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편지 (구) 문지 스펙트럼 5
에드가 앨런 포 지음, 김진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표제작 [도둑맞은 편지] 읽음.

초등학교 때 추리 소설 문고판으로 읽은 뒤, 라캉을 읽으면서 추억하고, 데리다와 들뢰즈를 보면서 다시 추억한 그 작품. 당시에 같이 읽었던 [검은 고양이]나 [어셔가의 몰락],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 [황금벌레]보다 인상 깊지 않았으나...

어째서 이 작품을 보면서 난 뒤팽과 D장관이 동일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라는 괜한 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자 - 김동인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
김동인 지음, 최시한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표제작 [감자] 읽음.

언제 읽었는지도 모르고 몇번째 읽었는지도 모를 그런 '유명한'(?) 김동인의 소설. 1921년 1월, <조선문단> 발표작.

복녀의 죽음에 대한 수수께끼란 이상한 나선형 괴물과 같다는 생각. 세월이 지날 수록 이 나선형의 DNA는 더욱 더 증식될 것이고, 또 기생생물들도 키울 것이라는 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쇼몽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양윤옥 옮김, 박철민 그림 / 좋은생각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표제작 [라쇼몽] 읽음.

이 작품 하나만 가지고는 아쿠타가와의 본모습을 알기는 힘들 듯.

그래도 이런 평가는 가능하지 않을까? [라쇼몽]이라는 이 몇 페이지 안되는 소설이 그토록 유명해진 것은 구로자와 아키라의 공이라는 것. 이 작품 하나만 가지고 그만한 메타포와 엄청난 소문들이 생겨나기는 힘들지 않겠냐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대한 패배자 - 한 권으로 읽는 인간 패배의 역사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체 게바라와 루이 16세 부분 읽음.

잘 간추린 다이제스트.

단지 패배자만을 그린 것은 아니지 않은가?

게바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훌륭한 이윤 아이콘이 된 것이고, 루이는 죽음으로써 혁명과 한 시대의 종말을 선언한 것이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제정책의 원리 대우학술총서 구간 - 사회과학(번역) 98
발터 오이켄 지음, 안병직 옮김 / 민음사 / 1996년 11월
평점 :
절판


 

‘질서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보고 


 

   오이켄에 의하면 ‘질서’(Ordnung)라는 용어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그것은 ‘경제질서’(Wirtschaftordnung)를 의미한다. 둘째로 그것은 라틴어 ‘Ordo’에 합당한 의미로서 “중용과 균형이 존재하는 질서”(Ordnung in der Maβ und Gleichgewicht)이며, 자연질서(Naturordnung) 내지는 본질질서(Wesenordnung)다(372:595-6). 후자의 사용에 있어서 오이켄은 그것의 중세적 용법의 전승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성과 본성에 합치하는 질서로서의 Ordo는 하나의 이념(Idee)으로서 “현실적 질서가 실패하거나 정의롭지 못한 시대”에 부각된다. 이에 반해 전자의 사용은 매우 현실적인 맥락에 놓인다. 따라서 이론적 분석에서 이 두 개념의 차이는 구체적인 준거점의 구실을 한다. 오이켄은 전자의 경제질서로부터 후자를 구별하기 위해 특별히 “경제질서의 형성”(Ordnung der Wirtschaft)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텍스트에서 오이켄이 중점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당연히 전자의 질서형태다. 왜냐하면 후자의 질서형태는 경제학의 대상이 아니라 철학이나 신학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규제적 이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질서는 오이켄에게 ‘경쟁질서’(Wettbewerbsordnung)로 비춰진다. 그것은 자원의 희소성을 극복하기 위한 경쟁이다. 이러한 경쟁질서는 결코 우리가 “발명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 현실 속에서 그것의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다(374:599). 이것을 오이켄은 “사물 자체 내에서 발견되는 유례없이 강력한 완전경쟁(vollständigen Konkurrenz)으로의 경향”이라 칭한다. 오이켄에게 경쟁이란 바로 사물 자체의 자연적 경향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 오이켄의 ‘자유주의’는 어떤 것인가? 오이켄은 오늘날의 사회문제의 핵심을 자유와 자유권에 두고 있다(193:322). 이러한 자유는 구체적으로 자유방임의 자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유방임에서 자유는 결과적으로 진정한 자유로 통하지 않고 억압과 종속으로 귀결된다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의미의 자유는 예로부터 독점적 권력을 초래하며, “결과적으로 경제의 권력화를 심화시켰다”. 그렇다고 자유를 위해 중앙계획적인 질서를 채택하는 것은 더 어리석다. 그것은 자유의 기능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두 개의 함정, 스킬라와 카리브디스를 효과적으로 돌파할 만한 자유의 이념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필연성의 통찰에 놓인다. 즉, “경제정책이 자유롭게 되려면 그것은 철저한 현실주의의 시각으로 <필연불가피성>(Notwendigkeit)의 위험을 보아야 하고, 그에 기초하여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224:371).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즉 오이켄은 이 책을 통틀어 맑스주의를 매우 강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지만, 자유에 대한 그의 파악이 엥겔스의 다음 구절과 매우 닮았다는 것이다. “자유는 자연법칙에 대한 꿈꾸어진 독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법칙들을 인식하는데 있으며 그리하여 일정한 목적을 위해 이 법칙들을 계획적으로 작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데 있다”(「오이겐 뒤링씨의 과학변혁). 맑스주의의 자유주의 변종?

