 돌파해 나아갔을 것이다.




9. 그러나 '포용'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민주당 정부의 '사면'이나 '부동산 세제[8]'에서 반복되어 온 어이없는 실책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마저 속임으로써 한 치 앞도 내다볼 능력이 전혀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의 저변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조차 전혀 눈치 채지 못 하는 언론의, 폭동과 광란에 뒤이은 갖은 엄살과 막무가내 식 떼쓰기에 계속 밀려 너덜너덜한 누더기가 되어버린 현재의 개정안으로는 언론에 의한 문제와 피해의 실효적 구제도, 심지어 법의 작동조차도 전혀 기대할 수 없기에 입법 통과가 되든 안 되든 일체의 상관이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10. 위와 같이 호소들은 너무나 애절하고 그 고통과 분노는 상상을 초월함에도 개정안을 통해서는 도저히 그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따라서 이 문제의 해결과 언론환경의 개선을 위하여 앞으로 우리는 다른 '무슨 짓'이라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음을 분명히 밝히는 바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그러므로 언론중재법 강화란 다름아닌 이 새로운 사법/사정권력으로서의 인민법정에 정연한 체계와 질서를 부여하고 그 권력에 따르는 엄중한 책임과 의무를 부과하는 필수불가결하고 당연한 과정의 첫 걸음에 불과할 뿐이다.



[2] The real.



[3] 見實; Reality (見 :나타날/보일 현).



[4]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사찰/정보기관이 숨은 매개고리를 통해 언론에 정보를 넘겨 더욱 폭넓은 대리폭력을 자유롭게 행사하는 이 통치기제'를 통해 그 기관들의 존립과 활동 근거도 유지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고양, 조장되고 활성화하는 확대재생산 회로를 끊기 위해서라도, 인민법정에 체계와 질서를 부여하고 의무와 책임을 묻는 법제 도입의 핵심적 일환으로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경우에도 사실이기만 하면 무조건 면책시키기보다 '독수독과론'에 준거하여 불법적 정보획득에 대한 징벌적 규제와 피해 구제의 도입이 반드시 유지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5] 주로 '소수자'로 번역되는데, 오역에 가깝고 '약자'나 '비주류'로 번역되어야 '여성은 결코 소수자가 아니다'라는 식의 황당한 내외 반론을 없앨 수 있음.



[6] 또한 진보계도 백날 오체투지까지 해봐야 전혀 씨도 안먹히는 '차별금지법' 제정운동만을 분리단절적으로 오인하고 매몰돼 있기보다 눈앞의 언론법 개정이 바로 '혐오차별(표현(조장)) 금지법'의 시작과 단초가 될 수 있음을 직시하고 동일 관점으로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전 사회적 여론을 형성-주도하는 언론, 특히 독과점적 (준)공영 방송 언론에 의한 혐오차별 조장은 그 피해가 너무나 급속하고 광범위하기 때문에 정확히 이들에 의해 주도된 이번 언론폭동도 국민 대다수와 청년층에게 가해진 더 큰 피해는 무한반복의 '전문가'주의 광란 그 자체뿐 아니라, 이에 완전히 세뇌고무된 대중, 특히 community (/) site들에서 혐오차별적 공격표현의 폭증 때문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7]그래도 정 어렵다면, 청구 '대상'을 규모에 따라 중상위 언론사로 제한해서라도.



[8] 최근의 경제 상황은 금융(완화)정책이 점차 그 한계 구간의 입구에 진입하고 있다는 sign과 symptom들로 해석되어야 하며, 앞으로 펼쳐질 이러한 구간에서 유일한 해법은 통화 유동성 공급은 점차 줄여 나가면서 그간의 온갖 완화 조치들의 특혜를 독식해 한껏 부풀어 버린 자산 시장의 시세 차익들을 세제로 환수하는 과정 자체에서부터 양극화도 이완하면서 이를 기반(/)자원으로 강력한 재정중심정책을 향해 신속전환해, 금융통화정책으로는 조금도 해결되지 않은 채 오히려 더욱 심화만 되어 갈 양극화 문제와 광범한 수요기반 실물경기 부양을 정밀하게 집중 표적화하여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9] 이하는 조속한 언중법 개정 통과를 촉구하는 140여 개 단체의 공동성명서 전문이다.


66

참된 언론자유는 언론의 책임으로부터!


언론중재법의 조속한 국회 통과를 촉구한다!



유신과 군사독재 시절 권력의 총칼 아래 신음할 때 언론은 국민이 숨을 쉴 공간을 제공하는 탈출구였다. 그리하여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와 자유언론수호투쟁은 마침내 독재의 아성을 무너뜨린 하나의 봉홧불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 언론개혁의 절규가 시민사회에서 분출하는가. 대한민국 언론이 그만큼 타락했기 때문이다. 자본으로부터 독립과 참된 언론 자유를 위해 싸우던 선배들의 결기를 까맣게 잊고 현실에 전면적으로 투항했기 때문이다. 이제 언론은 거꾸로 독점재벌, 사법/검찰, 극우정당 등 우리 사회 과두 기득권의 이익을 앞장서서 지키는 용병이 되고 말았다.


시민의 투쟁으로 쟁취된 언론 자유는 어느덧 통제 불능의 자의적 권력으로 변질되었다. 시민의 편에서 정의를 수호해야 할 언론의 책임은 언론사주와 하수인들의 독점적 권리가 되고 말았다. 대한민국 언론 자유의 신화는 마침내 ‘타인의 인권을 침해할 자유’, ‘가짜 뉴스로 명예를 훼손할 자유’로 변신하고야 만 것이다.


현재 국회 본회의 통과를 앞두고 있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이 통탄할 언론현실을 개혁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책임과 자유가 공존하는 매스미디어 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첫 번째 벽돌을 쌓는 것이다.


하지만 개정안의 통과가 벽에 부딪히고 있다. 극우야당의 국회본회의 통과 저지 책동 때문이다. 그들과 한 몸이 된 언론 기득권 구성원들의 저항 때문이다. 그 선두에 이른바 ‘조중동’이 있다. 언론중재법이 언론자유를 침해한다는 가짜 프레임을 극렬히 유포시키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개정 언론중재법이 현 집권세력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 차기 정권연장을 목표한다는 강변까지 나오고 있다. 개정 법률안 발효 시점이 2022년 대선 완료 이후임을 감안할 때 기괴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허위조작 뉴스, 발행부수 조작, 불법 차명거래, 사생활 침해 기사가 있어왔는가. 이를 통해 추산이 어려운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고 시민 비판이 고조될 때마다 신문협회, 기자협회, 언론노조 등은 언론개혁은 자정능력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과연 결과는 어떠했는가?. 우리나라의 <언론 자유도>는 3년 연속 아시아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언론 신뢰도>는 주요 40개 국가 중 5년째 최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 언론자유의 적나라한 현실인 것이다.


현재 추진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그러한 참담한 언론 현실에 대한 시민사회의 분노가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법률안의 핵심으로서 “언론사의 명백한 고의 또는 중대 과실로 인한 허위·조작 보도에 대한 최대 5배의 징벌적 손해배상 청구”는 책임에 기초한 언론자유를 가능케 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것이다.


참된 언론자유는 언론사주와 일부 언론종사자들의 독점적 소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시민을 위한 시민에 의한 시민의 자유다!



이러한 확고한 믿음 아래 우리 시민사회단체 일동은 다음과 같이 촉구한다.


1. 언론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도 늦출 수도 없다. 주어진 ‘자유’를 악용하여 가짜뉴스로 여론을 호도하는 행위. 허위사실임을 알면서도 언론의 이름으로 폭력적 보도를 자행하는 행위는 민주주의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사회적 약자인 시민의 피해를 방지하고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악의적 가짜뉴스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것이 주권재민 국가의 기본적 장치이며 역으로 언론을 위한 최소한의 자정수단이다.


1. 정부와 여당은 시민사회의 이 같은 절박하고 엄중한 요구에 부응하여 조속히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본회의 통과를 진행시켜야 한다. 이를 통해 자유와 책임이 공존하는 진정한 언론개혁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2021년 8월 30일


언론중재법 개정을 촉구하는 시민사회단체 일동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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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izome 2024-01-20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당연히 거칠어진 어조는 대규모 법정 소송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로 해석되어야 마땅하겠죠.

우선 ㅁㅁ 담당자께 경고합니다.
소설 좀 작작 쓰고 당신 정체나 좀 밝히시기 바랍니다.
소송 준비하느라 방송사 프로그램 홈페이지고 어디고 다 뒤지고 돌아다녀도 도대체 당신 이름 하나 밝히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신도 무슨 비밀 정치조직이라도 되는 겁니까?

밑도 끝도 없이 막말 쏟아댄 게 벌써 한두 번도 아니고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란 게 결국은 다른 채널들이 자중하고 있을 때조차 혼자 친한 척 계속 비벼대면서 할 말 못 할 말 무책임하게 아주 맘 편히 다 해대어 다른 모든 채널들에게 다시 용기를 주고 모함과 비방 대열에 또 끌어들이고 있는 짓거리입니다.

벌써 몇 년째 도무지 쉴 틈 없는 인격살해 시도들에 시달려 왔고 그에 대응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로 신원을 공개하지 않고 있는 것 뿐인데 그간 당신이 해 온 짓은 생각도 않고 자꾸 도대체 누가 누굴 용서한다는 겁니까??


적당히 좀 하시기 바랍니다.
당신 같은 인간들과 각종 구경꾼, 관전꾼 XXX들 때문에 참다 참다 그만 두게 되면 그 다음 벌어지는 사태들에 대해 모두 책임질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rhizome 2024-04-28 0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별 것도 아닌 일 하나 하나에 또 아주 난리가 났나요?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일들에 어슴푸레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 하나 얼핏 보고 오로지 억측만으로 가지가지 이야기를 지어내 떠들어 대는 인간들은 그 의도와 정반대로 그냥 딱 자기 수준만 투명하게 드러낼 뿐이라는 사실도 알 리가 없고.....

전혀 관심도 없는 무슨 얼어죽을 ‘주인공‘ 타령이나 하고 있지 않나...
생싸이비 심리분석이랍시고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내키는 대로 떠들어 대고 있는 방송들은 채증과 함께 계속 모니터링을 하고 있으니 더 큰 죄 짓지 말고 각별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EBS
대충 알아 들었으리라 믿고 한동안 신경을 안 썼더니 설마 아직도 재방, 4방을 해 가면서 지금 일주일 내내 저에 대해 되지도 않는 헛소리들을 계속하고 있는 겁니까?
GQ 선생님에 대해서도


* 기타 호사가 관전꾼 분들께 드리는 추신

‘침묵‘이라는 기표 하나조차 올바른 해석에 성공한 적이 없는 분들이 뭘 그렇게나 시끄럽고 소란스럽게 가지가지 황당무계한 입방아들을 찧어 대고 계시는 건지

일단 ‘피로‘나 ‘무기력‘과는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고 차라리 이미 그간 여러 번 지적돼 온 배신들의 PTSD로서 ‘조용한 사직‘ 등에 훨씬 더 가깝다고 보는 게 그나마 정상적인 분들이겠죠.



