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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 선집
히포크라테스 지음, 여인석.이기백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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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계보
헤시오도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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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니샤드- 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길
이명권 지음 / 한길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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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니샤드 2
이재숙 옮김 / 한길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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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F. C. 코플스턴 지음, 임재진 옮김 / 중원문화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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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플스톤 철학사 시리즈를 일별하다 보면 그 '온건함'에 경의를 표할 때가 많다. 이건 비꼬는 말이 아니다. 철학사를 그토록 공평무사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많은 문헌에 대한 꼼꼼한 독해, 그리고 텍스트들의 상호성을 감안하는 종합적 정신의 노고가 필요하다. 논의의 말미에 자신의 의견을 적어넣는 것은 아마도 훌륭한 미술작품 귀퉁이에 적어 놓는 사인과도 같을 것이다. 그렇다고 코플스톤이 이를 통해 해당 시기의 철학사가 자신의 해석과정에서 어떤 식의 독특한 변형을 이루었다고 보지도 않는다.

 

이 책은 코플스톤의 A History of Philosophy-From the French Enlightent to Kant 중 '칸트' 부분의 번역이다. 이 부분을 따로 번역하기로 한 '중원문화'의 선택은 온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 책은 코플스톤의 다른 철학사와는 달리 저자 자신의 관점이 보다 선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코플스톤은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을 대폭 수용하면서, 기존의 존재론적 편향을 교정하고자 하는 자신의 기획을 책 말미에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물론 칸트 이후의 독일 관념론자들이 칸트를 나름대로 전용하면서 물자체를 어떤 경험론적 대상에 가까운, '존재자'로 만들고, '이념'을 훼손했다고 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칸트에 관한 국내저서 중에서 가장 훌륭한 책은 아마도 백종현 선생의 [존재와 진리]일 것이다. 이 텍스트와 코플스톤의 논의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 같다. 이 텍스트에서 백종현은 코플스톤과는 달리 칸트의 관념론을 실재론 쪽으로 끌어당겨 놓기 때문이다. 물론 그 미묘한 논의전개 안에서 이 둘의 일치점이 더 많이 발견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관건적인 부분에서만큼은 차이를 형성한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백종현은 구성주의를 거부하지만 코플스톤은 칸트의 인식론을 '경험구성론'으로 보고 있다.

