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란 무엇입니까 - 표정훈, 스승 강영안에게 다시 묻다, 20년 만의 특강
강영안.표정훈 지음 / 효형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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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나 지금이나 단 하나다. '지혜사랑'(또는 레비나스적 의미에서 '사랑의 지혜). 그러나 이 단순한 대답은 철학사 안에서 위상을 달리하며 끊임없이 변주되어 왔다. 또는 오히려 이 질문과 대답 자체가 다시 구성되었다. 그래서 질문은 대답 속에서 다시 물어지고, 대답은 질문을 통해 다시 의문에 부쳐 지는 것이다.

강영안 선생도 이 오래된 질문을 다시 반복한다. 하지만 그 대답은 레비나스와 마리옹, 그리고 리쾨르라는 20세기 주체 철학(아니면 타자의 철학) 안에 재정위하는 방식을 취한다. 결론적으로 철학은 오래 은폐되어 왔던 '타자성'이라는 주제를 꺼내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체'는 이러저러한 우회를 거쳐 '부름'에 응답하는 그런 존재가 된다. 절대적 주체성은 없으며, 단지 '겸손한 주체'의 모습만이 남는다. 그러나 이 겸손은 너무나 투철하기 때문에 그 전의 '주체'마저 더 투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주체를 강화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더 투과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것, 타자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이 주체는 그래서 스스로가 존재 근거나, 인식 근거라고 말하기 보다, 윤리의 근거 또는 윤리라는 실천을 매개하는 일종의 '천사'가 되는 것이다.

강영안 선생이 '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논의 가운데에는 어쩌면 신의 부름을 받는 불완전한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윤리적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인간보다는 더 상위의 주체성, '하지만' 상호주체성의 주체성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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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의 옹호
머레이 북친 지음, 구승회 옮김 / 민음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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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주의와 합리성의 구출
기본적으로 생태철학은 ‘타자(타인과 자연)에 대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익히 알려진 논리를 가져 오자면 이 사유는 데카르트 이후로 형성된 서구 근대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실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탈근대성이라는 법정에 소환하는 것은 일종의 대유행처럼 번져 있다. 한편으로는 그의 ‘로고스 중심성’이 또 한 편으로는 그의 ‘기계론적 자연관’이 말이다. 생태적 사유가 데카르트를 이토록 괴롭히는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사유하는 나’를 중심에 놓거나, 그것의 존재론적 근거로 ‘신’이라는 초월적 타자를 끌어 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인식론적으로나(Cogito), 존재론적으로나(Dieu) 내재적 의미에서의 타자성(altérité)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데카르트의 합리적 이성(ratio)을 부정하는 근거를 찾을 수는 없다. 합리성은 이러한 데카르트 비판에 있어서도 변함없이 작동하는 메타적 기제며 인간존재라면 이러한 정신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이다. 만약 이 근거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곧장 종교나 신비주의로 향하게 된다.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 1921- )이 근본생태주의(심층생태론, deep ecology)나 원시주의(primitivism)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지점도 이곳이다.

‘합리성’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타자를 사유하고, 그를 위해 윤리적 토대를 마련하며, 마침내 공동체 내에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 윤리를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지반이면서 최종적인 판단 근거인 셈이다. 하지만 현대적 상황은 이 당연하게 보이는 근거를 상당부분 상실했다. 이 책의 본래 제목인 Re-Enchanting Humanism은 북친이 어떤 지성적 전략을 가지고 자신의 생태철학을 전개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실 ‘re-enchanting’이라는 북친의 개념을 우리말로 번역하기란 쉽지 않다. 글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재매력화’정도가 될 것이다. 역자(구승회)는 이 말을 ‘재마법화’라고 번역했다. 이 번역어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의 본래 의미를 잘 음미하면, 북친의 의도를 좀 더 뚜렷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제목은 북친이 보기에 인간성의 가장 큰 지반인 합리성이 평가절하되거나 폐기될 대상으로 치부되는 현 상황에서 그것의 ‘매력’을 재발견하는 것이 긴요했다는 의미로 새겨야 할 것이다.

