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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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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부분의 기억은 전체로 인식된다. 오에 겐자부로 하면 ‘죽음’과 ‘개인적 체험’이 떠오른다. 그동안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와 『익사』를 읽었다. 제목에서 보듯 모두 ‘죽음’이란 단어와 관련이 있다. 두 권의 책 모두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 녹아 있다.

 

자기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을 경외한다. 개인적 체험을 쓰는 일은 어설프게나마 봉합했던 고통의 시간을 다시 통과해야 하는 작업이고, 다른 사람에게 내 상처를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초기, 중기, 후기 단편이 실려 있는 단편집이다. 중기 편에 실린 작품들은 연작 형태의 작품들이 실려 있다. 이 책은 오에 겐자부로 문학의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 역시 ‘죽음’과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오에 겐자부로는 ‘쓴 것을 계속 고쳐 나가며 내용이나 문체를 확정 지어 가는 일은 소설가로서의 습관’이라고 했다. 「사자의 잘난 척」은 「기묘한 아르바이트」를 다시 쓴 작품이다. 두 작품은 모두 ‘기묘한 아르바이트’를 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개백정을 도와 개를 처리하거나 해부용 시체를 처리하는 것으로 평범한 아르바이트가 아니다. 「공중 괴물 아구이」의 ‘나’는 괴물에 씌었다는 작곡가D의 시중을 드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역시나 평범한 아르바이트가 아니다. 「기묘한 아르바이트」의 대학원생은 자신 역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무자비하게 개를 죽이려는 개백정의 행위는 비열하다고 몰아친다. 개백정은 개를 죽이면서도 개를 굶겨 죽이는 것은 잔인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행동은 타당하며 타인의 행동은 비난의 대상이다. 초기 단편은 인간의 이중성과 삶의 역습을 그렸다. 개를 죽이려다 개에게 물려 사느냐 죽느냐에 처하고, 검둥이 군인을 가두지만 오히려 그에게 갇히는 상황에 부닥친다. 나는 상대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을 보면 오십보백보다. 인간은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일까.     

 

「사자의 잘난 척」의 여학생이 아르바이트하는 이유는 ‘병원 가서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관점에서 낙태는 한 인간을 말살하는 책임을, 그대로 두면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이렇게 애매한 기분인데 새롭게 그 위에 또 하나의 애매함을 창출해 내는’ ‘살인 못지않은 중대한 일’이다. 초기 단편의 인물들은 이름이 없다. ‘나’이거나 대학원생, 여학생, 학생, 소년, 동생으로 불린다. 이들에겐 삶의 희망이 없다. 노년이 아닌 청년인데도 그렇다. 전쟁의 경험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살아갈 뿐이다. 분노를 억누르며 이젠 불안하지 않다고 스스로 합리화하며.

 

「슬기로운 ‘레인트리’」(연작「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1)에서 세미나에 참석한 ‘나’는 궁금해 하던 나무에 대해 중년의 미국 여자 아가테로부터 슬기로운 ‘레인트리’라는 말을 듣는다. 레인트리는 밤에 소나기가 내리면 모조리 흡수하지 않고(혹은 흘려보내지 않고) 잎사귀에 물을 저장해 두는 나무다. 레인트리는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그가 알게 된 진실은 참혹함이었다. 초기에 비해 연작소설로 이루어진 중기 작품들은 읽기가 버거웠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와 『익사』의 주인공 ‘나’에겐 장애인 아들이 있었다. 『오에 겐자부로』의 중기 연작소설에도 장애인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오에 겐자부로에게 장애인 아들은 평생 안고 가야하는 삶의 무게였다. 연작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와 연작 「조용한 생활」은 ‘나’의 장애인 아들 이요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연작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의 화자는 이요의 아버지‘나’이고, 연작 「조용한 생활」의 화자는 이요의 여동생이다.

 

내가 여기서 기술하는 것은 그 자리에서 내가 논전을 재구성했던 것에 다시 한 번 기억의 변형이 주어지고, 시간이 가져오는 어긋남에 영향을 받으며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단순하고 지루한 요약이 되지 않도록 그 자리에서 느꼈던 시각적인 풍경도 곁들려 기록하려 한다.(「슬기로운 ‘레인트리’」(연작「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1), 370-371쪽)

 

연작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에는 소설가 ‘나’가 연작 「레인트리」를 쓰게 된 이야기가 등장한다. 연작「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를 포함한 중기 연작들과 후기 단편은 각자의 단편 속에서, 다른 작품과의 관계에서 ‘다시 한 번 기억의 변형이 주어지고, 시간이 가져오는 어긋남에 영향을 받으며 재구성’한 작품들이다.

