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스파르타쿠스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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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스파르타쿠스} 조정환, 갈무리 2002 중

"싸빠띠스따의 '간대륙주의'와 '민족자율' 문제"

Zapatista라는 이름은 그 이름이 함의하는 바, 단지 멕시코 민족의 해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이름은 그들에게 '다중의 목소리'였으며, '모두의 이름'으로 또한 '모두'를 호명하는 그들의 언어와 투쟁들은 또한 '민족'이 가지고 있는 부르주아적, 사회주의적 의미에 최종적인 파산을 선고하는 일종의 '실험'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994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봉기'한 Zapatista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실험성'은 구소련의 망령이 '절망'이나 '회고' 또는 '전향'이라는 이름으로 전세계를 공공연히 떠돌아 다니는 와중에 개시되었으며, 신자유주의가 사회주의에 대한 '승리의 축포'를 쏘아올리며 기세등등할 때 시작되었다. 그러나, 도대체 이들이 시작한 '투쟁'이 왜 그토록 '찬사'와 '오해' 사이를 극단적으로 횡단하는 것일까? 이 횡단의 구경꾼들은 바로 다름 아닌 부르주아들이며, '걸으면서 사고'하는 Zapatista들로부터 어떤 것을 얻을 것인가 생각하는 소부르주아 거간꾼들이었다.

모든 오해와 왜곡들 중에는 노골적으로 그들을 깍아 내리는 우익민족주의 세력들이 있다. 이들은 얘기할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민족주의라는 가면 아래 아주 분명하게 부르주아지의 본모습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비판들은 좌파 내부의 관점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들을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Zapatista 투쟁의 면모에 보색효과를 유발할 것이며, 구좌파와 국제주의자들의 편향성으로부터 '투쟁'의 실질적 힘(puissance)을 보호하게 할 것이다.

주목할 만한 오해는 바로 '민족'개념의 사용에서 나온다. Zapatista 투쟁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국제주의자들(internationalist-영국 Wildcat 그룹, 미국의 Collective Action Notes;CAN 그룹, 프랑스의 Ab Irato 그룹, 독일의 [와일드켓 회보]그룹 등)은 '민족' 개념의 맑스적 용례를 정당하게 취하는 댓가로 '민족' 개념의 현동적 의미를 포기해야만 한다.

[공산당 선언]이 말하는 바 '조국 없는 노동자'들은 레닌에 와서 '민족자결'의 원칙으로 실천적으로 천명되었다. 그것은 당시의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발틱, 코카서스 들의 민족 독립을 옹호하는 것으로 갈무리된다.  이러한 방식의 '민족' 이해는 레닌과 대립했던 로자에게서도 발견된다. 이 둘은 약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족'을 산업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을 강화하는 '수단' 또는 '단계'로 '민족'과 '민족해방투쟁'을 평가했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이러한 '단계론적 혁명관'은  '진보'에 대한 정통 좌파의 신뢰와 더불어 자본주의 발전의 '거울상'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제주의자들의 비판은 이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단계론'에 입각한 혁명 전술에서 '민족'은 그 자체의 활력을 상실한 전체 혁명기계의 한 부품이 되고, 부정의 계기가 된다. 국제주의자들의 이러한 관점은 현동적이지 않으며, 다분히 '회고적'이다. 

그러나, 정통 좌파와 국제주의자들의 '민족' 이해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 측면도 간과할 수는 없다. 어쨌든 '민족'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의 성과를 부르주아지들의 영토화 전략에 상납하게 하는 도구로 쓰여져 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민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민족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질문에 Zapatista들은 그들의 행동과 언어로 대답해 왔다. 4번에 걸친 '라칸돈 선언'과 정부군과의 투쟁에서 그들은 점차적으로 스스로의 '민족주의'를 '국제주의'와 연동시키는 시도들을 끊임 없이 해왔다. 본질에 있어서 '전복적 친연성' 그리고, 방법에 있어서 '간대륙주의'와 '네트워킹'으로 요약되는 이들의 '민족'주의는 그러므로, 민족의 고착성을 탈피한 '민족자율'이며, 현존했던 좌파적 민족주의에 대한 이해를 극적으로 역전시켜 가는 과정이었다. 실제적으로 좌파적 민족주의란 국제주의를 외재적 '연대'의 수준으로 활용해 왔으며, 그러한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중심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주변부 프롤레타리아트의 도구화와 배제를 불러 왔다. 1936~39년의 인민전선은 그러한 외재적 민족주의 전선이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율적 봉기를 억압하는가에 대한 생생한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Zapatista는 이러한  외재적 전선을 내재적 공명(resonance)의 수준으로 끌어 올린다. 이 와중에 '민족'은 단순히 영토, 문화, 인종의 단일경계 내부에 닫혀 있지 않고, '투쟁하는 무리의 과정과 역사 속의 주체성'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주체성의 구성과정이 바로 '전복적 친연성'이다. 이것은 곧장 '국제주의'의 진정한 맥락 속으로 자신을 기입하는 행위가 될 것인데, 이때 중요해 지는 것이 프롤레타리아트 주체성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프롤레타리아트는 전통적 의미의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그것은 '다수자로서의 소수자', 즉 사회적 피억압자들의 움직이는 총체며 현대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모든 파괴적 요소들에 저항하는 생성의 분자조직이다. 이로써,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투쟁이 가지고 있는 전복적 성격과 국제주의 내부에서의 민족주의에서 중심성을 버리게 되는데, 그것은 보다 큰  전지구적 공명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수준에서의 국제주의의 주체는 다름아니라 '다중(multitude)'이다. 정통 좌파에게 있어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 중심성을 깨끗이 탈각한 다중은 불안하고 언제 형해화될 지 모르는 불확실한 계급구성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의 본질이 차이와 위계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이러한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은 곧장 그러한 위계와 명령 체계에 균열을 형성하는 조직적 무기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Zapatistas가 가지고 있는 네트워킹의 방법이 경화된 '전선'보다 효과적인 무기가 되는 지점이 또한 이곳이다. 그러나, 헤리 클리버의 말대로 이러한 네트워킹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민주주의의 극대화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새로운 꼬뮨의 구성으로 나가는 실질적 도구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리고, Zapatista가 새롭게 구성하고 있는 민족과 국제주의 그리고 다중의 역능은 항상 반동적 경향에 열려 있게 된다. 탈영토화하는 이들의 투쟁을 항상 영토화하는 시도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의 '빈곤'과 '난관' 속에서 항상 '희망'을 사고할 것이며, 삶의 가치를 훼손하는 모든 자본주의적 시도들에 대해 '깃발을 올릴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21세기 스파르타쿠스} 조정환, 갈무리 2002 중 pp227~236