두 번째 비밀통로 : ‘초월성‘
이 요소 단 하나 때문에라도 당신들 같은 소시민의 오로지 평범한 우물 안 일상(/)생활 감각에만 기댄 속물적 통속성으로는 아무리 애를 써봤자 죽었다 깨어나도 애초 저에 대해 절대 뭐 하나 제대로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rhizome 2024-08-26 0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상대가 눈치 없어 보입니까? 당신이 위에서 말한 바보들이 아니라면 혹시 당신을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닌지 꼭 한번 생각을 해봐야만 합니다.
그걸 넘어 눈치를 밥 말아 먹은 것처럼 보입니까? 그럼 그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당신을 경멸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인생 낭비라 아예 조회 자체를 안 하고 있었는데 간만에 보니, 엄밀한 조직론에 입각해 원인분석과 대책을 제시해 줄 능력도 무엇보다 진심 자체도 전혀 없으면서 드디어 복통이 해소되는 것 같다는 기대감에 마냥 신이 나서 백면문인의 법적 무지가 조장하는 용기로 가일층 비방과 책임전가에 열을 올려 점점 더 난리를 쳐 대려 들거나 아니면 자기 손으로 나무를 베어 버렸다는 악어의 눈물 같은 알량한 죄책감을 지어 보이려 애쓰는 표정의 인간들 모두가 단 한 곳만을 뚫어지게 들여다 보고 있는 그 광기 어린 충혈된 갖가지 눈들!! 그것이야말로 이 군상 영화의 진정한 공포 중 공포의 백미입니다.

자신이 뒈져 나자빠진 지 이미 오래인 줄도 모르고 한국문단이 뒤늦게 싸질러 낳아버린 위대한 시인 김 살리에리와 그 주변 인간들의 밑바닥에 대하여는 조만간 따로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 문제만은 그간의 다른 내용들과 달리 약간의 전파율조차 전혀 안 나오고 있는 건 아닌 듯 싶어 우선 답하기로 합니다.
일단 당신 회사 법무팀에라도 제발 좀 문의를 하고 나서 행동을 하더라도 하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다른 방송사들은 왜 다들 갑자기 조용해 진 것 같습니까??

이 문제를 이렇게까지 계속 방기한 채 제대로 관리감독을 하지 않고 계시면 류시춘 이사장님도 언젠가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시면 안 될 것입니다.)


 

.



   그 이전에는 전혀 신경을 못 쓰고 그냥 지나치던 {Classⓔ} Program을 주말에라도 틈틈이 챙겨 보려 노력하게 된 최초의 계기도 김석 선생님의 Lacan 강의 때문이었는데, Butler는 여러 사람들에게 {위대한 수업Great Minds}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유인이 되기 충분할 것입니다.

세계 지성계의 지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나 그 기여도를 고려할 때, 그래도 나름 외국 방송이라고 신경 쓰고 나오신 듯한 선택이 하필 동물피부 jacket이었다는 점이 실망스럽긴 하지만, 적잖은 분량의 강의안까지 정성스럽게 준비하신 배려심과 성실성에 대한 경의로 겨우 상감하면서 감히 드리고자 하는 간략한 제언은...



대부분의 강의가 너무 짧아 심도 확보가 전혀 안 되고 매우 단편적으로 수박 겉핥고 지나가기를 못 벗어나는 게 고질적 문제점일 것으로 보이나, 이를 최대한 보완하기 위해서는 이번처럼 강의안을 별도로 준비하신 경우만이라도 (사전에 가능하다면 더 좋겠지만) 반드시 같이 online 배포, 공유될 수 있도록 좀 더 노력을 기울여 주실 것과 특히 성우의 dubbing diction은 국문 자막의 필요성을 현격히 감쇠시키는 게 사실이긴 하나, 여전히 난청 등등 다양한 유형의 청각 장애를 갖고 있을지도 모를 다른 동료 시민들을 위해 {Classⓔ} Program에 준하는 꼼꼼한 자막 처리를 주관 기관들에 요청드리는 바입니다.[1]


또한 더 중요하게는 출연진이 너무 영미권, 특히 미국 거주자라는 사실이 강력하게 조건지을 인식의 편향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세계 각 지역의 다양한 지성들에게도 적극적 섭외 시도를 확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미 인구의 상당수가 영미권 강의 자료엔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여러 channel들이 날로 확대되고 있는 반면, 기타 언어권은 번역, 소개 등에 공영 방송과 기관들의 개입이 더욱더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될 뿐 아니라, 특히 France나 독일 등의 경우 인문사회과학 등 광범한 분야에서 영미 학계를 압도함으로써, Butler 자신을 포함해 영미권에서도 유학 등 수입 및 추종에 급급한, 뿌리와 원천이 되고 있는 석학들과 그 학통들이 다수 존재하는데, 더구나 Jacques Ranciére, Jacques Attali나 Hito Steyerl처럼 이 지역 출장이 전혀 일정에 없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Badiou[2], Balibar[3], Jacques-Alain Miller 등이나 Bourdieu 후학단, Jacques Bidet, Dominique Lecourt, Pierre Macherey 그리고 바로 이웃한 Habermas, Axel Honneth[4] 등의 Frankfurt 학파와 Negri 주위의 post±Operaisti, Slovenia/Ljubljana 학단 등등은 물론이고, 경제학만 해도 Gérard Duménil, Dominique Lévy 하다못해 Thomas Piketty 등등의 거장들이 전멸에 가까울 정도로 완전히 배제된 점[5]은 거의 지역 차별에 해당할 정도여서 정말 매우 안타깝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모쪼록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에서 힘들게 애써 주시는 점 전혀 모르는 바 아니오나 기왕 들이시는 노력들이 조금이라도 헛되지 않도록 그 모든 노고에 선행하는 근본적 방향 설정의 중요성에 관해서만이라도 약간의 신경을 더 경주해 마무리 지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나중에 확인해보니 Butler까지는 재방 version에도 청각장애인용 자막지원조차 첨부되어 있지 않았음.

[2] 잘 알려진 직계제자인 서용순 선생님을 통하면 의외로 매우 빠르게 진척될 수 있음.

[3] 역시 직계제자인 배세진 선생님을 코디로 참여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매우 빨리 성사될 수 있음.

[4] 심지어 Honneth는 운이 좋으면 현재 Frankfurt( @Goethe Univ.)가 아니라 New York시( @Columbia Univ.)에 거주 중일 수 있음.
(겸직으로 되어있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매주 화요일 11~13시를 Office Hour로 운영 중.)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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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izome 2024-05-22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2‘]&[5]
현존하는 세계최고지성이라 할 수 있는 BADIOU는 이미 만으로도 87세를 넘었으므로 언제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렇지 않더라도 정신력이 감퇴할 수 있으므로 한시라도 빨리 방송강연의 기회가 최우선적으로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될 위태로운 보석이라 아니 할 수 없음.
참고로 Etienne_BALIBAR도 이미 82세, Jacques-Alain_MILLER도 80세.



66
‘현존 최고의 지성‘에 관해 부연하면, 완전히 새로운 관점의 탈근대 국제관계론을 정립한 [[제국Empire]]이 출간되었을 당시만 해도 Antonio_NEGRI를 ˝(MARX를 넘어선 )MARX에서부터 DELEUZE, MACHIAVELLI를 거쳐 SPINOZA 연구까지 모두 아우르는 최고의 지성˝으로 주저 없이 손꼽은 서적들이 다수 발견되나 이후 신자유주의 체계의 급격한 붕괴 과정과 이에 따른 국제 정치경제 정세의 급변을 거치며 검증된 국제관계의 실제는 본질적으로 세계체계론에 더욱 부합하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제국은 이를 대체하는 새로운 단계가 아니라 세계체계라는 하나의 단일 구조가 국면에 따라 세기 초에는 강대국 간 갈등이 격화하는 제국주의적 성격이 전면화되었다가 점차 세기 중후반 전성기에 제국적 성격이 강화되다 100여 년에 걸친 종말기에 다시 갈등이 격해지는 제국주의로 회귀하는 관계였음이 드러나면서 지금은 BADIOU와 각축하(거나 경우에 따라 오히려 다소 열세로 평가되는 경우도 있으나 반대로 NEGRI에 비하여 BADIOU의 최대약점은 정치경제학적 사유의 부재가 자주 지적되)는 상태로 볼 수 있는데, 문제는 NEGRI가 33년생으로 곧 90세라 단연코 가장 다급하고 위태로운 Great Mind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음.
99
그리고 더욱 결정적으로 현대세계사상(사)의 중심무대를 France에서 Italia로 옮겨 놓은 장본인들인 (post)Operaisti의 수장.

: 인용 따옴표 안은 일부러 연령을 수정하지 않고 처음 2023년 연초 게재 당시의 원문[*]을 그대로 재게재했는데 이유는 NEGRI 선생이 안타깝게도 그해 말인 12월 16일자에 향년 90세로 서거하셨기 때문.

세계(체계)의 위기와 봉기는 50~60년 주기로 반복되고, 지금까지는 다행히 그 격변기 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지성과 리더들이 탄생해 왔으나, 너무나 안타깝게도 이제 20세기 중반 혁명을 이끌었던 3세대의 빛나는 사상가들이 모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모두들 어렵겠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지런히 남은 분들이라도 생전에 지금 여기 우리의 문제에 대하여 더 가까운 배움을 청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최초 게재 원문 출처 : <편지> Page 덧글창
@https://blog.aladin.co.kr/rhizoma/13044350#C4041005

‘2023-04-02 12:35 최후수정 덧글 내
‘$4장. 탈주술화와 재주술화, 그리고 기계주의‘ 중
‘ [****] Alain_BADIOU‘에 관한 주해부





rhizome 2024-05-22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현대 급진주의에 대한 오해와 세대별 차이 >


0. 변별/쟁점들

0.오해1. 한미동맹


0.오해2. 사회주의


0.오해3. 평의회와 자치정부, 그리고 ((초)Elite대리주의) 정당의 존부 및 상호관계와 태도




-0. 구체적 입장의 차이


2세대.




3세대.

3a. 뿌리로서의 Mao주의
3b. ‘68혁명 사상과 (post)anarchism

: 사상사적 관점에서 3세대의 뿌리는 Mao주의와 문혁에 깊은 영감을 받아 발아하였고 이후 anarchism을 참조하면서 postanarchism으로 정립되어 간 사상운동으로서, 국내에서는 이러한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다면성에 대한 심각한 무지로 철저히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폐해에만 천착하여 Mao주의와 문혁 현상 전체를 아주 일면적으로 완전히 악마화하기에만 급급하고 있으나, 본래 그 사상철학적 이념과 목표는 ˝백화제방˝과 ˝백가쟁명˝으로 심지어 ‘광기‘까지를 포함하는 이 모든 약자 및 소수자 담론들과 인식을 사면복권시키고 담론간 평등성을 보장하려는 운동이 postmodernism 사상운동의 핵심요체였다고 정리할 수 있으며, 그 최고 지성적 형태가 그 유명한 France의 초고도 지성들 뿐 아니라, 영미 과학철학계의 별들, 특히 Thomas_KUHN과 인식론적 anarchism, anarchism적 과학철학을 정교하게 정립시키는데 성공한 Paul_Karl_FEYERABEND 등으로 완성된 것임.