 

“이요, 왜 그랬어? 아직도 괴롭니?”하고 묻자

“아닙니다, 완전히 나았습니다!” 하고 힘차게 대답했다. “나는 물에 가라앉았습니다. 앞으로는 헤엄을 치겠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헤엄을 치기로 했습니!(「떨어진다, 떨어진다, 절규하며……」(연작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3), 511쪽)

 

‘나’는 자신이 없는 세상을 살아갈 아들에 대해 걱정했지만 오히려 아들의 순수한 모습을 통해 삶의 비밀, 삶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배우게 된다. 그는 아들을 통해 죽음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알게 된다. 이요는 알려 주었다. 삶은 죽음을 향해 가는 행보지만 ‘매우 힘들지만 최선을 다해야’ 한다, 라는 것이라고.

 

‘1년쯤 전에 나는 10년이 넘도록 손대는 일이 없던 단편소설을 하나 발표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 장르를 멀리 했던 것이나 또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이 분야의 일을 하려고 하는 건 요컨대 나의 작가로서의 삶이 내부에서 새롭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이제부터 되는 이야기와 관계가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람의 인생이란 결국 죽음을 향한 행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아무튼 그 오랜만의 단편의 주제는 ‘레인트리’였다.‘(거꾸로 선 ‘레인트리’(연작「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4), 370-371쪽)

 

인생이란 결국 죽음을 향한 행보에 지나지 않는다면 삶을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삶에 희망이 없다면 묵묵히 현실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때로는 분노가 뚝뚝 떨어지겠지만. 언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과 같은 순수한 용기를 가진 이를 만나고 싶다. 그가 잠자고 있는 내 순수한 용기를 깨워주기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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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밥도둑
황석영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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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지, 간장에 담근 무장아찌와 깻잎, 김이 차지했던 식탁은 봄 내음을 간직한 봄동 겉절이와 달래무침, 바다향이 가득한 톳무침, 감태무침, 파래무침 등속이 번갈아 오른다. 덕분에 잃었던 미각이 톡톡 돌아왔다.

 

『황석영의 밥도둑』은 『노티를 꼭 한 점만 먹고 싶구나』(디자인하우스, 2001)의 개정판이다. “노티를 꼭 한 점만 먹고 싶구나.”(90쪽)는 황석영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하신 말이다. 황석영에 의하면 노티는 ‘약과 비슷한 것도 같고 모양은 지짐이(녹두 빈대떡)와 비슷’(95쪽)한 음식이다.

 

요즈음은 그때처럼 구수한 기장쌀을 구하기 힘들 테지만 어쨌거나 찰기장을 빻아다 시루에 찐다. 엿기름가루에 물을 내려 우려낸다. 익은 기장쌀가루와 엿기름가루를 섞고는 우려낸 엿기름물을 붓고, 소금 간을 하고 참기름 넣어서 반죽을 한다. 반죽을 아랫목에 한두 시간 덮어두어 삭힌 다음에 손바닥만한 크기로 만들어 약한 불에 지져낸다. 이것을 식혀서 꿀에 잰 것을 항아리에 차곡차곡 넣어 장독대에 내다 놓고 먹는다.(97~98쪽)

 

노티는 정성이 많이 들어간 음식으로 보인다. 먹고 싶어도 만들어 달라고 말하기 미안하고 만들어주고 싶어도 선뜻 만들겠다고 나서기 어려워 보인다. 노티는 황석영의 어머니가 어린 시절 고향에서 형제들과 함께 먹은 음식이자 황석영도 명절 때 외가댁 식구들과 먹은 음식이었다. 황석영 어머니가 말한 “노티를 꼭 한 점만 먹고 싶구나.”는 이제는 돌아갈 수 그 시절, 가족이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다.

 

“왜 아버지 같은 사람과 결혼했어요?”