북친의 입장에서 합리성은 생태철학의 사회적 측면을 발견하고, 생태적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기 위한 방법론적 개념이면서, 윤리적, 미학적 판단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인간성을 <재마법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본래의 뜻은 상호존중의 윤리와 함께 나누는 사회에 바탕을 둔 합리적이고, 생태 지향적이며, 미학적으로 고양되고, 자비 넘치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인간의 잠재력을 깨닫는 것이 중요함을 지적하려는 데 있다”(365). 여기서 ‘인간의 잠재력’은 분명 인간의 합리적 사유 능력을 최종적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이에 기반해서만 생태적 감수성(ecological sensibility)이 나올 수 있다. 생태적 감수성이 어떤 동물적이고 인간성 외의 신비로운 여섯 번째 감각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중 나선 구조의 유전자처럼 인간의 생태적인 특성”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의 독특한 특징인 윤리적 의지”에서부터 출현하는 것이다(54). 따라서 합리적 사유 능력에 기반한 생태적 감수성은 인간의 원시적 공감능력이나 자연과의 일체감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풍부한 문명화, 인간 정신의 복잡 미묘한, 그리고 인간적 가치의 섬세한 진보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사실 북친의 사유는 합리성 그 자체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근본생태론에서 흔히 주장하는 것처럼 북친의 사유 전략을 ‘인간중심주의’의 구태의연한 반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인간을 “모든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신비하고도 <매혹적>인 존재”(400)라고 선언할 때는 일정한 제한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성에 대한 꾸준한 옹호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을 포함하는 초자연적 <우주>를 향한 인간의 자기 파괴에 기초한 반인간주의에 반대하는 것만큼이나 자기 확장과 약탈에 근거한 휴머니즘도 반대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19).

문제는 타자를 돌볼 수 있는 휴머니즘이 이론적으로 구성가능한지, 또 그것을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북친의 문제제기는 오히려 매우 상식적인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도 밝히고 있다시피 인간 본성의 핵심으로서 합리성을 목욕물의 아이 버리듯 간단하게 처리한다면 인간이 타자를 돌볼 수 있는 인식론적 근거도 또한 윤리적 감수성도 불가능해 진다. 하긴 합리적 사유 능력과 윤리적 감수성을 버린다면 어디서 생태철학이 가능할 것인가 말이다. 이렇게 봤을 때 북친이 ‘반인간주의’라고 부르는 이러저러한 사조들(근본생태론, 신맬서스주의, 도킨스류의 환원론, 기술공포주의, 포스트모던 허무주의)이 인간이 가진 권리인 이성을 포기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타자에 대한 책임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퇴행적 사조들이 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결과라 하겠다. 이들 사조들은 “인간의 자기 진보 능력, 기술적 재능, 진보의 잠재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성의 권능 자체를 비웃는다”(15).

새로운 이성과 계몽된 휴머니즘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능력과 잠재성을 떠받치는 ‘이성’을 북친은 선뜻 다르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하겠다. 그는 “<이성적>이라는 것은 세련되고 추상화된 철학적 의미가 아니라, 협동과 감정이입, 생명권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공동체와 연대라는 새로운 개념을 포괄하는 살아 있는 합리성”이라고 정의하고 있다(18). 여기서는 주어와 술어(이성적이라는 것은 ~ 합리성이다)가 가지고 있는 상식적인 판단에 긴 수식어구들을 새로운 참조점으로 제시하는데 사실상 이러한 참조점들은 단순한 것들이 아니다. 이성, 즉 logos, ratio가 가지고 있는 본뜻이 ‘계산’, ‘비율’이라는 것을 따져 보아도 그렇고, 그것이 ‘과학적’이라는 근현대적인 뉘앙스를 띈다는 것을 음미해 보아도 그렇다. 다시 말해 북친은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고전적, 근대적 개념에 윤리적 가치들(협동, 감정이입, 책임감, 연대)을 추가함으로써 이 철학적 개념을 생태철학적 논의 속에 기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 새로운 ‘생태철학적 이성’을 ‘살아 있는 합리성’이라고 부른다. 북친의 이러한 개념의 전용을 사유의 확장이라고 볼 것인가, 아니면 개념의 오용이라고 볼 것인가는 독자가 판단할 몫이지만 그러한 취사선택 외에 이 논의 속에는 중대한 역사적 결절점이 담겨 있다는 것을 봐야 한다.