"싸빠띠스따의 '민족 프로젝트'에서 무엇이 새로운가?"

북미자유무역헙정(NAFTA) 이후로 멕시코 제도혁명정부는 500년의 역사를 가진 멕시코 민중의 혁명 전통을 배반하고, 1917년 헌법 27조를 개정함으로써 원주민들의 생존을 초국적 기업의 이윤추구의 재물로 내놓는데 기꺼이 동의했다. 이에 대한 멕시코 민중들의 반응은 전통적인 혁명주체로서의 산업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라칸돈 정글의 원주민들에게서 나왔다. 이들은 새로운 종획운동으로서의 NAFTA를 전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금융폭탄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으며, 새로운 4차대전의 전조로 해석한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민족성'을 전통적인 '민족해방' 차원에서 '국제연대' 차원으로 승화시켜 갔으며, 이제껏 저항적 주체들의 공리처럼 받아들여져 온 사회주의 강령의 대부분을 재해석하거나, 재구성해야 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민족의 자율은 언어, 관습, 영토로 구획된 민족간의 '연대'나 '반목'을 넘어서는 '차이'와 '자치'를 의미하게 된다. 멕시코 제도혁명당(PRI)은 이러한 이들의 새로운 '민족프로젝트'를 그들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중요한 걸림돌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이 국제적 공명을 획득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자율'을 '분리'로 환원하려는 거짓선전에 열중한다. 다시말해, "원주민들의 분리를 원하는 것은 사빠띠스따들이 아니라 멕시코 정부와 자본이다."(229) 분리된 상태에서의 원주민들은 마치, 종획 운동을 통해 이기적 자본주의 윤리를 받아들인 본원적 축적 과정에서의 농민들처럼 서로를 반목하게 되고, 그래서 초국자본의 이윤을 방해하는 그들의 단결의 힘을 제거하여 보다 손쉬운 이윤획득을 보장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빠띠스따들이 원하는 것은 '분리'가 아니라 '자율'이다.

"연방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들 간에 새로운 협정을 체결하여 중앙집권주의를 종식시키고 각 지방과 원주민 공동체 및 자치시들이 정치적, 경제적 , 문화적인 자치권을 가지고 자치적으로 통치할 수 있게 할 것"(229)

그래서, '자율'은 필연적으로 중앙집권주의의 종식을 거쳐 가야하는데, 그것은 '분리'를 통해 주민들을 통제하려는 그 통제주체의 종식을 의미하면서, 새롭게 구성될 풀뿌리 민주주의의 시작이 된다. 자치권을 가진 공동체와 원주민 자치시는 스스로의 자발성에 의해 협정을 체결하고, 분쟁을 조정하며, 직접민주주의를 통해 '복종하는 자유'를 선택할 수 있는 역능(puissance)를 지니고 있다. 이런 이들에게 '국가권력'은 '독이든 사과'와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국가권력 장악'이라는 부르주아 자본주의와 구사회주의 기획을 반대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실현되어야 하는 것은 당-국가 체제를 통한 억압의 재생산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구성될 꼬뮌의 새로운 네트워크가 될 것이다. 이것은 맑스가 파리꼬뮌을 겪고 [선언]에 대한 반성을 내놓은 1871년의 언급과 직접적으로 연동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국가권력과 그 기구들을 단순히 장악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꼬뮌은 그러므로, 구획되고 통제당하는 인간의 존엄성(dignity)의 회복을 그 기본적 강령으로 해야한다. 이 원칙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켜져야 하는 것이며, 꼬뮌을 구성하는 제일 원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선택의 상황, 즉 죽음을 택하느냐, 존엄성을 버리느냐 라는 극한적 상황에서도 관철되는 것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개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단다. 하지만 우리는 짐승처럼 살 것인지 아니면 고귀한 사람들처럼 죽을 것인지 선택해야 했단다. 미겔, 영원히,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될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란다."(231, "바하 칼리포르니아의 13살 소년에게 보내는 편지")

이러한 '존엄성'은 스스로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또한 함축할 수 있다. 이들이 '무기를 내려 놓으면 용서하겠다'라는 멕시코 정부의 제안에 '우리가 왜 용서를 받아야 하는가 ...... 과연 누가 용서를 구해야 하고 누가 용서를 해 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뢰, 그리고 자신들도 그 존엄성의 한 부분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자율'과 '존엄성' 위에서 우리는 Zapatista의 자유, 민주주의, 정의를 이해할 수 있다.

