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맑스주의 아우또노미아총서 8
니콜래스 쏘번 지음, 조정환 옮김 / 갈무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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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 없다>(Deleuze, Cinema 2: The Time-Image, 216). 그와 더불어 위대한 세계사적 가능성 하나가 몰락한다. 민중을 중심으로 엮어진 모든 담론들과 문건들이 휴지조각이 된다. 베를린 장벽과 소비에트 붕괴 이후 동일한 악몽이 밤마다 출현한다. 깨진 거울 속의 균열. 동일성의 사지가 찢겨 나간다.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그린 지옥편. 거대한 대열을 형성했던 민중의 기념물들이 목이 잘리고 거리에 나뒹군다.

 

니콜레스 쏘번은 이 모든 끔찍한 전사(前史)들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의 논법에는 어떤 회고나 섣부른 희망이 없다. 끝장난 역사에 대한 연민을 흘리지도 않는다. 차라리 민중이라는 재현적 형상을 애초부터 떠받치고 있던 하나의 주제 즉 ‘삶’과 ‘소수자’ 그리고 ‘코뮤니즘’으로 복귀한다. <민중이 없다는 것은, 그러므로 푸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민중이라는 사회-정치적 형상이 최상의 경우에는 흘러넘치고 있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그 자체로 … 정치를 종말에 이르게 한다는 주장이다. … 그래서 정치는 민중을 재현하는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와 도래할 민중’을 창조하는 과정으로 된다>(80). 여기서 ‘도래할 민중’은 몰락한 옛 민중이 아니다. 이것은 소수정치의 주체며 그것은 몰적 재현의 운동을 거부한다. 매 순간 구체화되는 자본의 포획망을 횡단하는 소수적 주체는 그러므로 항상 배회하는 빈자리와 같다. 도래할 민중은 자본으로 둘러싸인 이 갇힌 빈 공간에서 교전(engagement)하며 매번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고 자신을 갱신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어떤 소통이나 표현의 문제는 아니다. 갇힌 공간 안에서 정치는 필연적으로 소통과 표현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삶과 노동이 자본에 의해 포위된 맥락에서 언어와 소통에 어떤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기만인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자본주의에 의해 생산의 단순한 도구로 환원되며 그리하여 이해가능성이라는 기준들 내부에 코드화되고 감금된다>(Collectif A/traverso 1977: 109~10, 358). 따라서, <소수정치의 문제는 ‘우리가 충분히 소통하고 있는가?’ 혹은 ‘우리 모두가 듣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상이한 질서의 것이며, 우리가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리고 지배적 형식들이나 주요한 형식들을 탈영토화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어떻게 창조하는가? 에 관심을 갖는 문제이다>(87). 이러한 소수적 구성과 창조는 몰적 방식이 아니라 분자적 방식으로 팽창하며 산개한다. 작은 변칙들과 계략들이 유용해진다. 구체적 맥락에서 소수 정치는 하나의 술어화된 몸체로 정지하는 법이 없다. 그것은 ‘~임(is)’의 운동이 아니라, 항상 재개되는 다양체 즉 ‘~ 그리고(and) ~’의 방식으로 운동한다. 반목적론적이며 사이존재적인 주체로서의 소수자들은 그러므로 <혼성적이고 언제나 다른 이접들과의 순열조합 관계에 개방되어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 소수정치의 특징적인 면모는 어디에서 있는가? 쏘번은 들뢰즈를 참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정치적 과정을 시작하는 것은 동시대적 문제들이며 더욱 분명한 문제들이다>(105). 다시 말해 정치적 개입의 지점은 어떤 거대담론에의 참여나 역사적 논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일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소수정치는 줄곧 교조에 빠져 굴락과 수용소로 근근이 버틸 수밖에 없던 상황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하나의 맥락, 현실적 개입이 중요하다. 그것이 동성애 문제이건, 이주 노동의 문제이건 자본이 포획하려 하지만 좀체 걸려들지 않는 취약한 지점이 먼저다. 따라서 소수정치는 상당할 정도로 <실리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실리적인 과정은 그러나 손익계산식의 고립된 단순작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의 포획망을 성공적으로 탈주한 소수정치의 선은 교전의 책략들을 발휘하면서 다른 탈주선들과 조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쏘번이 말하는 소수정치의 두 번째 면모다. 이때 맑스의 ‘모순’ 개념은 전진적으로 대체된다. <들뢰즈와 가따리는 종종 ‘모순’의 우선성에 대한 맑스주의의 긍정과는 달리 탈주선의 우선성을 제시한다>(106). 그러나 이것이 맑스의 개념을 폐기하는 것은 아니다. ‘탈주’는 ‘모순’ 개념 이전에 규정력을 가지는 개념으로 제시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란 <탈주선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매우 변형적인 사회체제>이며, 그것의 본질은 <착취의 새로운 영토를 열어젖히기 위해서, 그것이 지속적으로 그것의 탈주선들…을 해방시>키는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107). 그러므로 소수정치는 ‘해방의 기획’이라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보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탈영토화와 탈주들에 <달라붙어>, 그것을 더 멀리까지 가져가는 것이며, 이때 코뮤니즘은 ‘획득’의 관점에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공명’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하나의 소수적 형상으로서 자본주의적 탈주선 그리고 자신과 조우하는 삶의 탈주선과 교전하는 하나의 계급구성양식이며 코뮤니즘은 이러한 <교전의 양식과 스타일의 수준에서 작동>하게 된다(109).

 

여기서 고전적인 문제 하나가 등장한다. ‘당’의 문제가 그것이다. 쏘번에 의하면 맑스는 당을 <특수한 역사적 경험들과 운동들을 통해 발전하는 일단의 경험, 실천 그리고 지식이 발전해 나오며, 이와 동시에 특수한 경험을 초월하고 또 이 운동들의 여러 측면들에 비판적 태세를 유지할 수 있는 한편, 특정 순간들에는 투쟁의 촉진자로 작동하고 있는 그러한 평면>으로 이해했다(133). 여기서 쏘번이 방점을 두는 것은 ‘비판적 태세’라는 테제다. 당은 자본의 갇힌 공간 안에서 끊임없이 계열들을 발산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당이 가지고 있는 레닌주의적 모델에 균열을 가져온다. 레닌주의 모델은 점차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활력을 흡수하면서 그 기관들을 잠식한다. 활력을 상실한 당은 암적이다. 그러나, 비판적 태세는 어떤 아나키적 심성을 유지하면서, 당을 장악하고 있는 ‘중앙위원회’의 분자화를 획책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당을 때 이른 죽음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투쟁주기 안에서 기능을 마친 당은 이러한 소수정치의 작은 계략들에 의해, 그렇지 않을 경우에 자본으로부터 면역력을 상실하게 되는 지경에까지 타락하지 않고 다음 전략적 변모를 꾀할 수 있기조차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소수정치는 자기비판의 기능을 넘어서는 적극적인 ‘실험’의 장이 될 수 있다. 논쟁과 책략은 이 실험을 하나의 목적으로 이끄는데 치중하기보다 들끊는 교전의 장으로 만든다. 여기서 주체는 ‘중앙’이라는 검은 구멍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가면서 소멸된다. 주변을 떠도는 특이한 정동들과 탈주선들은 교전 속에서 고착되지 않고 갱신되는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대지’의 호출 속에서 ‘누구나/모든-것 되기’로 바꾸려고 하>는 들뢰즈의 맑스주의라고 쏘번은 강조한다(143).