북친 자신이 이러한 개념의 전용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근거를 파악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책 속에 드러나는 바가 없다. 하지만 그가 생태 신비주의(근본생태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 68혁명을 떠올린다거나, 하이데거를 비판하면서 아우슈비츠를 언급하는 곳에서 이러한 전용의 역사적 근거를 추론할 수 있다. 그는 생태신비주의의 역사적 출현을 “신좌파가 몰락하면서 이어진 직관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관념을 선호하는 이념적 풍토”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철학 자체가 가지고 있는 원시주의적이고 낭만적 반동성(인간 현존재를 ‘전락verfallen’한 것으로 파악하는)이 그의 나치 추종을 이끌었다고 말한다. 책의 이러한 논의들 속에서 북친은 혁명의 좌절이 이성의 좌절(신좌파의 좌절)을 불러왔으며, 이 좌절에 대한 반작용이 생태신비주의와 같은 반인간주의라고 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혁명의 좌절과 마찬가지로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에 대한 혐오감이 이성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그것을 통해 하이데거류의 반동적 사상이 유행하게 되었다고 북친은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신비주의와 반동적 낭만주의가 인간성의 부정적 측면만을 과도하게 부각시키고, 마침내 인간혐오주의를 부추긴다면? 하지만 역사적으로 인간의 혐오스러운 측면이 충분히 드러났다는 것도 사실이다. 북친의 생태철학은 여기서 타협하기보다 자신의 관점을 역사성 너머로 밀어붙이는 전략을 택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인간들의 실패’를 ‘이성의 실패’로 간주하기보다 일종의 이성의 간계(Hegel)의 실패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때 이러한 간계를 이끄는 것은 한 줌도 안 되는 지배계급이다. 이 방면에서 북친의 생태철학은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사회생태론’이 된다.

따라서 이성의 능력, 즉 합리성을 재발굴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이익추구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이러한 비판의 목록에는 그들의 경제적 탐욕과 그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 체제뿐만 아니라 그들의 비정하고 반인간적인 윤리까지 포함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비판의 필연적 결론은 바로 이성의 능력 안에서, 또한 그것을 통해서 이성의 능력을 확장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균형잡힌 연방적 네트워크, <직접 민주주의>, 지역 위원회와 지역 대표 위원회가 행정적으로 통합된 탈중심화된 공동체"를 완성하는 것을 겨냥해야 하는 것이다(403). 이렇게 해서 이제 휴머니즘은 애초에 전쟁과 혁명으로 실패한 그것이 아니라 “계몽된 휴머니즘”이라고 지칭된다. 계몽된 휴머니즘은 과학기술에 대한 ‘공포’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과학기술의 윤리적 사용을 통해, 또한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 하에서 인간성을 타자와 결합하는 것을 통해 완성될 수 있다. 이러한 타자와의 결합 속에서 북친은 ‘생태적 감수성’을 쇠락한 원시주의로부터 끌어내어 이성과 문명의 옷을 새로 입히는 것이다.

사회생태론의 아포리아
북친의 이러한 시도들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가 비판하고 있는 사조들이 더 새롭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고 있는 사유 전략의 어떤 측면이 충분히 의미 있는 울림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과도하게 비합리주의로 경도되어 인간 혐오에까지 이른 첨단의 논의들을 다시 내재성의 장으로, 또는 인간성의 첨예한 현실성의 장(계급과 생명)으로 끌어 내린다는 데에 있다. 요컨대 북친의 사회생태주의는 철저한 내재적 사유와 현실주의에서 당대성을 획득한다고 볼 수 있다. 현실주의의 측면에서 북친은 근본 생태주의나 환원주의, 포스트모던 허무주의가 간과한 계급적 상관관계와 그것의 생태문제와의 연관성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내재적 사유를 통해 신비주의와 각종 종교적 반인간주의에 반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문제는 과연 북친의 생각처럼 이성 그 자체를 통해 이성의 비판이 (칸트에서처럼)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성의 능력 가운데 비판의 지점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비판의 가능성 또는 능력과 실천의 능력은 다른 근원에 속한 것이 아닌가? 그가 말하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그리고 있어야 할 바로서의 실재를 보는 우리의 능력을 모호하게 하는 물신성을 제거할 때, 오직 그렇게 할 때만 우리는 이성적 존재로서 자아실현을 위한 살아 있는 잠재력을, 그리고 세계 내에서 창조적이고 자기 개선적 주체로서 휴머니즘을 옹호할 수 있다”(400)면 그 있어야 할 바를 보는 눈이 이성임과 동시에 자아실현을 위한 잠재력의 실재적인 근원이라면 그것은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또한 동시에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에 대한 합리적인 현실화를 추구하여야 하며, 동시에 불합리하고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비판하는 윤리적 역할을 간직해야”(402)한다는 것이 그의 요청이라면 이 막중한 윤리적 역할을 떠맡을 주체가 다시 그 간교한 이성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다시 한 번 북친의 말을 되새기자면 ‘살아 있는 이성’은 “협동과 감정이입, 생명권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공동체와 연대”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성의 개념 함축은 그의 현실주의(‘있는 그대로의 능력’)와는 다른 방면에서의 당위적 요청(‘있어야 할 바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북친이 말하는 이 생태적 주체는 다름 아닌 칸트적인 도덕 주체 또는 선험적 주체의 생태철학적 번안이 아닌가?