FEYERABEND Bibliography

(‘1975) Against Method: Outline of an Anarchistic Theory of Knowledge. London: Verso Books.
(‘1978) Science in a Free Society. London: Verso Books.
(‘1981) Realism, Rationalism and Scientific Method: Philosophical papers, Volume 1. P.K. Feyerabend (e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Problems of Empiricism: Philosophical Papers, Volume 2. P.K. Feyerabend (e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4) Science as Art. Bari: Laterza.
(‘1987) Farewell to Reason. London: Verso Books.
(‘1991) Three Dialogues on Knowledge. Hoboken: Wiley-Blackwell Press.
(‘1998) ˝How To Defend Society Against Science˝. Radical Philosophy, no. 11, Summer 03 1975. The Galilean Library, Introductory Reading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edited by E. D. Klemke.
(‘1999) Conquest of Abundance: A Tale of Abstraction versus the Richness of Being.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9) Knowledge, Science and Relativism: Philosophical Papers, Volume 3. J. Preston (e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For and Against Method: Including Lakatos‘s Lectures on Scientific Method and the Lakatos-Feyerabend Correspondence with Imre Lakatos. M. Motterlini (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9) Naturphilosophie, Posthumously published. Berlin: Suhrkamp Verlag. Helmut Heit and Eric Oberheim (Eds.).
=(‘2016) Philosophy of Nature, Posthumously published. Cambridge: Polity Press.

(‘2011) The Tyranny of Science. Cambridge: Polity Press.
(‘2015) Physics and Philosophy: Philosophical Papers, Volume 4. S. Gattei and J. Agassi (ed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 Feyerabend‘s Formative Years. Volume 1. Feyerabend and Popper: Correspondence and Unpublished Papers. New York: Springer Press.



3c. (post)nomadism, 유목주의와 강신주

일단 일주일 내내 재방, 4방 해대는 스토킹 헛소리 프로그램은 {북카페}를 지칭한 것이지, 공과를 종합할 때 강신주 선생님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지성으로 평가될 수 있음. 가끔 번역 문제를 지적하는 분들도 있던데 무오류나 무오해란 불가하며 시적 Text의 ‘Context 해석‘에선 독보적 역량이 인정될 만하다고 봄.



본론은 도가 노장 철학에 대한 새로운 현대적 해석이라는 공통 운동 맥락과 흐름에 있으며 그 본질이 정치경제적 독(해)법[의 제시]이고 핵심은 동일한 자유(지상)주의 계열 안에서 노자가 법가와 연결되며 더 효율적인 통치와 지배를 위해 작은 정부를 주장하는 (야경국가적) 자유(방임)주의에 가깝다면, 장자는 저항적 처세적인 유목주의 anarchism 계보라 할 수 있다는 연구 테제These를 운동 안에서 얼마나 잘 수행/구현하고 있는가,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 연구 테제의 궁극적 타당성과 효능효과를 중심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임.

이러한 구도에서
강신주(‘2004.04.21)<<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은 세부내용에 문제가 있을 수는 있어도 기본방향에 있어서는 이를 충실히 구현하는 업적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나,
이에 반해 박사논문인 <莊子哲學에서의 소통(通)의 논리 : 『莊子』<내편>을 중심으로>와
이를 단행본으로 개정출판한 (‘2003.09.27)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이나
그 연장선인 (‘2007.08.10)<<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에 이어 최근까지 ‘장자‘에 대해서는 노자와의 근본적 차이를 주장하는 점은 옳았어도, 정치경제적 독해틀에 입각한 새로운 해석 운동이라는 작업 방향이 전혀 분명하게 의식화되지도 구현되지도 못했다는 결정적 문제를 안고 있고, 이는 최근 EBS 강의에서 스스로도 밝히셨듯 아주 뒤늦게 거의 최근에야 기존의 자기 해석틀이 균열, 붕괴하면서 전복적으로 완전히 재구성된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이런 측면에서는 그간 선생님의 (장자) 번역과 해석에 시비를 걸어 온 분들이 일정 정도 합리성과 타당성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음.
(운동의 명확한 핵심 테제 주창자( 1인??으)로서) 그 획기적 단서나 영향이 무엇이었는지는 학문적 솔직성과 연구윤리에 입각해 정확히 밝히시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사료됨.

이 새로운 방향전환/정향에 의해 현대철학의 대표적 (post)anarchism이라 할 수 있는 nomadism이 주 해석틀로 도입, 원용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필연 과정으로 볼 수 있으나 이러한 작업이 세계사적으로는 늦어도 ‘70년대에 수행되었다면 가장 시의적절한 연구였고, 당시 거의 고립되어 있었다 볼 수 있는 국내 이론사적 맥락을 고려해도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90년대에는 수행되었어야만 3세대로의 전환을 선도(적으로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었던 연구 프로젝트로 평가됨.

이제라도 당면한 현재적 맥락에 충실하기 위해 이후 후속되지 않으면 안 될 더욱 중요한 남겨진 필수 연구 과제는
a. 시적, 원형적 고대 anarchism인 장자 철학과 새 해석틀로 원용된 현대 postnomadism은 어떠한 구체적 미세 차이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 (원인은 무엇이고) 효과들은 각각 어떻게 다른가?
b. 지난 반세기 이상 세계 정신을 지배한 (post)anarchism은 주어진 시대 문제 해결에 과연 얼마나 효과적이었으며 반면 어떤 새로운 문제들을 양산했고 그로 인해 고통받았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요청되고 있는 새로운 시대정신과 사상철학은 무엇인가?

등등의 문제설정이 되어야 할 것임.



3d. 3세대의 종언

왜냐하면 이러한 postanarchism 계열은 이미 (FOUCAULT, LACAN, DERRIDA, LYOTARD, BAUDRILLARD 등과 함께) DELEUZE=GUATTARI에 의해 심오한 차원으로 완성되어 화려하게 만개하며 ‘68혁명 전후부터 현재까지 50~60년 간 세계사상사를 좌우해 왔으나 전세계적 ‘68혁명운동의 봉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지배계급은 벌써 ‘70년대(말)부터 이를 완벽하게 Decoding하고 Cracking하는데 성공하여 극히 효율적으로 전유/역이용한 ‘유목적 자본주의로서의 신자유주의‘를 발명해 냄으로써 ‘68 운동과 사상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오히려 각국에서 그 운동주체들이 신자유주의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기수로 활약하게 만들어 버리거나 마치 인디언 보호구역처럼 겨우 학술문화영역만 ‘68 주체들에게 주도권을 남겨준 채 이외의 정치경제사회 모든 영역을 철저히 장악, 지배하게 되었던 것임.

장차 도래하게 될 이러한 상황에 맞서 ‘후기 FOUCAULT‘는
a. 당시 만들어지고 있던 신자유주의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b. 국가, 사회를 단지 지배-복종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통념에 입각해 일면적으로만 파악해 온 치명적 오류를 공유하는 anarchism과 postanarchism의 내재적 오류원인을 ˝억압가설˝로 분석해 내는 등의 천재적 조기대응에 의해 세계현대사상사에서 소위 ˝Foucaultian turn˝이라 불리는 대전환을 예비함으로써 장차 4세대가 탄생하는 시원적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임.
사회, 특히 ‘국가‘를 다양한 제도적 장치dispositif와 문화기계들이 부정합적으로 얼기설기 엮여 있는 복합조잡한 얼개로 보고, 그 주체는 단일한 지배계급 일방이 아니라 각다기한 사회세력들이 매순간 각종 계급투쟁 전략과 (대항)행위/품행 전술들을 구사함으로써 끊임없이 각축, 교전하는 (주)전장으로 파악하며 ˝억압가설˝의 편견을 극복한 ˝복지가설˝을 구축해 낸 FOUCAULT의 독특한 paradigm은 이후 현대국가론의 최고권위라 할 수 있는 Nicos POULANTZAS 등에 결정적 영향을 끼침으로써 국가론에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 젖히게 됨.

이렇게 태동한 흐름을 이어받아 ZIZEK 등은 아예 그 ‘사상과 저술‘ 활동의 주된 한 축 전체를 DELEUZE를 정점으로 하는 세계사상의 지배자 postanarchism 비판에 헌정하고 있으며, 그의 최대 비판점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postanarchism은 사상과 수사의 현란하고 화려한 현학성에 비해 그 어떤 거시적 사회문제해결이나 세계변화도 단 한 건조차 성공시켜 내지 못 했으며 이는 (post)anarchism의 사상적 편향 그 자체에 근본적으로 내재한 본질적 결함 때문이라는 것임. 비근한 예들을 잠깐만 둘러봐도 제도화나 체계적 조직화 투쟁, 지도중심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감) 등등 때문에 ‘68혁명 자체는 물론이고 ‘2008년 세계금융붕괴위기에 의해 대대적으로 촉발되어 미국 금융중심 Wall street으로부터 유럽 등 세계 각국으로 확산된 곳곳의 ‘점령하라!‘운동[‘Occupy!‘Movement] 등이 모두 풍찬노숙의 대규모 초장기 텐트생활 농성 등등 어마어마하고 지난한 헌신과 노고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결정적 사회(제도) 변화 하나 성공시켜 낸 것이 거의 없이 최대한 성공해 봐야 Hippie 같은 대안적_생활양식Alternative_Lifestyle 운동 형태로 조금 잔존하다 흐지부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게 되는 운명을 반복해 왔을 뿐임.



[결론적으로 강조하면 3세대의 완성자는 DELEUZE=GUATTARI, 4세대의 (처녀)생모가 FOUCAULT로 요약됨.]





4세대





S. 소결 : 사회정치적 패러다임의 4분면








* ‘post‘는 ‘후기/현대(판)‘의 의미로서 연속성을, ‘post-‘는 ‘탈[脫]/이후‘의 의미로 단절성을 강조하기 위해 (구)별(사)용키로 함.



 





주체를 비추는 거울과 거울(의 이면)을 비추는 거울, 그리고 심리학주의의 한계들

  : (신흥) 기득권층 지배논리의 새로운 첨병으로 나선 심리학주의





0.1. 애초 이 글은 원래 한 방송에서, 그래도 나름 애정을 담뿍 담긴 했지만, '독심술', '관심법' 같은 말들이 저절로 유행할 정도로 아무런 근거도 없는 과도한 추측들에만 기대어 워낙 실재와 동떨어진 채 너무 일치하는 관련이 없어 직접 대상이 아니라는 판단 하에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음에도,

0.2. 최소 3가지 단서에서는 빼박 직접 대상화 되어 있는 데다 초방 당시 동 채널에서 Sports 정신(과)의에 의해서도 지적되었듯 절차에 있어서 공개분석을, 그것도 전쟁터 한 복판에 끼어들어 모두가 지켜보는 전국 방송에서 행했다는 등등의 치명적 결함을 통해, 그리고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 사건 당시 대학본부 측 관리자의 "늘 억울하시겠네요" 같은 조롱 섞인 망언들을 부추긴 사례에서도 잘 드러나듯, 결과에 있어서도 애초 애정어린 의도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수많은 청년들과 "억울한" 사람들을 양산하면서 매우 곤란한 처지로 몰아 넣었다는 판단 하에 계획이 잉태, 검토된 것이었으나,

0.3.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후 여러 방송과 논자들을 통해 최신/최후의 언론폭력기법으로 동원되고 계속 확대재생산되면서 매우 심각한 정세 왜곡과 극단적 반동화에 악용당한 것도 모자라 재방까지 되고 있어 재증폭이 우려되는 상황이기에 도저히 더이상은 미룰 수 없어 결국 집행에 이르게 된 것임.