"첫 번째 논점, 즉 자유는 혁명적 변화의 기초를 지칭한다. 싸빠띠스따들은 EZLN[싸빠띠스따 민족 해방군]이 자신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투쟁형태이지만 자신의 투쟁형태만이 멕시코 전체에게 유일하게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멕시코인 모두가 싸빠띠스따의 기치 아래 일치단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다른 투쟁형태들의 존재와 가치를 아낌없이 승인한다. 상이한 방법들, 상이한 전선들, 상이하고 다양한 책임과 참여의 수준들의 존재를 승인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수준의 참여가 중요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전통적 혁명 이론들과 혁명 조직들은 투쟁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그것들의 한계를 강조하면서 자신을 그 투쟁의 다양성을 대표로, 혹은 지도자로 내세웠다. 싸빠띠스따들은 이러한 유일 전위에 의한 목적의식적 지도의 방법에 반대하면서 그 대신에 집합적인 하나의 포괄적 과정을 주장한다. 그들이 혁명을 유일의 조직, 유일의 방법, 유일의 지도자에 의해 이끌리는 대문자 혁명이 아니라 소문자 혁명으로, 혁명이 필요하며 또 가능하다고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사람의 성취가 다른 사람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련된 문제로 이해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233, 강조는 필자)

여기서 '자유'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형식적 '이념'이길 그치게 된다. 그것은 적극적인 '조직원리'로 부상하는데, 그것도 고정되고 위계화된 조직이 아니라 '과정'이 된다. 방법들의 다양성, 투쟁전선의 상이함을 인정하면서 단일 전선이 아니라 이중의 또는 여러 수위에서의 전선형성을 승인하는 이러한 조직 태도는 Zapatista를 조직적 구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일부의 요구에 대해 이들이 FZLN(싸빠띠스따 민족 해방전선)으로 합의를 형성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들은 자신의 자율성을 파괴할 적극적인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위계적 조직관을 배격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대신 거기에는 '자율'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차이를 긍정하면서 소문자 혁명들(revolutions)의 공명을 이루어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두번째 논점, 즉 민주주의는 혁명의 방법과 목표를 지칭한다. 싸빠띠스따들에 따르면, 멕시코에서의 혁명적 변화는 단지 무력 혁명인가 비무력 혁명인가 중에서 어떤 종류의 행동을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것은 다양한 수준의 헌신과 참여로 다양한 방법과 다양한 사회적 형태를 이용하여 각각의 전선에서 벌이는 투쟁의 결과이다. 그 때문에 혁명 과정에서 이들 다양한 헌신과 참여,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 기획들 사이의 차이는 필연적일 뿐 아니라 필요하다 ...... '혁명의 결과는 어떤 특정한 사회적 기획을 가진 당이나 조직 혹은 제휴조직들의 승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정치적 제안들 사이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민주적 공간의 창출'이라는 생각으로 발전된다. 여기서 각각의 제안들은 다른 제안들과 싸워 자신의 올바름을 입증할 수 없다. 오직 전체 민중이 그것을 받아들일 때에만 그것의 올바름이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의 결정권은 전체 민중에게 있다 ...... 이런 맥락에서 민주주의는 민중 자신이 민족적 프로젝트들의 유효성을 판단하고 그것들 사이의 대립을 해소시키며 특정의 프로젝트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는 혁명적 공간이다."(234, 강조는 필자)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에 대한 대의적 관념 전체가 적극적으로 사상된다. 이제 민주주의는 정치의 직접적 장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공간의 창출 자체도 또한 '민주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방식의 '장'은 Zapatista의 실험 중 중요한 마디를 구성하게 되는데, 그것의 직접적 성과물이 바로 네 번의 '라칸돈 선언'으로 인한 투쟁의 전자적 직조(네트)이며, '대륙간 회의(엔꾸엔뜨로)'인 것이다. 이러한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적 특성은 이들이 규정하는 바, '투쟁하는 공동체'로서의 '민족'에 적절하게 부합하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때 민족 프로젝트는 비로소 예전의 '민족' 개념에 대한 파괴의 현실화가 될 수 있는 것이며, 새로운 조직과 공간 구성의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이미 실현되고 있다.

