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빠랑 시골 가서 살래? - 시인과 딸의 2년간의 소풍
전남진 지음 / 좋은생각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홍대근처 맥주집에서 시인을 오랜만에 만났다. 변하지 않는 사람. 손을 끌어 당겨 쥐며 웃는 모습을 보며 필자는 한참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은 듯 기뻤다. 전남진 시인은 그런 사람이다. 사람들이 무심코 또는 고의로 잃어버렸던 것들을 불러내는 사람. 그래서, 그가 쓴 글들은 한사코 우리의 뒤를 돌아보게 만들고, 애잔하게 하고, 또 소녀처럼 수줍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회상들과 처연함들 안에는 튼튼한 기쁨이 있다. 시인으로서, 남편으로서, 또 딸 다온이의 아빠로서 그는 한세상을 풍요롭게 사는 법과 그 신념을 일찌감치 알아버린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푸른 청춘을 꼬박 시(詩)에 바치고 또, 10년 간의 직장생활을 접고 산골 고향에 손수 흙집을 짓겠다고 나섰을 때에도 그는 이 신념을 의심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가 있다. 이 아이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그래, 우리는 도대체 충분히 이런 고민을 하고 사는 것인가? 기껏, 결론이란 게, 좋은 학교를 따라 위장전입을 하고, 조기교육을 위해 어린 것들을 생면부지의 외국 땅에 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별 가능성도 없는 입시전쟁터로 내모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아이들이 또한 선택하는 건 뭔가? 가슴에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울분을 삭이기 위해 밤거리를 나서고, 범죄를 저지르고, 마침내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목을 매고. 그들이 약해서라고?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한번이라도, 그 아이들을 자연과 더불어 자유롭게 한 적이 있었던가?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은 그래서 아이들을 죽인 바로 그 범인들이다.
우리는 전남진 시인의 책을 통해서 참으로 단 한번만이라도 아이들을 위해 뭘 해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결심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결심은 아이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누천년이 지나도 자연은 여전히 우리 어머니기 때문이다.
서른넷에 딸을 얻어 아이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별을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 아이와 헤어지겠지. 만남의 기쁨은 이별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야 하리. 나와 아내의 의지로 세상에 나온 저 아이가 부디 세상을 아름답게 살기를. 곳간에 쌓는 곡식보다 마음에 쌓는 곡식이 많았으면, 자신의 꿈을 세상에서 이루려 하지 않고 마음에 이루었으면 좋으리라. … 마음의 재산,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타인을 소중히 여기며, 더 많이 가지기 위해 타인과 경쟁하기보다 많이 가진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진정한 재산이란 마음에 쌓인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내가 아이에게 바라는 이러한 심성은 결국 자연에서 배운다고 믿는다(9)
그래서, 시인이 딸 다온이와 함께 사는 산골 흙집에는 자잘한 걱정에서부터 큰 일까지 모든 것이 배움이고 또 그 배움으로부터 오는 기쁨이다. 흙집 앞 마당에는 ‘진돌이’가 있고, ‘삐약이네 가족들’이 종종거리고, 오리가 강아지 뒤를 뛰어 다닌다. 사계절 내내 산골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식물과 곤충들과 작은 동물들이 널려 있다. 읍네에 장이 서면, 다온이는 아빠보다 앞서 뛰어 다니며 까르르 웃는다. 때로, 시무룩해지기도 하는 아이. 그래도, 풍요로운 자연은 아이를 슬픔에 깊이 빠져들도록 그저 내버려 두지 않는다. 눈길을 끄는 다른 것들이 많으니까, 다온이는 또 금새 즐거워지는 것이다.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그래서, 항상 넉넉하다. 그 슬픔조차 말이다.
저녁 즈음 졸던 두 마리 중에서 결국 한 마리가 죽었다. … 이제 남은 것은 저 병아리를 다온이 마음에 잘 묻어주는 일이리라.