코플스톤이 이 책에서 특히 공을 들이는 부분은 아마도 [유작]에 관한 해석이 담긴 마지막 장일 것이다. 신학적 기반을 가진 저자가 이 부분을 칸트의 종교철학과 관련하여 논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저자의 관심사와는 별개로 이 부분은 [유작]을 접해보지 못한 독자들을 위한 짧지만 훌륭한 가이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선험철학은 관념론이다. 주관이 자기자신을 구성하는 만큼. XXI, p. 85
[347]칸트는 물자체가 현존하는 대상으로서는 주어지지 않고 또 실제로 주어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주어질 수는 없으되 사유되어야 하는 (...) 가상체 혹은 필연적인 가상체"[XXII, p. 23]라고 말한다. 물자체의 관념은 현상의 관념에 상관한다. 사실 칸트는 한 번인가 두 번인가 우리의 기대 이상으로 실재론적인 방향에 깊이 들어간 것 같다. "우리가 세계를 현상으로 간주한다면 이것은 바로 현상이 아닌 어떤 것의 현존을 입증하는 셈이다"[XXI, p. 440].
[348]칸트는 물자체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앞뒤가 맞지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서 생각하는 사람들의 반대가 비판철학의 틀 안에서 논박될 수 있다는 것을 [유작]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 칸트는 [유작]에서 자신에 대한 비판가들의 견해를 논박하고 피히테와 다른 사람들의 철학발전에서 주장되었던 모든것을 자신의 철학이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신의 입장을 재구성하고자 노력하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런 이유 때문에 자신의 체계를 순수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로 변형시키려 했다는 것은 논의의 여기자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하는 것과, 칸트가 비판서들의 본질을 이룬 일반적인 관점을 분명하게 거부했거나 포기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유작]은 칸트주의의 경향이, 존재를 사유에 종속시키는 혹은 그것들을 궁극적으로 동일시하는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로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칸트 자신이 이러한 결정적인 단계까지 밟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경향은, 비록 그의 체게에서 실재론적인 요소 - 즉 피히테는 그것을 `독단론`의 요소라고 부른다 - 를 제거해야 한다는 피히테의 주장에 칸트가 동조하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의 저작들에 암암리에 내포되어 있다. 어쨌든 칸트의 철학을 그것에 뒤이은 사변적 관념론과의 관계 속에서만 해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우리가 칸트의 철학을 그 자체로서 이해할 때, 우리는 그것 안에서 필연성과 자유라는 두 영역의 조화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본래의 시도, 다시 말해서 어느 한 편을 다른 편에로 환원시키지 않고 인간의 도덕적 의식 안에서 이들의 접합점을 발견함으로서 그것을 해결하려는 시도를 통찰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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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비판철학 들뢰즈의 창 5
질 들뢰즈 지음, 서동욱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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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철학을 칸트로 환원하는 것은 일종의 아카데믹한 농담이거나, 심각하게 치부된다면 한국 철학계의 '악습'일 것이다. 그러한 농담이나 악습을 대표하는 개념은 '초월론적 경험론'이다. 바로 이 책에서 시작되어 [차이와 반복]의 몇몇 맥락(두 세번)에 나오는 이 개념은 한국 철학계에 사금파리처럼 번득이는 보석이 되어 버렸다. 얼마전 번역된 얀 소바냐르그의 책([들뢰즈, 초월론적 경험론])은 이러한 농담을 확신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초월론적 경험론이라는 칸트적 용어법의 가장 심상한 함축은 그것이 들뢰즈의 철학을 어떤 '시선'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선 아래에 잠재성의 철학과 사건의 철학은 '질 들뢰즈'라는 초월론적 경험론자의 '방법적 일원론'으로 장쾌하게(?) 요약된다. 하지만 어째서 경험론은 경험론이 되었는가? 어째서 초월적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과연 들뢰지안이면서 초월적 경험론자들인 칸티안들은 이 질문에 칸트적인 답변 또는 들뢰즈-칸트적인 답변을 할 것인가? 그들이 이미 우회했다고 여기는 칸트를 직접 가져오지 않고, 들뢰즈의 철학을 이 개념적 봉쇄로부터 끄집어낼 수 있을까? 아마 그러지 못할 것이다.

이 책 자체가 이미 들뢰즈의 철학이 그 개념의 외투를 거추장스러워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는 경험론자이지만, 칸트적 의미에서의 초월론자가 아니며, 오히려 칸트의 등에 올라타 괴물을 낳는 배교자에 가깝다.(이것은 루크레티우스나 니체를 아버지로 두고 베르그송을 어머니로 두고 있지 않겠는가?) 칸트가 말년에 이르러 비로소 깨닫게 되는 이 괴물의 정체를 들뢰즈는 분명히 드러낸다. 그 괴물은 '마주침' 또는 '사건', '불화'와 같은 개념들로 표현된다. 들뢰즈가 잉태한 이 괴물의 이름들은 저 '초월론적 경험론'이라는 회색의 개념에 비해 훨씬 적확하다. 칸트는 들뢰즈에게 '개념적 인물' 또는 '이디오진크라시'다. 그래서 이 책은 칸트에 대한 하나의 잔혹극으로 읽혀야 한다.

[33]그러나 우리가 현상을 산출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현상이 우리에게 종속된단 말인가? 또 어떻게 수동적 주체는 다른 한편으론 활동적 능력(수동적 주체가 체험하는 촉발이 필연적으로 이 능력에 종속되는 그런 활동적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 그러므로 칸트에게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 문제는 내재화되는 방향으로 나간다. 다시 말해 이 문제는, 본성상 다른 주관적 능력들(수용적 감성과 활동적 지성) 사이의 관계 문제가 된다.