 

노동의 문제는 이 교전 상황에서 관건적이다. 이제 그 누구도 ‘노동’에 의해 스스로를 결정화하지 않는다. 노동은 인간주체의 자본주의적 본성이기를 그친다. 노동은 처음부터 이중적이다. <노동이, 확장적이고 변이하는 사회적 유기체 속에 병합됨에 따라, 인간이 탈영토화하는 방식이라면, 그것은 동시에 자본의 재영토화하고 재코드화하는 메커니즘이다. 즉 그것은, 다양한 관계들이 … ‘노동자’라는 몰적 형태로 변환되어 잉여가치의 추출을 가능케 하는 메커니즘이다>(167). 따라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은 자본주의 공간의 산물일 뿐 <미리 주어진 동일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자와 동일할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소수정치가 자본의 기능적 착취 메커니즘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이라는 인위적인 규정성을 벗어버려야 한다. 노동거부. 쏘번은 이 주제를  룸펜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그 특유의 분석을 거쳐 이탈리아 오뻬라이스모 그룹의 이론으로부터 가져온다.

 

노동거부를 통해 적극적으로 교전하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이라는 규정으로부터 자유롭다. 다시 말해 그의 정동과 지성은 중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를 쏘번은 <이름 붙일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트>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주체규정이 맑시즘의 먼 외곽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민중이 없는 ‘갇힌 상황’에서 스스로의 이름을 삭제하길 바란다. 맑스가 예견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바로 이런 모습이다. 자기폐지운동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사실상 프롤레타리아트의 비밀을 이와 같다. 역사적 책무라는 소화불량에 걸린 프롤레타리아트는 소멸을 꿈꾸기보다 자기유지에 더 많은 에너지를 낭비할 것이다. 그러나 실천이란 혁명적일수록 더 가벼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동일성의 유기체로 굳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실천이란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이 노동거부는 그러므로 단지 일단의 실천들로서만 이해되지 말아야 하며 노동 속의 어떤 충만함 또는 노동 속의 주체에 대한 거부의 메커니즘으로서, 노동과 그것의 동일성에 대항하는 지속적 교전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307). ‘지속적 교전’으로 구성되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때 <추상적 강령>의 수준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거부를 통한 <구성의 양식>을 자신의 책략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는 ‘구성의 양식’이라는 특유한 규정에 프롤레타리아 지식인 집단의 오래된 헤게모니가 파열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은 레닌주의 조직화 모델의 비판이기도 하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상화하고 일군의 전위집단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되기’를 정당화하는 방식은 ‘구성’이라는 관점에서는 폐기되어 마땅한 것이다. 계급은 이때 어떤 매개나 ‘교육’ 따위를 거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계급구성은 결정적으로 어떤 사물을 지시하지 않고, … 하나의 구성 과정 혹은 구성 양식을 지시한다>(315). 대자 계급으로의 발전행정은 구성 과정 상 하나의 사소한 변화일 뿐이며 일률적으로 적용되지도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박제화된 자본주의적 주체임을 그침과 동시에 자기구성을 개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한 전통적인 모델이 붕괴한다. 즉 자본형성을 중심으로 두고 투쟁과 역사를 바라보는 교조적 유물론의 관점이 그것이다. 이 모델이 붕괴하면 관점은 극적으로 역전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주기가 자본의 대응을 야기하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쏘번은 이러한 관점의 역전과 계급구성론을 소수정치와 자율주의의 핵심적인 두 항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계급구성 모델과 관점의 역전의 모델은, 체제의 핵심에 불안정성을 놓음으로서, 그리고 정치적 발명, 연합, 그리고 저항의 메커니즘과 장소들을 지속적으로 발견할 필요를 강조함으로써, 이것들을 시간초월적인 프롤레타리아적 실천들로 제시함이 없이, 자본주의 동학과 정치(학)에 대한 어떠한 객관주의적 해석도 깨뜨리는 이점을 갖고 있다. 투쟁이 당대의 자본주의적 공리계와 동력학, 그리고 그것들의 탈영토화 과정과의 교전을 통해 출현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에서, 그것은 구성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적 생각이다>(317).

 

이와 같이 쏘번은 들뢰즈와 오뻬라이스모를 경유하여 소수정치의 가능성을 ‘교전’과 ‘갇힌 공간’이라는 테제 안에 압축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정치(학)에 있어서 이론이란 하나의 삶 속에 펼쳐지는 교전의 한 양상일 뿐 모든 것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책의 말미에 이르러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확실한 색채를 띠면서 다가온다. 그것은 네그리와 하트도 다른 맥락에서 사용한 것이다. 기쁨의 정동. 정치(학)은 결론적으로 이 정동의 개발에 대한 스피노자적 관심과 실천을 필연적으로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쏘번은 네그리, 하트가 가지고 있는 충만한 낙관주의보다 P. 비르노가 가지는 조심스러운 전망에 더 가까워 보인다. <소수정치(학)은 갇힌 공간, 작은 계략, 그리고 내밀한 탈영토화의 과정인 동시에 ‘새로운 대지’와 ‘도래할 민중’을 불러내는 일종의 ‘불가능한’ 기획이다. … 즉 정치를 ‘부재하는’ 민중의 극들과 ‘새로운 대지’ 사이에 위치시킴으로써, 소수정치(학)은 그것의 불완전성, 그것의 어려움들, 그리고 그것의 ‘불가능성들’과 더불어 살 수 있고 또 심지어 그것에 의해 키워질 수 있는 정서적 조건을 발전시키기 위해 애쓴다. 그것은 하나의 환경으로, 즉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는 베케트의 명령이 삶의 긍정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환경으로 발전한다>(395).