1.1. 소위 '전문가주의'의 치명적 한계 중 하나로서 협소한 분과주의

    : 심리학 전문가로 나선 사회(과)학적 백치들


자기 인식과 영역의 한계에 대한 무지와 무자각.


심리학주의의 근본공리계에 있어 사회 자체와 그 지배(세력들의) 구조적 폭력과 살인 문제들은 절대 비판도 변경도 불가능한 초역사적 자연/천부적 질서로 절대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를 수호하고 있으며, 모든 목표 체계는 이에 대한 '적응'을 위해서만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사회불만세력들을 사회부적응자나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로 매도하면서 이러한 총체적이고 복합적인 상황과 주체 양측 간에 발생하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모두 개인 주체의 심리적 문제와 그 선택의 결과로만 몰고가는 궁극적 '빈곤문화론'의 달관판에 불과하기에 자기도 모르게 반동보수(화) ideology를 대변하게 되는 인식론적 원죄 구조에 기반하고 있음. 



1.2. 관점의 비일관성


기본의 기본으로서의 rapport 형성조차 불가능한 관점의 비일관적 혼재와 이중성







2. 사회(과)학의 탄생, 자살론


자살에 대한 만연한 전형적 고정관념들

사회적 살인으로서의 자살

자살의 한 공격적 형태로서의 흉악범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타살의 핵심인 사회구조적 양극화와 만연한 혐오차별에 대하여는 단 일말의 성찰도 자성도 없음.







3. 악의에 가득 찬 관점의 문제

3.1. 반동보수적 관점 : 이해도 교정도 불가능한 선천적 괴물론

3.2. 전통적 민주당파 사목권력의 관점 : 치유와 인도/교정의 대상 또는 길 잃은 어린 양

3.3. 급진적 관점 : 사회 개혁과 해방의 주체이자 동력



요즘 우리 사회에 (대)유행하는 반동보수적 진화심리학 등 유전자 (/) Code 결정론의 오류에 지배받는 'Psychopath' 등등 각종 사이비 선천적 성격/인격 (유형)론, 특히 괴물론의 핵심 문제를 비판해 온 진보적 심리학 특히 Marx주의 심리학 체계에 따르면, '존재'가 '본질'에 선행하며, 본질은 그를 둘러싼 모든 제관계의 총체이고, 따라서 '성격'이란 시공간-한정적, 부분적 관계들에 의해 조성된 잠정적 '상태'에 불과한 것이기에 선천적 Code의 자연적 연역/연장 결과가 아니라 그가 놓이게 되는 관계망(, 특히 인지경험적 정보망)이 훨씬 더 중요하며 이 '망網' 주변에 형성되는 '장場' 속에서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결정하는 동역학적 운동상태 방정식에 더 가까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최근 민주당 정권 하에서 오히려 모든 사회불만세력들을 (잠재적) 흉악범죄자로 연합/연상관념화를 반복시도하면서 낙인찍고 혐오차별을 선도/선동하는 일부 (강성) 민주당파 (특히 심리학주의) ideologue들과 방송언론의 광적인 반동화 행태와 그 확산은 더욱더 기이한, 매우 흥미롭기 그지없는 사례로 새로운 사회 및 시대 조건의 변화와 이에 따른 민주당(파)의 명실상부 기득권층으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나타내는 극명한 징후들이라 아니 할 수 없음.




3'.1. 김난도 교수 [[아프니까 청춘이다]] 사례와 보수 심리학주의자들의 사례 비교

원래 애제자에 대한 직접적 위로와 응원 서신으로 작성된 이 한 권의 도서 때문에 이후 사회적 발언(권)에 있어서는 거의 매장에 가까운 비난과 조롱 세례 받은 김난도 교수 사례와 비교해 보면 민주당 집권 이후 현재까지 시국과 정서의 변화가 얼마나 극적으로 반동화되어 있는지를 극명하게 알 수 있으며 바로 이것이 문제의 원 방송이 아무리 본의에서 애정에 기반해 있음에도 더이상은 그 문제점에 대한 언급을 미룰 수 없는 이유임.


3'.2. 노태우~김영삼 정권 하의 '지존파' 사건 등에서 '사회적 책임과 자성'을 강조한 보수언론 자료와 현재 {표리부동} 등 민주당파 언론의 관점 비교



3'.3. {표리부동}의 악의적 훼손기법

  원대상을 극단적으로 악마화하면서 당시 사건기록을 다 뒤져 지엽말단적 공통점을 찾아내 이를 부각, 강조함으로써 집요한 반복누적적 연상/연합 관념화를 통해 현재의 은폐된 공격 대상을 동일시시키려 애쓰고 있으며, 이 기법은 다른 악의적 범죄(자) profiling program들로 점차 학습/전파되어 가고 있음. 







4. 정세 왜곡과 악화의 실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Rf.]
































[초고를 위한 memo 작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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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izome 2022-05-19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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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2.3.5. 새롭게 출현한 작은 악마들




원래 이 분들에 대하여는 일절 대응치 말라는 조언들도 있었을 뿐 아니라, ‘세 가지 사명‘의 하나인 구조적 언론문제 혁신에 직접적으로 긴밀히 해당한다고 보기 저어되는 측면이 있고, 중요한 사회적 보고로서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다 하기도 또한 어려워 윗글에는 포함시키지 않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종의 대응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해당자 분들께 답변이 필요한 경우도 있어 참고 별지로만 첨부키로 하오니 이후로 해당자 분들 정도만 일별하시기 바랍니다.


.............


먼저, 제기했던 비평들은 인식론적 위상(학) 구조가 수학체계에 대한 Kurt GÖDEL[GOEDEL]의 불완정성 정리와 같기 때문에 그런 대응으로는 결코 해소될 수 없는 이론적 근본 비판들, 그리고 경찰력의 생명과도 같은 신뢰성을 뿌리부터 갉아 먹는 위험한 오남용에 대한 지적들이며, 이러한 근본 문제들의 명시에 대하여 성실한 답변을 통한 발전적 이론 토의가 아닌 메신저 비난과 음해 등을 통한 제거 시도로 맞서는 행태는 언론방송이 보여준 난동 방식을 모사하는 반지성주의적 퇴행일 뿐임을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언론폭동이 야기하는 가장 심각한 3차 폐해 중 하나는 이렇듯 사회적 논의 구조 및 방식의 파괴와 왜곡으로 (이미 보고한) 공론장의 독점적 장악을 위한 국민 전체의 축출 이외에도 그 개별적 축출 달성을 위한 구체적 manipulation 과정으로 바로 이런 communication 방식의 야만적 모략적 퇴행이 다른 한 축으로 동반하며 더 큰 문제는 이것들이 전 사회적 학습을 통해 각 분야 각 장면들로 확산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 이 항목이 주는 교훈의 요지입니다.



a. 심리학 비평에 앙심을 품고 합류한 심리학주의자 유형

제발 자기 감찰의 선범을 좀 보여 주시어 저절로 우러나는 존경심으로 따라 배우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세한 논의는 이하 심리학(주의)에서 자기 감찰의 요소들을 참고하십시오.

.............

a1. naive sociology : 최종적 편견과 선입견의 뿌리
a1a.
기득권 독과점욕망에 의한 모략과 배제, 갈등과 모순 등등으로 왜곡되고 뒤틀린 악의적 System이 빚어내는 복잡다단하게 얽힌 구조와 상황.
그 상황이 매순간 쏟아내는 복잡한 정보들을 자기가 알고 있는 얄팍하고 앙상한 인지그물에 걸린 몇 가지만으로 전체 맥락도 파악 못 한 채 혼자 엉뚱한 판단을 내리고는 확신에 차서 헛소리를 내뱉고 있는 것이 오히려 자기 자신쪽은 아닌지에 대한 자기 의심과 자기 감찰의 모범.

a1b.
이런 정신 없이 복잡다단한 상황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올바로 해석해내기 위해서라도 상황과 맥락( 분석)에 필수적으로 얽혀 있는 중층 영역들( 간)의 상이한 지식체계들에 대한 융복합적 이해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회 자체와 그 인정분배체제 및 평가 System 상에 실재하는 숱한 각종 문제와 모순, 왜곡과 오염들 등등에 대한 그 어떤 반성적 조망이나 문제의식 및 문제제기, 자기교정 능력도 완전히 결여되어 있을 뿐 아니라, 대신 매우 간단하고 조악한 도식과 image에 의한 근거 없는 막연한 무한 신뢰와 어떤 경우에도 무조건 복종하고 순응해야만 한다는 절대적 믿음만이 그 자리를 완전히 대체하고 있는 여타 학문 체계들의 문제.

a1c. 스토킹 범죄화 광고 해석 문제
사태의 가장 얇은 표면에서만 이루어지는 부분적 국소 독해


b. 본색을 드러내는 유슬림



c. 전혀 관심이 안 가는 당신들의 관심

도대체 누가 당신들의 인정을 원했던가?



d. 작품과 그 현실적용대상 양자 모두에 대한 2중 곡해의 끝없는 연속










[방침은 일요일에 변경되었고, 이상은 일요일 저녁부터 간헐적으로 게재되었다가 결정기 정세에 대한 고려 때문에 임시 삭제되었던 내용이며, 금주에 추가내용이 이어질 예정임. ]
















[ 작성 중 ]

rhizome 2022-05-19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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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정신의학


Iain Ferguson, ‘Interview: Marxism and Mental Distress’ @ {Socialist Review}‘2017.11;
>국역: 장호종. <마르크스주의와 정신적 고통> @ {마르크스21} 23호‘2018년 1~2월호;



최근 영국에서 출간된 《마음의 정치학: 마르크스주의와 정신적 고통》Politics of the Mind의 저자 이언 퍼거슨이 《소셜리스트 리뷰》와 인터뷰하며 자본주의에 만연한 우울증과 불안을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우리의 감정과 심리적 경험을 표현하는 용어들은 그런 경험의 기원과 본질에 관한 이론과 연관돼 있다. 그런데 오늘날 주류 심리학과 정신의학은 문제의 원인을 대개 그 개인(혹은 그의 뇌나 유전자 또는 신경전달물질, 그의 일부 경험)의 문제로 환원하는 이론을 받아들인다. 그러다 보니 정신적 문제를 표현하는 많은 용어들(정신병, 광기, 미친, 정신질환, 정신장애 등)이 그런 함의와 연결돼 낙인 효과를 내곤 한다. 이언 퍼거슨은 그의 책에서 이런 낙인 효과를 피하면서도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을 표현할 수 있는 용어로 ‘정신적 고통’mental distress을 사용한다고 밝혔다. 한국에서도 2010년대 들어 정신분열병Schizophrenia의 낙인 효과를 완화하고자 ‘조현병’調絃病이라는 용어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런 시도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익숙지 않은 용어 사용이 이해를 어렵게 하는 경우가 있어 이 글에서는 예전 용어인 정신분열병을 그대로 사용했다.


