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커넥션
존 라이크만 지음, 김재인 옮김 / 현실문화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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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적으로 ‘죽음’을 얘기하는 시대는 지난 것이다. 죽음 자체가 사실이고, 그것을 애도하는 것마저 심드렁해질 쯤에야 사람들은 그러한 수선스러움 따위를 망각할 수 있다. 죽은 자의 무덤 주위에 잔이나 치면서, 먼산바라기나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더 나아가 들뢰즈에게는 어떤 죽음이든지 간에 가상(Schein)과 관련이 있다. ‘형이상학의 죽음’이든 ‘주체의 죽음’이든 이것은 하나의 사유의 이미지로서 철학이 지층화되는 과정이며, 이 속에서 우리는 그것에 탈주선을 내거나, 단층을 발견함으로써 연접(connexion)을 마련할 수 있다. 그래서, 그에게 철학사는 한 철학자의 등에 붙어서 아이를 또는 괴물을 탄생시키는 작업일 수 있었던 것이다(Negotiation 1972-1990). 다시 말해, 죽음이란 재탄생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가상이다. 그러므로,  유클리드적으로 상상되는 시간이란 한 점과 그 끝 점간의 최단거리일 테지만, <그리고, ... 그리고 ...(et, ... et ... )>로 이어지는 의미의 논리 안에서 시간은 과정이며, 형이상학이든 주체든 과정의 실험 안에 놓여지는 것이다. <시간은 경첩을 벗어나 있 The time is out of joint>고 죽음과 탄생은 항상 유예된다. 억압되는 것(disjonction)과 생성하는 것(conjontion)에 대한 위엄 또는 긍정이란 그런 것이다. 초월적 공리와 정리, 증명으로 수목화된 위계에 구멍을 내기, 리좀을 접속하기. 그래서, 내재성의 판(plane)으로 초월성의 판을 대체하기. 들뢰즈의 철학이 놓여진 경험론의 지평은 따라서, 어떤 위나 아래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표면, 즉 고른판을 도주하는 탈주선과 다양체의 누승적 증식 그 자체를 가리킨다. 하여간 스피노자와 니체 그리고 루크레티우스가 일종의 야만적 역능(puissance)을 들뢰즈에게 부여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존 라이크만은 이러한 들뢰즈 사상의 풍모를 섬세하게 풀어낸다. 게다가, 이전의 들뢰즈 해설서들이 가지고 있던 일면성을 벗어나 형이상학과 논리학, 정치철학 전반에 걸쳐 훌륭한 요약을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들뢰즈 철학을 하나의 닫힌 전체성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이해야말로 들뢰즈가 항상 경계하는 바가 아니었던가. 『경험론과 주체성 Empiricism and Subjectivity』 서문에서 Boundas가 밝힌 바와 같이 들뢰즈를 읽는 가장 합당한 방법은 들뢰즈 자신이 저자들을 독해한 방식대로 읽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체적 체계가 아니라 부분들과 특이성(singularity)들의 계열로서 들뢰즈를 독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들뢰즈가 구사하는 개념의 한갓 내포만을 엄정하게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그 개념이 어떤 창조적 발산을 수행하는지, 다른 개념들과 어떻게 조우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이른바, 개념의 근방역을 살핀다는 것은 이런 것을 의미한다. 애매한 부분, 그리고 불명확하지만 봉쇄되지 않은 개념으로서의 그 ‘사건’을 들뢰즈와 함께 사유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 책의 저자와 더불어 <항상 어떤 특이점에서 다른 특이점으로 옮겨 가서 그것을 다시 다른 것과 연결 접속시키는 일을 벌이게 되는 한계 없는 판(plane)을 선택하면서 조직이나 발전이라는 통일된 계획(plan)을 단념하게 된다. …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이 책은 철학하기의 방법이라는 보다 큰 물음에 접근하고자 한다>(22) 이때, 철학하기는 어떤 전문가 집단을 겨냥하는 말이 아니다. 들뢰즈 자신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철학은 항상 비철학자들에 의해 더 잘 이해되어 온 것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었던 암스테르담의 한 노동자처럼 개념의 직조를 이해하는 것은 차라리 어떤 식의 법칙과 지긋지긋한 동일성의 반복에 익숙하지 않은 비철학자, 노동자, 예술가들이 더 나은 것이다. 정말 나쁜 버릇은 종합하고, 회상하면서, 책 위에 책을 얹고 개념 안에 개념을 포개 놓는 짓이다.