 

한 가지 부언. 쏘번의 이 책에서 우리는 앞서 밝힌 그의 소수정치에 대한 활달한 이론뿐만 아니라 네그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도 주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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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기계 비판 아우또노미아총서 6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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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을 수반하지 않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전제(專制)의 시작이거나 반복되는 검열과 감시의 히스테리일 뿐이다. 그래서 맑스가 『선언』을 기초할 때 들었던 그 <조종(弔鐘)소리>는 전세계 부르주아들에게는 공포의 시작이었지만 막 성장하던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유쾌한 사티로스극의 서막을 알리는 웃음소리였다. 전율과 폭소, 전복과 전유의 기쁨은 세계가 한 순환을 마감했음을 의미하는 공통의 악보 위에 기입되는 음표들이다. 거기서 형성되는 긴장과 굴절된 음들의 기묘한 조합들이 세계사적 사건들을 일의성의 지반 위에 펼쳐 놓는다.

 

부르주아들은 이 경쾌한 리토르넬로를 견디지 못한다. 기계가 멈추고 지층이 파열되는 순간, 무대는 거대한 하나의 사건으로 가득 메워지고, 들끓고, 기민해지며, 조우하는 힘들이 하나 낭비됨이 없이 자기가치화의 역능에 이르기까지 고양된다. 혁명, 하나의 삶.

조정환의 『제국기계비판』은 이 삶의 기록이며 악보다. 넓게는 제국의 심장부에서 라깐돈 정글, 좁게는 한반도와 주변국들에 이르기까지 빠르게 또는 느리게 이동하는 다중들의 리듬을 따라간다. 조정환은 이러한 <지적 모험>을 이미 그의 다른 저서 『아우또노미아』에서 밝힌바 있다. ‘버츄얼리즘’(virtualism). 이것은 실재와 가까우면서도 가상과 일정한 힘을 공유하는 다중의 덕 윤리이며 정치학을 의미한다. <virtual은 virtue와 마찬가지로 ‘남자/인간’을 의미하는 라틴어 vir에서 유래하며 ‘힘’을 뜻하게 된 virtus에 그 어원을 둔다. virtual은 효과상에서 실제적이란 뜻이며 실제적 효과를 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485)  이러한 다중의 정치학과 덕 윤리는 <정보화로 나타나는 지배의 새로운 형태에 대응하고> 거기에 파열구를 낼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버츄얼리즘이 향하는 제국과 대항제국의 버츄얼리티는 맑스를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맑스가 미완으로 남겨 놓았던 정치경제학 비판의 기획 속에 이미 이 통찰이 존재한다. 따라서 네그리와 더불어 조정환은 『자본론』보다는 『그룬트리세』와 『초고』에 주목한다. <20세기 맑스주의 역사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아니 외면되어 왔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적합할 맑스의 이론들 중의 하나가 포섭(subsumption)이론이다.『그룬트리세』(Grundrisse), 『1861-1863년 경제학 초고』를 포함하는 자본론 연구 과정에서 맑스의 핵심적 관심사 중의 하나였던 포섭론은 『자본론』 서술과정에서는 제외되었다>(27)  맑스가 충분히 조심스럽게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쉽게 간과되어 버린 ‘포섭론’은 사실상 자본 운동을 중심에 놓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정치와 역능을 중심에 놓는 것이다. 『자본론』 속에서는 이 흔적이 ‘가치론’에 녹아 있다.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에 대한 맑스의 정교한 분석은 그 자체로 포섭론의 자본운동으로의 번역인 것이다. 여기서 필요노동은 잉여노동에 비해 상세히 서술되지 않지만 그 중요성은 후자를 능가한다. 필요노동은 프롤레타리아의 욕망을 대변하는 것이며 항상 잉여노동과 대립하고 그것을 위협한다. 필요노동을 극적으로 줄여가려고 시도하는 자본의 노력 속에는 자신의 생명줄과 같은 잉여가치에 대한 파괴적 과정이 숨어 있다. 그러므로 필요노동은 자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잉여가치와 이윤을 생산하기 위해  자신의 무덤을 파면서까지 줄여야 할 대상이지만 노동의 입장에서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자기가치화의 주체다. 따라서 <전자는 이룰 수 없는 모순된 꿈이지만 후자는 하나의 현실적 경향이다>(102).

 

자본의 이룰 수 없는 꿈은, 그러나 현재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것은 현실적 경향으로서의 필요노동에 대한 감시와 통제, 폭력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 제국이 기반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현실적이며 제국 그 자체는 현실에 기생하는 공허한 스펙타클일 뿐이다. 제국의 지층 아래 다중의 역능은 필요노동을 통한 자기가치화를 전복의 가능성으로 감지한다. 이때 제국은 한낱 위기의 징후이며 탈지층화를 경유해서만 완전해 질 수 있는 수동적 정념의 산물, 공포와 독재가 유일한 희망인 암적 유기체다. 다시 말해 <지구제국은 다중과의 적대를 피할 수 없으며 다중의 저항, 탈주, 구성의 운동에 의해 부단히 위기에 처한다>(146).

 

실제적 포섭의 시기에 다중의 저항에 떠밀린 자본은 위기에 처한 구성양식을 금융자본의 형태를 띤 초국적 자본의 도주선 위에 형성한다. 이 도주선은 다중의 소통과 협력을 통한 생산력에 의해 간신히 지탱되므로 주체로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하다. <자본의 생산적 기능은 끝났다. 자본은 사회적 노동협력체를 낡은 가치관계에 종속시키는 순수 권력으로 현존한다>(379). 소통과 협력의 구성을 통한 생산력 전체는 이제 다중의 수중에 떨어진다. 자본이 죽음의 도주선을 타고 떠난 자리, 수 천의 고원 위에 형성되는 이 주체성의 공명은 <사회 전체에 산포되어 있으며 그들의 생산력은 그 개별적 구성원들의 노동력의 합산으로 환원될 수 없는 특이한 협력적 생산력으로 나타난다>(220). 국가와 대의를 기반으로 하는 근대정치는 이 새로운 주체성 앞에 불필요한 잔여로 드러난다. 자본 운동의 마지막 잔여물을 쓸어버리는 전복의 활동은 <다중에 의한 공통제의 직접적 생산>을 <연합과 자치>를 통해 펼쳐낸다. 

 

이 연합과 자치의 주체성은 비물질적 노동이라는 경제적 공통항을 가진다. 비물질적 노동은 소통과 협력을 전지구적 차원으로 확대시킨다. 자본에게 잉여가치 수탈의 광범위화이기도 한 이 확대과정은 역설적으로 자본의 위기를 첨예화시키는 중요한 독립항으로 작동한다. 양적․시간적 척도로 잴 수 없는 비물질적 노동은 자본의 시공간을 왜곡시키고 거대한 구멍을 뚫어 놓는다. 자기가치화가 치명적인 이유는 이렇게 미묘한 지점에서다. 게다가 비물질적 노동을 통한 자기가치화는 다중의 공통 역능을 증대시키고 기쁨을 산출한다. <오직 가변자본으로 배치됨으로써만 가치화할 수 있었던 노동력이 이제 광범위한 소통관계 속에 포섭되면서 자기가치화의 능력을 획득하고 있는 현실은 역설적이게도, 사유화의 행위를 극히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실로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오늘날처럼 철저하고 심오한 공통성(commonality)이 구축된 적은 없었다>(445-6).