[92]숭고의 느낌은 무형 혹은 기형(광대함 혹은 강력함)에 직면할 때 체험된다. 이때 모든 과정은 마치 상상력이 자기 고유의 한계에 직면하게 된 것처럼, 자기의 최대에 도달하도록 강요된 것처럼 진행된다. 그리고 상상력은 자기 능력을 극단까지 몰고가는 맹렬함을 체험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은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부분도 아름다움의 감각도 아니라, 자연 속에서 아름다움의 산출과 관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관심은 우리 안에서의 아름다움의 감각 자체의 발생을 위한 원리로서 기여할 수 있다. 이 관심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이것이 핵심문제이다. … {98}오로지 우리 능력들 모두와 자연과의 <우연적 일치>만을 얻어낼 수 있을 뿐이다(KU 들어가는 말, VII). … 이 경우처럼 자연의 소질은 무목적적인 힘으로 나타나며 또 우리 능력들의 조화로운 활동에 우연하게 적합한 것으로 나타난다(같은 책, §58). 이 활동에서 생기는 즐거움은 그 자체 무관심하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의 산물들과 우리의 무관심한 즐거움 사이의 우연적 일치에서 이성적 관심을 체험한다’(KU §42). 이것이 이성의 세 번째 관심이다. 이 관심은 필연적 종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연과 우리 능력들 사이의 우연적 일치를 통해서 정의된다.

능력들의 규정되지 않은 통일이라는 초감성적인 것의 이념이, 이성을 통해 (자유의 목적들의 원리로서) 실천적으로 규정된 그런 초감성적인 것의 이념을 준비하든, 혹은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이 도덕적이 되려는 성향을 함축하든 간에 말이다(KU §42). 칸트가 말하듯 <아름다움은 그 자체 선의 상징이다>(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아름다움의 느낌은 선의 불분명한 지각이라는 뜻이 아니다. 선과 아름다움 사이에는 아무런 분석적 관계도 없지만 어떤 종합적 관계가 있고, 이 종합적 관계에 따라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은 우리를 도덕적이게끔 하고 운명적으로 도덕성을 목적으로 하게끔 만든다는 것이 이 말이 뜻하는 바이다)(KU §59). 이{101}처럼 규정되지 않은 통일과 능력들의 자유로운 일치는 심성의 <가장 깊은> 부분을 구성할 뿐 아니라 <가장 높은 것>의 출현, 다시 말해 욕구 능력의 최고권을 준비하며 인식 능력에서 욕구 능력으로의 전이를 가능케 한다.

[130]감성적 자연 속에 나타나는 것인 역사는 우리에게 모든 대립을 보여준다. 즉 힘들이 순수한 관계들, 성향들 간의 적대 관계들 같은 것 말이다. 이런 대립은 유치한 자만 같은 광기의 덩어리를 형성한다. 감성적 자연은 언제나 자신의 고유한 법칙을 따른다. (...) [131]이 힘들의 메커니즘과 성향들의 투쟁(`반사회적 사회성` [보편사], VIII, 20 참조)을 통해 감성적 자연은 인류 자체 속에서 사회 건설을 주재하고, 오로지 그런 가운데서만 궁극목적으로 역사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보편사], 명제 4).