그렇다면 애초에 북친이 제기한 계급적 노선은 여기서 심각한 딜레마에 봉착하거나 일정한 절충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생태적, 환경적 부정의를 일으키는 계급이 부르주아지이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 동력이 프롤레타리아트와 저항세력에게 있다면 이들의 이성적 능력 또한 계급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런데 환경 부정의에 저항하는 인민들만이 이성의 저 넓은 외연 안에 포함된다면 상관없겠지만 사실상 이성의 능력이라는 칸트적 개념 함축은 계급적 바운더리를 희석시키고 보편화 시키는 기제라 하겠다. 오히려 이런 생태적 주체 개념이 수긍될 만한 영역은 계급적 영역이 아니라 심층생태론의 영역에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위 인용문에서 북친이 쓰고 있는 ‘자아실현’이라는 것이 실제로 심층생태론의 핵심 주장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지역적 생태 공동체를 통해 직접 민주주의의 이상을 일구어 내기 위해서는 저러한 윤리적 요청에 긍정적으로 답하는 부르주아와의 타협은 이론적으로 장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가 한 인간으로서 선하다 하더라도 하나의 계급으로서 부르주아의 욕망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는 맑스의 테제는 이제 폐기되어야 하는 것인가?

생명과 계급
북친의 사회 생태론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비판 능력(현실주의, 내재적 합리주의)과 심오한 통찰(“인간의 자연지배는 인간의 인간 지배에서 비롯된다.”)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 이러한 난점을 노정하는 것은 이 이론이 (비록 ‘사회주의’에 찬성하고 있다 할지라도) 선명한 이념적 구도를 내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문제 지점 자체가 북친의 사회 생태론이 가지고 있는 매우 급진적(radical)이고 진보적(progressive)인 측면이라고 본다. 그가 비판하고 있는 이러저러한 사조들은 이 문제 영역에 한발자국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을 회피하거나 자기중심적으로 환원할 뿐이다. 따라서 북친의 논의는 다른 어떤 생태주의보다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나는 북친 이론의 현실주의와 내재성은 계급과 생명이라는 두 가지 큰 주제에 착목한다고 본다. 여기에 ‘살아 있는 합리성’이라는 실천적 요청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철학과 형이상학 그리고 윤리학이라는 오래된 주제를 다시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큰 주제를 다 다루기 위해서는 따로이 생태철학적 논의가 담긴 한 권의 책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는 이 문제에 대한 거친 단초만을 밝혀 볼 수 있다. 사실상 이것은 어떤 절충주의나 양자택일의 문제가 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혹은 다중)가 생명에 대한 윤리적 요청을 개인적으로 결단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식의 단순한 주의적 해결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신비주의로의 샛길을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계급 지향성이 생명과 생태정의를 위한 윤리적 요청들을 마련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철저하게 사회 구조 분석을 통해서 정당화되어야 하며, 지금/여기 펼쳐지고 있는 운동의 현실태 내에서 구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내재적 장 안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기회주의만을 볼 수도 있다. 북친의 말처럼 ‘먹고 사는 일이 시급한’ 사람들에게 생태문제는 배부른 중산층의 소일거리 이상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태 윤리의 실천과 완성은 생계문제가 나타나는 그 만큼의 강도 내에서 그것이 발현되기 위해 미래의 어떤 혁명적 상황을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자연과 인간의 관계 내에서 어떤 본성의 일치를 발견하는 것은 먹고 사는 일이 시급한 것만큼이나 확연하게 보인다. 사실 이러한 불투명한 상태, 생명과 계급이 형이상학적으로는 이상하게도 하나의 지반 내에 있으면서도 현실 상황 내에서는 심각한 간극을 노정한다는 이 상태가 철학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네스(Naesse)가 자신의 두 가지 원칙(생명중심윤리, 자아실현)을 일종의 세계관으로 파악하고 결단의 문제로 제시했을 때 그것은 계급이라는 한 쪽의 관점을 온전히 희생한 것이다.