 

다중의 활력은 여기서 탄생한다. 공통성은 소통의 협력체, 비물질적 노동의 장소다. 그렇다고 해서 다중이 어떤 전체성 속으로 용해되는 것은 아니다. 전체성 속에서는 활력의 펼침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다중은 특이성들의 배치, 아상블라쥬, 혹은 별자리이다>(475). 배치와 아상블라쥬로서의 다중의 협력은 이렇게 해서 점점 언어적이고 지적인 일반지성에 접근한다. 탈근대적 역설이 발생한다. 다중의 두뇌와 몸이 이제 생산수단인 것이다. 이 생산수단은 전적으로 다중 자신의 일반지성이며 따라서 생산수단은 본원적 축적기의 폭력적 탈취 이후 처음으로 생산자와 결합된다. 주권적 정치의 조종이 울린다. <삶과 분리된 것, 삶을 대상화하는 것으로서의 주권적 정치와 삶에 내재하는 삶으로서의 정치가 하나의 장소에서 대립한다. 다중의 일상적 삶이 세계를 생산하고 혁신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주권체에 합성될 것인가(타율)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스스로를 통치할 것인가(자율)의 싸움이 벌어지는 전장으로 되는 것이다>(476-7). 실제로 코뮤니즘은 이 전장 속에서 탄생하고 지속되며, 또는 지속되어 왔다.

 

코뮤니즘의 시간 속에 다중의 주체성은 생산과 저항, 탈주로 수렴된다. 첫째, 생산이 곧 정치인 탈근대적 상황에서 생산은 바로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며 사유화가 아니다. 둘째, 생산의 공통성은 착취의 시도를 비웃는다. 기생적 욕망인 착취는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다. 공통성의 양식은 따라서 저항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셋째, 이러한 주체성의 생산은 근대적 훈육과 탈근대적 통제의 판옵티콘을 파괴하고 탈주한다. 그러므로 <생산, 저항, 탈주는 오늘날 제국을 전복하고 대항제국을 건설하는 다중의 주체적 운동의 주요한 양태들이다>(479).

그러나 다중의 운동은 국가 구성체를 향하지 않는다. 코뮤니즘은 이행이긴 하되 한 지점과 다른 지점을 잇는 방식, 하나의 파괴와 더불어 곧장 다른 하나의 전체가 탄생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주권적 구성을 탈구시키면서 현재/여기 일상에서부터 이념의 차원까지 잠재된 전복이다. 따라서 버츄얼리즘은 국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국가는 언제나 반혁명의 도구였으며 commune은 자신의 고유한 역능을 국가 체제 실험의 수단으로 양도하기를 거부한다. 자신의 역능 외부에 어떤 대상도 두지 않는 다중의 고유성이 코뮤니즘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중의 활력, 즉 코뮤니즘의 잠재성에 대한 긍정인 동시에 협력과 공통성의 무한한 자기가치화에 대한 확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긍정과 확신은 그저 잠잠하게 도래하지 않는다. 제국의 평면은 코뮤니즘의 들끓는 시물라크르들을 구획하고 재영토화한다. 따라서 <이 희망은 유토피아적이기보다는 디스토피아적이다. 왜냐하면 그 희망은 오직 비참을 강제하는 전 지구적 전쟁질서에 대항하는 길고 지루하며 고통스러운 전쟁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482).

 

삶은 항상 재개되는 혁명인 것이다. <언제나 전략에 있어서 적들에 앞서갈 것>(F. Guattari)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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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커넥션
존 라이크만 지음, 김재인 옮김 / 현실문화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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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적으로 ‘죽음’을 얘기하는 시대는 지난 것이다. 죽음 자체가 사실이고, 그것을 애도하는 것마저 심드렁해질 쯤에야 사람들은 그러한 수선스러움 따위를 망각할 수 있다. 죽은 자의 무덤 주위에 잔이나 치면서, 먼산바라기나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더 나아가 들뢰즈에게는 어떤 죽음이든지 간에 가상(Schein)과 관련이 있다. ‘형이상학의 죽음’이든 ‘주체의 죽음’이든 이것은 하나의 사유의 이미지로서 철학이 지층화되는 과정이며, 이 속에서 우리는 그것에 탈주선을 내거나, 단층을 발견함으로써 연접(connexion)을 마련할 수 있다. 그래서, 그에게 철학사는 한 철학자의 등에 붙어서 아이를 또는 괴물을 탄생시키는 작업일 수 있었던 것이다(Negotiation 1972-1990). 다시 말해, 죽음이란 재탄생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가상이다. 그러므로,  유클리드적으로 상상되는 시간이란 한 점과 그 끝 점간의 최단거리일 테지만, <그리고, ... 그리고 ...(et, ... et ... )>로 이어지는 의미의 논리 안에서 시간은 과정이며, 형이상학이든 주체든 과정의 실험 안에 놓여지는 것이다. <시간은 경첩을 벗어나 있 The time is out of joint>고 죽음과 탄생은 항상 유예된다. 억압되는 것(disjonction)과 생성하는 것(conjontion)에 대한 위엄 또는 긍정이란 그런 것이다. 초월적 공리와 정리, 증명으로 수목화된 위계에 구멍을 내기, 리좀을 접속하기. 그래서, 내재성의 판(plane)으로 초월성의 판을 대체하기. 들뢰즈의 철학이 놓여진 경험론의 지평은 따라서, 어떤 위나 아래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표면, 즉 고른판을 도주하는 탈주선과 다양체의 누승적 증식 그 자체를 가리킨다. 하여간 스피노자와 니체 그리고 루크레티우스가 일종의 야만적 역능(puissance)을 들뢰즈에게 부여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존 라이크만은 이러한 들뢰즈 사상의 풍모를 섬세하게 풀어낸다. 게다가, 이전의 들뢰즈 해설서들이 가지고 있던 일면성을 벗어나 형이상학과 논리학, 정치철학 전반에 걸쳐 훌륭한 요약을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들뢰즈 철학을 하나의 닫힌 전체성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이해야말로 들뢰즈가 항상 경계하는 바가 아니었던가. 『경험론과 주체성 Empiricism and Subjectivity』 서문에서 Boundas가 밝힌 바와 같이 들뢰즈를 읽는 가장 합당한 방법은 들뢰즈 자신이 저자들을 독해한 방식대로 읽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체적 체계가 아니라 부분들과 특이성(singularity)들의 계열로서 들뢰즈를 독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들뢰즈가 구사하는 개념의 한갓 내포만을 엄정하게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그 개념이 어떤 창조적 발산을 수행하는지, 다른 개념들과 어떻게 조우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이른바, 개념의 근방역을 살핀다는 것은 이런 것을 의미한다. 애매한 부분, 그리고 불명확하지만 봉쇄되지 않은 개념으로서의 그 ‘사건’을 들뢰즈와 함께 사유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 책의 저자와 더불어 <항상 어떤 특이점에서 다른 특이점으로 옮겨 가서 그것을 다시 다른 것과 연결 접속시키는 일을 벌이게 되는 한계 없는 판(plane)을 선택하면서 조직이나 발전이라는 통일된 계획(plan)을 단념하게 된다. …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이 책은 철학하기의 방법이라는 보다 큰 물음에 접근하고자 한다>(22) 이때, 철학하기는 어떤 전문가 집단을 겨냥하는 말이 아니다. 들뢰즈 자신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철학은 항상 비철학자들에 의해 더 잘 이해되어 온 것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었던 암스테르담의 한 노동자처럼 개념의 직조를 이해하는 것은 차라리 어떤 식의 법칙과 지긋지긋한 동일성의 반복에 익숙하지 않은 비철학자, 노동자, 예술가들이 더 나은 것이다. 정말 나쁜 버릇은 종합하고, 회상하면서, 책 위에 책을 얹고 개념 안에 개념을 포개 놓는 짓이다.