"세 번째 논점, 즉 정의는 민주주의, 자유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싸빠띠스따들의 언어에서 이 개념에 대한 정의를 찾기는 매우 어렵지만 그것은 '혁명의 성격이 아니라 결과'를 지칭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민주주의가 없으면 정의도 없으며(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연기하고 정의를 먼저 손에 넣자'는 정부의 선전은 지배자들의 특수한 정의이다), 정의가 없이는 자유도 없다('정의를 연기하고 자유를 먼저 손에 넣자'는 정부 선전은 착취자들의 특수한 자유를 대변할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정의는 존엄한 주체들의 자율적 활력이 서로간의 적대를 최소화하면서 꽃피우는 공동체적 사회 상태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235)

다시말해, '정의'는 결과로서의 꼬뮌의 상태다. 그리고, 존엄성과 자율을 스스로의 주체성으로 상정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현동적인 투기가 된다. 정의 속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는 홉스식의 주체성의 비관주의를 극복하면서 현실 안에서 펼쳐진다(unfold). 동시에, 이것은 '결과'이긴 하지만, 어떤 먼 미래의 결과가 아니라, 지금/여기 꿈틀거리는 공산주의적 과정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이제, 새로운 주체성은 자신의 자율성과 존엄성에 대한 현실적 증거들을 확보하면서 그것을 통해 더욱 '멀리까지' 가게 된다.   

우리는 Zapatista들의 이러한 '민족 프로젝트'를 일국적 수준에 고립시키려는 이해의 태도와 공세들을 다시한번 경계해야 한다. 앞서도 얘기 했듯이 이들의 '민족'은 결코 부르주아적 또는 구좌파적 관념이 아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되었을때, '민족'은 '국제주의'를 형성하는 한 양태(mode)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이 한 양태는 '국제주의'의 가장 완전한 상을 또한 '감싸고'있는 것이다. 민족과 국제주의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혁명적 과정이며 주체성의 의식상태다.

 

{21세기 스파르타쿠스} 조정환, 갈무리 2002 중 pp237~251 "차이빠스 봉기와 새로운 유형의 혁명"

바슐라르는 그의 과학철학에서 제 과학혁명의 단계는 '연장(extension)'됨으로써 구래의 인식을 전승하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인식론적 단절(epistemological break)을 겪으면서 예전의 이론들을 '감싼다'고 말한다. 이러한 법칙성이 혁명의 유형에도 관철되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진화론적인 법칙성만이 혁명의 유형론에는 가능한 것일까? 1994년 1월 NAFTA의 발효와 더불어 개시된 라칸돈 정글 Zapatista들의 투쟁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투쟁의 '특이성(singularity)'에서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단절'을 혁명론에 가져다 주는 것 같아 보인다. 다만 그들을 '볼거리'로 격하시키는 부르주아 언론과 스키마스크 뒤에 감추어진 마르꼬스의 얼굴에만 열을 올리는 천박한 오락심리는 그러한 '단절'을 보지 못한다. 혁명의 얼굴성은 차라리 기관 없는 몸체와 같다. 그들의 스키마스크는 기관 없는 얼굴성의 표면 그 자체다.

그러면, 혁명은 변했는가? 아니면 혁명은 단지 스스로에게 새로움의 양태를 부과한 것일 뿐인가? 조정환은 이 글을 통해 '단절'이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이 혁명이 결코 '연장'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Zapatista들의 투쟁이 지리적 간극을 넘어서 남한 사회 변혁에 미치는 함의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그래서 1990년대의 한국은 전 계급적 '개혁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역사의 종말'과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에 대한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이야기들을 뒷받침해 주는가? 이제 혁명의 시간은 지나간 것인가?"(238)라고 물음으로써 말이다.

조정환은 두가지 '단절'을 말한다. 1)개혁주의 및 국가조합주의와의 단절 2)전통적 혁명주의와의 단절. 그리고, 단절 이후에 따르게 되는 몇가지 '창조성'을 얘기한다.

"우리는 당시 무장혁명은 멕시코 이외의 나라에서만 가능하다는 일반적 믿음에 직면했다. 즉, 멕시코는 연대의 나라로 간주될 뿐 혁명의 나라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우리가 혁명을 제기했을때 우리는 돠파 내부에서도 이단자로 간주되었다. 좌파는, 혁명은 멕시코의 역할이 아니며 우리는 미국에 너무 가깝고 멕시코 체제는 유럽모델을 닮았으며, 이 때문에 '혁명적' 변화는 오직 선거적 방법들, 평화적 방법들을 통해서만, 혹은 가장 급진적인 시나리오라 하더라도, 반란적 방법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것은, 비무장 대중들이 광범하게 결집되어 경제를 분쇄할 것이고 국가기구 내부에 위기를 창출할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 국가 기구가 붕괴할 것이고 새로운 정부가 권력을 장악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게릴라전, 무장투쟁을 제기했을때 우리는, 당시에 매우 강력했던 하나의 전통인, 이러한 전통과 단절한 것이다."(240, [Zapatistas! Documents of New Mexican Revolution]에 실린 부사령관 마르꼬스와의 인터뷰)

이것은 봉기 당시의 Zapatista에 대한 멕시코 내부에서의 적대적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봉기는 멕시코에서 전혀 불가능한 것으로 제도혁명당(PRI)과 좌파조합들은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유약함은 이들이 1910년대의 혁명 이후 꾸준히 보수화되고 제도화되어 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마르꼬스의 말은 또한 유로꼬뮤니즘으로 상징되는 사회민주주의 분파의 개혁주의에 대한 비판도 함의하고 있다. 멕시코의 현실은 사실 그러한 국가/자본과 PRI 그리고 노동조합의 거래와 타협으로 민중들의 자발적 봉기를 억압해 왔으며 그 와중에 '혁명의 불가능성'은 그 억압적 이데올로기 효과를 극대화하는 패배적 전술로 활용되어 온 그것이었다. 이런 '국가조합주의'와 '개혁주의'는 그러나 멕시코 민중의 현실을 타개하는 데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기껏해야  열정들을 '봉합'하는 수준에 그쳐 왔다. 이런 봉기의 열정이 폭발한 것이 Zapatista들이다.