   이렇게 해서 오이켄의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us)는 완전경쟁이라는 경향성을 기반으로 그 필연적 작동을 파악하는 구체적인 경제질서에서의 자유주의를 의미하게 된다. 이 의미에는 경제정책적 고려가 중심적으로 놓이게 된다. 즉 경제정책을 통해 이러한 자유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잘 작동되고 인간존엄에 합당한 경제질서 및 사회질서(Aufbau einer funktionsfähigen und menschenwürdigen Ordnung von Wirtschafts und Gesellschaft) 를 수립하는 데 있다”(369:590).

   경제질서에 대한 오이켄의 앞서의 정의는 노동문제와 관련해서도 유효하다. 즉 경제질서의 과제는 “모든 노동하는 인간의 각각의 노동시간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물적 생산수단과 매일매일 상호 결합시켜서 경제적 희소성”을 최대한 극복하도록 한다는 데 놓이기 때문이다(7:41). 난점은 어디서 발생하는가? 바로 완전경쟁이 사라진 시점에 발생한다. 완전경쟁이야말로 질서조종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경제과정이 완전경쟁에 다가서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그 과정의 어떤 지절에서 기능부전이 발생했다는 징후가 된다. 다시 말해 독점적 징후인 것이다. 특이한 점은 오이켄이 이러한 독점적 징후를 기업 단위에서만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노동 단위에서도 발견한다는 것이다. 즉 “파업 … 역시 거래거절(Sperre)”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거래거절은 충성할인(Treurabatte), 투매가격(Kampfpreis)과 더불어 대표적인 독점형태다. 이렇게 해서 맑스적 의미에서 노동자투쟁은 기업 독점의 한 파생태로 전화한다. 정당화는 존재하는가? 오이켄은 대답이 없다. 노동이 이렇게 간단히 독점투쟁의 주체로 기능하게 되는가? 노동조합은 역사적인 형성물이다. 오이켄도 이 점을 간과하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는다. 우선 노동시장에는 항상적인 위협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수요독점’(Nachfragemonopol) 현상이다(44:102). 오이켄은 맑스가 그의 『자본론』에서 자주 묘사한 바 있는 1831년의 상황을 가져와서 비정상적인 임금상황에 대해 분석한다. 맑스가 ‘착취’(exploitation)라는 말을 썼다면 오이켄은 이 상황에서 ‘수요독점’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임금이 더 낮게 하락할수록 노동자가 소유하는 재산은 더 적어지며, 그럴수록 추가로 노동을 더 하거나 자기 자식과 부인에게까지도 노동을 시킬 필요성이 더 커진다. 임금이 하락할수록 증가하는 노동공급, 즉 비정상적인 공급반응이 노동자의 상태를 더 열악하게 만들었고, 수요독점자의 권력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자유에 대한 대중의 믿음에도 큰 타격을 가져다 준다. 이들에게 자유는 자본의 자유, 즉 부르주아지의 자유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자유가 가진 물질적 기반은 무엇인가? 맑스에 의하면 이것은 생산수단의 독점에 있다. 맑스의 분석이 더 근원적이지 않은가? 왜냐하면 수요독점 상황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아니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이켄은 이러한 맑스의 분석을 “결정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일축한다(45:103). 이때 그는 자신의 논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문제의 전제조건’과 ‘사회문제의 성격 결정’을 구분한다. 전자에 있어서는 맑스의 분석이 옳지만 후자의 면모를 맑스는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회문제의 성격은 바로 ‘노동시장의 형태’에 좌우된다. 즉 ‘수요독점적 시장’이라는 것이다. “기업이 보유한 독점적 또는 부분독점적 수요자라는 지위 때문에 노동자는 임금의 몫으로 자신의 한계생산물만큼을 받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생산수단의 독점 유무와 시장의 독점 유무는 인과관계를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과연 그러한가? 맑스는 과연 오이켄의 말대로 “노동자의 궁핍상태를 철저하고 올바르게 묘사했지만 틀리게 해명”한 것인가? 맑스는 ‘시장형태’를 무시했는가? 마지막의 오이켄의 반론은 큰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독점자본의 형성에 대해 맑스가 몰랐다고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며, 노동시장에서 행사되는 그러한 독점형태를 몰랐다고는 더더욱 가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했다면 맑스에게는 ‘착취’라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개념과 ‘잉여가치’(surplus value) 또는 ‘이윤’(profit)이라는 경제적 개념이 연결될 수 있는 여지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중요한 개념들 중 잉여가치가 생산부문의 분석에서 나온다면 이윤과 착취는 분명 시장상황에 대한 2차적 분석, 즉 가격과 유통, 그리고 ‘가치전형’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정확하게 도출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오이켄은 논점을 더 확장한다. 맑스의 분석이 맑스 당대에만 통용되는 것이며, 근대적 노동상황에 따르면 그러한 분석이 오류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사후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는 말이다. 오이켄의 주장은 예측가능성이라는 과학적 규준에 맑스의 이론을 적용해 봄으로써 정당화된다. 즉 “그가 올 것이라고 보았던 대중의 궁핍화는 출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엄청나게 상승하였다는 것이다(208:348). 여기에는 몇가지 근거가 제출된다.