Q. 오늘날 우울증과 불안이 만연한 듯합니다. 이 문제와 관련된 말은 훨씬 많고, 흔히 사람들의 결근(결석)과 결부돼 논의됩니다. 최근 정신 건강 문제가 대두한 까닭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A. 단연 중요한 이유는 정신적 고통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엄청나게 증가한 것이라고 봅니다.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업무 수행 평가 압박을 받는 사람들, 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자리를 구하라는 압력을 받는 복지 수급자들이 그 영향을 가장 분명하게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뿐 아니라 그리스 같은 나라들에서도 우울증과 불안은 물론이고 자살이 엄청나게 증가했습니다. 다른 집단도 영향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높은 수준의 불안과 우울증을 겪는 청년, 특히 젊은 여성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이는 어느 정도 소셜 미디어에서 겪는 경쟁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직장이 있는 사람들의 불안과 우울증 수준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난한 저임금 노동자들이 그런데, 그중 일부는 빚과 관련이 있고 또 다른 일부는 고용 불안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우울증과 불안의 증가는 꽤 보편적입니다. 저는 책에서 노동강도 강화, 빚, 복지 혜택 축소 같은 신자유주의 사회의 삶이 가하는 압력이 이 현상과 연결된 요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Q. 왜 지금 이 책을 쓰게 됐나요?

A. 책을 쓰게 된 핵심 이유는 우울증, 불안증, 정신분열병 등 뭐라고 부르든 간에 정신적 고통을 사회 현상이나 사람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아무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는 의학 모델에 도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모델은 정신적 고통을 개인 문제로 여깁니다.

이런 모델에 문제를 제기하고 정신적 고통이 오늘날의 수준으로 증가한 것이 자본주의가 대중의 삶에 가하는 압력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 책의 출발점입니다.

다른 두 가지 요소도 중요했습니다. 하나는 최근 정신 건강과 정신적 고통을 이해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여러 견해 사이에서 일어나는 논쟁입니다. 런던의 ‘맑시즘’ 포럼과 《소셜리스트 리뷰》 지면에서도 그런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프로이트에 대한 논쟁, 신경 과학에 대한 논쟁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 논의를 일부라도 다루려고 애썼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정신 건강 문제가 대두한 또 다른 요소로는 ‘긴축에 반대하는 장애인 운동’ 같은 조직들이 한 구실이 있습니다. 최근 위기가 끼친 긍정적 효과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정신적 고통을 자주 겪거나 그런 가족을 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낳은 [사회적] 요인들에 맞선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Q. 당신이 언급한 의학 모델이 득세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 얼마나 오랫동안 그랬습니까?

A. 그 모델은 150년 이상 득세했습니다. 첫째, 이데올로기적 이유 때문입니다. 그 모델은 정신적 고통을 개인의 내면에서 찾습니다. 매우 편리한 설명이죠. 이 모델은 원인이 우리의 두뇌나 도덕적 결함에 있다고 암시합니다. 당연히 낙인 찍기 효과를 냅니다. 그 탓에 정신적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패배자 취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들 스스로 ‘나는 패배자야’ 하고 여기기도 합니다.

둘째, 그 모델의 핵심 요소는 병이 있으니 치료해야 한다고 보며 약이든 뭐든 써서 처리한다는 사고 방식입니다. 그런 치료가 실제로는 효과가 없다는 증거가 수없이 많은데도 말입니다. 제약 산업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수익성이 높은 산업이라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 까닭이죠.


Q. 그렇다면 그런 의학 모델의 탄생 이전, 자본주의 이전에는 정신적 고통이 어떻게 설명됐습니까?

A. 가장 유력한 모델은 종교적 설명이었습니다. 즉, 정신적 고통을 신이 내린 벌이나 귀신에 씌인 것으로 봤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모델과 나란히 그리고 그와 더불어 정신적 고통의 원인을 신체에서 찾는 유물론적 설명도 항상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체액으로 설명하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몸 안의 체액이 균형을 잃었다고 본 것입니다. 이 모델은 19세기까지 영향력이 매우 컸습니다. 제가 책에서 〈조지 왕의 광기〉라는 영화를 언급했는데요. 이를 꽤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책에서도 강조했듯이,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전환기나 프랑스 혁명기처럼 거대한 사회 변화가 일어날 때 특히, 훨씬 더 진보적인 설명이 등장했습니다. 이런 설명들은 스트레스의 수준을 사람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 자리매김해서 살핍니다.


Q. 이처럼 복잡한 문제를 다루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은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요?

A. 마르크스주의적 접근법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유물론적 설명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필요(육체적·정서적 욕구) 충족을 우선시하지 않고 이윤 축적의 필요에 따라 작동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 탓에, 정서적인 것이든 성적인 것이든 무엇이든 사람들의 욕구가 억눌리고 왜곡되거나 소외돼 있습니다. 이것이 정신 건강을 이해하는 진정한 출발점입니다.

둘째 측면은 역사적 설명입니다. 왜 정신 건강에 대한 특정한 견해가 특정한 시기에 유력한 것인지를 이해하고, 한 사람의 삶도 일대기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정말로 물어야 하는 질문은 “잘 지내니?”(영어로 How are you?)가 아니라 “무슨 일 있니?”(영어로 What happened to you?)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즉, 삶에서 일어난 사건들, 유일한 것은 아니지만 특히 어릴 적에 일어난 사건들이 그 사람이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셋째는 변증법적 접근법입니다. 여기에는 두 측면이 있습니다. 개인 수준에서 정신분열병의 가장 흔한 증상인 환청을 듣는 사람들은 그 목소리에 반응해서 두려움을 느끼거나 환청을 조절하려 애쓰는 등의 행동을 보입니다. 그런데 그 반응 방식 자체가 매우 흔하게는 정신분열병의 증상으로 취급됩니다.

따라서 첫째 요점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이해하고 그에 대처하려고 능동적으로 애쓴다는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의 집단적 정신 건강은 계급 투쟁 수준에 크게 좌우됩니다. 이것이 제 책의 핵심 주장 중 하나입니다.

집단적 저항이 없는 곳에서 사람들은 고통과 스트레스의 일부를 내면화할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사람들이 체제에 맞서 집단적으로 저항하고 싸우는 것이 정신 건강에 유익한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가 꽤나 많이 있습니다.


Q. 책에는 “피켓 라인부터 걱정 라인까지”라는 인용문이 있습니다.

A. 그렇습니다, 저는 그 말을 좋아합니다. 여러 면에서 이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의 현실을 잘 요약해 줍니다. 정신 건강을 개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 하나는 집단적으로 투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외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제가 책에서 언급했듯이, 많은 정신적 고통은 무력감을 느끼는 것과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행위 주체라고 여기고 자신에게 힘이 있음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은 정신 건강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Q. 지금 말씀하신 내용은 사람들이 의사를 찾아갔을 때 듣는 견해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 같습니다. 의사를 찾아간 사람들은 약을 먹지 않더라도 인지행동치료CBT를 받을 텐데요. CBT는 여러 현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바꾸는 데 도움을 주지만 매우 개인적인 수준의 방법인 듯합니다.

A. 당연히 그 치료가 유용하다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CBT는 개인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세계를 바꾸는 것과 대조적이죠. CBT의 다른 측면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특징을 보여 줍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는 진보적인 아이디어를 가져다가 자기 목적에 맞게 바꿔 버립니다. 예를 들어, 정신 건강 회복이라는 개념은 현재 영향력이 매우 큽니다. 이 개념의 긍정적인 측면은 사람들이 인생을 불행하게 살 필요가 없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부정적 측면은 “잘 살아야” 한다는 책임을 개인에게 부과한다는 것입니다.


Q. 당신은 책에서 유력한 모델에 중요한 문제 제기를 하는 한편, 그 모델이 상황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도 살펴봅니다. 분명히 정신분석학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프로이트인데요. 당신은 그의 접근법이 이룬 혁신과 그것의 강점을 인정하면서도 비판도 했습니다.

A. 프로이트는 혁명가가 아니었지만, 그의 사고思考에는 대단히 급진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그는 사회가 사람들의 섹슈얼리티뿐 아니라 다른 기초적 욕구도 억누르고 왜곡해 그가 ‘신경증’neurosis이라고 부른 것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정신분석학의 전통은 대부분 정신적 고통을 개인의 문제로 다루는 매우 보수적인 전통이었지만, 제가 책에서 말하고자 한 것의 하나는 마르크스주의 내에는 프로이트 사상의 급진적 핵심을 파악하려 한 조류가 항상 있었다는 것입니다.


Q. 당시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들 몇몇이 프로이트와 관계를 맺었죠?

A. 예, 특히 1920년대 초 러시아처럼 혁명적 시기에 그랬습니다. 이 책을 쓰려고 탐구하다가 발견한 매우 흥미로운 정보 하나는 1920년대 초 러시아에서 정신분석학이 공식 승인을 받은 학문으로 보일 만큼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소비에트 정부의 출판 기구가 프로이트의 책을 출간했죠. 트로츠키, 라데크, 비고츠키 같은 인물들이 프로이트를 비판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같은 시기 독일에서도 다수의 여성 정신분석가들을 비롯해 정신분석학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프로이트 사상에 매료됐고 프로이트 사상에 급진적 잠재력이 있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미국으로 수입되면서부터는 달라져서, 거의 공식 이데올로기가 되고 급진성을 거의 다 잃었습니다.


Q. 당신은 1960년대를 또 다른 위대한 시기로 언급하셨습니다. 다시 찾아온 엄청난 혼란과 정치 투쟁의 시대였죠. 이 시기와 관련된 인물 한 명이 로널드 레잉R D Laing입니다. 그는 최근에 좀더 유명해졌죠. 데이비드 테넌트가 레잉 역을 연기한 영화가 있었습니다. 레잉은 어떤 기여를 했습니까?

A. 저는 레잉이 매우 흥미롭고 모순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초기에 한 기여는 당시 행해지던 더 야만적인 정신과 치료법, 예컨대 전두엽절제술(사람의 두뇌를 절단하는 것)이나 광범하게 사용되던 전기경련요법 등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레잉을 억압받는 사람들의 호민관이라고 봅니다. 그가 정신분열병 등을 앓고 있다고 판정된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행동과 감정은 단순한 화학 반응이 아니라 그들이 삶에서 겪은 경험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레잉은 부모와 가족을 정신분열병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으로 비쳐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약간 불공정한 평가라고 보지만, 그는 그 문제에 대해 모호했습니다.