하지만 ‘생명’이 곧 ‘계급’이라면? 다시 말해 사회진화론적으로 정당화되어 온 그 지배계급의 논리를 뒤집을 수 있다면? 정치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일종의 마키아벨리의 가면(알튀세르), 또는 한비자의 혁신이 될 것이다. ‘생명 또는 계급’이라는 양자택일이나 ‘생명과 계급’이라는 절충주의를 넘어 ‘생명이 곧 계급, 계급이 곧 생명’(生卽民)이라는 전복의 논리가 가능할 것인가? 이 논리와 더불어 ‘살아 있는 합리성’이 그 최종심급에서 긍정된다면 우리는 두 가지 분할 불가능한 방향에서 하나의 생태철학, 생명의 철학을 획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생명에서 계급으로 가는 존재론적 방향, 계급에서 생명으로 가는 정치적 방향. 하나는 이론의 심급, 또 하나는 실천의 심급. 이 방향을 좌로 우로 꿰는 붉은 실은 물론 ‘살아 있는 합리성’이 될 것이다.-redbrig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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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공간 - 세계화.신체.유토피아, 한울공간환경시리즈 14 한울공간환경 14
데이비드 하비 지음, 최병두 외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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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하비의 출발점은 outopia에 대한 일반적 정의에 대한 반항이다. 이것은 '어디에도 없는 공간'이 아니라 '희망의 공간'이며, 타락한 유토피아를 거부한 변증법적 유토피아를 의미한다. 유토피아가 항상 실패한 것은 그 '불가능한 현실'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명시적인 거부 시도들, 부르주아와 한 줌의 통치자들에 의해 계획된 타락한 전망 때문이다. 이 목표는 인류사에서 소멸되지 않는 잠재성으로서 현실 구성에 영향을 끼쳐 왔다. 하비는 이러한 가능성을 맑스의 [자본론]과 [선언]으로부터 도출해 낸다. 하비에 의하면 맑스의 텍스트들은 맑스 생존 시보다 지금에 와서 더 적실해 진 것이다.

문제는 변증법적 유토피아의 전망을 가능한 현실로 주조해 내는 방식이다. 하비는 이것을 지리-유물론적 시도로 지칭한다. 공간적인 형태의 유토피아가 항상 시간적인 방면에서 실패한 것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변증법적 이해와 실천이 늘 적정 수준에 미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패한 시도들 모두가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시도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유령과 같다.

부정적인 방식으로 '타락한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것은 새로운 유토피아의 전망에 유익하다. 하비는 이 타락한 유토피아의 여러 예들을 제시한다. 그 자신이 거주하는 볼티모어는 어떤 식으로 자본과 국가가 공간의 변형을 통해 인간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지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이 책의 [부록]편을 통해 하나의 꿈을 제시한다. Edilia. 한 편의 작은 소설 같은 이 편은 하비와 (일신한 의미에서) 유토피아주의자들이 왜 항상 꿈꾸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지에 대한 심원한 에필로그와 같다.

가독력이 떨어지는 부분이 많이 보인다. (더불어 비문도) 좋은 책이긴 한데 번역 상의 난해함(?)이 보일 때마다, 번번히 번역자들의 노고를 높이 사는 것보다 그들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고 싶지는 않다. 내가 읽은 것은 2001년 초판이고 재판에서는 상당부분 교정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을 내서 영문판을 함께 읽으면 그만이다. 번역 때문에 투덜거리는 것까지는 좋지만, 책 전체를 힐난하는 속좁은 짓은 하지 않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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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라는 유령 -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론 비판 이매진 컨텍스트 14
알렉스 캘리니코스 외 지음, 고팔 발라크리슈난 엮음, 김정한 옮김 / 이매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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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Empire]이 출간된 지도 7년이 흘렀다. 이 책이 가진 파급력이 대단했다는 것은 '자율주의'(Autonomism)라는 운동의 고유명사가 증명해 준다. 역사와 문화, 사회과학과 철학을 횡단하는 지적 얼개에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와 혁명에 대한 낙관적 전망에 이르기까지 그 방대함과 치밀한 분석력에 있어서 이 책은  68년 이후 좌절에 빠진 좌파들에게 하나의 선물 이상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내가 이 책을 접했을 때의 놀라움도 이러한 좌절감의 대척점에서 가늠해야 마땅하다. 이 책 이후로 네그리의 책들을 거의 다 봤으니 그 좌절감이란 게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하긴 나는 지금도 맑시즘과 자율주의, 그리고 아나키즘이라는 왼쪽 길들의 원근을 가늠하며 걷고 있는 중이다.  