   첫째, ‘경제적 기술적 발전’이다. “노동자의 기계장비가 개선되면 될 수록 노동자의 생산량은 점점 더 증대하였다”(186:312). 기계의 발전을 통한 생산량의 증가는 맑스에게 ‘자본의 유기적 구성’(the organic composition of capital)의 상승이라는 정식으로 유명하다. 다시 말해 가변자본(variable capital)의 비율에 비해 불변자본(constant capital)의 비율이 증가함으로써 생산량이 급격하게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이켄의 그 다음 언급이다. “그러면 임금은 더 높게 상승할 수 있었다”. 맑스에 따른다면 이 파악은 매우 미심쩍다. 먼저 이때 임금이 실질임금(real wage)냐 명목임금(nominal wage)냐가 그렇고, 만약 후자라면 이 언급은 일종의 기만이 되기 때문이다. 맑스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상승함에 따라 상품의 가치는 그만큼 하락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가치창조적인 노동력의 투입이 절하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상품의 시장가격이 낮아지는데 이는 곧 생필품 가격에 해당하는 노동자의 임금하락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사안에 대해 정반대의 결론이 이끌어져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오이켄이 드는 근거는 교통, 통신수단의 발달이다. 이것은 “노동시장을 확대”시킨다(45:104). 오이켄에게 이로 인한 발전은 실로 “혁명적인 영향(revolutionierend gewirkt)을 미쳤다”(228:377). 즉 산업노동자의 이동성이 향상됨으로써 거주 지역 기업에만 의존하던 노동 선택 영역이 크게 확대된다. “노동시장형태는 완전히 변”하였으며, “전에는 드물었던 경쟁이 활발해졌다.” 앞서 말했던 기업의 수요독점 상황이 깨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오이켄의 진단은 몇 가지 점에서 현실적이지 못하다. 교통, 통신수단의 발달로 인해 이동성이 극대화된 것은 노동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업과 자본의 이동성도 그만큼 빨라졌다. 이것은 기업이 광대한 지역에서 독점적 권한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졌다는 뜻이다. 오이켄이 이 책을 쓰기 시작할 무렵에는 벌써 다국적 기업의 활동이 서서히 그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다. 이러한 기업의 해외 진출은 교통, 통신의 발달을 비롯한 기술적 발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매우 현실적인 경제학자인 그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결국 교통, 통신 수단의 발달은 노동자들이 기업의 수요독점을 벗어나기 위한 충분한 도구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기업은 원거리 통행이 가능해진 상황을 역이용했다. 자신의 지배권을 더 넓히고, 넓은 지역의 노동자들을 자신의 수요독점적 시장권력 하에 둘 수 있게 한 것이다.      

   세 번째로 들 수 있는 근거는 제도적 보완이다. “국가에 의한 노동자 보호, 연소자노동의 금지, 노동시간의 법적 제한, 공장에 대한 감독, 질병, 사고 및 노동력 상실 등에 대한 보험등”이 그것이다(186:312). 이러한 제도적 보완들은 사실 대부분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이르는 노동자 운동의 성과물이라는 점을 알아 두도록 하자. 또한 제도적 보완이 항상 유지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벌써 20세기 들어와서 주변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19세기 당시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상황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오이켄이 보고 있는 제도적 보완들은 매우 유럽적이라는 것이다.