그녀의 어머니가 답한다. 그이가 누구라는 건 동네에서 다들 알구 있었다.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고 가는데 앞자리에 그이가 앉아있었어. 검은 물 들인 군복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목덜미 아래로 비듬이 하얗게 떨어져 있더구나. 나는 그 비듬을 털어주고 싶었어.“

그것은 살가루이기도 하고 뼛가루 또는 눈이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말한다.(77쪽)

 

삶이 고통이면 타인의 아픔을 들여다보기 힘들다. ‘함께’ 보다는 ‘일단 나부터 살고’라는 사고가 앞선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다 같이 가난했던 시절, 내 아픔만큼 타인의 아픔도 고통이었던 시절 말이다. 그때 우리는 함께 고통을 견뎠다.

 

돼지껍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몇 점 먹는 정도다. 어느 날, 외출하신 아버지는 돼지껍데기를 들고 오셨다. 정육점을 운영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 친구분이 주셨다고 하면서. 어머니가 난감해하셔서 인터넷에서 손질법을 찾아 다듬었다. 마늘, 생강, 소주, 월계수 잎을 넣고 삶은 후 건져보니 처음 봤을 때보다 상태가 더 나빴다. 솟은 털과 두툼한 기름이 가득했다. 면도칼로 털을 깎고 기름을 제거하고 씻어내길 반복했다. 손질하는 내내 생각했다. 차라리 사 먹는 게 낫겠다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고춧가루 팍팍 넣어 매콤하게 볶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나는 소주와 곁들여 돼지껍데기를 먹었다. 아버지는 맛있다고 하시면서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돼지껍데기라고 하셨다. 처음 알았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돼지껍데기라는 걸. 평생을 건설 현장에서 일했던 아버지는 돼지껍데기에 소주 한 잔으로 하루의 피곤을 푸셨을 것이다. 연로한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는 일은 서글프다. 돼지껍데기는 언젠가 그리움의 음식이 될 것이다. 먹먹함이 밀려온다.

 

전라도 광주에 사는 친구가 있다. 결혼을 하고 몇 번의 이사 끝에 광주에 정착했다. 내가 사는 지역과 거리가 멀어 만나기 쉽지 않다. 다행히 친정집이 내가 사는 곳과 같아 친정집에 오는 날이면 시간을 내어 만난다. 그녀를 만나 맥주에 치킨을 먹었다. ‘장에 갔던 가장이 어스름한 달밤에 막걸리 한잔으로 거나해져서 타령 한소리 읊조리며 영을 넘어올 제 새끼줄로 꿰어 들고 오던 것이 간고등어 한 손이다.(126쪽)’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내 아버지가 술 한 잔 걸치고 들고 오신 건 치킨, 아니 통닭이다. 많은 치킨을 먹었지만 어린 시절 먹었던 통닭과 맛이 같다고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시간이 흐르니 정말 그 맛이었을까 싶다. 친구와의 시간이 즐거워 내가 맛을 착각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의 맛은 언제 누구와 먹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던가. 

 

어느 먼 산골이나 바닷가 어촌에서 두 사람이 먹던 음식의 맛은, 지금 아무데서나 다시 찾아 먹을 수 있는 흔한 먹을거리라라 할지라도 다시는 되살려낼 수가 없다. 또한 그녀가 가끔씩 콧노래를 부르며 아침을 준비하던 달그락거리는 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식탁 맞은편에서 따뜻한 눈빛으로 이편을 건너다보면 날의 맛을 어디서 되살려낼 것인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물처럼 지나간 시간은 자취도 없지만 그 감각만은 생생하다.(48-49쪽)

 

『황석영의 밥도둑』을 읽으며 우리 음식의 다양함을 봤다. 유럽의 음식을 보며 세상에는 안 먹어 본 음식이 참 많구나 생각했다. 입안에서 침이 고였다. 같은 재료로 같은 사람이 만들어도 같은 맛이 나지 않는다. 맛은 그리움이다. 음식의 맛은 즐겁던 또는 슬펐던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나누어 먹던 음식을 시간이 지나 떠올렸을 때 가장 맛있다.

 

운 좋게(?) 아직 어머니의 밥을 먹는다. 각자의 가정이 있는 언니나 동생들은 엄마가 만든 만두나 간장게장, 감자탕이 그 어떤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 맛있다는데, 난 잘 모르겠다. 아마도 그리움이 아닌 일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훗날 덜 그리워하려면 열심히, 감사하게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더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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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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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살! 이 나이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어떤 문장이 적절할까?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시스터 캐리』에서 캐롤라인 미버의 나이 열여덟 살을 말하며 ‘무지와 젊음의 환상으로 가득찬, 수줍으면서도 밝은(11쪽)' 나이라고 했다. 가족들이 캐롤라인에게 ’시스터 캐리‘라고 부른 이유도 같다. 삶에 대한 불안보다는 기대가 큰, 그래서 세상이 만만한 나이.

