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경험론
F. C. 코플스턴 지음, 이재영 옮김 / 서광사 / 199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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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의 표준적인 저작이라면 코플스톤의 철학사를 꼽을 수 있다. 현재 3권의 르네상스 철학과 9권의 현대철학(맨 드비랑부터 사르트르까지)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번역되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은 영어로 봐도 이해가 쉽게 된다. 그만큼 문체가 평이하고, 독자에 대한 배려가 차고 넘친다. 그렇다고 해서 난해한 부분을 임의로 건너뛰지도 않으며, 부박한 예들을 통해 개념의 원뜻을 왜곡하지도 않는다. 코플스톤은 사제적인 엄밀함과 성실성을 최대한 발휘해서 거의 모든 철학사의 개념들을 통시적으로 엮어내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경험론]은 전체 철학사 중 5권에 해당되는 The British Philosophy: Hobbes to Hume의 번역이다. 91년에 번역되었고 2010년에 6쇄가 나왔으니, 꾸준히 읽히는 책인 셈이다. 아카데믹한 철학전문 출판사인 서광사와 경험론 전공자인 이재영 선생의 번역이므로 가독력은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훌륭한 책이다.

다만 무릇 '철학사'를 공부하면서 빠지기 쉬운 측면을 짚어야 한다. 즉 아무리 좋은 철학사 책이라 하더라도 원전에 비길바가 못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철학사는 그 저자의 철학사상이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철학사를 읽을 때에는 '서문'(이 책의 경우는 앞권인 4권[합리론]의 서문)에서 밝히는 사상적 관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거기서 코플스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대철학은 철학이 신학의 시녀 역할에서 벗어났다고 할지라도 아직 과학의 파출부가 되지는 않은 상태이다"(31)

다시 말해 코플스톤에게 근대철학(합리론을 포함하여)은 중세의 개념을 여전히 사용하면서, 과학의 성과에 대해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는 상업도시 근교의 수도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철학사에서 '단절'이나 '혁명'보다, '점진적 변화'와 '연속성'을 더 강조하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코플스톤은 고대철학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다룰 때에도 그간에 두 철학자 간에 강조되었던 '단절'의 측면이 가진 부당성을 자주 언급하곤 한다. 요컨대 코플스톤의 철학사는 역사적 연속성이라는 전제 하에, 아주 온건하게 진행되는 지성의 역사를 우리에게 펼쳐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관점에는 철학적 혁명이나 불연속성이 가진 깊은 요동을 간과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혁명이 발생하게 되는 컨텍스트, 즉 사회정치적 조건에 대한 고려는 지나가면서 잠시 언급되거나 생략된다. 요컨대 코플스톤의 철학사는 이 지나쳐버린 측면들을 보완할 유물론의 철학사(또는 철학사의 유물론)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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