레잉은 이 기간에 신좌파에 깊숙이 관여했고 1960년대 후반 런던에서 중요한 회의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1970년대 이후 그의 지적 기여는 훨씬 작아졌고, 개인적으로는 점점 알코올에 중독됐습니다.

그러나 정신적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는 1960년대 레잉의 핵심 사상과, 그 의미를 알아내는 방법이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이라는 점은 중요합니다. 훗날 실증적 연구로 수집된 매우 풍부한 증거 자료는 레잉의 명예를 회복시켰습니다. 그 연구들은 학대 경험을 포함해 사람들이 살면서 겪은 경험과 정신적 고통 사이에 매우 강한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Q.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지난 몇 해 사이에 등장한 새로운 운동에 대해 얘기하셨습니다. 특히 정신 보건 서비스 이용자들과, 학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당신처럼 급진적 사회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참가하는 운동에 대해서 말이죠. 이 운동은 과거 운동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습니까? 그리고 새 운동의 접근 방식은 얼마나 새로운 것입니까?

A. 지금은 매우 흥미로운 시기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운동의 기초는 정신 건강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더는 병원에 가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지역 사회에 머무르면서 다양한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람들이 지역 사회에 머무른다는 사실은 그들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보다 조직되기가 훨씬 쉬워지는 요인의 하나입니다. 정신 건강 문제가 매우 광범하게 퍼져 있다는 사실과 낙인 찍기에 맞선 도전이 있다는 사실 덕분에 오늘날에는 조직하기가 더 쉽습니다.

정신 건강 운동이 급진화하며 확산되고, 정신 보건 서비스 이용자들이 ‘긴축에 반대하는 장애인 운동’ 같은 조직 내에서 매우 능동적인 구실을 하게 된 것이 긴축의 한 효과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운동은 아주 새롭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운동들은 자신의 역사를 되짚어 가기도 하는데,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미친 연구”mad studies라고 불리는 활동이 있는데, 그것의 긍정적 측면 하나는 사람들이 1960년대와 그 전의 투쟁 사례를 되돌아보고, 로널드 레잉 같은 사람들의 사상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활용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정체성 정치가 운동을 전진시키는 최선의 방법인지 아닌지에 관한 논쟁이 더 많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하도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어서, 낙인 찍기의 효과가 감소하고 기반이 광범한 운동을 건설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봅니다.

지난해 영국 전역에서 지역 사회 기반 정신 보건 서비스 폐지에 반대하는 운동이 매우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 운동에서 서비스 이용자와 노동조합원 등 다양한 활동가들이 긴밀히 협력했습니다.

‘소셜워크액션네트워크’Social Work Action Network와 ‘긴축에 반대하는 심리학자들’Psychologists Against Austerity 같은 조직에서 서비스 이용자, 사회복지사, 심리학자 등이 긴축 정책에 문제를 제기하며 긴밀히 협력하고 있습니다.


Q. 끝으로,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이 정신적 고통을 다루는 데 더 철저한 방법을 제공한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제가 책에서 중점을 둔 것은 정신적 고통의 뿌리가 특정 정책이나 특정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회, 즉 자본주의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삶을 통제할 힘을 모두 박탈하고,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욕구가 창조적으로 발전하고,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을 부인합니다.

노동강도 강화든, 아이들이 학교에서 겪는 경쟁의 심화든, 점점 더 원자화되는 사회에서 노인들이 겪는 외로움이든, 이 다양한 측면들이 모두 같은 문제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인간의 사회적·정서적 필요가 아니라 축적을 위해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 말이죠.

따라서 정신 건강의 위기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윤 축적보다 인간의 필요 충족을 위해 세워진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rhizome 2022-05-19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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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요청 받은 마르크스주의와 심리학은 따지고 보면 엄청나게 큰 분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부분으로 나눠서 진행하겠습니다. 첫 부분에서는 심리학 분야의 이데올로기 성격을 말씀드리고, 두 번째는 자본주의에서의 정신적 고통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심리학은 사회학이나 경제학 같은 분야와는 다르게 단 한번도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심리학 분야에서 급진적 조류들이 나타나긴 했습니다. 그리고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주류적 관점과 급진적 관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오고 가기도 했습니다.

심리학회를 주관하는 영국·미국 심리학회는 매우 보수적이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 심리학회에서 일부 회원들이 고문을 정당화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됐습니다. 이라크 전쟁에서 고문이 자행되면서 심리학자들이 이를 편들었던 것이죠. 이와 비슷한 논쟁들이 임상심리학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심리학계 내에 세 가지 이데올로기 조류가 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조류는 보수적이고 친자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 속한 심리학자들은 체제 내에 순응적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프로이트에 기반을 둔 정신역동심리학이 포함됩니다. 또 스키너와 파블로프, 왓슨에 기반을 둔 행동주의 심리학이 포함되고, 인지심리학·실험심리학도 포함되며, 진화심리학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진화심리학은 오늘날 우리 마음 상태가 인류진화의 자연스런 결과라고 주장하는 학파죠. 이 조류에 속하는 친자본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심리학자들은 그들이 하는 행동뿐 아니라 그들이 “누구를 위해서 봉사하는가?”라는 점 때문에도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심리학자들이 국가를 위해, 특히 국방부를 위해 일해 온 오랜 역사가 있습니다. 또한 기업과 산업·재계를 위해 일해 오기도 했죠. 그들은 노동자들을 더 효율적으로, 더 열심히 일하도록 만들려는 명시적인 의도를 가지고 재계에 복무해 왔습니다. 예컨대 산업심리학을 보면 “노동자들을 어떻게 하면 생산성을 더 높일 것인가? 어떻게 하면 더 잘 착취할 것인가?”가 주된 논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인성검사라는 것도 있는데 적합한 직무에 적합한 사람을 할당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죠. 인성검사의 오랜 전통에는 “아이큐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논란도 계속 있었습니다. 당초 파리 사람이었던 알프레드 비네가 아이큐 실험을 처음 고안했을 때 그 목적은 뒤처지는 사람이 따라잡게 도와 주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큐 테스트가 얼마 안 가서 실제인지 아닌지 모르는 지능을 근거로 사람들을 선별하는 도구로 변질됐습니다. 일부 심리학자들에게는 아주 인종차별적 동기가 있었는데요 아이큐 테스트 그 자체가 편향적인 테스트인데, 인종차별적 심리학자들은 아이큐 테스트를 근거로 인종 간에 아이큐의 차이가 있다는 사상을 퍼트렸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파시스트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이런 심리학계의 발견들을 근거로 온갖 인종차별적 사상을 과학적으로 합리화했습니다.

심리학의 유명인사들을 보면 예컨대 존 헌츠먼, 한스 아이젱크, 찰스 스피어만, 헨리 머레이, 리처드 헌스타인 같은 사람들은 인종차별을 부추기는 편향된 관점을 나름의 자기 방식으로 되풀이해 왔습니다. 1994년에 《벨 커브》The Bell Curve라는 유명한 책이 나왔는데, 이 책에서도 흑인과 백인 사이에는 선천적으로 지능의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1 다수의 심리학자들은 상당히 반동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과 약간 대조되는 또 다른 전통은 자유주의 전통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이 있습니다. 이 조류를 대표하는 문화는 1930년대 킴볼 영이라는 사람이 쓴 《사회심리학 핸드북》이라는 책입니다. 여기에 속한 심리학자들은 심리학을 자유주의적 학문으로 바라봅니다.

이 조류는 특히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1960년대까지 번영기를 맞았습니다. 이 경향에 속한 많은 심리학자들은 제2차세계대전 중에 파시즘이 어떻게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을 줬는지를 이해하고 싶어했습니다. 또 다시는 파시즘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려는 데 관심이 있었죠. 그 한 예가 아도르노라는 심리학자인데, 이른바 권위주의적 성격과 인성을 연구했습니다. 아도르노 접근법의 명백한 문제는 파시즘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을 개인 인성의 문제로 본다는 점입니다. 즉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파시즘의 부상을 시대적 맥락에서 물질적 조건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죠. 어쨌든 자유주의 심리학자들은 심리학의 오남용을 막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이를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 했습니다.

1940년대와 1950년대 말까지 활동했던 미국의 심리학자 커트 루인은 심리학자들이 대학이라는 상아탑에서 떠나서 사람들의 실질적 필요에 부응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루인이라는 심리학자는 에이브러햄 매슬로, 칼 로저스라는 사람들과 힘을 합쳐서 이른바 인본주의 심리학이라는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새로운 경향의 목표는 심리학의 중심에 인간을 다시 자리매김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사람을 인격적 총체로 이해한다는 것이고, 단지 인성검사로만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관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접근법조차도 문제의 근원이 개인에게 있다는 것을 고수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즉, 그 사람의 인격을 바꾸는 것에 초점이 맞추지 그 사람이 처한 물질적 조건을 바꾸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을 바꾼다는 접근법은 1970년대 이르러서 너무나 개인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

1960년대 거대한 반란과 1970년대 초까지 이어지는 반란을 겪으면서 일부 심리학자들이 명시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접근법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필 브라운이라는 심리학자는 《마르크스주의적 심리학을 향하여》라는 책을 썼고, 영국의 심리학자 닉 헤더는 《급진적 심리학》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사람들은 심리학자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뿐 아니라 그들이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를 비판적으로 썼습니다.

닉 헤더의 책에서 한 문구를 인용하자면 ‘심리학은 “계급적 약탈”이다, 왜냐면 심리치료를 받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하고, 심리치료 혜택을 보는 사람들은 대체로 부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프로이트 사상을 결합시키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런 시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이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할 수 있습니다. 1970년대 활동한 급진적 심리학자들은 정신의학 반대 운동Anti-psychiatry과도 연계가 있었습니다. 로널드 레잉이나 데이비드 쿠퍼, 피터 세드윅 같은 사람이 대표적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과학을 이용해서 인간을 비인격화하는 모든 종류의 심리학과 정신의학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이런 관점들 속에는 마르크스의 소외 이론의 흔적이 녹아 있습니다. 더 최근에는 비판적 사회심리학과 같은 또 다른 비판적 경향이 나타났는데요. 페미니스트 심리학도 나타났습니다. 페미니스트 심리학자들은 심리학에서 여성들이 드러나지 않는 것에 문제제기를 합니다. 또한 여성 문제가 간과되는 것을 문제제기하구요. 즉 심리학에는 강고한 남성 중심적, 이성애 중심적 편향이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심리학은 흔히 사람들의 행동과 심리 근저에는 사회적 요인이 아니라 생물학적이고 내인성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고 전제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개인에게서 비롯한다는 관점은 심리적인 성차가 필연적이라는 관념도 강화시킵니다. 예컨대 약물 남용 같은 사회적 문제를 바라볼 때조차 남성들이 약물 남용을 하면 그 문제의 원인을 그들의 양육방식, 즉 내인성이 아니라 외인성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여성의 경우에는 여성적 심리 또는 호르몬 문제로 환원합니다. 이런 식으로 남녀 사이에 문제의 원인을 다르게 취급하는 문제를 페미니스트 심리학은 교정하려 해 왔죠.