조정환은 이러한 관점에서 Zapatista 봉기를 지금까지의 노동합운동의 공식적 테두리 외부에서 진행되었던 "자주적 노동조합 운동의 흐름들(1920년대 초의 CGT[프랑스 노동총연맹], 1940년대 말 1950년대 초의 CUT[브라질 노동조합센터], 1970년대 초의 TD, UOI, 이후 오늘날의 UNT, 그리고 이보다 급진적인 CIPM 등)과 일정하게 공명한다"(240)고 분석하면서도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면서  자본과의 협약으로 이끌려 가는 것과는 달리 혁명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점에서 그것과 구별된다"(240)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Zapatista는 사회민주주의적 개량주의를 전복하고 레닌주의로 회귀하는 '전위주의 혁명노선'인가? 이 질문은 이들이 애초에 마오주의와 게바라주의가 혼재한 소수의 게릴라들로 시작하였음에도 원주민들과의 직접대면을 통해 스스로를 전환시켜가는 과정을 바라볼때 우문이 되어 버린다.

"마르꼬스가 자주 '산들(mountains)'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게릴라 소그룹으로 출발한 자신들과는 구별되는 원주민 공동체의 대중들이다. 산들과의 대면, 즉 소수의 게릴라 전사들의 원주민 대중들과의 상면은 무엇을 가져왔는가? 그 대면 속에는 운동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기대가 있었다. 애초의 EZLN 그룹은 무장행동이 혁명과 권력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정부의 붕괴와 또 다른 당의 집권에 이어 마침내 대중들이 권력을 장악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다른 한편에서 원주민 대중들은 무장 투쟁을 매우 폭력적이고 공격적이며 권력있는 농장주들에 대항하는 방어의 형식으로 받아들였다. EZLN은 원주민 대중들의 이 직접적인 기대를 목적의식성에 의해 지도되어야 할 자발성으로 치부해 버리지 않고 바로 그것을 자신들의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이 원주민들의 현실이 지속적으로 자신들을 통제하도록 허용한 점에서 레닌주의적 전위당과 구별된다 ...... 그들이 지금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아니라 싸빠띠스따'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새로운 혁명의 시간은 낡은 시계로는 더 이상 재어질 수 없다."(242) 

이와같이 애초에 존재하던 원주민 대중들의 기대에 대한 EZLN의 유연하고 적극적인 수용의 과정은 그들 자신을 레닌주의적 전위노선에 묶어 둘 수 없게 하였다. 이것은 '대중관'의 대대적인 전환을 의미하는 바, '동원과 통제의 피주체'로서의 대중에서 '자율과 구성의 주체'로서의 대중으로의 변화인 것이다. 이러한 Zapatista의 대중관은 '자율(autonomy)'과 '존엄성(dignity)이라는 그들의 제일 원리를 형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며, 이것은 또한 오래된 '전위주의'와의 단절을 수행하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이 두가지 '단절'의 경험이 이들에게 가져다 준 것은 새로운 혁명적 주체성과 그들이 만들어 나가는 혁명의 경험이다. 조정환은 이러한 Zapatista의 독특성을 하비에르 비아뉴의 말을 빌어 "혁명 속의 혁명"(243, Javier Villanueva, 'Mayas and Zapatistas')으로 명명한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혁명의 계승을 통한 혁명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새롭고 독창적인 경험"으로서의 혁명, 그래서, 그것 자체가 혁명일 수밖에 없는 혁명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새로움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첫째로 '존엄성(dignity)'에 있다. "우리는 여기에 존재한다. 우리는 반역하는 존엄성이다"(243, 강조는 필자,  Forth Declaration of The Lacandon Jungle, 'Today We Say: We Are Here, We Are Rebel, Dignity, The Forgotten of The Homeland')라고 말하는 Zapatista들에게 존엄성이란 자신들의 '반역'이 존재하는 이유라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국(Negri, Antonio)이 수행하는 그 위선적인 '평화를 위한' 또는 '자유를 위한' 전쟁과는 천양지차다. 그것은 대상화된 대중의 권위인 국가나 당을 위한 존엄성이 아니라, 직접민주주의의 당사자이면서 양도할 수 없는 권능의 주체인 다중(multitude)의 존엄성인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이들의 혁명은 결코 경제적으로 결정되거나, 빈곤과 집단화된 노동에 의해 수동적으로 발현되는 힘(power)이 아니며, '삶 그 자체'의 욕구에 내재한 그래서 적극적으로 사회를 촉발(affection)하는 힘(puissance)인 것이다. 존엄성은 그래서 "기생적 존재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설치된 경계들, 관습들, 전쟁들을 무효화시키는 반역적 불경성으로 존재한다."(244, 강조는 필자)