 

캐리는 고향 컬럼비아시티를 떠나 시카고로 간다. 캐리(Carrie)는 ‘carry'와 발음이 같다. 'carry'엔 옮기다’의 뜻이 있다. 그녀는 컬럼비아시티에서 시카고로, 그리고 뉴욕으로 삶을 옮겨 갔다. ‘carry’엔 ‘짊어지다’와 ‘견디다’의 뜻이 있다. 줄어든 것 같으면 다시 느는 것이 삶의 무게가 아닌 가 싶다. 그녀의 삶도 그러했다.

 

그녀는 세 명의 남자를 만났다. 첫 번째 남자는 영업사원 드루에였다. 1989년의 시카고는 희망의 도시, 가능성의 도시였지만, 경험이 부족한 사람에게까지 기회를 주는 도시는 아니었다. 환상은 ‘현실의 냉소’에 쉽게 깨진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달콤한 유혹이 다가온다. 진실을 알지만 거부하고 이건 사랑이라고 자기 최면을 건다. 드루에가 캐리에게 손을 내민 이유는 사랑이 아닌 욕정이었다. 캐리가 드루에의 손을 잡은 건 사랑이 아닌 돈이었다. 허스트우드가 끼어들지 않았어도 그들의 관계는 깨졌을 것이다.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가진, 원하는 것을 누릴 수 있는 허스트우드가 행복하지 않은 건 욕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젊음을 간직한 캐리는 그가 찾은 새로운 욕망이었다. 캐리가 허스트우드에게 마음이 끌린 건 그가 상류층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기에 그는 드루에보다 자신의 욕망을 더 많이 실현해줄 남자였다. 그녀가 그를 따라나선 건 그의 거짓말 때문이지만 자신의 선택이기도 했다.

 

허스트우드는 그녀를 선택함으로써 돈과 명예, 가족 등 많은 것을 버렸지만, 캐리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그와 살 생각은 없었다. 그녀에겐 미안함보다 현실이 우선이었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여자, 특히나 젊고 예쁜 여자와의 사랑을 믿지 말라, 라는 것으로도 읽힌다. 『시스터 캐리』는 새로운 사랑을 찾았다는 이유로 아내를 버리고 젊은 여자를 선택한 불륜남들은 좋아하지 않을 책이고, 버림받은 아내로선 통쾌한 책이다.

 

에임스는 드루에와 허스트우드 만큼의 관계로까지 발전하진 않았지만 캐리의 마음을 끈 남자이다. 그는 부자로 사는 것보단 훌륭하게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믿는 남자였다. 그녀가 에임스에게 매료된 건 자신이 만났던 남자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연애하진 않지만 만약 연애했어도 금방 끝났을 것이다. 삶의 가치가 다르면 존경할 순 있어도 함께 살 순 없기에.

 

드루에의 소개로 우연히 무대에서 연기했던 캐리는 허스트우드의 파산으로 맞은 절망의 순간 다시 배우가 된다. 간절한 마음과 부단한 노력에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게 꿈인데 그저 ‘결혼’이라는 틀에서 안정적 보호를 받으며 화려하게 살고 싶었던 그녀가, 배우의 꿈을 꾼 적도 없고 제대로 노력도 하지 않은 그녀가 유명 배우가 된 것을 보니 그녀의 행운이 부럽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그녀는 꿈을 이루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사라졌는데도 ‘삶의 완전한 기쁨으로 가는 문은 열리지 않았다(593쪽)’고 생각했다. 그녀는 과거의 허스트우드처럼 누군가가 간절히 바라는 삶을 살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그녀가 불안했다. 그녀가 허스트우드의 전철을 밟게 될까 봐. 그녀는 기억해야 한다. 순간의 감정은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는 허스트우드의 교훈을. 어떤 사람들에겐 순간의 감정이 인생을 지탱하는 근원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어떤 경우든 선택의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한번 살아보고 싶은 삶이 수없이 많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한 번에 한 가지씩밖에는 누릴 수가 없습니다. 멀리 있는 것을 향해 아무리 손을 내밀어봐도 소용이 없지요.”(627쪽)

 

현실 속 나의 삶은 시시하고, 멀리 보이는 타인의 삶은 근사하다. 근사하게 보였던 삶도 현실이 되면 시시해진다. 복잡한 삶! 완전한 기쁨을 얻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해 선택하고 나아갈 뿐이다. 시스터, 어린 여자 아이의 시간을 끝내고 이젠 어른의 시간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오늘만을 살든 내일을 위해 살든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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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의 행복 - 행복해지고 싶지만 길을 몰라 헤매는 당신에게
법륜 지음, 최승미 그림 / 나무의마음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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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니?”