[제국]이 나온 것과 더불어 수많은 논쟁들이 있었다. 이 책은 그러한 논쟁들의 정수들을 모아 놓은 리스트라 할 수 있다. 캘리니코스와 아리기, 우즈의 논평은 특히 날카롭다. 그러나 몇몇은 실망스럽기도 하다. 그 몇몇 중에는 [제국]이라는 텍스트에 집중하기 보다, 네그리라는 인물에 더 치중하면서, 이상한 음모론 같은 비평(부르주아에의 투항이라는?)을 전개하기도 한다. 함량 미달의 이런 비평들을 제외하면 각각의 글들이 제 나름의 논변을 가지고 텍스트를 꼼꼼히 비평하고 있다. 그런데 이 비평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게 바로 '노동자주의적 낙관론'이라는 거다. 이 방면의 비판은 파올로 비르노가 그의 [다중의 문법]이라는 책에서 더 정교하게 전개해 놓았는데, 네그리 입장에서 보면 그리 낯설지도 않을 것이다. 내 생각에 네그리의 낙관주의는 문제틀의 범위에 놓여 있다기 보다, 전략적 관심에서 나온 것이지 않나 싶다. '억누를 수 없는 코뮤니스트의 기쁨'이라는 [제국]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 테제는 그래서 비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폐기될 수는 없는 것이다. 

발췌하고 정리하여 좀 더 긴 서평을 써 봐야 할 책.-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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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 근대성과 순간의 시학 - 김수영.김종삼 시의 시간의식
남진우 지음 / 소명출판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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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비평가인 남진우의 박사논문(중앙대)이다. 

내게 남진우는 80년대 시운동 동인의 한 사람이었고, 시대적인 분위기를 거슬러 꽤나 사색적인 시를 썼다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와 하재봉 등등 시운동 동인이 모여 찍은 사진도 기억 난다. 하나같이 장발에다가 굶주린듯한 눈빛들을 하고 있었다. 하긴 당대의 리얼리스트들에게 이들은 역적 정도로 비치지 않았을까?

남진우는 이 책에서 두 사람의 시인을 비교하고 있지만 사실, 김수영에 대한 편애를 감추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분량에 있어서도 그렇고, 분석의 독창성이나 깊이 면에서도 김수영에 대한 시각이 훨씬 풍부하다. [풀]와 [사랑의 변주곡]에 대한 분석은 매우 독특해서 이 방면의 논문을 쓰는 사람은 반드시 참고해야 될 듯하다. 그러나 김종삼에 대한 분석은 초기시의 중요성을 발견했다는 것 외에 다른 독창적인 시각이 보이지 않는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남진우가 김수영의 시를 '상상적 도정의 언어'로 김종삼의 시를 '귀향적 도정의 언어'로 규정하면서 '순간의 시학'을 말하는 곳에서, 그러한 규정의 준거를 (제목과는 달리)미적인 차원에서 찾기보다 철학적인 차원에서 더 많이 찾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하이데거에의 의존은 관점을 정교화한다기 보다 흐리게 만드는 게 아닌가 할 정도다. 보러(Bohrer)를 빌어 말하자면 시란 시만의 '자기준거틀'이 있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 철학과 이론으로부터 작품으로의 하방경로가 아니라, 작품으로부터 이론을 구성해 내는 상방경로가 마땅하지 않겠는가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이 두 시인의 '시간의식'이 제대로 개념화되지 않겠는가?

내용 비판과는 별개로 이 논문은 빛나는 분석과 구절이 수도 없이 많다. 배우는 사람이 본받아야 할 점이다. 논문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기도 하다.-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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