 

이렇게 해서 경험론이 시작된다. 칸트는 흄의 일부를 이어받아 흄의 야만성을 길들였지만, 들뢰즈는 그것을 끝까지 밀어 붙인다. 칸트가 달아났던 초월적 자아라는 지점은 비록 데카르트적 자아(res cogitans)의 실체성을 탈각하고 있지만, 도덕법칙과 자유의 문제에 이르러 절대화된다. 그것은 구성과 입법을 행하는 판관으로서의 주체를 필연적으로 형성한다. 이미 주어진 선험적 범주와 실천이성과 이론이성 간의 조화로운 공통감을 떠받치는 것은 주체의 초월적 조건들이다. 그러나 그 조건들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흄에게 그것은 <일종의 믿음이나 신뢰, 다시 말해 세계에 대한 믿음(belief-in-the-world)이다>(25). 들뢰즈는 우리가 잃어 버린 것은 형이상학이나 주체가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이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경험주의는 세계, 또는 내재성과 삶을 되찾아야 하며, 철학은 어떤 <부재하는 자리>(Lacan)나 오이디푸스 삼각형이 아니라 (푸코를 따라) <바깥>을 사유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직 모든 것이 너무 신성하다>.

 

이 내재성의 판 안에서 철학은 개념을 창조하고 발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계열이며, 전체성이 아니다. 흄은 하나의 개별적 이념이 아니라 그 이념과 개념들의 관계를 중요시했다는 것이 들뢰즈의 진단이다. 즉 <이 관계들은, 각 구성요소들이 퍼즐조각처럼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직 시멘트로 마감하지 않은 벽 안에 있는 갖가지 돌처럼 맞추어진 구성물 속에 있>는 것이다(53). 하나의 조각에서 다른 조각으로 움직이는 것이 바로 경험론의 작동원칙이며, 유목적 경험론이다.

 

이렇게 하면서, 들뢰즈는 어떤 사유의 모습을 일구어 내는 것인가? 하나의 실험, 즉 그것은 굳어진 시멘트처럼 결과가 뻔한 어떤 것이 아니라, <개념들의 창조 및 개념들과 장차 도래할 것의 관계에 대한 암묵적 전제>를 밝혀내고 그것을 따라 가는 것이다(70). <사유의 이미지>란 이런 것을 말한다. 하지만, 사유의 이미지를 밝히는 작업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각각의 철학 내에서 <초월성의 안개를 걷어치우고자 하며, 각 철학의 “창조”에 있는 독창성의 계기들을 다시 설립하고자> 하는 것이다(74). 이렇게 해서 사유의 이미지는 어떤 방식의 비난이나 원한(ressentiment)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된다. 모든 철학은 창조적인 계기, 개념을 가지고 있다. 플라톤에게서 그것은 이데아와 형상이며, 그것이 어떤 슬픈 정념을 일으키는가 하는 것은 그 다음으로 (그러나, 결정적으로) 고려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유의 이미지를 탐구하는 것은 어떤 내적인 논리를 요구한다. 『의미의 논리 Logique du sens』는 그러한 요구를 위해 씌여진 책이다. 여기서 들뢰즈가 바라보는 것은 진리 문제 이전의 문제 즉, 의미의 문제다. 의미는 어떤 식의 동일성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거나, 대상과 개념의 일치의 문제가 더 이상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재인지와 재현의 가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가상이란 <사유 안의 문제들은 전제로 간주되는 다른 명제들에서 도출된 명제들에 의해 일거에 해결될 수 있는 종류의 물음들로 환원된다>는 식이다(97). 경험론의 입장에서 이것은 거의 농담에 가까워 보인다. 명제진리의 문제는 의미와 사건의 논리보다 앞서지 않는다. 들뢰즈에 의하면, 이러한 의미와 사건의 논리는 바로 <다양체의 논리>다. 이것은 동일성 보다 차이를, 일반성보다 보편성을, 특수성보다 하나의 특이성을 겨냥하는 것이다. 사유는 명제의 진리치에 속하지 않는 가상(simulacre)들을 몰아내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의식에 폭력을 행사하는 그 가상으로서의 기호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은 차이며, 복잡화하는 것이며, 또한 명석애매한 것이다. 이것은 ‘존재’(einai)라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적 관념을 길게 늘인다. 하나의 보편적 술어로서 기능하는 이 언표는 하이데거식으로 말해지지도 않고, 그저, <차이가 있다>라고 말해진다. 그런데, 이때, ‘있다’는 것은 일종의 잠재성(potentiality)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차이는 반복을 통해 흘러나오지만, 그것은 어떤 심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표면의 작업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숨어있으면서 현실화를 기다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가능태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인 것 자체이며, 재현되지 않고 사건으로 경험되는 것이며, 늘 우리 주위를 감싸고 도는 것이다.

 

그래서, <다양체는 단지 논리적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 실천학적 문제이기도 하다. … “다양 그것을 만들어야만 한다”>(143). 이것은 따라서, 삶의 문제다. 들뢰즈가 생의 마지막까지 바라보았던 그 내재성으로서의 삶, 하나의 삶(UNE VIE) 말이다. 다양체로서의 삶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 이 다양체를 형성할 것인가라는 관건적인 문제에 달려 있다. 하여간, 지금까지의 자아(ego, cogito)는 흔적조차 없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계급적 함의조차 희미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비난해 마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들뢰즈는 계급이라는 이항성 속에 당적 대표체로서 삶을 상정하는 그 재현적 태도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68을 회상하자면 이러한 들뢰즈의 반대는 맑스에 있기보다 CGT나 PCF에 혐의를 두는 것이다. 계급이란 차후의 일이다. 그 전에 <우리는 일종의 불특정한 군중 또는 “다중”을 구성한다>(146). 다중으로서의 계급은 이렇게 해서 자신의 동일성을 떨쳐내고, 항상 차이와 놀이하며 자신을 긍정하고, 시공간 안에 새로운 배치물들을 창조함으로써 역능을 최대한도로 펼쳐낼 수 있다. 즉, 그것은 <“또 다른 정치, 또 다른 개체화, 또 다른 시간”>이다.