   네 번째의 근거는 노동조합의 설립과 활동이다. 그런데 노동조합은 “노동시장의 변형”을 의미한다(46:104). 앞서 우리가 논한 바에 의하면 노동조합은 독점적이 되었을 때 반시장적이다. 그것은 완전경쟁을 불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치명적인 요소가 된다. 사용자 입장에서 이러한 노동자‘들’이 하나의 거대한 이익집단으로 비치는 것은 당연하다. 오이켄에 의하면 노동조합의 결성으로 인해 “쌍방독점(zweiseitige Monopol)의 방향으로 노동시장이 발전하므로 새로운 질서정책적 어려움이 발생”하는 계기가 여기에 있게 된다. 파업(Streik)과 그에 맞선 공장폐쇄(Aussperrungen)는 이러한 쌍방독점으로 인한 시장교란의 결과다. “일방적 권력화(einzeitige Vermachtung)가 쌍방적 권력화(zweiseitige Vermachtung)에 의해 대체되었다. 사회의 계급분열이 지속되었다.” 계급 분열과 시장 교란은 완전경쟁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발전할 수 있다고 오이켄은 경고한다. 즉 노동에 대한 국가의 중앙통제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이켄이 누누이 반복하는 경고가 바로 이런 것이다. 혼란은 중앙통제 경제를 부르고 그것은 곧 전체주의로 이어진다는 것 말이다. 시장에서의 새로운 독점적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몫’이 증가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단기적인 성과일 뿐이라는 것이 오이켄의 이러한 경고의 내용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나는 이러한 오이켄의 진단이 경제학적인 시각에서 유의미하다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것은 노동시장의 특유성을 바로 보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오이켄은 “실물재화(Sachgüter-)의 시장과 노동시장(Arbeitsmärkten)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319:511). 그러나 그는 이러한 차이가 어떤 내용인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나는 그것을 노동시장의 ‘정치적 특성’이라고 본다. 이 시장에서는 세이의 법칙이 미미하게만 통용될 수밖에 없다. 노동시장에서 임금 즉 가격의 결정은 수요와 공급의 탄력성과 경직성에 의해 결정된다기보다 협상과 투쟁이라는 정치적 매개의 결과다. 이 변수가 더 결정적인 것이다. 오이켄은 이 면을 보지 못했다. 이러한 결과는 우리의 논의에서 매우 중대하다. 왜냐하면 질서자유주의에서의 노동문제는 이때 일면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오이켄에게는 노동시장에서의 인과 관계가 뒤집어져 있다. 정치적 결정과정이 가격기구에 뒤따라 나온다. 그래서 우리의 의문은 매우 온당하다. “석탄노동자들의 장기파업이 섬유회사의 휴업을 강요한 것”과 같은 사태가 가격기구의 기능 회복으로 없어질 것인가? 또한 화폐의 긴축과 팽창은 가격기구의 기능 회복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나는 임금과 노동시장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기순환과 관계되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바대로 노동시장에서의 가격결정은 가격기구의 기능 여부와는 다른 변수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가격기구가 제기능을 찾았다고 해서 ‘파업을 통한 가격결정’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가격기구의 기능은 항상적인 불안정 상태에 있게 된다. 그리고 경기순환 상 나타나는 공황과 불황, 그리고 호황과 활황은 필연적으로 화폐 유동성의 변화를 수반한다. 가격기구가 교란되어 신용이 팽창하거나 수축하면 당연히 그것은 경기순환에 영향을 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화폐는 점점 더 가격기구와는 현격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즉 금본위제와 달러 태환제의 잇따른 붕괴는 상품시장과 금융시장의 분리를 극적으로 조장해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기순환은 현재 점점 더 가격기구의 기능과는 상관없이 진행되는 경향이 강해 보인다.

