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하느님
조정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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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3부작([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쓰면서, 조정래 선생은 자신이 '원고지의 감옥'에 갇혀 사는 수인이었다고 회고했다. 작품들을 쓰면서 얻은 고통스런 지병을 생각할 때 선생의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래서 엄청난 스케일과 분량의 그 책들이 서점이나 도서관 서가에 사열(?)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난 경외감 때문에 오체투지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조정래는 그런 작가다. 남한 땅의 어떤 평론가나 작가, 철학자도 그를 쉽게 비평할 수 없으며, 그의 작품들은 곧 남한 근현대사의 'Histories apodexis'(헤로도토스의 [역사], '연구보고'란 뜻)에 다름 아니다.

이번 책은 3부작에 비할 바가 안되는 '소품'이다. 그러나 나름의 응집력을 가지고 있으며, 특유의 역사감각으로 2차대전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시각이 항상 그렇듯이 천연한 민중의 시각이 이 책의 핵심이다. 일본군에서 소련군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일군으로 연명하는 '고려인'들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민중이란 그러한 세계사적 사건들의 참혹한 피해자일 뿐 아니라, 그 사건 속에서도 생기를 잃지 않는 생명력 자체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민중에 대한 요상한 감상주의 관점을 벗어나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나는 조정래 선생이 이 소설을 통해 '민족'이라는 그 감상적 관점의 구심력에서 많이 벗어나려고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인물들은 '고려인'이라는 '민족 정서'에 기대어 서로를 인식하는 듯 하지만, 사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생존'이며 '가족'이고 또한 자신의 특유한 정체성이 아닌가 싶다. 비극으로 끝나는 작품임에도 암울함이 느껴지지 않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문학동네], 2006 겨울호와 2007 봄호에 각각 분재된 작품을 일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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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대사상사론 한길그레이트북스 70
리저허우 지음, 정병석 옮김 / 한길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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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쩌허우를 처음 소개 받은 것은 동양철학을 전공하는 후배(지금은 대만에 유학 가 있다)에게서다. 한참 주자로 석사 논문을 쓰고 있는 그에게 책 소개를 부탁했었다. 하나는 주자의 삶과 사상을 간략히 볼 수 있는 좋은 번역서고 또 다른 하나는  풍우란 외에 최근에 나온 중국철학사 책이었다. 전자의 책으로 소개 받은 것이 [인간주자]였고 후자의 책으로는 바로 이 책을 소개 받았었다. 그 후배는 이 책을 읽고 "가슴이 확 뚫리는" 활연관통(!)의 체험을 했노라고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이러니 안 읽어 볼 수가 없었다. 

이 책을 보고 맨 처음 드는 생각은 노사광이나 풍우란이 고대 사상을 다루는 바에 비해, 이택후(리쩌허우)의 방식은 정말 굉장히 자유롭다는 것이다. 노사광, 풍우란이 공자라면, 이택후는 장자의 스케일에 가깝다. 그는 철학사를 '중국인의 문화 심리구조'를 드러내는 하나의 중요하고 (아마도 유일한) 전거로 삼는다. 이것은 분명 유물론적이고 맑스적이다. 이 책이 '사상사'가 아니라 '사상사론'인 이유도 여기 있다. 저자 자신도 맑스주의 방법론을 따른다고 말한다. 이런 까닭에 그에게는 고대 텍스트의 진위 여부나, 철학자들의 생몰년을 따지는 훈고적인 작업이 중요하지 않다. 이런 경우에 중요해 지는 것은 저자 자신의 역사적 관점의 건전성이다. 내가 보기에 리쩌허우의 역사관은 중국 민족주의(중화주의라고 하기에는 좀 심하고)에 약간 기울어 있다. 이러한 관점이 완전히 불건전하다거나 이로써 중국고대사상사를 덧칠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엄밀함을 소중히 하는 학자며, 유학자인 것도 또한 분명한 것이다. 

다른 사적 문헌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정리가 필요하다. 독서카드를 쓴다면 아마 리쩌허우 자신의 독특한 관점들, 경서 해석들 때문에 좀 많은 분량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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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과 프로이트 옥스퍼드 위대한 과학자 시리즈 10
마가렛 머켄하우프트 지음, 김문영 옮김 / 바다출판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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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경에 프로이트 선집이 이미 나와 있었다. 그것을 나는 당시에 다니던 대구 시립 두류 도서관  2층 인문학관에서 읽었었다. 그 책의 위치가 어디였었는지도 기억이 난다. 그것은 서가 복도에 연한 책꽂이 아래에서 세번째 열 맨 왼쪽부터 차례로 꽂혀 있었다. 파란색 하드커버에 많이 낡았었다. 기억이 아슴아슴하지만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프로이트라 ... 그건 내게 빠져들면 들수록 더 매력적인 미궁과 같았다. 지금은 그 키클롭스로부터 좀 멀리 떨어져 있는 터이지만 그때는 그랬었다. 