그것은 선배의 인사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안녕!”이나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했을 때 선배는 “행복하니?”라고 인사했었다. 언제 봐도 평온한 얼굴인 선배를 보며 전직이 신부님이 아닐까 싶었다. 훗날, 선배가 어둠의 세계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쪽 다리를 저는 건 그곳을 나오면서 두들겨 맞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 알았다. 다른 사람에겐 시시한 삶이 누군가에게 죽음을 각오해야 가질 수 있는 삶이라는 걸. 그것은 내가 스무 살에 만난 삶의 비밀이었다. 잊고 있었다. 행복하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그 용기는 내 마음에서 나온다는 걸.

 

삶이 만만했던 시간이 지나고 지금은 ‘일말의 가능성’과 ‘회복 불가능성’ 사이에 발 하나씩 올려놓은 채 어제는 왼쪽, 오늘은 오른쪽으로 흔들리며 살고 있다. 법륜스님은 말씀하셨다. 마음의 습관을 고치고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하라고. 무심결에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누가 그걸 모르나”였다. 최선을 다했으면 결과는 상관없다고 위로하지만 허무한 결과는 삶의 의욕을 떨어뜨린다.

 

횡단보도에서 파란 불이 조금 남으면 뛰어 건너지 않고 다음 파란 불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어느 날, 파란 불이 조금 남아 평소처럼 건너지 않고 다시 파란 불이 켜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빨간 불 그대로였다. 서둘러 가야 하는 길이 아님에도 조바심이 일었다. 실제 빨간 불의 시간은 내 생각만큼 길지 않았을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살아갈 시간이 살아온 시간보다 짧다는 것이다. 조급했던 청춘엔 나이를 먹으면 삶의 여유가 있을 줄 알았다. 막상 어른이 되니 청춘의 조급함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부족한 것도 아니고 넘치는 것도 아니에요. 존재는 다만 존재일 뿐이에요.

자신을 너무 위대하게 생각하니까 자기 자신이 초라하게 보여 위축되는 거예요. 사람이나 동물이나 풀이나 그냥 한 존재일 뿐입니다. 인간도 산에 사는 다람쥐나 토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하나의 동물입니다. 동물 중에서 의식 작용이 조금 낫다 하는 정도예요.

산에 사는 다람쥐나 토끼도 괴로워하지 않는데, 사람이 사는 게 힘들다고 괴로워하는 건 분명 잘못된 겁니다. 사람이 얼마나 속박을 받고 살고 있으면 날아가는 새를 부러워하겠어요.

우리는 모두 풀 같고 개미 같은 존재입니다. 미미하지만 사실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것을 탁 깨달아버리면 남이 나를 어떻게 보든 신경 안 쓰고 편안히 살 수 있으며, 남의 인생에도 간섭하지 않게 됩니다.(35쪽)

 

산에 사는 다람쥐나 토끼도 괴로워하지 않는데, 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삶의 고단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괴롭지 않다는 건 인간의 시선일 뿐이다. 인간이 새를 부러워하는 건 일시적인 기분이지 지속적인 마음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부족한 것도 아니고 넘치는 것도 아니에요. 존재는 다만 존재일 뿐이에요.'라는 말은 부족한 능력으로 위축된 나를 위로해주었다. 삶이 고통스러운 건 나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법륜 스님은 욕심과 원은 다르다고 하셨다.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괴로운 마음에 시달리면 그것은 욕심’이라고 하셨다.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태평하기는 어렵다. 괴로움이란 녀석은 내 머릿속에 터를 잡고 나갈 내색을 하지 않는다. 내 마음은 너무 약해 그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다.