   노동문제 즉 고용과 관련하여 우리가 특기해야 할 오이켄의 또 다른 면모는 바로 완전고용정책(Vollbeschäftigungspolitik)에 대한 그의 입장이다. 오이켄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교환 경제 체제에는 시장을 통해 희소성이 자동적으로 측정된다. 그런데 “현대의 완전고용정책은 이 희소성 측정기(Rechenmaschine)를 정지시키는 경향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비현상은 주로 완전고용달성을 위한 국가 정책, 즉 상품 가격의 고정, 외환관리, 그리고 신용확대정책의 필연적인 결과다. 이렇게 해서 완전고용은 획득되지만, 오이켄에 의해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바, ‘전체질서’에는 심각한 타격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 ‘질서’의 문제, 즉 고용을 질서와 조화시키는 문제는 질서자유주의 노동문제의 관건이며, 그만큼 어렵다. 그래서 오이켄은 “<이 어려운 딜레마는 아마 우리 시대 최대의 경제정책적 및 사회정책적 문제일 것이다>”(144:247)라고 말한다.

   나는 오이켄이 이 딜레마를 충분히 해결했다고 보지 않는다. 다만 그는 완전고용에 대한 요구와 시장불균형이라는 난제가 중앙계획경제의 방향으로 경제정책을 이끌어 갈 것이라는 경고만을 주는 듯하다(ibid.). 그는 완전고용의 필요성과 생계수준의 악화를 통한 중앙경제정책의 출현에 대한 비판 사이에서 동요한다. “중앙관리경제로의 바람직스럽지 않은 제 경향을 동원하였던 것은 단지 자유방임정책뿐만 아니라 경제 실험의 정책, 그중에서도 특히 완전고용정책이었다”는 것이다(218:362). 그렇다면 도대체 “다른 목표와 함께 완전고용도 달성되는 그러한 일반균형을 추구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166:284)       