이 책은 프로이트에 대한 작은 요약이다. 뭘 크게 기대한다거나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프로이트를 정신분석한 책도 있고, 또 영어판으로는 이보다 더 좋은 책들이 꽤 나와 있으니 말이다. 다만 교육적 가치가 있고, 사진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으니 볼 만하다.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적 평전을 기대한다면 읽지 않는 것이 좋다. 이 책의 저자는 어쨌든 프로이트를 한 '인간'이라는 관점에서보다 '위대한 과학자'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의 정신분석에 대한 설명도 짧은 임상 경험 서술 정도로 그치고 있다. 아마 출판사나 역자도 이것 이상을 바란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일독을 권할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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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에르바하 인문 예술 총서 21
한스 마르틴 자스 / 문학과지성사 / 198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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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dwig Andreas Feurbach(1804-1872)는 내게 맑스의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그 유명한 11번! "지금까지 철학자는 세계를 해석만 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로 더 많이 익숙하다. 그의 [미래철학의 근본 원칙]을 몇 년 전인가 읽었지만, 무슨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포이에르바하의 이 책보다는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as Christentums)이 더 기억에 남는다. 

이 책은 포이에르바하의 생과 사상에 대한 다이제스트다. 문고판이지만 작은 글씨로 인쇄된 책이라 내용이 부실하지도 않다. 그러나 지금은 절판된 책. 1841년 [기독교의 본질]이 출판됨과 동시에 시작되는 포이에르바하의 아카데미 밖에서의 활동들을 눈여겨 보면 그가 굉장한 의지와 자신감을 가지고 혁명기에서의 지식인의 위치를 자리매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자리는 강연장이었고, 스크럼과 총성이 가득한 길거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규정은 어떤 식의 비판이 가능할 것이다. 결국 포이에르바하는 혁명가는 아니었고, 다만 혁명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이집트 학자거나, '미네르바의 부엉이'(Hegel)였을 것이라는 그런 평가 말이다. 맑스에 의하면 포이에르바하는 헤겔의 철학을 '두 다리'로 서게 했지만, 결코 그 자신의 한계 밖으로 즉, 인간주의 또는 '사랑의 종교' 밖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1871년은 빠리 꼬뮌의 해였지만, 그의 노쇠한 정신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변역에서 비문이 몇몇 보이고, 가독력이 좀 떨어진다는 것이 이 책의 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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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사:고대편
노사광 / 탐구당 / 199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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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된지 꽤 오래된 책임에도 그 가치가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중국철학사에 관한 책으로는 고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호적, 이택후, 곽말약의 중국철학사가 있고, 또한 풍우란의 그것이 있다. 중국철학의 성격상 이들 학자들에게 철학사 자체가 곧 자신의 철학적 관점이 담긴 철학사상서가 된다. 

노사광 선생의 관점은 자신의 선철인 호적과 풍우란을 비판적으로 흡수하는 것이다. 이 책의 서문격인 글에서 그는 호적이 '철학사'라는 이름에 값하는 철학사를 쓰지 못하고 문헌사 위주의 전적을 마련한 반면, 풍우란은 '철학'은 맞지만 그 시각이 서양 고대철학과 플라톤의 그것에 갇혀버렸다는 것이다. 자신은 방법론과 관점에 있어서 더 확고하고 넓은 기반을 가지고 출발한다고 말한다. 

책을 계속 읽다 보면 노사광 선생의 관점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이를테면 송유 이래 논의된 이른바 '도통'의 직계를 ('공맹육왕'(孔孟陸王)을 거부하고) '공맹정주'(孔孟程朱)로 놓는다든지, 순자를 극구 공자의 후계로 인정하지 않고, 그의 사상을 말단으로 취급한다든지 하는 측면들이다. 이에 따라 한비자나 노자, 장자는 더 이상 크게 취급되지 않는다. 하여간 선생의 중심은 '공맹'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를 정통의 관점이라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또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진고응이 [노장신론]을 쓰면서 매우 성마르게 비판한 것은 학자들의 이런 '정통'에의 집착이었을 것이다. 

관점 여하를 불문하고, 이 책은 일독으로 그쳐서는 안되는 책이다. 모든 '사적' 문헌들이 그렇지만 중요한 저서는 정리하고, 두 세번 읽으면서 완전히 '관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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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6-03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벼리님 철학책 열심히 읽으시네요. 저는 자꾸 주변에서만 맴돌고 있습니다. 어서 안으로 문열고 들어가야할텐데. 이 책 네 권짜리도 집에 모셔놨죠.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맨날 보기 편한 풍우란 것만 참고했었죠.

nomadia 2007-06-04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풍우란 책이 정리가 더 잘 된 것이지요. 저는 예전에 한 번 훑어 보고 지금 다시 보고 있습니다. 아프락사스님도 여러 방면의 책들을 많이 읽으시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