숭고함은 서로 싸우게 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능력들이 활동하도록 만든다. 한 능력이 다른 한자를 그 최대 혹은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도 후자는 전자가 영감을 얻도록 고취시키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 영감은 능력들 중 하나가 혼자서는 얻을 수 없다. 각각은 서로를 극한까지 밀어붙이지만 그 각각은 하나가 다른 것의 극한 너머로 나가게 해준다. 그것은 상상력과 이성 사이, 그리고 지성과 내감 사이의 무시무시한 싸움이다. 이 싸움의 에피소드로는 숭고함의 두 형식, 그리고 천재가 있다. 이 싸움은 주체 안에 입 벌리고 있는 구렁 속에서 몰아치는 폭풍이다. 능력들은 서로 직면하고 각각 자신의 극한까지 뻗친다. 그리고 근본적인 불일치 속에서 일치를 찾는다. `불일치의 일치`는 [148][판단략 비판]의 위대한 발견이며 칸트가 행한 마지막 전도다. (...) 모든 능력들의 규제되지 않는 활동 그것은 미래의 철학을 정의하게 될 것이었다. 바로 랭보의 모든 감각들의 무질서가 미래의 시를 정의하게 될 것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불일치로서, 그리고 불일치의 일치로서 새로운 음악, 시간의 원천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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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경험론
F. C. 코플스턴 지음, 이재영 옮김 / 서광사 / 199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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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의 표준적인 저작이라면 코플스톤의 철학사를 꼽을 수 있다. 현재 3권의 르네상스 철학과 9권의 현대철학(맨 드비랑부터 사르트르까지)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번역되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은 영어로 봐도 이해가 쉽게 된다. 그만큼 문체가 평이하고, 독자에 대한 배려가 차고 넘친다. 그렇다고 해서 난해한 부분을 임의로 건너뛰지도 않으며, 부박한 예들을 통해 개념의 원뜻을 왜곡하지도 않는다. 코플스톤은 사제적인 엄밀함과 성실성을 최대한 발휘해서 거의 모든 철학사의 개념들을 통시적으로 엮어내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경험론]은 전체 철학사 중 5권에 해당되는 The British Philosophy: Hobbes to Hume의 번역이다. 91년에 번역되었고 2010년에 6쇄가 나왔으니, 꾸준히 읽히는 책인 셈이다. 아카데믹한 철학전문 출판사인 서광사와 경험론 전공자인 이재영 선생의 번역이므로 가독력은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훌륭한 책이다.

다만 무릇 '철학사'를 공부하면서 빠지기 쉬운 측면을 짚어야 한다. 즉 아무리 좋은 철학사 책이라 하더라도 원전에 비길바가 못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철학사는 그 저자의 철학사상이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철학사를 읽을 때에는 '서문'(이 책의 경우는 앞권인 4권[합리론]의 서문)에서 밝히는 사상적 관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거기서 코플스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대철학은 철학이 신학의 시녀 역할에서 벗어났다고 할지라도 아직 과학의 파출부가 되지는 않은 상태이다"(31)

다시 말해 코플스톤에게 근대철학(합리론을 포함하여)은 중세의 개념을 여전히 사용하면서, 과학의 성과에 대해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는 상업도시 근교의 수도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철학사에서 '단절'이나 '혁명'보다, '점진적 변화'와 '연속성'을 더 강조하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코플스톤은 고대철학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다룰 때에도 그간에 두 철학자 간에 강조되었던 '단절'의 측면이 가진 부당성을 자주 언급하곤 한다. 요컨대 코플스톤의 철학사는 역사적 연속성이라는 전제 하에, 아주 온건하게 진행되는 지성의 역사를 우리에게 펼쳐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관점에는 철학적 혁명이나 불연속성이 가진 깊은 요동을 간과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혁명이 발생하게 되는 컨텍스트, 즉 사회정치적 조건에 대한 고려는 지나가면서 잠시 언급되거나 생략된다. 요컨대 코플스톤의 철학사는 이 지나쳐버린 측면들을 보완할 유물론의 철학사(또는 철학사의 유물론)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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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르네상스 철학 강의
에른스트 블로흐 지음, 박설호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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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흐의 미덕은 역사 속에서 지속되는 유토피아의 상에 대한 그의 집념에 있다. 이러한 집념은 청년 헤겔주의자이자, 맑스주의자로서 그가 늘 견지하는 이론적 방법론으로부터 유래한다. 사실 블로흐의 유토피아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폐기처리된 어떤 유령에 신체의 옷을 입히는 것이며, 그것은 그의 텍스트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강신굿에 참여하도록 '강제'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의 방법은 곧 그의 '신념'이기도 한것일까? 만약 그러하다면 포스트 맑시즘의 시각에서 이 신념은 교육적인 목적에서 매우 유용할지 모르지만, 이론의 당대성과 시의성이라는 측면에서 고루하다고 공격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블로흐의 이 책은 철학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매번 간과하고 마는 '당대성 자체' 다시 말해, 지성사가 아니라 당대성 속에서의 지식이라는 유물론적 철저함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철학적 업적들을 경제사에 끼워 맞추는 억지를 부리지도 않는다. 다만 그는 아주 담담하게 지성사는 곧 혁명사며, 그것이 계급적 변혁 또는 변혁의 시도라는 컨텍스트 안에서 이해될 때 더 명확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독자에게 이해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철학사'가 아니라 '철학강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전공자라면 흔히 코플스톤의 철학사 시리즈를 철학사 공부의 대계인양 생각하지만, 사실 그런 생각은 매우 편협한 것이다. 철학사는 곧 철학사상이다. 따라서 코플스톤의 철학사는 그의 철학사상일 뿐 철학사의 캐논이 될 수 없다. 철학 자체에서 '정전'이라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철학사라는 지적 발췌와 편집이 필수적 과정인 책에서 그러한 규정은 더 가당치 않다. 사실 누구나 철학사를 구성할 수 있다. 하지만 탁월한 철학사는 그리 많지 않다. 우선은 기술적으로 간명해야 하지만, 저자 자신의 관점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분명한 어조로 제시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설득력'일 것이다. 논리적인 설득력은 글쓰기의 잔재주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통찰과 자신의 관점에 대한 농익은 반성의 결과 생겨날 수 있다. 블로흐의 이 철학사는 그런 점에서도 탁월하다.