   오이켄의 여러 방면의 설명에서 노동자는 자본가와 더불어 자유로운 존재로 제시된다. 즉 “노동자도 특정한 목적에 노동을 제공할 의무가 없다. 노동자는 거주이전의 권리 및 자유로운 노동계약의 권리를 보유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우리가 말한 바 있는 수요독점적 시장형태를 벗어난 시장형태라는 것을 함축한다. 즉 완전경쟁 상태에 가깝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경잴질서 하에서는 “소비의 자유”도 존재한다. 그러나 단 하나, 경제과정의 규칙과 형태 그리고 시장과 화폐제도를 임의로 형성하는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오이켄은 못 박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질서정책 자신의 전공분야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경쟁질서에서 노동자가 어떻게 저러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노동자의 자유와 경쟁질서가 상충하는 면모를 두 가지 정도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노동자의 자유와 기업가 즉 부르주아지의 자유는 매우 다르다. 노동자에게 자유는 자신의 노동력을 노동시장을 통해 팔 수 있는 자유일 뿐이다. 그 반면에 기업가는 그럴 필요가 없다. 여기서 전자는 선택의 자유가 없으며, 후자는 그것이 있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기업가의 경우 자신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는 전적으로 그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그러나 한 노동자는 생계와 부양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이켄의 ‘수평적 조정’은 과연 현실적인가? 둘째, 여기서 질서정책을 입안하는 주체는 어떤 주체인가? 경제과정은 규제하는 질서담당세력에 대해 오이켄은 이 책의 5부에서 길게 설명한다. 그들이 어째서 그러한 주체로 서게 되는가라는 질문은 차치하고서도 만약 이들이 있다면 애초의 수평적 조정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질서정책의 전공자들’이 그러한 질서정책의 파괴자가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상 그런 일은 무수히 있어왔다.

   그런데 오이켄에게 사적 소유는 질서의 관건이다. “사유재산(Privateigentum)은 경쟁질서의 전제조건에 속한다”(271:444). 이와 더불어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는 경쟁질서를 통해 규제된다. 즉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경쟁에 의한 통제를 필요로 한다”(275:448). 사정이 이러하다면 앞서 우리가 경쟁질서와 노동자의 자유가 상충하는 두 가지 면으로 들었던 것의 본면모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목표는 ‘질서’이며 그 수단은 ‘사적 소유’가 되고, 이때 수단은 경쟁질서를 보장하지만 노동자의 자유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오이켄이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경쟁질서가 “이기주의의 힘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질서유형”이고, 중앙통제체제로 가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책이라 하더라도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305:583). 왜냐하면 노동자의 자유는 기업가의 자유에 대해 상대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기업가의 자유가 가진 사적 소유의 크기는 노동자의 자유가 가진 그것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오이켄의 질서자유주의는 그의 사후에 더욱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프라이부르크 경제학파는 사회적 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라는 이름으로 소비에트 붕괴 이후 새로운 대안이 되고 있다. 오이켄 자신은 이러한 추세를 반길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왜냐하면 그는 명시적으로 막스 베버와 실증주의 사회학자들의 실천의 방기와 이론적 편향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문제들을 <예언자>나 <선동가>가 해결하도록 내버려 주는 것은, 교량이나 기계의 제작을 <예언자>나 <선동가>에게 위임하는 일만큼이나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341:547).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선동가’와 ‘예언자’가 오이켄 자신이 되지 않으려면 실천적 대안들에 대한 의문점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오이켄이 맑스의 ‘잉여가치설’이나 ‘정치경제학 비판’을 적극적으로 검토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노동가치설’이나 ‘잉여가치설’이라는 말이 텍스트 어디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부분에서 보이는 ‘오해’는 그런 심증을 더 굳히게 한다. 오이켄 질서자유주의에 있어서 노동문제는 “<착취>가 불가능하고, 따라서 권력화를 초래하지 않고, 전체 과정을 균형으로 인도하는 그러한 시장형태 및 화폐제도가 실현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 물음에 벌써 세 가지는 제외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첫째는 자유방임 경제체제고 둘째는 중앙계획 경제체제(사회주의)며 셋째는 케인즈주의적인 일면적 완전고용정책이다. 그리고 더불어 신용화폐제도도 거부된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질서자유주의 실천인가? 사회적 시장경제인가? 오이켄은 그가 남긴 유고 어디에도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해 남한 사회 신자유주의자들은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