 

이렇게 해서 경험론이 시작된다. 칸트는 흄의 일부를 이어받아 흄의 야만성을 길들였지만, 들뢰즈는 그것을 끝까지 밀어 붙인다. 칸트가 달아났던 초월적 자아라는 지점은 비록 데카르트적 자아(res cogitans)의 실체성을 탈각하고 있지만, 도덕법칙과 자유의 문제에 이르러 절대화된다. 그것은 구성과 입법을 행하는 판관으로서의 주체를 필연적으로 형성한다. 이미 주어진 선험적 범주와 실천이성과 이론이성 간의 조화로운 공통감을 떠받치는 것은 주체의 초월적 조건들이다. 그러나 그 조건들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흄에게 그것은 <일종의 믿음이나 신뢰, 다시 말해 세계에 대한 믿음(belief-in-the-world)이다>(25). 들뢰즈는 우리가 잃어 버린 것은 형이상학이나 주체가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이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경험주의는 세계, 또는 내재성과 삶을 되찾아야 하며, 철학은 어떤 <부재하는 자리>(Lacan)나 오이디푸스 삼각형이 아니라 (푸코를 따라) <바깥>을 사유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직 모든 것이 너무 신성하다>.

 

이 내재성의 판 안에서 철학은 개념을 창조하고 발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계열이며, 전체성이 아니다. 흄은 하나의 개별적 이념이 아니라 그 이념과 개념들의 관계를 중요시했다는 것이 들뢰즈의 진단이다. 즉 <이 관계들은, 각 구성요소들이 퍼즐조각처럼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직 시멘트로 마감하지 않은 벽 안에 있는 갖가지 돌처럼 맞추어진 구성물 속에 있>는 것이다(53). 하나의 조각에서 다른 조각으로 움직이는 것이 바로 경험론의 작동원칙이며, 유목적 경험론이다.

 

이렇게 하면서, 들뢰즈는 어떤 사유의 모습을 일구어 내는 것인가? 하나의 실험, 즉 그것은 굳어진 시멘트처럼 결과가 뻔한 어떤 것이 아니라, <개념들의 창조 및 개념들과 장차 도래할 것의 관계에 대한 암묵적 전제>를 밝혀내고 그것을 따라 가는 것이다(70). <사유의 이미지>란 이런 것을 말한다. 하지만, 사유의 이미지를 밝히는 작업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각각의 철학 내에서 <초월성의 안개를 걷어치우고자 하며, 각 철학의 “창조”에 있는 독창성의 계기들을 다시 설립하고자> 하는 것이다(74). 이렇게 해서 사유의 이미지는 어떤 방식의 비난이나 원한(ressentiment)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된다. 모든 철학은 창조적인 계기, 개념을 가지고 있다. 플라톤에게서 그것은 이데아와 형상이며, 그것이 어떤 슬픈 정념을 일으키는가 하는 것은 그 다음으로 (그러나, 결정적으로) 고려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유의 이미지를 탐구하는 것은 어떤 내적인 논리를 요구한다. 『의미의 논리 Logique du sens』는 그러한 요구를 위해 씌여진 책이다. 여기서 들뢰즈가 바라보는 것은 진리 문제 이전의 문제 즉, 의미의 문제다. 의미는 어떤 식의 동일성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거나, 대상과 개념의 일치의 문제가 더 이상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재인지와 재현의 가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가상이란 <사유 안의 문제들은 전제로 간주되는 다른 명제들에서 도출된 명제들에 의해 일거에 해결될 수 있는 종류의 물음들로 환원된다>는 식이다(97). 경험론의 입장에서 이것은 거의 농담에 가까워 보인다. 명제진리의 문제는 의미와 사건의 논리보다 앞서지 않는다. 들뢰즈에 의하면, 이러한 의미와 사건의 논리는 바로 <다양체의 논리>다. 이것은 동일성 보다 차이를, 일반성보다 보편성을, 특수성보다 하나의 특이성을 겨냥하는 것이다. 사유는 명제의 진리치에 속하지 않는 가상(simulacre)들을 몰아내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의식에 폭력을 행사하는 그 가상으로서의 기호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은 차이며, 복잡화하는 것이며, 또한 명석애매한 것이다. 이것은 ‘존재’(einai)라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적 관념을 길게 늘인다. 하나의 보편적 술어로서 기능하는 이 언표는 하이데거식으로 말해지지도 않고, 그저, <차이가 있다>라고 말해진다. 그런데, 이때, ‘있다’는 것은 일종의 잠재성(potentiality)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차이는 반복을 통해 흘러나오지만, 그것은 어떤 심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표면의 작업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숨어있으면서 현실화를 기다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가능태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인 것 자체이며, 재현되지 않고 사건으로 경험되는 것이며, 늘 우리 주위를 감싸고 도는 것이다.