또한 심리학의 근저에는 이성애가 정상이고 동성애는 비정상이라는 전제도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심리학이 성적 지향의 문제, 섹슈얼리티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영국 심리학회는 1998년에 가서야 학회 내에 동성애 부문을 설립하는 것을 허락했는데, 이것은 동성애를 지지하는 심리학회 회원들이 4차례나 요구하고 4차례나 거절당한 뒤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아주 간략하게 심리학계의 역사와 현황을 개괄해 봤는데, 저는 이런 강연을 할 때마다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자인 레프 비고츠키입니다.

비고츠키는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자인데 안타깝게도 1934년 38세의 나이에 결핵으로 인해 숨졌습니다. 그리고 사후에 그의 저작이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돼 소개되기까지 몇 십 년이 걸렸는데, 영국 같은 경우 1960년대 말이 돼서야 번역됐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특히나 영국 같은 경우는 교사들 사이에서 큽니다. 왜냐면 어린아이들이 집단으로 활동하고 또 서로 가르칠 때 학습을 잘 할 수 있다는 비고츠키의 이론은 교사들과 교육 과정에 아주 큰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리고 비고츠키의 인지발달 과정에 관한 이론은 사람들의 언어 습득 이론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는 비고츠키를 살짝 건드리기만 했는데, 이 주제로 강의 몇 개를 별도로 잡을 만합니다.

자본주의 하에서 정신적 고통과 마르크스주의
다음으로 저는 자본주의 하에서 정신적 고통과 마르크스주의라는 주제로 넘어갈 텐데, 다음의 책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이언 퍼거슨의 《마음의 정치학; 마르크스주의와 정신적 고통》이라는 제목입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당원이기도 합니다. 퍼거슨은 그 동안 있어 왔던 정신질환에 관한 이론들을 검토합니다. 정신질환에 관한 초창기 이론들은 종교적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후에 가서는 의료적 이론들로 대체됩니다. 초창기 이론들은 사람들이 정신질환을 겪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빙의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신이라고 하면 이상하고 뭔가 초자연적 존재들, 예를 들면 악마에 씌었다는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책에서 짧게 한 구절 인용하면,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뿐 아니라 바빌로니아 왕이었던 네브카드네자르도 신을 모독한 벌로 둘 다 미쳐버렸다”라고 돼 있습니다.

퍼거슨은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이론을 다른 것과 대조를 하고 있습니다. 이언 퍼거슨은 정신적고통mental distress이라는 용어를 쓰고 정신질환mental illness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데요. 이 점을 주목할 만합니다. 이런 사회적 설명은 의료적 설명과 대비되는데, 의료적 이론들에 따르면 정신질환은 온갖 종류의 생리적 요인에서 비롯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전자가 됐든, 호르몬이 됐든, 다른 생체화학적 작용에 따르든 말이죠.

퍼거슨은 긴축정책이 심화되고 불평등이 강화됨에 따라서 정신적 고통의 발생률이 높아진 것에 주목합니다. 여전히 의료적 이론들이 주류인 것은 사실입니다. 즉, 정신적 고통은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에 약물치료, 전기치료, 상담치료로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역사적으로 극단적인 경우에는 정신적 고통에 대처하기 위해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나치들이 정신적 고통을 앓고 있는 사람을 제거했던 경우를 떠올려 보십시오.

최근에는 정신적 고통을 진단하고 분류하는 정신의학회의 표준 교범인 DSM이 가장 최신판으로 개정돼 나왔습니다.2 DSM은 ‘미국 정신과학회의 정신 장애 진단 및 통계 매뉴얼’이라 번역되는데 사실 그렇게 분류하는 과학적 기준은 없습니다. 서로 합의해서 만드는 건데 몇 년 전에 제 5판이 새로 나왔습니다. 여기에 추가된 새로운 질병들이 흥미롭습니다. 트랜스젠더인 사람들은 성별 위화감이라는 이름의 질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규정되고요 저 같은 사람들은 아직도 약간은 정신 이상이 있다는 것 같습니다.

그뿐 아니라 범불안장애는 특별한 원인 없이 세상 모든 일을 불안해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경도 인지 장애 정도가 약한 신경인지 장애, 저도 이 병을 앓고 있는데요. 왜냐면 약간 건망증이 있는 것을 지칭합니다. 또 분노조절장애라는 병도 있습니다. 화가 나면 이 병을 앓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친한 사람이 죽어서 실의에 빠지면 이 또한 우울증의 한 증상이라고 합니다. 이제 이런 장애 숫자만도 몇 백 개가 됩니다. 이런 온갖 종류의 병명들이 있다 보니 많은 경우 사람들이 필요하지도 않고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는 온갖 종류의 의료조치와 약물처방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약을 공급하는 쪽은 누굴까요? 비싸게 약을 파는 거대 제약회사들이죠.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대책으로 나오고 있는 것들이 쉽고 빠르게 통하는 요법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했습니다.

저는 몇 년 동안 칼 로저스의 상담치료 요법을 다루는 과목을 가르쳐 왔는데요, 그런데 이 과목을 듣는 학생들이 영국 의료서비스시스템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왜냐면 지금 영국의 대세는 짧은 기간에 마칠 수 있은 인지행동 치료가 대세이기 때문입니다. 또 긍정심리학이 뜨는 것을 여러분이 아실지 모르겠는데, 이 또한 시간이 걸리는 상담치료의 대안으로서 사람들의 정신적 고통을 유발하는 생활환경을 바꾸는 대안으로서 행복의 심리학, 긍정심리학이 부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퍼거슨은 DSM이 생체화학적 요인들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반대로 가난, 외로움, 실업 같은 사회 경제적 요인들을 무시하는 관점이 반영돼 있다고 지적합니다.

퍼거슨은 21세기 초에 정신적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에 어떤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급진적인 정신과 의사들, 심리학자들, 사회복지사들, 심리치료이용자들이 연합하여 이런 변화를 주도했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광기와 심리질환이란 것이 사람들의 삶의 경험에서 비롯한다는 것입니다. 가난, 인종차별, 성차별, 외로움, 불평등 등 차별에서 비롯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커다란 일보진전임이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자본주의 하에서 소외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마르크스 이론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퍼거슨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사회적 요인들을 너무 강조한 쪽으로 나아갔고, 정신적 고통의 생리적 요인들을 너무 간과한 것 아닌가 하고 주장합니다. 예컨대 최신호 《국제사회주의》International Socialism에서도 퍼거슨 책 서평이 실렸는데요. 이 서평의 논지도 퍼거슨이 너무 막대기를 사회적 요인 쪽으로 구부려서 생체화학적 요인을 간과한 것 같다는 것입니다.3

그리고 그 밖에도 사회적 모델에 대해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신적 고통의 근본 원인이 사회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정치적 해결책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 접근법 모델의 약점 중 하나는 사회적 요인에 주목한다고 하더라도 정신적 고통에 대한 정치적 이해가 가능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로는 사회적 모델에서는 유년기의 애착관계 형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년기의 정신적 고통을 예방하기 위해서 유년기의 애착형성을 중요시하다 보면 그걸 근거로 국가가 나서서 유년기 아동들에 개입하고 사회복지사들이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돌리는 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데 그것이 꼭 아동들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애착이론을 근거로 아동을 가정에서 떼어내는 정책을 추진할 수도 있는데 이것이 아동들에게 꼭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죠.

주류 정신의학에 반대하는 또 다른 경로는 정신의료 서비스 이용자들이 최근 들어서 자신들의 권리를 더 많이 주장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퍼거슨이 결국 주장하는 것은 정신적 고통의 원인에 맞서 싸우는 광범한 사회적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운동은 긴축 때문에 공격받고 있는 기존의 서비스들을 방어해야 합니다. 기존의 서비스를 지키는 것뿐 아니라 대안적 정신건강 보건서비스의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 중심에는 정신의료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필요와 그들을 직접 치료하는 사람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퍼거슨이 주장한 핵심 하나는 계급투쟁의 수위가 사람들의 정신적 건강과 정신적 고통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계급투쟁의 수위가 높아지면 정신적 고통 수준이 낮아집니다. 제가 본 어떤 연구에 따르면 1980~1981년 폴란드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 당신 폴란드 의료당국에 보고된 정신적 고통 발생 건수가 급격하게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를 둘러싼 조건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봤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희망을 느낄 때는 자기 바깥의 세계에 집중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의 정신건강을 증진시키고자 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나은 정신보건서비스를 요구하며 싸우는 것뿐 아니라 그런 서비스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혁명가들의 비회원 가입 전략이기도 합니다. 정신건강을 증진시키고자 한다면 사회주의 조직에 가입하세요.

정리 발언
정말 훌륭한 토론이었고 많은 분들이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해 주셨습니다. 제가 다 답할 수는 없을 것 같고, 특히 여섯 개 질문을 해 주신 분에 대해서는 다 답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핵심 주제 하나는 정신적 고통을 사회적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 있느냐 아니면 생물학적 요인도 존재하느냐 하는 것인데 저는 퍼거슨이 생물학적 요인을 부정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그의 강조점은 사회적 요인에 가 있죠. 우리의 정신에는 자본주의가 뿌려놓은 온갖 오물, 마르크스가 세계의 오물이라고 불렀던 것이 있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약물치료가 언제나 불필요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죠. 많은 분들이 지적해 주셨듯이, 저도 심각한 증상을 일시적으로라도 완화시켜 주는 것이 약물의 효과라고 생각합니다.

한 동지는 정신이라는 것이 물질 작용에서 세계를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가 볼 때도 그것이 올바른 관점입니다. 사람의 정신은 물질적 조건과 끊임없이 변증접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죠. 진화심리학을 부정적으로 기각하는 것에 대해 어떤 한 동지는 그렇게 사줄 것이 없느냐 하는 문제제기를 했는데요 제 반론의 요지는 우리의 존재를 진화의 불가피한 결과, 진화 과정의 노예인 것처럼 여기는 접근법을 기각한 것입니다. 실제로 진화심리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더라도 우리의 행위가 과거의 진화 과정의 필연적 결과라는 논조가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태생적으로 폭력적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전쟁이나 심지어 가정 폭력도 필연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진화에 대해서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진화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저작을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리처드 르원틴 같은 사람도 있고요. 제가 볼 때는 이들이 진화심리학자의 많은 주장을 효과적으로 반박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폭력이 인간본성의 일부라는 주장을 효과적으로 반박합니다.