새로움의 두 번째 측면은 첫 번째 측면의 현실화를 위한 '희망'이다. 이것은 마르쿠제식으로 말하자면, '현실원칙(principle of reality)'을 철저히 바라보면서 희망의 '쾌락원칙(principle of pleasure)'을 열망하는 것이다. 더 나은 삶, 지금과는 다른 삶에 대한 꿈으로서의 '희망'은 바로 전복적 친연성을 가진 Zapatista들의 존엄성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될 요소가 된다. 그래서, 그 희망의 현실화를 위해서 그들은 즐겁게 "권력의 볼을 후려치는 것"(245)이며, "민중의 열망들을 자루에 넣어 버리는 거짓 경계들, 시장의 조야한 실리주의들, 대안과 선택의 박탈상태 등을 거부하는 것이다."(245)

세 번째 측면은 그러한 희망을 실현할 '자유', '민주주의', '정의'를 말한다. 이것은 또한 '차이의 존중과 통일에의 열망의 결합'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멕시코에서의 혁명적 변화는 단일한 무대에서의 행동의 산물이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달리 말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무장 혁명이나 평화 혁명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수많은 방법들로써, 상이한 사회적 형식들 내에서, 헌신과 첨여의 다양한 수준들로 이루어지는 상이한 사회적 전선에서의 투쟁의 산물인 그러한 혁명일 것이다."(246, Marcos, 'Book of Mirrors'; 이원영 역, '거울들의 책', [당대비평] 6호) 

이를 통해 Zapatista는 어떤 방식의 중앙집중적인 조직적 통합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다차원적 전선과 자율적 다중들의 네트워크가 현실화되는 '공간'을 기획한다. 그것은 일종의 지도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유', '민주주의', '정의'는 통시적 결과로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지도제작의 경험치와 지도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지각변동의 강렬함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네 번째 측면은 이들의 새로움이 가지는 독특한 탈근대성을 지칭한다.

"만약 당신이 이성과 힘을 모두 가질 수 없다면 항상 이성을 택하고 힘은 적에게 주어버려라. 힘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해 주지만, 전쟁에서 승리를 안겨주는 것은 오로지 이성뿐이다. 지배자는 절대로 자신의 힘으로부터 이성을 얻어낼 수 없지만 우리는 우리의 이성으로부터 항상 힘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247, 마르꼬스, "제4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당대비평] 3호, p273)  

 이 새로움의 측면은 이들의 봉기가 전통적인 무장봉기가 가지는 의미와 다르다는 것과 동시에 우리에게 이들이 사용하는 '이성'과 '힘'이 또한 전통적인 의미와 상이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들에게는 '이성(ration)이 곧 힘'이 될 것인데, 그것은 권력으로서의 힘이 아니라, 바로 다중의 활력으로서의 힘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기생적인 권력과는 달리 그러한 권력의 힘을 산출해낼 수 있는 살아있는 활력으로서의 원주민들의 힘은 '무력'이 아니라 '이성'에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지배계급이 가지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재전유해야할 본래의 '우리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전제 하에서 이성은 더이상 계몽적이길 그치는 동시에, 대중들 자신의 지성으로 된다. 그래서, 힘은 이성을 제압하지 않고, 이성은 힘과 맞서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무기와 무장은 한 계급 혹은 집단이 다른 계급 혹은 집단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강제로 부과하는 수단으로 이해되었지만, 사빠띠스따들에게서 무기나 무장은 자신들의 이성적 올바름과 정치적 정당성을 보조하는 수단으로 위치지워진다."(247, 248)

 다섯 번째의 새로움 그것은 Zapatista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새로운 국제주의'에 관한 것이다.

"맛시모 데 안제리스에 따르면, 사빠띠스따들에 의해 고무된 국제주의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전통적 국제주의를 혁신한다. 먼저, 민족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서, 후자는 여전히 국제적인 것을 민족적인 것에 도구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에 반해 전자는 국제적인 것과 민족적인 것의 구별을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둘째는 노동운동과 여타 운동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서, 후자는 이 두 운동을 분명히 구별짓고 노동 운동에 여타의 운동들을 종속시켰음에 반해, 전자는 수많은 다양한 운동들의 공명관계에 주목하면서 그것들 간의 연합 혹은 가교의 구축을 지향한다."(249, 강조는 필자, Massimo de Angelis, 'Global Capital and Global Struggles: The Making of a New Internationalism and the Zapatista's Voice')