중세 말의 암울함은 사람들에게 공포와 더불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인 혁명적 사고를 불어 넣었다. 이른바 혁명적 평신도 사상이 그것이다. 이것은 유럽 지역의 농민 운동을 지지했는데, 그중 독일 농민전쟁은 정점을 이루었다. 이들과 재세례파, 도시 프롤레타리아들은 하나의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

중세 평신도 운동과 신비주의는 아카데믹한 철학사에서 잘 기술되지 않는(어쩌면 전혀 기술되지 않는) 역사다. 하지만 이는 매우 중요하다.
이 사조에 속한 인물들은 대개 평민출신들이다. 즉 교회에 속하거나, 교회에 대한 일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이 등장한 것은 중세의 피폐한 생활환경과 빈번한 폭동이 그 배경이다. 이들에게 예수는 메시아이면서 혁명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 교회가 아니라 자신이 내면의 신앙이 더 중요했다.
"우리는 성당의 어떤 중개도 필요하지 않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에 계시다. (...) 그리스도의 원수는 성직자들이다. (...) 이들은 왕, 제후, 착취자, 우리를 부려먹고 찢어 먹는 자들의 명령에 복종한다. 우리를 이끄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내면의 정신, 열광적 정신이다. 이러한 열광적 정신은 성당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단종파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활동하던 그 시기에 대학에서는 아퀴나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보나벤투라, 둔스스코투스, 오컴이 가르쳐지고 있었다.
이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니교였다. 마니교는 일단의 평민들과 혁명적 종교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 중 야콥 뵈메가 가장 특출났다.

당시 주류 교회와 이단적 종파간의 대립에서 유의해서 봐야할 점은 바로 `자연법`에 대한 견해 차이다. 주류 가톨릭 교회는 상대적 자연법만을 인정하였다. 본래의 자연법은 인간에 의해 타락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국가권력에 의한 강제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된다. 하지만 이단종파들은 절대적 자연법을 인정한다. 이들에게 이 자연법은 천국의 법이며, 앞으로 반드시 실현되어야 하는 법이다. 이 상태는 국가도 계급도 없는 상태며, 공산주의적인 삶이 가능한 상태를 의미한다.

`신비주의`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는 무언가를 은폐하고 가린다는 `내부적`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외적으로 어떤 것이 드러난다는 `외부적` 의미이다. 전자는 반동적인 권력사상으로 나아가며, 후자는 평신도 운동과 유사한 민중운동으로 나아간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사상이 가진 혁신적이면서도 이단적인 부분은 바로 신과 인간이 서로 조력한다는 주장이다. 신과 인간은 서로의 진정한 삶과 영혼을 찾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신의 창조론을 완전히 전복하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인간을 신이 자신이 형상대로 만든 것처럼, 신은 인간의 형상 속에서 끊임없이 재창조된다. 그에 따르면 `신은 함께하는 깨달음 안에서 인간을 태어난다`
"인간이 곧 신이다" - 에크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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