 

마음을 바꿔도 불행한 상황이 확 달라지진 않는다. 영화에는 주인공 외에 또 다른 주인공과 조연, 엑스트라가 있다. 그들의 부딪힘은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한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삶은 자신과 타인의 부딪힘으로 만들어진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법륜 스님의 말씀처럼 마음을 내려놓은 일은 필요하다. 뉴스를 보면 세상엔 나쁜 사람들만 있는 것 같지만, 실제는 선한 사람이 훨씬 많다. 나부터 마음을 내려놓다 보면 불행한 상황은 나아질 것이다.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어떤 일을 이루려면 온 힘과 정성을 다해야 한다. 중요한 건 누군가의 눈물을 발판으로 이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1월은 새해가 시작하는 달이지만 3월은 새로운 일상이 시작하는 달이다. 『법륜 스님의 행복』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흔들리는 마음을 잡고 다시 꿈을 꾸기에 적당한 책이 아닐까 싶다. ‘일말의 가능성’과 ‘회복 불가능성’ 사이에서 전자에 몸의 무게를 옮긴다.

 

“행복하니?”

이제 선배는 묻지 않지만, 답한다. “조금은요. 내일은 더 행복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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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일인자 1~3 세트 - 전3권 (본책 3권 + 가이드북) - 1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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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일인자라고 하면 특정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뜻한다. 『로마의 일인자』는 『가시나무새』의 콜린 매컬로가 20년 동안 집필한 <마스터 오브 로마> 시리즈 제1부로 여섯 번이나 집정관 자리에 올랐던, 실질적 로마의 일인자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좋은 집안 출신임에도 암울한 과거를 지닌 미스터리한 술라 중심으로 정치가들의 욕망, 그들과 얽힌 여자들의 사랑, 그리고 어떻게든 생을 지켜내려는 하층민들의 분투를 그리고 있다.

 

우리는 늘 뭔가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왔다. ‘지배’라는 단어는 ‘속박’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떠오르는 까닭에 좋게 다가오진 않는다. 과거엔 신분, 현재는 돈이지만 둘은 늘 상호 협력해 왔다. 과거나 현재 모두 돈과 혈통 한가지만으로 힘을 유지하기 힘들다. 권력자들이 재력가들을 손을 잡는 이유다.

 

파트리키 귀족 출신 술라는 태생만으론 집정관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돈이 없었다. 가난한 그는 어둡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술라에게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돈이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재력가였지만 고귀하지 않은 혈통이 약점이었다. 신이 한 사람에게 모두를 주지 않은 건 공평하게 싸우라는 뜻일까. 아니면 서로 합심하라는 뜻일까. 유서 깊은 집안으로 막강한 정치력을 가졌으나 돈이 없는 율리시스 카이사르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큰 딸 율리아와의 정략결혼 제안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로선 이미 결혼했고 율리아보다 서른 살이나 많았다 하더라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율리아는 25년이나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던 본부인 그라니아와 달리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웠다. 결혼 생활 내내 남편에게 최선을 다했음에도 버려진 그라니아에게 연민이 든다. 어쩌겠는가. 상인의 딸로 태어난 것을 원망할 수밖에.

 

율리시스 카이사르의 둘째 딸 율릴라는 슐라를 사랑했다. 그녀는 풀잎관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풀잎관을 만들어 그의 머리에 씌어주었다. 풀잎관은 ‘흔한 풀잎으로 만든 소박한 관이지만, 말 그대로 개인의 용맹함과 결단력으로 군단이나 군대 전체를 구한 사람에게 주는 것(2권, 105쪽)’이다. 수많은 훈장을 받은 가이우스 마리우스 역시 풀잎관은 받지 못했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 제2부의 제목은 『풀잎관』이다. 아마도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시대가 끝나고 슐라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언니 율리아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이상적인 배우자였지만 율릴라는 슐라에게 이상적인 배우자가 아니었다. 너무 뜨거운 사랑은 자신이 먼저 데인다. 율릴라처럼.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7번이나 로마의 집정관이 된다는 예언을 들었고 『로마의 일인자』에선 6번 집정관이 된 것까지 나온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이뤘다. 예언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당신은 뭔가 될 거라는 누군가의 말이 그 사람을 그 자리에 올려놓은 것을 보며 말의 위대함을 생각한다. 물론 그 반대는...... 생각조차 두렵다.