구별의 이완과 중심성의 탈각이 가져다 주는 직접적 효과는 위계구조에서 배제되거나 약화된 경향들을 적극적으로 끌어 안으면서 전선의 배치와 역량의 편성에 있어서 유동적이면서도 폭발적인 양상을 구성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국가주의 기획에서 배제된 모든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대한 '직접적 소통'으로서의 이러한 연대는 소수정파들 간의 연대 수준에서 사고되고 실천되었던 구좌파적 기획과는 그 방법과 본질에 있어서 상위하다. 그것은 삶의 욕구와 저항의 테크놀로지를 결합하는 과정이다. 네그리식으로 얘기하자면, 그것은 사회적 프롤레타리아트가 행하는 산노동의 자기가치화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려되는 새로움은 바로 혁명의 현동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Zapatista들에게 혁명은 목적인적인 대상이 아니라, 지금/여기 움직이는 운동의 활력이다. 그래서 주체성은 이 운동하는 활력 속에서 스스로를 정리하고 검증받으며, 구성한다. 이것은 앞서 말한 반중심적 조직관과 대중관에서 나오는 결론인데, 그들이 '복종하면서 지도한다'라고 할 때 그러한 '현동성'은 내재적 수위에서 현실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Spinoza가 다중을 상정할 때 그랬던 것처럼, 이들은 스스로의 권능을 누구에게도 양도하지 않으며, 국가를 그 대의기구의 영속적인 실체로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은 활력을 '장악'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행사'되는 것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이제껏 조정환의 글을 매개로 삼아 살펴본 Zapatista들의 '새로운 혁명'은 회고적인 혁명관에 대해 조종을 울린다. 그것은 끊임 없이 스스로를 실험하면서 오류를 통해, 또는 승리와 패배를 통해 성장하는 전복의 정치학이다. '물으면서 걷는다'라는 Zapatista들의 말은 이러한 정치학의 직접적 표현일 것이다. 그러므로, '소비에트의 절망' 이후로 이합집산하는 남한 사회 운동은 Zapatista에게 있어서 이미 과거일 것이며, 현재 새롭게 꿈틀거리는 다중의 역능에 섞이는 것이야말로 그 활력을 자신의 삶 속에 내재화 시키는 길이라는 것을 그들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현재 속에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또한 현재 속에서 미래 자체로 돌아가는 것, 그 직접행동이 지금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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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구판절판


3장의 경우 구조적으로 매우 흥미롭다. 영화적 기법. 교차 편집.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분위기. 그런데 어째서 야만인 존은 종교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매듭 진 채찍은 지금으로서도 매우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오히려 전체주의에 대한 비정상성만 배제한다면 무스타파 몬드의 가르침이 훨씬 명쾌하고 현실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몬드의 가르침에는 일종의 '선택'이 강요되고 있다는 것. 그것은 사악하다.
헬름홀츠 왓슨이나 버나드 마르크스 또는 레니나가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면 이 소설은 다른 방향으로 갔을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낭만적 관점의 한계? 그의 말년이 종교로 물들었다면 이 소설에도 그 징후가 있다는 것.

영어판 구절들을 읽으면 헉슬리 문체의 좀 끊어지는 듯 하면서도, 고저가 분명한 박진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번역도 훌륭했다고 본다. -단평쪽

For of course some sort of idea they must have, if they were to do their work intelligently - though as little of one, if they were to be good and happy members of society, as possible. For particularly, as every one knows, make for virtue and happiness; generalities are intellectually necessary evils. Not philosophers, but fret-sawyers and stamp collectors compose the backbone of society.
{12}'And that,' put in the Director sententiously, 'that is the secret of happiness and virtue - liking what you've got to do. All conditioning aims at that: making people like their unescapable social destiny.'
-p. 2/12 쪽

‘Stability,' said the Controller, 'stability. No civilization without social stability. No social stability without individual stability.'
-p. 33쪽

{Mustapha Mond}'Has any of you been compelled to live through a long time-interval between the consciousness of a desire and its fulfilment?'
-p. 36쪽

One hundred repetitions three nights a week for four years, thought Bernard Marx, who was a specialist on hypnopædia. Sixty- two thousand four hundred repetition male one truth. Idiots!
-p. 38쪽

{Mustapha Mond}'There were a thing called Heaven; but all the same they used to drink enormous quantities of alcohol.'
-p. 44쪽

A physical shortcoming could produce a kind of mental excess. The process, it seemed, was reversible. Mental excess could produce, for its own purpose, the voluntary blindness and deafness of deliberate solitude, the artificial impotence of asceticism.
-p. 57쪽

Speaking very slowly, "Did you ever feel,' he{Helmholtz} asked, 'as though you had something inside you that was only waiting for you give it a chance to come out? Some sort of extra power that you aren't using - you know, like all the water that goes down the falls instead of through the turbiness?'

-p. 57쪽

Words can be like X-rays, if you them properly - they'll go through anything. You read and you're pierced.
-p. 58쪽

The old man of the peublo had much more definitive answers. 'The seed of men and all creatures, the seed of the sun and the seed of earth and the seed of the sky - Awonawilona made them all out of the Fog of Increase. Now the world has four wombs; and he laid the seeds in the lowest of the four wombs. And gradually the seeds began to grow ... '
-p. 107쪽

But once you began admitting explanations in terms of purpose - well, you didn't know what the result might be. It was the sort of idea that might easily decondition the more unsettled minds among the higher castes - make them lose their faith in happiness as the Sovereign Good and take to believing, instead, that the goal was somewhere beyond, somewhere outside the present human sphere; that the purpose of life was not the maintenance of well-being, but some intensification and refining of consciousness, some enlargement of knowledge.
-p. 145쪽

One of the principal functions of the friend is to suffer (in a milder and symbolic form) the punishments that we should like but are unable, to inflict upon our enemies.

-p. 147쪽

{John}'How many goodly creatures are there here!' The singing words mocked 'him derisively. 'How beauteous mankind is! O brave new world ... '{The Tempest 5막 1장 중}
-p. 171쪽

{Mustapha Mond}'Because it's old; that's the chief reason. We haven't any use for old things here.' {John}'Even when they're beautiful?' 'Particularly when they're beautiful. Beauty's attractive, and we don't want people to be attracted by old things. We want them to like the new ones.' 'But the new ones are so stupid and horrible. …'
-p. 179쪽

{Mustapha Mond}'But that's the price we have to pay for stability. You've got to choose between {181}happiness and what people used to call high art. We've sacrificed the high art.'