 

정치가 예술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은 이런 것을 의미한다. 앙드레 브르통이라면, 아방가르드의 수뇌부를 구성하고 선언문을 낭독할 테지만, 들뢰즈에게 그것은 헛된 것이다. 다양체의 창조는 그러한 수목적이고 종속적 이미지로는 턱도 없다. 문제는 그러한 위계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과 예술이 각각의 운동 안에서 서로를 부르는 것, 또는 천 개의 고원 위에서 서로를 공명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 가능성을 영화에서 찾는다. 전쟁 전과 후를 나누면서, 또는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를 분할하면서, 그는 영화와 철학이 서로의 속을 관음하는 관계가 아니라, 그 속에서 서로를 부르는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 영화에 관계하는 소수자를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전후에 가능해진다. 그런데, 이때 영화가 맞서게 되는 것은 바로 매체라는 적이다. 매체가 가지는 가공할만한 힘은 그것이 하나나 여럿의 코드들을 가지고 이미 형성된 것으로 간주된 대중과 행위자들을 묶어 낸다는 것이다. 덧코드화라 불리우는 방식은 따라서, 자본의 포획과 연접되었을때 죽음의 도주선으로 다양체를 인도하게 된다. 이러한 포획을 파괴하거나 피해가기 위해서는 이미 존재한다고 간주된 그 대상의 대상화 양식 속에 다중과 다양체가 끌려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것은 코드를 거부하고,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이다. 클레의 금언처럼 <“우리가 이미 볼 수 있는 것을 재생산하지 말고,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만들라”>는 것 말이다(210).

 

들뢰즈가 철학자라면 또는 시인이나 아리아드네를 사랑하는 디오니소스라면, 우리는 이와 같은 철학을 어떻게 긍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그는 철학이라고 불리웠던 그 모든 회색빛 개념들을 창조의 활력과 연접함으로써 어떤 다른 것, 규정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남한 사회에 들뢰즈라는 유령이 출몰하고 다니는 것을 그토록 경외하거나 질투하는 것은 세간의 소문처럼 그것이 단지 유행처럼 흘러 갈 것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그 유령의 웃음소리가 우리의 고막을 찢을만치 광범위하면서 날카롭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하나의 소리, 즉 일의성(univocal)의 소리, ‘삶’이라는 단 하나의 음성일 뿐이다. 판관이 죽고 실험가가 살아있다는 것이야말로 이 삶에게는 어쩌면 하나의 축복이다. 그래서, 세계를 믿고 삶과 그 운명을 사랑하는 것은 많은 선별과 투쟁을 요하지만, 또한 그보다 더한 유쾌함과 웃음을 담고 있다. 저자인 존 라이크만이 말하고 있다시피, <모든 문제는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기 때문이다(239).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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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시골 가서 살래? - 시인과 딸의 2년간의 소풍
전남진 지음 / 좋은생각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홍대근처 맥주집에서 시인을 오랜만에 만났다. 변하지 않는 사람. 손을 끌어 당겨 쥐며 웃는 모습을 보며 필자는 한참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은 듯 기뻤다. 전남진 시인은 그런 사람이다. 사람들이 무심코 또는 고의로 잃어버렸던 것들을 불러내는 사람. 그래서, 그가 쓴 글들은 한사코 우리의 뒤를 돌아보게 만들고, 애잔하게 하고, 또 소녀처럼 수줍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회상들과 처연함들 안에는 튼튼한 기쁨이 있다. 시인으로서, 남편으로서, 또 딸 다온이의 아빠로서 그는 한세상을 풍요롭게 사는 법과 그 신념을 일찌감치 알아버린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푸른 청춘을 꼬박 시(詩)에 바치고 또, 10년 간의 직장생활을 접고 산골 고향에 손수 흙집을 짓겠다고 나섰을 때에도 그는 이 신념을 의심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가 있다. 이 아이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그래, 우리는 도대체 충분히 이런 고민을 하고 사는 것인가? 기껏, 결론이란 게, 좋은 학교를 따라 위장전입을 하고, 조기교육을 위해 어린 것들을 생면부지의 외국 땅에 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별 가능성도 없는 입시전쟁터로 내모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아이들이 또한 선택하는 건 뭔가? 가슴에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울분을 삭이기 위해 밤거리를 나서고, 범죄를 저지르고, 마침내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목을 매고. 그들이 약해서라고?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한번이라도, 그 아이들을 자연과 더불어 자유롭게 한 적이 있었던가?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은 그래서 아이들을 죽인 바로 그 범인들이다.

 

우리는 전남진 시인의 책을 통해서 참으로 단 한번만이라도 아이들을 위해 뭘 해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결심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결심은 아이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누천년이 지나도 자연은 여전히 우리 어머니기 때문이다.  

서른넷에 딸을 얻어 아이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별을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 아이와 헤어지겠지. 만남의 기쁨은 이별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야 하리. 나와 아내의 의지로 세상에 나온 저 아이가 부디 세상을 아름답게 살기를. 곳간에 쌓는 곡식보다 마음에 쌓는 곡식이 많았으면, 자신의 꿈을 세상에서 이루려 하지 않고 마음에 이루었으면 좋으리라. … 마음의 재산,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타인을 소중히 여기며, 더 많이 가지기 위해 타인과 경쟁하기보다 많이 가진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진정한 재산이란 마음에 쌓인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내가 아이에게 바라는 이러한 심성은 결국 자연에서 배운다고 믿는다(9)

 

그래서, 시인이 딸 다온이와 함께 사는 산골 흙집에는 자잘한 걱정에서부터 큰 일까지 모든 것이 배움이고 또 그 배움으로부터 오는 기쁨이다. 흙집 앞 마당에는 ‘진돌이’가 있고, ‘삐약이네 가족들’이 종종거리고, 오리가 강아지 뒤를 뛰어 다닌다. 사계절 내내 산골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식물과 곤충들과 작은 동물들이 널려 있다. 읍네에 장이 서면, 다온이는 아빠보다 앞서 뛰어 다니며 까르르 웃는다. 때로, 시무룩해지기도 하는 아이. 그래도, 풍요로운 자연은 아이를 슬픔에 깊이 빠져들도록 그저 내버려 두지 않는다. 눈길을 끄는 다른 것들이 많으니까, 다온이는 또 금새 즐거워지는 것이다.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그래서, 항상 넉넉하다. 그 슬픔조차 말이다.