“아빠 병아리가 왜 여기서 자는 거야?”
“지금 병아리는 천사님을 기다리는 거야.”
“아빠 천사님이 내려와 병아리를 하늘나라에 데리고 올라가? 왜?”
“저 병아리는 지금 병이 들어서 천사님이 고쳐주러 하늘나라에 데리고 가는 거야.”
“그럼 저 병아리는 하늘나라에 가서 사는 거야?”
“그럼, 이제 저 병아리는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살 거야.”(81)
천진한 아이와 그 질문에 하나하나 마음을 쓰는 아빠의 대화라는 건 이런 게 아니겠는가. 그리고, 아이는 자연 안에서 모든 것을 자연스레 배운다. 삶도 죽음도 그리고, 슬픔이나 기쁨 같은 것도 그저 무난한 순리며 영원하지 않지만, 또 마냥 소멸해 지나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지혜가 아이의 가슴에 새겨지는 순간인 거다.
뛰어온 아이의 한 손엔 작은 책, 다른 손엔 꽃이 들려 있었다. 아이는 무언가 대단한 것을 알아낸 듯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아이를 안고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아빠, 이것 봐. 내가 책에 있는 꽃을 찾았어! 봐, 똑같지?”
아닌 게 아니라 아이는 정말 책에 있는 것과 같은 꽃을 들고 있었다. 아이는 그것을 찾아냈다는 기쁨에 자랑을 하러 내게 달려온 것이다. (147-8)
시인과 딸아이의 이야기는 이렇게 하루 해가 뉘엿거릴 때까지, 그리고 한 해가 저물고 다른 해가 올 때까지 이어진다. 산골마을 할머니들, 흙집 작은 창으로 날아드는 새와 겨울 밤 장작을 불 속에 던지며 사념에 잠기는 아빠와, 단잠을 자는 아이. 오래된 친구를 찾아 읍내로 가는 아빠 손목을 잡고 마냥 즐거운 아이. 시인은 이 모든 것들을 책 속에, 80여장의 정겨운 사진과 함께 담아 내고 있다. 글과 사진들을 보며 마음이 그토록 따뜻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보는 동안 독자도 또한 그 이야기와 사진 한 켠에 자신이 어색하지만, 소박하게 웃고 서 있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예쁘고 소박한 마음 그리고 크진 않지만 견실한 결심으로 그가 선택한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시인 자신은 알고 있을까? 그러나,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소중한 딸 다온이가 이 두 해 간의 생활을 내내 가슴에 지니고 살아 간다면, 그래서,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아 가는 지혜로 그것이 발효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아니, 이미 다온이는 삶의 정수를 짐짓 깨닫고 있는 지도 모르는 일이다. 무릇 아이의 마음은 청명해서, 삶도 죽음도 한갓이기 때문이며, 그 깨달음이 곧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아이가 어른들에게 문득 스승인 것이다.
혹시 「플랜더스의 개」가 슬퍼지면 그때부터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닐까. 「과거는 흘러갔다」가 슬퍼지면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닐까. 비운 잔에 다온이가 어느새 맥주를 따라놓았다. 아빠가 술을 마시는 것이 좋은 모양이다. 술만 마시면 노래를 불러주니 좋은 모양이다. 나는 아이가 따라놓은 술을 마시고 다시 노래 책을 뒤적거렸다.
“아빠,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응?”
“술 너무 많이 마시면 죽는단 말야, 아빠 죽는 거 싫단 말야.”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아이가 죽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말인가.(165)
아이는 이제 ‘삶의 틀’을 갖춘 게다. 게다가, 그것은 그 어떤 것보다 넉넉한 자연의 틀이다. 평생을 견디는 힘이 거기에 있는 게다.
책을 덮으며, 가느다란 웃음이 나온다. 쾌활한 아이와 그 자연이 까르르까르르 마음속에 잔물결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 Noma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