 

결혼에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율리아, 율릴라와 달리 리비아는 오빠 드루시스의 강압으로 죽은 아버지가 남편감으로 원했던 퀸투스 세르빌리우스와 결혼했다. 드루시스는 리비아의 행복이 자신의 기쁨이라고 했지만, 물론 사실이었겠지만 그에게 동생보다 가문의 명예와 지위가 중요했다. 가문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남매가 엇갈려 결혼하는 걸 보며 무언가를 지키려면 다른 것은 포기해야 한다는 말을 떠올린다.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상황에 부닥쳤을 때 그 상황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삶을 고립시켜선 안 된다. 어떤 경우 자유를 갖는 일은 생각만큼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리비아는 남편 퀸투스에게 돈이 없어 절대 집 밖으로 못 나간다고 하자, 그는 돈을 줄 테니 언제든 나가고 싶을 때 나가고 사고 싶을 때 사라고 했다. 아버지의 권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오빠의 권위 아래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살았던 리비아는 지배받는 삶에 익숙해지면 ‘시도’라는 단어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삶을 지배했던 건 그녀의 가족이 아닌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리비아가 더 빨리 남편에게 말했더라면, 아니 더 늦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리비아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한 결혼이었지만 오빠의 선택은 옳았다. 그녀는 4년 동안 그리워했던 남자의 진실, 천한 혈통에 노예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원망했다. 바깥세상을 몰랐던 그녀는 책을 통해 판타지 속 남자를 만들고 이상형이라 착각했다. 우리는 일정 부분 순수하고 일정 부분 속물이다. 그녀처럼. 나의 의지든 타인의 강압이든 제대로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것, 틀에 갇혀 제멋대로 상상하는 일은 위험하다.

 

로마의 일인자는 분명 가이우스 마리우스다. 천한 출신이었으나 그는 6번의 집정관 자리에 올랐다. 그중 세 번은 로마에 없는 상황에서 부재중 선거로 뽑힌 것이다. 그에겐 운명과 돈, 야망이 있었다. 그리고 전쟁 내내 함께 하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게르만족인 척하며 위험을 감수한 술라를 비롯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목숨을 잃을 것을 알면서도 명령 때문에 전쟁에 나갈 수밖에 없는 하층민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로마의 일인자가 된 진짜 이유가 아닐까.

 

자신이 살아왔던 우아한 삶과는 다른 삶을 선택한, 수부라 지구의 거친 인간들을 상대하며 사는 아우렐리아를 보며 처음엔 좀 멋있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그녀의 시아버지는 로마에서 막강한 정치력을 가진 가이우스 율리우스였으니까. 예전에 힘을 갖는 일이 중요한지 몰랐다. 거대한 힘 앞에 쓰러지는 사람들을 봤지만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갈수록 느낀다. 힘과 싸우려면 더 큰 힘을 가져야 한다고.

 

“노력만큼 가치 있는 일은 원래 없어요! 그런 경우는 절대 없죠! 우리 중 누구도 상 때문에 노력하지는 않아요. 우리가 마구를 차고 경기장 일곱 바퀴를 돌려고 나설 때 경쟁 상대는 우리 자신입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 같은 사람에게 달리 어떤 도전자가 있겠습니까? 그는 경기장에서 가장 뛰어난 말인데요. 그래서 그는 자신과 싸우며 달리는 겁니다. 나 역시 마찬가집니다. 나는 할 수 있고, 해내고 말 거라는 생각으로 달리지요! 하지만 그것은 오직 나에게만 진정으로 의미가 있어요.” - (『로마의 일인자3』, 451쪽)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이 말을 들었다면 좋아했을 것이다. 술라에게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로마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술라를 만난 것에 대해 행운이라고 생각했는데 술라가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만난 것 역시 행운이었다. 물론 이들이 영원한 동반자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건 역사에서, 그리고 현재의 정치판에서 많이 봐오지 않았던가.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로마의 민중들은 전쟁과 기근으로 인한 식량 부족으로 죽음을 맞지만, 권력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늘리고 자리를 지키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들에게 민중은 자신들의 재산을 늘려주고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대상일 뿐이다. 우리의 현실 역시 이들과 다르지 않다.

 

한 계절이 끝나가고 있다. 추위가 풀리니 마음도 느슨해진다. 마음이 편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제 TV프로 <꽃보다 청춘-아프리카>엔 혼자 차를 렌트해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외국인 여자가 나왔다. 출연자인 류준열이 그녀를 보고 멋지다고 하자 그녀는 'yolo : You only live once)라고 적어 주었다. 숱한 삶의 배반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술라의 말처럼 오직 자신을 믿고 달리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 끝에 뭐가 있든 간에. 인생은 한 번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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