 저녁 즈음 졸던 두 마리 중에서 결국 한 마리가 죽었다. … 이제 남은 것은 저 병아리를 다온이 마음에 잘 묻어주는 일이리라.

“아빠 병아리가 왜 여기서 자는 거야?”

“지금 병아리는 천사님을 기다리는 거야.”

“아빠 천사님이 내려와 병아리를 하늘나라에 데리고 올라가? 왜?”

“저 병아리는 지금 병이 들어서 천사님이 고쳐주러 하늘나라에 데리고 가는 거야.”

“그럼 저 병아리는 하늘나라에 가서 사는 거야?”

“그럼, 이제 저 병아리는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살 거야.”(81)

천진한 아이와 그 질문에 하나하나 마음을 쓰는 아빠의 대화라는 건 이런 게 아니겠는가. 그리고, 아이는 자연 안에서 모든 것을 자연스레 배운다. 삶도 죽음도 그리고, 슬픔이나 기쁨 같은 것도 그저 무난한 순리며 영원하지 않지만, 또 마냥 소멸해 지나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지혜가 아이의 가슴에 새겨지는 순간인 거다.


 뛰어온 아이의 한 손엔 작은 책, 다른 손엔 꽃이 들려 있었다. 아이는 무언가 대단한 것을 알아낸 듯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아이를 안고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아빠, 이것 봐. 내가 책에 있는 꽃을 찾았어! 봐, 똑같지?”

아닌 게 아니라 아이는 정말 책에 있는 것과 같은 꽃을 들고 있었다. 아이는 그것을 찾아냈다는 기쁨에 자랑을 하러 내게 달려온 것이다. (147-8)

시인과 딸아이의 이야기는 이렇게 하루 해가 뉘엿거릴 때까지, 그리고 한 해가 저물고 다른 해가 올 때까지 이어진다. 산골마을 할머니들, 흙집 작은 창으로 날아드는 새와 겨울 밤 장작을 불 속에 던지며 사념에 잠기는 아빠와, 단잠을 자는 아이. 오래된 친구를 찾아 읍내로 가는 아빠 손목을 잡고 마냥 즐거운 아이. 시인은 이 모든 것들을 책 속에, 80여장의 정겨운 사진과 함께  담아 내고 있다. 글과 사진들을 보며 마음이 그토록 따뜻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보는 동안 독자도 또한 그 이야기와 사진 한 켠에 자신이 어색하지만, 소박하게 웃고 서 있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예쁘고 소박한 마음 그리고 크진 않지만 견실한 결심으로 그가 선택한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시인 자신은 알고 있을까? 그러나,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소중한 딸 다온이가 이 두 해 간의 생활을 내내 가슴에 지니고 살아 간다면, 그래서,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아 가는 지혜로 그것이 발효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아니, 이미 다온이는 삶의 정수를 짐짓 깨닫고 있는 지도 모르는 일이다. 무릇 아이의 마음은 청명해서, 삶도 죽음도 한갓이기 때문이며, 그 깨달음이 곧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아이가 어른들에게 문득 스승인 것이다. 


혹시 「플랜더스의 개」가 슬퍼지면 그때부터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닐까. 「과거는 흘러갔다」가 슬퍼지면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닐까. 비운 잔에 다온이가 어느새 맥주를 따라놓았다. 아빠가 술을 마시는 것이 좋은 모양이다. 술만 마시면 노래를 불러주니 좋은 모양이다. 나는 아이가 따라놓은 술을 마시고 다시 노래 책을 뒤적거렸다.

“아빠,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응?”

“술 너무 많이 마시면 죽는단 말야, 아빠 죽는 거 싫단 말야.”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아이가 죽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말인가.(165)

아이는 이제 ‘삶의 틀’을 갖춘 게다. 게다가, 그것은 그 어떤 것보다 넉넉한 자연의 틀이다. 평생을 견디는 힘이 거기에 있는 게다.

 

책을 덮으며, 가느다란 웃음이 나온다. 쾌활한 아이와 그 자연이 까르르까르르 마음속에 잔물결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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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리쾨르의 철학
윤성우 지음 / 철학과현실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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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리쾨르는 낭떼르 대학의 성난 학생들로부터 쓰레기통을 뒤집어쓰는 수모를 겪는다. 이것은 하나의 헤프닝이지만, <그 당시에도 좌파였고 지금도 좌파인 리쾨르>(225)의 면모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해 주는 사건임에도 틀림없어 보인다. 일군의 아나키스트들과 마오주의자들의 눈에 리쾨르의 <상호성>과 <자기성>이란 단지 혁명적 상황을 끝없는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 유예하고 무력화하는 반동적 계기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리쾨르가 어떤 답변을 마련하는지 우리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혁명적 상황에서 하버마스와 더불어 별난 형이상학자 정도로 치부되었으며, 그러한 결과 그의 철학전체가 정치적으로 폄훼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사실일 지도 모른다. 철학이 온건한 시기에 명제와 그것의 진리치를 가늠하면서 연구실의 마호가니 책상 위에서 꿈꾼다면, 이러한 격변의 시기를 거치면서 어째서 그 꿈이 평가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의 정치적 정체성이 소위 말하는 ‘기독교 좌파’라면, 그 레떼르에 부합하는 철학을 펼쳐 내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가 쓰레기통을 뒤집어썼든, 그 시기에 <구식(舊式)의 왕관을 쓰고 다니는 철학자>(225)로 낙인찍혔든,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팩트일 뿐만 아니라, 그 철학의 진의다.

이 책의 저자 윤성우가 일률적으로 우리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리쾨르를 탐구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도, 저자는 리쾨르의 정치적 성향을 충분히 숙고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철학에서 학생과 급진좌파그룹들은 리쾨르보다 푸코와 들뢰즈를 더 선호했다. 그러나, 그것이, 다시 말해, 그 사실이 푸코와 들뢰즈의 철학의 우위를 증명하는 것인가? 도대체 철학이 역사에 대해 어떤 빚이 있기에 역사는 철학으로 하여금 출생증명을 작성하게 하는 것인가? 시대의 적자를 증명하는 것이 철학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들뢰즈가 말했다시피, 철학은 그 시대를 반하는 것도, 순응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거스르는 것이다. 저자가 리쾨르를 보는 시각은 그래서, 다른 방식이다.