 

그래서, <다양체는 단지 논리적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 실천학적 문제이기도 하다. … “다양 그것을 만들어야만 한다”>(143). 이것은 따라서, 삶의 문제다. 들뢰즈가 생의 마지막까지 바라보았던 그 내재성으로서의 삶, 하나의 삶(UNE VIE) 말이다. 다양체로서의 삶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 이 다양체를 형성할 것인가라는 관건적인 문제에 달려 있다. 하여간, 지금까지의 자아(ego, cogito)는 흔적조차 없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계급적 함의조차 희미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비난해 마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들뢰즈는 계급이라는 이항성 속에 당적 대표체로서 삶을 상정하는 그 재현적 태도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68을 회상하자면 이러한 들뢰즈의 반대는 맑스에 있기보다 CGT나 PCF에 혐의를 두는 것이다. 계급이란 차후의 일이다. 그 전에 <우리는 일종의 불특정한 군중 또는 “다중”을 구성한다>(146). 다중으로서의 계급은 이렇게 해서 자신의 동일성을 떨쳐내고, 항상 차이와 놀이하며 자신을 긍정하고, 시공간 안에 새로운 배치물들을 창조함으로써 역능을 최대한도로 펼쳐낼 수 있다. 즉, 그것은 <“또 다른 정치, 또 다른 개체화, 또 다른 시간”>이다.

 

정치가 예술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은 이런 것을 의미한다. 앙드레 브르통이라면, 아방가르드의 수뇌부를 구성하고 선언문을 낭독할 테지만, 들뢰즈에게 그것은 헛된 것이다. 다양체의 창조는 그러한 수목적이고 종속적 이미지로는 턱도 없다. 문제는 그러한 위계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과 예술이 각각의 운동 안에서 서로를 부르는 것, 또는 천 개의 고원 위에서 서로를 공명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 가능성을 영화에서 찾는다. 전쟁 전과 후를 나누면서, 또는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를 분할하면서, 그는 영화와 철학이 서로의 속을 관음하는 관계가 아니라, 그 속에서 서로를 부르는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 영화에 관계하는 소수자를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전후에 가능해진다. 그런데, 이때 영화가 맞서게 되는 것은 바로 매체라는 적이다. 매체가 가지는 가공할만한 힘은 그것이 하나나 여럿의 코드들을 가지고 이미 형성된 것으로 간주된 대중과 행위자들을 묶어 낸다는 것이다. 덧코드화라 불리우는 방식은 따라서, 자본의 포획과 연접되었을때 죽음의 도주선으로 다양체를 인도하게 된다. 이러한 포획을 파괴하거나 피해가기 위해서는 이미 존재한다고 간주된 그 대상의 대상화 양식 속에 다중과 다양체가 끌려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것은 코드를 거부하고,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이다. 클레의 금언처럼 <“우리가 이미 볼 수 있는 것을 재생산하지 말고,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만들라”>는 것 말이다(210).

 

들뢰즈가 철학자라면 또는 시인이나 아리아드네를 사랑하는 디오니소스라면, 우리는 이와 같은 철학을 어떻게 긍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그는 철학이라고 불리웠던 그 모든 회색빛 개념들을 창조의 활력과 연접함으로써 어떤 다른 것, 규정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남한 사회에 들뢰즈라는 유령이 출몰하고 다니는 것을 그토록 경외하거나 질투하는 것은 세간의 소문처럼 그것이 단지 유행처럼 흘러 갈 것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그 유령의 웃음소리가 우리의 고막을 찢을만치 광범위하면서 날카롭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하나의 소리, 즉 일의성(univocal)의 소리, ‘삶’이라는 단 하나의 음성일 뿐이다. 판관이 죽고 실험가가 살아있다는 것이야말로 이 삶에게는 어쩌면 하나의 축복이다. 그래서, 세계를 믿고 삶과 그 운명을 사랑하는 것은 많은 선별과 투쟁을 요하지만, 또한 그보다 더한 유쾌함과 웃음을 담고 있다. 저자인 존 라이크만이 말하고 있다시피, <모든 문제는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기 때문이다(239).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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