-pp. 180-1쪽

{Mustapha Mond}'Actual happiness always looks pretty squalid in comparison with the over-compensations for misery. And, of course, stability isn't nearly so spectacular as instability. And being contented has none of the glamour of a good fight against misfortune, none of the picturesqueness of a struggle with temptation, or a fatal overthrow by passion or doubt. Happiness is never grand.'

-p. 181쪽

‘The optimum population,' said Mustapha Mond, 'is modelled on the iceberg - eighty-ninths below the water line, one0ninth above.'
-p. 183쪽

{Mustapha Mond}'Besides, se have our stability to think of. We don't want to change. Every change is a menace to stability. That's another reason why we're so chary of applying new inventions. Every discovery in pure science is potentially subversive; even science must sometimes be treated as a possible enemy. Yes, even science.'
{185}'You've had no scientific training, so you can't judge. I was a pretty good physicist in my time. Too good - good enough to realize that all our science is just a cookery book, with an orthodox theory of cooking that nobody's allowed to question, and a list of recipes that mustn't be added to except by special permission from, the head cook. I'm the head cook now. But I was an inquisitive young scullion ones. I started doing a bit of cooking on my own. Unorthodox cooking. A bit of real science, in fact.'

-p. 184/185쪽

'Sometimes' he{Mustapha Mond} added, 'I rather regret the science. Happiness is a hard master - particularly other people's happiness. A much harder master, if one isn't conditioned to accept it unquestionably, than truth.'
-p. 186쪽

{John}'But God doesn't change' {Mustapha Mond}'Men do though' 'What difference does that make?' 'All the difference in the world.'
{192}'God isn't compatible with machinery and scientific medicine and universal happiness. You must make your choice. Our civilization chosen machinary and medicine and happiness,'

-p. 190/192쪽

{Mustapha Mond}'It would upset the whole social order if men started doing things on their own.'

-p. 194쪽

{Mustapha Mond}'But industrial civilization is only possible when there's no self-denial. Self-indulgence up to the very limits imposed by hygiene and economics. Otherwise the wheels stop turning.'… 'But charity means passion, chastity means neurasthenia. And passion and neurasthenia means instability. And instability means the end of civilization. You can't have a lasting civilization without plenty of pleasant vices.'
-p. 194쪽

{Mustapha Mond}'civilization has absolutely no need of nobility or heroism. These things are symptoms of political inefficiency'

-p. 194-5쪽

{John}'But I like inconveniences,' 'We don't,' said the Controller. 'We prefer to do things comfortably.' 'But I don't want comfort. I want God, I want poetry, I want real danger, I want freedom, I want goodness. I want sin.' 'In fact,' Mustapha Mond, 'you're claiming the right to be unhappy.' 'All right then,' said the Savage defiantly, 'I'm claiming the right to be unhappy.' 'Not to mention the right to grow old and ugly and important; the right to have syphilis and cancer; the right to have too little to eat; of what may happen to-morrow; the right to catch typhoid; the right to be tortured by unspeakable pains of every kind.' There was a long silence. 'I claim them all,' said the Savage at last. Mustapha Mond shrugged his shoulders. 'You're welcome,' he said.
-p. 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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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이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8
고골리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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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투, Shinel] 찾아 읽음

 90년인가, 러시아 문학에 광분(?)해 있을 때 고골(그때는 '고골리'라고 했었는데)을 좋아했었다는 기억. 더듬어 보면, 푸시킨([에프게니 오네긴], [대위의 딸](?) ...)을 처음 보았고, 다음이 고골이었고 그 다음이 아마도 ... 투르게네프 ... 도스토옙스키 ... 체홉 ... 으로 나가다가 톨스토이에서 책을 던져 버린 것 같다(톨스토이의 장광설에 질려 버린 것). 그때의 선명한 감동이 다시 읽어도 여전하다는 것. 아까끼 아까끼예비치, 그의 유령이 금새라도 뒷덜미를 낚아챌 듯 섬뜩하다는 것. 물론 이 책에 나오는 다른 작품들도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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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 (구) 문지 스펙트럼 21
G. 모파상 지음, 이봉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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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곗덩어리] 찾아 읽음.

이 작품도 거의 16년 만에 다시 보았음. 여전한 감탄사와 참을 수 없는 웃음. [여자의 일생](불어 제목은 그냥 [Une Vie]로 기억됨. 영어본 제목이 아마 [A Woman's Life]였지)을 다소 지루하게 보고 단편들을 봤는데, 한 참을 웃었다는 추억. 지금도 마찬가지. 졸라의 [나나]가 다소 충격적이었다면 모파상의 단편들은 매우 신랄했었음. [비곗덩어리 Boule de Suif]가 모파상의 단편들 중 가장 걸작이라는 세간의 평은 대체로 정확하다고 생각됨. 그런데 마지막 장면, 코르뉘데는 무슨 의도로 '라마르셰예즈'를 부르는 것일까? 조롱? 연민? 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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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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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논고] 찾아 읽음.

휘갈겨 쓴 명작. 각자의 관점에서 속임수의 주체는 없음. 씌여지지 않은 것은 바로 반-역사라는 것. 반그노시스주의자, 반헤겔리안인 국립도서관장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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