 리쾨르는 그때의 학생들에게는 너무도 온건한 좌파였는지 모른다. 철학적 스펙트럼 위에서 급진 좌파에 해당하는 포스트 근대주의자들에 비하자면 리쾨르는 포스트 근대를 살지만 여전히 근대와 총체적으로 결별하지 못하는 너무 점잖은 포스트 근대주의자일 것이다. 그러나 근대 철학과 포스트 근대 철학 사이의 지나친 단절과, 후자에 의한 전자의 공격이 반드시 온당하다고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리쾨르가 보여준 행로는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유의 혁명성과 경쾌함에 사유의 중후함과 원숙함이 비스듬히 맞서 있다.(225)

포스트 근대와 근대 사이의 경계를 걸어가는 철학자로서의 리쾨르는 <사유의 혁명성과 경쾌함에 사유의 중후함과 원숙함이 비스듬히 맞서> 있는 철학을 전개한다고 저자는 본다. 왜 그런가? 그것은 리쾨르의 ‘주체사유’와 관계가 있다. 리쾨르에게 포스트모던의 악동들이 저지르는 주체 살해의 잔혹극은 왠지 떨떠름하다. 어째서 주체가 죽었다고 얘기하면서 ‘타자’를 고려해 넣지 않느냐는 것이다. 리쾨르에게 타자는 이때, 바로 <책임성>의 주체를 떠맡기는 <배려>의 대상이다. 만약 우리가 주체를 살해하고 그 자리에 끊임없는 생성과 무원칙한 도덕성을 채워 넣는다면, 사실상 모든 윤리는 불가능하다. 리쾨르는 학생들에게 이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긴 세상의 모든 젊은 것들은 과격하며, 또한 그러해야 마땅하다. 고정된 주체의 실체성이란 가장 먼저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리쾨르는 고개를 주억거릴 것이다. 바로 여기서 일컫는 폐기될 주체란 ‘자체 동일성’을 가지 주체다. <결국 자체동일성과 자기동일성의 이런 구분은 더 이상 (인간) 주체라는 범주에 근세의 철학이 부여한 불변의 실체성만 고집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205) 저자는 이러한 주체의 이분화가 리쾨르의 가장 뛰어난 발견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리쾨르의 자기 동일성은 어디서 확보되는가? 아마, 이 지점이 가장 미묘할 것이다. 먼저 리쾨르에게 <자기(the self)>는 데카르트적 실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때 데카르트의 철학은 ‘의식의 철학’이며, ‘반성의 철학’이 될 수 없다.

반성철학은, 리쾨르의 새로운 정의에 따르면 “의식의 철학 - 이 ‘의식’이라는 말을 자기-자신에 대한 직접적 의식을 의미한다면 - 이 아니며”[DIF, 51], “직접적인 것의 철학(une philosophie de l'immediat)”이 아니다. 오히려 “반성은 하나의 해석학”[62]이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주체의 자기 파악이나 자기 이해가 더 이상 매개를 거치지 않는 - 이런 의미에서 직접적인(im-mediat) - 것이 아니라, 주체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자신을 드러낸 언어적 표현물들과 그에 대해 해석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언어적 표현물들이 리쾨르에게는 다양한 인간활동 영역에서 드러나는 상징들이었고, 언어의 의미 창발적 형태로서의 담화와 살아 있는 은유였고, 이야기로서의 텍스트다.(73)

다시 말해, 반성의 철학은 상징과 담화와 은유 그리고 텍스트들에 대한 해석을 ‘우회’하는 철학적 방법론을 말함이다. 이때, 주체의 자기 이해는 직접적이지 않고 매개적이다. 직접적 자기의식은 공허하다. 그러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펼쳐지는 인간활동의 면면들을 파악하는 ‘자기’는 이러한 공허함을 넘어선다. 우리는 리쾨르의 실천적 면모가 여기에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혁명적인가? 우리는 여기에 대한 답변을 좀 미루어 두자. 이 답변에 다가가기 전에 저자는 리쾨르의 윤리학을 설명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배려의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타자에 대한 배려와 자기존중이 종합되는 지점에 리쾨르 윤리학의 위상이 놓인다. 그런데, 이러한 타자에의 배려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자기 존중의 강도가 상쇄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 자신의 ‘좋은 삶’을 생각하면서, 그 길로 끊임없이 매진하면서, 인간의 욕망이 과연 타자의 배려라는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한없이 유약한 시도가 아닌가? 곧 우리는 저자가 리쾨르를 비판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접할 수 있다.

배려의 구체적 형태가 우정이든, 헤겔 식의 인정이든, 연민이나 공감이든, 이 배려는 온전한 자기 존중과 같은 뿌리를 가진 배려이므로 온전하지 않고, 이미 타자로부터 상처받은, 이미 피해와 희생의 흔적을 가진 자기가 어떻게 타자에 대한 배려로 (자기 존중을 통해 그리고 자기 존중을 가지고) 동시적으로 나갈 수 있는지 말하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또한 타자와의 관계가 “좋은 삶의 지향”이라는 윤리적 맥락 속에서는 관심과 배려로 제시되지만, 현실적 맥락에서는 가벼운 폭력에서 심지어는 (타자의) 자기 존중과 자기의 행위 능력의 무화로 이어지는 살인에까지 확대되기에 이제 더 이상 윤리적 지향이 아니라 칸트적인 의미의 도덕적 금지, 규범, 당위가 개입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240)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와 칸트의 의무론적 도덕을 전자 쪽의 ‘좋은 삶의 지향’이라는 개념 하에 종합하려고 했던 리쾨르의 원대한 시도는 저자가 보기에 그 반대의 측면에서 더 타당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극단적인 상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윤리의 지향은 칸트의 의무에 대한 존경심으로 완전히 교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리쾨르가 의무의 충돌이 일어날 경우 반드시 ‘좋은 삶’의 윤리적 지향에 의존해서 충돌을 해결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테제와는 반대의 방향이다. 재미있는 비유를 들자면, 리꾀르가 만약 저자인 윤성우의 입장대로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면, 선생에 대한 의무를 좀 더 확고하게 지켜 냈거나, 최소한 자신의 의무에 거스르는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거다. 어쨌든 68은 ‘의무’가 아니라 ‘좋은 삶’을 지향하는 좌파들의 꿈을 대변하는 것이지 않은가 말이다. 아니면, 학생들은 리쾨르의 또다른 테제로서 윤리가 항상 ‘규범의 체’를 통과해서 시험받아야 한다는 것을 잠시 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리쾨르의 윤리학에서 ‘좋은 삶’ 그리고 ‘의무’가 종합되며, 주체철학에서 자기자체와 자기자신이 종합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다만, 이것은 철학적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을 단서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인데, 왜냐하면, 좋은 삶은 의무들의 갈등을 해석하는 와중에 항상 유예되며, 자기성은 텍스트와 상징 해석의 지평이 넓어질수록 그 성취가 유예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이 책을 보면서 리쾨르가 추구한 철학적 이념이 봉착한 하나의 아포리, 즉 실천적 유약함이라는 슬픈 테제를 받아 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Noam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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