마지막에 발언하신 동지가 상담사로서 본인의 경험을 얘기했는데 저는 매우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특히 심리치료라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르핀 같은 기능을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꽤나 까다로운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상담치료가 필요할까? 그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모르겠습니다. 일단 저는 지금보다 치료가 훨씬 덜 필요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날 약물치료나 상담치료가 필요한 거의 대부분의 이유는 자본주의 하에서 착취와 억압에 [병의] 뿌리가 있기 때문이죠. 또한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무기력감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회주의 사회에 산다면 우리 얘기를 들어 줄 사람이 주변에 많다고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민주적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면, 그럼으로써 사회적으로 어떤 것을 생산하고 누구에게 분배하는지를 집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면, 사람이 노동력이 아니라 인격체로 존중 받게 된다면 정신적 고통이 지금보다 훨씬 덜할 것이고 치료의 필요성이 많이 줄어들 것이란 점을 다들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신적 고통의 생물학적 요인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지금과 같은 심리치료나 약물치료는 아니더라도 모종의 생물학적 요인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필요할 수는 있을 겁니다. 질문 몇 가지는 빠트린 것 같은데 그것에 대해서는 죄송합니다. 이 정도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주]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심리학자 리처드 헌스타인과 사회학자 찰스 머레이의 저작으로, 인종 간에는 아이큐의 평균치가서로 다를 뿐 아니라 낮은 아이큐를 지닌 흑인과 라틴계가 복지 혜택을 받아 출산을 많이 함으로써 미국의 평균 아이큐가 낮아지기 때문에 보편적 복지가 문제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DSM은 ‘미국 정신과학회의 정신 장애 진단 및 통계 매뉴얼’의 약자로 흔히 ‘정신의학의 성서’로 불린다. 1952년에 초반이 출판됐고, 2013년에 5판이 나왔다.
계간 잡지 《국제사회주의》International Socialism 159호(2018)에는 셜리 프랭클린이 쓴 ‘Capitalism and mental health treatment’이 실렸고, 같은 잡지 160호에는 이언 퍼거슨의 답변 글 ‘Marxism and mental distress: a reply to Shirley Franklin’이 실렸다.

rhizome 2024-03-09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 원래 심리학주의 비판을 주 테마로 하는 글들을 본 page 상에 집약하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부득이 댓글형식으로 추가되었던 보론적 인용자료들에서 바로 윗글은 게재 당시 글의 제목과 출처 등을 요약하는 짧은 서두 누락부가 나중에 발견되었으나 필수 요소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되어 이하 현재 일자로라도 보충키로 함.
66
이 글은 한국에서 개최되는 {맑시즘}2018에서 로라 마일스가 같은 제목으로 초청강연한 내용을 녹취한 것이다.
>@{마르크스21}n29 ‘2019년1~4월호

# [쟁점: 현재의 이슈들]
심리학과 마르크스주의
강연자 : 로라 마일스

99



2. 보충분을 게재하는 김에 (이제는) 흔하게 상식화된 metacognition 개념을 초월하여, 본 페이지 테마를 구축하는 핵심 통찰들 중 하나인 ˝meta-metacognition˝이라는 심도 깊은 창의 개념에 대해 아직도 거의 이해를 못 하겠다는 분들이 다수인 듯해 아쉬운 대로 EBS TV {위대한_수업Great_Minds} Program 중 중국대기획 Inside China series에서 사회 분야를 담당한 ‘Max_PLANK진화인류학연구소‘ 샹바오XIANG_Bao가 중국 청년들의 비참한 현실 문제들을 일괄하면서 교육부문을 설명할 때, 학교교육현장에서 눈에 잘 보이는 A와 B라는 존재들 외에 장/막 뒤에 숨어서 전체 교육(과 취업)의 (경쟁) system들을 설계하는 숨은 ‘C‘의 존재를 지적하는 장면에서라도 그나마 유사한 인식을 얻으실 수 있으리라 기대되어 참고하셔도 좋겠다는 권고를 드립니다.

차제에 다시 한 번 요약하면,
metacognition이 주어진 환경 내에서 (설정으로) 주어진 (학습 등) 과제와 목표, 윤리도덕 등등 (행위 및 발달의) 기준들에 자신을 맞추어 돌아보는 자기성찰능력이라고 한다면,
meta-metacognition이란 XIANG_Bao의 ‘C‘ 존재보다 훨씬 포괄적으로 이러한 주어진 상황과 환경, 목표와 과제들, 판단기준들 그 자체와 그 숨은 설계자들을 모두 돌아보는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초월적 반성사유의 능력과 역량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격을 살해하고, 오히려 다양성을 말살하며, 중소/자영업자와 문화체육산업을 말려 죽일 자유에 대한 규제

: 언론중재법 개정 논란에 부쳐





0. 이번 광란의 언론폭동 사태는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함의들을 내포하고 있기에 이 함의와 문제들, 그리고 그 해결에 대하여 불가결한 핵심만 약술키로 합니다. 





1.낡은 진보의 피상적 고정 관념


1.1. 피해자들 고통의 심각한 구체성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저 눈 감아버리는 낡은 진보들의 무능과 무책임

 

1.1.1. (주지되지 않은) 폭동의 다면성들


잔인한 언론폭력에는 그야말로 찍소리 한마디도 못하고 숨죽인 채 구경만 하고 계시던 분들이 갑자기 관심법 도사인 척 뛰쳐나와 뭐라고 떠들어대고 다닌다 해도, 그간 오랜 침묵의 가장 큰 원인은 애초 명백히 표명했던 바와 같이 '연대와 협력'을 실현해내기 위한 극한의 인내였으며,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길임이 분명해진 이후에는 '기러기 자유낙하 실험' (보고서( 작성)) 과정의 일환으로서 매질 저항력과 마찰력 zero의 진공 상태를 조건화하기 위해 수행되어야만 했던 핵심 절차였습니다. 

일단 실험 보고서 제출은 유보되었으나, 모두가 손쉽게 명확히 관찰할 수 있었던 '전문(가)' 반복 강조 이외에도 이번 폭동은 군소/개인 매체를 압살해버리기 위한 여러 다채로운 공격 행위들이 장기간 집요하게 지속된 일종의 발작적 '복합complex'(이고) 증후군syndrome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도무치한 이런 다양한 폭력들을 많은 분들, 특히 역설적으로 자칭 똑똑한 척, 전문가연 깨나 하시는 분들일수록 잘 눈치도 채지 못 하고 아주 단순하게 무슨 전문가주의 찬반 논쟁이나 (관료적 사회주의 ((단계)) 특유의 계급투쟁이라는 당대 현실을 반영하던,) 시대착오적이고 허구적 대립구도의 이분법에 불과한 홍-전 논쟁으로 받아들이고 섣불리 참전하는 경우가 그간 하도 많기도 했지만, 이런 무지가 결국에는 당면한 언중법 개정 문제에도 결정적 오판을 일으키는 일원인을 제공하기에 이르고 있어, (archiving을 위해서라도) 불가피 여기에 대신 몇 자 적습니다.

   


.....




1.1.2.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세뇌에 성공하리라는 기성언론의 기대와 달리, 이번 사태가 광범위한 관찰자/수용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세상이 뒤집히"는 충격 그 자체였으며, "심판이 사라진" "무법천지", "악마 같은" "Chaos"의 실재(세)계에 "깨어나" 눈뜨는 각성 경험들로 진술되고 있으며,



1.1.3. 폭동의 좀 더 직접적 피해자인 청년들에겐 "매순간 마음이 멍들"고 "(숨을 쉬어도) 숨이 쉬어지지 않"았으며,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고민...불안과 공포로 잠 못 들"고, "이제라도 여기저기 다른 길을 알아봐야 했"던 "벼랑 끝에 선" 듯한 고통들이었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토록 간절히 외쳤는데도 꼰대들[1], 특히 언론 자신은 아예 귀를 막은 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어둠"과 "암흑"의 시간이었음이 갈수록 극명하게 드러났기에, 개인적으로는 비웃음을 악물고 왼뺨까지 내어주려 하고 있었으나 더 이상 전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판단되어 대응 방향을 돌이키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문화예술체육계에서 피땀 흘려 자신을 갈고 닦아 온 이들은 어려서부터 너무나 눈부시게 빛나는 여러 재능들 때문에 그 재능이 뛰어날수록 자신감도 넘쳐 일찍이 용감하게 자기 길을 찾아 나설 수 있었던 것 뿐인데, 이제 와서 아무것도 보잘것없던 앵무새들이 세상 다 가진 주인 행세를 하며 시커먼 의도를 숨기고 모두를 세뇌시켜 한 줄로 세워보겠다고 사람들 괴롭히며 난리 치는 것도 더이상은 좌시하고만 있을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1.2. 기러기협회, 앵무새연합, 뻐꾸기노련[2] 등 소위 언론현업단체들의 정체성에 대한 녹슨 고정관념과 착각




1.3. 자유지상주의 반동 보수 세력과의 정책적 (동일성) 착종




1.4. '국가'론에 대한 인식 편향

     : 민주적 통제의 (유일한) 일반 통로





2. 언론사[史]적 의의


2.1. 정체성의 자기 폭로


2.2. 언론/Media산업 독(과)점 (Cartel) 자본주의의 자기 증명

담합적 무한반복에 의한 사회 전체의 세뇌 능력


독과점 Cartel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절박성



같은 이유로 공영방송 및 언론 지배구조 개편에도 직접 선거제 도입 이전엔 결사 반대 입장의 결의를 천명합니다.   






S. 대안


그러므로 개정 그 자체를 반대하기보다 개정안의 보완과 독소조항 수정[3]에 집중하시기를 강력히 권고 드리며, 그간 살을 취하고 결국 뼈를 내주는 우행들을 반복해 오셨는데 이번에도 개정 시도 전체가 실패할 경우 장차 (공영)언론에 대규모 인적 청산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후폭풍이 불어닥치게 될 수 있는 상황이라는 사실에 대한 각성도 또한 촉구 드리는 바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이 점에선 진보꼰대들도 별반 면책될 사유가 없음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2] 심지어 JG 교수 등 진보계 분들조차 (방송 중에도) 이 명칭으로 호명하시는 사례가 많은 듯해 의도적으로 인용 중임.   


[3] 실제 언중법 등 법적 구제 절차 이용자 및 제소자 (계층 분석) 통계를 동원해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개정을 반대하려는 논리도 횡행하던데, 그러한 현실에 대한 올바른 대응은 고위공직자, 대기업 등은 배액 손배 청구권자에서 제외하는 등 문턱을 높이고, 입증 책임 전환을 포함해 minority 피해자들에게는 문턱을 더욱 낮출 수 있는 여러 방안들을 강화하는 개정이 되어야지 이를 핑계로 개정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무법천지가 되어버린 언론계를 자유방임하자는 주장일 뿐입니다.


또한 담합과 무한반복에 의한 세뇌와 Social Media 및 군소 매체에 대한 보복, 말살 등의 사례로 만천하에 명백히 드러난 이번 폭동도, 현재는 (제왕적) 대통령제 의회주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event인 대선을 앞두고 정권이 교체될까봐 잠시 소강상태이지만 민주당, 특히 특정 계파가 재집권에 성공하고 나면 다시 극성을 부리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는 상황이므로, 안 그래도 그 누구의 눈치도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던 게 제도적 원인이 된 이 사태가 함부로 다시 반복될 수 없도록, 담합 등 독과점 행위에 대한 규제 조항 또한 반독점 입법 체계의 일환으로서 반드시 추가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작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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